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시의 강물,
백호 임제(林悌,1546-1579)↘
호: 백호(白湖),겸재(謙齋).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1. 서 문
본관 나주. 대곡(大谷) 성운(成運)의 문인. 1576년(선조 9)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에 급제, 157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다. 예조정랑(禮曹正郞)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내다가 동서(東西)의 당파싸움을 개탄,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보냈다. 당대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시풍(詩風)이 호방하고 명쾌했다.
선구적 사상이나 독창적인 개혁의지는 언제나 소외 당하게 마련인가, 조선 선비 모두 주자학이라는 강고한 사슬에 묶여있을 때 '이래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말했건만 400년이 지난 2000년대까지도 그 말이 되풀이 되어야 하는가.
당시대엔 기인이었던 외로운 선구자 임백호의 탯자리는 나주 회진, 조선 명종 4년(1546년) 12월 20일 병마절도사 林晋과 모친 남원윤씨의 5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백호라는 호 외에도 겸재,풍강,소치라 했다. 백호라는 호는 외가인 곡성 옥과 섬진강 무진동에서 얻은 것이고,풍강은 고향 마을 회진 풍호마을 앞 풍호강에서 얻은 호,소치는 전국의 산하를 방랑하면서 술과 시로써 한줄기 외로운 회포를 달래며 지은 호다.
2. 과거급제 관직진출
1576년 생원.진사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으나 당시 선비들이 동서로 나뉘어 다투는 것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 다니며 자연을 즐기고 한때 속리산에 들어가 성운에게 사사했다. <성운(1497-1579)은 나이30세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그의 형이 을사사화로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높은 학문을 지닌 채 속리산 기슭에 들어가 3년 숨어 살다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짧은 옷을 즐겨 입고 시와 거문고를 벗삼아 그를 찾아온 서경덕.조식.토정 이지함 등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
성운 선생은 백호와의 대면 때 반성문을 써보라 했다. 이에 백호는 意馬賦(뜻이 정립되지 못하고 달리는 말과 같이 호협하게 방랑한다는 뜻)라는 시를 지었다고 전한 성운은 훗날 그의 문집에 백호에 대해 "소년 때 착실히 공부하였고 시를 지으매 땅에 떨어지면 쇠소리가 나더라. 이별한 후로도 서로 대면함과 같으니 좋은 밤 밝은 달이 마음 속에 이르는 것 같다"고 적었다.
당시 공명심에 불탔던 호남 선비들은 당대의 등용문이던 박순의 문하로 운집할 때 과학 위주의 글에는 뜻이 없었던 호쾌한 백호는 성운을 홀로 찾으니 그의 나이 26세 가을, 3년 동안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고향에 돌아와선 영모정.벽류정.소요정. 창랑정 등 이른바 영산강 8정을 두루 돌아다니며 문우들과 만나 술과 시,거문고 풍류로 세상 인심을 논했다.
3. 일생 마침
27세에 임진왜란이 발발 17년 전인 1575년 호남에 왜구가 침입하여 백호는 박계현 막하에서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우니 병조판서가 된 박계현이 평했다.
"금석같은 목소리,유창한 말솜씨,노년에 그대 만나 사는 보람 크도다. 시단의 굳센 시운 세상을 압도하니..."
30세가 넘어선 영남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시를 남겼고 전국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민중 속에 뿌리 깊은 서민의식을 시로 표출했다. 39세를 일기로 요절할 때까지 생전에 그가 지은 시는 1000수가 넘는다. 호탕하고 기발한 그의 시는 항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당시의 대문호 신흠은「백호문집」서문에서 "내가 백사 이항복과 만나 임백호를 논하기가 여러 번인데 매양 기남아로 일컫었고 또 시에 있어서는 그에게 90리나 훨씬 뒤떨어져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임제는 즉으면서 처자에게 유언하기를
"사해의 모든 나라가 자주 독립하고 있는데 홀로 조선만이 그렇지 못하여 중국을 섬기고 있으니,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하며, 내가 죽은들 무엇이 원통하겠느냐."하며 곡(哭)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유언의 사실 여부를 떠나 마지막 남긴 서러운 말은 민중들의 가슴 속에 '독립심'과 '자주의식'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중화주의의 깊은 늪에 빠져 오랫동안 몰민족적 주자학적 세계관에 빠진 조선시대의 부패상을 통탄해하고 '민족적 자아의식'을 빨리 갖고자 외친 선비의 가슴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황진이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와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한 시조 〈한우가(寒雨歌)〉 등은 유명하다. 저서에 《화사(花史)》 《수성지(愁城誌)》 《임백호집(林白湖集)》 《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이 있다.
황진이 무덤 앞에서 지은 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한우가
북쪽 하늘이 맑다고 하기에 비옷도 없이 길을 나섰더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차가운 비가 내리는 구나
오늘은 차가운 비를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한우가에 대한 답가
어찌 얼어 자겠나이까? 무슨 일로 얼어 자겠나이까?
원앙새 수놓은 베개와 비취색 이불을 어디다 버려두고서, 이 밤을 얼어 자려 하시나이까?
오늘은 찬비를 맞고 오셨으니 덥게 몸을 녹여가며 자려 하나이다.
-임제가 평양의 명기(名妓)였던 한우에게 구애의 표현으로 지은 작품이다. 차가운 비(한우)를 맞았으니 얼어잘까라고 구애 하였으며, 한우는 이 시에 찬비를 맞고 온 그대를 따뜻하게 녹여자겠다고 화답했다.
무어별(無語別)
열다섯 아리다운 아가씨
남 부끄러워 말 못하고 헤어졌고야.
돌아와 중문을 닫고서는
배꽃사이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나주시에서 목포로 가는 광주 목포간 1번 국도를 따라 약 4Km정도 가면 남도 휴게소를 지나 신걸산(368.1m) 끝자락에 백호(白湖) 임제(林悌) 선생 묘가 있다.
[출처] 백호 임제|작성자
[출처] 백호 임제(林悌,1546-15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