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사자암을 표현하는 여러 시선
겸재 정선은 만폭동을 그린 그림에서 사자암을 마치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 바위가 모든 사람의 눈에 사자처럼 보였던 것은 아니다. 조선 초기의 문인 남효온(1454~1492)은 금강산을 유람하고 쓴 글에서 사자암은 단지 투박한 돌일 뿐이라며 사자처럼 보인다는 당시의 통념을 부정했다.
민지의 「유점사기」에 이르기를 “호종단이 이 산에 들어와서 제압하고자 하니, 사자가 길목에 와서 막고 있으므로 호종단이 들어가지 못했다”라고 했다. 운산은 산마루의 한 돌을 가리키며 저것이 사자의 형상이라 하는데, 나는 자세히 보니 자못 사자와 같지 아니하고 바로 투박한 하나의 둥근 돌이다.1)
그러나 율곡 이이(1536~1584)는 ‘풍악산에서 본 것을 읊다’라는 삼천언시(三千言詩)에서 “사자와 꼭 닮은 바위 하나가 봉우리 꼭대기에 우뚝 서 있다”라고 했으며 조선 후기 문인 이만부(1664~1732)는 “사자봉 아래에는 석사자가 있는데 마치 목털이 사납게 곤두서 있는 성난 모습처럼 보였다. 이 사자석 북쪽이 곧 원통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2)라고 했다.
그림에서 사자암은 과연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실제로 사자암의 모습을 사자처럼 그린 화가는 겸재 정선과 민화<금강산도>를 그린 이름 없는 화가들뿐이다. 19세기 이후에 민간에서 유행한 민화 <금강산도>는 적게는 6폭, 많게는 12폭에 이르는 병풍 장식 그림으로 그 안에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을 포괄한 금강산 전체가 그려져 있다. 이들 그림은 일정한 모본에 따라 반복적으로 그려졌으며 필선이 일정하고 도식화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내금강의 만폭동 부근에 그려진 사자암의 얼굴과 내 팔담의 물줄기는 화가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었다. 마치 이 구역에서는 화가의 개성이 허락이라도 된 듯 때로는 꿈틀거리는 도깨비처럼, 때로는 귀여운 강아지처럼, 사자바위에는 자칭 사자를 주장하는 여러 화가의 개성이 표현 되었다.
사자암에 전해 오는 전설
사자암에는 외국인 첩자인 호종단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호종단은 10세기 중엽에 고려에 귀화해 벼슬살이를 한 사람인데 우리나라의 지기(地氣)를 약화시켜 장차 고려를 침공하려는 속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가는곳마다 볼 만한 비석이 있으면 글자를 긁어버리거나 부숴 버리고 이름난 종이나 경은 모두 녹여 쇠로 만들어 소리가 나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날 호종단이 금강산에 침입해 만폭동 입구에 들어섰다. 내팔담의 윗목을 지키고 있던 사자는 이를 알고 분개해 일어나 크게 포효했고, 호종단은 금강산을 지키는 신령스러운 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쏜살같이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 사자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단번에 앞산 바위 턱까지 올라갔다가 그만 뒷다리 하나를 걸치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중심을 잃게 되었다.
곤경에 처한 사자는 바로 아래 화룡담에 사는 화룡에게 돌을 하나 가져다가 발밑에 받쳐 달라고 청했다. 화룡이 이를 듣고 건너편 법기봉에서 돌을 하나 뽑아다 받쳐 주었다. 사자는 그 후 굳어져 돌이 되었다. 사자의 발밑에 받쳐진 돌의 크기와 생김새는 신기하게도 맞은편 법기봉의 돌을 뽑아낸 자리와 같다고 한다.3) 사자암은 금강산을 지키다가 돌이 된 충신이었던 것이다.
1) 남효온, 「유금강산기」, 『추강집』
2) 이만부, 「금강산기」, 『지행록』
3) 이곡, 「동유기」, 『가정집』 제5권
참고 문헌
이곡 외 지음, 정우영 엮음, 『선인들과 함께하는 금강산 기행』,도서출판 인화, 1998
이영수, 「민화금강산도에 관한 고찰」, 『미술사연구』, 제14호, 2000사회과학 력사연구소, 『금강산의 력사와 문화』, 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4
글, 사진. 이영수(청주국제공항 문화재감정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