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목숨 구명자(求命者)
임병식 rbs1144@daum.net
일전에, 그간 풀리지 않은 문제, '충무공은 어떻게 생기신 분일까' 하는 것을 풀어줄 만한 기사가 보도되었다. 모 신문에서 취재한 것인데 통영 적량묘사당에서 당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영정이 나왔다는 것이다. 사진을 보니 그간 표준영정으로 알고 있는 얼굴과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기른 수염의 모습은 같으나 눈과 눈섭이 많이 치켜올려져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무인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서 놀라던 참인데 어간에 고향 친구로부터 카톡 문자가 왔다. 느닷없이,
“자네 정경달 선생을 알고 있는가?”
그말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어찌 내 마음을 간파했나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전번에 내가 이순신 장군에 관한 이야기를 쓰면서 광양현감 어영담에 대해 언급한 것을 읽은 모양이었다. 그 물음에,
“그럼, 알다마다. 당연히 알지 ”
대답했다. 그래놓고도 생각하니 나와 어딘가 모르게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다음에는 정경달 군수에 대해서 글을 쓸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친구는 내가 올려놓은 글을 읽으며 어영담현감이 바다에서의 공로자라면 육지에서 크게 힘을 보탠 그를 떠올리며 그것을 상기해주고 싶은것 같았다.
바로 그 사람. 이름은 정경달(丁景達 1542-1602). 호는 이회, 선산군수를 지낸 사람이다. 임진왜란때는 장군의 보급참모로써 적극적으로 도와 안정적으로 전투를 치르게 한 분이다. 친구도 그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공은 1592년 전쟁이 발발하자 선산군수로서 의병을 모아 관찰사 김성일과 함께 경상도 금오산에서 크게 적을 물리쳤다. 이 사실을 안 장군이 나중 1594년 조정에 계청(啓請)을 하여 그를 종사관으로 삼는다. 그는 문과급제자로서 시문에도 띄어났다. 그리하여 명나라 사신이 올때는 접빈사로 활동했다.
당시는 전쟁도 장기화되고 군의 기강도 무너져 많이 흩어지고 보급추진도 원활하지 못한 때였다. 이런 때에 공은 둔전을 일구고 적기에 파종을 하여 넉넉하게 군량미를 확보했다. 그렇게 빈틈없이 장군을 보필했다. 그는 행정처리에도 솜씨를 보여 장군을 안도케 했다.
그렇게 공은 보필도 잘 했지만, 무엇보다도 더 크게 평가할 부분은 장군이 누명을 쓰고 옥고를 치를때 보여준 구명운동을 들어야하지 않을까. 목숨부지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임금을 알현하여 마음을 누그러뜨리는데 앞장 섰기 때문이다. 서슬퍼런 선조도 그의 논리정연한 말에 경청을 했던 것이다.
선조는 몇가지를 문제 삼았다.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 죄와, 적을 놓아주고 치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저버린 죄,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에게 죄는 몰아넣은 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제멋대로 거리낌없이 행동한 죄를 씌웠다.
이는 원균의 모함도 작용했지만 기실은 선조 자신이 장군을 기필코 제거하려는 뜻이 강했다. 장군이 가는 곳마다 승전고를 올리고, 백성들이 따르니 신변에 불안을 느낀 측면도 컸다. 미움이 차곡차곡 쌓이다보니 하는 행동마다 고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금부로 압송이 되자 선조는 가감없는 적의를 드러냈다. 서슬 퍼런 독기에 그 어떤 이도 말리려들지 못했다. 아니, 그 누구도 나아가 구명의 소신을 밝히지 못했다. 영의정 유성룡과 좌의정 이산해 대감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이때 종사관인 공과 정철이 나섰다. 정철은 전라좌수영에 있을 때부터 장군을 도운 부장이며 장군의 모친을 고음천으로 모신 사람이다. 목숨을 걸고 선조 앞에 나아갔다.
“이순신의 애국심과 적을 방어하는 재주는 일찍이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쟁에 나가 싸움을 미루는 것은 병가의 승책(勝策)인데 어찌 적세를 살피고 싸움을 주저한다하여 죄를 돌릴 수 있습니까. 왕께서 이 사람을 죽이면 나라가 망하겠으니 어찌 하겠습니까.”그러면서,
“이순신을 죽이면 종묘사직이 망합니다.” 하고 단호하게 목숨을 건 말을 했다. 이에 앞서 두 사람은 서애 유성룡과 백사 이항복 두 사람을 찾아갔다.
“그대가 남쪽에서 왔으니 원균과 이순신의 옳고 그름(是非)에 말해 줄 수 있겠는가?” 물으니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말로써 해명할게 아니라 다만 보니, 이순신이 붙잡혀가자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이공이 죄를 입었으니 이제 우리들은 어떻게 살꼬’할 뿐이었소. 이것을 보면 그 시비를 알 수 있을 것이요.”대답했다.
이들이 임금 앞에 아뢰기 전에는 정탁대감도 나아가 배알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으로부터 전후사정을 듣고 백성들의 민심파악을 한 후에 마음을 바꿔먹었다. 목욕재계하고 죽을 각오로 신구차(伸救箚) 써 올렸다.
“(전략) 이순신의 처형을 좋아할 놈들은 왜 놈들 뿐입니다. 전하!” 이렇게 끝을 맺는 애끓은 글이었다.
이를 돌아볼 때 종사관 정경달의 독대는 목숨을 건 행동으로서 추호도 용서치 않고 죽이려는 선조의 마음을 잠시 흔들리게 하고, 뒤이어 구구절절한 정탁대감의 신구차는 결정적으로 마음을 바꾸게 한 요인이 아닌가 한다.
그런 점에서 정경달 공의 업적은 장군의 보급참모로써 뿐만 아니라 장군의 목숨을 구명한 큰공도 있지 않나 생각한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