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코스 소남머리 전망대에서 스마트폰 셀카로 찰칵~(2015. 8. 10)
나 로망은 '인연(因緣)'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을 '인연'으로 설명하는 불교의 연기설을 좋아한다는 말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이 없어진다."
그러한 인연 자체는 왜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 잘 모르겠고, 우연한 만남이 결국 필연이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
어린 아사코(朝子)와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아련한 추억을 바탕으로 솔직담백하게 써내려간 피천득 선생의 수필인 '인연'도 생각이 나면서.
이런 인연에 의한 만남이 좋은 만남으로 지속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하는 이른바 '악연'이 되는 수도 있다.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 어떤 결실을 초래할는 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를 것이다. 자신이 타고났다고 하는 이른바 '운명 혹은 사주팔자'와 후천적 '노력'이 합쳐져서 어떤 결실이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나는 살고 있다.
제주올레를 만난 지 어언 만 7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 나 로망은 모든 올레 코스를 다 걷고 또 걸었다. 그렇지만 완주증은 아직 신청하지 않았다. 그런 것에 그리 연연하거나 집착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당장 신청하면 탈 수 있는 '종이 쪼각'인데 무엇이 걱정인고 하면서. ^^
지난 7년여 동안 올레길을 걷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 어울리다가 헤어졌고 아직도 만남을 지속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인연 따라 만나고 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헤어진 사람들과는 시절인연이 닿으면 언제 어디서 또 만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네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다 보면 언젠가는 모두들 이 세상을 떠나 대자연과 우주 속으로 영원히 돌아가게 될 것이다. 다들 사는 날까지 의미있고 보람차게,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비록 내 맘 먹은 대로 살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올 여름 휴가 때도 예년처럼 제주도에서 열흘 정도 놀다 돌아왔다. 올레길도 쬐끔 걷고 올레길 인연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과 또 다시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수다도 떨면서 놀다가 돌아온 것이다.
서귀포 법환에 있는 가름 게스트하우스(http://www.galeum.com)잔디밭에 작년 재작년처럼 베이스캠프 텐트를 쳐놓고, 한편 서귀포 시내 꼬닥꼬닥 게스트하우스(http://cafe.daum.net/kodakkodak)를 오가면서 양쪽에서 주로 자고 놀았다.
▲ 가름게스트하우스 잔디밭에 쳐놓은 베이스캠프 텐드
그러면서 추자도 올레지기인 김정일님이 있는 추자도도 다녀왔고, 6코스와 8코스 및 18코스의 각각 일부를 뙤약볕에 걷기도 했고, 지인들이 새로 개업한 숙소에서 자면서 지내기도 했고.
이번 글은 그 중에서 올레 6코스 일부 구간을 걸으면서 느낀 소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내가 이번 여름 제주에서 지낸 기간은 8월 3일부터 12일까지 9박 10일인데, 6코스 일부 구간을 걸은 날은 8월 10일이었다. 하나의 코스를 모두 다 걷기에는 너무 무더운 날이 지속되었고, 또 이 구간은 과거에도 여러 번 걸었기 때문에 모두 걸을 필요는 없었다.
제주도에서 지내는 열흘 동안의 날씨는 거의 맑은 날이었고, 계속해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날도 계속해서 불볕 더위를 뿜어내고 있었다.
6코스를 걷기 전날인 일요일(8월 9일) 밤에는 방학올레행사에도 함께 참여했던, 이런 저런 사연을 지니고 살다가 지금 제주도에 정착하면서 살고 있는두발로님과 함께 지냈다. 두발로님과 함께 텐트를 쳐놓은 가름게스트하우스 잔디밭에서 고기도 구워먹고 술도 마시면서, 삶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지내다가 텐트에서 같이 잤다.
▲ 두발로님과 함께 이렇게 먹고 마셨다. ^^
아침 일찍 두발로님을 보낸 후 텐트에서 빈둥거리다가 오전 중에 텐트를 걷어야만 했다. 6코스 일부를 오후에 걸은 후 그날 밤에는 제주올레 탐사대원인 혁준님네 부부가 새로 개업한 펜션인 '소보록요보록' 에서 자기로 했고,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인 11일에는 꼬닥에서 자기로 했기 때문에 이날 텐트를 걷은 것이다. 내년 여름을 기약하면서.
오후 2시 넘어서 내 승용차를 몰고 혁준님네 펜션으로 갔다. 제주올레 탐사대원인 혁준님은 늘 그러하듯이 올레코스를 점검하러 가셨고 사모님만이 계셨다. 수박과 음료수를 얻어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펜션을 나섰다. 이따 저녁 7시 경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혁준님네 펜션은 서귀포 칼호텔 근처에 자리잡고 있다. 서귀포 시내 중앙로터리 1호 광장과는 약간 떨어져 있어서 -떨어져 있어 봤자 승용차로 10분 정도 거리지만- 시골스런 분위기가 풍기는 조용한 곳이다.
▲ 주소 : 서귀포시 검은여로 81-7 (토평동 781-12)
▲ 혁준님네 펜션인 '소보록요보록' http://soborok.com(여기 홈페이지를 클릭하면 자세히 살펴볼 수 있고, 홈페이지나 쿠팡, TMON(티켓몬스터) 혹은 팡숑을 통해 예약을 해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알뜰살뜰'을 뜻하는 제주말인 '소보록요보록'은 (원래는 '요보록소보록' 인데 순서를 살짝 바꾸어서) 서명숙 이사장님이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한다. 줄여서 '소요(逍遙, 노닐다, 거닐다의 뜻)'라고 할 수 있어서 순서를 바꾼 것 같은데, 장자책에도 나오는 '소요'는 제주올레의 정신인 '놀멍 쉬멍 걸으멍'과도 딱 어울리는 면이 있는 잘 지은 이름이라고 나 로망도 맞장구를 쳤다. ^^]
앞으로 제주도로 놀러가는 지인이나 직장동료들에게 소개해 주더라도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아담하고 깨끗한 펜션이다. 직장 동료들이나 지인들과 함께 제주도로 놀러 가면 이곳 펜션에서 놀면서 지낼 생각을 하면서 펜션을 나섰다.
이날 오후에 걷기로 맘먹은 6코스 구간은 서귀포 칼호텔부터 시작하여 옛 올레길 구간이었던 서귀포초등학교를 지나 이중섭기념관과 서귀포 매일올레시장을 거쳐 종착지인, 미선님이 계신 외돌개 솔빛바다까지 걷는 것으로 정했다.
그런데 날씨도 덥고 놀멍 쉬멍 하다보니까 외돌개 종착지까지 걷지를 못하고 경남관광호텔 부근에서 마쳤다. 종착지인 외돌개 솔빛바다까지 반드시 가야할 이유도 없고 혁준님네 펜션으로 되돌아갈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혁준님네 펜션에서 서귀포 칼호텔 후문이 있는 6코스 검은여로 들어가는 큰 길까지는 300미터 5분 정도 걸린다. 보목포구와 중앙로터리로 가는 2번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는 이곳에서부터, 일단 '그 여자 순심이님'이 근무하고 있는 6코스 안내센터를 목표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7년 반 전인 2008년 2월 28일 직장동료인, 지금은 모두 퇴직한 서형과 김공 2명과 함께 처음 올레길을 걸었던 때를 생각하면서. 그때는 지금처럼 이른바 올레폐인이 될 줄은 생각치도 못했었고. ^^
▲ 서귀포 중앙로터리와 보목포구를 다니는 2번 버스가 서는 서귀포 칼호텔 후문 거문여 입구 버스정류장. 칼호텔 담을 끼고 6코스 거문여 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올레꾼들의 모습이 보인다.
▲ 동백꽃이 피어 있는 서귀포 칼호텔 담장을 끼고 걸어가고 있는 직장동료 (2008. 2. 28)
서귀포 칼호텔을 지나 소정방폭포 쪽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조금 이상했다. 화살표가 소정방폭포 쪽으로 되어 있지 않고 직진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었다.
어렵쇼 무슨 일이 생겼나 하면서 혁준님에게 전화를 걸어서 확인했다. 소정방폭포 난간 공사 때문에 며칠 동안 입구에서 통제를 하고 있어서 우회길을 내서 직접 정방폭포 쪽으로 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정방폭포를 거쳐 6코스 안내소로 걸어갈 수는 있냐고 하니까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답해서 그냥 소정방폭포 쪽으로 걸어갔다. 도저히 걸어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면 다시 되돌아 나올 각오를 하고서.
올레꾼들은 유사시에 대비하여 제주올레 콜센터 번호(064-762-2190)를 미리 확인하고 휴대폰에다 저장을 해두면, 올레길을 걸을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또 올레길을 걷기 전에 혹은 걸으면서 스마트폰으로 제주올레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공지사항 등을 살펴보면 손쉽게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정방향 화살표(파란색)가 소정방폭포 쪽이 아니라 정방폭포 방향으로 되어 있어서 올레꾼들이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이틀 뒤(8월 12일)에 통제가 해제되어 원래대로 해 놓았을 것이다.
어느 코스든 올레길을 걷다가 길이 이상하다 싶더라도 나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다. 든든한 '빽'이 있기 때문이다. 제주올레 탐사팀인 수호님이나 혁준님에게 전화를 해서 확인을 하면 100% 해결이 되니까 '하쿠나 마타타' 요 'No Problem!'이다. ^^
소정방폭포 입구에는 출입금지의 팻말이 붙어 있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 난간 공사하는 분들이 막아섰지만, 6코스 안내소로 가려고 한다니까 조심해서 올라가라고 했다.
▲ 난간 공사 중인 소정방폭포 입구 양쪽에 출입금지 표시가 있지만, 나처럼 출입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 ^^ 만약의 사고 발생시 모든 책임은 당사자에게 있음은 물론이다.
순심님을 만나 차도 한잔 얻어마시면서 얘기도 나누고, 컴퓨터도 잘 작동하고 있나 살펴보고, 다른 분들에게 선물로 줄 간세인형도 사려고 안내소로 들어가려고 했더니 문이 닫혀 있었다.
공사 때문에 임시로 문을 닫았나 해서 순심님에게 전화를 했더니, 월요일과 수요일은 6코스 안내소가 쉬는 날이라고 해서 내일 시간을 내서 들리마 하고 정방폭포 쪽으로 걸어갔다.
▲ 다음 날 안내소에서 함께 찍은 사진속에서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순심님. ^^ 뒤에서 부러운듯이(?) 쳐다보고 있는 분은 순심님 친구분이자 효돈올레민박 주인장이신 권 여사님
30도가 넘는 습한 날씨가 몸을 삶는 것 같았고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이 흘러 내렸다. 나는 몸에 열이 많이 나는 체질이기 때문에 습한 여름보다는 추운 겨울을 차라리 잘 견딘다. 에어콘이 나오거나 용천수가 펑펑 솟아나는 시원한 곳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만일 소정방폭포에서 공사가 없었다면 아래 사진처럼 시원하게 폭포수를 맞으면서 일단 땀을 식히고 갔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그렇지를 못하고 계속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름철 이곳을 지나는 올레꾼들은 잠시 시간을 내서 이렇게 폭포수를 맞고 가면, 평생 잊혀지지 않는 추억거리를 갖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올레길은 걸으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젖은 옷은 어디서 갈아 입느냐고 물으신다면, 그 위에 있는 6코스 안내소 화장실 등에서 갈아입으면 된다고 말하겠어요. 아니면 안내소의 순심님에게 여쭈어 보던가. ^^
▲ 소정방폭포에서 시원하게 물을 맞고 있는 나 로망 (2013. 8. 11)
6코스 안내소를 그냥 지나친 후 부지런히 걸어서 시원한 곳을 찾았다. 정방폭포 안내소가 눈에 띄었다. '저기로구나' 하고 안내소로 들어가 인사를 드린 후 잠시 시원하게 쉬고 가겠다고 했다. 당연히 그러라고 했다.
그때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이 안내소에 들어와서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나는 그분에게 어디서 오셨냐고 하니까 레비논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한국말을 참 잘 하신다고 하면서, 올 겨울에 레바논에서 오신 분들과 함께 올레길을 걸은 적이 있다고 하면서 레바논에 대해 아는 척을 했다. ^^
▲ 올해 1월 겨울방학 올레걷기를 할 때, 6코스 일부를 함께 걸은 레바논에서 온 손님들인 두 분을 서명숙 이사장님이 "이분이 '밀바'시고 저분이 '살람'이랍니다." 라고 하면서 방학올레팀에게 소개하고 있는 모습 (2015. 1. 13)
안내를 받은 후에 가시는 레바논분들에게 즐거운 여행을 하시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 잠시 후에 나도 안내소에 근무하는 분들에게 잘 쉬고 간다고 하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정방폭포와 서복전시관은 그냥 지나쳤다. 지난 날 몇 번씩 들어가 보았기 때문이다. 6코스 갈림길이 나왔다. 계속 직진하면 서귀포 칠십리 음식특화 거리와 자구리 해안을 지나 서귀포항으로, 길을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소암미술관을 거쳐 이중섭거리로 가는 길이다.
▲ 서귀포항으로 가는 길(맨위)과 추억의 옛 올레길인 서귀포초등학교로 가는 길(중간)과 소암미술관을 거쳐 이중섭 거리로 가는 길(아래 사진 길건너 왼쪽)
나는 나중에 새로 낸 두 길 대신에 '추억의 옛 올레길'을 찾아가기로 했다. 두 길 사이에 있는, 처음 6코스가 만들어졌을 때의 길인 서귀포초등학교로 가는 길이다. 서명숙 이사장님의 어린 시절 6년이 오롯이 담겨져 있는 그 학교길을.
서명숙 이사장님이 쓰신 첫 번째 올레책인 '놀멍 쉬멍 걸으멍 - 제주올레걷기'에 나오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오의삼 4학년 담임선생님(현 제주올레 아카데미 교장선생님)과 함께 했던 시절의 아련한 추억(358~362쪽)을 되살려 올레길로 재탄생시킨, 그 학교길로 가기로 했던 것이다.
서귀포초등학교로 가려면 일단 갈림길에서 직진하여 소남머리를 약간 지나, 위 가운데칸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길을 건너 영빈횟집 골목길로 가면 된다.
▲ 주황색으로 되어 있는 코스가 A B 코스로 나뉘어지기 전의 '추억의 옛 올레길'이다.
소남머리는 서예가인 소암 현중화 선생이 예술적 영감을 떠올리기 위해 자주 찾았던 곳이라고 한다. 이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소암미술관이 여기 갈림길 조금 지나 있는데, 올레길에 편입되기 전에 여기를 들어가 관람하기도 했다.
▲ 소남머리 전망대에서. 정방폭포를 보려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관광객과 오른쪽 멀리 섶섬이 보인다.(아래칸)
소남머리를 내려서서 왼쪽 계단으로 내려가면 용천수가 펑펑 나오는, 남녀용으로 구분되어 있는 노천탕이 나온다. 작년에도 와본 적이 있는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찬물에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면서 더위를 식혔다.
내년에 또 놀러와서 꼬닥꼬닥 게스트하우스에 머물 때는, 승용차를 몰고 아침마다 이곳으로 와서 시원하게 씻으면서 보내야 하겠다고 다짐하고 서귀포초등학교로 떠났다.
▲ 소남머리 아래에 있는 용천수가 펑펑 나오는 노천탕
▲ 노천탕에서 바라본, 서명숙 이사장님이 어렸을 때 친구들과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물놀이를 했다고 하는 자구리해안
방학 중인 서귀포초등학교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어린이들은 여름방학 동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들이 자랄 때처럼 방학식 때 나누어준 얇은 여름방학책 하나만 달랑 풀고 나서 신나게 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즘 어린이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그놈의 입시공부를 미리 앞당겨서 하느라고 고생이 많을 것이다. 시대를 아니 나라를 잘못 타고 태어나서 그런 것은 아닌지. 옛날처럼 밥을 굶는 일은 거의 없겠지만 그놈의 시험공부 때문에 마음 고생 몸 고생을 많이 하고 있을 것이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 어린이들 못지 않게.
▲ 서귀포초등학교 정문과 옆문 그리고 본관 건물과 운동장. 하르방 아래에 누군가가 어색하게 그려넣은 화살표가 남아 있다.
학교 건물에 내걸린 구호가 눈에 띠었다.
"미래를 여는 교육. 꿈을 키우는 학교"
서명숙 이사장님이나 내가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를 다닌 1960년대에도 이런 구호가 있었을까? 그때 내걸린 구호는 '반공방첩' '자나깨냐 불조심' '때려잡자 공산당' 혹은 '착하고 슬기로운 어린이가 되자' 이런 구호가 아니었을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명숙 이사장님은 위에서 언급한 4학년 때 오의삼 담임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평생 글을 쓰면서 살아가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굳히게 되었다고 올레책에서 말하고 있다.
지금은 '길 + 글'과 함께 살고 있는 서 이사장님 인생 후반기 삶은, "미래를 여는 교육. 꿈을 키우는 학교"라는 구호에 걸맞는 교육을 몸소 실천한 오의삼 선생님과 같은 분을 만난 '행운(인복)'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60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오다 보니까, 인생이 잘 풀리려면 무엇보다도 '사람'을 잘 만나는 '인복'과 같은 '행운'의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는 옛 성현의 말씀이 옳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노력'도 당연히 해야 하겠지만, 노력은 그 다음인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내가 종종 언급하는 '운7 기3'이라는 인생의 논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큰 틀에서 내 인생을 바라볼 때, 내가 요정도의 삶을 살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천사표' 어머니를 잘 만난 '행운'이 작용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와의 만남은 나의 노력이나 선택과는 전혀(100%) 상관없이 태어나면서 그냥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직장을 설립한 분을 만난 것이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밥벌어 먹고 살 수 있도록 나를 최종적으로 임용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정치적) 문제'를 일으켰을 때도 쫓아내지 않고 나의 평생 '밥줄'을 보장해 준 분이기 때문이다.
나 로망의 인생 후반기 신나는 '놀이터'로 여기고 있는 제주올레를 만든 서 이사장님과 같은 분도 잘 만난 분 중에 한분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
서 이사장님은 6코스를 A와 B코스로 나눌 때 당신의 모교인 서귀포초등학교를 계속 올레 (B)코스에 포함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암(현중화) 미술관을 올레코스에 반드시 넣어달라는 요청을 뿌리칠 수가 없어서 당신의 모교를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무언가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과거의 옛 길인 옆문으로 들어가) 학교를 나왔다. 학교 정문을 나서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찾아 아니 '희미한 옛 올레길의 화살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담을 끼고 시계 방향으로 따라 올라갔다. 계속 걸어가면 이중섭 미술관과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나오고 서귀포 매일올레 시장으로 이어진다.
▲ '희미한 옛 올레길의 화살표'를 따라 가면 이중섭 미술관으로 이어진다.
화가 이중섭을 생각할 때마다 '이 사람은 매우 불운한 삶을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가난에 쪼들린 그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위작을 팔려는 사기를 저지르다 잡힌 적도 있으니 대를 이어서 불운한 삶이 전개된 것이다. 나중에 건립한 이중섭 동상과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그의 '불운한' 삶에 대해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 이중섭 동상과 함께
지금 서귀포시에는 유명한 화가와 서예가 세 분의 업적을 기리는 미술관인 이중섭 미술관, 이왈종 미술관, 소암(현중화) 미술관과 변시지 화가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는 기당미술관이 있다. 모두 6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이중섭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명예와 어느 정도의 부와 지위를 누린(누리고 있는) 분들인데 반하여, 이중섭은 그야말로 가난과 병에 시달리면서 처자식과 이별한 상태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고, 사후에 그의 작품이 인정받은 불운한 삶을 살다간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흔히 '지지리 복도 없는 삶을 살다갔다' 고 말하기도 한다.
이중섭 못지 않게 지금 강원도 양구에 잠들어 있는, 그를 기념하는 그의 이름을 딴 커다란 미술관이 그의 묘소 앞에 사후에 건립된, 지금 우리나라 화가 중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되는 그림을 그린 박수근 화가도 그런 불우한 삶을 살다 간 화가 중에 한 사람이다. 그나마 이중섭과 박수근은 사후에 명예라는 '보상'을 받아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래 주소를 클릭하여 박수근 미술관을 관람하고 쓴 소감문을 읽어 보세요.
http://blog.daum.net/roman2040/8840317(우연히 박수근 미술관을 들리다.)]
이중섭 거리나 서귀포 매일올레 시장은 제주올레가 생기기 전에는 그야말로 '파리를 날리는' 신세였다. 내가 처음 올레길을 걸었던 2008년도만 하더라도 저녁 때가 되면 '삭막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몇 년 뒤 우연히 밤중에 거기를 갔다가 깜짝 놀랐다. '상전이 벽해'가 된 느낌이 확 들었다. 올레시장도 북적거리고 이중섭 거리도 불이 삐까번적 하면서 서울 홍대거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화려하게 변했던 것이다.
제주올레가 서귀포시 나아가 제주도 전역의 지역경제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것이요,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온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창조경제'가 아니고 무엇인가? 제주올레가 사회 경제적으로 기여한 최대의 성과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서명숙 이사장님도 제주올레를 처음 만들 당시에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성과를 낼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행운'이 작용한 것이요,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진 것이요, 서 이사장님이 말씀하시길(점쟁이가 과거에 예언하길) 인생 후반기 '30년 대운'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노력'이 뒷받침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이래서 인생은 살만한 면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름 열심히 '노력'을 했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행운이 오거나 업적이 이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 매일올레시장 내 올레코스 알림판과 북적거리는 올레시장
서귀포 매일올레 시장에 오면 반드시 들리는 곳이 있다. 바로 올레 안내소인 '서명숙 상회'이다. 서 이사장님의 어머니인 현영자 여사님이 '서명숙 상회'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품목과 종목 및 하시는 일은 과거의 '서명숙 상회'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시장통에서 정정하게 일을 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으신 것 같다.
서귀포에 놀러갈 때마다 시장 구경도 하고 물건도 사고, 서 이사장님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뵙고 올레기념품도 사고 사진도 찍어 드렸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2달 전에 처음 마련한 스마트폰으로 셀카봉을 이용하여 찍은 것이다. 마치 우리 어머니하고( 서 이사장님 어머니하고 우리 어머니하고는 한살 차이가 나는데, 서 이사장님 어머니가 한 살 더 많으시다고 한다.) 사진을 찍는 기분이 들었다. ^^
▲ 서 이사장님 어머니와 함께
늘 건강하게 잘 지내시라고, 다음에 또 들리겠다고 인사를 드린 후 올레리본과 화살표를 따라 계속해서 걸어갔다. 올레시장을 빠져나와 아랑조을거리를 거쳐 진주식당과 경남관광호텔까지 걸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 있는 새로 마련한 제주올레 본부가 들어설 빌딩도 살펴보았다.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리모델링을 거쳐 새로 단장하고 연다고 하는데 기대가 된다. 올레꾼들의 많은 도움과 기부가 있으시길 바란다. 로또 당첨 안 되나? ^^
▲ 제주올레 본부가 들어설 건물
오늘의 걷기 일정은 일단 끝났다. 혁준님네 펜션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약간 시간이 남아서 나의 '친정 숙소'에 해당하는 민중각 게스트하우스(http://cafe.daum.net/minjoonggak)에 들려 오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물도 얻어마시고 잠시 얘기를 나눈 후 헤어졌다.
마지막으로 근처에 있는 꼬닥꼬닥 게스트하우스로 가서 서동성 국장님을 뵙고 내일 다시 온다고 인사를 드린 후 택시를 타고 '소보록요보록' 펜션으로 갔다.
▲ 서 국장님에게 내일 온다고 인사를 드리고 혁준님네 펜션으로 떠났다.
혁준님 내외분이 마련해 주신 저녁도 푸짐하게 얻어먹고서, 새로 지은 깨끗한 펜션인 '소보록요보록'에서 아주 편안하게 잤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소보록요보록' 펜션을 많이 소개해 주시고 또 애용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
▲ 혁준님네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
▲ 소보록요보록 펜션 침실과 펜션에서 바라본 한라산과 섶섬 풍경
사모님이 차려주신 아침까지 잘 얻어먹은 후에 다음에 또 들리겠다고 작별인사를 드리고, 나는 이번 여름 휴가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꼬닥꼬닥 게스트하우스로 떠났다. 내 승용차를 몰고서.
2015. 8. 28
서울에서 로망올림
(노래 선물)
대만 가수인 고(故) 등려군(鄧麗君, 덩리쥔)과 그녀가 부활한 것 같은 중국 가수인, 소(小)등려군으로 불리는 진가(陳佳, 첸지아)가 부른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The Moon Represents My Heart)’을 서로 비교하여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목소리가 거의 똑같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IiFm7AWP9n4 (등려군 노래)
첫댓글 짝짝짝! 로망님 오랫만에 뵙네요. 저는 8월 3일날 나왔는데...
그 동안 농땡이 치다가 6개월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네요.
제 '엉덩이'를 본 몇 분(?) 안 되는 조류님도 잘 지내고 계시지요? ^^
@로망 하하하~~사실 엉덩이는 못봤구요 빤쮸만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