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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비언나비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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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의산책 광기로 얼룩진 중세의 혼란 속에서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 애쓴 고독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평전
주의검을보내사 추천 0 조회 175 22.09.30 00:27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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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2.10.01 09:08

    첫댓글 넘나 흥미롭게 읽었네요.

  • 작성자 22.10.02 16:29

     <엔키리디온>으로 널리 알려진 <기독교 전사를 위한 지침서>는 당시의 종교에 대해 많은 비판을 포함한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지혜의 시작이다. 에라스무스는 당시의 종교적 생활을 아무 못마땅하게 여겼다.
     기계적인 전례와 영혼이 없는 기독교적 의무를 강조하는 그 생활이 진정한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았다.
     모든 기독교인은 성경의 순수한 1차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자면 기독교인은 고대 작가들, 웅변가들, 시인들, 철학자들(특히 플라톤)을 공부하면서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
     또 초기 교부들, 가령 히레로나무스,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등도 도움이 된다. ☞ 히에로나무스는 불가타를 완성했다.
     종교는 외면적 의례를 지속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유대주의적 의례주의이고 아무런 가치도 없다.

  • 작성자 22.10.02 16:30

    그를 근대정신의 선구자라고 평가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에라스무스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온건하여 영웅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波瀾萬丈한 16세기에는 루터의 힘, 칼뱅의 의지, 로욜라의 추진력이 더 요긴했다. 에라스무스의 부드러운 매너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루터,칼뱅,로욜라 등의 힘, 열기, 깊이, 일관성, 성실성, 외향성 또한 요청되었다. ☞ 로욜라의 예수회는 1540년 교황 파울루스3세에 의해 승인받았다.
     그들은 에라스무스의 온유한 미소를 견디지 못했다. 그의 종교적 경건함은 그들이 볼 때 너무 밋밋하고 허약했다.
     지성인의 유형으로 볼 때 에라스무스는 소규모 그룹에 속했다. 이 그룹은 절대적인 이상을 믿으면서 동시에 아주 온건한 그룹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력하게 맞서서 저항하는 것도 아니었다.
     극단적인 것은 그들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들은 정작 행동에 나서야 할 때는 움츠린다.
     왜냐하면 행동은 건설하는가 하면, 동시에 파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작성자 22.10.02 16:31

    정작 위기가 닥치면 그들은 마지못해 전통과 보수주의의 편을 든다.
     에라스무스 인생의 비극적 측면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측면은 이런 것이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새로운 것 혹은 곧 닥쳐올 것을 잘 알아본다.
     그렇다면 낡은 것과 맞서 싸우면서 그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오래된 카톨릭교회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후에 그 교회 품에 안겼고, 그리고는 종교개혁을 비난했다.
     휴머니즘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종교개혁과 휴머니즘의 대의를 한참 신장시켰다가 나중에 가서는 등을 돌렸다.
     "그리스도는 어디에나 계신다. 경건한 마음은 어떤 의복 아래에서도 실천된다. 자상한 성품이 있기만 하다면..."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캠프는 결국 에라스무스를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했다.
     교황청은 그를 이단으로 낙인찍지는 않고 신자들에게 그의 책을 조심스럽게 읽으라고 경고했을 뿐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역사는 그를 종교개혁가의 일인으로 치부하려고 노력해 왔다.
     양측이 이렇게 나온 데는 당시의 여론이 에라스무스를 존경하고 숭배했던 데 기인한다.
     

  • 작성자 22.10.02 16:31

    종교개혁은 교황청의 교권남용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종교혁명이었다. 그 원인은 대략 세 가지 정도이다.
     1) 개인주의의 등장이다. 중세 후반 교황청의 월권행위가 지속되자 이에 대항하는 군주들의 종교적 개인주의가 생겨나게 되었다.
     2) 민족주의의 대두이다. 중세 후반 민족국가, 제후국가, 자유도시 등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해, 교황청의 세속권에 대항했다.
     3) 교황청의 경제정책이다. 그리스도는 가난과 청빈을 설교했지만, 교회는 과도한 세금과 공납을 요구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해 에라스무스는 지속적으로 풍자와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하여 "에라스무스가 종교개혁의 알을 낳았고, 루터와 츠빙글리가 품어서 부화시켰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의 대표작 <우신예찬>과 <대화집>에는 이런 풍자와 비난이 가득하다.

  • 작성자 22.10.02 16:33

    에라스무스는 안식처로 바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프라이부르크를 선택했다. 그는 거기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이제 종교개혁의 대의에서 너무 멀어졌다. 종교개혁가들을 가짜 복음주의자들이라고 경멸하는 어조로 불렀다.
     도시와 국가들은 종교개혁의 찬반을 기준으로 서로 긴밀하게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복음과 사람들을 한 번 보십시오. 그들은 전보다 더 좋아졌습니까? 그들이 전보다 사치,육욕,탐욕 등에 덜 탐닉하고 있습니까? 복음으로 인해 바뀐 사람들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 술꾼이 술 끊은 사람이 되고, 금수가 온유한 사람이 되고, 구두쇠가 관대한 사람이 되고, 뻔뻔한 자가 순결한 자로 바뀐 경우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전보다 더 나빠진 많은 사람들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제 그들은 성화를 내던지고 카톨릭 미사를 철폐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보다 더 좋은 것이 나왔는가?
     그는 종교개혁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절대적 확신을 아주 싫어했다.
     "울리히 츠빙글리와 마틴 부처는 성령의 영감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성령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 작성자 22.10.02 16:34

    그러나 그의 정치사상은 순진한 것이었다. 가령 <기독교 군주의 교육>(1516)은 일종의 군주론인데 정치문제보다는 도덕문제를 더 많이 다룬다.
     이 논문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마키아벨리의 <군주론>(1513)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는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고, 좋은 사람인 척하기만 하면 된다.
     반면 에라스무스의 지도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며, 지도자의 성공은 도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서 하이라이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갈등이다.
     에라스무스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려 하지 않았으나, 결국 카톨릭의 품으로 돌아갔다.
     종교개혁은 결국 루터가 의도한 대로 흘러갔고, 카톨릭교회는 큰 상처를 입었다.
     에라스무스는 이왕 카톨릭으로 돌아갔으면 교회를 위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섰을 법한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절친한 친구 토머스 모어는 카톨릭교회를 옹호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았던가.
     커다란 위기 앞에서 루터 못지않게 단호함을 보여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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