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지 않는 시간
Ephesians 5 : 16 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making the most of your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 / 2Peter 3: 8 But, beloved, be not ignorant of this one thing, that one day is with the Lord as a thousand years, and a thousand years as one day.
시간이란 무엇일까?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 하지만 무엇이 과거이고 무엇이 현재이며 무엇이 미래인가? 누가 시간을 과거와 현재, 미래로 분할 할 수 있는가? 밤 하늘에 내가 보고 있는 빛나는 별빛은 빛의 속도로 나를 향해 오고 있는 빛이지만 그 빛이 있게 한 별에서 봤을 때 그 빛은 이미 과거이다. 다리위에 서서 고개를 숙여 아래 흐르는 냇물을 보면 내가 현재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 물은 이미 흘러 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는 없는 것인가? 내가 현재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과거가 되니 미래가 끊임 없이 과거로 전환될 뿐 현재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미래는 있는 것인가? 아직 오지 않았으니 미래가 있다고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면 미래는 존재한다 하지만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이라 말할 것인가? 한 시간이 가고 하루가 가고 한달이 가고 일년이 간다는 것,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지구와 달의 자전(스스로 도는 것)과 공전(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바퀴 도는데 1년걸리고,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한바퀴 도는데 한달이 걸림)을 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시간을 정의할 때 시간은 엔트로피의 증가라 말한다. 열역학 제 2법칙처럼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 다시말해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것이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말한다.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엔트로피가 낮은 것이 높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엔프로피가 증가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없는 것인가? 간단한 공식 S(거리)=v(속도)x t(시간) 즉, 거리는 시간과 속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시간은 움직이는 것과 관계가 있다. 움직이는 것은 속도가 있고 거리로 나타난다. 즉 빠르게 움지이면 멀리 가고 천천히 움직이면 멀리 가지 못한다. 시간은 사물의 변화를 인식하기 위한 개념이다. 그 변화는 거리로 나타난다. 점위에 사는 자를 0차원, 점이 연결된 선에 사는 자를 1차원, 선이 연결된 면에 사는 자를 2차원, 면이 연결된 공간에 사는 자를 3차원이라 할 때 공간의 방향성은 한점위, 그리고 한점에서 앞,뒤로 움직이는 선위, 다시 앞,뒤에서, 앞뒤좌우로, 앞뒤좌우에서 앞뒤좌우상하로 다양화 되지만 결국 변화된 위치는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움직임이없으면 시간도 정지된 것과 같다.
한편,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은 다섯가지로 요약이되는데 첫째,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은 천천히 간다. 둘째, 움직이는 물체의 길이는 짧아진다, 셋째 한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난 사건은 다른 운동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넷째 움직이는 물체는 질량이 증가한다 다섯째 물질과 에너지는 서로 바뀔 수 있다. 움직이는 사람의 시계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시계는 동일하게 흐르지 않는다. 즉 너와 나란 (이동하는) 관계속에서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시공간의 개념에 대해 고전물리학점 관념을 바꾸는 변혁을 가져왔다. 그렇지만 인간이 시공간의 한계속에 갇혀 사는 존재임에는 변함이 없다.
철학자 뉴턴과 라이프니스는 시공간은 변하지 않는 절대 개념이라 했고 임마뉴엘 칸트는 절대 시공간은 존재는 실체가 아닌 관념의 산물이라 생각했다. 앙리 베르그송은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공간으로 치환해서 측정하는 과학적 물리적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의식의 시간, 즉 삶을 경험하는 방식으로서의 의식시간이 진정한 시간이며 그것을 지속이라 말했다. 즉 내가 느끼고 체험하는 경험적 시간, 즉 "지속"이 진짜 시간이고 체험이 배제된 기계적 시간은 단지 형식에 불과하다 말했다. 한편 심리학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시간의 지속성에 관심을 갖았다. 시간의 지속성을 아는 것이 능력인데 악보를 보고 표시된 음표만큼 연주하는 것, 몇시까지 자기 일을 끝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그 사람의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아파 열이 많이 올랐을 때 옆에 간병해 주던 사람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오면 마치 오랬동안 자신을 떠난 것으로 느끼거나 권투선수가 맞을 때 흐르는 시간과 사랑하는 애인과 같이 있을 때 흐르는 시간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인지적 측면에서 시간을 생각했다. 시간에 대해 흐르는 생각들을 몇가지 정리해 보아도 시간에 대한 question mark는 떠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시간을 말할 때, 세월을 아끼라 말한다. 무슨 뜻일까?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시간을 아끼라? redeeming the time? 시간을 구속하라? 시간을 값을 주고 사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또 making the most of your time? 나의 시간을 갖으라? 그러면 내 시간이 있고 또 다른 시간이 있단 말인가? 또 때가 악하다. days are evil이란 말은 시간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창세기를 보면 시간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을 만드셨고 그중 두 큰 광명체를 만들어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는 말이 나온다. 시간은 그 때부터 시작이 된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은 악하지 않은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 시간이 악하지 않으면 엔테로피가 증가되지 않는다고 본다. 엔테로피가 증가되면 결국 그것은 죽음이다. 질서 정연한 것이 무질서도가 되는 것이 곧 죽음이다. 생명체가 썩어지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결국 엔테로피가 증가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1,2장과 계시록 21. 22장에는 엔테로피가 증가되지 않고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죽을 상태로 엔테로피가 증가하는 상태로 창조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시간은 있으나 흐르지 않는 시간 곧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는 상태로 태어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그들은 지금도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에는 흐르지 않는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다. 흐르는 시간은 사탄이 개입된 시간이다. 엔테로피가 증가되는 시간이다. 흐르지 않는 시간은 사탄이 죽은 시간이다. 성령이 존재 안에 거하시는 시간이다. 성령께서 내 몸을 성전 삼고 사시면 처음 아담과 하와가 창조된 것과 같은 흐르지 않는 시간을 갖게 된다. 흐르지 않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비유를 하면 나무와 같다. 수백 수천년을 살 수 있다. 흐르지 않는 시간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같다. 오병이어와 같다.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 나무와 같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언제나 첫사랑이다. 날마다 뜨겁고 날마다 새롭다. 주님께서는 사탄에게 빼앗긴 시간을 다시 나의 시간으로 되 찾으라 하신다. 사탄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시간을 저당잡고 엔테로피를 흘러가게 하고 있다. 하지만 속지 말라 값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지불하셨다. 그러니 다만 하나님께서 하신 그 구속을 믿는 것으로 시간을 redeeming 하라고 하신다. 믿는다 고백하고 사탄에게 더이상 속지말고 흐르지 않는 시간을 소유하라 하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