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와 선비정신
선비란 말은 순수 우리말로서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옛날에, 학식이 있되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이라든지 ‘학문을 닦은 사람을
예(禮)스럽게 일컫는 말’이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우리말의 어원으로 ‘선비’는 ‘어질고 지식을 갖춘 사람’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하고 있다.
언어학을 전공한 학자의 말을 빌리면 선비의 ‘선‘은 곧 몽고어의 ’어질다‘는
말인 ’sait'의 변형인 ‘sain'과 연관되어 있고, ’비‘는 몽고어 및 만주어에서
’지식있는 사람‘을 뜻하는 ’박시‘의 변형인 ’비‘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했다.
선비란 말은 한자로 士(선비 사)와 같은 뜻을 가지며 儒敎(유교)이념으로
인격체라는 뜻에서 儒(선비 유)로도 쓴다.
한편 선비와 비슷한 용어나 뜻으로 사대부(士大夫), 수기치인(修己治人),
유학(儒學)등도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 사대부의 士(사)는 선비란 뜻이며, 대부란 벼슬을 한 선비로서,
벼슬을 한 선비를 한데 묶어 지칭한 말이다.
선비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어야 한다고 했다.
수기치인은 먼저 자신을 수양하고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공자(孔子)가 말한 유학의 목적은 결국 이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하였다.
이 말은 논어(論語)의 헌문(憲問)에서 군자(君子)가 힘쓸 것으로서
修己以敬 修己以安人 修己以安百姓
“修己(수기)함으로써 恭敬(공경)하고, 수기함으로써 사람을 편안히 하고,
수기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라는 세 조목을 애기하고 있는데 수기치인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비란 조선시대의 지배계급으로서 벼슬을 하기 전은 士(사)를 이름 뒤에
붙여 쓰고 벼슬을 한 뒤엔 大夫(대부)라 일컬어 통친 士大夫(사대부)라고 했다.
그런데 사에는 文士(문사)와 武士(무사)가 있어 흔히 문관과 무관을 합해
양반이라고 이르기도 한다.
어쨌든 서비의 뜻은 ‘좋다’ ‘훌륭하다’는 뜻을 담고 있어 선비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지식인’ 또는 ‘유학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선비 정신.
우리에게 선비라고 하면 흔히 단아하게 앉아 점잖게 책을 읽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타협할 줄 모르고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는
고루한 인물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비란 그렇지 않다.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학문을 통해 스스로 수양하고, 천하를 평화롭게 해야 할
의무, 즉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이념을 가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비는 배운 것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도덕적 용기가 강했다.
선비란 순우리말이며 한자로는 사(士) 혹은, 유(儒)로도 쓰이고 있다.
그들의 정신적 체계를 형성하는 유교(儒敎)는 고려 이전에도 한반도에 전래된
정황은 있으나 본격적으로는 고려 말에 유입되어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며
윤리적인 사상으로 새로운 학풍을 이루었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관직에 나가 사대부(士大夫)가 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부에
국한된 것이고, 진정한 목표는 바른 길, 다시 말해 정도(正道)와 명예였기에 관직
여부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조선의 가장 전형적인 선비였던 퇴계와 율곡은 각각 선비를 가리켜 '권세와 지위에
굽히지 않는 존재', '마음으로 옛 성현의 길을 사모하고, 몸은 유가(儒家)의 행실을
따르며, 입은 법도에 맞는 말을 하고, 공론(公論)을 지니는 자'라고 하였다.
즉 선비는 인격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에 힘쓰며, 큰 뜻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지조를 갖추고, 언행이 일치하는 지도자 역할로서 한국의
정신을 이끌어 왔다. 그래서 나온 말이 속유(俗儒)와 진유(眞儒)이다.
속유는 부와 권세에 굽히는 선비이며, 진유는 지조를 생명처럼 지키며 현실적
이해관계에 굴하지 않는 선비를 의미한다.
진유는 양반의 일정한 특권을 누리면서도 부정한 현실과 끊임없이 싸웠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것이 아는 것을 실천하는 知行合一 정신이다.
여기서 더욱 발전한 선비 정신은 공익 , 공동체, 자기 절제 등 통합적 인문교양을
기초로 하게 된다. 그리하여 100여 년 전까지 조선의 지도자 정신이 된다.
1392년에서 부터 1910년까지 519년을 존속한 조선은 당시 세계 최장수 왕권국가
였지만, 상대적으로 왕권과 군사력은 취약했다.
그러한 조선이 519년을 지탱한 것은 선비 정신이었다.
선비는 스스로 엄격하고 솔선수범했으며, 국난에는 의병을 이끌기도 했다.
또한 선비는 백성 모두가 잘 살자는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주창했고, 이를 위해
가장 높은 지위인 임금을 공부시켰는데, 이를 경연(經筵)이라 하며, 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과 밤에는 과외로 야대(夜對)까지 하였다.
또한 선비들은 때로 죽음을 각오하고, 감히 절대자인 임금에게 직언하기도 했다.
중종 12년(1517), 조광조는 조강에서 임금에게 '밝은 임금은 대간(臺諫, 간언을
담당하는 관리)의 말을 좋아하나, 어두운 임금은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다.
대간의 청원은 상을 주어 마땅하나 전하는 위엄으로 물리치시니,
이는 어두운 임금입니다'라면서 임금의 면전에서 바로 임금의 행실을 지적했다.
자신의 안위에 상관없이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이 선비이며, 이런 정신이 조선의
원동력이었다. 선비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 큰 덕목이었다.
이것은 배우고, 익힌 바를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비들에게는 엄청난 도덕적 용기가 필요했다.
이는 부나 권세에 대한 엄청난 소유욕을 가지고, 더 가진 사람을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는 사람들에게서 절대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선비들은 학문과 사랑, 청빈과 공익은 나눌수록 보다 풍족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