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은이성지에서 미리내성지까지의 순례길(약13km)인,
김대건길을 다녀왔습니다. 재작년 버그네 순례길을 홀로 걸어본 경험이 있지만 이번 성지순례길은 또 다른
감동이었습니다. 그 중 저는 신부의 유해를 한강 새남터에서 수습하여 미리내로 모셔온 이민식 빈첸시오를 알게되어,
가슴이 먹먹하고 감동적인 그에 대한 기사를 공유하려 합니다.
사제를 꿈꾸던 17세 소년 이민식의 숨은 공덕 이민식(빈첸시오)
이민식(1829~1921) 빈첸시오
기골이 장대하고 기백과 용기가 뛰어나서 다른 성숙한 청년을 능가하는 용감한 청년이었던 그는 1829년 독실한 교우 집안인 함평 이씨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 역시 군란 때의 다른 교우들 가정이 다 그랬듯이 쫓겨 다니는 처지라 가정 형편은 말할 수 없이 가난하였고 공부도 많이 못 하였다. 남달리 신심이 깊었던 이민식은 김대건 신부님이 은이에서 전교 하실 때 30리나 되는 마을까지 밤낮으로 찾아가서 성사를 보고 신부님의 말씀을 듣기를 즐겨하였다. 김대건 신부님이 밤에 미리내에 오셔서 성사를 주고 그날 밤으로 가실 때에는 빈첸시오가 변함없이 길을 안내해서 영접해 오고 또 모셔다드렸다. 이렇게 이민식 빈첸시오는 김대건 신부님을 각별히 따랐고, 김대건 신부님의 어진 인품과 고결한 덕행에 많은 감화를 받았다. 신부님 또한 그의 강직하고 순박하면서도 신실한 수계범절(守戒範節) 칭찬하셨다고 한다.
사제가 되고 싶었던 이민식
김대건 신부님처럼 사제가 되어 천주님의 뜻을 전하고 싶었던 그는 나이 40세가 되도록 꿈을 접지 못하고 있다가 40세가 지나서 중국 마카오와 일본에까지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나 50세가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전보다 더 열심히 수계(守戒)하여 부감목 신부 밑에서 여러 해 동안 복사(신부님을 도와 미사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봉사하는 신부님의 시종역)를 했으며 서울 약현 본당 초대 정 신부를 도와드리는 등 교회 사업에 전념하여 당대나 후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평생 힘들다 말하지 않았고, 거룩하게 살아 모든 교우로부터 반은 성인이라 일컬어졌다. 1853년 2월 페레올 고 주교님이 서거하신 후 베르뇌 주교님의 분부로 페레올 주교님의 유해를 김대건 신부님 무덤 옆자리로 안장하게 되었을 때도 그는 앞장서서 주교님의 유해를 모셔다가 김대건 신부님 묘소 옆에 안장해 드렸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이장 경로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이장했던 미리내 북쪽 거문정이에 살았던 이민식(빈첸시오)는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그는 유체를 수습하기로 마음먹었다. 시체 수습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고, 새남터로 단숨에 달려갔다. 그러나 40일간 모래밭에 가매장(假埋葬)되어 있던 김대건 신부의 유체는 국사범인 관계로 군졸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이민식은 새남터 주막에 머물면서 그곳을 감시하던 포졸들의 동태를 한 달 넘게 살핀 것이다. 주모를 시켜 군졸들에게 막걸리와 술로 인심을 쓰면서 소홀해진 틈을 기다렸다. D-DAY 날, 독한 술을 마신 포졸들이 잠들어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재빠르게 유체를 옮겼고,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어내는 데 성공한다. 삼베에 곱게 싼 머리는 가슴에 안고 동체는 묶어 이불깃에 둘둘 싸맨 뒤 지게에 올렸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흑석동을 지나 동작동 뒷산을 타고 남태령을 넘어 청계산 골짜기로 내려오니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 어두워질 때까지 유체를 다래 덩굴에 숨겼다가 다시 길을 재촉하여 하우고개[鶴峴]를 돌아 묘론이 고개, 너덜(板橋)를 거쳐 태재(泰峴)에 이르니 용인 땅과 가까운 능골 앞산이었다. 끊임없이 묵주 기도를 바치며 밤을 틈타 유체를 옮기던 이민식은 용인 땅에 들어서서야 한숨을 돌렸다. 되도록 위험한 큰길을 버리고 참바대 고개를 넘어 태화산 기슭의 동점(銅店) 드렝이 고개를 거쳐 마침내 은이 마을에 도착하였다. 은이 마을에서 미리내까지는 신덕, 망덕, 애덕이라 불리는 험한 고개 셋 중 마지막 애덕 고개에서 날이 새는 바람에 유체를 콩밭에 숨겨 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해가 밝자 농부들이 가을걷이하느라 콩밭으로 오는 게 보였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는 마음 졸이며 천주님과 성모님께 제발 무사히 넘기기를 빌었다. 그런데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농부들이 되돌아가 김대건 신부의 유체를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다. 10월 26일 김 신부의 유체를 미리내에 있는 그의 선산에 모실 수가 있었다.
나라에서는 큰 죄인의 시신을 잃어버린지라 이를 훔쳐 간 자를 잡아주는 자에게는 벼 다섯 섬 즉, 10가마를 주겠노라고 방을 곳곳에 부쳤다. 그 때문에 이민식은 세상에 잘 나타나지 않고 김 신부 묘를 돌보며 미리내 성당을 건립하는 데 이바지했다. 오늘날에도 이민식 빈첸시오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며 한국 천주교 교리연구소에서 역사적인 인물로 인정할 뿐이다.
1901년 5월 21일 김대건 신부의 산소발굴 이민식(빈첸시오) 고증인
“세상이 좋아져서 우리 후손들이 종교의 자유를 얻으면 김 신부님의 유해를 찾으실 것 같아서”
광중(무덤의 구덩이)에 널판을 구해다가 톱으로 잘라서 7개를 엎어 놓았다. 널빤지 위에 조선회를 꼭꼭 다져 얹은 다음, 손가락으로<金海 金公 大建 神父之墓>획을 꼭꼭 눌러서 음각으로 글씨를 새기고 그 위에 고운 참숯 가루를 글자 획을 따라 넣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글자 하나하나를 꼭꼭 다진 다음 고운 흙으로 덮었다. 훗날 산소를 발굴할 때 글자가 일그러질까 봐서...세월이 흐르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뒤인 1901년 5월 21일. 김 신부님 시신을 모신 지 55년이 지났을 때 부주교 빅또르 뽀아넬 박 신부님을 위원장으로 플로리아노 드망즈 안세화 신부님이 그 비서로 내려와 묘를 발굴했다. 이민식(빈센시오) 고증인으로 호출되어 성경을 잡고 맹세한 뒤 김대건 신부님 시신을 옮긴 이야기며 묘소 만들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보고했다.
발굴하고 보니 흙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 널빤지가 조금 상했을 뿐, 55년이 지난 그날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었고, 널빤지를 드러내자 유해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유해는 하나도 상하지 않았고 칡넝쿨이 유해를 뺑 둘러 감아줘서 뼈 하나도 흩어지지 않았다.
“천주님이 칡넝쿨로 관을 해주셨나 봐“ 이민식(빈센시오)의 감개 어린 목소리였다.
김대건 신부 묘역을 아침저녁으로 보살피던 이민식은 그로부터 7년 후, 제3대 조선 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선종하자, 주교의 유언을 따른 교회의 결정으로 그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묘소의 옆자리에 안장하였다.
이민식(빈첸시오)은 고 우르술라 어머니도 김대건 신부의 묘소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모자간의 한을 위로하였다. 미리내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빈첸시오 자신도 92세에 세상을 뜨고,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묘역 곁에 묻혔다 평생 동정(童貞)으로 살면서 교회에 봉사해 오던 그는 1921년 12월9일 92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용인일보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