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전기 고전주의 시대의 주도적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사이에 생존한 자식 중 둘째 아들이다.
바흐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고 아버지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계승하여 나름대로 독자적 위치에 이르렀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작곡과 건반악기 연주를 위해서 아버지 외에는 선생을 둔적이 없었다."고 썼다. 1735년 법학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학위를 받았지만, 음악 이외의 직업을 가질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1740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베를린 궁정 예배당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훌륭한 플루트 연주자였던 왕은 월요일과 금요일(1주일 중 2일은 오페라를 연주하게 함)을 제외한 매일 저녁에 협주곡의 밤을 마련해서 직속 관현악단의 반주에 맞추어 협주곡을 연주했다. 왕이 지나치게 굴종을 요구하여 관계가 점차 악화되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왕을 모시다가 1767년에 결국 베를린을 떠나 함부르크 궁정의 음악감독(텔레만의 후임)으로 가게 되었다. 그동안 결혼을 했고(1744), 〈건반악기 연주법에 관한 소고 Versuch über die wahre Art das Klavier zu spielen〉(1753~62)를 출판하는 등 작곡가·연주가·선생으로 다른 음악가들이 선망하는 명성을 얻었다.
큰형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와는 달리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강력한 영향력을 나름대로 잘 소화해서 이를 당시 새롭게 싹트고 있던 신양식에 연결시킴으로써 새로운 차원을 이룩했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곧 과거와의 단절로 음악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로써 기념비적이고 웅대한 바로크 음악은 동시대 사람들이 '감정과다성'(Empfindsmkeit)이라고 즐겨 표현한 낭만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감정과다 양식). 그는 이 새로운 음악운동의 선두주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가르침과 본보기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으며, 아버지에게서 습득한 장인적 기교의 혜택을 입었다.
그는 종교음악(성모 찬가 1곡, 수난곡 22곡 등), 교향곡, 협주곡(플루트, 하프시코드, 피아노, 하프시코드와 피아노, 오르간, 오보에 등을 위한 여러 협주곡들), 오르간 소나타, 실내악, 노래 등 수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베를린 시절의 작품들은 후원자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보수적 성향으로 인해 다른 시기에 비해 다소 과거 지향적이었지만, 함부르크 시절에는 진취적인 성향을 보여 어느 시기보다도 미래지향적인 작품들을 썼다. 특히 그의 교향곡, 협주곡, 건반 소나타 등은 고전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줄여서 소나타 형식)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하이든·모차르트와 베토벤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만년에는 후배 작곡가인 하이든의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은 하이든이 만년에 젊은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은 것에 비견할 수 있다. 그의 〈건반악기 연주법에 관한 소고〉는 이후 두 세대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 하이든은 이 책을 "논서 중의 논서"라고 극찬했으며, 모차르트는 "그는 대부이고 우리들은 그의 자식들"이라고 말했다.
한편 베토벤은 젊은 카를 체르니를 가르치면서 "에마누엘 바흐의 논서를 반드시 읽을 것"을 요구했다. 이 책은 실제로 18세기 음악양식 및 해석방법을 이해하는 데 필수 서적으로 숫자표 저음, 장식음, 손가락 주법 등을 포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18세기의 세련된 연주양식의 이해에 권위있는 지침서이다.
요약 독일의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의 큰아들이며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 사이의 전환기에 활동했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는 아버지로부터 초기 음악교육을 받았는데,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아들이 10세 때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 Klavier-büchlein vor Wilhelm Friedemann Bach〉이라는 매력적인 피아노 소품곡집을 교육용으로 작곡해 주었다. 바이올린도 공부했으며, 1729년 라이프치히대학교에 입학했다.
1733년에 이미 활발하게 작곡 활동을 했으며 드레스덴에 있는 장크트조피아 교회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1746년 할레에 있는 리프라우엔 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이무렵 아버지가 죽었고(1750), 이후 과음을 하거나 방탕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 충격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751년 뒤늦게 결혼한 후에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1753, 1758년 2차례에 걸쳐 일자리를 바꾸려 했으나 실패했다. 1762년 다름슈타트 궁정음악가로 임명받았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1764년 20년 동안 일했던 할레 교회를 그만둔 후 고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지내야 했다.
성격이 과민해지고 의심이 많아져 아무도 그의 재능을 의심하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의심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1774년 베를린으로 가서 연주와 교습활동으로 가까스로 연명했다.
주로 건반 음악과 칸타타를 작곡했으며 그밖에 교향곡, 실내악 작품들이 있고 오페라도 하나 남겼다. 그의 음악은 아버지의 바로크 양식과 새로운 로코코 양식(갈랑 양식이라고도 함) 사이에 위치한다. 오랜 활동기간에 비해 다작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은 열정적이며 때로는 선율·화성·리듬을 독창적으로 구사했다.
4.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 (1714~1788)
첼로 협주곡 A장조 Wq.172 중 3악장 Allegro assai
- 앨리슨 맥길리브레이(첼로), 앤드류 맨지(지휘), 잉글리시 콘서트
(5:33)
5. 카를 필립 에마누엘 바흐 (1714~1788)
<겔레르트> 노래집 중 '저녁 노래(Abendlied)'
- 도로테 밀즈(소프라노), 루트거 레미(포르테피아노)
(3:19)
6.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1735~1782)
피아노 협주곡 D장조 op.1-6 중 3악장 Allegro moderato
- 잉그리드 헤블러(포르테피아노), 에두아르드 멜쿠스(지휘), 카펠라 아카데미카 빈
(3:50-3:09)
Johann Christian Bach
요약 전기 고전주의 시대에 명성을 떨친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안나 마크달레나 바흐의 사이에 태어난 막내아들로, '영국의 바흐'로 불렸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아버지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로부터 어려서 음악교육을 받았고, 아버지의 사촌인 요한 엘리아스 바흐로부터도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가 1750년에 죽자 베를린에게서 이복형제 C. P. E. 바흐와 함께 일했다.
20세에 이탈리아로 갔고, 1756년 볼로냐에서 파드레 마르티니의 제자가 되었다.
아버지 세대의 구양식적인 잔재를 현저히 없애고 우아함과 세련됨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의 곡을 작곡하여, 한 귀족 후원자의 열성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곡들은 아직 채 고전주의 양식으로 성숙하지는 않았지만 진지한 양식으로 되어 있으며 대체로 예배가사를 가지고 만든 종교곡이 많았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1760년 밀라노 대성당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그의 개종은 대대로 루터교를 믿어온 그의 가문에 의해 심각하게 받아들여졌고, 가족들은 그를 멀리했다. 그가 다음으로 관심을 기울인 장르는 오페라로, 오르간 연주자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할 정도였다.
1762년 런던의 킹스 시어터 소속 작곡가가 되었고, 이곳에서 성공적인 이탈리아 오페라들을 여러 편 작곡했다. 관현악곡·실내악·건반음악도 여러 편 작곡했고, 칸타타도 몇 곡 작곡했다. 2년 뒤 비올라 다 감바주자인 카를 프리드리히 아벨과 함께 일련의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열기 시작했다.
샤를로테 여왕과 자식들의 개인 음악 선생으로 임명되어 좋은 보수를 받았을 뿐 아니라 사회적인 명사가 되었다. 1772년 독일 만하임의 선제후로부터 오페라를 위촉받았다.
그의 음악은 우아한 선율 등 갈랑 양식(혹은 로코코 양식)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의 음악이 나타내는 이탈리아적 우아함은 고전주의 시대의 작곡가들, 특히 모차르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모차르트는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을 뿐 아니라 그를 존경했다.
하이든과 동시대에 작곡된 그의 교향곡들은 고전주의 시대 초기 교향곡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의 소나타와 건반악기 협주곡들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 그는 너무 일찍 성공을 해서 나이 들어 그 이상 발전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했다. 심오한 깊이를 지닌 작곡가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음악은 감각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