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Erasmus 요한 하위징아 / 이종인 / 연암서가 / 1924→2013 / 472p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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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로 얼룩진 중세의 혼란 속에서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 애쓴 고독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를 다룬 평전이다. 수도원의 무명 수도사에서 당대의 저명한 휴머니스트로, 종교개혁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되는 과정을 세세하게 파헤치고 있다.
요한 하위징아(1872~1945). 네덜란드生. 흐로닝언大 어문학과. 히브리어,아랍어,산스크리스트어 연구. 흐로닝언大/레이던大 역사학교수. 히틀러 치하에서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1942년 석방. 연구에 몰두하다가 1945년 생을 마감했다. 저서『하를렘의 기원들』『중세의 가을』『에라스무스』『얀 베트의 생애와 저작』『호모 루덴스』등.
이종인. 1954년 서울生. 고려대 영문학과. 전문번역가. 역서『중세의 가을』『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평생독서계획』『루스 베네딕트』『폴 존슨의 예수 평전』『신의 용광로』『촘스키, 사상의 향연』『고전 읽기의 즐거움』『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성서의 역사』등.
옮긴이의 말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무스 로테로다뮈스(1466~1536)는 중세의 가을 직후에 도래한 르네상스와 휴머니스트의 놀이정신을 보여 주는 구체적 사례다.
그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제이고, 어머니는 의사의 딸이었다. 그에겐 세살 위의 형 페터가 있었다.
1487년 스테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수련사로 들어가 신학공부를 하면서 라틴어를 배웠는데, 실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492년 사제로 서임되었다. 1495년 주교의 후원으로 파리에 가서 몽테귀大에서 신학을 연구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大에서 잠시 가르치기도 했고, 토머스 모어의 환대를 받았으며, <우신예찬>도 그의 집에 기숙할 때 집필했다.
1514년 바젤로 옮겼고, 1516년에는 그리스어 신양성경의 라틴어 번역본을 발간했다.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루터가 보통사람들의 귀에 호소했다면, 에라스무스는 교양인들의 관심에 호소했다.
교회의 개혁을 원하는 점에서는 동일했으나, 에라스무스는 학문을 통한 점진적 개혁을, 루터는 복음적 열정에 기초한 투쟁노선을 걸었다.
제1장.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1466-1488)
에라스무스의 어머니는 그가 10대 때에 사망했고, 얼마 후 아버지마저 사망했다.
보호자들의 종용에 굴복하여 스테인의 수도원에 들어갔고, 1488년에 수도사가 되겠다는 서약을 했다.
제2장. 스테인 수도원(1488-1495)
이후 그는 수도사 신분에 대한 후회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스테인 수도원에서는 라틴 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이탈리아 휴머니스트들 중 로렌초 발라를 특히 좋아했다.
1492년 신부로 서임되었다. 이때에는 벌써 라틴어 학자 겸 문필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495년에 파리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제3장. 파리 대학교(1495-1499)
15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전통주의는 휴머니즘이 파리 지성계에 스며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세련된 라틴어 스타일과 고전 詩 애호사상이 열렬한 추종자들 사이에서 퍼져 나갔다.
이탈리아에서 막 시작된 플라톤 사상의 재해석도 널리 받아들여졌다.
신플라톤주의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새로운 해석도 널리 도입되었는데, 이것 역시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파리의 이론신학이나 철학은 여전히 보수적이었지만,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파리에서도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운동이 움트고 있었다.
에라스무스가 파리 행을 결심한 주된 목적은 신학박사 학위를 따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파리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는 어떤 형태의 스콜라주의든 그 사상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금욕과 치밀한 논리만을 강조하는 분위기를 혐오했다.
당시 지적 노동으로 생계를 잇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의 생활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처지의 문필가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메세나(후원자)를 찾는 것이었다.
제4장. 최초의 영국 체류(1499-1500)
영국에서 탁월한 인품을 갖춘 두 명의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존 콜렛과 토머스 모어였다.
에라스무스는 왕족을 만나서 인사하는 행운도 누렸다.
그리니치의 마운트조이 영지에서 토머스 모어는 에라스무스와 함께 산책을 하다가 그를 왕가의 자녀들이 교육받고 있는 엘섬 궁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에라스무스는 왕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9세의 헨리를 보았다. 그는 후에 헨리8세로 영국 왕에 등극하게 된다.
헨리 옆에는 두 명의 어린 여동생과 한 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직 양팔에 안긴 어린 아이들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옥스퍼드에 체류하면서 대화와 편지교환에 몰두했고, 다양하고 폭넓게 교류했다.
에라스무스의 생애에는 타르수스 사건이 없다. → 사도 바울이 유대교도에서 기독교도로 개종한 획기적인 사건.
어떤 큰 위기를 겪지 않았다는 것이 에라스무스의 정신적 성장이 보여 주는 특징적인 사항이다.
위대한 사상가들은 으레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성장하는데, 에라스무스에게는 그런 점을 발견할 수 없다.
문학에서 신학으로 관심이 전환된 과정은 개종의 성격 같은 게 아예 없다.
그러한 전환은 점진적으로 발생했고, 어느 특정 시점으로 완성되는 법이 없다.
1500년 1월 영국 땅을 떠나면서 에라스무스는 봉변을 당했다. 에드워드3세가 만들고, 헨리7세가 다시 부과한 법령은 金銀의 해외반출을 금했다.
그러나 모어와 마운트조이는 영국 동전이 아니라면 안전하게 영국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있다고 에라스무스를 안심시켰다.
막상 도버 세관에 도착하니 관리들은 다른 말을 했다. 돈을 빼앗긴 그는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너무나도 하기 싫은 벨에스프리(bel esprit 재미있게 가르치는 사람) 직업을 다시 잡아야 했다.
그러나 이런 재정적 불운 때문에 <격언집>이라는 책이 나왔고, 그 책 덕분에 에라스무스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프랑스에 돌아온 이후의 몇 년 동안은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그는 돈이 궁했고, 문필가가 손댈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했다.
역경은 그를 속 좁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후원자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도록 어떻게 말할 것인지 충직한 친구에게 일러주기도 했다.
제5장. 휴머니스트 저자인 에라스무스
1500년 <격언집>을 펴냈는데, 이 책 덕분에 명성이 찾아 들었다. 이 책은 고대의 라틴 작가들로부터 약 800개의 격언들을 모아 놓아, 우아한 라틴어 문장을 쓰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격언을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라틴어로 글을 썼기 때문에 그 직접적인 영향은 당시의 교육받은 계층, 즉 상류층에 국한되었다.
그는 일부 휴머니스트들에 의해 비난을 당하기도 했다. 고대 학문의 신비를 이런 식으로 공개해도 되느냐는 것이었다.
라틴어 덕분에 로마제국 멸망 이래 유럽 전역에서 지적 소통이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에는 라틴어를 배우는 사람이 사제들이나 학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관직에 나아가 立身揚名하려는 부르주아지와 귀족 자제들이 그래머 스쿨을 다니며 라틴어를 배웠고, 그 과정에서 에라스무스를 발견했다.
라틴어가 아니었더라면 에라스무스는 그런 세계적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제6장. 신학적 열망(1501~1504)
그는 생계수단이 불안정한데도 건강에 더 신경을 썼으며, 학문연구도 당장에 소용되는 것보다는 지식의 근원에 도달하려는 강렬한 열망을 품었다.
1500년 영국에서 돌아온 이후 그리스어 학습에 치중했으며, 1502년 가을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그리스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평소 그리스어를 마스터하면서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올바른 판단으로 드러났다.
3년간의 그리스어 공부는 그에게 충분한 보상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히브리어도 함께 공부했으나, 이 언어는 결국 포기했다.
1504년 그는 그리스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비판적 신학공부에 그리스어를 활용했으며, 여러 사람에게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엔키리디온>으로 널리 알려진 <기독교 전사를 위한 지침서>는 당시의 종교에 대해 많은 비판을 포함한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지혜의 시작이다. 에라스무스는 당시의 종교적 생활을 아무 못마땅하게 여겼다.
기계적인 전례와 영혼이 없는 기독교적 의무를 강조하는 그 생활이 진정한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았다.
모든 기독교인은 성경의 순수한 1차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자면 기독교인은 고대 작가들, 웅변가들, 시인들, 철학자들(특히 플라톤)을 공부하면서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
또 초기 교부들, 가령 히레로나무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도 도움이 된다. ☞ 히에로나무스는 불가타를 완성했다.
종교는 외면적 의례를 지속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유대주의적 의례주의이고 아무런 가치도 없다.
감동 없이 시편 전편을 읽는 것보다는, 단 한 줄이라도 시편의 의미를 깊이 음미하며 하느님과 자신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례는 영혼을 새롭게 하지 못할 경우 아무 가치도 없고 오히려 해로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 미사를 몇 번 참석했다고 회수를 헤아리면서 그 회수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미사 도중에 그리스도의 사랑은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미사가 끝나고 교회를 나서면 일상생활의 습관으로 고스란히 되돌아가는 것이다."
"당신은 매일 희생을 봉헌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당신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간다. 당신은 성인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유물을 만지고 싶어 한다. 당신은 베드로와 바울의 은총을 얻고 싶은가? 그렇다면 베드로의 신앙과 바울의 자비를 모방하도록 하라. 이렇게 한다면 로마 순례를 열 번 갔다 온 것보다 더 많은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예가를 하기가 정말 부끄럽다.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대부분 사소한 의례에만 매달린다. 그 의례라는 것은 한심한 심성을 가진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고, 때로는 그런 것을 만든 의도조차도 의심스럽다. 그런데 성직자들은 남들에게 그 의례를 준수하라고 밉살스러울 정도로 강요하면서 그것을 따르면 신임하고, 그렇지 않으면 비난을 해댄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진정한 기독교 정신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갈 5:1.
이 말씀은 기독교적 자유의 교리를 온전히 포함하고 있고, 나중에 종교개혁의 시대가 도래하면 온 세상에 울려 퍼지게 된다.
"당신은 노름판에서 주사위를 잘못 던져 하룻밤에 1천 냥의 금화를 잃기도 한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가난에 내몰린 비참한 소녀가 자신의 정절을 팔고 있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목숨을 내주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사람의 영혼이 이처럼 파멸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당신, 당신은 그런 한심한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여긴단 말인가?"
"훌륭한 문학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것이 종교적 경건성의 극치라고 생각하는 중상 모략가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은 젊은 시절 고전 작가들의 교양 높은 문학을 배웠고, 여러 날 밤을 세워 가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정확한 지식을 습득했다. 이렇게 한 것은 허영이나 유치한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고, 주님의 신전을 우리의 정신력, 고전문학의 지식으로 장식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종교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교정하고 싶었습니다. 종교는 유대주의적 의례와 물질적 사항들의 준수라고 생각하면서 경건한 신앙심을 무시해 버리는 사람들을 경고하고 싶었습니다." - 존 콜렛에게 보내는 편지. 1504.
제7장. 루뱅, 파리, 두 번째 영국 체류
1504년 루뱅 근처의 수도원 도서실에서 에라스무스는 로렌초 발라의 신양성경 주석 원고를 발견했다.
그것은 복음서, 바울 서한, 계시록 등의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주석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었다.
불가타(Vulgata 라틴어역 성경)가 오류가 전혀 없는 번역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13세기 초에 로마에서 공인되었다.
에라스무스는 발라의 원고를 읽은 것을 계기로 신약성경 전체로 관심을 돌려서 성경의 순수한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기로 했다.
1505~1506년까지 존 콜렛의 권유를 받아들여 신약성경을 그리스어 원본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 번역은 불가타와 다른 점이 아주 많았다.
그는 헨리7세의 궁정 주치의인 조반니 바니스타 보에리오의 두 아들을 대동하고 이탈리아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제8장. 이탈리아 체류(1506-1509)
그는 1506년 토리노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 체류 중 보았던 건축도, 조각도, 그림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파비아의 대성당을 방문하고서 나중에 기억한 것이라고는 쓸모없는 낭비와 엄청난 규모에 대한 얘기 밖에 없다.
이탈리아에서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오로지 책 뿐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인쇄술이라는 초창기 산업과 함께 성장한 세대였다. 그와 그의 저작의 명성은 인쇄술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인쇄된 책으로 동일한 텍스트를 수천 명의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이전 세대들은 맛보지 못한 커다란 혜택이었다.
그는 저자로서의 명성이 확립된 이후 인쇄소를 통해 연속적으로 작업을 한 첫 세대였다. 그것은 그의 강점이면서 약점이었다.
우리가 글을 쓰면 온 세상에 직접 알려지게 된다는 사실은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표현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자극제가 된다.
이런 사치스러움은 최고의 지성만이 큰 탈 없이 감당할 수 있다.
에라스무스와 단행본 인쇄를 이어 주는 연결고리는 라틴어였다. 탁월한 라틴어 실력이 없었더라면 그가 누린 저술가의 직위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인쇄술은 라틴어가 널리 사용되도록 촉진시켰다. 당시 출판업자들에게 성공과 대규모 매출을 약속해 준 언어도 라틴어였다.
1509년 초 로마에 도착했다. 그는 이미 잘 알려진 존경받는 작가로서, 조반니 데 메디치(후에 교황 레오10세) 등 고위직들이 그를 대접했다.
1509년 4월 영국 왕 헨리7세가 죽었다. 후계자 헨리8세는 에라스무스가 1499년에 엘섬 궁에서 만나 영국을 칭송하던 시를 바쳤던 젊은 왕자였다.
1509년 7월 에라스무스는 로마와 이탈리아를 떠나,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제9장. 『우신예찬』
알프스를 넘어가면서 그는 토머스 모어와 대화를 하면서 나누게 될 즐거운 농담을 기대하면서 <우신예찬>을 구상했다.
이 세상은 어디에서나 어리석음이 저질러지는 무대라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인생과 사회를 돌아가게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 모든 것이 스톨티티아(愚神, 어리석음을 의미하는 라틴어)의 입을 통해 발언된다.
스톨티티아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아테나)와 정반대 되는 위치에 있는 어리석음의 여신인데, 자신의 위력과 유용성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는다.
모든 인간행동을 밀어붙이는 추진력은 스톨티티아의 자매인 필라우티아(自己愛)이다. 이 인생의 양념을 한 번 제거해 보라.
그러면 웅변가의 말은 썰렁해질 것이고, 시인의 언어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화가는 조용히 사라져야 할 것이다.
오만,허영,허세의 외투를 입고 있는 어리석음은, 이 세상에서 높고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것의 감추어진 원천이다.
명예의 전당, 애국심, 민족정신으로 무장한 국가, 의례의 장엄함, 궁전의 고귀함과 망상, 이런 治粧物들은 어리석음이 아니면 무엇인가?
가장 어리석은 행동인 전쟁은 모든 영웅심의 근원이다. 무엇 때문에 영웅들은 목숨을 희생제물로 내놓았는가? 바로 허영심이다. ☞ 제국의 영웅심은 허영심의 발로일 수 있지만, 침략당하는 국가의 영웅심은 가족의 생존이다. 이는 동일한 가치가 아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국가를 만들어 낸다. 그 허영심 때문에 제국,종교,법원이 존재한다.
보라, 사랑이 어리석음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장애물을 무시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면,사람들은 왜 결혼을 하는가?
모든 즐거움과 오락은 어리석음이 배후에서 작용하는 인생의 양념일 뿐이다.
"무대공포증이란 자기 자신의 결점을 잘 아는 현명한 웅변가에게서만 발견된다." - 퀸틸리아누스. 고대 로마 수사학자.
맞는 말이다. 퀸틸리아누스는 지혜가 훌륭한 실행의 장애물이 된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톨티티아가 나름대로 공로를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현명한자가 수치심이나 수줍음 때문에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리석음 혹은 미친 척하는 태도가 무대공포증을 일거에 날려 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업적이 미흡하다고 느끼는 자의식은 과감한 행동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요, 세상의 발전을 지연시키는 엄청난 무기력을 가져오는 것이다.
너무 자의식이 강하여 자기 배꼽만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다.
때때로 바보노릇이 즐거운 이유는 행동의 브레이크를 제거하고 무기력을 발산시켜 주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은 즐거움이요, 경쾌함이며, 인생에 빠져서는 안 되는 행복의 필수요소이다.
어리석음은 인생의 치료약이다. 아내의 단점을 까발려 가정의 비극을 만들기보다는 단점을 모르는 체하면 결혼생활이 얼마나 평화로울 것인가?
여러 가지 가치 있는 사회적 성질에는 약간의 어리석음이 가미되어 있다.
인자함, 자상함, 남을 인정해주고 존중하는 마음,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마음, 그것이 어리석음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의 마음은 미묘하여 진실보다 거짓말에 더 귀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교회에 가보라. 신부가 설교 내내 진지한 얘기만 한다면 신자들은 졸고, 하품을 하고, 따분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웃기면서도 황당무계한 얘기를 시작하면 그들은 눈을 번쩍 뜨면서 그의 입술에 매달리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하늘을 날지 못하고, 네 발로 달리지 못한다고 해서 그를 불상하게 여기는가?
차라리 말들이 문법을 배우지 못하고 케이크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불행하다고 말하라.
어떤 피조물이든 그의 본성을 따라 살아간다면 그는 불행할 수가 없다. 본성을 도외시하는 온갖 학문들이 만들어져 우리의 파괴를 재촉할 뿐이다.
그런 학문들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말들은 많지만, 그 행복에 기여한 바가 없다.
온갖 악마가 작용하여 그 학문들은 인간의 생활에 많은 질병들을 몰래 가져왔다.
<우신예찬>은 두 가지 주제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 유익한 어리석음이 진정한 지혜라는 것이고,
2) 망상에 빠진 지혜는 완전한 어리석음이라는 것이다.
스톨티티아는 에라스무스가 평소 비난하고 싶어 했던 것을 직접 비난한다. 가령 면죄부 판매, 기적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 특정 성인들에 대한 이기적 숭배, 무모한 도박사들, 뭐든지 기계적으로 획일화하고 평준화하려는 정신, 수도자들의 질투심 등이 비난의 대상이다.
그는 교조적 논리의 비현실성을 잘 알고 있었다. 신앙의 도그마에서 나온 일관된 사상은 결국 불합리성으로 추락한다.
저 나약한 스콜라주의의 신학적 본질들을 한 번 살펴보라. 열두 사도들이 오늘날 환생해서 그들의 말을 듣는다면 전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스콜라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 중세 신학교들의 교육전통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후 의미가 확대되어 기독교의 계시된 진리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철학적, 신학적 사유방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스콜라 사상에서는 철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이성의 힘을 중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비주의와도 연계를 맺었다.
스콜라주의의 원조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이다. 이후 스콜라주의의 발전은 대체로 3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9~12세기까지인데 교권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호교(超이성주의) 사항을 플라톤주의의 관념으로 설명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스쿨맨은 9세기의 에리우게나와 11세기 말의 안셀무스이다.
제2기는 전성기인데 13세기이다. 이 시기에 스페인을 점령한 아랍인들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유럽에 전해지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의 스쿨맨들은 인간이성을 통하여 기독교의 신앙을 해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접목시켜 하나의 사상체계를 수립했다. 이 시기에 실재론과 유명론이 서로 갈등했다.
제3기는 14~15세기로서 몰락기이다. 이 시기에 유명론이 널리 유행하고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분리가 요구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스쿨맨은 윌리엄 오컴과 둔스 스코투스이다.
오컴은 토머스 아퀴나스의 신학사상에 반대해, 인간이성으로는 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컴의 면도날의 의미는 "실체들은 필요 이상으로 증폭되어서는 안 된다."고 정의된다. 설명에 들어 있는 모든 불필요한 아이디어들은 제거해 버리고 가장 簡單明瞭한 가설만 제시하라는 뜻이다.
제10장. 세 번째 영국 체류(1509-1514)
1509년 초여름 에라스무스는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건너와 토머스 모어의 집에서 <우신예찬>을 썼다.
자유를 염원하는 사람에게 지속적인 가난, 장래의 불확실성,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 상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케임브리지大에서 에라스무스는 신학과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하지만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수입도 별로 올리지 못했다.
1513년 봄, 영국은 오랫동안 준비해 온 프랑스 공격을 감행했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군대와 협력하면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헨리8세는 군사적 명성을 드높이면서 늦가을에 영국으로 되돌아와 의회의 찬사를 받았다.
"전쟁은 전쟁을 모르는 자에게만 즐겁다." - 에라스무스. <격언집>.
에라스무스는 1514년 스테인의 수도원장 세르바티우스의 소환명령을 거부했다.
제11장. 신학의 빛(1514-1516)
1516년 에라스무스의 주석이 달린 교정된 그리스어 텍스트로 된 신약성경과, 불가타와는 크게 다른 그의 라틴어 번역본 성경도 함께 발간되었다.
이 두 중요한 저작이 나오자 에라스무스는 신학연구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고전문학의 태두요 기준인 동시에 이제 신학연구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같은 해에 <기독교 군주의 교육>을 출판했다. 이보다 몇 년 전에 출간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출간을 마무리하고 네덜란드로 여행했다. 안트베르펜에는 평생 동안 에라스무스를 지원하고 도와준 친구인 페터 길레스(피터 자일즈)가 살고 있었다.
페터 길레스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도 나오는 인물인데, 페터의 정원에서 선원이 자신의 해상경험을 말해주는 장면이 들어 있다.
당시 페터는 <유토피아>의 초판이 인쇄되도록 도왔다.
1514년 세르바티우스의 소환명령을 거부한 이래, 이 문제는 언제나 그의 머리 위에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칼처럼 매달려 있었다.
이 문제는 마침내 1517년 초에 결말이 났다. 교황 레오10세는 교회법을 위반한 에라스무스를 용서했다. 또 반드시 수도회의 의복을 입어야 하는 의무에서 면제시켰고, 세속에 살면서 聖職祿을 받을 자격을 수여했으며, 사생아로 탄생한 사실이 아무런 불이익 사유가 되지 않음을 밝혔다.
또한 교황은 신약성경의 헌정을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그의 높은 명성이 이러한 결과를 이끌어 낸 것이다.
이로써 에라스무스는 청년시절부터 그를 압박해 오던 악몽으로부터 영영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자유인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라틴어 학자 겸 재치 넘치는 사람으로 성장하여, 그 시대의 문명을 회전시키는 중심축 같은 인물이 되었다.
제12장. 에라스무스의 사상 1
에라스무스는 비합리적인 것, 無味乾燥한 것, 오로지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을 아주 싫어했다.
아무런 동요가 없었던 중세의 문화는 오로지 이런 것들로만 사상의 세계를 채워 넣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특히 종교계가 각종 관행, 의식, 전통, 고정관념 등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고, 그 세계에서 종교정신은 사라진 지 오래라고 보았다.
그의 논문들, 편지들, <대화집>에는 무지하고 탐욕스러운 수도자들의 행렬이 반드시 등장한다.
그 수도자들은 가짜 거룩한 태도와 헛된 수작으로 어리석은 대중을 속이며 그들에게서 빼앗은 돈으로 호의호식하고 있다.
또한 하나의 고정적 모티브로서 당시의 미신을 다룬다.
가령 프란체스코 수도회나 도미니크 수도회의 옷을 입은 채로 죽은 사람은 사후에 구원을 받는다는 미신을 사정없이 조롱한다.
단식,기도,축일준수,고해,사면,축복 등 형식만 중시하고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런 것들을 열심히 해도 하느님을 기쁘게 하지는 못한다.
종교적 경건함이 뒷받침되지 않은 순례는 아무 가치도 없다. 성자들과 그들의 유물을 숭배하는 것은 미신이요 어리석은 행위이다.
"우리는 성자들의 손수건과 그들의 지저분한 신발에 키스하지만, 그들이 남긴 가장 거룩하고 효과적인 유물인 책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삼단논법의 체계에서 그는 머리카락의 두께를 재려는 사소함과 無味乾燥한 논쟁기술을 보았을 뿐이다.
중세 기독교 문명은 신비주의의 바탕, 철저한 위계구조(신-인간-동물-사물)의 적절한 균형 등을 갖춘 아주 영광스러운 구조물이었다.
그는 신비주의로 기울어지는 법이 없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져와 세운 스콜라 철학의 구조와 그 구조 위에 단테가 세워 올린 천국/연옥/지옥의 정신적 구조가 분명 있었지만, 에라스무스는 그것들을 도외시하고 자신만의 다른 세계를 보았다. 그것은 고전사상과 기독교 정신이 융합된 세계였다. → 연옥 개념은 고대에도 이미 존재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제6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대와 중세에 지중해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이 연옥 사상은 14세기에 이르러 단테의 <신곡>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그런데 개신교는 연옥 교리에 커다란 문제점이 있다고 본다. 성경에서 그 교리의 근거를 도무지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교회 신조 22조는 이렇게 단정한다. "그것은 헛되이 만들어진 희망에 불과하며 성경의 근거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에 역행하는 것이다."
에라스무스 정신의 주축은 기독교이고 고전주의는 정신의 형식을 부여해 주는 보조물이다.
그는 고대 고전에서 기독교적 이상에 부응하는 윤리적 경향만을 취해 온다.
2~3세기 앞서 시작된 르네상스 역사에서 '복원'과 '다시 꽃핌'이라는 용어 외에 에라스무스의 글에는 '재생'이라는 용어가 거듭 튀어나왔다.
세상은 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제정신을 차려 가고 있다. 그렇지만 예전의 무지에 그대로 매달리려는 무지한 사람들이 있다.
훌륭한 문학이 다시 살아나고 세상이 그만큼 현명해지면, 그들의 무지가 온 천하에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고대인들이 아주 경건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고대의 역사는 용서와 미덕의 사례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위엄있는 인생관은 그들의 사상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훌륭한 도덕을 이교도의 것이라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
"가장 유쾌한 여행은 해안을 따라 여행하는 것이고, 가장 유쾌한 산책은 물가를 따라 산책하는 것이지요... 시는 산문일 때 가장 맛이 있고, 산문은 시적일 때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單純明瞭한 스타일, 뛰어난 논리 제시, 탁월한 묘사력을 갖추고 있지만, 이는 깊이의 부재 혹은 방만함의 원인이 된다.
에라스무스는 정곡과 핵심을 찌르는 격언 혹은 속담 같은 생생한 문장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현대에 들어와 자주 인용되는 에라스무스 문장은 하나도 없다. <격언집>의 저자가 정작 자기의 격언은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다.
그가 좋아한 일은 쉽게 풀어 쓰는 것이었다. 가장 좋은 사례가 그의 라틴어역 신약성경이다.
그는 이 번역본에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 모든 텍스트를 쉽게 풀어 썼다.
자유가 없으면 인생은 인생이 아니다. 한가함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 그가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것은 완벽한 독립을 열망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어떤 당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내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바울. 고전 2:15.
인간의 법률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잘 알아서 스스로 처리하는 사람에게 법률적 처방이 무슨 소용인가?
성령의 영감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을 제도로 묶어 두려는 것은 얼마나 오만한 짓인가?
우리는 에라스무스에게서 의로운 사람은 고정된 형식이나 규칙이 필요없다는 낙관주의의 단초를 발견한다. 그는 이미 자연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
우리가 신앙과 경건함이 내면에 충만하다면 자연은 당연히 우리를 선량함으로 인도한다.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된다.
자연회귀사상과 단순명료하고 합리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곧 에라스무스의 사회사상과 교육사상의 바탕이다.
이러한 사상은 시대를 훨씬 앞선 것이다. 그 사상은 18세기 계몽사상의 예고편이다.
"아이는 놀이하면서 배워야 하고, 아이 마음에 쾌적한 것, 가령 그림들을 수단으로 배워야 한다. 아이의 잘못은 부드럽게 지적하며 교정해야 한다."
교사의 매질과 욕설을 에라스무스는 아주 혐오스러운 것으로 생각했다.
교직을 성스럽고 보람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교사를 맡아야 한다.
남녀관계에 대해서 그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서 여성 편을 들었다.
부녀자의 취약한 입장에 대하여 부드러우면서도 애정 넘치는 이해심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사람으로 누가 에라스무스처럼 영락한 처녀 혹은 생활고에 내몰린 창녀가 된 여자를 옹호한 적이 있는가?
유럽의 새로운 저주(성병)에 감염된 사람들의 결혼처럼 사회적 위협이 되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 사람이 그 말고 또 누가 있는가?
그는 당시의 안이한 사회이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의 문헌들은 하나같이 간통과 호색의 책임을 여자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자연에 사는 야만인들 사이에서도 간통이 발생했을 경우 남자를 처벌하고 여자는 용서해 주었다."
제13장. 에라스무스의 사상 2
윤리와 미학의 관점에서 單純明瞭, 자연스러움, 순수함, 합리성 등이 에라스무스가 높이 평가하는 필수적 덕목이었다.
그는 세상이 인간의 제도와 의견, 그리고 스콜라주의 교리로 가득 차 있으며, 수도회의 전제적 권위에 눌려 질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압박 때문에 복음의 교리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끝없는 책들과 학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迂廻路를 모두 버리고 지름길을 타고서 진리로 직접 다가갑시다." - 존 콜렛.
"진리의 언어는 단순해야 한다." - 세네카.
진리는 單純明瞭해야 한다. 이는 단지 문헌학적, 철학적 요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윤리적, 미학적 필연성도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근원적이고 순수한 것은 아주 강력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학문의 원시적 單純明瞭함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가장 맑은 물이 흐르는 수원은 복음의 교리이다. 그는 이 원천을 회복하는 것이 신학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각종 막연한 철학체계에 대해서는 온갖 사소한 사항까지 다 신경 쓰는 사람들이, 왜 기독교 정신의 원천으로 다가가는 것은 게을리하는가?"
"이 지혜는 워낙 탁월하여 세상의 온갖 다른 지혜들을 다 부끄럽게 만들 것이다... 이는 삼단논법보다는 성품의 문제이며, 논쟁보다 생활의 문제이며, 학식보다 영감의 문제이며, 논리보다 변화의 문제이다."
이것이 그 성경적 휴머니스트의 인생관이었다.
사람들이 불가타의 텍스트를 두고서 서로 싸우는 것은 그를 역겹게 했다.
사람들은 불가타의 텍스트가 그리스어 원본과 차이가 있고, 또 와전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어 원전으로 되돌아가서 원래의 형태와 최초의 의미를 파악하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음식, 우리의 옷, 우리의 돈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까다로우면서 유독 성스러운 문헌 속에서 찾아낸 언어학적 정밀성이 왜 그토록 당신들을 불쾌하게 만듭니까? 사람들은 내가 쓸데없이 헛고생을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경배하고 예배하는 그 분의 말씀을 왜 이토록 무시합니까?"
그는 새 번역본을 읽은 사람이 의문을 표시하면 거기에 대해 해명할 것이고, 그 자신이 오류를 저질렀다면 고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언어학적 비판방식이 교회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듯 하다. 그는 적들의 맹렬한 반응에 놀랐다.
"사람들이 순화된 형태의 성경을 읽고, 원래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성직자들의 권위가 일거에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에라스무스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가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서한들은 그 앞에 이름이 붙은 사도들이 모두 집필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사도들 자신도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기독교적 표현과 고전주의가 양립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발생한다.
성경연구 분야에서 성경 저자들의 자격요건을 철저히 캐묻던 사람이, 정작 고대 문인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권위를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정말로 중요한 것은 생활 속의 실천이라고 확신했다. 특정 철학파의 가르침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자는 위대한 철학자가 아니다.
기교적 삼단논법으로 가르치는 자는 진정한 성직자가 아니다. 자신의 성품, 자신의 얼굴과 눈빛, 자신의 검소함으로 가르치는 자가 진정한 성직자다.
사상의 의도나 내용은 적절한 표현의 형식이 뒤따르지 않으면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르네상스는 물질적 세계를 즐겁게 여기고 그에 대응하는 유연하고 신축적인 어휘를 많이 만들어 냈다.
루터, 칼뱅, 정치가들, 예술가들, 군인들, 과학자들과 비교해 볼 때, 에라스무스는 속세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은둔자처럼 세상을 바라본다.
이것은 라틴어의 영향이다. 그의 예리한 감수성과 관찰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현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법이 없다.
삼위일체와 聖처녀 마리아에 대한 커다란 논쟁들이 결국 무슨 이익을 가져왔는가?
"우리는 미지의 상태 혹은 미결의 상태에 남겨 두어도 좋을 법한 것을 너무 많이 정의함으로써, 오히려 우리의 구원을 위태롭게 한다... 종교의 본질은 평화와 일치이다. 우리가 가능한 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또 많은 문제들을 개인의 판단에 맡겨 두지 않는 한, 이런 평화와 일치는 불가능하다. 이제 많은 문제들을 보편 종교회의 때까지 연기하기를 희망한다. 희미한 거울이 제거되고 어둠이 사라져서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대면할 수 있을 때까지 이런 문제들을 연기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
"성경연구와 관련하여 하느님이 우리의 탐구를 원하지 않는 성스러운 분야들이 있다. 우리가 이 분야를 파고들려 한다면 우리는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신성한 지혜의 이해 불가능한 장엄함과 인간 이해력의 하찮음을 깨닫게 된다."
제14장. 에라스무스의 성품
에라스무스가 자신과 사람들에게 간절히 바랐던 것은 물질적, 도덕적 순수함이었다.
와인의 순도를 속이는 술장수나 음식에 다른 것을 섞는 식료품상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다.
그는 답답한 공기와 냄새나는 물건을 병적일 정도로 싫어했다. 시대에 앞서 전염의 위험을 경고하고 살균소독을 강조했다.
"컵을 공동으로 사용하지 맙시다. 누구나 다 깨끗하게 면도를 합시다. 침대시트를 깨끗하게 빨아서 덮읍시다. 인사할 때 서로 키스를 삼갑시다."
그의 생전에 유럽에 누구나 무섭게 생각하는 성병이 수입되었다. 이런 몹쓸 질병에 대한 공포는 깨끗함에 대한 그의 욕망을 더욱 강화했다.
그는 모든 것에 민감했지만 그 중에서도 그가 말하는 '학자의 질병', 즉 감기에 아주 취약했다.
게다가 젊었을 때부터 신장결석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는 추위,바람,안개를 잘 견디지 못했고, 냉방은 더욱 견디지 못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정작 중병에 걸렸을 때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친구 페터 길레스가 병에 걸렸을 때 그는 이런 조언을 했다. "약을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안정을 취하면서 화를 내지 말게."
그는 의사들을 신임하지 않았고, <대화집>에서도 여러 번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라고 하면서 그들을 조롱했다.
만년에 그는 논쟁에 이골이 났다. 후텐, 루터, 스페인 사람들, 이탈리아 사람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그들의 해로운 선서에서 면제시켜 주신다. 단 그들이 그 선서를 참회한다면..."
이런 말은 자신의 수도자 서원을 깨뜨린 사람이 할 법한 말이다.
명성이란 무엇인가? 세속에 전해지는 것 뿐이다. 그는 명성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많이 누렸다.
때로는 명성으로 인해 엉뚱한 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만약 당신이 무모하게도 나의 선량한 이름을 계속 공격한다면 나의 이런 온유한 태도는 사라져 버릴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은 천년 뒤에 남을 해롭게 하는 아첨꾼, 한가한 떠버리, 무능한 의사들의 무리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남들과 깊은 교류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 능력이 부족했다.
"사랑을 할 때는 증오하게 될 어느 날을 생각하고, 증오심을 느낄 때는 사랑하게 될 어느 날을 기억하라."
그는 자신이 쓴 저작들에 만족을 얻지 못했다. 루뱅 대학의 한 교수는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그토록 많은 책을 써서 우리들에게 안긴 겁니까? 그 책들 중 어느 하나도 맘에 들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에라스무스는 호라티우스의 시구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지요."
제15장. 루뱅 대학 시절
에라스무스는 1517년 루뱅 대학에 자리를 잡으면서 거대한 변화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하느님의 은총과 군주들의 경건과 지혜가 인간사에 크게 개입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파괴적 현상이 벌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섭니다."
종교개혁이 벌어지고 몇 년 동안 에라스무스는 엄청난 오해를 받는 피해자였다.
그의 온유하고 미학적인 학문정신이 신앙의 심오한 깊이와 인간사회의 가혹한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였다.
에라스무스는 신비주의자도 현실주의자도 아니었으나, 루터는 그 둘 다였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정화된 진리의 타당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에라스무스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가 볼 때 대낮처럼 환하고 분명한 것을 왜 사람들이 거부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불가타 텍스트를 수정하려 들면 성경에 대한 믿음이 끝장나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성직자들을 에라스무스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신부는 놀라는 신자들을 앞에 두고 내가 거룩한 복음이나 주기도문을 고치려 든다고 화를 내며 말합니다. 나는 무지와 부주의로 신약성경의 문장을 와전시킨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인데, 마치 내가 마태나 누가를 비난한 것처럼 말합니다. 도대체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가능한 한 정확한 신약성경을 갖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까?"
보수적 성직자들의 본능은 정확했다. 그들은 어떤 개인의 학문적 판단이 성경 텍스트의 정확성을 결정하면 교리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가 종교적 경건함과 철저한 윤리적 감정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모든 신앙의 핵심인 신비주의적 통찰이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개인적으로 신비주의를 배척했기 때문에 그는 카톨릭 정통파의 저항과 그 근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에라스무스는 그들이 자신의 조롱과 야유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우신예찬>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깨닫지 못했다.
특히 새로운 학문적 신학에 대하여 반감을 품고 있는 것은 도미니크 수도회와 카르멜 수도회가 심했다.
저 자가 박식한 자들을 위해 글을 쓸 테면 써라. 그런 자들은 소수니까. 우리는 계속 짖어 대중을 동요시키겠다... 이런 식이었다.
에라스무스는 1519~1520년에는 그 자신이 논쟁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고,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이제 이 커다란 갈등은 오로지 그 한 사람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온 사방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1517년 루터는 면죄부에 반대하는 95개조를 발표했고, 1520년에는 카톨릭교회에 반발하는 3대 논문을 발표하여 온 세상에 불을 붙였다.
루터의 3대 논문은 <교회의 바빌론 유수>, <독일의 기독교 귀족에 대한 호소>, <기독교인의 자유에 관하여>를 말한다.
제16장. 종교개혁의 초창기
1518년 3월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95개조를 아무런 논평 없이 토머스 모어에게 보냈고, 존 콜렛에게는 지나가는 어조로 교황청이 너무 뻔뻔하게 면죄부를 유통시킨다고 불평했다.
1519년 3월 루터가 처음으로 직접 에라스무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보석이며 희망인 에라스무스여. 당신도 내 얘기를 많이 듣고 나도 당신 얘기를 많이 들어 왔습니다... 당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산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이 작은 형제의 존재를 인정해 주소서. 나는 당신을 정말로 존경하고 당신이 나의 친구 같은 느낌이 듭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로 하여금 명확한 입장을 밝히게 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학문과 문화의 기준인 이 강력한 권위자를 종교개혁의 대의에 동참시키려 한 것이다.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태도를 어느 한쪽으로 평가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중도 노선을 유지하려 했다.
영국의 헨리8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1세는 서로 싸움하는 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려놓았다. 교황도 그렇게 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1520년 5월 런던에서 루터 저작 화형식이 거행되었다.
1520년 여름 헨리8세, 프랑수아1세, 카를5세가 칼레에서 만나 회담을 했다. 에라스무스는 카를5세의 고문관 자격으로 참여했다.
그는 칼레에서 토머스 모어를 비롯한 영국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 것 외에는 그 여행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1520년 10월 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엑스라샤펠에서 거행되었다.
1521년 4월 기독교 세계가 기대했던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 나가,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옹호했다.
당시 독일 내의 기쁨은 워낙 강렬하여 루터와 그 지지자들이 위태로운 것이 아니라 황제의 권력이 위태롭다는 생각이 나돌 정도였다.
곧 황제의 칙령이 선포되었다. 제국 내에서 루터의 책들을 불태우고, 지지자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루터는 사법당국에 넘겨질 것이었다.
1521년 10월 말 에라스무스는 종교적 보수주의자들로부터의 위험을 피해 루뱅을 떠나 바젤로 갔다.
제17장. 바젤 시절(1521~1528)
그는 신학적 논쟁이 분노에 찬 투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는 순간부터 더 이상 참여자이기를 거부하고 방관자로 남았다.
그는 인간의 교정 가능성에 대해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정치적 행위와 통치의 어려움을 잘 깨닫지 못했다.
훌륭한 통치에 대한 그의 사상은 너무 순진했고, 강력한 윤리적 기반을 가진 학자들이 그러하듯 그 바탕이 아주 혁명적이었다.
그런 사상에 맞추어 현실적 조치를 추론해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정부형태, 법률, 권리에 대한 구체적 질문이 그에게는 아예 없었다.
그는 경제적 문제들도 전원적 단순함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처럼 막연한 정치사상을 가진 사람은 군주들을 아주 가혹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에라스무스의 글을 읽은 많은 지식인들은 그의 평화주의적 감정에 공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16세기의 역사에서 그런 감정이 현실에서 열매를 맺었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치열한 열정과 냉정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지도자는 될 수 없었다.
세계 문학사에서 그의 다수의 저작 가운데 <우신예찬>과 <대화집>만 살아 남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 신학적 편저는 도서관 서가로 조용히 밀려나겠지만, 유쾌하고 재미있는 두 저작은 분명 계속해서 읽힐 것이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와 갈등을 벌이거나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대화집> 속에서 조롱을 당할 각오를 해야 되었다.
제18장. 루터와의 논쟁과 짙어지는 보수 색채
다들 에라스무스를 조용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카톨릭교회의 지지자들은 그에게 확고한 견해를 요구했다.
"에라스무스가 글을 써서 루터를 반박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를 루터 지지자라고 생각한다."
루터에게 반박하라는 글을 쓰라는 압력은 점점 강해졌다. 헨리8세도 에라스무스의 오랜 친구를 통해 재촉을 했다.
마침내 에라스무스는 루터를 반박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논쟁은 실제로 두 사람 사이의 논쟁으로 그쳤다.
종교개혁이라는 대변혁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그 논쟁은 하나의 뒤풀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524년 4월 루터가 에라스무스에게 편지를 보내 냉소적인 경멸의 분위기로 이렇게 요구했다.
"제발 공언해 오신 대로 비극의 구경꾼으로 남겠다는 그 자세를 견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1524년 9월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에 관한 논고>를 통해, 인간의 의지는 마땅히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정의나 하느님의 자비라는 용어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모든 것이 불가피한 필연에 따라 벌어지는 것이라면, 성경의 가르침, 비난, 경고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루터는 이 자유의지론을 혐오와 경멸의 감정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내적인 분노는 <자유롭지 않은 의지에 대하여>의 행간에서 드러난다.
그는 아무런 유보 조건 없이 아주 극단적 형태의 예정론을 지지한다.
그가 볼 때 인간이 서로 협력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느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죄악과 은총, 구원과 하느님의 영광을 모든 것의 근본적 원인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그런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다.
"비극은 옮음과 그름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사이의 갈등이다." - 헤겔. ☞ 이는 관념상의 갈등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다.
루터 신학의 3대 핵심은 '오로지 믿음으로만, 오로지 성서로만, 오로지 은총으로만'이다.
기독교의 모든 권위는 성서에서 나오고 구원은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은총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카톨릭 측 반박은 다음과 같다.
믿음만을 말한다면, 선행을 게을리하여 신자들이 태만해진다.
성서만으로 믿음을 따진다면, 누구나 자신의 주관적 견해에 따라 성서를 해석하게 되어 결국 중구난방이 된다.
은총으로만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하면, 신자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와 공로를 말살하게 된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신학논쟁은 자유의지에 관한 것이었는데, 결국 은총과 공로 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하는가의 문제였다.
미묘한 뉘앙스를 잘 파악하는 에라스무스는 그 싸움의 성격을 잘 알았다.
그는 관념들은 언제나 서로 뒤섞이고, 또 상호 교환 가능하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루터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지나치게 불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를 좋아했다.
바다를 보는 네덜란드인이 산꼭대기만 쳐다보는 독일인과 맞서는 형상인 것이다.
카톨릭교회는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약간의 단서를 마련하여, 하느님의 은총 아래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가 발휘될 수 있는 공간을 부여한다.
에라스무스는 그 자유를 상당히 폭넓게 해석하는 반면, 루터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부인한다.
에라스무스는 아주 회의적인 자세로 오로지 자유의지라는 문제만 가지고 논쟁을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열정적 심리상태에 있던 루터는 교회의 단점과 비참한 상태는 도외시하고 오로지 그 문제만을 거론한 에라스무스를 비난했다.
에라스무스가 깊은 고뇌와 함께 하느님 앞에 교회의 심각한 문제를 고발해야 마당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젤 시의회 대부분이 이미 과격한 종교개혁을 지지하고 있었다.
1524년 에라스무스는 <참회>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고해성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역시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리스도나 사도들이 이 예식을 정하지 않았다면 교부들이 정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성사를 유지하는 것이 옳다.
고해성사는 때때로 악용되었으나 그래도 훌륭한 용도를 갖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양쪽 모두를 애매하게 경고하려 했다.
같은 해에 <교회의 화목한 일치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자신의 입장을 종합했다. 카톨릭교회의 단식, 聖物숭배, 성인숭배, 聖畵 등에 대한 찬성으로 카톨릭교회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으나, 여전히 교회의 옹호자들은 그를 의심했다.
그들은 에라스무스의 <대화집>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카톨릭교회의 핵심 교리들을 믿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래서 나중에 에라스무스의 저작들이 검열을 받게 되었을 때 <대화집>, <우신예찬> 등 몇 개의 저서들이 금서목록에 올랐다.
그 이외의 저서들은 카우테 레겐다(조심해서 읽을 것) 처분을 받았다.
종교개혁의 원인과 잘못을 에라스무스에게 뒤집어씌우는 사람들의 코러스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가 종교개혁의 알을 낳았고 루터와 츠빙글리가 품어서 부화시켰다."
제19장. 휴머니스트와 종교개혁가들과의 전쟁(1528-1529)
에라스무스는 고전연구가 순수 기독교에 봉사하는 한, 그 연구는 문명의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순수 기독교 정신을 위한 고전연구를 주장하고, 또 큰 기대를 걸었지만, 동시에 한 가지 위험을 보았다.
"고전문학을 되살린다는 미명 아래 이교도주의가 고개를 쳐들고 있다. 겉으로는 그리스도를 경배하지만 속으로는 이교도주의를 흠모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있는 것처럼..." - 1517. 카피토에게 쓴 편지에서.
이탈리아에서 학자들은 너무 배타적으로 또 너무 이교도적으로 문예부흥에 헌신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연구태도를 고쳐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 학자들이 지금껏 거의 이교도적인 방식으로 진행해온 문예부흥을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치시키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여겼다.
노년에 접어든 에라스무스는 보수반동의 길로 가고 있었다. 이런 노선은 결국 휴머니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그가 이처럼 휴머니즘의 순수주의 형태와 싸우는 것은 그가 장차 기독교적 순수주의로 나아가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바젤 시는 1501년부터 독립을 추진해 오다가 마침내 1521년에 스위스 연합에 가입했다. 바젤 시에서 새로운 신앙이 점점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1525년에는 카톨릭 미사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시위가 터졌다. 1528년 말 바젤 시는 거의 내전 일보 직전까지 갔다.
1529년 초 카톨릭 미사는 금지되었고, 聖畵들은 철거되었으며, 수도원들은 철폐되고, 대학은 휴교조치를 받았다.
이제 복음주의자들이 에라스무스를 바젤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이득을 보려 했다. 그의 이름은 여전히 하나의 깃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페르디난트는 형인 카를5세를 대신하여 독일제국을 다스리고 있었고, 막 스파이어 의회를 주재했다.
에라스무스는 안식처로 바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프라이부르크를 선택했다. 그는 거기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이제 종교개혁의 대의에서 너무 멀어졌다. 종교개혁가들을 가짜 복음주의자들이라고 경멸하는 어조로 불렀다.
도시와 국가들은 종교개혁의 찬반을 기준으로 서로 긴밀하게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복음과 사람들을 한 번 보십시오. 그들은 전보다 더 좋아졌습니까? 그들이 전보다 사치,육욕,탐욕 등에 덜 탐닉하고 있습니까? 복음으로 인해 바뀐 사람들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 술꾼이 술 끊은 사람이 되고, 금수가 온유한 사람이 되고, 구두쇠가 관대한 사람이 되고, 뻔뻔한 자가 순결한 자로 바뀐 경우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전보다 더 나빠진 많은 사람들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제 그들은 성화를 내던지고 카톨릭 미사를 철폐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보다 더 좋은 것이 나왔는가?
그는 종교개혁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절대적 확신을 아주 싫어했다.
"울리히 츠빙글리와 마틴 부처는 성령의 영감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성령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제20장. 에라스무스의 말년(1529~1536)
전에는 타협이나 동맹이 가능해 보였던 분야에서조차도 첨예한 갈등, 선명한 파당주의, 엄격한 원칙 등이 평화로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1529년 봄 카톨릭 세력이 과반을 차지한 스파이어 의회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양보를 했던 1526년의 후퇴를 취소시키고, 오로지 루터파에게만 기존의 양보사항을 그대로 누리도록 허용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변화나 새로운 사항들은 절대 금지한다고 선포했다.
츠빙글리파와 재세례파는 조금의 관용도 허가받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복음주의를 지지하는 군주들과 도시들은 일제히 항의(Protest)했다.
이것을 계기로 카톨릭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에게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슐레이만1세가 빈의 성문 앞에 나타났다.
당시 에라스무스가 쓴 편지들을 보면, 그처럼 폭넓고 생생한 견식을 가진 인물이 당대의 대사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 자신의 개인적 생각이나 신변문제 등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사항들에 대해서는 아주 막연하고 허약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1530년 3월 <투르크족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데 대한 조언>은 너무나 막연한 내용이어서 그 글을 읽은 독자들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도대체 전쟁을 선포하라는 얘기야 말라는 얘기야?"
1530년 여름 카를5세의 주관으로 아우구스부르크 의회가 열렸다. 황제는 종교개혁 세력에 대해 노골적인 탄압을 결정했다.
독일 내에서 거대한 갈등이 닥쳐오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지역들과 도시들은 힘을 합쳐 동맹을 형성하여 황제에게 맞섰다.
만년에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도덕적, 신학적 사상의 결산이며 완벽한 표현이 될 대작 <설교론>을 쓰는 데 모든 노력을 바쳤다.
<설교론>은 피곤한 정신으로 쓴 작품이고, 그리하여 그 시대의 요구에 날카롭게 대응하지 못하는 인상을 준다.
그는 복음의 순수한 정신에 입각하여 정확하고, 지적이고, 세련된 매너의 설교를 하면 사회가 저절로 향상되리라고 보았다.
"사람들은 권위에 더 잘 순종하고, 법을 더 잘 지키며, 더 평화롭게 될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더욱 금실이 좋아지고, 더욱 믿음이 커지면서 간통을 더욱 혐오하게 될 것이다. 하인들은 더 잘 주인의 말을 따르고, 장인들은 더 좋은 물건을 만들고, 상인들은 더 이상 속이지 않을 것이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 쫓겨나 바젤로 온 젊은 프랑스인의 신앙생활 지침서가 인쇄되고 있었다. 장 칼뱅의 <기독교 강요>가 그것이다.
에라스무스보다 많이 연하인 페터 길레스는 1533년 사망했다.
1535년 토머스 모어는 헨리8세의 수장령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일관되게 거부함으로써 참수형을 당했다.
"모어가 그런 위험한 일에 개입하지 말고 신학적인 문제는 신학자들에게 맡겼더라면 좋았을걸..."
에라스무스는 편지에서 마치 모어가 종교적 양심이 아닌 다른 어떤 문제로 죽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
1536년 여름 에라스무스도 운명을 달리했다.
제21장. 결론
과감하고 열광적인 16세기는 절제와 관용을 중시하는 에라스무스의 이상을 비웃으며 우레처럼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진정한 교양의 핵심인 라틴어 학문은 이제 한물 가 버렸다.
그를 근대정신의 선구자라고 평가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에라스무스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온건하여 영웅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波瀾萬丈한 16세기에는 루터의 힘, 칼뱅의 의지, 로욜라의 추진력이 더 요긴했다. 에라스무스의 부드러운 매너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루터,칼뱅,로욜라 등의 힘, 열기, 깊이, 일관성, 성실성, 외향성 또한 요청되었다. ☞ 로욜라의 예수회는 1540년 교황 파울루스3세에 의해 승인받았다.
그들은 에라스무스의 온유한 미소를 견디지 못했다. 그의 종교적 경건함은 그들이 볼 때 너무 밋밋하고 허약했다.
지성인의 유형으로 볼 때 에라스무스는 소규모 그룹에 속했다. 이 그룹은 절대적인 이상을 믿으면서 동시에 아주 온건한 그룹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력하게 맞서서 저항하는 것도 아니었다.
극단적인 것은 그들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들은 정작 행동에 나서야 할 때는 움츠린다.
왜냐하면 행동은 건설하는가 하면, 동시에 파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로 물러나 사태가 지금과 같이 흘러가서는 안 된다고 계속하여 소리친다.
정작 위기가 닥치면 그들은 마지못해 전통과 보수주의의 편을 든다.
에라스무스 인생의 비극적 측면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측면은 이런 것이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새로운 것 혹은 곧 닥쳐올 것을 잘 알아본다.
그렇다면 낡은 것과 맞서 싸우면서 그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오래된 카톨릭교회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후에 그 교회 품에 안겼고, 그리고는 종교개혁을 비난했다.
휴머니즘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종교개혁과 휴머니즘의 대의를 한참 신장시켰다가 나중에 가서는 등을 돌렸다.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계신다. 경건한 마음은 어떤 의복 아래에서도 실천된다. 자상한 성품이 있기만 하다면..."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캠프는 결국 에라스무스를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했다.
교황청은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지는 않고 신자들에게 그의 책을 조심스럽게 읽으라고 경고했을 뿐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역사는 그를 종교개혁가의 일인으로 치부하려고 노력해 왔다.
양측이 이렇게 나온 데는 당시의 여론이 에라스무스를 존경하고 숭배했던 데 기인한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종교적 갈등에서 어떤 타협을 이끌어 내려는 거듭되는 노력은 결국 이후 그의 모국에서 쉽게 뿌리를 내린다.
다음 세기의 위대한 지도자인 오란예의 빌렘(윌리엄3세)은 에라스무스 정신을 많이 이어받았다.
17세기에 홀란트의 행정제도는 상업의 번창, 자비와 사회적 기강, 온유함과 지혜의 매너 등 외국인들에게 하나의 모범적 사례로 보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마녀사냥과 박해가 이웃의 다른 나라들보다 1세기 전에 이미 중지되었다. 이는 개혁교회의 목사들 공로가 아니다.
그것은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은 17세기 초 계몽된 시 행정관들의 공로였고, 그들의 양심상 마녀사냥의 박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해설 - 둘케 데시페레 인 로코(dulce est desipere in loco)
휴머니즘은 여러 사상의 갈래가 한데 엮여 만들어진 지적 운동이다.
에라스무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갈래는 14세기부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작가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었다.
처음에 시인 페트라르카가 이 사상을 강하게 표출했는데, 그의 시는 휴머니즘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즉 고전문학은 고전을 문헌연구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휴머니즘은 이교도적 운동의 측면이 있었다. 이 운동은 교회가 부과한 속 좁은 금욕주의를 답답하게 여겼다.
교회는 자연을 아름다운 유혹이라면서 혐오의 대상으로 보았고, 육체를 악이라고 생각했으며, 현세를 부정하면서 이 세상에는 수도원의 명상적 생활을 통해서만 미덕을 획득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휴머니즘은 이런 가르침을 거부했다.
중세교회의 핵심 교리는 원죄였다. 영혼과 신체는 완전히 분리된 것인데, 인간은 오로지 육체를 통해서만 영혼을 표출할 수 있으므로, 피할 수 없는 죄(순수 정신이 될 수 없는 죄)를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휴머니즘은 원죄보다는 인간의 선량함을 강조하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신체적 쾌락에 대해서도 한결 더 수용적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영혼과 신체는 하나이며, 신체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영혼의 인간성을 표현한다고 가르쳤다.
즉 영혼은 그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육체를 입고서 이 지상에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신체와 정신의 결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과의 본질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씨앗이다. 그 씨앗만을 얻겠다고 하면 사과 전체를 파괴하는 수 밖에 없다.
인간도 신체를 무시하고는 정신을 얻을 수 없다. 신체를 무시하고서는 정신도 없는 것이다.
성직자들이 교회와 교부들에게 의존했다면, 휴머니스트들은 이교도적 고전들에게서 힘을 얻었다.
따라서 15세기 인문학자 마키아벨리가 정치행위에 대한 현실적 근거로 고대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의존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휴머니즘은 처음엔 문학운동에서 시작되었으나, 곧 사상운동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가치의 관점을 천상의 것에서 지상의 것으로 전환시켰고, 인간정신과 신체가 갖고 있는 새로운 자의식에 눈뜨자고 권장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휴머니즘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일치하는 것이었고, 그로부터 이탈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에라스무스가 상상하는 휴머니즘은 순수 고전주의와 순수 기독교 정신이 융합된 세계였다.
이 때문에 휴머니즘이 그보다 1세기 앞서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새롭게 보였다.
페트라르카 이후 제자들은 고대의 화려한 형식미에 매혹되어 기독교 정신과의 융합에 소홀했는데, 그 융합을 다시 집대성한 것이 에라스무스였다.
에라스무스는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서정시에서 영감을 받아 <우신예찬>을 집필했다.
"Misce stultitiam consiliis brevem dulce est desipere in loco. 약간의 어리석음을 사려에 섞으라, 때로는 이성을 잃는 것도 좋다."
동일한 휴머니스트 배경을 가진 토머스 모어도 때때로 바보짓이 쓸모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상가가 생각한 것은 바보짓은 풍자정신과 놀이정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사실 <우신예찬>의 저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사람은 모어였다. 에라스무스는 그를 처음 만날 때부터 意氣投合하여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온 두 사람의 저작 <우신예찬>(1511)과 <유토피아>(1516)에도 그런 상황이 잘 반영되어 있다.
에라스무스는 1509년 모어의 집에 머물면서 <우신예찬>을 썼는데, 이 저서의 착상을 모어로부터 얻었고, 그에게 헌정까지 했다.
모어는 1515년 외교사절로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 파견된 일이 있었다. 거기에는 평생 에라스무스를 지원하고 도와준 친구 페터 길레스가 있었다.
길레스는 당시 시청의 서기로 근무했는데, 모어의 <유토피아>는 에라스무스의 소개로 알게된 길레스와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저술된 것이다.
<우신예찬>과 <유토피아>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 사실상 동일한 내용을 다루지만 표현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작품을 호평하며 널리 소개했다.
종교개혁은 교황청의 교권남용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종교혁명이었다. 그 원인은 대략 세 가지 정도이다.
1) 개인주의의 등장이다. 중세 후반 교황청의 월권행위가 지속되자 이에 대항하는 군주들의 종교적 개인주의가 생겨나게 되었다.
2) 민족주의의 대두이다. 중세 후반 민족국가, 제후국가, 자유도시 등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해, 교황청의 세속권에 대항했다.
3) 교황청의 경제정책이다. 그리스도는 가난과 청빈을 설교했지만, 교회는 과도한 세금과 공납을 요구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해 에라스무스는 지속적으로 풍자와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하여 "에라스무스가 종교개혁의 알을 낳았고, 루터와 츠빙글리가 품어서 부화시켰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의 대표작 <우신예찬>과 <대화집>에는 이런 풍자와 비난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의 정치사상은 순진한 것이었다. 가령 <기독교 군주의 교육>(1516)은 일종의 군주론인데 정치문제보다는 도덕문제를 더 많이 다룬다.
이 논문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마키아벨리의 <군주론>(1513)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는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고, 좋은 사람인 척하기만 하면 된다.
반면 에라스무스의 지도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며, 지도자의 성공은 도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서 하이라이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갈등이다.
에라스무스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려 하지 않았으나, 결국 카톨릭의 품으로 돌아갔다.
종교개혁은 결국 루터가 의도한 대로 흘러갔고, 카톨릭교회는 큰 상처를 입었다.
에라스무스는 이왕 카톨릭으로 돌아갔으면 교회를 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섰을 법한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절친한 친구 토머스 모어는 카톨릭교회를 옹호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았던가.
커다란 위기 앞에서 루터 못지않게 단호함을 보여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요한 하위징아는 1940년 나치가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가택연금을 당하다가 네덜란드 변방으로 추방되었다.
이런 하위징아였으니 사망 직전에 쓴 글에서 "에라스무스를 존경하지만 공감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 어느 정도 이해된다.
'140303月 安晋弘
[출처] 812 ★ 에라스뮈스 - 요한 하위징아|작성자 길벗
첫댓글 넘나 흥미롭게 읽었네요.
<엔키리디온>으로 널리 알려진 <기독교 전사를 위한 지침서>는 당시의 종교에 대해 많은 비판을 포함한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지혜의 시작이다. 에라스무스는 당시의 종교적 생활을 아무 못마땅하게 여겼다.
기계적인 전례와 영혼이 없는 기독교적 의무를 강조하는 그 생활이 진정한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았다.
모든 기독교인은 성경의 순수한 1차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자면 기독교인은 고대 작가들, 웅변가들, 시인들, 철학자들(특히 플라톤)을 공부하면서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
또 초기 교부들, 가령 히레로나무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도 도움이 된다. ☞ 히에로나무스는 불가타를 완성했다.
종교는 외면적 의례를 지속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유대주의적 의례주의이고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를 근대정신의 선구자라고 평가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에라스무스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온건하여 영웅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波瀾萬丈한 16세기에는 루터의 힘, 칼뱅의 의지, 로욜라의 추진력이 더 요긴했다. 에라스무스의 부드러운 매너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루터,칼뱅,로욜라 등의 힘, 열기, 깊이, 일관성, 성실성, 외향성 또한 요청되었다. ☞ 로욜라의 예수회는 1540년 교황 파울루스3세에 의해 승인받았다.
그들은 에라스무스의 온유한 미소를 견디지 못했다. 그의 종교적 경건함은 그들이 볼 때 너무 밋밋하고 허약했다.
지성인의 유형으로 볼 때 에라스무스는 소규모 그룹에 속했다. 이 그룹은 절대적인 이상을 믿으면서 동시에 아주 온건한 그룹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력하게 맞서서 저항하는 것도 아니었다.
극단적인 것은 그들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들은 정작 행동에 나서야 할 때는 움츠린다.
왜냐하면 행동은 건설하는가 하면, 동시에 파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작 위기가 닥치면 그들은 마지못해 전통과 보수주의의 편을 든다.
에라스무스 인생의 비극적 측면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측면은 이런 것이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새로운 것 혹은 곧 닥쳐올 것을 잘 알아본다.
그렇다면 낡은 것과 맞서 싸우면서 그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오래된 카톨릭교회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후에 그 교회 품에 안겼고, 그리고는 종교개혁을 비난했다.
휴머니즘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종교개혁과 휴머니즘의 대의를 한참 신장시켰다가 나중에 가서는 등을 돌렸다.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계신다. 경건한 마음은 어떤 의복 아래에서도 실천된다. 자상한 성품이 있기만 하다면..."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캠프는 결국 에라스무스를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했다.
교황청은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지는 않고 신자들에게 그의 책을 조심스럽게 읽으라고 경고했을 뿐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역사는 그를 종교개혁가의 일인으로 치부하려고 노력해 왔다.
양측이 이렇게 나온 데는 당시의 여론이 에라스무스를 존경하고 숭배했던 데 기인한다.
종교개혁은 교황청의 교권남용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종교혁명이었다. 그 원인은 대략 세 가지 정도이다.
1) 개인주의의 등장이다. 중세 후반 교황청의 월권행위가 지속되자 이에 대항하는 군주들의 종교적 개인주의가 생겨나게 되었다.
2) 민족주의의 대두이다. 중세 후반 민족국가, 제후국가, 자유도시 등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해, 교황청의 세속권에 대항했다.
3) 교황청의 경제정책이다. 그리스도는 가난과 청빈을 설교했지만, 교회는 과도한 세금과 공납을 요구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해 에라스무스는 지속적으로 풍자와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하여 "에라스무스가 종교개혁의 알을 낳았고, 루터와 츠빙글리가 품어서 부화시켰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의 대표작 <우신예찬>과 <대화집>에는 이런 풍자와 비난이 가득하다.
에라스무스는 안식처로 바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프라이부르크를 선택했다. 그는 거기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이제 종교개혁의 대의에서 너무 멀어졌다. 종교개혁가들을 가짜 복음주의자들이라고 경멸하는 어조로 불렀다.
도시와 국가들은 종교개혁의 찬반을 기준으로 서로 긴밀하게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복음과 사람들을 한 번 보십시오. 그들은 전보다 더 좋아졌습니까? 그들이 전보다 사치,육욕,탐욕 등에 덜 탐닉하고 있습니까? 복음으로 인해 바뀐 사람들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 술꾼이 술 끊은 사람이 되고, 금수가 온유한 사람이 되고, 구두쇠가 관대한 사람이 되고, 뻔뻔한 자가 순결한 자로 바뀐 경우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전보다 더 나빠진 많은 사람들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제 그들은 성화를 내던지고 카톨릭 미사를 철폐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보다 더 좋은 것이 나왔는가?
그는 종교개혁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절대적 확신을 아주 싫어했다.
"울리히 츠빙글리와 마틴 부처는 성령의 영감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성령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사상은 순진한 것이었다. 가령 <기독교 군주의 교육>(1516)은 일종의 군주론인데 정치문제보다는 도덕문제를 더 많이 다룬다.
이 논문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마키아벨리의 <군주론>(1513)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는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고, 좋은 사람인 척하기만 하면 된다.
반면 에라스무스의 지도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며, 지도자의 성공은 도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서 하이라이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갈등이다.
에라스무스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려 하지 않았으나, 결국 카톨릭의 품으로 돌아갔다.
종교개혁은 결국 루터가 의도한 대로 흘러갔고, 카톨릭교회는 큰 상처를 입었다.
에라스무스는 이왕 카톨릭으로 돌아갔으면 교회를 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섰을 법한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절친한 친구 토머스 모어는 카톨릭교회를 옹호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았던가.
커다란 위기 앞에서 루터 못지않게 단호함을 보여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