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매 / 윤금초
- 국사전(國師殿) 기왓골
천야만야 지붕 아래 천야만야 익는 서원
송광사 전각 70채 기왓골에 눈이 아리다.
지붕에 지붕을 덧댄 닫집 하나 우뚝하다.
휘휘 친친 둘러쳤다, 겹처마 서까래 위에
연꽃무늬 수막새 타고 눈석이 흘러내린다.
따지기 절집에 이르러 대숲 바람 귀를 씻고.
밀가루 반죽 다루듯 화강석을 마른 탑신.
여덟 마리 사자 발톱 매지구름 지르밟고
지붕골 누비주름이 이승 물매 재고 있다.
가전체(假傳體)로 오는 봄 / 윤금초
산에 들에 가려움증, 잎눈 뜨는 가려움증
따지기때 들머리에 저승 야차 다녀갔나?
삼이웃 뜰썩하도록 곡지통을 내쏟는다.
눈물 콧물 버캐 자국, 돌니 박힌 벼랑길에
휘진 몸 끌고 오는 봄의 전령 오리궁둥이
가근방 짜하게 번지는 볕뉘 상큼 부려놓네.
비루먹은 꼬리 흔드는 황소거사 영각 켠다.
새도록 가전체 쓰는 꽃의 눈빛 적바림하고
숯검정 다 된 작약도 입귀 절로 벌고 있다.
독의 계보 1 / 윤금초
그러나 그 모든 것도 미치지 못한다. 나를 깨무는 그대 침의
무시무시한 마력에는
내 넋을 여한도 없이 망각 속에 담그고는
현기증을 일으키며,
쇠잔한 영혼을 죽음의 기슭으로 굴려 가는 내 힘!
샤를 보들레르 「독」 부분
독을 퍼다 독 죽이는
독은 결코 독 아니야.
복어회에 복어 독을 거짓말처럼 얹어설랑 혀를 톡 쏘는 맛 즐기는 쾌감, 삶이라는 음식 위에 죽음이라는 소스 살짝 덧입히는 시도랄까. 그야말로 저릿저릿 오금 못 펴게 하는, 희열의 극치 아니겠어? 광대버섯이 품고 있는 무스카린 말씀이야. 그게 글쎄 부교감 신경 흥분시킬 때 흰독말풀에 함유된 아트로핀으로 진정시킬 수 있는 이치 같은 거야. 일테면 중독도 가능하고 해독도 가능하단 말씀이야. 죽였다 살릴 수 있고, 살리고자 죽일 수 있단 말씀이야. 아으 몰라, 다롱디리…. 독살의 역사에서 책을 이용하는 전설적 방법 알고 있남? 갈피마다 독을 묻혀 손끝에 침을 발라 한 장 한 장 책장 넘기면서 그걸 읽을 때 말씀이야. 독이 그만 몸속으로 스며들어 목숨 앗는 수법 말씀이야. 책 내용 재미있으면, 허벌나게 재미있으면 그 사람 그만큼 빨리 죽는 거야. 알고 보면 독을 안고 노는 사이, 독도 우릴 데리고 노는 거지.
그러게.
이참에 글쎄
살고 죽는 전율 만끽했지?
천창(天窓) 2 / 윤금초
내 사는 도심 바깥
그 6층 옥탑방엔
달빛도 세 들어 사는
옹색한 서재가 있다.
썼다가 도로 지우는
글밭 가는 비상구 있다.
옛 선비 길러냈다는
사가독서(賜暇讀書)는 언감생심
베갯머리 포개둔 책
손때 절은 갈피도 있다.
자다가 벌떡 깨어나
머리 뜯는 비상구 있다.
목멱산(木覓山)* 그늘 / 윤금초
붙잡아도, 붙잡아도 가는 세월 꼭뒤 너머
울력 나온 낮달 그예 잡목숲길 기웃댄다.
산울림 목 붉은 울음
풀다 말다, 풀다 말다….
허천뱅이 산턱인가
출출한 해거름 녘에
걸귀 든 그늘 자락 숲정이를 붙잡다 놓고
귀 밝은 저 푸새들도
들숨날숨 숨 고른다.
시나브로 떨고 있다, 늙수그레 시든 뒷등
황동(黃銅) 물빛 뒤집어쓴 맨몸 시린 가지 사이
눈부신 갈잎 갈피가
시전지(詩箋紙)로 펄럭인다.
* 서울 남산의 다른 이름.
- 『독의 계보』(2023. 문학의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