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2021 겨울호 계간평】
현실과 자연현상을 진맥(診脈)한 작품들
유 준 호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Ⅰ.
계절도 추운 겨울이고, 코로나의 변이들이 기승을 부려 마음마저 추운 때에 이를 딛고 표출해낸 세상이야기들이 여기 있다. 모든 작품에는 들쑥날쑥한 세상사와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숨어 있다. 그 모습들을 이번 현대시조 겨울 호 작품에서 확인해 보기로 한다. 시조의 기본 틀인 한 장(章) 4음보를 벗어나 5음보가 된 작품도 눈에 띄어 시조의 미래를 걱정하게 하는 것도 있었는데 이들 작품은 이번에 다루지 않기로 하였으니 독자들이 찾아서 이를 눈여겨보아 시조의 규범(規範)을 찾아가 주었으면 한다. 이번 현대시조 겨울 호에는 소시집으로 10편, 이 계절의 신작으로 56분의 작품이 2편씩 실려 모두 122편이 실려 있는데 이중 시조 작품 몇 몇을 골라 살펴보려 한다. 고루 여러분의 작품을 만나보려고 이미 전호에서 계간 평으로 언급했던 분의 작품은 되도록 뒤로 미루었음을 말씀 드린다.
Ⅱ.
무게를 못 이기고
놀 밭으로 툭! 떨어진다.
지붕 위로 던져 올린 어린 치아 몇 개와
가마솥 불덩어리와
부활하는 숯불까지
빨갛게 익어 터진
뜨거운 눈물방울
해 떨어지기 전 아우성치던 하늘까지
입으로 꽉 물고 왔다
두근두근 뜨겁다.
-김문억, 석류, 전수
이 작품에서 “석류”는 “불”의 이미지로 쓰인 듯하다. 활활 타는 불덩이로 모습을 한 석류 속 진홍빛 알갱이를 연상하여 썼다고 본다. 주변이 온통 석양에 벌겋게 물든 서녘하늘을 배경으로 해가 불덩이가 되어 바다 속으로 떨어지듯이 석류가 붉은 알갱이를 품고 놀 밭으로 떨어져 뒹굴고 있음을 첫수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 떨어지는 모습이 중장과 종장에 나타나 있다. 전통적으로 시조는 그 짜임새가 열고 펴고 마무리 짓는 삼장(三章)의 문학으로 종장에서 정서의 중심점을 이루며 맺음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작품 첫수는 그 중심 시구가 초장에 배치되어 있다. 첫수에서 석류는 ‘어린 치아’ ‘가마솥 불덩어리’가 되고, ‘숯불’이 되어 ‘툭! 떨어진다.’둘째 수는 석류의 빨간 알갱이를 ‘빨갛게 익어 터진 뜨거운 눈물방울’로 표현하고 있다. 눈물은 감정의 순수함을 표현하는 말이기에 석류의 티 없이 순수함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우리의 삶과 삼라만상의 생물들의 삶이 생동감 있게 겨루며 살아가는 때는 낮이기에 중장에서 이런 삶의 치열한 모습을 ‘아우성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의 사물을 일상과 자연현상의 또 다른 섭리로 연결시켜 표현의 묘를 보여준 훌륭한 작품이다. 김 시인의 문학적 상상의 폭을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시나 시조에서 작품의 질은 시적 내포와 외연이 조화롭게 그리고 넓게 조응(照應)할수록 좋은 작품이 된다고 하는데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는 시조라고 생각된다.
밤하늘 반짝이는
별 하나 건져 내어
가슴에 품어 안고
수십 년 살다보니
별 자국
구멍 사이로
찬바람만 지나네.
-김선환, 인생∙2, 전수
누구나 자신의 삶은 저 ‘밤하늘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기를 바라며 산다. 그러나 대부분 젊은 날의 별 같은 꿈은 세월이 지나며 그 색이 바래 서 희미해지기 일쑤이다. 그 허망함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강도(强度)와 상관없이 작아지고 먼지 낀 밤하늘별이 되고 보면 늘 허전함을 느낀다. 그것이 인생인 것 같다. 그런 모습을 이 짧은 단시조 속에 버무려 놓고 있다. 가슴에 별 같은 꿈을 품고 살았지만 꿈은 구멍이 나 그 구멍 사이로 ‘찬바람’만 흐르고 있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싸늘한 삶의 흔적만 보여주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인생엔 늘 따뜻한 봄바람만 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비바람이 불고 추운 겨울 칼바람도 부는 것이 자연의 현상이요, 인생의 길이기에 이를 실증하듯 그 모습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이 시조엔 요즘 와서 시도되고 있는 낯설기 기법이 쓰였다. 낯설기 기법이란 친숙하거나 인습화된 사물이나 관념을 특수화하거나 새로운 느낌이 들게 표현하는 방법인데 이 작품 초장에 쓰인 시어 ‘건져 내어’가 그것이다. 하늘에 있는 별은 지상에 사는 우리 입장에선 ‘받아내어’하든지 ‘바라보며’와 같이 위에서 밑으로 향하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밤하늘을 우물로 가상(假想)하고 이를 ‘건져 내어’라고 표현하여 인습화된 관념을 뛰어넘고 있다.
부동산 사고팔아 수십억 부풀린 돈
장롱 뒤에 숨겨두고 불안한 졸부 아제
밤마다 노심초사에 도끼 놓고 잠잔다.
빈자의 가슴에다 못 박는 참견에도
흔들림 하나 없는 마음이 편한 부자
가난을 주렴 엮어서 걸어놔도 행복이다.
<김성숙, 행복 대조, 전수>
시조집 “별바라기”에 있는 작품으로 인간사의 이치를 표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니 불현 듯 거지가 그 아들에게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불난 집 근처를 지나며 아들에게 「넌 행복한 줄 알아라. 저기 불이 나 발 동동 구르는 이들을 보라. 우리는 불탈 집이 없으니 발 동동 구를 일이 없으며, 다리 밑에 자리를 펴면 잠자리가 되니 잠자리 걱정도 없고, 돌아다니면 먹을 것도 생기니 끼니 걱정도 없으니 이 어찌 행복이 아니겠느냐.」했다는 이야기이다. 행복은 생각의 방향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마음속의 존재이다. 그래서 거지가 느끼는 행복을 우리는 이해할 만도 하다. 돈 때문에 돈을 지키려고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이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재벌(財閥)이 다 행복하지 않듯이 가난하다고 다 불행한 것은 아니다. 먹고 자고 살면서 근심 걱정이 없으면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니겠는가. 인생은 미립자(微粒子)에서 출발하여 성체가 되어 살다가 다시 미립자로 돌아간다고 한다. 갈 때는 돈이나 금덩이를 짊어지고 가는 것도 아니고 홀홀히 몸만 떠나니 돈도 재물도 다 무용지물이다. 이것이 하늘의 이치이며 우리 삶의 이치이다. 그러니 행불행(幸不幸)은 다 각자의 생각과 마음이 지어낸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여 세상 만상은 오로지 마음과 생각에 달려있다고 하고 있다. 이런 모습과 생각을 가감 없이 표현한 작품이 바로 이 “행복 대조”이다. 첫수는 재물에 눈이 멀어 이를 이루고 지키려 노심초사(勞心焦思)로 잠 못 이루는 졸부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둘째 수는 가난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주변에서 누가 뭐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굳게 지키며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 행복임을 표현하고 있다. ‘도끼 놓고 잠잔다.’ ‘가난을 주렴에 엮어서’와 같은 구절은 생략의 여운이 깃든 매우 시적인 표현으로 새로움을 느끼게 한다.
풀벌레 울음소리
열두 줄을 끊어다가
달빛에 줄을 얹어
육자배기 튕기면은
목련이
걸어 나와서
춤사위를 펼친다.
-김옥중, 가야금, 전수
기막힌 서정이 숨어 있는 작품이다. 그 시적 발상과 시적 상상의 폭이 넓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풀벌레 울음소리’를 가야금 튕기는 소리로 환치 은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가야금은 고래로 민족의 애환이 서린 악기이다. 그 음률이 한을 품은 우리 민족의 가슴 울림 같다. 가야금의 대명사가 된 우륵(于勒)은 가야금 소리를 낙이불류 애이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즐겁되 저속하지 않고, 슬프되 비통하지 않다)고 하여 가야금 소리를 고고하고 애잔한 소리로 해석해 보여주었다. 어떻든 가야금소리는 물 흐름 같이 자연스런 음악소리이다. 한 마디로 우리 민족 고유의 소리이다. 김 시인은 이를 ‘달빛에 줄을 얹어’민족의 한이 배인 ‘육자배기’를 연주해 내니 ‘목련’ ‘걸어 나와서’ ‘춤사위를 펼친다.’고 하고 있다. ‘풀벌레’ ‘달빛’ ‘목련’이 물아일체가 된 조용한 심포니(symphony)를 연주하는 장면을 펼치는 듯하다. 김 시인은 주로 단시조를 쓰고 있는데 그 작품들이 하나같이 빛을 발하고 있다. 아무래도 김 시인은 단시조의 달인(達人)인 듯싶다. 같이 발표한 “산작약”도 이에 못지않은 수작이다.
창호지에 달빛이 곱게 붓질한다.
백련(白蓮)을 그리다가 스스로를 그린다.
다 그린
환한 그림에
달빛 한 장
눈부시다.
-김종목, 달빛그림, 전수
화폭에 달빛이 눈부시게 빛나는 한 폭의 영상화(映像畵)이다. 시골 동향(東向)집 창호지로 바른 방문(房門)에 밝은 달빛이 비쳐 한 폭의 동양화를 연출한 모습이다. 달빛을 의인화하여 화가(畫家)로 보고 쓴 작품이다. 아마도 그 달빛은 보름달빛인 것 같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고즈넉한 산골 외딴 집에 내려앉아 고요를 재촉하고 있는 듯하다. ‘붓질하다’ ‘달빛 한 장’과 같은 시어가 새롭고 신선하다. 열고 펼치고 맺는 시조의 전범(典範)을 보여주고 있다. 깔끔하고 환한 마음의 창이 여기 열려 있다.
골리앗
크레인이라 불렀던 아내였다.
또 탱크보살이라는
별명도 가졌었다.
전차도
고장이 나면 수리가 필요한갑다.
감독관
없는 집이 맘 편한 줄 알았는데
외로운 침대 한켠
새우처럼 잠을 잔다.
새벽에
벌떡 일어나 손으로 더듬는다.
-김현길, 아내는 수리 중, 전수
아내가 병원에 입원하여 있나보다. “아내는 수리 중”이란 말은 아내가 입원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현실적 사실적 표현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골리앗’ ‘크레인’ ‘탱크보살’이란 말로 아내를 은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아내가 평소에 몹시 건강하고, 씩씩하여 모든 일을 도맡아 거침없이 처리하였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렇게 튼튼하여 병이 나지 않을 것 같던 아내가 병이 나(=고장이 나) 병원 치료(=수리)를 받고 있음을 첫수에서 보여주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늘 불도저처럼, 아니 탱크처럼 일을 추진하여 남편으로서 이를 따르기 벅차고 고단했는데 막상 아내가 병원에 가 있어 그간 고단함을 주던 아내가 집에 없자 ‘맘이 편할 줄 알았는데’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침대에서 마음 편히 육신을 펴고 자던 스스로가 침대 한편에서 쭈그리고 새우잠을 자게 되고,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아 새벽에 ‘벌떡 일어나’아내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그 허전함을 느끼고 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 했던가. 그래서 한 몸이었던 아내가 없으니 몸 한쪽이 달아난 듯한 허허한 심경을 표현한 작품으로 좀 거친 듯한 시어를 동원하여 이를 형상화하였다. 무사히 아내가 수리를 다 마치고 낫아 다시금 골리앗으로, 크레인으로, 탱크보살로 돌아와 허전함 아쉬움이 사라지기를 기원해 본다.
해가 긴 하지에도 잔뼈가 굵은 나는
이끼를 군데 두른 바윗돌 곁에 앉아
산마루 흰 구름 속에 꿈을 실어 보냈지.
이웃은 하나같이 대처로 떠난 뒤에
사립을 열어놓은 앞마당에 싹이 트듯
뻐꾹새 한번 울고도 초록빛을 남기다.
생각은 끝없는데 등불은 잦아들고
행적을 찾아가는 그 길은 너무 멀어
두고 온 하늘이 아파 손수건을 꺼내다.
-노종래, 두고 온 하늘, 전수
‘두고 온 하늘’은 어디인가. 정겨운 고향 하늘이다.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래서 늘 눈에 삼삼 어린다. 고향 하늘 아래서 들판 산판을 뛰놀며 자란 시적 자아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는 24절기 중 열 번째 절기로 일사 시간과 일조량이 가장 많은 날이다. 그래서 농촌에서의 농작물들은 이 때 가장 많이 성장하고 뼈대를 키워 열매 맺을 준비를 튼튼히 한다. 농작물처럼 성장한 시적자아인 ‘나’는 다문다문 푸른 이끼 낀 바윗돌에 기대 앉아 산마루를 넘나드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어린 날의 동심 어린 꿈을 흰 구름에 실어 보내기도 하였는데 그런 고향에 정든 이웃들은 하나 둘 피폐한 농촌 생활을 접고 도시 생활을 위하여 대처로 떠나고 텅 빈 빈집만 덩그러니 남아 사립문도 열어놓은 채 방치되어 앞마당엔 풀싹이 돋아 자라고 ‘뻐꾹새 한번 울고도 초록빛만 남아’있다고 하여 쇠잔해진 고향산천에 대한 아쉬움을 표출하고 있다. 그 통에 이런 저런 생각은 끊일 줄 모르고 밤을 밝히던 ‘등불’마저 잦아들고, 사람 자취는 아득만 한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 작품은 그리움이 촉촉이 밴 일종의 사향시조(思鄕時調)이다.
좁다란 새장 안에
가둬두면 답답해서
일사철리 바삐 나는 하늘 위의 새들이
미문의 공간 안에서 틈새를 찾고 있다.
흔들린 나뭇가지
허공 속을 뻗어나가
흩어지던 소리는 바람으로 소요하고
맹금의 눈빛 속에서 움직임이 감지됐다.
아직도 살아남은
날지 못한 새들이
둥지가 좁아서 벗어남이 간절했는지
발 없이 귓속을 걸어 날개 없이 날아간다.
-류용곤, 소문, 전수
‘소문(所聞)’은 내용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로 주로 거짓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 말이다. 유언비어, 풍문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소문은 보이지 않는 소리이다. 이를 시인은 ‘새’로 환치하여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첫수에서 ‘새장’은 소문이 떠도는 정체된 공간의 의미로 쓰였다.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인데 이게 마치 거짓 없는 어떤 일인 양 둔갑하여 세상에 퍼져나간다. 그것도 아주 빨리 퍼져나가는데 어디까지 퍼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소문은 ‘미문의 공간 안에서 틈새를 찾고 있다.’고 첫수에서 표현한 듯하다. 둘째 수는 소문은 ‘흔들리는 나뭇가지’마냥 ‘허공 속을 뻗어나가’바람처럼 떠다니며 눈에 보이지 않게 퍼지는데, 맹금의 눈빛은 이를 감지한다고 하고 있다. 글쎄 맹금은 눈빛으로 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지. 문학적인 묘사이기에 가능성이 있을 수 있겠다. 끝수에서는 채 들키지 않은 헛된 소문(=날지 못하는 새)이 퍼져나가서 귓속에 속닥거림을 표현하고 있다. 소문은 누가 퍼뜨리나. 의도가 밝지 못한 이들의 속셈이 이를 키우고 재생산하는 것은 아닐까. 대개의 경우 소문은 소문을 낳아 처음의 소문은 간데없고 재생산된 소문들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 엉뚱한 결과를 낳는 경우가 허다하다. ‘누가 아프대.’하는 소문이 돌아다니다 보면 ‘누가 죽었대.’로 끝나는 일도 다반사이다.
아홉 배미 다랑이 논 물려받은 죄 값에
이왕지사 살 거라면 잘 살아야 한다면서
논 갈고 써레질 치며 물꼬 트던 아버지.
앙금진 물이랑에 내 얼굴 비쳐질 때
그믐달 걸린 저녁 먼 저승 당신 모습
하늘의 눈물까지도 다 받아 삼키시고,
해거름 무논배미 명경 속의 산 그림자
눈물 없는 한 세상은 여기에나 있을까요
그 이승 담사리 새는 이슬 밟고 웁니다.
-문주환, 전라도 가는 길, 전수
문주환 시인은 해남을 밝히는 등대 같은 시인인데 이 작품은 그가 읊은 일종의 사부곡(思父曲)이다. ‘천수답’이란 부제가 붙었는데 이는 아버지가 짓던 ‘아홉 배미 다랑이 논’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짓기 어려운 논인데 이를 일궈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첫수에 배치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물 앙금 진 그 천수답 물이랑에 시적자아의 얼굴이 비쳐질 때 그믐달 걸린 저녁 무렵 먼 길 떠나신 아버지 모습이 거기에 오버 랩 되어 나타난다. 그 모습에선 하늘도 안타까워 흘리는 눈물을 받아 삼키시는 아버지 모습이 보인다. 셋째 수는 물 걱정 없는 무논배미 맑은 물속에 비치는 산 그림자가 편안하고 그윽하다. 아버지는 눈물의 세상을 사셨는데 눈물 없는 세상이 여기 펼쳐져 있다. 어쩌면 아버지가 담사리 새가 되어 순수 자연인 이슬을 밟고 올 듯도 하다.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이 간절하게 비쳐져 있다.
그리움 아라리오
꽃으로 피어나면
그대로 심어두어
울음으로 불러내리.
벽오동 바람 잔등에 미움으로 지워내리.
만개 파도 춤을 쉬고
억수 바람 숨 멎은 날
구천의 소리 내려와
인간 속에 숨어들 적
옹달샘 천만리 길에 구름 실어 보내리.
-박길중, 젓대소리, 전수
아주 리드미컬한 작품이다. 읽어보면 저절로 흥취가 솟구친다. ‘아라리오’는 전통 민요 아리랑에서 나온 말로 ‘아프오, 아리오.’의 음률어라 한다. 그래 그런지 작품 속에는 슬픔과 아픔이 배어 있지만 겉 표현은 흥취를 돋워주고 있다. 첫수는 젓대소리가 ‘그리움 아라리오’를 연주하니 그것이 아름다운 꽃이 되고 있다. 그 꽃을 그리움이 밴 채로 심어두어 그 속에 숨은 음률을 불러내 벽오동에 부는 바람의 잔등에 마음을 실어 슬픔 아픔을 미움으로 지워 내리라 하고 있다. 벽오동은 봉황이 와서 깃드는 신성한 나무로 알려졌으니 아마도 이 위에 부는 바람도 미움도 신비를 품고 있으리라. 그래서 그 신비한 기운으로 편안을 얻고 싶은 마음이 속 깊이 배어 있다. 둘째 수는 세상의 희로애락이 다 멎는 날, 구만리 장천 신의 소리가 인간의 가슴에 스며들 제 생명의 샘인 옹달샘 머나먼 길에 젓대에 구천의 소리를 실어 보내려 하니 처량하고 애달픈 젓대소리는 어딘가 쓸쓸하고 애절하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 젓대소리는 어쩌면 우리 인간의 고단한 삶을 내포하고 있는 애달픈 마음이 아닐는지.
오색의 갈바람이 풀어놓은 호수에
두 마리 청둥오리 상형으로 띄운 시어詩語
자연의 수수께끼를 끙끙대며 풀어본다.
저편의 마음 하나 줌(Zoom)으로 잡아당겨
불편한 내 마음도 물빛에 비춰보니
물속은 저리 깊은데 한 뼘만도 못한 깊이
흔들린 나무래야 뿌리 깊게 내리다기
윤슬로 출렁인 길 피하지도 못할 바엔
중심도 내려놓고서 푸른 웃음 새기자.
-박봉주, 출렁다리를 걸으며∙158, 전수
가을바람은 산과 들을 오색으로 물들인다. 지은이가 논산 탑정호에 설치된 출렁다리를 거닐며 느낀 느낌을 시화(詩化)하여 보여주고 있다. 첫수 초장은 호수 물속에 비친 갈바람이 변색시킨 가을 물든 오색의 산천 모습이고, 중장은 물 위를 떠도는 청둥오리 모습을 ‘시어(詩語)’라고 은유하여 여유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오색의 자연’ ‘시어가 된 청둥오리’이는 자연이 빚어낸 수수께끼이다. 시적자아는 이를 풀어내보고자 끙끙대고 있다. 그래서 이를 풀고자 둘째 수에서는 더 자세히 보아 자연의 마음을 알아내려 카메라 줌(Zoom)을 당겨서 자연의 마음을 비춰보았지만 자연의 마음을 알 길이 없고, 시적 자아인 내 마음을 그 물속에 비춰보니 물속 자연은 너무 깊어 알 길 없고 내 마음을 비친 물속은 한 뼘도 못 되게 비춰보였다. 자연의 심오함과 시적자아와 함께 인간들의 얄팍함을 대비시켜 표현하였다. 셋째 수는 조금은 흔들리며 사는 나무가 생명을 뿌리를 깊게 내린다고 하여 이 작품의 시적자아도 뿌리 깊은 나무 같은 존재가 되고파 반짝여 출렁이는 잔물결처럼 흔들려 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그냥 마음을 내려놓고 희망 섞인 삶을 향해 푸른 웃음을 새기며 살고자 함을 표현하고 있다. 무한 깊이의 자연 앞에 깊이 없는 인간의 삶을 대비시켜 표현함으로써 자연의 위대함을 보여주고자 한 작품이다. 박봉주 시인은 이 작품과 함께 발표한 ‘봉주르의 사랑시’를 연작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랑시인이다. 그 사랑시들은 시어가 평이(平易)할 뿐 아니라 내용도 인간적이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정겨운 시작들이다.
요새를 지켜내다 초개 같이 스러진 몸
한 줌 재로 사함 받은 편안의 안식이다.
툭! 떨군
어린병사 목
저 붉디붉은 주검들
-박희옥, 백련사 동백, 지다, 전수
백련사는 전국에 서너 곳이 있는데 이 시조 제목을 보니 동백꽃의 명소인 전라남도 강진에 위치한 고찰(古刹), 백련사로 그곳에서 만개하였다 지는 동백꽃을 형상화한 단시조 작품이다. 초장에서 ‘요새를 지켜내다 초개 같이 스러진 몸’이라고 하였는데, 요새(要塞)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시설물을 방어하는 시설이다. 동백 숲에 핀 꽃들을 백련사를 지키는 요새의 군사들로 보고 쓴 작품이다. 동백꽃들이 지는 것이 백련사를 지키다가 스스로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고 스러져버린 희생의 상징물로 보고 있다. 중장은 이렇게 스러진 동백꽃들을 다비(茶毘)한 것일까. 꽃들이 한 줌 재가 되어 스러져 임무를 다하지 못한 죄를 용서 받고 편안한 안식에 들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종장에서는 동백꽃이 지는 것을 ‘툭! 떨군’이라고 돌올하고 감각적으로 표현하여 시적 감흥을 고조시키고 있다. ‘어린병사’인 동백꽃의 꽃잎들은 단심(丹心)을 지닌 ‘붉디붉은 주검’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 있다. 의인적 수법이 돋보이는 시조로 ‘요새’ ‘초개 같이 스러진 몸’ ‘어린병사 목’등의 새뜻하고 장엄한 비유로 문학적 기능을 강화하여 표현한 단출한 현대시조이다.
청동기의 푸른 하늘 만 삼천 빗금 긋고
동심원 백여 개에 여덟 가지 원을 지어
삼천 년 긴긴 세월을 다 닦아낸 놋쇠거울
그 얼굴에 비쳐오는 번뇌며 물결이랑
천만 가지 죄업들이 그림자로 오고가도
동그란 마음에 묻어 그냥 말을 잃었다.
살아온 많은 날에 닳고 닳은 흔적으로
가슴에 새긴 원은 깊고 깊은 강이 되고
지금 막 반달 하나가 비쭉 솟아 떠오른다.
-백승수, 다뉴세문경, 전수
시인이 작년에 상재(上梓)한 시조집 「윤슬에 대하여」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다뉴세문경은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구리거울이다. 불가사의한 잔물결이 오묘하게 파동치고 있어 “잔물결 거울”이라고도 한다. 이런 신비로운 거울을 묘파한 작품으로 첫수에서는 거울의 생김새와 역사성을 표현하고, 둘째 수에서는 그 거울에 비쳤을 숱한 세월과 그 거울을 사용한 이들의 번뇌가 물결을 이루고 수천수만 가지 인간들이 저지른 죄업이 그 아득한 세월 속에 그림자로 오가더라도 다뉴세문경 거울 속에 모두를 포용하는 ‘동그란 마음’속에 묻혀 있어 그 감동에 말을 잃었다고 하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인간의 삶의 역사가 반질반질 닳아 흔적으로 남았는데 그 흔적을 가슴 속에 새긴 원은 깊은 강이 되고, 거기에서 하나의 희망의 달이 ‘삐쭉 솟아’오른다고 하고 있다. 인간 세업의 영원성이 현현하게 나타나 있다. 청동기 동경인 다뉴세문경을 통하여 아득한 역사와 인류문명의 흔적을 가슴에 새기고 이를 느끼는 모습을 의미 깊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파악된다. 비유들이 겉으로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작품 속에 시적의미가 잔잔한 비유로 숨어 있는 작품이다.
지게는 사막이다. 물 건너 입양까지
아버지 등에 업혀 보육원 앞 세워놓고
곧, 오마! 얼룩진 상흔 몇 마디로 끊긴 꿈길
바람 세찬 낯선 풍경 그을린 얼굴에다
황량한 모래 바람 고래등짐 보내놓던
복사꽃 활짝 핀 산하 오랜 기억 수평선.
아직도 찾지 못한 싹둑 자른 화인 한 점
증표라곤 이름표에 코 묻은 수건 한 장
아리랑 고샅길마다
푯말 없는 늦가을.
아흐레 순례조차 길 잃고 미아 되는
얽히고설킨 설움 발채에 퍼 담아서
내 자란 가지마다
푸른 꿈 부려놓고 싶다.
-서문기, 몽유도원도, 전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1447년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의 꿈을 꾸었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3일 만에 꿈속의 낙원을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바탕으로 하여 산수화로 그려놓은 걸작이라고 한다. 현재는 일본 덴리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어떤 경로로, 어떻게 반출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이것을 용산 국립박물관에서 9일간 전시했다고 하는데 시인이 그 때 본 이 그림을 시조로 표현한 것이다. 도원의 세계는 이상세계로 현실에선 볼 수 없는 미지의 미혹(迷惑)의 세계이다. 현실 속에서 현실적 사고를 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입장에선 낯선 세계이다. 첫수는 사막 같은 일본 땅으로 건너가 일본 도서관에 들어갔음을 마치 입양 간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일본 땅에 갈 때는 곧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알 수 없는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그냥 주저앉아 있게 되었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둘째 수는 세파에 시달려 못쓸 모양이 되어버린 몽유도원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래도 거기에 담긴 복사꽃 피는 무릉도원의 모습은 변하지 않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이 처한 환경과 그림이 품고 있는 내용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셋째 수는 왜 우리의 문화재가 이렇게 되었지 그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 것이란 증표는 몽유도원기라는 이름표가 고작이기에 우리의 한 맺힌 마음은 풀길이 없음을 ‘아리랑 고샅길마다 푯말 없는 늦가을’이라고 하여 찾아올 세월이 자꾸만 저물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넷째 수는 일본에서 가져다 임시로 짧은 기간 전시하고 돌려주는 아쉬움을 말하며, 이 그림은 우리민족의 얼이기에 갖가지 설움과 감정이 뒤섞여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그림 속에는 우리의 산천이 깃들여 있는 우리의 유산이기에 이를 찾을 푸른 꿈을 펼쳐 부려놓고 싶다고 하는 소망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효도의 짙은 향기
잡힌다. 물씬물씬
아낙네 수줍음이 사립문 서성댄다.
티 없는 남루의 고요
돌부처를 닮는다.
흰옷으로 살아온
아름다운 그림자들
이끼 낀 골목마다 숨어서 손짓한다.
하늘을 담고 키워온
뿌리가 튼튼하다.
-신강우, 한옥마을, 전수
함양 개평 한옥마을을 두고 쓴 작품인데 한옥마을하면 우선 우리는 고즈넉한 조상의 냄새와 민족의 바른 예절이 꽃 피는 곳으로 인식된다. 우리 민족의 예절의 첫째는 ‘효(孝)’이다. 요즘은 신문물과 함께 이의 실종을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리 민족 가슴 깊이에는 이 효 문화 정신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신 시인도 작품 첫머리에 ‘효도의 짙은 향기/ 잡힌다. 물씬물씬’이라고 시상을 열고 있다. 정숙한 아낙네들은 담 밖을 나들지 않기에 ‘수줍음 사립문 서성댄다.’고 하여 여인의 조신한 몸가짐을 표현하면서 지금은 이 효가 남루하게 고요 속에 파묻혀 돌부처처럼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첫수에서 표현하고, 둘째 수에서는 백의민족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인 효 문화가 오랜 자취를 보여주는 이 한옥마을 골목골목에 숨어서 보여주고 있음을 묘사하여 하늘의 뜻을 담아 키우며 살아온 우리 삶의 튼튼한 근원지임을 표현하고 있다. 한옥마을하면 고리타분한 향취가 나 첨단을 가고 있는 현실과는 동떨어져 본디 한옥마을이 품고 있는 고유 정서와 혼을 무시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런 마을에 담긴 효정신이 바로 우리 삶의 뿌리임을 우리는 자각해야 하겠다.
제 몫 다한 마스크 미련 없이 버려졌다.
산으로 때로는 강물을 따라나선
갈매기 발이 묶인 채 해변을 서성인다.
거북이 목에 건 질긴 인연의 끈은
방역도 생활도 아닌 그냥 나쁜.
마스크 그들은 원치 않는 족쇄 같은 뭐 그런
-양점숙, 마스크의 용도, 전수
코로나 시대의 또 다른 폐해를 표현하고 있는 현실 참여적 시조이다. 마스크는 코로나 시국의 필수 용품이 되고 있다. 코로나가 오미크론이니 뭐니 하는 변이들이 기승을 부리는 통에 2〜3차 예방접종을 하였는데도 그 번지는 속도는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는 것 같다. 매일 뉴스의 중심은 이것이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마스크를 쓰고 살다보니 몇 번 쓰고 나면 폐품이 되어 버려지는데 이를 바르게 처리하지 않고 함부로 아무데나 내동댕이쳐 길거리, 집주변, 산천 어디에나 버려지기 때문에 이것이 바람에, 날아다니고 빗물에 떠내려가 하천, 강물, 바다에 흘러 다니다보니 새나 짐승들의 발목에 감기고, 고기들의 목에 감겨 목을 조이고, 더러는 이를 삼키는 바다의 큰 고기들도 있어 수많은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그 모습을 이 작품 첫수에서 펼쳐 보이고 있다. 둘째 수는 인간에게는 필수품이지만 거북이 같은 동물에게는 인간과 더불어 같은 공간에 사는 인연으로 그들의 삶과는 무관하게 벌어진 일 때문에 ‘그냥 나쁜’ 것으로 인식되는 마스크 쓰는 일은 동물의 입장에서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이것이 그들 삶과 생명의 족쇄가 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폐해는 인간이 저지르는 일종의 만행이다. 하루 빨리 코로나 현상이 종식되어 인간도 동식물도 폐해를 걱정하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기다려본다.
꽃차를 익힌 터라 기다린 가을인데
산골짝 물소리에 산국이 화답하여
노오란 언덕배기가
그림처럼 곱습니다.
마알간 계곡물에 헹구어낸 산국 꽃잎
아홉 번 덖는 사이 가을도 함께 덖여
햇살이 내려다보고
끼워 달라 보챕니다.
뜨거운 찻잔 속에 피어난 산국 꽃잎
내가 나를 공양하듯 두 손에 받쳐 들면
추정(秋情)에 취한 여심(女心)은
산국 되어 웃습니다.
-윤미정, 산국차, 전수
정원은 계절마다 각양각색 꽃이 피니
향수(鄕愁)에 꽃을 덖어 가두는 색과 향기
식혔다 또 데우다 보면 향기 물씬 일겠네.
절정의 고온에서 꽃향기를 잠재운다.
인내한 시간만큼 맑고 고운 맛을 내니
데워진 물먹은 꽃이 기지개를 펼친다.
꽃들의 무지개 색 우림의 정원에서
꽃 같은 사람들과 수다자리 꽃물 들어
서로의 향기를 마셔 아름다움 입는다.
-윤윤주, 꽃차 수업, 전수
위 두 작품 “산국차(山菊茶)”와 “꽃차 수업”은 그 제재가 꽃을 이용하여 차를 만들어내는 차(茶)라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꽃차를 만드는 과정이 나타나 있다. 꽃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단 꽃을 채취하여 잘 씻어 물기를 빼고 말린 다음 꽃잎을 겹겹 재웠다가 이를 끓는 물에 넣어 다려서 마시도록 하고 있다. “산국차”는 언덕배기에 가을을 맞아 곱게 핀 산국화가 물소리가 어울려 있는데 이를 따서 계곡물에 헹구어내 아홉 번을 덖으니(물을 더하지 않고 그대로 볶아 타지 않을 정도로 익히니) 가을도 함께 덖어져서 가을 냄새가 나는데 그 모습이 좋아보였는지 햇살도 그 꽃차에 끼워달라고 한다고 하여 자연과 합일됨을 표현하고 있다. 셋째 수는 찻잔에 띄운 산국 꽃잎을 받쳐 들고 마시니 가을 정취가 여자의 마음을 취하게 한다고 하여 산국화차와 물아일체가 되는 경지를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꽃차 수업”은 각양각색의 꽃잎을 따 이에 고향 냄새를 입혀 덖어 색과 향기가 어울리게 식히고 데우기를 반복하고, 생경한 꽃냄새를 고온에서 잠재워 특유의 고운 냄새와 맛을 내니 찻잔 속에서 물먹은 꽃향기가 물씬 풍긴다. 꽃들이 무지개 색으로 핀 우림 정원에 앉아 꽃 같이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과 수다를 떨며 꽃차 향을 즐기니, 가슴속에 아름다운 마음이 샘솟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다만 앞뒤 수에서 다른 점은 만들어지는 모습으로 앞엣것은 하나의 꽃을 덖어 만드는데 뒤엣것은 여러 가지 색색 꽃의 각기 고유한 향을 섞어 이를 덖어 만드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산국차는 산국 향의 고유(固有) 향차(香茶)이지만, 꽃차 수업의 꽃차는 복합(複合) 향차(香茶)라 하겠다.
걷기 전엔 몰랐다.
걸어가면 길이 됨을
주춤대고 망설이다
어쭙잖게 자로 재다
끝내는
지레 겁먹고
주저앉고 말았다.
길을 길로 이어지고
길이 길을 열어가는
그 뻔한 이치가 뵈는
이순 지난 갈림길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툰 걸음 다시 내딛다.
-윤현자, 다시 길을 나서다, 전수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보이는 길, 보이지 않는 길이 있고, 그 종류도 수만 가지는 될 성싶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길은 교통수단으로써의 길이다. 그러나 도덕의 길, 지혜의 길, 삶의 길 등도 있다. 세상에 사통팔달로 뻗어나가 열리고 이어지는 우리 눈에 보이는 지구상의 길이 구상적 길이라면,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과 정신으로 구분되는 길은 추상적인 길이다. 이 작품은 이 두 가지 추상과 구상의 길을 아울러 표현하고 있다. 사람이 사는 동안 선택하여 가는 길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동소이한 길을 선택하여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미지의 길, 새로운 길은 낯설고, 실패의 위험도 도사리고 있어 그 선택을 꺼린다. 그러나 사회를 선도하는 이들은 늘 새로운 길을 쉼 없이 개척하여 새 세상을 연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일은 미래를 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의 시적화자는 전자에 가까운 것 같다. ‘걷기 전엔 몰랐다.’로 작품 첫머리를 열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길, 일상에서 벗어난 길을 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새 길을 가려고 하다가 ‘주저앉고 말았다.’포기했다는 의미이다. ‘이순(耳順)’이면 세상 이치를 귀로 들어 이를 이해하고 이를 수용할 수 있는 나이라는 뜻이다. 지은이는 이때가 되어서야 길은 길로 이어지고 열려가는 것임을 깨닫고 천천히 그 길을 실천해 나가고 싶다고 하고 있다. 세상 이치를 터득하고 이에 알맞은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작품이다. 지은이가 같이 발표한 “혀의 변명”은 도덕, 지혜의 추상적인 길에 속한다. 이 길은 반성을 동반하기 일쑤이다.
치매 초기 구순 엄니
오늘이 추석이냐?
모처럼 간 아들에게
가슴 찌른 한마디
흰모시 뒤덮인 세월
너무 멀어 애달프다.
-이건영, 엄니 세월, 전수
‘치매’는 머릿속에서 기억의 해마와의 연결고리에 이상이 생겨 일정 기억이 상실되어 언어, 판단력이 퇴행되는 정신질환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먹어가면서 이를 겪는다고 한다. 빠른 이는 2, 30대에도 이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시인의 어머니는 구순이 되어 이 증상을 보이나 보다. 여기에 걸리면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를 지켜보는 주변인의 입장에선 난감하기 그지없다. 일부러 마음 벼르고 간 아들에게 ‘오늘이 추석이냐?’고 하여 자주 뵙지 못하고 추석 때나 들렸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여 불효를 저지른 것 같아 가슴 찢는 아픔을 맛보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옛날의 아름답고 곱던 시절의 어머니 모습은 간곳없고 흰모시 뒤덮인 듯한 백발의 어머니 모습에 세월을 탓하고 있다. 인생길을 자꾸 멀리 떠나려는 어머니 모습에 애달픔을 토로하고 있다. 부모님, 특히 어머님은 누구에게나 우주인데 그 우주가 쇠잔하여 가니 그 속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아픔의 끝없는 진동(震動)을 느끼게 된다. 시인은 그런 심경을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다. 종장 ‘흰모시 뒤덮인 세월/ 너무 멀어 애달프다.’는 참으로 멋들어진 절구로 이 작품의 핵이 되고 있다.
가만히 좀 있으면
뒤로 숨었다 하고
얼굴 좀 내보이면
자화자찬한다 하니
그런 난 어쩌란 건가
이걸 그냥 확
확 그냥.
얼떨결에 했지만
다시는 하나 봐라
역병까지 덮쳐 와서
이내 속을 썩이는 줄
저 달은 알기나 할까
인왕산 위
저 달은.
-이기라, 뿔날 만도 하겠다, 전수
남을 헐뜯는 일에 성이 난다고 하며 남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주고 있는 시조이다. 첫수는 칭찬과 수용, 이해하는 인간의 심성은 간곳없이 남의 일을 훼방하고 이를 시기질투 하는 모양새를 초, 중장에서 보여주고, 이에 대해 분노하는 원초적 감정을 종장에 배치하였다. ‘확 그냥’하며 뒤에 올 말을 생략하였는데 아마도‘때려버려!’ ‘죽어버려!’ 같은 격한 감정의 말이 숨어 있을 수 있겠다. 둘째 수는 세상살이를 서로 어울리며 살려고 ‘얼떨결에’스스로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행동을 하였는데 앞의 내용과 같은 일을 겪게 되니 이런 짓 다시는 안 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면서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편ㅎ지 않은데 역병까지 덮쳐와 ‘이내 속을 썩일 줄’몰랐는데 속을 무한 거북하게 썩이니 이를 저 인왕산 위에 뜬 달은 알기나 하느냐고 천지신명에게 자신의 심사를 하소연하여 위무(慰撫) 받고 싶은 심사(心思)를 표현하고 있다.
우네요. 우는군요.
양철 지붕 아래서
서러운 가슴 안고 구슬피 우시네요.
찔레꽃
하얗게 핀 밤
봄날은 간다고.
-이문균, 봄비, 전수
시적전개가 경쾌한 작품이다. 작품 속에 담긴 정서는 다분히 애상적이다. 봄비를 의인화하여 그 슬픔을 지닌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정서는 김소월의 “봄비” ‘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하는 애상적 시구에 보이듯이 애상적인 감흥이 있는데 이와 유사하다. 양철지붕에 빗방울이 뚝, 뚝, 뚝 떨어지는 소리를 울음소리로 환치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우는 봄비는 가슴 속에 서러움을 안고 있어 구슬피 운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봄은 3, 4, 5월이다. 그런데 찔레꽃은 5월에 핀다. 그래서 봄비는 ‘찔레꽃 하얗게 핀 밤’ 구슬픈 소리를 내며 ‘봄날은 간다고’가는 봄의 아쉬움과 서글픔을 표현하고 있다. 봄비를 통하여 인생의 흐름까지 유추하여 표현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런데 봄비는 구슬픈 것일까. 아니다. 봄비는 그냥 봄비이고, 그 소리 역시 자연의 음률이다. 봄비소리가 슬픈 것은 그것을 듣는 이의 마음이 그래서 그렇다.
환갑이 내년인 간판 없는 인생극장
고갯길 털털거리며 배달 가던 경운기
햇볕을
가득 싣고서
빈 점방을 지킨다.
-최현주, 점방, 전수
점방, 오랜만에 들어보는 정겨운 말이다. 1960〜70년대까지도 시골동네 입구에는 이것이 있었다. 점방은 작은 잡화 상가이다. 대개 전통 한옥의 어느 구석에 방을 차려놓고 여기서 시골 동네에서 흔히 사용하는 성냥, 양초, 과자, 국수묶음 등을 진열하여 놓고 파는 미니 상점이다. 지금은 교통이 발달과 시장의 모습이 바뀌어 사라지고 없어진 시골 동네 명물이다. 대개 나이 드신 할머니들이 먼지를 털며 지키던 상점이기에 동네에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이야기들이 여기에 있었고, 생활 이야기가 여기서 번져나갔다. 그래서 지은이도 이를 ‘인생극장’이라고 은유하여 표현한 듯하다. 젊은이는 다 떠나고 나이든 머리칼 흰 이들만 살다보니 생기는 잃어버리고 시골동네 점방은 폐쇄되어 그 흔적만 남아 있는데 그곳에 진열대 대신 낡은 경운기만 덩그러니 남아서 세월의 무상을 보여주면서 할 일 없이 햇살 아래 조는 듯 자는 듯 텅 빈 점방을 지키고 있다. 참으로 을씨년스럽게 먼지만 뒤집어쓰고 허물어질 듯이 있는 점방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Ⅲ.
시인은 늘 정신의 긴장 속에 산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의 숨소리를 듣고 그들의 생의 율동을 감지하여 이를 작품화하기에 한시도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애쓴다. 그래서 어쩌면 고단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순간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들을 감지하여 언어로 교환하는 재치를 발휘해야 한다. 시조는 균형미, 절제미를 가지고 표현하는 문학이다. 절제와 응축은 시조를 쓰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 이번 겨울 호에서 이런 작품들을 몇 편 붙잡아 읽으며 더없이 마음 든든하였다. 그러나 풀어져 좀 헐거운 작품들도 더러 있는 것 같았다. 짜임새 있는 작품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써본 이는 다 안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빛나는 작품을 많이 써서 우리 민족 얼이 실린 문학 장르로 우뚝 서는 계기를 많은 이들이 만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종장 첫 구절을 ‘〜의’형태로 소유격(속격)조사를 사용하여 쓴 이들이 이번 호에도 드문드문 보였는데 이렇게 되면 독립성이 요구되는 종장 첫 구가 둘째 구에 예속되어 그 기능을 상실하니 이런 형태의 시조 종구 쓰임은 시조를 쓸 때 피해야 할 것 같다. 될 수 있으면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을 연구해 보았으면 한다.(현대시조 2022 봄,여름,가을 합본 통권150호)
첫댓글 촌철살인의 계간평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매 호마다 작품 하나하나를 깊이 탐색하고 좋은 작픔을 골라 평해주시니 배우는 우리에게 큰 선물이 됩니다.
화려하게 꾸며 쓰는 평설이라기 보다는 자연스럽고 순수한 느낌 그대로 평하면서도 예리하게 짚어주시어
풀피리처럼 여운 있는 울림을 주십니다. 소중한 계간 평 잘 탐독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