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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 성세기해수욕장과 카페천국 월정리해변.....
동복리 4.3사건 희생자 위령탑을 지나 구좌읍의 월정리를 향합니다.
몇 군데 답사하는 사이 현지 중개업소서 연락이 옵니다.
2차선 도로와 접하여 상가 건축이 가능한 토지라고 하기에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금은 제주도 일주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였지만
아래 보이는 도로는 예전의 일주도로 입니다.
4차선 도로가 신도로라면 이곳은 2차선의 구도로인 셈이지요.
새로 개설된 일주도로는 해안의 마을을 통과하지 않고
마을 뒤쪽으로 우회하기에 제주도 지역을 운행하는 버스 같은 대중교통은
마을 대부분을 연결하고 있는 2차선의 구도로를 노선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동선이 구도로를 따라 이동하다 보니
상가와 같은 건물도 아직은 구도로를 중심으로 형성이 될 수 밖에 없고요.
도로 오른쪽으로 보이는 답 이고요.
당근을 심어 놓았네요.
땅의 모양이 반듯하고 길게 도로와 접했으며,
바다가 보여서 좋기는 했지만 금액이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도로보다 낮은 것이 흠이기도 했지만 제주도는
대부분의 전답이 도로보다 낮게 위치하며
마을을 형성하는 대지상의 주택들도 골목길보다 낮은것이 보통입니다.
제주도는 왠만큼 비가 내려도 배수가 잘 되는 토양이며, 태풍같은 집주호우를 대비한
집수정(集水井)이 잘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물론 바람의 영향이 크지요.
바람이 워낙 거세다 보니 도로보다 낮은 위치에 집을 짖고
천정과 지붕도 낮게 건축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제주도의 농가주택이라고 하는 옛날 집들에는
가구점에서 파는 일반적인 크기의 가구(농)를 들여 놓을 수 없답니다.
곡식을 심는 논과 밭이, 그리고 주택의 지붕이
주변의 도로나 담장보다 낮을수록 바람의 피해로부터는 안전했을터이니.....
섬으로 이루어진 제주도에도 여러 개의 해수욕장이 있습니다.
비양도와 은모래가 그려내는 수채화 같은 협재, 금능해수욕장,
제주공항과 가까운 이호테우해수욕장, 해변의 풍력발전기와 잘 어우러지는 김녕해수욕장,
서우봉의 오름과 숙박시설이 잘 발달한 함덕해수욕장,
용천수 풀장이 있는 화순 금모래해수욕장과 노천탕이 함께 있는 곽지해수욕장,
서핑으로 유명한 중문 색달해수욕장, 원형경기장처럼 넓은 표선해수욕장,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신양 섭지해수욕장, 검은 모래로 유명한 삼양해수욕장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섬 속의 섬이라고 부르는 우도에도 세 곳의 해수욕장이 있고요.
제주시를 중심으로 북동쪽 해안에는
삼양, 함덕, 김녕, 월정리, 평대, 세화, 하도해변에 해수욕장이 있습니다.
제주시 구좌읍의 김녕해수욕장입니다.
김녕 성세기해변이라고도 부르지요.
길이 200m, 너비 120m 정도의 해변은 부드러운 모래의 백사장과
맑은 바닷물, 주변 풍력 발전기의 모습들이 다른 해수욕장들과 구분된 풍경을 보여줍니다.
제주도의 북쪽 해변에는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 까지
왜구의 침입이 잦아서 이에 대비한 환해장성이나 방호소를 설치하였습니다.
1416년(조선 태종16년),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이곳 김녕에 방호소를 설치고 방호별감을 임명하였다고 합니다.
성세기는 김녕 방호소 성 밖에 있는 작은 성이라는 뜻의
“성새끼”라는 음이 변화하여 성세기라는 지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세기 해변에서 동쪽 월정리 해변으로 이어지는 8.4km의 해안도로는
풍력발전기와 코발트 빛 바다가 어울리며 이국적인 모습을 연출합니다.
피서철이 지나면 제주도의 백사장은 저렇게 비닐 천을 씌워
강한 바람에 해수욕장의 모래가 유실되지 않도록 보호한답니다.
성세기 해변의 “도대불”입니다.
도대불은 선창으로 배를 안전하게 유도하기 위하여
검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시설로 지금의 등대와 같은 기능을 하였습니다.
어두운 밤에 조업을 하는 배를 유도해야 했기에
선창의 방파제 끝이나 지형이 높은 곳에 설치하였지요.
1915년에 만들어져 태풍으로 허물어진 것을 1961년에 마을 사람들의 요청으로
당시 군청의 지원을 받아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은 것이랍니다.
도대불은 따로 관리자를 두지 않았으며, 출항하는 어부가 석유 호롱불을 켜 놓고 나가면
조업을 마치고 맨 마지막에 항구에 들어오는 어부가 껐다고 합니다.
등대의 상단 가운데 호롱불을 놓기 위한 대가 박혀 있고,
등불 보호대가 설치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1972년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사용이 중단되었습니다.
김녕의 도대불은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성세기 해변이 있는 김녕은 제주시 구좌읍에서 가장 큰 마을입니다.
하늘에서 바라본 모습이 한문 평(平) 자를 이룬 모양이어서 “김녕”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넉넉하고 편안한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김녕 주변으로는 제주 바람을 이용한 풍력발전기들 곳곳에 들어서 있고
어종이 풍부하여 갯바위 낚시터의 명소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용천동굴, 당처물동굴, 만장굴 같은 자연동굴과 해안가의 특이 지형으로 지질 트레일이 조성 되어
풍부한 주변 관광지를 자랑합니다.
김녕마을은 구좌지역의 마을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어서
그만큼 곳곳에 유서 깊은 이야기가 담긴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오래된 퐁낭 아래 자리 잡은 궤내기당과 궤내기동굴은
돼지를 잡아서 신에게 바치는 “돗제”가 행해졌던 곳입니다.
옛날 궤내기굴에는 몸통이 다섯 섬 들이의 항아리만큼이나 큰 멧돼지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 멧돼지는 매년 봄과 가을에 공양을 바치지 않으면 농사를 망치게 하여 주민들이 늘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를 본 제주의 여신 ‘백주또’와 한라산의 신 ‘소천국’ 사이에서 난 여섯 번째 아들 '궤내깃또'는
멧돼지들을 잡고 마을을 구하기로 마음먹고 무쇠투구와 갑옷 그리고 칼과 창을 차고
궤내기굴로 가서 큰소리로 호통하며 멧돼지들과 싸움을 벌입니다.
처음에는 머리가 둘 달린 멧돼지를 베고, 두 번째는 머리가 셋 달린 멧돼지를
세 번째는 머리가 넷 달린 멧돼지를 죽이니 멧돼지들은 싸울 의지를 잃고 항복하였고,
궤내깃또는 멧돼지들에게 명령을 합니다.
“앞으로 절대 주민들을 괴롭히지 말고 항상 그들의 옆에서 도와주도록 하라.”
그리하여 주민들은 집집마다 ‘통시’를 만들어 야생 멧돼지를 집안에 키울 수 있게 되었고,
주민들의 생활 속에 흑돼지가 밀접하게 자리 잡게 되었답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고마움의 표현으로
궤내깃또에게 매년 돼지를 잡아 바치며 안녕을 기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돗제가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즐기는 축제가 되었고,
돗제가 끝나면 돼지고기로 죽을 쑤어 굿을 보러 온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풍습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성세기 해변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면
제주시 구좌읍의 월정리(月汀里)와 마주하게 됩니다.
월정(月汀)은 마을의 모양이 반달 같고 바닷가에 접해 있다는 의미라고 하며,
다른 표현으로는 “달이 머무는 바닷가”라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가진 마을입니다.
약 400여 년 전 김해 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알려지며,
옛 문헌에는 '무주포'로 표기되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부터 월정리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천연기념물 제384호인 당처물동굴이 있습니다.
점심은 저기 보이는 월정리 해녀식당에서....
20호 7082 회색 소나타는 47시간 동안 렌트한 제주도의 애마입니다.
누적 운행거리가 약 8만km정도 인데요
지난번 차량보다 상태가 아주 좋습니다.
운행중에 잡소리도 없고, 밟으면 시원하게 잘 나가네요....ㅋㅋ
이틀을 꼬박 사용하고 47,000원이면 착한 가격입니다.
"준치" 입니다.
즉석에서 구워주며, 한마리 7,000원이라고.....
여기선 준치라고 부르는데, 육지에서도 맥주 안주로 인기있는 한치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럼 월정리 해변의 멋진 모습을 함께 감상해 볼까요?
따라 오세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월정리의 풍광이 여행객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점점 유명해질수록 월정리 해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났고,
그에 맞춰서 다양한 식당과 카페, 숙박시설 등이 많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몇몇 카페는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쉬어갈 수 있도록
바닷가에 의자를 놓아두었는데, 이 의자에 앉아 찍은 사진이 유명해 지면서
인증 샷의 명소가 되기도 하였답니다.
조천읍의 서우봉 해변 함덕해수욕장이
주변으로 숙박시설이 잘 발달한 해수욕장이라면, 이곳 구좌읍의 월정리 해변은
다양한 모습의 카페들로 가득하게 밀집해 있는 해수욕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변으로 산재한 풍력발전 시설과 남국의 느낌으로 가득한 바다 색깔,
초승달 모양의 고운 백사장과 해변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예쁜 카페의 모습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자연스럽게 젊은 연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제주도는 월세형태의 임대문화가 정착된 육지와는 다르게 년세가 주를 이룹니다.
주택이나 상가를 임차하면서 1년 단위로 차임을 결정하고, 지불하는 방식이지요.
요즘 제주도에는 육지의 건축업자들이 들어가 신축주택을 많이 건설했습니다.
내륙과는 고립된 섬이어서 제주도의 인구나 육지 사람들의 투자수요가 한정 될 수 밖에 없어서
최근엔 거품이 좀 빠졌지만 은평구에서도 꽤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 신축현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지 공인중개사의 설명에 따르면, 투 룸 형태의 작은 다세대 주택을
투자 형태로 매입해서 세컨드 하우스(Second House)로 사용하기도 하고,
1-2개월 단위로 임대하여 소득을 올리기도 한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단기 임대차를 선호할까 궁금해서 물어 보았더니
대부분은 육지에서 들어오는 젊은층들이라고 합니다.
20-30대의 싱글이나 젊은 부부들이 길게 휴가를 내거나
하던 일을 잠시 접고 제주도에 내려와 1-2개월씩 휴가를 즐긴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요즘 젊은 사람들 생각하는 것이 우리 세대하고는 많아 달라요”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살지, 기성세대처럼
미래를 생각해서 집 사고 돈 모으려고 악착같이 살지 않아요.”
왜 그들이라고 치열한 삶을 살지 않겠어요?
다만 ,기성세대들이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많이 억눌렀다면,
젊은 세대들은 미래보다는 현재의 행복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삶은 선택하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사회풍조는 ‘욜로족’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켰습니다.
욜로족이라고 한 번 쯤은 들어들 보셨지요?
욜로(YOLO)는 ‘한 번 뿐인 인생(You Only Live Once)’ 의 첫 글자를 딴 이니셜입니다.
한 번 뿐인 인생에서 기회를 놓치지 말고 현재를 즐기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라는군요.
그러니까 욜로족은
한 번 뿐인 인생, 현재를 즐기며 살자는 태도나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인 것이지요.
욜로(YOLO)라는 말이 대중화된 것은 2010년대 들어서라고 합니다.
2011년 래퍼 드레이크(Drake)가 발표한 ‘The Motto’ 라는 노래의 가사에서
‘You Only Live Once’와 ‘YOLO’가 등장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노래가 빌보드 차트와 각종 음악프로그램에서 인기를 끌면서
‘욜로’ 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며,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현재를 중시하는 20-30 세대의 가치관이 욜로 문화로 나타났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저성장이 장기화하면서 미래를 준비하기보다
오늘에 집중하려는 가치의 형태가 20-30 세대를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오늘의 즐거움보다는 미래를 위한 투자에 고민했던 기성세대와는 다른 삶의 방식으로요.
즉, 아끼고 모아 부자가 되는 시대는 지났으며, 지금 가진 것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들겠다는 태도의 변화가 ‘욜로 라이프(YOLO Life)’에 반영되었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20-30 세대를 중심으로 경험과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가 발달하면서 욜로를 포함한 다양한 신조어들이 등장합니다.
‘욜로’의 기조에 맞게 현재를 즐기는 생활은 ‘욜로 라이프’라 하며,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욜로족’ 혹은 ‘투데이(Today)족’이라 부른답니다.
곧, 오늘에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의미이지요.
단순하고 간결한 생활을 통해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하는 생활 방식인
‘미니멀 라이프’ 역시 욜로와 관련이 있습니다.
적게 소유하는 삶을 통해 만들어지는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하고 싶은 일이나 여행, 취미 등에 집중하며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전편에서 이어지는 제주 4.3사건 입니다.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를 저지하고, 남북한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의 제주도당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며 무장봉기가 시작됩니다.
이들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중지,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게 됩니다.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미군정은 4월 5일에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각 도로부터 차출한 대규모의 군대와 경찰, 서북청년단 등 반공단체를 제주도에 증파하였으며,
제주도 도령을 공표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해 제주 해상교통을 차단하고 해안을 봉쇄합니다.
그럼에도 쉽게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의 출동 명령을 내렸으나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김익렬 중령은 경찰, 서북청년단과 제주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대가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 귀순 작전을 추진하며,
4월 말 무장대의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입니다.
하지만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은 결렬되었고, 제9연대장을 교체하게 됩니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 국회의원 선출을 목적으로 5.10 총선거를 치르게 됩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지방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제주도의 3개 선거구 가운데 2개 선거구가 투표인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가 되면서
제주도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총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제주도에는 강도 높은 진압작전이 전개됩니다.
5.10 선거의 결과로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다음달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하게 됩니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제주도의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 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 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하게 됩니다.
11월 17일 제주도에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 산간 지대의 마을이 초토화되기 시작합니다.
11월 중순부터 이듬 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토벌대는 중 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하게 됩니다.
중 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로 소개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을 당하게 됩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늘어났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으로 보내졌습니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작전으로 중 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에 탔으며,
전소되어 아예 사라져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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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겨울바다....
사진으로는시원합니다.
실제로는 춥겠지만....
바람만 아니면 이국적인 바다색깔과 함께 정말 최고인데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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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정말 장난이 아니더군요...![ㅋ](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5.gif)
![ㅋ](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5.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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