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나눔의 삶’은 진정한 참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엄두섭에 따르면, 그는 “체격이 크고 기골이 장대하며 힘이 장사여서” 일을 잘 했다고 합니다. 그는 머슴살이를 열심히 한 나머지 상당한 돈과 재산을 모았습니다. 돈을 남에게 빌려주고 비싼 이자를 챙겼습니다. 색갈이를 놓아 재산을 불렸습니다. 흉년이나 ‘보릿고개’가 닥치면, 빌려주었던 벼나 보리의 배 이상을 받아 챙기는 수법으로 재산을 불려갔습니다. 제때에 빚을 갚지 못하면 집문서나 땅문서를 빼앗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땅을 100마지기쯤 가진 지주가 되었습니다. 흉년에는 가난한 농사꾼의 땅 50두락을 헐값으로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를 믿게 된 다음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그가 착취하고 수탈한 것을 갚아주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시골 농민들이 돈을 빌리려고 맡겼던 집문서나 땅문서를 원주인을 찾아 모두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빚 문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버렸습니다. 이세종이 이 일을 결단한 것은, 그에겐 이미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다. 그러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고 모두 하느님의 것이다.”는 사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이란 따로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의 것’, ‘이웃의 것’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삭개오의 고백에 큰 감명을 받은 것 같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으며, 착취한 것은 4배로 갚겠습니다.”(루가 19, 9) 이세종에게 이런 소유의 철학과 진정한 참회가 있었기에, 그의 나눔살이가 가능했을 터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세종은 분명히 ‘예수의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아니 ‘참 사람’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엄두섭 목사는 이세종의 ‘나눔살이’를 보고서 그때 사람들의 말을 빌려 ‘기인’(奇人)이라고 했는데, 엄밀한 뜻에서 이세종은 ‘기인’이라기보다 ‘예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 한 가지만 보아도 이세종은 예수의 삶과 생각을 그대로 본받아 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예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