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4주일(나해)
제1독서(에제 2,2-5)는 완고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하느님께 반항을 일삼았기에 바빌론으로 유배된(1차: 2열왕 24,8-17) 유다인들처럼 에제키엘은 아마도 초라하게 죽을 운명에 처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2,1). 서른 살이 되던 해(기원전 593년)에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예언자로 불리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의 혀를 입천장에 붙여 언어장애인으로 만드십니다(3,26; 24,27). 예언자의 임무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에제키엘의 연약함과 그가 하느님이 아님을 강조하려는 것인지 예언자를 “사람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하느님 영의 힘과 그분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게 된 에제키엘은 비록 가시로 둘러싸이고 전갈 떼 가운데 빠져드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이 완고한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2,6.8). 에제키엘은 예언자로서 겪어야 할 어려움이 많을지라도, 그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족을 보면서도 마음이 완고하여 아직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다인들을 하느님께서는 반역을 저지르는데 익숙해진 “반항의 집안”이라 부르십니다.
복음(마르 6,1-6)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저항 세력을 만나십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고향 나자렛에 가셔서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서 하느님 나라(구원)를 선포하셨고, 몇 가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제대로 공부한 적(율법학자)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회당에 모여든 많은 이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탄했고(1,22; 11,18), 베푸신 기적 때문에 더욱 놀랐습니다(7,37; 10,26). 그런데 예수님의 활동과(세 번) 친척(두 번)에 대해서 다섯 번씩이나 의문을 제기합니다. 기적을 베푸시는 능력과 지혜로운 가르침에 놀라면서도 예수님을 우습게 여기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회당에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마음이 완고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지혜의 스승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권위 있는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시고, 더러운 영들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분이심을(1,27)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평범한 마술가나 세습되는 직업인 목수로만 취급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잡으러 나선 적이 있었고(3,21),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가르치실 때는 말씀이 들리지 않는 곳에 있었기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3,31-35). 예수님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있고, 충분히 좋은 협조자가 될 수 있는 친척들과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의지는커녕 말씀을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그저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소리(비유)로만 다가갔던 것입니다(4,11). 이들이 예수님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4,12)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은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을 비난하는 이들이 늘 끌어들이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사돈에 팔촌까지 따지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다른 나라는 고작해야 4촌밖에 따지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쓰이던 언어(아람어)는 물론 현대 유럽 언어도 4촌과 더불어 이웃까지도 다정하게 형제라고 부릅니다. 초기 교회의 역사가(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주님의 형제인 시몬은 클레오파의 아들로서 예수님과 사촌이고, 야고보의 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교부(테르툴리아누스: 155-220)의 잘못된 해석을 따르는 이들은 이들이 예수님의 친형제들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일 이들이 친형제들이고 마리아가 낳은 자식들이라면, 복음사가는 무엇이 두려워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왜 굳이 어머니 마리아를 혈육이 아닌 제자 요한에게 맡기셨을까요?(요한 19,26-27) 마음이 완고한 이들의 주장 때문에 우리 믿음이 흔들릴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제2독서(2코린 12,7ㄱ-10)는 자신의 신비체험과 하느님의 섭리를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 생활은 온통 가시밭길이었습니다. 18개월 동안 코린토 선교를 마치고 에페소에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 추천서를 받아서 코린토에 왔다는 “사탄의 하수인들”(선교사들)이 정말 하찮은 것을 자랑하면서 바오로를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로울 것이 없지만, 그들이 그렇게 자랑한다면 자기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환시와 계시에 대한 초월적 체험을 말하겠다고 합니다(12,1). 그러나 주님께서 섭리하신 체험들이 너무 엄청난 것이기에 주님께서는 바오로가 분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나누어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건전하게 생각하도록(로마 12,3) 몸에 가시를 주셨다고 합니다. 가시란 바오로가 적대자들(사탄의 하수인들) 때문에 겪는(10,10) 굴욕감과 좌절감을 포함한 모든 고통(갈라 4,13-14)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적대자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세 번씩이나 절규하면서 주님께 도움을 청했다고 합니다. 그때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힘이 자기에게 머물도록 오히려 기쁘게 자기 약점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말을 전하게 되고, 자기 자랑이 앞선다면 그리스도가 가려지기 때문에 선교사로서의 삶은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게 받겠다고 합니다. 질그릇 같은(4,7) 자기가 약할 때 오히려 주님께서 더 강하게 활동하시므로 은총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명령대로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자기 입에 넣어주신 말씀을 어떤 처지에서도 반항의 집안사람들에게 토해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앞길이 점점 가시밭길임을(더 이상 회당에 들어가지 않으심) 암시합니다. 고향 사람들의 완고함에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실 것입니다. 교만하고 거만한 코린토인들의 저항이 심할수록 바오로를 통한 예수님의 위력은 더욱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몸을 찌르는 가시 같은 교만한 자들의 모함과 비아냥거림을 무시하고, 오히려 자기 약점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 동족이 바빌론에 끌려가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마음이 완고해서 항상 하느님의 뜻을 거역했던 반항의 집안인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어설픈 체험을 떠벌리면서 자기 자랑만 일삼던 코린토 공동체는 한결같이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당신을 공적으로 드러내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구원의 징표로 보여주시는 기적에 대해 소문내지 말라고 그토록 여러 번, 간절하게 이르셨을지라도(마르 5,43) 온 세상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미 모두 다 알려졌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과 형제들은 믿음이 없어서(요한 7,5), 마음이 완고하기에 항상 말씀이 들리지 않는 곳에 머무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의 예수님의 역할과 본질은 전혀 상관이 없고, 단지 예수님의 인간적 관계와 하던 일(목수)만 크게 부각합니다. 당신께 대한 믿음이 없음에 놀라신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하고, 의사도 친척과 집안사람들은 치료하지 못한다.”라는 격언을 끌어들이시면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 치유해주시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내미시는 구원의 손길을 거부했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주어지는 구원과 믿음의 은총을 가로막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교만한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많이 주어진다 해도 그 힘이 그들 안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또 마음이 완고한 이들은 다른 이들이 걸어가는 은총의 길을 막아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화답송의 저자(시편 123,1-4)는 하느님의 은총의 길을 막아버리는 교만한 자들의 멸시와 거만한 자들의 조롱을 실컷 받다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깊은 감사에 젖어 주님을 우러러본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성실하게 살기로 다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느님을 증거하기 위해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 하느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교만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아니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허락되는 하느님의 은총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주간동안 잘 살펴봅시다.-방효익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