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조카인 병탁이한테 전하고싶픈 야기 사랑하는 내조카인 병탁아 오랜만 이다 너와 내가 언제 우리둘이 얼굴을 마주 했는지 나데로 내가 기역도 할수없은 긴세월 속에 그동안 멀리 떨어져 살면서 서로가 여유롭지 못한 환경 속에서 먹고사는 생활를 앞세워가며 서로가 살다 본이 우리가 그동안 마주 했던 날들이 너무 많은 세월들이 흐르고 말아구나
이작은 아버지는 오늘 날 까지 살아 오면서 내마음은 항상 언제가는 한번쯤은 내조카인 너들에게 지난 날에 내가 너에들 앞에서 했던 내행동에 일들을 그렇게까지 해었야 했었던 그사연들에 야기들를 너에 들게도 한번쯤은 하고 싶었지만 내가 그동안 살아 왔던 지난 나날들이 그동안 여유롭지 못해서 나데로 허덕이며 살다본이 오늘날에 너무 많은 세윌들이 흐르고 말았구나 한가족에 집안에 형제들이란 가까이 살면서 때로는 한자리에 모여 한순간 서로에 의견속에 가끔 이해심에 부족으로 형제간이라 할지라도 출돌도 하고 서로가 앵정한 모습으로 돌아서기도 했다가 형제이기에 영원히 왜면하지 못하고 어느때가 다시 만나게 되면 서로간에 옛전에 무슨 일들이 있었야 하든이 반가워 하며 또다시 화해도 하면서 이러궁 저러궁 하며 우리에 인생관 삶속에서 살아 가는 인간들 이기에
어느 집안 형제들이나 한세상 살아가면서 너도 나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들이 이루워지고 있는 현실들이 인간들에 삶들이 란다 형제들 간에 때로는 이러쿵 저러쿵 했다 가도 한집안에 형제들 이기에 어느날 형제 집안에 어려움 일들이 있쓸때는 그동안에 그누구에 잘잘못에 탓도 잃어벌인체 서로가 자기들에 능력데로 도와 줘가며 염여 속에 걱정도 해줘 가며 같이 협력하며 사는 것이 한집안 형제 들이고 친인척 들인데 우리 형제들은 여기저기 흐터져 살면서 처음부터 각자 가정을 꾸미고 살아 가던 출발점부터 서로가 어려운 환경 속에 시작된 우리 형제들은 어려워기에 그누구를 먼져 도와 주고 보살펴 줘가며 살아야 한다는 여유있는 마음속에 생활들이 너도 나도 부족 했었기에 내형제 간이라 할지라도 서로가네 무심하게 살수밖게 없었지 않았나 싶군나 나부터도 그동안 그누구에 한번쯤 실수들에 잘못도 용서하기 힘든 이해심 부족으로 우리형제 간에 서로가 상쳐들만 가슴속에 한아름씩 품고 오늘날 들을 너도나도 살아온 것같다
병탁아 너로써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작은 아버지에 야기들이 길고 짜증나는 야기들이 될지라도 끝까지 다읽봐주고 이해할수 있는 부분들은 이해를 해주워 쓴면 고맙게다 이제 너희 나이도 사십에 나이가 넘는 중년에 남자로써 그동안 너데로 많은 사람들 공간들
속에서 서로가네 주고받고 이루워지고 있는 사람들에 야기들을 보고듣고 체험 속에 너데로 느끼면서 그동안 때묻지 않았던 너에 마음은 오늘날에 이세상 모든 사람들 속에 야기들이
우리형제들 집안들 뿐만이 않이고 이세상 모든 집안들 속에 이루워지고 있는 것들 처럼 한번쯤 너데로 느껴본 경험도 있었는지 모르지만 이세상 사람들 속에 이루워 지고 있는 사람들 간에 일들 이란 어느 집안들이고 각자 나름데로 많은 사연들 속에 야기들이 많이들 있는 거란다 어느 집안도 그 누구에 한사람에 잘못된 일들로 발생된 일들만은 않인데도 서로가 각자 다른 자기들에 유리한 입장들만 앞세워 성토해가며 본질에 야기들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면서 자기 나름데로 유리한 아기들을 하로라면 상대방 한쪽에서 말없이 묵묵히 살고있는 사람은 결국 한번쯤 변명도 못한체 죄많은 사람들이 되어 벌리는 일들이 양쪽에 서로 다른 인식속에 차이 점에 야기들이 않이게는냐 너도 그동안에 너에 부모님 들한테서나 너에 주변 속에 사람들한테 알게 모르게 이런 저런 야기들을 든다 보면 서로 다른 자기들만에 인식들에 차이점 속에 야기들을 너도 한번쯤은 들었쓸거라 믿은다 우리형제들 집안 한두 집들이 자기들에 서로 다른 인식속에 차이로 오해 하며 떨어져 살면서 오늘날에 형제 집안들끼리 서로간에 왕래 한번도 제되로 못하며 오늘날들을 지내 온는 것도 우리집안 형제들 간에 비극 인지도 모르게 구나 병탁아 이제 너도 사십이 넘은 중년에 남자로 너데로 판단 할수 있는 능력에 남자에 나이로 단순히 오늘날에 우리형제 집안간에 이렇게 싸늘한 현실들을 어느 형제 한집 사람들 만에 잘못된 탓스로 인식하지를 말아 주워 쓴면 한다 우리 형제 집안들이 오늘날에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형제 모두가 각자 나름데로 잘못된 일들이 있고 집집마다 나름데로 연관되여 있지만 그중에는 너에 아버지와 내가 제일 잘못이 많다고 나는 생각다 우리형제들 중에 제일 웃사람들로써 너에 아버지와 내가 제역활들을 제대로 다못하고 살아온 것 도 오늘날에 우리형제들 간에 변명할수 없은 우리 형제들이기에 말이다 누구나 내부모님들 야기를 듣고 믿음과 신뢰 속에 존중할줄 알아야 한다고 나부터 내자식들한테도 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리 형제들은 누구나 자기들이 나름데로 해야할 일들을 너도나도 다잘해왔다고 우리형제 누구도 떠떠하게 장담할수 없다고 나는 생각하며 살아 오고 있단다 형제들 간에 잘잘 못에 일들이 그동안 이루워 지고 있었던 사연들은 그어느 누가 무엇라고 변명들을 할지라도 한집안에서 그동안에 같이 보고듣고 느끼며 살아 왔었던 우리집안에 형제 가족들이 제일 잘알수 있고 판단 할수있는 장본인 들이 않겠느냐 나는 너에 아버지와 한부모님에 자식 오남 일녀 중에 나는 둘째 자식로 이세상에 태여난 지만 우리들은 어린시절 부터 시골 갯촌마을 사람 들은 항상 힘들고 어려운 가난한 생활속에서 사는걸 보고듣고 느꼈가며 성장해 왔지만 진도에 너에 할아버지는 우리집안 장손인 큰아들이였던 너에 아버지한테만이 어렵고 힘들어도 목매여 살든이 시골농촌 생활속에서 가난 속에 허덕이며 살면서도 너에 할아버지 할머니은 장손이란 큰아들은 옷부터 항상 맑근한 차림으로 입펴가며 감싸 안고 살면서 둘째였던 나는 항상 내가 입어야 한는 내옷부터는 너에 아버지가 입다가 적어 지고 헛해지며 내차지가 되면서 나는 내어린시절에 내몸에 새옷을 내부모님이 단한번도 내몸에 입펴 줘어 던 기역들이 나는 단한번도 없단다 내가 물여 받아 입었던 옷들은 내몸에서 떨어져 내가 입던 내옷을 물여 줄수없었기에 내믿에 두살어린 내동생은 나와는 또 다르게 새옷을 입게되는 걸 내눈으로 지켜보 노라면 나도 모르게 질투와 효기심 에 동생을 부모님들 모르게 괴뢰펴 오기도 하며 우리 형제들이 성장하는 동안 농촌 우리마을에는 팔십 가구가 넘었던 집들 속에서 많고많은 아이들 중에 몇명 밖에 못가는 시골 농촌에서 너에 아버지가 국민학교을 졸업하자 너에 할아버지는 진도 읍내에 자취방을 구해 잘해먹던 못해먹던 간에 손수 밥을 해먹어가며 중학교를 단일수있게 뒷바라지을 힘들게 해가며 보내시던이 중학교를 졸업 하자 그렇게 어렵고 힘들어 하시면서도 또다시 진도섬 우리 마을에서 목포시로 고등학교를 보내줘가며 믿에 둘째 나는 아주 작은 비용에 학비로 집에서 먹고자고 단일수가 있었던 우리가 살고있던 면소제지 에 그동안 없었던 중학교가 처음으로 면소제지에 의신중학교가 설립 되자 그동안 우리마을과 주변 마을에 그동안 집안 살림들 이 어려워서 중학교를 못갔던 아이들이 중학교를 너도나도 다갈수 있었기에 우리 마을에도 내나이 똘에 아이들이 이십명이 넘어 지만 그동안 중학교를 못가고 있던 아이들이 중학교를 다진학 하는데도 우리마을에서 유일하게 나혼자만이 내형님이 중학교를 단이고 있어 집안 살림이 어렵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아버지가 보내주지 않아 나는 진학할수가 없었기에 어려서 부터 나는 욕심도 많고 식이와 질투 심이 많아 누구에게도 지기싫어 했던 나는 한마을 에서 중학교를 단이고 있는 아이들 속에 끼여들수가 없게 되자 나도 모르게 언제부터가 귀가 죽어야 했었기에 나데로 외톨이가 되면서 부모님들 한테 불만속에 죄없은
내믿에 동생들한테 분풀이 하든이 폭행들을 일삼든이 하로라면 나는 더욱 부모님 들한테 미운자식이 되었 단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외로움 속에 슬픔 차별속에 억굴함과 천되받은 괄세을 당해 보지않고 외톨이가 되여 보지않은 사람은 그마음 그슬픔에 그외로움들을 다모르고 굶주려보지 않고 힘들게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굶주름에 느껴오는 참기 힘든 배속에 그고통에 통증들을 다모르고 참기 힘든 아픔을 느끼도록 맞자보지 않은 자가 어찌 그아픔들를 알게는냐 나는 아침마다 우리마을 길를 소란스럽게 떠들며 학교로 가는 아이들을 부럽게 바라보며 나는 너에 할아버지 할머니 따라 논과 밭으로 농사일 만을 도와주기 바빠는데도 어느날 술좋와 하셨던 너에 할아버지가 술많이 드시고 술끼에 분별을 제데로 못하시고 본인이 집에 두워던 돈들이 부족하다고 무작정 밭에서 너에 할머니와 일하고 있던 나를 붙잡고 무작정 돈부터 내노라고 매질부터하는 너에 할아버지 아우성 소리에 우리마을 들녁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면서 무작정 당하던 나는 너에 할아버지 손에 이끌여 집에까지 끌여 와 집안에 두워다는 돈을 확인해 본이 돈금액은 그데 로 있었고 너에 할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신 술끼에 자기가 두워다는 돈액수도 제데로 한순간 분별을 못하시고 어둥하게 나를 매질부터 한거라고 너에 할아버지가 집에까지 끌고왔던 나에게 돈액수가 그데로 있다고 실토하신는 야기에 나는 영문도 모르체 내아버지한테 매부터 당했 던 나는 미쳐벌인 아이처럼 분게하며 악을 쓰며 집도 부모도 다싫다며 내가 차라리 죽어야 한다며
나는 우리마을 뒷산으로 뛰여 올아가 칙영굴로 내목를 매여 죽자 시도를 내손수 해었지만 사람이 자기손수 죽는것 조차도 그리쉽게 마음데로 죽을수 없다는 것도 체험하며 나는 한동안 나데로 정신나간 아이처럼 행설수설하다 우리마을 길가 밭에서 우리어머니와 같이 일하다 우리 마을를 떠나갔다고 길가 밭에서 일하던 우리 어머니한테 그동안 육지 해남땅에서 왔다며 우리옆집 사랑채방을 빌여 지내면서 우리마을 사람들에게 치과 일을 해주고있던 사람이 마을사람들에게 그동안에 해줘던 일들을 끝내고 다른 곳으로 간다면서 그동안 옆집에서 고마워다며 인사 를하고 떠나가던 돌파리 치과 그사람이 생각이나 나는 그사람이 간다던 그길를 뒷따라 찾아가 그사람한테 나를 육지에 대려다 달라고 해보자며 나는 무작정 맨손으로 그사람이 간다던 그길다라 뛰기 시작하여 우리마을 에서 다른곳으로 가고있던 그사람를 길목에서 따라 잡고 나를 육지에만 대려다 달아고 붙잡고 울며 내가 매달이자 처음에는 어리 등절하며 거절하던이 붙잡고 끝까지 매달이자 그렇게 육지를 가고싶픈면 잠시 따라가 있다 다시돌아 오라며 자기가 간다던 곳으로 나를 대리고 가기에 나는 그사람 따라 여기 저기를 거쳐가며 이틀간을 굶주림 속에 걸어서 진도 벽파란 선착장 섬에서 바다 건너 해남옥동이란 선착장 으로 여객선을 따고 건너가 해남군 황산면 면소제지가 있는 시등리란 시골장터에 나는 벌여졌다 여기까지 나를 그동안 굶주려가며 대리고 왔던 돌파리 치과 의사 였던 사람도 그앞날 저녁에 우리옆마을 주막집에서 밤세도록 술를 먹고 화투 놀름판에서 그동안에
무허가로 시골마을 단이 면서 시골사람들에게 금이빨를 해주로 단이며 벌어던 돈과 이빨를
해주게다고 사전에 선불금들을 여기저기에서 많이들 받아왔던 돈들을 놀름판에서 다잃고 여기 저기 빛때문에 우리마을를 도망치든이 다른 곳으로 피신해 가고있던 길에 우연하게도 내가 매달려던 것이였다 우리두사람다 돈한푼 없었기에 우리 두사람은 처음부터 굶주려 가며 진도에서부터 걸어 어디가 어디지도 모른체 여기저기 거쳐가며 진도 벽파란 선착장에서 해남땅 옥동이란 선착장으로 건너가 해남군 황산면 시등리 시골장터에 나는 같이갔던 그사람한테 벌여져 장터에서 맨돌며 그동안에 굶주름과 먼길를 걸어왔던 피곤함에 지쳐 가며 행설수설하며 장터에 맨돌고 있다가 어느 그사람 손에 이끌여 어느 집으로가 그집에서 잔일들을 거들어 주워가며 밥을 어더 먹기를 시작하며 나는 처음으로 남에 집에 밥들이 얼마나 힘들고 눈물 속에 밥인가를 해남땅에서 말로는 다표연 할수없은 힘들었던 생활 들을 처음 체험하며 일년 동안 소식 두절속에 지내며 나는 내평생에 내아버지 처럼 분별못하는 술잔은 내입에 되지않고 살게다고 내입술을 깨물면 맹세맹세 하며 내아버지한테 오늘을 보복하고 오늘날에 이렇게 나에게 했던 날들을 평생 후해하며 살게 하고 말게다고 내입슬 스스로 깨물어가며 견디기 힘들었던 나날를 보내다 그래도 잊질수가 없었고 그리워던 우리집을 나는 고향집를 일년만에 찾아 들었던 나를 내부모들은 눈물속에 반겨줘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 뿐이였고 내아버지에 호통과 아침 마다 책가방를 매고 마을길이 소란하게 학교를 가는 아이들 모습들이 변함없이 내마음를 흔들어 나는 몇달를 우리집에서 버터내지 못하고 또다시 나는 목포로가 한동안
작은 과자점에 일해오다 또다시 나는 더큰 서울로가 이곳저곳 여려곳을 전전 하면서 나처럼 무작정 집떠나 길거리에 떠돌던 아이들끼리 모여 서울거리 여기저기 떠돌아 단이다 우리들을 스쳐가는 사람들 은 우리들을 바라 보며 양아치 새끼들이라 하기도 하고 길거리 불량배 들이라 고 하기도 했지만 작은 아버지도 처음에는 여려 사람 속에서 순직하고
착하다고 야기도 많이도 들었왔지만 순진하고 착하게 고분고분 하다본이 이사람 저사람들 심부름 꾼으로 인식되여 너도나도 취급하면서 더많은 심부름 일들을 나에게 시켜가며 수시로 이사람 저사람들에 주먹질과 발길들이 수시로 나에게 날라들어 그아픔을
참다못해 울면 남자새끼가 운다고 더 많은 아픔을 주는 사람들 속에 참다못해 언제부터 나는 차라리 이렇게 살봐에야 내가 죽고 말자며 그동안 참고 인내 속에 지내왔던 나는 악날한
행동으로 돌변하며 내손에 잡펴있던 흉기들로 악날 하게 휘두르며 악을 한두번 쓰다본이 언제부터가 나를 두렵게 여기는 모습들에 나는 귀가 살아 더욱 악날 한 행동속에 때론 길거리 패싸움판에 앞장서 내몸을 던지든하다 본이 나도 모르게 무서움도 두려움도 모른체 거칠어진 내모습이 되였고 이런 힘든 환경속에 딩굴게 되자 언제부터가 나도 모르게 내부모한테도 나는 벌림을 받았다는 인식 속에 나데로 느껴가며 살다 본이 이세상속에 나는
그누구를 믿고 내가 의지할 사람들이 없다는 생각속에 살면서 항상 나는 길거리를 혜매든 살면서도 내가 살아 갈 길은 내가 개척해 살아 가야 한다고 나는 나데로 악착 같은 마음으로 여기 저기 떠돌다 본이 제일참기 힘들고 어려워던 일은 하루 끈이마다 먹를것이 없었기 에 하루이틀 굶주림에 배속 에 느껴오는 통증들을 이겨가며 참마내는데 제일 힘이 들었고 내가 마음편이
잠잘곳이 없었기에 추운 겨울밤 참바람속에 남의집 대문믿에서 웅굴리고 앉자 추이속에 떨며 밤새우는 나날들이 제일참기 힘들 나날들이 였단다 이런 생활 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마음 그심정들을 다이해 하지 못할것이다 이런 생활 속에서 살아 남기 위에서 나도 모르게 내입를 깨물며 악날한 내마음을 내가슴 속에 품고 살다본이 나도 모르게 내성격이 거칠어 졌고 나도 모르게 내몸에 배여가며 살아 오면서도 순간순간 내가 제일 어렵고
힘들때마다 생각난던건 내고향에 내친구들이 책 가방을 매고 공부를 하기 위에 학교를가며 우리 마을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모습들을 나데로 상상 속에 그려보면서 내고향에 내친구들한테 나는 뒷떨어 지지않게 더나은 그무엇를 배워서라도 내가 훗날에 꼭 이겨내고 말게다는 마음을 내가슴 속에 항상 품고 살아 왔던 나는 비록 학교에서 글은 배울수가 없었쓴이 나데로 그무엇가 을 배워야 게다고 꿈꾸워 왔지만 어려워던 우리나라 육십년도는 어린아이들에
일꾼들이 한두사람이 더 필요 해도 먹여주고 재워 주는것만도 힘이 들었던 우리나라 어렵던 시절속에 한사람을 더쓰고 못쓰고 했던 시절들이 였기에 좋은 기술을 배우기 위에서는 누구나 자기집에서 먹고 자고 자기 도시락을 싸들고 몇년간을 단여야 했기에 떠돌이 우리같은 아이들은 먹여주고 재워주는 걸로 겨우 중국집 배달원이나 희망이 없은 작은 재조업체 공장에 종업원에 일터뿐이 였기에 이작은 아버지는 어린나이 였지 언제부터가
오다가다 알게 되었던 떠돌아 단이는 나이많은 형들을 따라단이며 서울 시내에 여기저기 건축 공사장에 잔심부름들을 해줘가면서 어른들은 하루 공사장에 품값이 사백이십 원 였는데 나는 이백팔십원 씩을 받아가면서 공사장 에서 우막처럼 설치해준 천막안에서 손수 냄비밥을 해먹고 천막안에서 잠을 자며 하루하루 여기저기 공사장따라 단이며 일을 해가며 하루 일들이 끝나고 밤에는 같이 공사장에서 일해왔던 형들을 따라 서울에서 유명하다던 밤 거리를 헤매던 사람들과 보내 왔었단다 영화속에 화려하게 보여던 서울거리 속에 깡패들이란 건달들도
먹어야하고 잠자리가 있어야 했기에 나름데로 일턴가 있어야하고 일을 해야 하는지를 작은아버지 도 그때야 처음 알게 되었 고 같이 일하고 있던 형들 은 다한두번쯤은 교도소를 갔다온 형들이였고 내가 보고듣고 했던 여려장면들 속에 때로는 싸움판속에 경찰들에게 끌려가 조사 받고 고생하고 온은 것이 보편하였지만 나는 같이 있던 형들에 방패막으로
운이 좋게도 그동안에 단한번도 나는 어디에 끌려가 조사받고 문책받은 경험이 없었단다 내가 가던 어느곳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장소와 직장은 항상 그사람들에 학벌들을 야기 하고 있었고 그사람들에
출생지들를 따지는 현실들 을 체험하면서 나는 그동안 떠돌아 단이던 생활속에 나데로 느끼고 경험하면서 나는 학벌도 없었고 그당시 서울에서 전라도 사람이라 면 별로 좋와하지 않았기에 나는 누구한테도 내부모가 있고 내형제들이 있단는 야기들를 단한번도 어디 어느 곳에서도 해본적
없었지만 내음성에 목소리 때문에 전라도 출신 명패은 숨킬수가 없어 나는 전라도 목포시 어느 고아원에 출신자라 소개하면 때로는 이사람 저사람들한테 부모 없은 고아원에 출신자로 인식되여 오면서 동정심도 받아가며 모든 내사연 내가슴 속에 묻어 둔체 나혼자 단독으로 일하며 내노력 내능력들을 내마음 것 발휘할수있는 직업이 학벌 없은 나에게는 자동차 운전에 직업이 제일좋다는 어느 사람에 야기를 듣고 나는 언제부터가 나데로 흥미를 느끼면서 운전을 배워야 겠다고 갈망했지만 떠돌이 생활속에 내능력 으로는 금전에 능력이
없어 자동차운전를 배울수 없었기에 나데로 갈망속에 몇년간에 여려가지 일들을 해가며 운전에 꿈을 내가슴 속에 품고 운전을 배우기 위에 서울시내 공사판을 찿아단이며 피눈물 격게 노동에 일들을하며 한푼 두푼 그돈들 모와 옛날 여이도 모래사장에 있던 아시아 자동차 운전교습소 에 나데로 도전도 했었지만 떠돌이 생활속에 내작은 금전적으로 실패해가며 여기저기 혜매며 살다 같이 떠돌던 친구에 연결고리로 알게 되었던 서울시경에 경찰간부로 계시던 어느 분에 도움으로 내가 그동안 배우고자 했던 자동차운전 를 서부신진자동차학원
에 입학시켜줘가며 내가 머물수 있는 숙식과 운전을 배울수 있는 교육비 금전에 도움들을 받아가며 자동차 면허증를 받기위에 열심히 교습를 받고 1971년 2월 달에 있던 자동차면허증 시험에 학격하고 면허증을 받은 날만 기달리고 있는데 그동안에 월남전에 가있던
우리형이 언제쯤 귀국할 애정이라며 편지가 내가 있던 곳으로 왔었다 나는 그동안 여기저기 떠돌면서 도 내형님에 군대 주소만은 내주머니 속에 항상 있었기 에 내가 있는곳마다 내형님 과는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기에 형님에 편지를 받고나서 나를 도와주고 있던분에게 고아원에 같이 있던 내형님이 월남전에서 귀국한다는 편지가 왔다고 말씀들이자 당장에 자기 자가용기사를 시켜 서울에 서 부산가는 고속버스표를 사오게하여 내가 부산까지 가서 먹고자고 서울로 다시 돌아 올수있는 돈를 내손에 지여주면서 월남전에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형님를 너라도 찾아가 멋지게 환영를 해주고 오라며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자가용으로 운전수를시켜 나를 태워줘 그길로 나는 무작정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가 처음으로 개통
한지가 삼개월이 되었다고 고속버스 안내원 아기씨가 고속버스에 앉자있는 나에게 신문한부와 눈깔 사탕 몇개를주면서 설명를 해줘고 나는 처음으로 고속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넷시간만에 부산에 도착하여 하루밤를 자고 귀국선이 온다는 삼부 두로 찾아간이 수천명에
인파들로 정신이 없었고 여려까지 꽃다발들를 팔고있던 장사꾼들이 수백명 늘어앉자 지나친
사람들에게 꽃다발를 권장하며 팔고 있었다 나도 꽃다발를 남들 처럼 사들고 기달림속에 있는데 어디 선가 귀국선이 들어오는 바람에 수천명 인파들이 우왕좌왕 하던중에 귀국 선은 부두에 밀려오든 들어서고 수많은 인파들 과 귀국장병들에 눈들이 서로 마주치면서 서로
자기들에 가족들을 찾는데 아웅성 들이였고 나는 내형님 귀국선과 부두 사이에서 형님 얼굴를 한순간에 찾아내여 수많은 인파들 중에 나는 내형님 에게 제일 먼져 꽃다발를 목에 걸수있게 해들이고 나서 한동안 기쁨속에 눈물를 너무많이 흘려가며 많은 사연들 속에 나는 해병대 장병들이 타고 포항으로 가는 기차에 같이 동승하여 부산에서 포항를 거쳐 내가 있던 서울로 다시돌아 왔지만 나는 이렇게 내형를 만나게된 일로 내운명은 불행하게도
또다시 힘든 가시밭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시발점에 그사연들를 다네에게 야기할수가 없구나 나는
서울로와 자동차 면허증를 받고 내형님이 월남전에서 가져온 카메라 준다는 말한마디 현옥되여 내어리석은 행동으로 내운명은 또다시 가시밭 길속에 등굴든이 다시 나는 여기저기 공사장에서 막노동에 시달려오다
자동차 면허증 하나로 내험난한 내인생관을 새로운 내인생관으로 객척해 왔었단다 나는 책가방 들고 단이던 내고향에 친구들은 그동안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 하고 취직공부에 전염하고 있쓸때 나는 자동차면허증 을 내가슴 속에 품고 내직장을 잡은 기회를
찾기위에 전에부터 일해왔던 공사장에 임시로일하며 월급을 받게되면서 군대를 제대하고
직장시험 공부에 매달이고 있던 내형님은 나보다는 더조은 곳에 직장 잡기를 바라면서
너에 아버지 내형님이 해병대를 제대하고 전남 광주시 서방에있던 무등학원에서 취업
시험 공부하고 있던 내형님을 나는 경상남도 한산섬 건설현장에서 일하면서 받아왔던
금전들로 내능력데로 내형님을 도와주면서 그동안 내아버지한테 같은 자식으로 차별대우
받아왔던 그서름속에 고향집떠나 눈물속에 떠돌며 굶주림과 추이속에 떨며 내아버지한테
자식에 차별대우에 보복심에 내이빨을 갈며 그많은 세월들을 살아왔던 내 지난 과거들에
그서름속에 나날들을 언제부터가 까막게 잃어 벌인체 우리 마을에서 누구도 구경도 못할때
나는 내아버지가 시골에서 일하며 듣고 즐기시라고 수입산 야에전축을 사들고 내고향집을
찾아 들면서 한번쯤 고향우리집에 무슨 일로 금전들이 필요 할때마다 내형님보다 내수입이
더좋와기에 나는 고향에 집을 찾아 들때마다 내형님을 앞세워가며 내부모와 내동생들이
알수도 볼수도 없게 내형님 손에 내주머니에 금전들을 지여주면 내형님에 자존심을 지켜줘
가며 동생으로써 뒷전에서 그림자 처럼 할수있는데로 나데로 다해왔었단다 이렇게 해왔던
일들은 내형님은 항상 내마음속에 내우상이였고 나는 내동생들을 수시로구박하며 폭행도
일삼든 해왔지만 내형님은 나를 굴밤하나라도 주지 않았던 내형님를 나는 이세상속에 오직
내가 믿은 한사람이 였기에 내형님를 위에서 나는 그어던것도 아끼지를 않했단다 이렇게
살아온 나날들은 오직 우리둘만이 그시절속에 일들을 알고 있쓸거라 나는 생각하지만 힘들
지 않게 쉽게오다가다 받은것 처럼 내금전을 내형님은 쉽게잊고 살지는 모르나 나는 하나
하나 너무 힘들었기에 나는 그리쉽게 잊지 못하고 살아 왔단다 병탁아 이작은 아버지가
이런 야기들를 왜 이제와 오늘날에 너에게 하는야은 이작은아버지도 잘못한 일도 너무도
많치만 내형제들을 위에서 나도 한시절에는 도움도 줘가며 희생도 하며 살아왔던 내가
한때를 야기하고 싶고 너데로 조금 이나마 나를 이해주기를 간절한 마음속으로 오늘날에
이렇게 나열속에 전해본단다 이런 생활들이 지속되여가던 중에 내나이들어 나에게도 의무
였던 병력에 방위교육을 받고 나는 고향에 면소제지에 있는 예비군 중대본부에서 방위
근무를 해야 했는데 자동차면허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옛날에는 우리고향 시골에는
귀했던 칠십년도에는 우리고향 면소제지에 있는 주조장에서 말걸리를 만들어 마을마다
있던 주막술집에 막걸리 술을 배달 해주는 주조장에 유일하게 차한대가 있던 자동차을
운전를 해달아는 부탁을 받고 내는 방위근무 속에 운전을 해줘가며 내용돈을 벌면서 내가
의신면 전체마을 주막에 술집들마다 하루에 한번씩 돌아 단이다 본이 항상 나는 시간에
쪼끼며 단에야 했고 시골에서 자동차 구경를 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하루에 한번씩 술배
달을 오는 자동차운전수 나를 마을마다 사람들은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고 나도
그런 생활속에 지내다 본이 너에 외가집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이모들 다알게 되었
단다 내가 막걸리 배달차을 운전하고 단이는 바람에 너에 응덕리 할아버지는 좋와했던
술을 우리면 어느주막집에 가서도 내이름으로 마음것 막걸리 술을 드실수가 있게 해들였고
담배도 이아들 덕분에 시골에서 고급 담배로 피우시게 해들여단다 그런 생활을 시골에서
해오며 한푼두푼 용돈들을 의신중학교를 단이고 있던 작은집에 동생을 학교오는 길에
만나면 나는 동생를시켜 하루하루 몇푼씩 생겨던 용돈를 시골작은 우체국에 저금을 하
게하며 한동안를 보내오고 있는던 언제부터가 너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한다는 야기속에
지내 오다가 1972년 10월12일날 결혼를하게 되는데 그날도 나는 내형님 결혼식에 물건에
짐들을 내가 운전하고 있던 자동차로 양가집 짐들을 실어다 주고 나는 정신없이 방위근무
속에 주조장 술배달에 밤늦게까지 정신없이 혜매고 밤늦게야 잔치날이 였던 우리집에 찾
아 들어선이 우리집은 즐거움에 잔치집 않인 싸늘한 잔치집이 였단다 어느집들이고 자식
결혼은 지금처럼 예식장이 없었기에 신부집 에서 예식를 올이고 저녁에 실랑인 남자집
에서 마을남여들이 모여 새신부와 저녁늦도록 노래시켜가며 즐겁게 보내는게 상식처럼 되어
있던 시골풍습에 우리집도 그리하고 있쓸거란 희망속에 정신없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늦게야
내가 찾아들었던 우리집은 즐거운 잔치집이 않인 싸늘한 집처럼 느껴져 나는 나데로
실망속에 화도 나기에 잔치였던 우리집에서 음식하나 내입에 대지 못하고 그길로 주조
장으로 돌아 오면서 참기 힘든 화가 난었다 처음으로 큰자식을 결혼을 시키다 하면서도
부모님인 우리어른들이 단 한가지도 어덯게 준비을 할줄도 모르고 있었고 장가가는
아들도 직장생활하고 있다지만 자기 결혼에 무엇을 어덯게 준비해야 되는지도 모르든
우리부모님들이나 장가가는 우리형님이나 그동안에 남들이 결혼하는걸 보도 듣도 않해
는지 믿에 동생으로써 시골에 내부모님들에 아들결혼에 야기를 든다보면 너무나 답답하게
느끼오면서 아무것도 준비할줄도 모르는 우리 부모님들한테 내형수님이되는 너에어머니한테
작은 손목시계라도 하나 해들여야 한다고 말씀들이면서 돈지리 면소제지에 구멍가계
처럼 작은 시계방에서 그동안 내가 모와오던 내용돈을 털어 작은 손목시계라도 한나
사들려야 했다 이런 사연들 속에 결혼식은 끝나고 너에 아버지인 내형님은 혼자 서울
직장으로 가벌이고 새신부였던 너에 어머니는 혼자 어른들과 같이 일년가까히 시골에서
농사일을 같이하며 한동안를 살고 있었는데 그런 시절에는 시골에서 새며느리들을 여름
복날에는 국수와 술한병 사서 친정집으로 며느리들를 보내고 했는데도 우리부모님들은
그런것 조차도 모르고 있기에 내가 주조장에 운전하며 보고듣고 했기에 내손수 사들고와
내어머니를 시켜가며 보내게도 하면서 지내 오고 있었는데 서울로간 우리형한테 무슨
여자가 있네 어쩌네 하며 분별없은 미친사람 속에 이런저런 소문들이 있었던지 너에 어머
니데로 결혼한지 일년도 체않된 나날들 속에 열등감도 있었던지 이런저런 일들이 우리
집에 있었던지 우리어머니은 머리만 싸매고 누어있어 보다못해 여기서도 결국 내가 또
못난 거친 행동이 발생되 였고 그런 일들에 빌미로 중간에서 시골에 내부모님들 능력를
내가 알기에 모든 것들 부족하여 어려워도 내형수님를 서울에 있는 내형님과 신혼살림을
서울에 차려줘야 한다고 내아버지를 설득했지만 손에 있는 돈 한푼도 없는데 어덯게
하는냐고 내아버지는 말씀하셨지만 내가 모와오던 용돈들과 내가 일하고 있던 주조장에
영상이 형한테 몇푼에 돈를 부탁하여 받아든 돈들을 들고가 내아버지한테 내밀면서 형님에
신혼살림를 할수있게 해들리라고 권장하여 내형님과 내형수님은 서대문구 무학동에 작은
주택 단칸방에서 새로운 신혼살림이 시작되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너에 두부모님들은 그
옛날에 그렇게 이루워져던 일들을 다모르고 오늘날까지 살아 오고 있쓸 것이다 나는 내
병력에 임무인 방위근무가 끝나자 나는 바로 일하고 있던 고향에 주조장 운전을 그만두고
경남 남해 고속도로 공사장으로가 공사장에서 운행되고 있던 담프트럭 운전수로 일하다
그공사장에 일들이 끝나자 건설회사 따라경북안동에 안동댐 공사장으로 이동되여 일하고
있던중에 같은 현장에서 패싸움이 벌어져 내손에 휘들려던 흉기에 한사람이 맞고목숨이
위험하게 큰부상속에 큰병원으로 이송되였고 그자리에 있게되면 나는 구속되기에 그자리를
피해 도망단여야 했기에 나도 다친곳이 있어 아픈몸으로 여려곳를 피신에 전전하며 단이고
있다가 목포에서 학교를 단이던 넷째동생에 자치방에도 피신에 있다 결국 내가 일하던
회사에서 보상를 해주고 합이가 되여 나는 안동댐 공사장에서 다시일하면서 지금에 네에
작은 엄마를 만나서 결혼도 하게 되였고 내가 일하고 있던곳은 삼부토건 건설현장에서 협력
업체직원으로 내가 하루하루 해야할 내일과는 나로써는 너무 힘들었지만 내가 한달 받은 내
월급은 일반 공무원들에 월급에 두배가 넘었기에 나로써는 거역할수 없었지만 나는더나은
내직장생활을 위에 지금처럼 통신망들이 발달되지 않았고 정보망이 요즘처럼 발전되지 않
아던 시절에 내가 가보지도 않은 학교를 단였다는 가짜학벌과 경력들을 가짜들로 부풀여
이럭서를 만들어 대림건설회사 기능공 공체모집에 응시하여 그동안 공사장 경력을 인정
받아 더많은 호봉에 우대를 받는 경력자로 공체로 채용되여 나는 전남 여수에 석유화확
단지 공사장으로 발령을 받고 근무 해오는데 전에 내가 받아왔던 봉급보다 두배가 더많은
월급에다 내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부수입들이 생기는데 나로써는 전에 있던회사 일
보다 너무너무 편하고 내생에 맛보지 못했던 천국같은 회사생활이 였단다
나는 여려수당들이 여관데는 일들을 자청해가며 악착 같이 일하여 나에게 금전들이
여유가 생기자 진도에 너에 할아버지한테 농촌에서 일하는 소도 사들였고 논도 팔백평
사들여가면서 나데로 꿈꾸지 못했던 돈들을 여수에서 악착같이 모우면서 넷째 동생이
병력문제로 목돈이 필요하다해 이불속에 숨겨두워던 내한달반에 봉급액수였던 돈뭉치
을 조건없이 주워가며 넷째 동생이 하고자 했던 일들을 할수있게 해줘고 셋째 동생을
여수로 대려와 단칸방에 같이 아이들과 지낼 수없어 또다른 방한칸을 별도로 어더 아무
일도할줄 모르며 백수로 지내고 있던 동생를 자동차학원부터 보내서 면허증을 받게하여
말로는 다야기할수 없은 피마르는 사연들을 태산처럼 싾여가며 내월급 수개월치 털어가며
내가 있던 건설회사에 입사시켜 줘고 이런 생활이 몇년이 지나가는 세월속에 병희병수가
태여나 있었기에 1979년 어느날 아이들을 대리고 너희들이 살고있던 서울 무학동 산
꼭대기에 있던 작은아파트를 찾아갔던 일이 있었다 내가 찾아간던 곳은 내형님과 내형
수님 조카들은 너무나 비좁은 작은 두칸짜리 아파트에 작은 한칸은 내형님과 같은 직장에
단이던 직원이 살고있었고 큰칸방에서 내형이 살고 있었기에 작은아버지는 마음이 아파단다
비록 나도 시골 단칸방에서 비좁게 살고도 있었지만 나는 공사장 따라 시골농촌에서 살수
밖에 없었기에 그려다고 하지만 한곳에 일정하게 자리잡고 살면서 이렇게 밖에 살수없은
우리형제들에 현실속에 능력들이 내마음아파나는 너에 아버지인 내형님에게 나는 물었다
지금에 살고있는 이만한 두칸자리 작은아파트는 얼마나 주면 살수있는냐고 물은이 너에
아버지는 사백칠팔십만원 간다했다 나는그야기를 듣고 지금 살고있는 전세금에서
부족한 돈금액은 내가 다되줄던이 팔려고하는 집이 있거든 당장 계약하라고 했다
살고있던 전세금과 내가 가지고 있던 돈으로 살수있게다는 나데로 계산이 되어
있었기에 내걸 다털어서라도 내형님과 불편 하게 살고 계시는 내형수님한데 내가 그리
해주고 싶었단다 그때도 오랜만에 찾아간던 내형님집이 였지만 내형님 가족이 너무나
어려운 환경속에 비좁게 살고있는걸 보고 나서 나데로 어렵고 비좁게 사는 우리형제들
생활에 내자신이 화가나 나와 같이 갔던 내 아이들에게 화풀이 하든이 화를 내고난이
그때도 결국에는 내못난 성격에 모습으로 비쳐지고 말았지 오랜만에 찾아갔던 나는
내형님에게 나데로 더나은 생활을 할수있게 내가 도와 주게다고 큰소리쳐 노고 나는
여수로 내려와 한동안을 형님에 소식을 기달림속에 지내고 있는데 내가 근무하는 곳에는
회사 직원들한테 한달에 삼박사일씩 휴가가 주워지고 있었기에 나는 진도 너에 할아버
지한테 아이들을 보여 들리기 위에 오랜만에 찾아 갔었다 너에 할아버지는 때맞치 잘왔
다며 그전에 내가 사들였던 논에서 농사짖여 나오는 벼들로 마을사람과 나락개모임를 내
몫으로 들어왔는데 요번에 우리가 탈차래라면서 나락이 몇십가마리가 되는데 벼장사
꾼한테 팔게되면 팔십오만원 정도가 된다면서 나를보고 어덯게 할거야 하기에 나는
서울에가서 내가 형님에게 집계약 하라고 한 야기도 있고해서 너에 할아버지에게 아마
얼마 않있쓴면 서울에 형님이 집을 사게될지 모르이 벼를팔아서 그돈을 잘보관하고 있다가
형님이 집사게 되면 형님한태 보태 들리라고 하면서 큰아들이 오랜만에 집산다는데 부모로
써 돈 한품도 안보태 주면 되게야고 하며 그대신 이돈에 야기는 아버지와 나만이 알고
있고 그누구에게도 이돈에 야기하면 않된다며 신신 당부에 부탁를 하고 나는 여수로와
한동안 지내고 있는데 너에 아버지께서 때마침 살고있던 아파트내 팔여고 내온
아파트가 있어 내야기데로 계약을 했다고 나에게 1979년 11월13일날 열락이 왔었다
처음에는 살고있던 전세금에서 부족한 돈은 내가 다되주기로 했었는데 내돈이 일백만
원만 필요하다고 부탁해왔었다 내돈이 더 많은 액수가 필요할거라 나는 알고 있었
는데 겨우 일백만원만 달아하여 즉이 일백만원을 보내주고 나서 지내다 뒷늦게야
알게된 일이였지만 너에 어머니가 내가 돈을 많이 되주면 나중에 니집이다 내집이다
내가 할지도 모른다며 내돈을 줄여보려고 이리저리 하던중에 진도에서 내가 말했던
너에 할아버지가 그돈을 보태주자 너에 어머니도 너에 외가집에 할아버지한테 불야불야
벼나락개를 해서 첫번째로 타게하여 보태게 해달아 부탁해서 이리저리 돈을 준비하다
본이 집값 부족한 금액은 처음에 나와 했던 야기와는 다르게 내돈은 일백만원만이 필요
했던 것이였다 나에게 부탁해온 일백만원을 내가 보내줘지만 그동안 돈들을 준비하는
과정속에 이런저런 야기들을 뒤늦게야 내가 다듣게 되였던 나는 너에 부모님들과 내가
생각했던 마음들이 너무 다른 것같아 나데로 실망도 했었고 우리형제 집안간에 서로가
믿음과 신뢰감이 이렇게 밖게 않되나 하며 나데로써는 솔직히 서훈함을 느껴왔단다
너에 부모님들은 오늘날까지도 이런저런 일들을 내가 다모르고 살아온줄 알지만 나는
이미 다듣어 알고있었던 내마음은 그리좋은 느낌은 않이였단다 아무조건없이 내능력데로
내형님를 내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주고 싶었는데도 내진실된 내마음을 그리밖게 생각못하는
사람들을 내마음도 어짠해었고 오늘날까지도 너에 여기작은어머니는 진도할아버지 그돈에
야기를 모르고 살아오고 있고 아마 너에 부모님들도 그옛날 그런 돈들에 사연들을 오늘날
까지도 모르고 살아 왔쓸것이다 너에아바지는 그옛에 너에 할아버지한테 받았던 돈에 액수
를 기여하고 있다면 오늘에 내야기를 이해할 줄로았다 우리집에 일들은 내가 알아서 다해
왔지만 같이사는 여자들에 마음은 다를수도 있었기에 너에 작은 엄마한테는 너에 진도
할아버지에 돈야기는 그동안 하지 않고 살아왔단다 이렇게 살아 오면서 나는 여수공사장
에서 오년를 보내오면서 같이 근무하는 많은 동요들 속에 같은 분야에 앞에서 가는 니드로
이끌어가며 윗사람들한테 사랑를 받아가며 내생에 사람다운 대접받고 인정받아가며 여수에
공사을 끝내고 나는다시 충남보령 화력발전소 공사장으로 이동되였고 아이들은 그동안 자라
병희가 학교를 들어가게되자 나는 여려곳을 생각하며 많은 고민 끝에 나는 건설 공사장에
떠돌아 단여야 되는 여건이 였기에 병희를 낯설은 곳에서 학교를 보내는것 보다 외가집
친인척들이있는 안동에서 학교를 단이게 하고 자며 아이들과 너에 작은어머니를 안동으로
이삿을 시켜노고 나는 보령에서 천안 독립기념관 공사장으로 이동되여 근무하는데
그동안 안동시에서 병희 큰 이모집이 사업을 하고 있는데 사업자금이 필요하다며 우리들이
그동안에 저축하고 있었던 돈들을 당분간만 이용해 쓰자고 부탁를 한다기에 나는 처가쪽
친인척이라 거절할수 없어 당분간 사용할수 있게 그동안 모와왔던 돈들을 다해주고나서
그동안 우리들이 살고있던 비좁은 사를세방이 불편에 더큰 전세방으로 이삿을 하고싶픈데도
돈을 주지 않아 갈수도 없었고 계속 조르지만 계속에 미루며 지내던이 결국 사업에 부도를
내고 여기저기 부체들 때문에 도망치 든이 피신들하고 있단은 소식에 나는 그동안 청주
고속도로 공사장에서 근무하던 회사 일터에서 근무을 자체노고 내가 그동안에 줘던 돈들을
찾기 위에 쌍불을 키고 전에 내가 길거리에 떠돌면서 형들한테 들어왔던 야기들을 거울
삼아 모두가 부도 충격속에 넉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었지만 나는 식칼을 내품속에품고
하나하나 채권자들를 파해처가며 나를 방해하는자는 목에 칼날을 드리되며 혜매다
때로는 안동시내 사체군 건달들한테 여관방으로 몇번을 끌여 단이면서도 굴복하지도
포기하지 않은체 찾아 단이다가 그동안에 병희 이모부가 운용하고 있었던 영에이지
신발 대리점을 하면서 회사가 담보로 잡고 있던 건축물에 돈이 남마있는걸 내가 찾아
내여 그돈을 그누구도 모르게 내것으로 돌이 은데는 법적으로 많은 죄악들이 있어기에
나로써는 너무 힘들고 여려협박 속에 어려웠지만 나는 그누구에게도 양부하지 않고
영에지신발회사에 남아있던 돈은 원칙데로라면 다음 체권자한테 넘어가야 할 돈이였지만
신발회사에 나데로 파고들어 내것으로 돌려가는 과정속에 신발회사 관리 여려사람들과
부디치면서 이런 인연에 연결고리로 신발회사와 인연이되여 나는 영에이지 에스과이어
회사를 찾아 단이면서 내가 한번 영에이지대리점을 운용해보게 해달아고 매달이게
되였고 그당시에 대리점을 운용하려면 안동지역은 부동산 담보 오천만원 현금담보 이천
만원이 있어야 조건이 되였는데 나에게는내가 영에지에서 찾기로한 칠백만원 밖에
없었기에 내가 있던 대림건설 직원들 마을금고에서 내퇴직금 담보로 삼백만을 융자을
받아내여 천만원에 액수를 채워노고 그걸로대리점을 할수있게 해달아고 대리점 관리부
직원들부터 매달려지만 모든것이 부족하여 관리직원들에 귄한으로는 할수없다는걸 내가
체감하고 나는 제일높은 에스과이어 신발회사 대표인 회장님에 면담을 요청해왔지만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회장님한테 매다려 보련고 몇번을 찾아지만
거절을 당하기를 시작하면서 매일 청주고속도로 공사장에서 근무하며 회사 근무를 내던
져노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청주에서 첫차를타고 서울에 신발회사를 찾아 단이였고 거절
당하면 나는 퇴근시간까지 기다려다 만나주지를 않은면 나는 다시 청주로 내려가는 막차
버스를 타고 돌아오고 다시 다음날 첫차을타고 매일 서울를 단이며 회장님한테 면담에
요청에매달려오다 나는 십오일만에야 회사 제일높은 회장님이 내면담을 받아줘 면담을
하게되면서 나는 회사회장님한테 내가 그동안 길바닥에서 살온 내야기부터 시작하여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사연들을 야기하며 회장님한테 나에게 단한번만 대리점을
해볼수있게 기회를 달아고 무릎끌고 애원하며 매달리자 회장님은 이미 그동안 내
끈기있게 매달려 왔던 내행동들을 이미 다 사전에 보고 받아 알고 있다며 그때야 회사
회장님은 자기 과거사에 자기도 어려워던 지난날에 일들을 나에게 거울삼아 들여주면서
당신같은 억처같은 사람이 또 있게냐며 당신 같은 억척파는 포기도 실패도 하지않은 사람
이란걸 자기가 더잘알고 있기에 내가 특별히 당신에게 기회를 한번 줄턴이 열심히 잘해보
라며 회사대리점 관리부서로 찾아 가보라했다 대리점 관리과에 내가 찾아 들어간이 대리점
관리부 직원들은 나를보며 의하에 하면서 회장님께서 특별지시로 나에게 모든 것이
미비하고 회사와 대리점간에 가춰야할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회장님 특별배려로 안동에
대리점을 다시 운용할수있게 모든 면으로 협조를 빈틈없이 잘해주라는 회장님에 특별
지시가 내려져 다면서 나에게 대리점 운용에 관하여 설명해주면서 회사관리직원들이 신발
재품들을 한트럭에 실고가 그동안 철수했던 안동대리점을 다시 개업에 오픈해 준다했지만
나는 그동안 정신없이 단이며 너무 많은 나날속에 회사근무를 공쳐기에 같은 직원들한테도
미안하고 한숨 돌이며 우리대리점 개업날도 못오고 안동에 있던 너에 작은어머니와 모든
사람들도 도되체 어덯게해서 부도로 그동안 철수했던 대리점를 한달반만에 다시 안동에
우리들에 대리점으로 변신되여 왔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그동안 대리점으로 사용해왔던
점포도 이미 사체꾼 손에 넘어가 있었기에 내가 안동에서 사체꾼과 협이하여 내앞으로
잡아노고 있었기에 가능도 했었지만 그런 줄도 모르고 있던 안동에 사람들은 내가
어덯게 해서 신발회사 직원들이와서 대리점 오픈를 다시 해주는지도 아무도 모르고있었고
그사연들을 나만이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하여 영에이지 신발대리점을 이작은 아버지가 하게
되였단다 나는 자금이 부족했기에 처음시작된 우리신발대리점은 신발재품에 구색들이 미비
해서 힘들고 어려워지만 전국 신발대리점들은 장사들이 불티나게 잘되면서 너도나도 매출이
오르면서 상상외로 잘되고 있단은 여려대리점 속에 들여오는 소식들이 나데로 희망들이 있
었기에 나는 더욱 포기할 수가 없었고 조금 만한 담보라도 있어 더나은 구색으로 더나은
매출에 수입을 창출할수있는 희망들이 보였지만 너무나 정신적 시달림에 힘들어 몇번을
포기하고 싶었고 내형제들은 자기들한테 피해 주고 힘들게할까봐 그만두란 권고도 해왔지만
그동안 그많은 내노력에 쉽게 포기 할수없어 분게하며 내입을 깨물어가며 너에 아버지가
할수있는 만큼만 살고있던 아파트 담보를 당분간만 해달아 애원속에 매달려 봐던것이다
내가 눈물격에 매달이자 마음약한 너에아버지 내애원을 차마 냉정히 못뿌리치며 거절못하고
너에 아버지는 해주려 하는데 너에 어머니가 직접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내가 신발장사
잘되여 롯대빌딩 회장이 되다해도 자기는 싫다며 자기집에 담보에 부탁은 더이상 두번
다시는 하지말라며 이런저런 야기들 소리에 참물수 없은 소멸감속에 성격이 유별난던
나는 억제하지 못하고 흥분속에 화가나 그길로 안동에서 기차를 타고 너에들이 살고 있던
고덕을 찾아가 내생에 그동안 내아버지한테 술에 한이 맺혀 먹지않고 지내왔던 술을 한
포장마차에 들여 두병을 들이 마시고 너에 집을 찾아 들어가 너네들 앞에서 보기흉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병탁아 이작은아버지가 과거사가 어째던간에 어린너에들 앞에 보여던
내행동은 잘못된 것이다 이유야 어째던간에 어린조카들한테 보여서는 않될 행동들은 작은
아버지로써 잘못이다 병탁아 작은 아버지가 잘못해단다 용서해 다오 너에들에게 항상 내
표연은 못했왔지만 나는나데로 항상 죄스럽게 그동안를 살아왔다 그리고 너에 아버지에게
항상 감사해 한단다 너에 아버지께서 그때 그렇게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해다면 나는
아마 더큰 사고속에 이세상 사람이 않이여 쓸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잘알고 있기에 말이
다 우리두형제은 서로 끌어안고 눈물속에 한 동안 지내다 너에 아버지 결단으로 다음날에
살고있던 아파트를 칠백만원 같치에 담보를 영에지대리점 관리부에 담보로 해주고 나서
나는 더많은 신발재품 구색들을 가춰노고 악착같이 장사을 하게되자 신발장사는 주변전포
사람들이 부러워 하도록 잘되고 있는데그동안내가 근무하고 있던 회사가 그동안에 안동에
임하댐 공사가 끝나 나는 다시 강원도 평화댐 공사장으로 발령이나 나는 신발대리점를 더욱
잘될수 있게 뒷받침을 위에서 그동안에 내가 있었던 건설회사를 그만둬야 했고 회사에서
퇴직금 육백팔십원을 받아 보관하고있던 나는 그동안 안동시내에서 친분을 맺고 있던 분이
집터 택지를 한군데 구입해 두고 있는데 자기는 당장 필요치 않다며 나에게 싸게 넘겨
줄턴이 나를 보고 구입하라고 권장를 해와 나는 우선 퇴지금으로 받았던 돈으로 헌금을
주고 나머지는 몇년에 걸쳐가며 주기로 하고 내앞으로 택지를 이전등기부터 하고나서 나는
건설회사에서 그동안 보고듣고 해왔던 경험도 있고 우리가족들이 살고있던 집주인 친인척이
안동시내에서 제일큰 건제사 상회를 운용하고 있는데 나를보고 모든 자제들은 외상으로 다
대주고 일꾼들도 소개해 줄턴이 놀고있지말고 손수 구입한 집터에 집를짖여 보라며 기초에
일들부터 하나하나 가르쳐주며 분야별 일균에 앞잡비 사람들을 소개도 해줘 나는 분야별에
사람들과 내손수 벽돌한장부터 쌓아가기 시작하여 나는 이층 양옥집을 짖였다 이렇게 집이
완공되자 제일먼져 신발회사에 담보를 내집으로 대치해주고 일년만에 너에들이 살고있던
아파트 칠백만원에 담보물를 풀어주고 나서 새로짖은 내집에 일억 넘게 든든한 담보물로
되치 해주고 더많은 재품들을 받아 구색들을 가춰가자 불티나게 팔여가는 신발들에 우리
부부와 판매하는 아가씨를 두세명씩 써가며 전국대리점에 인구대비 판매실적이 전국대리
점들 중에 항상 삼등안에 들어 신발회사에 더많은 지원속에 인정 받아가며 집없는사람은
내집을 원하든이 나는 없던 내집도 구입해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내점포를 원하든 나는
또다시 오년만에 살던 집까지 팔아가며 점포 상가을 사서 내점포에 내장사를 하게 되었고
이렇게 사연들이 많았던은 내생할들은 무난히 내뜻데로 이루워져가고 있었지만 항상 내머리
속에 자리잡고있는 내형제간에 일들이 매돌고 있었기에 모든 일은 내스스로 풀어야 한다며
아픔과 어려움을 느껴왔던 그사람들은 쉽게 잊질수가 없든이 그마음들을 내가 더잘알고
있었기에 고향에서 부모님들 재사날에 한번쯤 내형님 내형수님을 만날때마다 나는 진심으로
용서을 빌며 내형수님 마음 풀어주는 노력을 나데로 해오면서 한때는 그모든 내잘못들을
이해하고 용서해주든이 해왔기에 나데로 내형님에 그마음 고마워 해왔는데 돌아서가며
그마음 그리쉽게 해소가 않되였는지 그동안 묵묵 부담으로 살아온 우리형제간에 나날들이
아쉬움이 싾인단다 병탁아 내가 이렇게 많은 야기을 하는것은 나도 어린시절 힘들게 살아
왔지만 나도 내스스로 내부모님들을 지난과거 사들을 이해하고 모든 것들이 우리집에 가난
때문에 이루워진 일들이라 이해하며 나데로 사람답게 살자고 부모님들한테 내능력데로
해줘고 형제들한테도 몇달치 내월급 봉투도 조건없이 내주워가며 형제들을 위에서 써왔
지만 그동안 악착같이 벌어던 돈들을 내처 친인척 도와주다 다잃게 된이 그놈에 신발
대리점 사업을 해서 그동안 잃었던 돈도 대찾고 사업도 한번 쯤 해보자고 형제들한테
매달려 가면서 시작했던 나는 단하루도 마음편이 내두다리 편리펴고 잠들어보지 못한체
악착같이 벌어서 끝까지 그누구한테도 그공들를 배신하지 않고 나를 끝까지 믿고
신뢰하며 기다려 줘던 내주변 사람들한테은 내가 도움을 받은 금전들 액수에서 두배로
셋배로 여유있게 보상에 차원으로 그공들을 잊지않고 다보상해 주든이 다해주워기에 오늘
날까지도 그분들과 서로가 고마워다고 야기를 주고받고 지내면서 지금까지도 친분을 싾여가
면서 지내고 있지만 나를 못믿고 기달려주지 못하고 유별스럽게 내피가 마르도로 나를
조르며 돌려 달아했던 내형제들은 급한데로 그때그때 내가 받았던 원금만은 바로 되돌려
주고 말았단다 내형제 중에서도 조금씩 도와줘던 돈들이 몇년에 걸쳐 천만원에 돈들이
되기에 나는 이천만원에 목돈으로 돌려줘는데도 남도 않인 내형제란 사람들이 나를보고
그렇게 어려울때 도와줘는데 덜렁 이천만원에 돈주고 먹고 떨어지라 한다며 나를 보면서
화부터 내던 내형제도 있었고 그훗날부터 오늘날까지 그것밖게 안줘 서훈하다고 오늘날
나와 왕래 끝고 살아오는 내형제도 있는데 내가 더이상 무슨 야기를 내가 다하게는냐
자기들이 나에게 받아왔던 그공들은 그돈에 몇배에 같치있던 내공들를 받아오며 살아온
사람들이 받은건 다잊고 자기들이 준건만 다 머리속에 담고 사는 어려석은 사람들이 우리
형제들이란다 나는 길바닥에서 의리를 배워고 배신에 보복를 배워왔던 나는 누구라할지라도
나를 끝까지 믿고 신뢰하며 차분한 마음으로 서로믿음에 든든한 협조속에 나를 지켜봐줘
쓴면 나는 더욱 열심히 대리점을 운용해 나데로 더나은 수입들로 내형제들과 같이살아
가는 내인생관를 창출할까 했었지만 내형제들 간에도 식와질투 속에 한심함을 느끼면서
전국 모든 대리점들은 더많은 확장에 수입를 더많이들 내고들 있었고 신발회사에서 나에게
더많은 혜택과 지원들을 해준다며 좀더 큰게 확장를 권장해 왔었지만 가까운 내형제들부터
자기들 욕심에 질투하든 안달들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듣고하다본이 나데로 화멸을 느껴고
나도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도 한때는 내가족 먹싶픈것 안사먹고 내가족들 입고싶픈 옷들도
않입고 한푼두푼 모와 내형제들테 조건없이 한두달치에 내월급봉투 그데로 주워가며 형제
위에서 써도봐고 실업자 내형제 직장잡은곳에 몇달치에 봉급에 돈도 아낌없이 써도 봐고
막내동생 내집에 대리고 있다 내능력되는데로 내마음 다받쳐 결혼도 시켜봐는데 내형제중
그누가 나처럼 형제을 위에 몇달치 윌급봉투 그데로 주워봐고 동생들을 위에 써봐야고 내
형제들한테 내가 한번 소리내여 물어 보고싶단다 나는 그누가 나에게 물어온다면 나는
몇년 몇월 며칠 누구한데 얼마 주위고 무엇때문에 써로라고 야기 할수있는 그거들를
나는 내일기장 속에 기록하며 살아 왔기에 말할수도 있단다 우리부부가 아무문제 없이
건강한 몸으로 해오던 대리점을 계속해왔다면 우리는 더나은 생활속에 우리를 위에 마음써
주고 협조해 주워가면서 고생했던 내주변속에 사람들에게 더많고 더나은 보답들로 하게다고
나데로 꿈꾸며 살아왔는데 내가 허리를 다쳐 척추에 수술을 받고 팔개월간 방안에 누워서
지내야 했고 내가 해복되여가는데 너에 작은 엄마가 목갑상성 암진단 받고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치료받고 있던중에 또다시 유방암으로 전이되여 한쪽 절제수술을 받게되면서
방사성 치료와 항암치료를 받은데 너무나 힘들어해 더이상 대리점을 할수없게되여 남한테
넘겨주고 아픈사람 뒷바라지에 매달여 지내오다본이 그동안에 내가 하고자 했고 해주고자
했던 그동안 내꿈들은 허무하게 사라져 벌여 나데로 실망과 패자에 마음으로 어려움 속에
힘든 나날들로 지내야 했는데 우리 어느 형제들은 내부모님과 내형제간에 도움을 자기들이
그렇게도 많이들 받아왔던 그공들은 까막게 다잊고 살든이 그렇게 내부모 내형제들 간에
주고 받은 일들에는 그렇게도 인색하고 야박하든이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사람들이 자기들
허황된 욕심들을 앞세워가며 그렇게도 세상에 천지를 다아는것 처럼 똑똑하고 아는소리들만
다하던이 분별못하고 어리석게 남들한테는이리저리 자기들 금전에 재산들 다털어 먹은
이용들이나 당하고 사귀나 당하며 그동안에 먹고 싶픈것 않먹고 입고 싶픈옷들 못입고들
힘들게 벌어서 남들 손에 다털어 넘은 사람들 지켜 보면서 한심하기 짝이 없었고 이리저리
자기들 무능과 욕심으로 다잃고나서 죄없은 우리형제들 탁처럼 형제들 사이에 이런에
저런에 야기들만 하며 서로간에 왕래끝고 사는 못난 사람들을 나는 먼곳에서 떨어져
살면서도 듣고도 못들은척 알고도 모르는척 살아 오면서 나만이라도 나데로 여려곳에
사람다운 행세하며 살아 보자고 나는 내아버지 처럼 분별 못하는 술잔은 나는 평생
먹지 않게노라 내아버지 때문에 고향 떠나오면서 맹세했던 그마음 내평생 잊지않고
그많은 술자리들에 유욕도 뿌리쳐가며 나는 술을 입에 되지 않고 살아 왔건만 세월따라
나이들고 오늘날에 내능력 없다본이 그동안 내가 하고자 했던 모든 일들을 내가슴 속에
안고 이렇게 묵묵히 살고 있단다 병탁아 이제와서 왜 내가 이렇게 소설같은 옛야기을
많이 하는가는 너도 언제가는 사실데로 알건 알아야 너데로 우리형제 집안간에 얼키고
설킨 현실들을 이해할수 있쓴거라 믿고 작은아버지가 너에게 해주고 싶었단다 니가 작은
아버지를 이해를하고 용서을 해주는건 그누가 무어라 할자라도 니마음이고 니몫이다 너도
중년에 남자로 너데로 판단할수있는 위치가 되였기에 이렇게 긴야기 속에서도 더많은
야기들이 내가슴속에 더많이 싾였지만 다야기할수 없는게 아쉬구나 병탁아 나는
어린시절 고향떠나 굶주린는 나날들 속에 서도 한장에 쪽지처럼 하나하나 기록하든
보고듣고 느끼고 깨우치며 못배운 내지식 부족함을 보충하든 배워가며 살아 왔단다
이런 생활속에 살다보니 나데로 후해되는 일들도 많고 미련속에 못잊는 일들도 내가슴
속에 넘쳐나지만 모든 것들이 내가 살아가는 내운명으로 받아 들여 오늘을 살면서 괴롭고
슬플때는 나혼자 아무도 모르게 내등돌려 울면서도 기쁘고 좋은 날에는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우리형제들과 같이 즐기며 살고싶단다 그리고 이작은 아버지는 병탁이와
특이 우리수현이한테만은 너무너무 미안감이 많아 항상 내가슴 속에 너에들에게 죄많은
작은 아버지로 오늘날을 살고 있단다 다시한번 작은아버지가 우리조카들한테
미안하다고 전하고싶군나 사랑하는내조카들에게 안동에서 이작은아버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