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편 14절-49편 3절.
48편 14절: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49편.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절-3절: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찌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48편 14절: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우리 주위에서 무슨 말끝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너밖에 없다.’ 또는 ‘바로 그 사람밖에 없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은 다 되어도 그 사람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이렇게 말을 할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거다.
그러면 오늘날 자기는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이 자기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 것을 들었느냐? ‘아, 그 사람밖에 없다. 그 일은 그 사람에게 맡겨라. 그 사람 참 신용이 있다.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 이런 말을 하느냐, 아니면 ‘에이, 그 사람 믿음 없다. 수 년 동안 교회에 다니고 집사가 되었는데도 믿음 없다’ 이런 말을 하느냐? 자기가 살아오면서 좋은 소리던 나쁜 소리던 들은 기억이 있느냐? 그랬을 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를 한 번 생각을 해 봐라.
또 자기가 이런 소리는 안 해 봤느냐? ‘수수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나냐? 다른 사람들은 다 제쳐놓고 왜 하필이면 나지?’ 그런데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해서 교장 선생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면 그 때도 ‘하필이면 왜 나냐?’ 라고 하느냐? 그런 것처럼 자기 마음 속에서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다. 정말 우리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말을 해 본 적이 없느냐? 무슨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이게 해결이 되어야 이런 말이 나오지 세 끼 밥 잘 먹고 직장 잘 다니고 하면 이런 소리가 나오느냐?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지 평화를 원하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되어지는 홍수라든지 전쟁이라든지 지진이라든지 이런 것을 원치를 않는다. 그런데 지진이 나서 땅이 내려앉는다든지 홍수가 나서 쓸어버리든지 하는 것을 당하거나 듣거나 볼 때 하나님께서 하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생각해 봤느냐?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신앙이다. 믿는 우리가 일도 하고 부자로 살 수도 있는 거지만 매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런데 대부분 인정을 안 한다.
영영하신 우리 하나님은 첫째로,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설정을 했다. 자기의 구원을 설정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걸 알까? 잘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잘 모른다.
두 번째는, 세상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신령계 천국의 영물의 존재까지 창조를 했고, 우리의 이룰구원에 이용하라고 사시사철을 통하여, 인류의 생활과 문화발전을 통하여, 생물들의 생태계를 통하여, 인간 자기의 몸 안팎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통하여 역사를 하신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몸 밖에서만이 아니라 몸 안에서도 역사가 일어나는데, 물론 병적인 것도 있지만 이룰구원의 깨달음을 위해서 자기 몸 안에서 그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아느냐? 자기 몸 속에서 세포조직이, 내장의 모든 기관이 어떻게 움직이고 돌아가는 건지 자기 몸인데도 자기가 모르는 존재다. 그러니 어떻게 똑똑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자기 몸도 자기가 가누지 못해서 자기 몸을 병원의 남의 손에 맡기는데 어떻게 자기가 똑똑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예수 믿는 것은 현실이요, 현실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이 되어가고 있는 거다. 자기 몸의 내장이 돌아가는 것이 자기가 하는 것 같으냐? 아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이걸 시인하는 것이 신앙이고, 이걸 모르는 게 교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시인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제일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시인하지 않고, 부정하고, 도외시하고, 모른 채 남의 일에는 간섭을 아주 잘 하는 거다. 자기가 신경 쓰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하는 게 거의가 남 쪽으로 되어있지 자기 쪽으로는 잘 안 된다. 그나마 자기 쪽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돈 많이 벌고 잘 먹고 잘 사는 거다.
자타의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위하여 사용하고 응용하고 활용하라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만물과 모든 법칙을 만들어 놓은 거다. 따라서 인간이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대로 본다면 자타의 구원과 관계가 되어있는 거다. 이것을 빼버리면 아무런 살 가치가 없는 거다. 짐승과 똑같은 거다.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주님을 닮게 해 주시려고 성령의 역사로 주님을 믿게 해서 신령세계를 실력적으로 원 것 마음 것 누리게 해 주시려고 우리를 믿게 해 주셨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제 말한 내용의 신앙사상을 가지고 사느냐? 어찌하던 ‘예수 믿어서 세상 복 복’ 하는 이건 자타의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방신을 믿는 사람과 똑같다. 또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름밖에 없다. 말밖에 없다.
네 번째는 현재적으로 성도들을 성령으로 끊임없이 보호 인도하시고 영능의 실력을 성장시키는데 밤낮으로 여념이 없으신 주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는 이 하나님이 누구의 하나님이냐? 나의 하나님이다. 아무리 믿음이 없더라도 이 지식은 가지고 있어야지 이 지식마저 없다면 이건 멍텅구리다.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이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는 것 같으나 내용적으로 보면 세상소원 목적을 들어주는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불에 타질 것을 이루게 해 달라고 한다. 이것이 이뤄지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면서 이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는다. 얼마나 어리석으냐?
여러분들, 이런 기도 안 해 봤느냐? 불에 타지고 없어질 것을 구하는 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이 목적을 두고 기도하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이건 이방인들이 구하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특히 교회 인도자들이 이런 것을 구하라고 바람을 넣고 있으니 이건 예수님과 대적이다. 이건 거짓이다. 이건 사단의 종들이다.
초등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학문적인 것은 안 가르쳐 주고 거짓말만, 도둑질하는 것만, 사람 죽이는 것만 가르친다면 부모가 자기 아이들을 이런 학교에 안 보낼 거다. 선생으로부터 배우지 않아도 될 것을 배우면서 시간낭비만 하고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특히 세상 속화된 거짓된 교회들이 세상 것을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이건 일반사람들의 양심보다도 못한 거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힘 것 노력을 해서 세상 것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건 하나님 앞에 벌을 받아도 단단히 받아야 한다. 이치를 생각하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
49편. 고라자손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절: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물론하고 세상 사람들 모두 들으라고 한다.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말이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기와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이라면 누구든지 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보면 다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하며 자기 말을 한다. 그래서 들어보면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 몰라도 그만 알아도 그만인 가치 없고 쓸데없는 말이 많다. 술을 잔뜩 먹은 사람이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말을 할 때 길 가는 사람이 그 말을 다 들어줘야 하느냐? 이웃사람들이 하는 말을 보면 오히려 ‘차라리 안 들었으면’ 하는 말도 있다.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된다. 예수 잘 믿으면 모든 일이 만사형통된다’ 이런 말은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왜냐?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이치가 아니냐? 첫째는 영원에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두 번째는 불에 타질 목적이기 때문이고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왜 거짓말이냐? 예수를 안 믿는 사람 중에는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부자로 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거짓말들을 목사님들의 세계에서 펑펑 하고 있다.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된다’ 라고 영적인 차원에 놓고 말을 하면 틀림이 없는 거다. 그런데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된다.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하는 것마다 만사형통이 된다’ 라는 이걸 배우려고 신학대학에 들어가고, 외국에 가서 박사를 따고 하는 거냐? 외국에서 실컷 공부하고 돌아와서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되고 세상에서 모든 일이 만사형통이 된다’ 라고 일 년 열두 달 성경구절을 가지고 말을 해도 이건 성경의 뜻도 아니고, 이런 말은 신학대학이나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다.
말세의 사람들이 귀가 간지러워서 귀신의 말을 듣기 좋아한다고 했듯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귀신이 들린 거고,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너도 정신 사상이 마찬가지가 된다. 실질적으로 점쟁이 집에 가면 귀신들린 점쟁이나 무당이 뭐라고 하느냐? 부자 되고 안 되고 하는 면의 말을 하느냐, ‘천국이 어떻고’ 이런 말을 하느냐? ‘언제쯤 복이 들어오겠다. 이 집에 화가 들어오는구나. 액땜을 해야 한다’ 이런 말을 한다. 이게 바로 귀신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과학적인 세계가 눈에 안 보이는 법칙을 이용해서 뭘 자꾸 만들어 낸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째서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느냐? 정신이 돌아가고 마음이 돌아가는 것은 왜 연구를 안 하느냐?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안 보이는 것으로 더 발견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의 마음이 어디로 돌아다니는 건지,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건지, 무슨 물을 먹고 있는 건지 몰라도 되는 거냐? 이런 식으로 평생을 살아봐라. 너는 그 꼴밖에 안 된다. 무슨 꼴이냐? 그런 것을 구하면서 아무리 오래 살아봐야 그 누림이 언제까지 가겠느냐? 그리고 자기 소원대로 다 가져지는 거고 누려지는 거냐? 아니다. 천국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인생의 가치에 대해 생각을 못할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게 사는 거다’ 하는 게 성경에 있다. 인간 나를 만드신 분이 ‘너는 어떻게 살아야 제일 가치가 있는 거다.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가치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 다 있다. 이런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성경 말고 또 있느냐? 인간 자기가 어떻게 사는 게 가치 있게 사는 것인지에 대해 이 세상의 어느 유명한 학자가 기록해 놓은 게 있느냐? 성경밖에 없다. 이 성경을 읽고 배우는 기독자이면서 세상에서 그냥 보통으로 살다 가고 싶으냐, 저질적으로 살다 가고 싶으냐, 고차원적으로 살다 가고 싶으냐? 사람의 가치가 어디서 나오는 거냐? 부자로 산다고 해서 고차원적인 거냐? 아니다. 인간의 가치는 고차원적인 인격에서 나오는 거다.
돈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사는 게 얼마나 추하고 더럽고 저질스러운 게 많으냐? 왜 그렇게 되는 거냐? 인격적 차원에서 저질이기 때문이다. 마4:의 마귀시험에서 세상에서 부자 되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에덴동산에서도 이걸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길은 저질적 차원의 길이다. 사람의 정신 사상 마음이 돌아가는 이치를 못 깨달으면 자기는 미련할 수밖에 없다.
2절: ‘귀천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찌어다.’ 빈부귀천을 물론하고 다 들으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가난과 부요와 상관이 없이 다 들으라는 말이다. 부자만 들으라는 게 아니라, 가난한 자만 들으라는 게 아니라 다 들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는 말이라는 거다. 왜 관계가 없는 거냐? 다른 세계의 말이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심판은, 신적인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세상의 부요나 가난과는 상관이 없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교회들이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된다’ 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세상부자가 되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고, 가난하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다는 말의 투가 되기 때문에 거짓말이 된다. 그리고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된다고 해서 예수를 믿었는데 예수를 믿은 후에 실지로 부자가 됐다면 이제는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되는 셈인데, 그럼에도 계속 믿는 것은 부자로 만들어준 것이 고마워서 그냥 믿어주는 거냐?
그러면 이건 어떠냐? 가난하니 주일을 지키기도 힘들고 예수 믿기가 참 힘들다. 그래서 ‘돈부터 많이 벌어놓고 믿으련다’ 라고 한다면 앞에서 말한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어느 쪽이 희망이 있느냐? 똑같으냐?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된다’ 라는 이 말은 가난한 사람이 예수 믿고 나서 부자가 되면 예수님 앞에서 졸업을 해야 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니 ‘돈 많이 번 다음에 믿겠다’고 하는 사람과 다른 게 뭐냐?
3절: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이 성도가 참 고상한 성도다. ‘지혜’가 무엇이냐? 일반적으로는 사물의 사리를 잘 밝히고 그 일을 잘 처리해 나가는 능력이다. 진리성도의 지혜는 진리말씀에서 나오는 지혜인데, 이 지혜는 영원 궁극적 결과적 최종적 목적적으로 신령세계 하나님 나라에서 되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현재 자기의 현실에서 미리 미리 영능의 실력을 잘 닦고 준비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믿는 사람은 이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일반적으로도 사람이 지혜가 없으면 이 사람은 게으르고 미련하고 이용만 당하고 손해를 보며 고통을 당하듯이 예수 믿는 사람이 진리지식에서 나오는 지혜가 없으면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하고 믿음이 자라지 못한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는 교회를 수 년 수십 년 다녀도 깨닫는 것도 없이 날마다 그냥 그 모양일 수밖에 없다.
‘명철’은 무엇이냐? 일반적으로는 귀가 밝고 보는 눈이 예민하여 지혜가 있어서 감각이 민첩하고 사리에 밝은 것을 말한다. 신앙 면의 명철은 영의 귀가 열려있고 영적인 면의 감각성이 예민하고 민첩하고 민감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바르게 처리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이러면 영적인 차원의 분별력이 얼마나 빠르겠느냐?
우리는 믿어갈수록 지혜가 있고 명철해서 신앙의 차원이 올라가야 한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아는 것이 많아야 하고, 교회에 오래 다닐수록 깨달음이 많아야 한다. 이게 없다면 하루하루 밥 먹고 사는 게 무슨 가치가 있느냐? 그래서 1절로 3절까지에서 ‘다 들을지어다’ 라고 하는 거다.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령천국을 상속받을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이 듣고 있지는 않느냐?
솔직히 말해서 자기가 테레비 앞에 앉아서 코미디나 드라마를 보면서 귀를 쫑긋하는 것과,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중에 어느 면에 자기의 정신과 마음을 더 기울이며 듣느냐? 어느 쪽이 더 진하게 자극이 되고, 자기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거다.
그리고 교회에서 무슨 말을 듣기 원하느냐? 세상에서 부자 되라는 소리를 듣기 원하느냐? 그렇다면 장사꾼에게로 가라. 돈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된 장사꾼에게로 가서 배워라. 그래야 옳은 거다. 그러면 장사꾼에게로 가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정말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사람이냐? 꼭 그렇지도 않다. 속셈이 따로 있을 수 있다. 지혜의 말을 듣고 자기의 세상을 펼쳐보려고 하는 자가 진실한 종들 틈에 끼어있기도 하다. 이건 거짓 종이라. 거짓 교인이라. 이런 자는 숨바꼭질을 하듯이 교인들 틈에 꼭꼭 숨어서 티를 안 낸다. 숨소리마저 내지 않는다.
의왕에서 공부(주-의왕 포도원 제일교회에서 김경형, 김정학목사님이 교역자 및 신학생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성경 및 신학공부 모임)를 하는데, 지난주에는 목사님들이 상당히 많이 와서 밥상을 차릴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니 고칠 것은 고쳐야 하겠는데 딴 짓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은 그런 사람에게 누가 목사안수를 준 거냐? 목사라고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줄 알아야 하는 건데 사람이 못쓰게 돼버렸다. 그러니 영적인 차원에서도 앙화요, 일반적 생활에서도 앙화다.
자기가 지혜자가 되고 싶고 명철의 사람이 되고 싶으면 세상의 부요와 관계가 없는 하늘의 교훈을 들어야 한다. 하늘의 진리이치를 들어야 한다.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싶거든 세상의 장사꾼에게 가서 들어라. 그러나 자기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에 속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자기가 금수와 목석이라면 하나님을 안 믿어도 되겠지만 인간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만드시고 나그네 세상을 살게 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자기가 세상에 존재가 있고, 환경이 있고, 삶의 처소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땅에 살게 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는 거다.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목적을 깨닫도록 하려고 아직까지 이 땅에 두고 계시는 거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거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드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느냐? 분명히 알 것은 본능적으로 사는 짐승들도 하나님께서 인간 나의 구원을 위한 이용 활용물로 태어나게 한 거다. 우로지택으로 자연은총을 내리는 것도 성도들의 구원을 위한 쓰임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거다.
인간 자기를 왜 동물이나 식물들과 다르게 인격자로 지었는지, 인간에게 왜 지혜를 주시는 건지, 원치 않는 고통이 왜 오는 건지?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이유와 목적을 성경에 다 밝혀 놓았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혜를 얻고 명철자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고, 자기가 깨달아서 다른 사람에게 지혜를 가르치고 가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적인 학식이 있던 없던, 부자이던 가난한 자이던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기가 되어야 한다. 듣지 않고 있다가는 결국은 자기가 버림받을 날이 온다.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