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점을 치는 사람은 이념과 교육 정도와 관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궁합에 대한 신뢰도도 낮았다. 아산정책연구원 여론연구센터(센터장 김지윤 연구위원)의 조사 결과다. 이번 조사는 ‘점의 경험과 신뢰도’에 관한 본격 인문학적 조사로 지난 1월 16~18일 전국의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조사 결과 “점을 쳐봤다”는 응답은 38.3%였는데 진보 40.0%, 중도 37.4%, 보수 38.8%로 나타났다. 진보보다 보수가 점을 더 볼 것이란 ‘보통 생각’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학력에 따른 차이도 없었다. 중졸 이하 39.9%, 고졸 이하 39.1%, 대재 이상 37.2%였다. 직업별 조사에서는 가사 종사자의 비율이 높았다. 가사 47.2%, 화이트칼라 42.5%, 자영업 41%, 농·임·어업 25.1%, 블루칼라 30.2%, 학생 22.8%, 무직·기타 32.5%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는 점치는 여성의 비율이 45.9%로 남성보다 높다는 점과 비교된다. 남성의 점치는 비율은 30.5%였다. 여성이 점에 더 빠져드는 것일까.
여성의 점치는 비율이 높은 것은 가족 중 직접 점을 보러 가는 사람은 대체로 주부이기 때문일 수 있다. 아이 문제, 남편 직장 문제, 집안일 등 온갖 걱정에 시달리는 사람이 주부이며 시간적으로 다소 자유롭기 때문이다. 최근 인터넷을 이용해 점을 치는 주부도 크게 늘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자영업 비율이 높은 것도 직장 생활보다 불안요소가 더 많기 때문이며 특히 불경기 때는 ‘점이라도 봐서’ 불안감을 덜어내려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일 수 있다. 연령별로는 30대(43.2%)·40대(39.1%)·50대(43.9%)가 19~29세(29.6%)·60대 이상(35.1%)보다 높게 나타났다. 연세대 심리학과 이동귀 교수는 “30대는 직업과 결혼, 40~50대는 가족부양 책임 때문인 듯하다. 반면 20대는 주로 학생이고 60대 이상은 은퇴 이후라 굳이 점을 칠 필요가 없는 현실이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점의 결과를 믿느냐는 질문에는 22.6%가 “그렇다”고 답했다. 점을 친 사람보다 훨씬 낮다. 점을 치지만 반드시 믿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궁합과 관련된 조사도 흥미롭다. “궁합이 나쁘면 결혼을 재고하겠는가”라는 질문에 ‘그러겠다’고 답한 경우는 아주 적었다(15.6%). 상대적으로 궁합을 믿는 노년층(60대 이상)도 그랬다. 궁합을 믿는 편이긴 하지만, 결혼 자체를 뒤흔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랑’이 ‘궁합’보다 강한 시대임을 보여준다.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인문연구센터장
점을 치는 사람은 이념과 교육 정도와 관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궁합에 대한 신뢰도도 낮았다. 아산정책연구원 여론연구센터(센터장 김지윤 연구위원)의 조사 결과다. 이번 조사는 ‘점의 경험과 신뢰도’에 관한 본격 인문학적 조사로 지난 1월 16~18일 전국의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조사 결과 “점을 쳐봤다”는 응답은 38.3%였는데 진보 40.0%, 중도 37.4%, 보수 38.8%로 나타났다. 진보보다 보수가 점을 더 볼 것이란 ‘보통 생각’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학력에 따른 차이도 없었다. 중졸 이하 39.9%, 고졸 이하 39.1%, 대재 이상 37.2%였다. 직업별 조사에서는 가사 종사자의 비율이 높았다. 가사 47.2%, 화이트칼라 42.5%, 자영업 41%, 농·임·어업 25.1%, 블루칼라 30.2%, 학생 22.8%, 무직·기타 32.5%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는 점치는 여성의 비율이 45.9%로 남성보다 높다는 점과 비교된다. 남성의 점치는 비율은 30.5%였다. 여성이 점에 더 빠져드는 것일까.
여성의 점치는 비율이 높은 것은 가족 중 직접 점을 보러 가는 사람은 대체로 주부이기 때문일 수 있다. 아이 문제, 남편 직장 문제, 집안일 등 온갖 걱정에 시달리는 사람이 주부이며 시간적으로 다소 자유롭기 때문이다. 최근 인터넷을 이용해 점을 치는 주부도 크게 늘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자영업 비율이 높은 것도 직장 생활보다 불안요소가 더 많기 때문이며 특히 불경기 때는 ‘점이라도 봐서’ 불안감을 덜어내려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일 수 있다. 연령별로는 30대(43.2%)·40대(39.1%)·50대(43.9%)가 19~29세(29.6%)·60대 이상(35.1%)보다 높게 나타났다. 연세대 심리학과 이동귀 교수는 “30대는 직업과 결혼, 40~50대는 가족부양 책임 때문인 듯하다. 반면 20대는 주로 학생이고 60대 이상은 은퇴 이후라 굳이 점을 칠 필요가 없는 현실이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점의 결과를 믿느냐는 질문에는 22.6%가 “그렇다”고 답했다. 점을 친 사람보다 훨씬 낮다. 점을 치지만 반드시 믿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궁합과 관련된 조사도 흥미롭다. “궁합이 나쁘면 결혼을 재고하겠는가”라는 질문에 ‘그러겠다’고 답한 경우는 아주 적었다(15.6%). 상대적으로 궁합을 믿는 노년층(60대 이상)도 그랬다. 궁합을 믿는 편이긴 하지만, 결혼 자체를 뒤흔들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랑’이 ‘궁합’보다 강한 시대임을 보여준다.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인문연구센터장
이순신, 장문포 해전 전날 점 치고 작전 개시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4.02.02 06:37 / 수정 2014.02.02 08:57한반도 역사 속의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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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경주의 점치는 모습. 무라야마 지쥰의 『조선의 점복과 예언』.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9월 28일. 장문포 해전 전날. 『난중일기』에 따르면 훗날 성웅(聖雄)이라 불릴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은 복점(卜占)을 쳤다. 이 해전은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기획한 합동 작전. 좌의정 윤두수가 원균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영의정 류성룡의 건의로 선조는 작전을 중지시켰다. 하지만 명령이 도착하기 전 작전은 시작됐다. 결국 왜선 두 척만 격침시켰다.
이런 사태 전개를 장군이 미리 알 수야 없었겠지만 어쨌든 불안했을 것이며 자연스레 점을 쳤을 것이다. 그전 7월 13일에도 아들 면의 병세가 걱정돼 척자점(擲字占·숫자를 던져 치는 점. 윷점의 한 유형)을 두 번 치기도 했다. 모두 길(吉)해 마음이 놓였다고 『난중일기』에는 나온다. 성웅도 그럴 판이니 과학시대가 아닌 마당에 보통사람이라면 점은 생활의 일부였을 것이다.
한국에서 점은 기원전부터 신앙생활과 의례행위의 일부였다. 기원전 2세기께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점복용의 복골(卜骨)이 발견되었다. 중국 쪽 기록인 『삼국지』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는 ‘부여는 군사를 일으킬 때 하늘에 제사 지내는데 소를 잡아 그 굽을 보고 길흉을 점쳤다’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중국에서 유래한 관직명으로 ‘일관(日官)’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관은 고대에 천문(天文) 역수(曆數)와 시일의 길흉을 가리는 일을 맡아보았다. 고려는 개국 초기에 천문, 역수, 측후(測候), 각루(刻漏)의 일을 맡아보는 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史局)을 두었다. 그 소속 관원 중에는 복박사, 복정, 복조교 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점복을 주관했을 가능성이 크다. 태복감과 태사국은 나중에 서운관으로 통합된다. 또 서경(西京)의 학교에는 복업이란 점복 관련 과목이 개설됐고 과거시험의 하나로 복업과가 실시됐다. 서운관은 조선조 세종 7년(1425)에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하고 예조(禮曹)에 편제됐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상청과 천문대에 해당한다. 소관 업무에는 점산(占算)이 있는데 그것이 점치기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관상감의 관원은 음양과라는 과거를 통해 선발됐다. 시험은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命課學)으로 나뉘어 치러졌다. 점복자는 명과학(占算)을 통해 관직에 진출했다. 특이하게 시각장애인이 적지 않았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점은 성명(星命)과 복과(卜課) 관련 전문직이었으며, 점복자는 국가고시에 합격한 공무원이었다. 이들은 육효점 등을 이용하여 왕실의 길흉을 점쳤다. 육효점은 주역점을 응용한 것으로 산통점은 그중 하나다. ‘산통 깨지 마라’는 속담은 여기에서 유래됐다. 일본의 신사나 사찰에 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제비뽑기의 일종인 ‘오미쿠지’도 이와 비슷한 원리다.
대다수의 점복자는 과거와 인연이 없고 사대부나 서민의 점을 봐줬다. 신점(神占)을 보는 무속인은 여성이 많고, 역리(易理)나 관상에 바탕을 둔 점술 종사자는 남성이 많았다. 신년운세로 토정비결과 같은 사주를 보고, 땅이나 집을 고를 때 풍수를 보고, 혼례 때 궁합이나 택일을 보고, 성명으로 길흉화복을 판단하고, 관상으로 사람의 성격과 심성은 물론 장래성까지 보았다. 한국의 전통 점은 종류만 해도 수십 종에 이른다.
점은 고대 이래 정치권력의 정통성과 정치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주요 수단 중 하나였다. 중국에서는 복골을 이용한 점이 이미 신석기시대에 행해졌다. 복골보다 더 유명한 것은 은대(殷代:B.C. 16~B.C. 11세기)의 갑골문이다. 그때는 정인(貞人)으로 불리는 직업적 종교인들이 왕의 곁에서 갑골점을 이용, 왕조의 대소사에 대한 길흉화복을 가렸다.
점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주역』이다. 『주역』은 처음엔 점서로 출발했다. 하지만 유가(儒家)가 경전으로 택하고 십익(경문에 관한 열 가지 해설)이라는 날개를 달게 되면서 윤리와 정치를 담은 철학서로 변모했다.
그러나 점서로 출발했다는 태생적 이유로 『주역』은 여러 점에 응용되면서 경전과 점서의 기능을 함께 수행해 왔다. 지덕을 겸비한 완전한 인격체(성인)만이 주역의 원리를 이용해 미래를 정확히 예지할 수 있다는 지혜를 담은 최초의 인문학적 점서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운명을 알려고 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한다.
이승률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이런 사태 전개를 장군이 미리 알 수야 없었겠지만 어쨌든 불안했을 것이며 자연스레 점을 쳤을 것이다. 그전 7월 13일에도 아들 면의 병세가 걱정돼 척자점(擲字占·숫자를 던져 치는 점. 윷점의 한 유형)을 두 번 치기도 했다. 모두 길(吉)해 마음이 놓였다고 『난중일기』에는 나온다. 성웅도 그럴 판이니 과학시대가 아닌 마당에 보통사람이라면 점은 생활의 일부였을 것이다.
한국에서 점은 기원전부터 신앙생활과 의례행위의 일부였다. 기원전 2세기께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점복용의 복골(卜骨)이 발견되었다. 중국 쪽 기록인 『삼국지』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는 ‘부여는 군사를 일으킬 때 하늘에 제사 지내는데 소를 잡아 그 굽을 보고 길흉을 점쳤다’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중국에서 유래한 관직명으로 ‘일관(日官)’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관은 고대에 천문(天文) 역수(曆數)와 시일의 길흉을 가리는 일을 맡아보았다. 고려는 개국 초기에 천문, 역수, 측후(測候), 각루(刻漏)의 일을 맡아보는 태복감(太卜監)과 태사국(太史局)을 두었다. 그 소속 관원 중에는 복박사, 복정, 복조교 등이 있었는데 이들이 점복을 주관했을 가능성이 크다. 태복감과 태사국은 나중에 서운관으로 통합된다. 또 서경(西京)의 학교에는 복업이란 점복 관련 과목이 개설됐고 과거시험의 하나로 복업과가 실시됐다. 서운관은 조선조 세종 7년(1425)에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하고 예조(禮曹)에 편제됐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상청과 천문대에 해당한다. 소관 업무에는 점산(占算)이 있는데 그것이 점치기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관상감의 관원은 음양과라는 과거를 통해 선발됐다. 시험은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命課學)으로 나뉘어 치러졌다. 점복자는 명과학(占算)을 통해 관직에 진출했다. 특이하게 시각장애인이 적지 않았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점은 성명(星命)과 복과(卜課) 관련 전문직이었으며, 점복자는 국가고시에 합격한 공무원이었다. 이들은 육효점 등을 이용하여 왕실의 길흉을 점쳤다. 육효점은 주역점을 응용한 것으로 산통점은 그중 하나다. ‘산통 깨지 마라’는 속담은 여기에서 유래됐다. 일본의 신사나 사찰에 가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제비뽑기의 일종인 ‘오미쿠지’도 이와 비슷한 원리다.
대다수의 점복자는 과거와 인연이 없고 사대부나 서민의 점을 봐줬다. 신점(神占)을 보는 무속인은 여성이 많고, 역리(易理)나 관상에 바탕을 둔 점술 종사자는 남성이 많았다. 신년운세로 토정비결과 같은 사주를 보고, 땅이나 집을 고를 때 풍수를 보고, 혼례 때 궁합이나 택일을 보고, 성명으로 길흉화복을 판단하고, 관상으로 사람의 성격과 심성은 물론 장래성까지 보았다. 한국의 전통 점은 종류만 해도 수십 종에 이른다.
점은 고대 이래 정치권력의 정통성과 정치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주요 수단 중 하나였다. 중국에서는 복골을 이용한 점이 이미 신석기시대에 행해졌다. 복골보다 더 유명한 것은 은대(殷代:B.C. 16~B.C. 11세기)의 갑골문이다. 그때는 정인(貞人)으로 불리는 직업적 종교인들이 왕의 곁에서 갑골점을 이용, 왕조의 대소사에 대한 길흉화복을 가렸다.
점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주역』이다. 『주역』은 처음엔 점서로 출발했다. 하지만 유가(儒家)가 경전으로 택하고 십익(경문에 관한 열 가지 해설)이라는 날개를 달게 되면서 윤리와 정치를 담은 철학서로 변모했다.
그러나 점서로 출발했다는 태생적 이유로 『주역』은 여러 점에 응용되면서 경전과 점서의 기능을 함께 수행해 왔다. 지덕을 겸비한 완전한 인격체(성인)만이 주역의 원리를 이용해 미래를 정확히 예지할 수 있다는 지혜를 담은 최초의 인문학적 점서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운명을 알려고 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한다.
이승률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