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천이 흐르는 이곳,
팔공산 산자락 중심자리
선현의 존령을 안장하다!
달성서씨 중심재 중건 및 시조묘역 사적
엮음 : 徐 寬 泰
편집.사진 : 徐 昌 虎
팔공산 명혈(明穴) 상중심 마을
팔공산 전체에서 가장 중심자리, 팔공산의 중심 용맥이 정상인 비로봉에서 낙타봉과 신림봉을 거쳐 남쪽으로 거침없이 내려와 자리잡은 모란반개형(牡丹半開形)의 명당에 달성서씨(達城徐氏) 구계(龜溪) 서침(徐沉) 선생의 묘소가 있고, 마을 중심부에 중심재(中心齋)가 있다. 대구 달성군 다사읍 문양리에 있는 시조공부터 4世까지의 단소(壇所)를 구계공 묘소 좌편으로 이전하였고, 중심재도 새로이 신축하였다.
1. 달서서씨 선조 5현 事蹟(사적)
1 - 1世 고려 봉익대부 판도판서 달성군 휘 진 事蹟(사적)
1) 達城君 晋 事蹟 家傳 | 달성군 진 사적 가전
縣監公派 辛巳譜(2001년) 首卷에서 옮김
우리나라의 서(徐)씨가 칠관이 있는데 달성이 그 하나이고, 그 중에 달성으로 보계(譜系)하는 자가 둘인데 서울에 있어서는 군기소윤(軍器少尹) 휘 한(閈)이요, 재향(在鄕)에서는 판도판서(版圖判書) 달성군 휘 진(晋)으로써 시조를 삼았다. 대개 판도공(版圖公)이 이 땅에 식읍(食邑)하였고 네 번 전하여 구계선생(龜溪先生)에 이르러서 세종조(世宗朝)가 선생이 살고 있는 터가 국가(國家)의 관방(關防)이라 하여 국가에 바치었는데 나라에서 상을 주기를 하였으나 이것을 사양하고 본읍(本邑) 상환곡을 석당오승(石當五升)씩 감(減)하게 하다.
구민이 그 은혜에 감복하여 구암서원에 향사하였다. 아, 지금으로부터 판도공(版圖公)은 칠백년 전이다. 세대가 멀고 문적이 증거가 없어 보책(譜冊)에 다만 고려 봉익대부(奉翊大夫)2 판도판서 달성군이라고 실렸을 뿐이고, 그 외에는 가고(可考)할 수 없으니 오직 공주(公州) 만성보(萬姓譜)2-1에 이르기를 판도판서2-2는 중랑장 한의 증손이요, 검교군(檢校軍) 기감(器監) 신(愼)의 손이요, 밀직(密直) 사사(司使) 무질(無疾)의 자요, 예의판서(禮儀判書) 진위(振威) 이자영(李自英)의 외손이라 하였다. 부인은 초계주씨(草溪周氏)인데 부에는 검교장군(檢校將軍) 치(穉)요, 조에 소부소감少府少監) 현(鉉)이요, 증조에 판군기사(判軍器事) 부(砆)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한 증거가 되나 그러나 선부노(先父老)께서 그 일을 신중히 여겨서 감히 상계(上系)에 올리지 못하였다. 여사(麗史)에 이르기를 신라(新羅) 아간대부(阿干大夫) 휘 신일(神逸)氏가 일찍이 포수에게 쫓겨 온 사슴을 감추어 준 일로 인하여 자손이 번성되었다고 한다. 지금 이천서씨(利川徐氏)의 시조인데 여러 사람들은 서씨는 다 아간(阿干)의 자손이라고 한다. 또 전하기를 판도공이 기자(箕子)의 사당에 배알(拜謁)하고 지으신 글이 있는데 이르기를 성교(聖敎)가 하늘같아 위대한지라, 아 짐짓 이 사당 제사를 동쪽에 모셨다. 군신부자(君臣父子)가 중하(中夏)를 같이 하였고, 예악시서(禮樂詩書)는 사이(四夷)에 미치었다. 천지간의 정은 다 내가 이었고 완효(頑囂)하여 불식(不識)함은 혼미(昏微)로 부터였네. 조선(朝鮮)의 근본이 상현(商賢)의 교화(敎化)에 있는데, 정사를 행하여 백성은 순박하니 실로 마땅한 바라 하였다. 야승(野乘)에 기록된 바가 이러한데 또한 적당한 증거는 없다. 춘추(春秋)의 예(例)에 의심은 의심으로 전하고 미더움은 미더움을 전하나니 그 비슷한 것을 어디서 의(疑)하고 신(信)하는 사이에도 가(可)히 그 의심(疑心)을 억측(臆測)하면서도 문득 꼭 믿는 것은 옳치 못하다. 마땅히 박고(博古)한 자를 기다려서 상고할 것이라. 유자(有子) 이인(二人)하니 장(長)엔 기준(奇俊)인데 구계선생의 증조부요, 차에 유(宥)요, 자(子) 고(翶)에 이르러 대가 절(絶)하였다. 찬(贊)해 가로대 조정(朝庭)에 벼슬을 하여 한 성(城)의 녹을 먹으니 그 덕(德)을 세워서 사업(事業)을 이룬 것을 알 것이요, 후손에게 복(福)을 주어 백세(百世)토록 번창하니 그 근원이 멀고 흐름이 긴 것을 알았도다. 하늘이 백성(百姓)을 낳으시고 우리 후인(後人)을 돈독케 하니 이지러지기도 아니하며 무너지기도 아니 할 것이니 오직 달성이 천억년(千億年)을 이에 징험(徵驗)할 지어다.
후손(後孫) 석화(錫華) [문집 십삼권중]
서석화(徐錫華 : 1860~1924 학유공파): 자는 중온(仲蘊) 호는 청석(淸石) 청송 마평, 서산 김흥락의 문인, 1896년 청송의병을 이끈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 서효원(徐孝源)의 아들인 서석화(1860~1924)는 정재 류치명(1777∼1861)으로 대표되는 정재 학맥의 학문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결속함과 동시에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선도적 위상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경설유편’(經說類編)을 편찬했다. 최근 경설유편 국역 편이 한국국학진흥원을 통해 재편되면서 그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 부인유사(夫人遺事)
高麗奉翊大夫版圖判書達城君夫人草溪周氏父檢校將軍穉祖小府少監鉉曾祖判軍器事砆
고려 봉익대부 판도판서이고 달성군이시다. 부인은 초계주씨 검교장군 치(穉)의 따님이고, 조에 소부소감 현(鉉)이요, 증조에 판군기사 부(砆)이시다.
▶ 대구부지(大丘府誌)
徐晋高麗奉翊大夫版圖判書封達城君
서진(徐晋)은 고려 봉익대부 판도판서 달성군에 봉하였다.
공이 보의장군(保義將軍)으로서 대동강(大同江) 뱃놀이 때 지어읊은 시 「대동강(大同江) 부벽루(浮碧樓)가 한 폭의 그림인데 〈도장구(倒裝句)〉생가(笙歌)에 취(醉)코 묻혀서 오래 못 돌아와 함께 노는 사람들아 나를 장군(將軍)으로 보지 말아라. 이내 이래봬도 경연(經筵)의 검토관(檢討官)일세.」 봉명사(奉命使) 선원공(仙源公) 김상용(金尙容)3-1이 서장군(徐將軍) 묘(墓) 앞을 지나다보고 느낀 것을 지은 시 「소슬한 백양(白楊)나무 바람에 우지지니 지난 날을 슬퍼하는 길손의 한(恨)이 무궁하구나. 장사(壯士)가 묻힌 저 무덤이 몇 백년(百年)인고 황초(荒草)에 쌓인 비(碑) 삼척(三尺)인데 서공(徐公)이라 새겨져 있다. 현우(賢愚)와 귀천(貴賤)이 돌아가는 길 같고 얻고 잃고 슬퍼하고 즐기던 것이 도시(都是) 간데 없구려. 오직 돌 비늘만 벗겨지지 않았을 뿐, 이제는 석양(夕陽) 속에 말없이 누워 있구려.」
1983년 묘단비 이병도(李秉燾) 撰, 최병찬(崔秉瓚) 書 ]
2 - 2世 고려 추봉 문하시중 찬성사 달천군 휘 기준 事蹟(사적)
1) 達川君 奇俊 事蹟 行略 | 달천군 기준 사적 행략
縣監公派 辛巳譜(2001년) 首卷에서 옮김
공의 휘는 기준(奇俊)이니 고려 판도판서 달성군 휘 진의 장남(長男)이며 벼슬은 승봉랑(承奉郎)도관좌랑(都官佐郞)이요, 공주(公州) 만성보(萬姓譜)에 이르되 도관좌랑(都官佐郞)은 밀직사사(密直司使)였는데 아들 노남선생(櫓南先生)의 휘 영(穎)이 귀하게 되었으니 은전(恩典)을 받게 되어 위로 공에게 문하시중(門下侍中) 찬성사(贊成事)에 달천군(達川君)을 추봉(追封)한 것이다. 대개 노남공(櫓南公)이 전형(典型)을 이어 지키어 가성(家聲)을 크게 천명(闡明)하였다. 이 분이 휘 균형(鈞衡)을 낳으니 호를 학암(鶴巖)이라 하며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요, 시호(諡號)는 정평(貞平)이라 받았으며 부자(父子)분이 함께 옥계서원에 배향되었다. 공이 휘 침(沉)을 낳으니 호는 구계(龜溪)며 벼슬은 전의소감(典醫少監)으로 균전제처사(均田制處使)였으며 구암서원에 제향하였다. 삼대(三代)의 훈업(勳業)이 국사(國史)에 실렸으며 사림(士林)에서 제사(祭祀)를 받들게 되었고 자손이 번성하여 나라안 방방곡곡에 널리 퍼져서 완연(宛然)이 거족(巨族)으로 일컫게 되었다. 이것은 공의 넉넉하게 드리운 음덕(蔭德)이 아닐 수 없으며 장래(將來)의 후손에 식록(食祿)으로 갚았으니 그 두터이 쌓인 발로(發露)를 빛내었을 뿐이라. 아름다운 업적(業績)을 자세히 고증(考證)할 수는 없으나 또 뭐 깊이 한(恨)될 것이랴. 부인(夫人)은 만경노씨(萬頃盧氏)에 언부의랑(讞部議郞) 도염서령(都染署令)인 종복(宗福)의 따님이요, 봉상대부(奉尙大夫) 삼사부사(三司副使)인 린(璘)의 손녀(孫女)며 도감판관(都監判官)인 상귀(尙貴)의 증손녀이니 만성보(萬姓譜)에 또 이렇다 하였다.
후손(後孫) 석화(錫華)
서석화(徐錫華 : 1860~1924 학유공파): 자는 중온(仲蘊) 호는 청석(淸石) 청송 마평, 서산 김흥락의 문인, 1896년 청송의병을 이끈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 서효원(徐孝源)의 아들인 서석화(1860~1924)는 정재 류치명(1777∼1861)으로 대표되는 정재 학맥의 학문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결속함과 동시에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선도적 위상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경설유편’(經說類編)을 편찬했다. 최근 경설유편 국역 편이 한국국학진흥원을 통해 재편되면서 그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 대구부지(大丘府誌)
徐奇俊承奉郞門下侍中贊成事達川君
서기준은 승봉랑, 문하시중 찬성사 달천군이시다.
3 - 3世 고려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찬성사 달성군 충정공 휘 영 事蹟(사적)
1) 達城君 忠靖公 神道碑銘 | 달성군 충정공 신도비명
대구 서쪽 하빈현의 남쪽 봉계산(달성군 다사읍 문양리) 임좌원(남향 두던)에 능과 같은 봉분이 있는데 실은 고려중대광금자광록대부에 문하시시중찬성사인 충정(忠靖)공 달성군 노남(櫓南)서선생 휘 영(穎 : 1315 ~ )의 묘소이다. 선생은 천도에 공이 있어 달성군으로 봉하여졌는데 할아버지이신 판도판서 휘 진(晋)이 달성군(達城君)이시고, 아버지이신 도관좌랑 휘 기준(奇俊)은 문하시중찬성사로 달천군이시니 삼세를 연이어 군(君)으로 봉(封)해지다. 어머니는 만경노씨로 언부의랑도염서령(讞部議郞都染署令)이신 휘 종복(宗福)의 따님이시고 배는 익양군부인(益陽郡夫人)이씨이니 승동정 경안공 휘 영유(永儒)의 따님이시다. 아들 균형(鈞衡)을 낳으니 호를 학암(鶴巖)이라 하고 직제학 이부상서를 역임하고 순충논도좌명공신상의문하시중찬성사(純忠論道佐命功臣商議門下贊成事)를 추증받고 졸하시니 시호는 정평(貞平)이시고 양세를 다 함께 옥계서원에 봉향하였다. 정평공이 세 아들을 낳으니 맏이에 휘 침(沉)이고 호는 구계(龜溪)이며 정포은선생에게 배웠으며 벼슬은 전의소감(典醫少監)과 삼남균전제처사(三南均田制處使)이시다. 세거지인 달성(達城)은 신라(新羅)의 현성이었는데, 우리 조선 세종 때에 그 터를 바꾸도록 명하고 대신 대대로 녹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공은 이를 사양하고 적모를 매석 당 5되(1/3)를 감하여 주도록 청하여 본읍의 백성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게 하여 구암서원에 배향하게 되었다. 다음(2子)에 휘 습(漝)은 문과 송화현감이시고 그 다음(3子)으로 휘 환(渙)은 문과 낭장이시다. 소감(龜溪 沉)이 세 아들을 낳으니 맏이는 휘 문한(文翰)이고 호는 쌍죽당이며 광흥창부승이고 다음(2子)으로 휘 문간(文幹)은 문과 통정 현감이고 그 다음(3子)은 휘 문덕(文德)으로 호는 무우당(無憂堂)이고 문과에 이조정랑과 만경현감을 역임하였는데, 중부 습(漝)의 후로 출계하였고 낭장(諱 渙)이 아들 한 명을 낳으니 휘가 세주(世柱)이고 벼슬은 우윤이다. 광흥부승(諱 文翰)이 제(濟), 도(渡), 섭(涉) 세 아들을 두었고, 통정현감(휘 文幹)은 아들 한 명을 낳으니 근중(近中)이다. 만경현감(휘 文德)은 석련(錫蓮), 석명(錫蓂), 석령(錫笭) 세 아들을 두었고 우윤(右尹: 世柱)은 종일(宗一), 종오(宗五) 두 아들을 두었다. 제(濟)는 음사(蔭仕)로 하양현감, 도(渡)는 성균관권지학유, 섭(涉)은 자헌대부이조판서, 근중(近中)은 사헌부감찰, 석련(錫蓮)은 진사, 석명(錫蓂)은 생원, 석령(錫笭)은 진사, 종일(宗一) 참판, 종오(宗五)는 현감으로 8파로 나뉘어지니 국중의 대족이 되다. 이것이 가계의 대략이며 이하에 또한 허다하며 문무훈벌이 여러 대에 그런대로의 이음이라 가히 다 열거할 수가 없다. 선생의 세대가 지금으로부터 이미 요원하여 달리 기술한 사장은 없으나 국야사 여러 곳에 나타나 있으니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에 이르기를 공은 일찍 문원에서 인재를 장려하여 끌어 올렸고 문장훈업으로 세상에 출중하였다하고 여조명신록(麗朝名臣錄)에는 문하시중찬성사로 달성군에 봉하여 문형을 맡았다고 하며 고려사 세가에는 천도한 공훈으로 달성군에 봉하였다고 하고 고려 때 대구읍지 인물부의 관직부 명부에는 문과로 벼슬이 문하시중 달성군이며 일찍이 문원에 있었고 인재를 장진하였다고 하고 대구읍지 고적조에는 달성은 본래 신라의 현성이었는데 고려 때 서씨가 살며 서진, 서기준, 서영이 세습하여 봉군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 사적의 대개이다. 공이 이미 문형으로서 인재를 장진하셨음은 그 학문과 문장이 성함을 능히 알 수 있으나 그의 가훈과 미훈이 세상에 무전함은 참으로 한이 되는 바이다. 그러나 군자론 불후이라 먼저 덕을 세우고 공을 세운 연후에 끝으로 그에 붙여 입언함이니 말의 유무가 족히 경중을 가릴바 아니다. 다만 공의 체백을 감춘 곳이 중세에 이르러 시비를 가리기 어려웠으니 구보에 이르기를 묘는 대구 하빈현 남 봉계산 임자원이라 하였고 그 아래에 사는 사람이 지금도 서능곡이라고 상전하니 능이라 함은 그 규모와 크기가 사서의 묘와 다르며 공은 봉군인즉 능이라함이 용혹(容惑;혹시 그럴수도 있음) 있을수도 있으며 전함이 또한 이미 오랜지라 곡명이 됨도 의심할 바 없고 임좌의 두던에는 지금도 공의 묘 외에는 흙 한덩어리의 묘도 없음은 즉 가히 더욱 징후의 믿음이 되는지라. 지난 철종 무오(1858년)에 설단하고 제사 지냄은 묘지석이나 묘갈의 분명한 징험이 나오지 않은 채 연의는 그대로 전하려는 뜻에서 행함이니 이 사적이 단비에 상세히 실려있다. 지금 공의 제후손이 이미 선배가 행해온 그대로 마땅히 수행할 것이나 그 실제(實際)를 궁구하면 선배가 이같이 한 일은 다만 하나의 징신이 없음과 또한 신중한 도리를 따름이리라. 오늘에 족히 징신할 것이 세가지 있으니 하나인 즉 구보에 실린바가 이와 같음이고 또 하나는 곡 이름이 상전함이 이와 같음이며 또 하나인 즉 타의 묘와 서로 혼동(混同)됨이 없음이 또한 이같이 믿을수 있는 징신이 삼종(三種)있으나 오히려 연의를 둔다는 것은 더욱 미안(未安)하므로 드디어 숭비를 신도에 세우려 함에 진하, 정찬, 익수, 종경 여러 종인이 종족의 의논에 따라 현각할 글을 규철에게 촉탁하니 돌이켜 본 바 사람됨이 미약하고 글이 졸렬하여 이 소임을 감당할 바 아니나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그 장에 의거하여 서하고 이어 명으로 이르노니, 서씨가 달성에 복지(卜地)함이 선생으로부터 비롯하고 은택이 부조에 이르렀다. 높은 벼슬이 대대로 이었으며 문원에 있어 인재를 성취하였고 강도에 호종해 따름이 많아 종묘와 사직을 편안케 하였는지라 진실로 문이 있고 진실로 무가 있어 나라에 주석이며 간성이니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근심걱정 생사애락을 같이 하다. 세대가 멀고 창상이 변함에 그 분묘를 오랫동안 확신치 못하였으나 오늘의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갈심탄성으로 광대의 연의는 구름같이 사라지며 안개 개인 듯 맑아지니 신령과 사람이 이로 해서 모두 편안하며 선생의 빛나는 사적이 새겨있는 이 대석은 길이길이 더욱 높고도 높으리라.
우인(于人) 조규철(曺圭喆) 撰
모산(慕山) 심재완(沈載完) 書
조규철(曺圭喆 : 1906~1982) :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명(汝明), 호는 우인(于人)이며, 슬하에 1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조석(曺錫), 사위는 달성인(達城人) 서길수(徐吉洙)와 청주인(淸州人) 한석범(韓錫範)이다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의 문인으로 1934년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장병린(章炳麟)에게 사사(師事)하여 학식과 덕행으로써 이름이 높았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民族文化推進委員會) 교열위원(校閱委員) 겸 고전국역연수원(古典國譯硏修院) 교수를 역임했다. 지시백과
심재완(沈載完 : 1918~2011) : 국문학자. 경북 선산 출생. 호는 모산(慕山). 경성사범(京城師範)을 거쳐 청구대학(青丘大學) 및 경북대학 대학원 국문과를 수료했다. 청구대학 및 영남대학 교수·학생처장·박물관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학술원상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석보상절 영인해제(釋譜詳節影印解題)〉(59), 〈청구영언 연민본(青丘永言淵民本) 영인해제〉(61), 특히 〈한국의 관모〉는 영남지방의 관모 자료를 중심으로 이에 관계되는 각종 문헌을 인용·고찰한 것으로 민속학 연구의 귀중한 업적이 되고 있다. 지시백과
1851년 옥계서원 봉안문, 통판 서유교(徐有矯)
1851년 옥계서원 상향축문 정재(定齋) 류치명
1858년 설단비문 조병덕(趙秉悳) 撰, 김교성(金敎性) 篆, 서찬규(徐贊奎) 書
1979년 신도비문 조규철(曺圭喆) 撰, 심재완(沈載完) 書
1983년 묘비문 이숭령(李崇寜) 撰, 서경보(徐鏡普) 篆, 서찬호(徐澯浩) 書
서유교(徐有矯 : 1791~1759) : 자는 장세(長世), 호는 소산(蘇山)이다. 아버지는 예조참판 서기수(徐淇修)이고 1828년(순조 28) 진사시에 합격, 1849년(헌종 15) 6월에 대구판관으로 부임하여 팔달진(八達津)[현 팔달교 부근]에 돌다리를 설치 하였다. 지시백과
류치명(柳致明 : 1777~1861) :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백(誠伯), 호는 정재(定齋). 이상정(李象靖)의 외증손, 1805년(순조 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산부사로 있을 때 여러 가지 치적을 쌓아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었다. 대사간, 한성좌윤,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이황(李滉)·김성일(金誠一)·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였다.
조병덕(趙秉悳 : 1800~1870) :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유문(孺文), 호는 숙재(肅齋). 동지중추부사 조최순(趙最淳)의 아들이다. 일찍이 홍직필(洪直弼)과 오희상(吳熙常)의 문하를 출입하며 학문을 닦았다. 1852년(철종 3) 음보(蔭補)로 지평이 되고, 1859년 경연관이 되었다.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동문의 임헌회(任憲晦) 등과 병칭되던 한말의 거유였으며, 성리학자로도 이름이 높았다. 이재(李縡)·김원행(金元行)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홍직필에게서 이어받아 문하의 김병창(金炳昌) 등에게 전수한 중심인물이었다. 저서로 『숙재집(肅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병덕 [趙秉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찬규(徐贊奎 : 1825~1905) :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경양(景襄), 호는 임재(臨齋). 아버지는 서홍열(徐洪烈)이다. 1883년(고종 20)에 경상도 관찰사 및 암행어사의 추천을 받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조병덕(趙秉悳)·최익현(崔益鉉) 등과 교류(交流)하였다. 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에 임연당(臨淵堂)을 짓고, 강학 장소로 삼았다. 문집에 임재집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4 - 4世 고려 문하찬성사 세자사부 정평공 휘 균형 事蹟(사적)
1) 貞平公 鈞衡 行錄 | 정평공 균형 행록
공(公)의 휘(諱)는 균형(鈞衡)이요, 자(字)는 상경(商卿)이며 호(號)를 학암(鶴巖)이라 하고 성(姓)은 서씨(徐氏)니 달성인(達城人)이라. 고려(高麗) 판도판서 달성군 휘 진(晋)을 시조(始祖)로 삼으니 공에게 증조(曾祖)가 되는지라. 조(祖)의 휘는 기준(奇俊)이니 도관좌랑(都官佐郞)에 추봉(追封) 달천군(達川君)이요, 고(考)의 휘는 영(穎)이니 중대광(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찬성사(贊成事) 달성군(達城君)이다. 비(妣)는 익양군부인(益陽郡夫人) 이씨(李氏)에 동정승(同正丞)인 경안공(景安公)영유(永儒)의 따님이라.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복위원년(復位元年) 경진(庚辰, 1340)에 공이 대구(大邱) 달성리제(達城里第)에 나서 공민왕 九년 경자(庚子, 1360)에 사마시(司馬試)에 뽑히었고 연달아 문과(文科)를 이기어 삼등구인(三等九人)에 들었으니 때에 나이 방년 二十一이라. 정포은(鄭圃隱) 몽주(夢周), 임월정(林月亭) 박(樸), 문삼우당(文三憂堂) 익점(益漸), 이석탄(李石灘) 존오(存吾)가 모두 동방급제(同榜及第)라. 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9-1가 주로 시관(試官)이었고 때에 사람들이 뽑히었음을 칭송하다. 공이 난계(蘭溪) 문하(門下)에 드나들면서 포은(圃隱), 석탄(石灘), 월정(月亭), 삼우당(三憂堂),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원재(圓齋) 정추(鄭樞)등 제현(諸賢)과 더불어 다 동문우(同門友)가 되어 나아가면 경륜(經綸 : 政事를 組織的으로 계획함)에 빛을 나타내고 물러나면 도의(道義)를 연마(硏磨)하였으며 직절(直節)로 명성(名聲)이 자자하여 조야(朝野)에 의표(儀表)가 되었다. 공민왕 十五년 병오(丙午, 1366)에 사간원(司諫院)의 좌사간(左司諫)에 오르니 때에 신돈(辛旽)이 국권(國權)을 오로지 마음대로 자행(恣行)하며 왕(王)으로 더불어 가지런히 앉았는지라. 공이 좌사의(左司議) 정추(鄭樞)와 우정언(右正言) 이존오(李存吾)와 더불어 글을 올려 죽이자고 간청한 것으로 十여년(餘年)을 축출되었다. 우왕(禑王) 五년 기미(己未, 1379)에 비로소 복직(復職)되자 때에 왜구(倭寇)가 연이어 침략(侵掠)함으로 능히 어찌할 수 없는지라. 공이 간관(諫官)으로 동료(同僚)인 김윤승(金允升), 최적선(崔積善), 노숭(盧嵩) 등(等)과 의논하고 글을 올려 방비할 계책을 청한대 왕(王)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하달하고 마침내 실행치 못하였으므로 시의(時議)를 애석하게 여기더라. 또 우대언(右代言)으로 성균시(成均試)를 장악할새 우왕이 시부(詩賦)의 제(題)를 보고져 하거늘 공이 말하기를 「과장(科場)에서 시험문제(試驗問題)를 밖으로 세우지 않는 것이라」하고 그에게 보이지 않았다. 우왕 十二년 병인(丙寅, 1386)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배수하였다. 기사(己巳, 1389)에 대신(大臣)의 의(議)에 좇아 꾀하여 공양왕을 세우고 좌명공신(佐命功臣)에 훈공(勳功)을 록(錄)하였으며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배수하였다. 이듬해 1390년에 상의(商議)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세자사부(世子師傅)를 배수(拜受)하였고 조금 있다가 양광도 도관찰사(楊廣道 都觀察使)를 배수하였으며, 이듬해 五월 갑오일(甲午日)에 관(官)에서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은 오십이(五十二)라. 부음(訃音)을 듣고 공양왕이 크게 애도하며 예관(禮官)을 보내여 조제하고 시(諡)를 정평(貞平)이라 내리었다. 개성부(開城府) 곡령(鵠嶺) 송림에 예장하고 대구(大邱)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봉향하였다. 배(配)는 광산군부인(光山郡夫人) 김씨(金氏)이니 전의부령(典儀副令) 영리(英利)의 따님이라. 이남(二男)을 낳았으니 맏아들 침(侵)은 제처사(制處使)로 호(號)를 구계(龜溪)라 하며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하였고, 다음 습(漝)은 문과(文科)에 부사(府使)였다. 제처사(制處使)가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낳으니 아들 문한(文翰)은 부승(副丞)이요, 문간(文幹)은 현감(縣監)이요, 문덕(文德)은 군수(郡守)이고 부사공(府使公)의 뒤가 되었으며 따님은 현감(縣監) 권자화(權自和)에 시집가다. 부승(副丞)이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낳으니 남에 제(濟)는 현감(縣監)이요, 도(渡)는 학유(學諭)요, 섭(涉)은 이조판서(吏曹判書)이며 따님은 풍산군(豐山君) 심응(沈膺) 증 영의정(贈 領議政)이다. 현감(縣監) 문간(文幹)이 일남(一男)을 낳으니 근중(近中)이고 감찰(監察)이라. 군수(郡守) 문덕(文德)이 삼남(三男)을 낳으니 석련(錫蓮)은 진사(進士)요, 석명(錫蓂)은 생원(生員)이며 석령(錫苓)은 진사(進士)라. 현손(玄孫) 이하(以下)는 다 기록하지 않노라. 아, 공의 풍채(風采)가 영특하고 뛰어났으며 기절(氣節)이 충직(忠直)하여 21세에 연이어 대소과(大小科)에 합격(合格)하였다. 문학(文學)과 덕망(德望)이 당세(當世)에 추중(推重)되었으나 다만 한(恨)되는 것은 때에 여조(麗朝)가 망하는 즈음에 공이 있고서 왕씨(王氏)가 보존(保存)되었고 공이 돌아가시자 왕씨(王氏)도 망하였다. 공이 장수(長壽)를 하지 못한 것은 또한 기수(氣數)가 그리하였던가. 또 지금 곡령(鵠嶺) 송림 속에 분묘(墳墓)를 찾을 길이 없거든 하물며 이력(履歷)과 언행(言行)의 자세한 것이며 학문(學問)의 조예(造詣)에 얕고 깊은 것을 알겠는가. 오직 우려(憂慮)는 오래될수록 행적(行蹟)이 아주 없어질 것이니 곧 굳이 지나간 전사(前史)에 채취(採取)하고 세계(世系)와 자손(子孫)을 서술하여 행장문(行狀文) 약간(若干) 한통을 만들어서 붓대를 잡을 군자(君子)의 채택(採擇)하기에 갖추노라. 十四世孫 상경(尙絅) 근록(謹錄)
1807년 유록서(遺錄叙) 14世孫 활(活)
1808년 유록서(遺錄叙) 14世孫 관수(寬修)
유록발(遺錄跋) 안동 권이복(權以復)
1983년 묘단비 서수생(徐首生) 撰, 서정한(徐廷漢) 書.
서관수(徐寬修 : 1741~1834) : 자는 계초(季初) 호는 만롱(晩聾) 명성당 이의조, 심재 송환기와 교류 14世 상태(祥泰)의 현손 문행이 있고 유고가 있다.
권이복(權以復 : 1740~1819) :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무회(無悔), 호는 만주(晩洲). 청송 안덕 출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 문집으로 만주짐이 있다.
5 - 5世 조봉대부 제처사 구계공 휘 침 事蹟(사적)
1) 龜溪先生 遺事 | 구계선생 유사
縣監公派 辛巳譜(2001년) 首卷에서 옮김
부군(府君)의 휘는 침이요, 자(字)는 성묵(聖黙)이며 자호(自號)를 구계(龜溪)라 하고, 포은(圃隱) 정선생(鄭先生)을 좇아 성리학(性理學)을 배웠었다. 나가서 벼슬하였으니 조봉대부(朝奉大夫) 전의소감(典醫少監)에 제처사(制處使)였으며 세종조(世宗朝)에 부군(府君)께서 살고 있는 달성지형(達城地形)이 언덕에 둘러 싸여 성보(城堡)를 설치(設置)할 수 있으므로 명하여 남산의 옛 역(驛)터와 연신(蓮信), 신지(新池) 두 못으로 물댈 토지(土地)를 하사(下賜)하고 또 벼슬과 상을 주기로 의결(議決)하니 부군(府君)이 이것을 사퇴하려도 되지 않아 이에 말하기를 부득이 하다면 원하옵건데 일읍(一邑)의 백성으로 더불어 함께 은덕을 받도록 본읍(本邑)에 상환곡(償還穀)의 이식(利息)을 감하여 백대(百代)에 박시(博施)의 성전(聖典)이 되옵기를 간청하나이다. 하니 상(上)이 의인(義人)이라 하고 허락하시었다. 사실이 읍지(邑誌)에 실려있고, 읍인(邑人)이 이것을 칭송하기를 이제까지 이르렀으며 현종(顯宗) 을사년(乙巳年)(1665)에 달성남(達城南)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판(板)에 이르되 구암서원(龜巖書院)이라 하였으니 백세가 되도록 공의 칭송이 사람의 마음 속에 사무쳐 가히 무궁하리라. 부군(府君)이 뜻을 도타이 하고 옛을 좋아하며 심한 병(病)이 아니면 새벽에 일어나 향(香)을 태우고 글을 읽기를 언제나 손에 놓지 않았다. 벼슬에 있어서는 그 덕인 즉 오직 백성에 혜택(惠澤)과 물건(物件)을 사랑하기를 급급하였으며 상환곡(償還穀)의 이식(利息)을 감(減)하기를 간청한 이 한가지 일로서 지금 세대에 추천(推遷)되었으나 문헌(文獻)이 부족하므로 고징(考徵)할 수 없고 아름다운 행적(行蹟)을 거의 그 만(萬)에 일(一)도 소급(溯及)할 수 없으니 이것이 어찌 자손의 급세(汲世)토록 한이 아니냐.
후손 한준(漢儁)은 삼가 기록하노라
서한준(徐漢儁: 1668~1748 학유공파) : 자는 수언, 호는 구암, 청송 마평, 매헌공 극명의 증손, 문학으로 중망있어 문생들이 구암서당을 짓고 공을 동주로 삼았다. 구계공 유사를 찬했고, 유고가 있다. 사적이 읍지, 환여승람에 있다.
2) 龜溪先生 行狀 | 구계선생 행장
선생(先生)의 휘(諱)는 침(沉)이요, 자(字)는 성묵(聖黙)이며 호(號)는 구계(龜溪)이시다. 우리 서씨(徐氏)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니 여조(麗朝) 판도판서(版圖判書)인 휘 진(晉)으로부터 비롯하였으며 선생에게 고조(高祖)이시다. 증조(曾祖)의 휘는 기준(奇俊)이니 도관좌랑(都官佐郞)에 달천군(達川君)을 추봉(追封)하였고, 조(祖)의 휘는 영(穎)이니 문하시중(門下侍中)에 달성군(達城君)을 봉하였고, 고의 휘는 균형(鈞衡)이니 호가 학암(鶴巖)이시고 공민왕 경자(庚子)에 등제(登第)하여 충직(忠直)과 청백(淸白)으로 드날렸다.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며 시(諡)는 정평(貞平)이시다. 비(妣)는 광산군부인(光山郡夫人) 김씨(金氏)요 전의부령(典儀副令)인 영리(英利)의 따님이라. 선생이 나서 억실하게 지각이 있었고 성품(性品) 또 인후(仁厚)하였다. 이미 자라서 포은선생(圃隱先生)의 문에서 군자의 배우는 방향을 얻어 들었고, 세종조(世宗朝)에 당하여 남변(南邊) 삼포(三浦)에 해마다 외적(外賊)이 있어 열읍(列邑)의 성보(城堡)가 바야흐로 엄숙하여야 되므로 선생의 살고 있던 달성은 곧 영남(嶺南)의 한 도회(都會)의 땅으로 지형(地形)이 두루 막히여 성(城)으로서 지킬만 하므로 국가가 환수하여 외모(外侮)를 방어(防禦)하기로 하고 상(上)이 명(命)하여 부남(府南) 오리허(五里許)에 남산(南山) 옛 역(驛)터 및 연신(蓮信) 신지(新池) 양지(兩池)의 물 댈바 토지에서 바치는 바 잡물로써 그 땅을 바꾸기로 하고 또 그 상(賞)을 논하여 장차 세록(世祿)을 더하려 하니 선생이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고 곧 말하기를 임금의 땅이 아님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상을 받겠습니까. 할 수 없다면 이 한집에 사은(私恩)을 주시기 보담 만민(萬民)이 골고루 혜택(惠澤)을 입기만 같지 못하오니 청(請)하옵건데 본부(本府)에 상환곡(償還穀)의 이식(利息)에 한 섬머리 닷되씩을 감하게 해서 조가(朝家)가 천백세로 넓게 베풀었다는 특전(特典)이 되게 하소서. 상(上)이 의리(義理)가 있다하며 허락하시니 드디어 일읍(一邑)의 상례(常例)가 되어 백성이 지금까지 혜택(惠澤)을 입고 있다. 처음 벼슬하여 조봉대부(朝奉大夫) 전의소감(典醫少監)이 되었고, 또 재망(才望)으로 뽑히여 삼남(三南) 균전(均田) 제처사(制處使)를 배수하였고, 세종(世宗) 十九년(일사삼칠) 정사(丁巳)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二월에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제수하고 권농사(勸農使)를 겸하니 사양하고 부임(赴任)하지 않았다. 선생이 비록 크게 영승(榮陞)치 않았으나 숨어 살며 힘써 배우고 뜻을 도탑게 하여 옛을 좋아하였으며 생도(生徒)들이 책꼬리를 지고 학업을 청하는 자는 재능(才能)에 따라서 교육(敎育)을 베풀어 많이 성취함이 있었다. 묘는 대구 팔공산 중심동 간방(艮方)을 향한 두던에 있으니 부인(夫人) 이씨(李氏)와 함께 상하분(上下墳)이 된다. 부인(夫人)은 고성이씨(固城李氏)에 경안공(景安公) 국헌(國軒)의 뒤요, 증조(曾祖)는 판중군(判中軍) 도총제(都摠制) 휘는 윤주(允柱)요, 조(祖)에 판우군(判右軍) 도총제(都摠制) 비순위(備巡衛) 휘는 백(伯)이며, 고(考)에 동궁(東宮) 첨사(詹事) 휘는 을방(乙芳)이라.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두었으니 맏아들 문한(文翰)은 문과(文科)에 부승(副丞)이요, 다음 문간(文幹)은 문과(文科)에 현감(縣監)이요, 셋째 문덕(文德)은 문과(文科)에 군수(郡守)로서 선생의 아우인 부사공(府使公) 휘 습(漝)의 뒤로 출계(出系)하였고, 따님에 현감(縣監) 권자화(權自和)라. 부승(副丞)이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두었으니 제(濟)는 현감(縣監)이요, 도(渡)는 문과(文科) 학유(學諭)요, 섭(涉)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따님은 심응(沈膺)이니 풍산군(豐山君)에 영의정(領議政)을 증직(贈職)하였다. 현감(縣監)이 일남(一男)을 두었으니 근중(近中)이며 감찰(監察)이요, 군수(郡守)가 삼남(三男)을 두었으니 석련(錫蓮)은 진사(進士)요, 석명(錫蓂)은 생원(生員)이요, 석령(錫苓)은 진사(進士)이니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노라. 그 후손으로 환로(宦路)에 있었던이는 증손(曾孫) 지원(智元)은 진사(進士), 인원(仁元)은 목사(牧使), 용원(勇元)은 생원(生員), 숙원(叔元)은 진사(進士), 진원(震元)은 진사(進士), 감원(坎元)은 생원(生員), 진손(震孫)은 직장(直長), 건손(乾孫)은 주부(主簿), 의손(義孫)은 현감(縣監)이요, 현손(玄孫)에 필(弼)은 찰방(察訪), 윤(尹)은 참봉(叅奉), 괄(适)은 훈도(訓導), 손(遜)은 부위(副尉), 혼(渾)은 습독(習讀), 우(佑)는 참의(叅議)를 증직하였으며, 숙(俶)은 훈도(訓導), 미수(眉壽)는 생원(生員), 기수(期壽)는 참봉(叅奉), 규(規)는 정랑(正郎), 구(矩)는 판관(判官), 학문(鶴文)은 주부(主簿)요, 오세손(五世孫)에 기종(起宗), 기문(起門)은 함께 참봉(叅奉)이요, 두남(斗南)은 교수(敎授), 덕윤(德潤)은 좌랑(佐郞), 덕선(德宣)은 참봉(叅奉), 덕공(德恭)은 참판(叅判)을 증직(贈職)하였고, 덕양(德讓)은 직장(直長), 희복(希福)과 시언(時彦)은 다 참봉(叅奉)이며, 시중(時重)은 현감(縣監), 시웅(時雄)은 진사(進士), 우(遇)는 교관(敎官), 진(津)은 습독(習讀), 희(熙)는 참의(叅議)를 증직(贈職)하였고, 육세손(六世孫) 형(泂)은 진사(進士), 흡(洽)은 교관(敎官), 식(湜)은 생원(生員) 진사(進士), 함(涵)은 첨추(僉樞), 현(顯)은 참봉(叅奉), 창(昌)은 첨추(僉樞), 춘양(春陽)은 부정(副正), 벽(璧)은 첨추(僉樞), 기(琦)는 판결사(判決事)를 증직(贈職)하였으며 일(逸)은 주부(主簿)에 참판(叅判)을 증직하였고, 한(澣)은 감찰(監察), 언겸(彦謙)은 주부(主簿), 인충(仁忠)은 첨사(僉事)로 다산사(茶山祠)에 배향(配享)하였으며, 칠세손(七世孫)에 사원(思遠)은 정랑(正郎)에 세상에서 낙재선생(樂齋先生)이라 일컬으며 이강서원(伊江書院)에 배향(配享)하였고, 사막(思邈)은 훈도(訓導)요, 사선(思選)은 叅奉이니 호를 동고(東皐)라 하며 옥천서원(玉川書院)에 배향(配享)하였고, 사건(思建)은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증직(贈職)하였다. 극성(克誠)은 우윤(右尹)을 증직하였으며, 극경(克敬)은 주부(主簿), 극명(克明)은 선무랑(宣務郎), 우적(禹績)은 봉사(奉事), 호명(昊命)은 찰방(察訪), 우인(禹仁)은 봉사(奉事), 득린(得麟)은 참봉(叅奉), 기운(起雲)은 주부(主簿), 극제(克悌)는 첨추(僉樞), 광윤(光胤)은 교수(敎授), 경함(景涵)은 호군(護軍), 승후(承後)는 참봉(叅奉), 이원(以遠)은 찰방(察訪), 관(寬)은 동추정(同樞正) 판결사(判決事)요, 팔세손(八世孫)에 항(恒)은 현감(縣監), 각(恪)은 주부(主簿), 율(慄)은 동추(同樞), 혜(憓)는 첨추(僉樞), 변(忭)은 군수(郡守)에 참의(叅議)를 증직(贈職)하였고,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配享)하였다. 로(璐)는 부정(副正), 봉(琒)은 참봉(叅奉), 욱(頊)은 봉사(奉事), 근(瑾)은 참봉(叅奉), 위(瑋)는 첨추(僉樞), 영길(永吉)도 첨추(僉樞), 시립(時立)은 참봉(叅奉)에 좌랑(佐郞)을 증직(贈職)하였으며, 호를 전귀당(全歸堂)이라 하니 백원서원(百源書院)에 배향(配享)하였다. 후손이 번성하여 여러 천으로 헤아릴 것이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선생의 덕을 쌓은 갚음이라 한다. 아! 선생은 성리(性理)의 학(學)과 충효(忠孝)의 행(行)으로 세상에 추존(推尊)된 바이라. 세대가 멀고 멀어서 여러번 병화를 거쳐서 나고 죽은 나날은 오히려 고증할 수 없으니 집에 거(居)하여 사업(事業)과 행실(行實)이며 조정(朝庭)에 있어 정사(政事)한 바를 무엇을 말미암아 만에 하나인들 찾을 수 있겠는가? 일찍이 여러번 명현록(名賢錄)을 살펴보건대 혹은 칠감(七監)이라 하고 혹은 중추원사(中樞院事)라고 이르나 모두 가전(家傳)에 실리지 않은 까닭에 감히 쓰지 못하고 오직 이 상환곡(償還穀)의 이자를 감하였다는 일만은 길이 대구 백성들의 구비(口碑)가 되어 집집마다 제향하겠다는 소원(所願)이 있는 까닭에 현종(顯宗) 六년(一六六五) 을사(乙巳)에 멀고 가까운 선비들이 소리를 가지런히 의논(議論)을 일으켜 숭현사(崇賢祠)를 부남(府南)에 창건(創建)하여 제향(祭享)을 받들게 되었고 수년 뒤에 달성남(達城南) 구암(龜巖) 아래에 이건(移建)하여 그 구제도(舊制度)에 따라서 정성껏 꾸리고 또 선생의 방손(傍孫)인 사가(四佳)의 휘 거정(居正)과 함재(涵齋)의 휘 해(嶰)와 약봉(藥峯)의 휘 성(渻)을 차제(次第)로 추향(追享)하였다. 여기 감히 가전(家傳)과 지지(地誌)에 의거(依據)하고 갈문(碣文)과 선배(先輩)의 수록(手錄)를 참고하여 족히 서로 증빙(證憑)할 만한 것에 의준하여 그 세계(世系)와 자손록(子孫錄)을 차례로 적어서 대량 교정(較正)을 더한 것이 우와 같으니 후세에 좋은 말을 쓸만한 군자를 기다려서 참고로 믿고 헤아려 준다면 다행하게 여기노라. 후손 활 삼가 지음. 후손 활(活) 謹撰
서 활(徐 活 : 1761~1838) 학유공파) : 자(字)는 청여(淸如), 호(號)는 매야(邁埜) 청송 마평, 어린 시절 권렴(權濂)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791년(정조 15)에는 김종덕(金宗德)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저서에 용사집설과 매야집이 있다. 달성서씨세보 신축보(1841년) 서문을 지었다.
매야집(邁埜集) 권말에 있는 이병운(李秉運)·유태명(柳台明) 등의 간기에 의하여 1850년경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권1∼4에 시·서(書)·서(序)·기(記), 권5에 발(跋)·뇌문(誄文)·제문·묘지·행장, 권6에 유사, 부록으로 만사·제문·행장·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기(記)의「매야당기(邁埜堂記)」는 정사(精舍)를 짓고 스승인 김종덕에게서 받은 호인 매야(邁埜)의 뜻을 해설해 기록한 글로 명문이다. 지식백과
3) 龜溪先生 墓誌銘 | 구계선생 묘지명
縣監公派 辛巳譜(2001년) 首卷에서 옮김
선생(先生)의 휘는 침이요, 자(字)는 성묵(聖黙)이며 성은 서씨(徐氏)니 자호(自號)를 구계(龜溪)라고 하며 달성인(達城人)이라. 서씨의 본관을 달성이라 한 것은 여조(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인 휘 진(晉)으로부터 비롯하였으니 선생의 고조(高祖)가 되는지라. 증조(曾祖)의 휘는 기준(奇俊)이니 도관좌랑(都官佐郞)이요, 조(祖)의 휘는 영(穎)이니 중대광(重大匡)에 달성군(達城君)이요, 고(考)의 휘는 균형(鈞衡)이니 공민왕 경자(庚子)에 등제(登第)하였으며 포은(圃隱) 정선생(鄭先生)과 동방(同榜)이라. 벼슬은 봉정대부(奉正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시(諡)는 정평(貞平)이요, 비(妣)는 광산군부인(光山郡夫人) 김씨(金氏)로 전의부령(典儀副令)인 영리(英利)의 따님이라. 선생이 이조(李朝)에 벼슬하여 조봉대부(朝奉大夫) 전의소감(典醫少監)이였으며 세종조(世宗朝)에 재주와 덕망으로 삼남균전(三南均田) 제처사(制處使)를 제수하였다. 때에 남해변(南海邊)에 해마다 왜적(倭賊)이 침로(侵虜)하므로 경비가 심하였다. 선생이 살고 있던 달성이 천연적(天然的) 참보(塹堡)로 성이 될 듯하여 조정(朝庭)에 받치게 되니 상(上)이 그 충성을 아름답게 여기시어 명하여 남산 옛터와 연신신지(蓮信新池) 및 관개토지(灌漑土地)를 하사(下賜)하고 또 상작(賞爵)을 하려하니 선생이 사양하여 받지 않고 곧 할 수 없다면 원컨대 일읍(一邑)의 백성으로 더불어 함께 은택을 입겠습니다 하고 본읍(本邑)에 상환곡(償還穀)의 이자(利子)를 감하시와 족히 백대에 넓게 베푸는 성전(聖典)이 되기를 간청하옵니다 하니 상(上)이 의사(義士)라 하여 허락하였으니 일이 읍지(邑誌)에 실렸고, 인민의 칭송(稱訟)이 이제까지 이르렀다. 현종(顯宗) 六년 을사(乙巳)에 숭현사(崇賢祠)를 창건(創建)하고 현종(顯宗) 九년(一六六八) 무신(戊申)에 사우(祠宇)를 달성남(達城南) 구암하(龜巖下)에 이건(移建)하고 현판을 구암서원(龜巖書院)이라 달고 제향하였다. 배(配)는 영인(令人) 고성이씨(固城李氏)에 첨사(詹事) 휘 을방(乙芳)의 따님이라.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두었으니 맏아들 문한(文翰)은 광흥창(廣興倉) 부승(副丞)이요, 문간(文幹)은 문과현감(文科縣監)이요, 셋째 문덕(文德)은 문과군수(文科郡守)로 숙부(叔父) 부사공(府使公) 휘 습(漝)의 뒤로 출계(出系)하였고 따님은 현감(縣監) 권자화(權自和)에 가다. 부승(副丞)이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두었으니 맏이 제(濟)는 현감(縣監)이요, 도(渡)는 문과(文科) 학유(學諭)요, 섭(涉)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따님은 풍산군(豐山君) 심응(沈膺)에게 가다. 증현손 이하는 기록지 않노라. 선생이 일찍 포은(圃隱) 정선생(鄭先生)을 좇아 성리(性理)의 학을 배웠고, 뜻을 도타이 하고 옛것을 좋아하며 심한 병이 아니면 문득 새벽에 일어나서 향을 태우고 글을 읽으며 일찍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마음껏 즐기었다. 이뿐 아니라 맛좋은 음식이 입을 즐겁게 하는 것 같이 호학(好學)을 하였다. 만약 끝까지 벼슬하였다면 그 배운 것을 행하여 오직 백성에 혜택을 주고 물질을 사랑함이 급급(汲汲)하였을 것이라. 상환곡(償還穀) 이자(利子)를 감하여 주기를 간청한 것도 대개 그 한가지 일로서 능히 알게 된다. 선생(先生)의 뒤에 들난 후손이 많았다는 것은 증손(曾孫) 숙원(叔元)은 문학으로 저명(著名)하여 권충재(權冲齋)로 더불어 좋은 벗이었고, 칠세손(七世孫) 사원(思遠)은 유종(儒宗)이 되어 세상에서 낙재선생(樂齋先生)이라 일컬어 묘당(廟堂)에 배향하였고, 사선(思選)은 호를 동고(東皐)라 하여 경산(慶山) 옥천사(玉川祠)에 배향하였으며, 팔세손(八世孫) 시립(時立)은 효행으로 발천(拔薦)되어 참봉(叅奉)이요, 호를 전귀당(全歸堂)이라 하며 백원서원(百源書院)에 배향하였다. 그 지손(支孫)들이 벌어지고 흩어져 사는 자가 심히 많은지라. 인하여 남산에 사는 자가 더욱 성하니 거의 옛날 회계태말(會稽太末)의 서씨와 더불어 그 번창하기가 같으니 어찌 또한 깊은 인과 두터운 혜택의 환덕(還德)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묘는 팔공산 중심동(中心洞) 간좌(艮坐)의 두던에 있다.
지금으로부터 선생의 재세(在世)가 사백여년(四百餘年)의 오랜 세월이기에 그 나고 죽고한 연월일을 보첩(譜牒)에 궐하였으므로 알 수 없는지라. 하물며 학문에 조예(造詣)가 얕고 깊은 것이며 이력(履歷)과 언행의 자세한 것을 얻지 않겠는가. 자손으로서 그 오래 될수록 더욱 자세(仔細)하지 못할까 두려워 유사(遺事) 일책(一冊)을 가지고 와서 희(熺)에게 묘지명(墓誌銘)을 요청하니 희(熺)가 그 중임을 맡을 사람이 못됨으로 사양하여 얻지 못하고 조금 있다가 비석(碑石)이 다 되었다고 독촉하므로 부득이 대략 세덕(世德)과 관작(官爵) 및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을 적은 것이 이 같으니 만약 그 오래도록 썩지 않은 바가 있다면 달성의 예부터 전해온 구비(口碑)가 있을 뿐이라. 이어서 명에 이르되, 벼슬하며 항상 근심하는 것은 혜택(惠澤)을 백성에 베풀지 못함이라. 선생의 벼슬은 높고 지극하다 이르지 않으나 오히려 능히 덕을 베푼 것이 한 고을에 품었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높은 자리였으면 만민(萬民)에게 나라 위한 선덕이 있었으리라. 선생의 덕을 지금까지 칭송(稱訟)하옵네 선생의 묘에 어찌 가시넝쿨이 돋으랴. 가시넝쿨이 돋는다 해도 달성의 구비(口碑) 저게 있도다. 몽암(夢庵) 정희(鄭僖) 지음
정 희(鄭 熺 : 1723~1793) : 자는 용회(用晦)이고, 호는 몽암(蒙巖)이다. 본관은 오천이며, 출신지는 경주(慶州) 하곡(霞谷)이다. 최흥원의 문인이며, 1756년 생원이 되고, 옥산서원 원장등을 역임했다. 부승공묘갈, 학유공 묘갈을 찬하였고, 사위는 학와 서유대(徐惟岱 : 풍호정)다.
몽암집(夢庵集) : 조선후기 학자 정희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16년에 간행한 시문집권두에 유필영(柳必永)의 서문과 권말에 서정옥(徐廷玉)·이광구(李光久)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118수, 권2·3에 서(書) 50편, 잡저 14편, 권4에 상량문 3편, 축문 14편, 제문 33편, 권5에 행장 4편, 묘지명 4편, 묘갈명 4편, 권6은 부록으로 만사(輓詞) 12편, 뇌문(誄文) 3편, 제문 16편, 행장·유사·묘표(墓表)·묘갈명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지식백과
4) 龜溪先生 墓碣銘 | 구계선생 묘갈명
옛 구계 선생이 달성 숲속에 숨어 살면서 가시 문도 좋고 졸졸 흐르는 물도 즐거우니 굶은들 어떠하리. 성문(聲聞)과 영달(榮達)도 구하지 않고 날마다 문제자(門弟子)로 더불어 경전(經傳)을 이야기 하고 도(道)를 강론(講論)하며 비록 궁하게 살면서 독선(獨善)을 하며 미상불 백성에 어질며 물자를 사랑하는 것으로 마음에 바탕을 삼았다. 세종조(世宗朝) 때에 남변(南邊) 삼포(三浦)에 해마다 외경(外警)이 있고 열읍(列邑)의 성을 지키며 바야흐로 엄숙하였다. 조정(朝庭)에서 공이 살고 있는 지형이 말과 같이 천연적(天然的) 참호(塹壕)로 성(城)이 된다는 말을 듣고 명하여 남산 옛 역터로 그 집과 바꾸라 하시고 인하여 그 상을 논하고 장차 세록(世祿)을 더하려 하니 공이 사양하여 받지 않고 이르되, 임금의 땅이 아님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상을 받으로리까. 굳이 사양하고 이에 그 일가(一家)의 사은(私恩)보다는 어찌 만민이 골고루 혜택을 입기만 같으리요 하며 본읍(本邑)에 상환곡(償還穀)의 이자(利子)를 한섬머리 오승(五升)을 감하여 주시면 영원토록 국가(國家)의 특혜(特惠)가 되옵기를 간청 하옵나이다 하니 조정(朝庭)에서 의리가 있다하고 허락(許諾)하여 드디어 일읍(一邑)의 특례를 이루었다.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惠澤)을 입고 송덕(頌德)을 말지 약으니 옛글에 이르는바 힘써 덕을 심으면 덕을 곧 받게 되나니 백성이 인덕을 잊지 않는 것은 공을 두고 이르는 것이 아니냐? 공(公)의 휘(諱)는 침이요, 자(字)는 성묵(聖黙)이며 호(號)는 구계(龜溪)니 달성서씨(達城徐氏)라. 계출(系出)은 고려(高麗) 판도판서(版圖判書) 휘 진(晉)이니 공의 고조(高祖)요, 증조(曾祖)의 휘는 기준(奇俊)이니 승봉랑(承奉郎) 도관좌랑(都官佐郞)이요, 조(祖)의 휘는 영(穎)이니 중대광(重大匡) 달성군(達城君)이요, 고(考)의 휘는 균형(鈞衡)이니 공민왕 경자(庚子)에 등제(登第)하였으며 곧 포은(圃隱)과 동방(同榜)이다. 봉정대부(奉政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시(諡)는 정평(貞平)이며 비(妣)는 광산김씨(光山金氏)에 전의부령(典儀副令)인 영리(英利)의 따님이라. 선생이 이씨조(李氏朝)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벼슬하여 조봉대부(朝奉大夫) 전의소감(典醫少監)이 되었으며 세종조(世宗朝)에서 재주와 덕망으로 뽑히어 삼남균전(三南均田) 제처사(制處使)를 제수하였다. 공이 일찍 포은(圃隱) 정선생(鄭先生)의 문에서 자기를 위하는 배움에 종사하며 강(講)하고 묻고, 전하여 익히며, 오직 날로 부지런하여 심한 병이 아니면 문득 새벽에 일어나서 향을 태우고 글을 읽으며 성현(聖賢)의 훈계(訓戒)에 잠심하고 완미하였다. 이뿐 아니라 맛 좋은 음식이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이 진학(進學)의 공부가 늙어서 더욱 도타웠다. 생도(生徒)들이 문에 이르러 학업을 요청하는 자는 재능(才能)에 따라서 교육을 베풀어 많이 성취(成就)시키었다. 배(配)는 고성이씨(固城李氏)에 여조(麗朝) 동궁첨사(東宮詹事)인 을방(乙芳)의 따님이며, 제우군(制右軍)인 은암(隱庵) 백(伯)의 손녀이라.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두었으니 문한(文翰)은 광흥창(廣興倉) 부승(副丞)이요, 문간(文幹)은 문과(文科)에 현감(縣監)이요, 문덕(文德)은 군수(郡守)로 숙부(叔父)인 부사공(府使公) 휘 습(漝)의 뒤로 출계(出系)하였으며 따님은 현감(縣監)인 권자화(權自和)에게 가다. 문한(文翰)이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두었으니 제(濟)는 현감(縣監)이요, 도(渡)는 문과(文科) 학유(學諭)이고, 섭(涉)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따님은 풍산군(豐山君) 심응(沈膺)에게 가다. 문간(文幹)의 아들에 근중(近中)은 감찰(監察)이라. 제(濟)가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낳으니 맹원(孟元)은 충순위(忠順衛)며 다음 중원(仲元), 셋째 계원(季元)이요, 따님은 최자하(崔自河)에 가다. 도(渡)가 사남이녀(四男二女)를 낳으니 지원(智元)은 진사(進士)요, 인원(仁元)은 문과(文科)요, 용원(勇元)은 생원(生員)이요, 숙원(叔元)은 진사(進士)며 두 따님은 낭장(郎將)에 여문필(余文弼)이요, 사직(司直)에 윤무형(尹畝亨)이라. 섭(涉)이 사남일녀(四男一女)를 낳으니 진원(震元)은 진사(進士)요, 감원(坎元)은 생원(生員)이요, 간원(艮元), 태원(兌元)이며 여(女)는 배사량(裵士良)이라. 근중(近中)이 오남(五男)을 낳으니 진손(震孫)은 직장(直長)이요, 태손(兌孫), 중손(仲孫)이며 건손(乾孫)은 주부(主簿)요, 의손(義孫)은 현감(縣監)이니 현손이하는 번거롭기에 다 기록하지 않노라. 아! 지금으로부터 공의 재세(在世)가 거의 사백여년(四百餘年)이라. 년대(年代)가 이미 멀어서 여러번 병화를 거쳤고 문헌(文獻)에 고증(考證)할 수 없어서 공의 생졸(生卒)의 년월 및 도학(道學)의 얕고 깊은 것과 지난 벼슬이 많고 적은지 함께 그 자세함을 알 수 없으나 오직 상환곡(償還穀)을 감한 것 그 한 일만이 기리 혜택(惠澤)이 인민에 미친 것이 깊은 까닭에 덕을 느끼며 칭송(稱訟)하여 잊어버리지 않은지 오래이다. 가가호호(家家戶戶) 이 제사를 받들고져 원하기에 이르러서 현종(顯宗) 을사년(乙巳年)에 숭현사(崇賢祠) 창건후(創建後)에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이건(移建)하여 제향하였다. 묘는 팔공산(八公山) 중심동(中心洞) 간좌(艮坐) 두던에 있으니 부인(夫人) 이씨(李氏)도 더불어 상하분(上下墳)이라. 옛적에 묘도(墓道)에 표석(表石)이 없었는데 지금 비로소 이것을 경영하게 되어 한 경내(境內)의 사녀(士女)가 권유(勸諭)도 기다리지 않고서 같은 소리로 일제히 응하여 서로가 그 역에 즐기지 않은 이가 없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을까? 보잘 것 없는 나 후생이 본래 공의 유풍(遺風)을 듣고서 앙모(仰慕)한지 오랜지라 이제서야 공의 후손인 식(栻)이 와서 묘도문(墓道文)을 부탁하니 내가 실로 사람도 변변치 못할 뿐 덕도 없으며 문사(文詞)가 거칠고 졸(拙)하여 어찌 받들어 감당할 것인가. 굳이 사양하니 청하기를 더욱 간곡하므로 드디어 감히 그 일을 대략 서술하고 이어서 명하여 이르되, 아름답도다. 우리 공은 맑은 기운이 빼어났도다. 일찍이 어진 스승을 만나서 도학(道學)을 성취(成就)하여 숨어서 살며 교수(敎授)로서 깊히 영재(英才)를 기르기를 즐기며 경륜(經綸)을 가슴 속에 많이 품었으나 아깝게도 널리 베풀지 못하였다. 벼슬은 삼남균전(三南均田) 제처사(制處使)였고, 남방(南方)에 전지(田地)를 고루었고, 고택(故宅) 또한 명구(名區)이다. 천참(天塹)으로 성(城)이 되므로 명을 받들어 관에 바치어 상의 은전(恩典)에 장차 세록(世祿)을 더하여 하니 이것을 고사(固辭)하고 상환곡(償還穀)을 감(減)하여 달라고 탄원해서 혜택(惠澤)이 인민에 미치었으니 천만년(千萬年)토록 노래하고 유덕(遺德)을 외는 소리가 양양하며 여경(餘慶)이 길고 길 것이다. 묘사(廟祀)는 백세(百世)토록 공향(供享)할 것이요, 후손은 억(億)으로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울울(鬱鬱)한 팔공산(八公山)이여 봉분(封墳)이 집채 같이 높았으니 누가 공경을 일으키지 않으리요. 의관(衣冠)을 묻은 이곳이라. 내가 비석(碑石)에 명(銘)을 하오니 떳떳이 무궁토록 보이리라.
이의조(李宜朝) 지음
이의조(李宜朝 : 1727~1805] :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맹종(孟宗), 호는 경호(鏡湖)·명성당(明誠堂) 김천출신이다. 방초정(芳草亭)을 교육장으로 활용하여 후진 양성에도 전력하였다. 부친의 유명을 따라 13년 동안 『가례증해(家禮增解)』 9권 10책을 완성하였다. 1824년(순조 24) 『가례증해』가 전국에 반포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가례증해(家禮增解) : 이의조(李宜朝)가 ≪주자가례≫를 증수(增修)·해설한 책. 원래 이의조의 아버지가 ≪주자가례≫를 대본으로 하여 고금(古今)의 예설(禮說)을 모아 놓은 것을 이의조가 다시 교정·해설하였다. 정조 16년(1792)에 간행되었다. 10권 10책. 지식백과
2. 달서서씨 시조묘역 중심재(中心齋)
중심재(中心齋)는
대구시 동구 용수동 상중심(上中心)마을에 있다. 1780년에 구계공(龜溪公)의 묘소 수호를 위해 지은 재실로 여러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정문인 일관문(一貫門)을 들어서면, 문 좌편에는 노남공 신도비와 1982년 단소(壇所) 축성 사적비가 있고 우편에는 관리사가 있다. 정면에 당(堂)이 있는데 재호가 중심재(中心齋)다. 재실(齋室)은 전후(前後)가 각각 다섯 칸씩 모두 열 칸으로 가운데 마루가 있고 좌우에 방이 있다. 2020년 종원들의 중의(衆議)를 모아 중심재 중건과 함께 문양리 봉계산 시조묘역 4위(位)를 구계공 묘소 좌편으로 이전 하기로 결의하고, 2022년 시조(始祖)공부터 4世까지 차례대로 안장(安葬)하였다. 묘역을 조성(造成)하는 과정에 용의 알처럼 생긴 둥근 암석(巖石)이 많이 배출되었고, 옆에는 옹달샘이 솟아났으므로 용정(龍井)이라 명명(命名)하였다. 이로써 중심재는 시조공(始祖公)부터 구계공(龜溪公)까지 5위(位)의 선영(先塋)을 수호하는 재실로 거듭나게 되었다.
1) 中心齋 重建 上樑文 중심재 중건 상량문
무릇 천운(天運)은 순환(循環)하여 가면 반드시 돌아오니 휴운(休運)의 회복(回復)을 점칠 수 있고 사물은 무너지면 반드시 다시 이루어지니 명구(名區)에 추재(楸齋)를 세우게 되었도다. 선현(先賢)께서 빛나는 덕업(德業)을 수립하였으니 제손(諸孫)이 영구히 선조(先祖)를 잊지 못하며 후손들이 긍구긍당(肯構肯堂)하는 정성을 기울였으니 그 완성에 오래 걸리지 않았네. 알맞은 시기(時機)를 기다린 듯 역사(役事)가 우연이 아니었으며 올바른 방위(方位)를 차지하였으니 그 위치가 양지(陽地)바르도다. 삼가 달성서씨를 생각하건대 고려조(高麗朝)에 판도판서(版圖判書)로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서진(徐晉)을 비조(鼻祖)로 삼도다. 승봉랑(承奉郎)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찬성서(贊成事)에 추봉(追封)된 달천군(達川君) 기준(奇俊)이 이세(二世)이며 인재장진(人材獎進)과 문장훈업(文章勳業)으로 유명했던 충정공(忠靖公) 노남(櫓南) 영(穎)이 삼세(三世)로다. 여말(麗末)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도의직절(道義直節)로 조야(朝野)에 명성을 떨치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세자사부(世子師傅)가 된 정평공(貞平公) 학암(鶴巖) 균형(鈞衡)이 사세(四世)로다. 정포은(鄭圃隱)의 문인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전공하여 전의소감(典醫少監)을 역임하고 재망(才望)을 찬양받아 삼남균제처사(三南制處使)에 탁수(擢授)된 구계(龜溪) 침(沉)이 오세(五世)로다. 시조(始祖)가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된 이래 연달아 삼대(三代)가 봉군(封君)되었으며 노남공(櫓南公)은 대구옥계서원(大邱玉溪書院)에 배향(配享)되고 구계공(龜溪公)은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도다. 구계공(龜溪公)은 세종조(世宗朝)에 달성(達城)을 국가에 헌납하고도 국은(國恩)을 사양하였으며 본읍(本邑) 백성에게 조세삭감(租稅削減)을 주달(奏達)하여 한말(韓末)까지 제도가 존속(存續)하였도다. 열조(列朝)에서 포창(褒彰)하고 증시(贈諡)하는 은전(恩典)을 거듭 내렸으며 여러 고을에서 원사(院祠)에 제향(祭享)하는 공의(公議)가 이어졌도다. 누대(累代)에서 승봉(承封)하는 동방(東方)의 화벌(華閥)이며 영남(嶺南)에서 송성(頌聲)이 양일(洋溢)하는 겨레로다. 조선(祖先)이 쌓은 공덕(功德)에 말미암아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번창하니 적덕지가(積德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 보은(報恩)의 혜택이 두루 미쳤도다. 이에 제손(諸孫)들이 선조(先祖)를 추앙(推仰)하고 원모(遠慕)하는 성의(誠意)를 모아 선조(先祖)에게 향화(香火)를 봉숭(奉崇)할 묘단(墓壇)과 재실(齋室)을 설립하였도다. 대구시(大邱市) 달성군(達城郡) 다사읍(多斯邑) 문양리(汶陽里) 봉계산(鳳鷄山) 의 기슭에 삼세(三世) 노남공(櫓南公)의 묘소 옆에 묘단(墓壇)을 설치하였도다. 선영(先塋)을 수호(守護)할 마음으로 영모재(永慕齋)를 건립하여 시조공(始祖公)부터 사세(四世) 학암공(鶴巖公)까지 제향(祭享)하였도다. 장구(長久)한 세월이 흘러 재실(齋室)은 풍화(風化)를 견디지 못하였으며 도시(都市)의 팽창으로 묘역(墓域)은 소란하고 황폐하게 되었도다. 이에 민망(憫恾)한 후손들이 이전(移轉)하기를 도모(圖謀)하였는데 오세(五世) 구계공(龜溪公)의 묘측(墓側)으로 이건(移建)하기로 결의(決議)하였네. 문양리(汶陽里) 묘단(墓壇)과 묘소(墓所)는 대구시(大邱市) 동구(東區) 용수동(龍水洞)으로 이전하였고, 쇠잔(衰殘)한 영모재(永慕齋)는 철거(撤去)하고 용수동(龍水洞)에 중심재(中心齋)를 중건(重建)하였도다. 중심재(中心齋)는 팔공산 중심동(中心洞)에서 유래(由來)하였지만 후손들의 심중(心中)에서 경경불망(耿耿不忘)하는 제사(齋舍)라네. 성금(誠金)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거북등에서 털을 긁는 것을 근심하지 않았으며, 목수(木手)들이 바람처럼 일어나 새가 날개를 펼친 듯 꿩이 날아가는 듯 하였도다. 이에 모전(慕羶)하는 마음을 이룰 수 있었으며 희생(犧牲)을 마련하는 장소를 가지게 되었도다. 무궁(無窮)하게 저존(箸存)하니 예기(禮記)에 이른바 불망소재(不忘所在)이며 불변(不變)하길 경계(警戒)하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영언효사(永言孝思)로다. 사람들에게 추원보본(追遠報本)을 알게 하였으니 무릇 민덕(民德)이 순후(淳厚)로 돌아가겠으며 선조(先祖)의 영령(英靈)이 좌우에 계시는 듯하니 물려준 교훈(敎訓)을 허물없이 받들겠도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뽑히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도다. 어찌 무덤길과 묘역(墓域)에만 단장을 했겠는가. 여기에 선조를 갱장(羹墻)하는 정성을 붙였도다. 진실로 조선(祖先)을 위하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이 날아갈 듯이 만들었겠는가. 이에 여러 후손들의 성의(誠意)를 흠앙(欽仰)하며 감히 육위랑(六偉郞)의 송축(頌祝) 노래를 베풀도다. 어기영차 들보 동쪽으로 떡을 던지세. 조손(祖孫)의 분묘(墳墓)가 늘어서서 유택(幽宅)을 이루었네. 여기에서 우뚝이 송추(松楸)를 바라보며 회상(回想)하면서 승미지선(承美趾善)하던 선조(先祖)의 후덕(厚德)을 우러러 사모하네. 어기영차 들보 서쪽으로 떡을 던지세. 아득히 문양리(汶陽里) 봉계산(鳳鷄山)이 시야(視野)에 들어오네. 선현(先賢)의 묘단(墓壇)과 묘소(墓所)와 영모재(永慕齋)가 존재(存在)해 있던 곳. 정기(精氣)가 응축(凝縮)되어 훌륭한 자손이 얼마나 많았던가. 어기영차 들보 남쪽으로 떡을 던지세. 대구(大邱)의 중심부에 달성(達城)이 현재까지 존치(存置)하네. 위국헌납(爲國獻納)하고 위민감세(爲民減稅)를 소망했던 구계공(龜溪公)의 통소(統緖)를 후손들이 멸사봉공(滅私奉公)하는 정신으로 승습(承襲)하기 바라도다. 어기영차 들보 북쪽으로 떡을 던지세. 진호(鎭護)는 팔공산 비로봉(毗盧峯)이 하늘에 우뚝하네. 백두대간 용맥(龍脈)이 뻗어내려 빼어난 기운이 모였으니 땅은 영험(靈驗)하여 걸출(傑出)한 인물을 수없이 배출(輩出)하였도다. 들보 위로 떡을 던지세. 지극한 이치(理致)에는 형상(刑象)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선조(先祖)를 추모(追慕)하고 근본(根本)에 보답(報答)하는 정성(精誠)을 기울이니 원래(元來)에 감응(感應)하는 것이 마치 그림자와 메아리와 같네. 들보 아래로 떡을 던지세. 평평하고 높다란 구원(丘原)에 미곡(米谷)들판이 열렸네. 바라건대 해마다 풍년(豐年)이 들어 곡식이 잘 여물어서 맑고 향기로운 술을 빚어 술잔 올리기를 기대(企待)하네. 삼가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후에는 산천(山川)은 경관(景觀)을 바꾸고 인신(人神)은 서로 기뻐하게 하소서. 돈종(敦宗)하고 목족(睦族)하는 정의(情誼)를 숭상(崇尙)하고 위선(爲先)하고 효제(孝悌)하는 정성(精誠)을 견지(堅持)하게 하소서. 전인(前人)들의 혁혁(赫赫)한 공렬(功烈)을 긍식(矜式)하며 연년세세(年年世世) 수호(守護)하여 언제나 새롭게 하소서.
2020年 庚子年 11月 16日
경북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밀양 박 영 호(密陽 朴英鎬) 삼가 찬술(撰述)함
2) 中心齋 重建記 중심재 중건지
무릇 후손(後孫)으로서 선조(先祖)를 공경하고 숭봉(崇奉)하는 일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인류(人類)의 보편적인 덕목(德目)이요, 가치(價値)일 것이다. 옛말에 사자(死者)를 공경히 대하고 원조(遠祖)를 추모하면 백성이 후덕(厚德)하게 된다고 하였으며, 복제(服制)가 끝나면 친함이 다하고 친진(親盡)하면 정이 다하여 잊어버리게 된다고 하였다. 무릇 묘소(墓所)에 제사지내는 것이 고례(古禮)는 아니지만 선유(先儒)들은 후함을 잃지 않기 위해 시행하였으며, 동방(東方)에서는 묘소(墓所)를 지키기 위해 재실(齋室)을 건립하여 오래도록 경영하였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근원(根源)이 멀리 있는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는 법이다. 달성서씨(達城徐氏)는 고려(高麗)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된 서진(徐晉)을 시조로 삼는다. 이세(二世) 서기준(徐奇俊)은 승봉랑(承奉郎)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찬성사(贊成事)에 추봉(追封)되었다. 인재(人材)를 장려하고 문장(文章)과 공훈(功勳)으로 유명했던 충정공(忠靖公) 노남(櫓南) 서영(徐穎)이 삼세(三世)이며, 여말(麗末)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도의직절(道義直節)로 조야(朝野)에 명성을 떨치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세자사부(世子師傅)가 된 정평공(貞平公) 학암(鶴巖) 서균형(徐鈞衡)이 사세(四世)이다. 오세(五世) 구계(龜溪) 서침(徐沉)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전공하여 전의소감(典醫少監)을 역임하고 재망(才望)을 찬양받아 삼남제처사(三南制處使)에 탁수(擢授)되었다. 시조(始祖)가 달성군(達城君)에 책봉(冊封)되고 노남공(櫓南公)은 대구(大邱)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配享)되고 구계공(龜溪公)은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구계공(龜溪公)은 세종조(世宗朝)에 달성(達城)을 국가에 헌납(獻納)하고, 국운(國恩)을 사양하며 본읍(本邑) 백성에게 조세삭감(租稅削減)을 주달(奏達)하여 한말(韓末)까지 제도가 존속(存續)하였다. 달성서씨(達城徐氏)는 선조(先祖)를 추앙(推仰)하는 후손들의 정성을 모아 선조(先祖)에게 향화(香火)를 봉숭(奉崇)할 묘단(墓壇)과 재실(齋室)을 일찍이 설립하였다. 대구시(大邱市) 달성군(達城郡) 다사면(多斯面) 문양리(汶陽里) 봉계산(鳳鷄山)에 있는 노남공(櫓南公)의 묘소(墓所) 옆에 묘단(墓壇)을 설치하였고 선영(先塋)을 수호(守護)하기 위해 영모재(永慕齋)를 건립하여 시조공(始祖公)부터 학암공(鶴巖公)까지 제향(祭享)하였다. 장구(長久)한 세월이 흐른 나머지 재실(齋室)은 풍화(風化)를 견디지 못하여 퇴락(頹落)하였고, 근대화(近代化)의 영향으로 대구시(大邱市)가 팽창(膨脹)함에 따라 묘역 부근까지 지하철(地下鐵)이 개통되어 주변이 소란하게 되었다. 이를 민망(憫恾)하게 여긴 후손들이 조용하게 타령(妥靈)할 장소를 물색한 결과 묘역(墓域)은 대구시(大邱市) 동구(東區) 용수동(龍水洞)으로 이전(移轉)하고 영모재(永慕齋)는 철거(撤去)하는 대신 구계공(龜溪公)을 제향(祭享)하던 중심재(中心齋)를 중건(重建)하기로 결의(決議)하였다. 중심재(中心齋)라는 명칭은 팔공산의 중앙(中央)인 중심동에서 유래(由來)하였으며 후손들이 심중(心中)에 경경불망(耿耿不忘)하려는 의미도 담겨있다. 2020년에 대종회(大宗會) 서영택(徐永澤) 회장이 먼저 발의(發議)하고 종친(宗親)들의 총의(總意)를 수험(收斂)하여 사업을 추진(推進)하였는데 2년 동안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묘역(墓域)과 재실(齋室)을 완성하게 되었다. 재실(齋室)은 전후(前後)가 각각 다섯 칸씩 모두 열 칸으로 구성되었으니 이전의 중심재(中心齋)에 비하면 훨씬 굉대(宏大)한 규모(規模)이다. 일관문(一貫門)을 통해 넓은 마당으로 들어가면 중심재(中心齋)라는 현판(懸板)이 보이며 중앙(中央)에는 마루가 있고 양쪽에는 방이 만들어졌으니 후손들이 재숙(齋宿)하며 제향(祭享)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묘역(墓域)은 구계공(龜溪公)의 묘소 서쪽에 넓은 공간(空間)을 마련하여 시조(始祖)부터 4세(四世)까지 차례대로 안장(安葬)하였다. 묘역을 조성(造成)하는 과정에 용의 알처럼 생긴 둥근 암석(巖石)이 많이 배출되었고 옆에는 옹달샘이 솟아났으므로 후손들이 용정(龍井)이라 명명(命名)하였다. 역사(役事)가 완성되자 실무(實務)를 주간(主幹)하던 현재 서영봉(徐永峰) 회장이 묘역(墓域)을 조성(造成)하고 재실(齋室)을 중건(重建)한 내력(來歷)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이미 중심재(中心齋) 상량문(上樑文)을 찬술(撰述)한 처지라 사양했지만, 그 간곡한 정성을 저버릴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달성서문(達城徐門)과는 사양하지 못할 인연을 가지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백강(白江) 서수생 박사(徐首生 博士)의 지도를 받은 제자(弟子)로서 선생님을 모시고 일찍부터 서씨문중(徐氏門中)을 출입하며 문중(門中) 어른들과 친분을 두텁게 쌓아왔다. 근래에는 낙재(樂齋) 서사원선생(徐思遠先生)의 낙재선생일기(樂齋先生日記)를 발굴하여 번역하였으며 구암서원(龜巖書院) 안에 설립된 영남선비문화수련원의 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처럼 달성서문(達城徐門)과의 깊은 인연(因緣)으로 말미암아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게 되었다. 후손(後孫)들은 선조(先祖)가 남긴 공렬(功烈)을 생각하여 몸가짐을 신칙(申飭)하고 덕업(德業)을 닦아 자손(子孫)들을 올바르게 인도(引導)하고 조상(祖上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든 종족(宗族)은 모두가 동기(同氣)이며 동일(同一)한 선조(先祖)로부터 갈라졌으니 자애(慈愛)로운 인정(人情)으로 보면 피차(彼此)의 차이가 없을 것이다. 현금(現今)에 들어와 세도(世道)가 판탕(板蕩)하고 여러 후곤(後昆)이 팔역(八域)에 산거(散居)하지만 달성서씨들은 위선효제(爲先孝悌)하고 돈종목족(敦宗睦族)하는 마음을 견지(堅持)하리라 확신하는 바이다. 앞으로 재실(齋室)을 출입(出入)하는 후손들은 선조의 마음을 체득(體得)하여 서로 권선징악(勸善懲惡)하고 환난상휼(患難相恤)하며 돈목(敦睦)하고 면려(勉勵)하는 태도(態度)를 유지(維持)해야 할 것이다. 매사(每事)에 공경(恭敬)하는 자세를 지니고 제기(祭器)는 정결(淨潔)하게 관리해야 할 것이며 주식(酒食)을 올리거나 배례(拜禮)할 때는 경건(敬虔)해야 할 것이다.
西紀 2022年 8月
경북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박 영 호(朴英鎬) 삼가 기록한다.
3) 達城徐氏始祖墓 新改 幽宅地 달성서씨시조묘 신개 유택지
소백산(小白山)이 태조산(太祖山)으로 그 간룡(幹龍)이 중조산격(中祖山格)인 보현산(普賢山)을 거쳐 금호강(琴湖江)을 감돌아 굽이굽이 뻗어 온 생룡(生龍)이 팔공산(八公山)의 동봉(東峯)에 올라타고 소조산(小祖山)으로 남하(南下)하다 중심귀봉(中心貴峯)의 주산(主山)에서 소미원(小微垣 : 동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별자리)으로 향한 천척진룡(千尺震龍)이 머리를 돌려 계축방(癸丑方) 백척혈처(百尺穴處)로 취기입수(聚氣入首)하여 오국(五局: 주산(主山), 청룡(靑龍), 백호(白虎), 혈(穴), 안산(案山))의 작국형세(作局形勢)가 금계포란형(金鷄包卵形)으로 귀천승(貴千乘) 부만금(富萬金) 손번성(孫蕃盛)할 대명당(大明堂)이다. 더구나 좌우용호미(左右龍虎尾)의 5대(5代), 12대(12代), 13대(13代) 묘소는 당처(堂處)를 자연적(自然的)으로 옹호(擁護)하는 현상(現象)이오니 이는 매우 상서로운 징조(徵兆)로 세세손손(世世孫孫) 숭조사상(崇祖思想)이 더욱 수승(殊勝) 하리라. 주산(主山)은 귀고봉(貴高峯)이요, 청룡(靑龍)은 광명수려(光明秀麗)한 귀격(貴格)이니 정차서자손(正次庶子孫 : 모든 자손)이 두루 흥(興)하며 귀(貴)할 것이고 내외쌍백호(內外雙白虎)로 외백호(外白虎)는 하수사(下手砂)가 두텁고 풍부(豐富)한 부격(富格)이니 귀순(貴順)하리라. 내백호(內白虎)는 다소 허(虛)하나 그 방면(方面)을 碑石(비석)으로 대치(代置)하였으며, 미방(未方)의 안산(案山)은 환포금산(環包金山)이요, 조산(朝山)은 일자문성영상봉(一字文星領相峯)으로 최상격(最上格)이며 부귀쌍전(富貴雙全)할 것이라. 파구(破口)는 곤신방(坤申方)으로 삼곡(三谷)의 수(水)가 교쇄(交鎖)하는 삼합구곡수(三合九曲水)로 수류(水流)하니 재물(財物)이 점점히 축적(蓄積)되리라. 혈토(穴土)는 비석비토(非石非土)로 콩가루와 같은 마사토(磨沙土)이니 최상(最上)의 혈토(穴土)로 기승(氣乘)이 증가(增加)될 것이며, 좌향(坐向)은 축좌미향(丑坐未向)으로 서기 2023년까지는 삼원팔운하괘(三元八運下卦)로 왕산왕향(旺山旺向)의 최길좌향(最吉坐向)이며, 서기 2024년부터는 삼원구운찬괘(三元九運贊卦)로 회향(會向)에 칠성타겁(七星打劫 : 모든 액운을 막아줌)이니 이 또한 길좌향(吉坐向)이다. 내룡(來龍)은 우선룡(右旋龍)이고 수류(水流)는 좌수우도(左水右倒)요, 파구(破口)는 곤신방(坤申方)에 구성위(九星位)는 정묘향(正墓向)으로 사대국(四大局) 중 수국(水局)이며 발복(發福)은 부귀겸전(富貴兼全)하고 인정(人精)과 정재(丁財)가 대왕(大旺)이며 수복쌍전(壽福雙全)으로 삼문유성(三門尤盛)하리라.
2022. 4. 박 장 우(朴奘佑) 올림.
4) 중심재 중건 및 시조묘역 이전 경위
옛 제도에 따라 묘역을 조성하고 재실을 지어 묘소를 수호지제(守護之制)하는 것은 후손들이 지녀야할 근본이다. 하지만 구)선영(先塋)은 도시의 확장으로 인해 지하철이 산맥(山脈)을 관통하니 혈(穴)은 끊어지고 그 소란스러움은 도심과 별 차가 없어 존령(尊靈)의 처소가 될 수 없어서며, 중심재(中心齋)는 세월의 풍화(風化)에 견디지 못하고 퇴락(頹落)하여, 명벌세족(名閥世族)의 재우(齋宇)로는 마땅치 않아 지난 2020년에 서영택 회장님의 발의와 서영봉 회장님의 주간하에 전 종원의 중의를 모아 문양리(文陽里) 봉계산(鳳鷄山) 시조 묘역을 동구(東區) 용수동(龍水洞) 상중심(上中心) 구계공(龜溪公)의 묘소 좌편 금계포란형(金鷄包卵形)의 명당에 혈(穴)을 잡아 이전(移轉)하고 구계공(龜溪公)을 수호(守護)하던 중심재(中心齋)를 중건(重建)하여 대대손손(代代孫孫) 달성세족(達城世族)의 전통을 계승하기로 결의하였다.
3. 중심재(中心齋) 사적
1) 1801년 중심재 중수 및 비각관련 참고자료
■ 시기 | 1796년 ~ 1803년 ■ 내용 | 경산 중방문중 대종계안으로 16세 ~ 18세에 해당하는 23명의 계원이 1796년부터 1803년까지 매년 12월 19일 그해 묘제 및 각 지출내역 등을 기록한 회의 기록. ■ 의의 | 신유년(1801년) 기록에 중심재 중수와 중심재 묘정비 관련 비용 지출에 대한 기록이다. 각 문중별 재원을 만들었는데 그 일부이다. ■ 中心齋重修參兩下 - 중심재 중수에 3냥을 내렸다. ■ 中心碑石吋名下錢伍兩陸戋下 碑石運去吋壹兩貳戋下 - 중심재 비석은 명하전(어떤 일을 하기 위하여 관련된 사람들에게 각각의 몫을 배당하여 거두는 돈)5냥 6전을 내렸고, 비석을 옮기는데 1냥 2전을 내렸다.
2) 중심재 비각 상량문
八公山中心龜溪先祖碑閣上樑文
述 夫
營昔年事未遑多功이後孫之心憾러니 到今日하야功旣訖에尊閣先祖之墓碑이 萬古靑山 一間畫閣이라恭惟龜溪先祖는貞平公伯胤이오 達城君丕孫이라 累代承封丕闡東方之華閥 0 0 0恩洋溢南土之頌聲 糴耗가減於獻基에 忠君愛民之誠이益切하시고 聖訓가習於玩味하시니修己進學之功이彌深이라 曰稽筮仕之時 乃在永宣之世이라 卜此幽宅하고 瞻彼公山하야 負艮其原하야與夫人로爲上下之墳이라 逮觀厥後曁子孫多枝葉之繁러니 壬丙歲兵燹之餘에或替祭禮라 亥子年凶荒之際에幾盡松衫러니 迺者諸孫追感爲先之誠으로 會議裕后之計이라 寒食에每一奉祀어늘壹無齋宇之搆成이오 盛德必百歲傳엔宜有石碣之銘刻이라 諸宗鳩聚合物하야堂이始建於庚子之春이라 州民雀躍赴工하야碑乃竪於壬戌之肇夏이라 秪緣財力之不給하야 未創碑宇之同時라 雨洗風磨로或恐龜頭之剝落하고 苔封莓食에難記蚪篆之臨看이라 惟玆今春에 經始新簷하야 仍成舊址이라 瓦礎星列하니未勞築杵之登登이오 棟樑雲齊하니已見崇墉之屹屹이라. 時來雲仍之同力에不日成功이라 焂若神靈之合謀하야無爲輸役일새文龜의座石이宛似院碑之舊規이오 彩鳳高簷이屹이如廟宇之遺法라 外面이華矣오 中心이樂之라 朱欄聳空하니瞻望이自此로多顔色하고 白石立하니實로風雨無憂生莓苔라 四百年遺風傳하니式遵勿替勿毁之戒하고 千億孫落星宴하야實踐肯構肯脩之謨어다 屹立而如彼在玆하야 永傳於千秋萬歲하라 敢陳短律하야 助擧(擧助)脩樑하노라 兒郞偉抛樑東 百尺枝巖이聳半空이라 佳氣玲瓏이凝艮麓하니 明堂은知在此山中이라 兒郞偉抛樑西 加沙峯이屹作雲梯하니 子孫丘墓가相隣近이라 香火千年토록富貴兮라 兒郞偉抛樑南 達城如畵하고水如藍이라 仁山이欲瘦文巖屹하고 元氣가瀜瀜하여 孕夕嵐이라 兒郞偉抛樑北 天光峯이秀入雲直 地勝鍾靈하야賢士가生하며 八公이趍拱一人石로다 兒郞偉抛樑上 蒼蒼松柏重瞻仰하고 黙會石龜가占吉祥며 靑龍白虎가飛騰状이라 兒郞偉抛樑下 雲烟隱映千人舍하고 地遠天長이指點邊하며 重重山勢가圍平野로다 伏願上樑之後이 雲仍蒙祐하며 丹雘이賁輝하고 繼繼承承하여 蔭福祿而依舊하며 年年歲歲하여 謹守護而常新하라
上之十九年戊寅四月初十日卯時上樑
任司十三代孫 寬復
文玉
斗復
十四代孫 橝
杺 撰
무릇 서술하기를, 지난 해 일을 미처 다 이루지 못하여 후손들의 마음에 꺼림직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서야 선조(先祖)의 묘비(墓碑)에 삼가 비각을 이루었으니 만고청산(萬古靑山)에 한 칸의 화각(채색이 아름다운 건물)이로다. 공손히 생각건대, 구계공(諱 沉)은 정평공(貞平公 : 諱 鈞衡) 맏아들(伯胤)이요, 달성군(達城君 : 諱 晉)의 큰 후손이다. 여러 대를 봉작을 받아 동방의 화려한 문벌로 크게 천명하였고, 덕을 쌓아 영남에서 칭송하는 소리가 넘쳐나게 하였네. 개인의 이익을 끊고 터를 헌납하여 환곡의 이자를 감하게 하였던 것은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이 더욱 간절해서이고, 성인의 가르침을 음미하고 덕을 닦은 것은, 수기(修己)와 진학(進學)의 공부가 더욱 깊어서이다. 출사한 때는 바로 영선(永樂과 宣德시기 : 조선초)의 시기라. 여기에 점을 처 유택으로 삼고, 저 공산(公山)을 살펴서 간좌를 등진 그 언덕에 부인과 함께 상하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 뒤에 후손이 번성할 쯤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 병화(兵火)로 더러는 제례를 폐하기도 하였으며, 해자년 흉황(凶荒)이 발생할 무렵에는 송삼(松衫 : 묘소주변)이 거의 다 없어 지기도 했네. 이에 선조를 추모하는 여러 후손들의 정성으로 모여 자손들이 잘될 계책을 의논하면서 ‘매 한식(寒食)때 제사를 받들 때마다 전혀 재실이 구성되어 있지 않아, 훌륭한 덕이 필히 백세토록 전해져야 할 것이기에, 마땅히 석갈(石碣)에 명(銘)을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다 하였네. 모든 종현들이 물자를 취합하고 모으고 힘을 보태어 경자년(1780년) 봄에 처음 당(중심재)을 세웠고, 고을의 백성이 기뻐하면서 일에 달려가서 비석이 마침내 임술년(壬戌年 : 1802년) 초여름에 세웠는데, 다만 재력(財力)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각을 같이 짓지는 못 하였고, 비와 바람에 혹시나 비각의 머리 부분이 깍기고 떨어져 나갈까 염려되고, 이끼가 둘러싸고, 풀이 둘러싸 그 글씨를 가까이 본 것도 기억하기 어려웠네. 이에 금년 봄에 새로운 처마를 짓고자 공사를 시작하여 마침내 옛터에 완성하였는데, 기와와 주춧돌은 별자리처럼 놓여져 있어, 힘들이지 않고 땅땅하게 공이로 박고, 대들보는 구름처럼 나란히 하니, 이미 높고 높은 담장이 우뚝하게 드러내었네. 때마침 후손들이 힘을 함께하여 즉시 완성하였는데 마치 갑자기 신령이 함께 도모함으로써 저절로 이루어진 것과 같았네. 문귀(文龜)의 좌석은 완전히 서원에 있는 비석의 옛날 규례와 같고, 채색한 봉황이 그러진 높은 처마는 묘우의 옛 법과 같네. 외관이 화려하니, 마음이 즐겁네. 붉게 칠한 난간은 공중에 우뚝 솟아 멀리서 바라볼 때 이제부터 보기가 좋았고, 백석이 견고하게 서 있으니 비바람에 이끼가 생겨날 근심이 없네. 400년 유풍(遺風)을 전하되 버리지도 말고 훼손하지 말라는 경계를 따르며, 이어온 많은 자손들이 아름다움 누각에서 즐기되, 선조의 유지를 잘 받들고 계승해야 하네. 우뚝 솟은 것이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영원히 천추만세에 전하세. 감히 짧은 가락을 펴서 긴 대들보를 들어 올리는데 돕고자 하네. 아랑위(兒郞偉 : 어기여차, 지극스러운 황제를 받드오니) 동쪽으로 크게 대들보를 던졌네. 백척의 지암(枝巖)이 반공(半空)을 솟아 오르고, 아름다운 기운이 영롱(玲瓏 : 곱고 투명한 모양) 하게 간좌(艮坐 : 구계공 묘소)의 기슭에 응결되어 있으니, 산의 중심에 명당이 있음을 알겠네. 아랑위(兒郞偉)는 서쪽으로 크게 대들보를 던졌네. 가사봉(현감공 묘소)이 우뚝 솟아 구름다리 만들었고, 자손의 묘소는 서로 이웃하고 가까우니, 향화(香火)가 천년토록 이어지니, 부귀를 누렸네. 아랑위(兒郞偉)는 남쪽으로 크게 대들보를 던졌네. 달성(達城)은 그림 같고, 흐르는 물은 쪽빛 같은데, 인산(仁山)이 마르고자 하여 문암(文巖)은 높이 솟으니, 원기(元氣)가 깊고 넓어 저녁 산기운을 품었네. 아랑위(兒郞偉)는 북쪽으로 크게 대들보를 던졌네. 천광봉(天光峯 : 팔공산 비로봉)은 빼어나 구름을 뚫고 곧게 서니, 승지(勝地)에 영기를 모으니 어진 선비가 태어나고, 팔공산이 뛰어 나아가 한사람의 돌을 위하여 읍을 하네. 아랑위(兒郞偉)는 윗쪽으로 크게 대들보를 던졌네.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가 거듭 우러러 보고, 잠잠(潛潛)히 있는 가운데 저절로 깨달은 돌 거북이는 길상(吉祥)을 점치고, 청룡의 백호가 날아 오르는 형상이네. 아랑위(兒郞偉)는 아랫쪽으로 크게 대들보를 던졌네. 구름과 연기가 많은 사람이 사는 집을 은근하게 비춰주며, 먼 땅과 긴 하늘이 한 점을 가리키며, 겹겹한 산세가 평야를 포위하네. 삼가 원컨대, 들보를 올린 뒤 먼 후손들은 복을 받고, 단청(丹靑)은 크게 빛날 것이고, 자손대대(子孫代代) 음덕(蔭德)으로 복록이 계속 받을 것이니, 이에 년년히 삼가 수호하여 늘 새롭기를 바랍니다.
임사(任司) : 13代孫 관복(寬復)(18世 1757년생, 14世흥태(興泰)의 後)
문옥(文玉)(18世 1764년생, 11世재겸(再謙)의 後)
두복(斗復)(18世 1778년생, 12世사선(思選)의 後)
찬(撰) 14代孫 담 (橝)(19世 1774년생, 14世시태(時泰)의 後)
심 (杺)(19世 1788년생, 14世승태(昇泰)의 後)
生 흥태(興泰)의 後)
3) 중심재 해체 시 사적
上 崇禎紀元後四丙午四月初三日立柆十二日上樑午時상 숭정기원후사병오사월초삼일립랍십이일상량오시
- 1846(숭정기원후4병오년)년 4월 3일 기둥을 세우고 12일 11시에 상량.
下 同十四年乙亥三月初七日甲辰00柱上樑 하 동십사년을해삼월초칠일갑진00주상량
- 1875(동치14년)년 3월 7일
도광 26년(1846년) 병오 4월12일 오시 상량
도감(都監) 서 양(徐 樣) : 19世 1789년생, 14世 흥태(興泰)의 後
감동(監董) 서준열(徐駿㤠) : 20世 1790년생, 14世 승태(昇泰)의 後
책응(策應) 서응렬(徐膺烈) : 20世 1788년생, 14世 계종(繼宗)의 後 서응(徐 木+應) :
도목수(都木手) 서일렬(徐一㤠) : 20世 1827년생, 16世 익후(翊后)의 後 이진택(李鎭澤), 김0손(金0孫), 박흥운(朴興雲),
고직(庫直) 이득이(李得伊), 구숙개(具宿介)
3) 구) 중심재
4) 완의문(完議文)
右完議事解北村中心理卽龜溪先生墓所守護之洞也先生之道德行誼非特垂範於後世官糴之減耗不知止於幾萬包之多而爲邱民沒世不忘之惠澤則山下居民尤當愛護自官己爲完減雜役自我廳亦不無鎭長保庇之道故玆成完議揭付以示爲去乎自今以後中心理段巨細煙戶雜役一体蠲減深得努尊專意守護之地宜當者
甲辰正月 日 紀綱 徐禹來
徐爾權
河經昊
裵夢行
有司 金爾弼
癸卯十月 日中心洞雜役厘正記
納正租拾斗 下里正租貳斗
倉直租捌斗 牟貳斗
笞杖牟陸斗 錢柒戔
盤貰租肆斗 牟參斗
書員租肆拾斗 錢壹兩肆戔
역_
완의한 건은 해북촌 중심리는 즉, 구계선생 묘소를 수호하는 마을이다. 선생의 도덕 행의가 후세에 특히 모범일 뿐 아니라 관가에 적모를 감하게 한 것은 몇 백년동안 몇 만석으로 너무 많아 그 숫자와 영구함을 알 길이 없으니 대구 백성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큰 혜택을 베풀었음으로 산하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더욱 마땅히 잘 수호할 것이다. 관에서 이미 잡역으로 완감하였으니, 우리 청(廳)에서도 애틋한 마음으로 오래도록 보호해 주는 방도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결의 한 바를 벽에 부쳐 보게 함은 지금부터 중심 일리의 크고 작은 민호에 잡역 일체를 감해 주니 가장 힘을 다해 묘소를 지키고 수호하는 곳에만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갑진(1784년) 1월 일 규율 서우래
서이권
하경호
배몽행
유사(有司) 김이필
계묘(1783년) 10월 일 중심동 잡역을 정리해서 바르게 기록
바치는 벼는 10두 하리의 벼는 2두
창고직은 벼 8두 보리 2두
태장은 보리 6두 돈 7전
반세(소반세) 벼 4두 보리 3두
서원(서기) 벼 40두 돈 1냥 4전
▲ 현감공파보에는 1844년으로 나온다. 하지만 서우래(徐禹來 : 1753~1793)는 14世 흥문(興門)의 현손으로 1844년 이전에 돌아가신 분이다. 따라서 정정 기록한다. 1780년 중심재를 건립하고 묘소 수호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것을 규율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4. 읍지(邑誌)등 문헌 고찰
1) 1643년 조고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부군 묘갈명
祖考 折衝將軍 龍驤衛 副護軍 府君 墓碣銘
世宗朝有諱沉爲制處使典醫少監
世宗以達城天作可爲城守以南山故驛基換賜公而居之且欲世世爵綠之公
辭之請減本府還穀耗每包三之一以惠邑民上從之自是府之公穀捧耗一斗
遵行數百年民甚德之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세종때 휘 침(沉)이 제처사 전의소감이 되었는데, 세종께서 달성을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성(城)이라고 여기시어 남산의 옛 역(驛)마을과 바꾸어 공에게 하사하여 살게 하시고 또 대대로 작록(爵祿)을 주려고 하시니 공은 그것을 사양하면서 대구부에 상환하는 곡식 중에서 한 포(包)마다 3분의 1을 덜어서 고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청하여 세종대왕도 그에 따랐다. 이로부터 본부에 바치는 곡식을 한 말씩 줄여 수 백 년 동안 그대로 시행하니 주민들이 큰 은덕으로 여겼다. 출처 : 용계선생문집
▲서 함(徐 涵 : 1535 ~ 1597) 字는 징원(澄源)으로 구계공의 6世孫이다. 3남3녀를 두었는데, 수사 이규문이 맏사위다. 용계공이 조부의 묘갈을 찬 한 것인데, 구계공관련 최초의 문헌이다.(용계공이 1637년 읍지와 중앙관료로 나아가 관련서적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서 변(徐 忭 : 1605 ~ 1656) 자는 자경(子慶), 호는 용계(龍溪) 아버지는 증장악원 정(贈掌樂院正) 서사건(徐思建)이고, 어머니는 주부(主簿)를 지낸 권응룡(權應龍)의 딸 숙부인(淑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1633년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 1652년 예조 정랑(禮曹正郞), 1656년 천안군수 시절 고변으로 추국을 받고 장살 당하였다. 1680년 신원되고, 1768년(영조 44)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동도회 회원이며, 「효종 어전 희우시회 인물도(孝宗御前喜雨詩會人物圖)」가 있는데 1653년 서변이 희우시를 짓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 옥계서원에 배향되었다.
2) 1734년 9월21일 승정원일기
희정당에서 군포의 감면에 대해 봉조하 이광좌가 영조에게 말한 내용
臣今有所言, 有似冥冥之中, 望報施之應, 而徐家祖先, 在達城時, 有施惠之事矣 。
朝家以達城有王氣, 欲空其地, 代給三倍之地, 則徐家祖先曰, 不願受田, 願除達城耗穀一斗五升, 朝家特准其請 。
蓋殘民所食還上, 不過三四斗, 則所除只升合矣。
其所施惠雖小, 而逐年計之, 則亦甚多, 故徐家以此興矣 。
신이 지금 말씀드리는 것이 하늘에서 보응(報應)하기를 바라는 것 같지만, 서씨(徐氏) 집안의 조상이 달성(達城)에 있을 때 은혜를 베푼 일이 있습니다. 조정에서 달성에 왕기(王氣)가 서렸다 하여 그 땅을 비우고 3배의 땅을 대신 주려고 하니, 서씨 집안의 조상이 전답은 받기를 원하지 않고 달성의 모곡(耗穀) 1말 5되를 줄여 주기를 원한다고 하여 조정에서 특별히 그 요청을 들어주었습니다. 대개 잔약한 백성이 먹는 환자(還上)는 3, 4말에 불과하니 줄여 주는 것은 단지 아주 적은 수량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은 비록 작으나 해마다 따져 보면 또한 매우 많은 양이므로, 서씨 집안이 이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 이광좌(李光佐 : 1674 ~ 1740) 자는 상보(尙輔), 호는 운곡(雲谷),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항복(李恒福)의 현손이며, 장령 이세귀(李世龜)의 아들이다. 1694년 20세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 1725년에는 영의정, 1730년에는 소론의 거두로 영조에게 탕평책을 상소하여 당쟁의 폐습을 막도록 건의, 글씨를 잘 썼고, 저서로 『운곡실기(雲谷實記)』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한국학중앙연구원
3) 1808년 8월 1일 승정원 일기
순조 임금이, 환곡(還穀)을 조적(糶糴) 하는 법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일일이 모곡(耗穀)을 취하는 것이 언제에 창창되었는데,
재해를 입은 해에 나누어 준다면 백성들이 과연 실효를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으니 당상 심상규15 가 답한 내용.
常平散斂之法, 其來已久, 而我朝仍之, 名色滋繁, 不可殫記 。
耗之爲言, 乃是雀鼠之耗縮, 而加取於民, 以補其縮之謂也 。
每石取一斗五升, 或歸公穀, 或作官用, 取耗之制, 不載大典, 始見於續編 。
然而世宗朝, 減大丘糴耗, 宣廟世, 有稍存耗穀之啓, 還穀取耗, 其制亦久, 創始之法, 文籍無考矣 。
“항상 고루 흩어 주었다가 거두어 들이는 법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로 인하여 명색(名色)이 늘어나 많습니다. 모곡을 받는 것으로 말하면, 바로 참새나 쥐가 먹어서 줄어든 것인데, 이것을 백성들에게 더 취하여 그 줄어든 것을 보충하는 것입니다. 1석 마다 1두(斗) 5승(升)을 취하여 혹 공곡(公穀)에 돌리거나 혹은 관용(官用)을 만듭니다. 모곡을 받아들이는 제도는 《대전(大典)》에 실려 있지 않고 《속전(續典)》에 비로소 보이는데, 세종조(世宗朝) 때에는 대구(大丘)의 적모(糴耗)를 경감해 주었고, 선조(宣祖) 때에는 모곡이 조금 있다는 계사(啓辭)가 있었으니, 환곡(還穀)에 모곡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제도 또한 오래 된 것입니다.”
◀ 심상규(沈象奎 : 1766 ~ 1838) 본관은 청송(靑松). 초명은 상여(象輿). 자는 가권(可權)·치교(穉敎), 호는 두실(斗室)·이하(彛下). 정조의 지우(知遇)를 받은 뒤 상규라는 이름과 치교라는 자를 하사받았다. 1789년(정조 13)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강제문신(講製文臣)에 선임되었다. 1821년 대제학,이용후생(利用厚生)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백성의 생활 근본을 제작(製作)에 두어야 한다고 늘 말하였다. 시호는 문숙(文肅) 한국학중앙연구원
4) 1832년 경상도읍지 대구읍지
在府西四里自琵瑟山來作周九百四十四尺高四尺內有三井二池有軍倉今
無龜溪徐先生沉世居達城而本朝 世宗朝以達城可修城塹 命賜南山古驛
基及蓮信池 新池換其地論其賞先生辭焉請減一邑宮糴耗遂石五升以爲
朝家百代之殊典備載龜巖書院廟庭碑
부(府)의 서쪽 4리에 있는 것이 비슬산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둘레 944척, 높이 4척, 속에 3정(井)과 2지(池)가 있다. 군창(軍倉)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구계(龜溪) 서선생(徐先生)이 세상을 침잠(겉으로 드러나지 않게)하여 달성(達城)에 거주하였는데, 본조 세종조(世宗朝)에 달성(達城)에 성을 수리하면서, 명하여 남산(南山)에 있는 옛 역터와 연신지(蓮信池), 신지(新池)의 그 땅을 바꾸어서 상(賞)을 주고자 하였는데, 선생이 사(辭)를 논감하여 한 고을의 환곡의 이자를 마침내 5승을 줄이니, 조정의 백대(百代)에 있는 특별한 은전이 되어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있는 묘정비(廟庭碑)에 갖추어 실려 있다.
▶ 1832년 경상도읍지 ‘달성’
대구읍지는 1637년 처음 간행 되었고, 1697년(우석규 : 1648 ~ 1713), 1757년(조춘경 : 1714 ~ 1786), 60년주기로 3차례 간행 되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현재 대구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1768년 대구 읍지로부터 8종의 읍지가 전한다. 그중 3종은 경상도읍지나 영남읍지 속의 읍지다. 1768년 읍지는 여지도를 참고하고 1757년 조춘경의 읍지를 보충한 자료이다. 따라서 1637년 최초의 읍지 이후 조금씩 보강 개수하여 읍지를 간행 했다고 볼 수 있다.
▶ 조춘경(趙春慶 : 1714 ~ 1786)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자는 일여(一如), 호는 승와(升窩)이다. 언양공 휘 항(恒)의 외증손으로 달성서씨 기축보(1769년) 보첩의 서문을 작성했다. 1753년(영조 29)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향리에서 학문과 덕행으로 널리 알려진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 ~ 1786)과 깊이 교유하였다. 향토대백과사전
5) 봉계산 선영 관련 문헌(임재일기에서)
1851년 1월 11일
晴。 以十八世祖達城君櫓南先生奉安玉溪書院事。 宗會龜院 。 鋤齋都汝純氏來訪。 巴岑族叔汝乘氏來訪。
맑음. 18세조(十八世祖) 달성군(達城君) 노남(櫓南) 선생을 옥계서원에 봉안하는 일로써 구암서원에서 종회를 하였다. 서재의 도여순(都汝純)씨가 내방하고, 파잠 족숙 여승씨가 내방하였다.
1853년 1월 24일
微陰。 家親與菊塢族叔丹陰三從善山叔主鍾烈 。 作鳳鷄山之行。
조금 흐림. 가친과 국오 족숙, 단음(丹陰) 3종(三從), 선산의 숙주 종열(鍾烈)이 봉계산(鳳鷄山)으로 가셨다.
1857년 5월 21일
巡相申公●●錫愚遣禮裨趙在豊傳喝。而設夕供。 是夕。 鷄明人靜。 陪話從容。 余問十八世祖達城君墓 。 在本邑河濱鳳鷄山。 而世久失傳。 蓋有●墳而誌表無徵 。 將欲設壇爲奉一祭之擧。 未知如何。 宋公曰。 此在子孫爲先之誠 。然近來此等事。未知皆純然一出於爲先否也 。惟在尊門諒處也
순상 신석우 공이 예비(禮裨)인 조재풍(趙在豊)을 보내어 저녁에 술자리를 마련한다고 전갈하였다. 이날 밤에 촛불은 밝고 사람들은 조용히 모시고 이야기 하였다. 나는 “18세조 달성군 묘가 본 읍 하빈(河濱)의 봉계산(鳳鷄山)에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있는 곳을 잊어버렸습니다. 다만, 묘는 남아 있지만 지표(誌表)를 찾을 수 없어서 앞으로 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모시려고 하는데 어떻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송공이 “이것은 자손에게는 선조를 위하는 정성이겠지만 그러나 근래에 이런 일은 모두가 순연히 선조를 위하는 것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귀댁에서 잘 헤아려 볼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 「임재일기(臨齋日記)」는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1825 ~ 1905)가 기록한 생활일기로 1845년 정월 1일부터 1861년 5월말까지 16년 5개월간의 일기이다. 분량은 280면이며 1면에 11 ~ 12행, 1행의 자수는 35자 내외이고, 작은 글씨의 행·초서로 썼는데 중간에 해서로 쓴 곳도 더러 있다. 출전 : 한국국학진흥원 국역
1857년 12월 16일
晴。 還家。 鳳鷄山設壇事。 宗會龜岩書院 。 分定任司。
맑음. 집에 돌아왔다. 봉계산에 단을 마련하는 일로 구암서원에서 종회를 가지고 각각의 임무를 나누어 정하였다.
1858년 3월24일
風陰。 鳳鷄山壇所齋舍上樑。 善山沈能蓍氏來訪。
바람 불고 흐림. 봉계산(鳳鷄山) 단소재사(壇所齋舍)에 상량(上樑)하였다. 선산의 심능시(沈能蓍)씨가 내방하였다.
1858년 12월 9일
晴。 以達城君櫓南先祖墓壇碑記●事。 將作湖西●●●行。是●午。俶裝。率轎軍二名及家僕龍石。行五十里。至沙乃堤下店宿焉。
맑음. 달성군(達成君) 노남(櫓南) 선조(先祖) 묘단 비기(墓壇碑記)의 일로 호서(湖西)로 가려고, 이날 낮에 채비를 꾸려 가마꾼 2명과 집의 종 용석(龍石)이를 거느리고 50리를 가서 사내제(沙乃堤) 아래 가게에 이르러 그곳에서 잤다.
1859년 4월 25일
晴。設壇●堅碑於十八代祖達城君墓。卽因行祀事。碑文趙肅齋撰。篆與書余所爲者。而篆則借啣於地主金敎性。是日。告祭後。余則陪家親還家。竗洞朴進士珽鉉以恩行來訪。往龜院留宿。
18대조18인 달성군의 묘소에 단을 설치하여 비를 세우고 이에 따라 제사를 지냈다. 비문은 조숙재(趙肅齋)께서 지으셨고, 전서(篆書)와 비문 글씨는 내가 썼는데 전서는 지주(地主 : 고을 원) 김교성(金敎性)의 이름을 빌렸다. 이날 고유제를 지낸 뒤에 나는 가친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묘동(竗洞)의 진사 박정현(朴珽鉉)이 사은(謝恩)하러 가는 길에 내방하여 구암서원에 가서 유숙하였다.
1860년 3월 3일
陰晴。宗會龜院。分定鳳鷄山中心寒食墓祀諸員。
흐리다가 맑음. 구암서원에서 종회를 하고 봉계산 중심에 있는 산소에 한식(寒食)에 있을 묘사에 여러 인원을 나누어 정하였다.
▲ 임재일기에서 여러번 世祖를 사용하였는데, 1851년 1월 기록에는 18세조로, 1859년 4월은 18대조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세조=대조를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임재공이 21世고 노남공이 3世로 21-3은 18이 된다. 18世祖=18代祖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노남공은 3世인데 여기에 祖를 붙혀 3世祖로 표기하거나 답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世=代, 世祖=代祖, 世孫=代孫은 조선시대 모든 행장, 묘갈에 공통된 사실이다.
▲ 김교성(金敎性 : 1807 ~ 1875) 본관은 청풍(淸風)이며 자는 경회(景誨)이다. 1834(순조34)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동부도사(東部都事), 선공감주부, 빈부도사, 삼등현령(三登縣令), 서흥부사, 광주목사(光州牧使), 여주목사, 동부승지 등을 두루 거쳐 1870년 돈녕부도정이 되었다. 만년에는 사천(沙川)에 초가집을 지어 종인(宗人)들과 창화(唱和)하면서 지냈다. 노남공 묘단비 전서를 썼다.
5. 영모재(永慕齋)와 봉계산(鳳鷄山) 구)선영
https://youtu.be/XrdiOeITcQs?si=WSqroXgGwrhwhBO4
달성서씨 중심재
대구광역시 동구 용천로 30길 54-7(용수동 329)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관태조카님 익히 실력을 잘알므로 수고하셨고
특히 창호조카 편집솜씨가 아주 뛰어납니다.
두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