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아가씨네 집에 다녀와서 추석을 지내고 귀대하였습니다. 우리는 혼인을 약속했지만 군대생활이 1년 반이나 남았고, 불안한 마음은 여전하였습니다. 전라도 임실과 경상도 김해는 너무나 먼 곳인데다 아가씨네 가족이 다 반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고 기다릴 것이라고는 아가씨의 마음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정기 휴가를 얻었을 때 만나자고 편지를 하였더니 안 된다고 답장이 왔습니다. 내가 집으로 가는 게 싫으면 김해로 나와서 만날 수도 있는데 다음에 만나자고 합니다.
그 사이 공무원이 되어 진영에서 근무하는 작은 오빠만 만나서 하룻밤을 보내고 귀대하였습니다. 편지는 변함없이 오갔지만 만나지도 못하면서 제대 날짜를 기다려야 하는 나는 답답하기만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느려터진 시계가 국방부 시계라고 합니다. 왜 그리 지루하고 하루가 열흘 같은지..... 그런 국방부 시계도 때가 오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는지 제대를 하게 될 1973년이 밝아 왔습니다.
제대를 두 달쯤 남겨놓았을 때인 1월에 반가운 편지가 왔습니다. 부모님께서“너 가고 싶은 곳으로 시집을 가라!”고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동안 어른들한테 많이 시달렸으며 온갖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반가운 편지를 받아 본 일이 없었습니다. 나는 약혼을 하러 간다고 말하고 특별 휴가를 얻었습니다.
제대 날짜를 기다리고 있던 아들이 휴가를 오고, 편지로 사귀던 아가씨와 혼인을 하기로 했다고 말씀드리니 부모님께서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회갑이 지난 어머니께서 농사일을 하시면서 식사 준비까지 해야 했으니.....
서둘러 김해로 갔더니 이번에는 김해읍내로 마중을 나왔습니다. 금은방으로 가서 내가 끼고 있던 2돈짜리 금반지를 실반지로 만들어 나눠끼었습니다. 요사이 같으면 커플 반지네요. 군대에서 봉급을 모으고 휴가 때마다 받은 돈을 아껴서 만든 금반지였습니다. 사진관으로 가서 약혼 사진도 찍었습니다.
사진에다“약혼기념 1973. 1. 28.”라고 글씨까지 새겼지요. 약혼한다고 휴가를 얻었으니 부대에 제출용 증거물을 만든 것입니다.
캄캄한 밤이 돼서야 아가씨네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어른들께서도 환영까지는 아니지만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우리가 펜팔을 시작한지 만 6년이 다 돼 가는데, 오늘이 단 세 번째 만남이었지요. 2박 3일간 머물면서 혼례식은 제대하고 가급적 빨리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나는 입대한지 35개월만인 3월 8일에 제대하고 바빴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때였는데, 집에 오자마자 새마을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새마을지도자를 하던 선배가 객지로 이사 나가자 마치 기다렸던 듯이 농촌운동을 했던 내가 새마을지도자가 되었지요. 혼인 날짜는 4월 10일로 잡았다고 편지가 왔습니다. 딱 한 달 남았네요. 그 사이에 본채 지붕을 스레트로 바꾸고, 행랑채는 옮겨서 다시 지었습니다. 마당에는 작두 펌프로 품어 올리는 우물을 만들었지요. 마중물을 붓고 작두질 하듯 물을 품어 올리는 시설 말입니다.
제대하고 장가간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혼인 비용으로 쓸 돈 60,000원을 내 놓더군요. 3월 말에 네 번째 만남을 위해서 김해로 갔습니다. 우리 혼인을 열렬하게 반대했던 큰 오빠 내외랑 부산진시장으로 갔습니다. 반대를 하였지만 허락이 난 후에는 잘 도와주었지요.
한복감 한 벌에 19,000원이 들고 다른 것을 더해서 35,000원을 썼습니다. 다시 김해로 와서 반지는 지난 번 실반지로 대신하고 손목시계는 8,000원을 주었습니다. 나도 10,000원짜리 시계를 받았습니다. 화장품 가게로 가서 신부용 화장품을 골랐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부족해서 두개는 제외하고 계산을 해야 했습니다.
내가 잊을 수 없는 옛날이야기를 시시콜콜 쓰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아무튼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서 4월 10일 오후,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아가씨네 마당에서 전통 혼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우리는 부모님께서 연로하셔서 혼례식에 참석하지 못하셨고, 자형과 형님 동생까지 단 5명만 참석하였습니다. 그것도 전날 김해에 와서 자고 혼례식을 치른 후에, 신부네 동네서 자고 다음 날 가야 했습니다. 혼례식 길이 2박 3일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꿈같은 첫날밤이 되었습니다.
1967년 3월 16일 첫 편지를 받으면서 시작한 펜팔 6년 만에,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라도 남자와 경상도 여자가 부부로 맺어진 것입니다. 첫날밤에 우리는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잘 살아가자는 다짐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렵게 만났는데 싸우지 말고 삽시다. 어쩌다가 언쟁을 하였더라도 누가 말을 걸어오면 반드시 받아 주기로 합시다. 우리한테 생기는 모든 문제는 함께 의논을 하되 최종 결정은 내가 합시다.”뭐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데, 아내는 기억이 없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니 싸울 일이 아닌 것을 가지고 싸우고, 싸우고 난 뒤에 며칠씩 말을 안 하고 지내는 것을 보면서 부부란 참 요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서로 좋다고,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만난 부부들이 하는 짓을 보니 이해가 안 됐던 것입니다.
처가에서 하루 쉬고 다음다음날 신행길에 올랐습니다. 김해에서 불러 온 택시를 타고 부산 범일동 시민회관 옆 고속버스터미널로 갔습니다. 전주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경부고속도로로 대구 대전을 거쳐 전주로 갔습니다. 가다가 금강휴게소에서 쉬었는데, 비온 다음 날의 우후청산 그대로였습니다. 꽃과 맑은 물, 푸른 나무들이 참 좋았습니다. 논산을 지날 때 온 산이 진달래꽃으로 칠갑을 하였는데, 그 아름다움은 지금도 행복한 추억입니다.
전주에서 택시를 대절해서 타고 임실 집으로 갔습니다. 임실읍에서 우리 동네로 가자면 고개를 하나 넘게 되는 데, 택시 기사가 고개에서 차를 세우더니 더 이상 못 가겠다고 버티네요. 전 날 비가 내려 포장이 안 된 고개를 넘어가면 이따가 올 때 미끄러워서 못 올라온다며 생떼를 쓰더군요. 신행길 택시에는 장인어른과 작은 처남, 바로 아래 처제가 타고 있었는데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7km를 더 가야 하는데.....
신행길부터 험난한 길을 예고하듯 택시기사가 속을 썩였습니다.
(다음에 계속합니다.)
다음은 우리 부부의 사진입니다.
신부 집에서 전통 혼례식을 하였습니다. 왼쪽 사진은 사모관대와 쪽두리를 한 사진이고, 오른쪽은 벗은 사진입니다. 나는 아직 스포츠 머리입니다. 신부화장을 이상하게 해서 다른 사람처럼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김해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온 미용사가 신부화장을 하였답니다.
아래 사진은 약혼한다고 휴가를 왔기에 증거물 만든다고 김해에서 만나 찍은 바로 그 사진입니다.
펜팔을 시작하고 맨 먼저 받은 사진입니다. 아마 18-19세 때의 사진이지요.
무전여행을 할 그 무렵에 찍은 사진입니다.
아래 사진은 가나안농군학교에 처음 갔을 때 수료 사진입니다. 앞의 왼쪽부터 장남인 김종일 선생님, 가운데가 교장인 김용기 장로님, 오른쪽이 둘째 아들인 김범일 선생님입니다. 김범일 선생 뒤로 여자 다음 남자가 나입니다.
숨은 이야기 하나. 앞 줄의오른쪽 세번째 여자 교육생이 머리를 숙이고 웃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대머리인 김범일 선생의 머리 한쪽에서 돌려 붙여 놓은 몇 개의 머리칼이 바람에 춤을 추다가 정수리 부분에 착 붙는 것을 보고 웃는 장면이라는거, 이 사진 볼 때마다 기억하고 웃습니다.
시집 온 뒤 두 달쯤 지나서 친정에 함께 다가다 진주 촉석루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 때는 저렇게 한복을 입고 갔습니다.
보관하고 있던 사진을 다시 찍어서 올렸는데,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남의 숨은 이야기를 듣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삼인행 필유아사라는 말이 있지요.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 중에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배울거리를 찾으면 배울거리가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것도 아니면 심심풀이 시간 보내기로 읽어도 될까요?
시원찮은 글을 읽고 말씀을 남겨 주시는 분들 덕택에 계속 쓰게 됩니다. 산촌에서는 반가운 손님처럼 느껴 집니다. 장마가 그치는 모양입니다. 의령이 오늘 35도가 넘었고 2등인 밀양도 34도를 넘긴 모양입니다. 건강관리 잘 하시고 날마다 기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2012. 7. 20.
종남산 정남향 산동네에서
조점동
다녀 가신지 5일이 지났군요.
다른 곳에서 남긴 글을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 글, 너무 길면 잘 안 읽습니다.
글씨가 작으면 반드시, 안 읽습니다. ㅋㅋㅋㅋㅋ.
나는 12포인트 크기로 올립니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