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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귀촌이야기 종남산 조점동의 인생 이야기 7 – 신발공장에 취직하다
조점동 추천 0 조회 750 12.08.02 22:52 댓글 1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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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8.03 05:39

    첫댓글 이 땅의 노동자들이 산업화 초기에 겪어야 했던 애환과 고통을 온몸으로 경험하신 님이십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한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과 애환....
    그리고 처부모님들의 깊고 따뜻한 애정은 미래의 삶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깊은 사랑과 감사로 이어질지
    부럽고 복있는 님이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현장에서의 개선활동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직장인으로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기록들은 개인으로 기록이기보다는 한국 산업화의 좋은 기록입니다.
    좋은 글 고대하면서 읽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또 돌아가신 분의 산소를 다녀와야 합니다.
    태풍의 영향으로 밤새 시원한 바람이 불어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 작성자 12.08.03 10:16

    운취헌님! 반갑습니다. 이 시간쯤이면 아마 삼우제에 가셨겠지요?
    새벽같이 글을 읽고 좋은 말씀을 남겨주셨군요. 고맙습니다. 1970년대의 신발공장은 열악했습니다.
    환경은 열악했고, 인간대접은 못 받았습니다. 신발공장 아가씨들 엉덩이는 장남감처럼
    아무나 만지고 다녔습니다. 그런 누이들, 누나들의 희생과 덕택에 그 많은 수출을 하였습니다.
    월급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첫 월요일과 세째 월요일만 휴무(전기가 부족해서)를 하고
    월급이 30,000원이었으니까, 생산직이나 아가씨들은 30,000원도 안 됐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장인 장모님께서 훌륭한 어른들이었습니다. 운취헌님!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 12.08.03 07:05

    잠깐 잊혀졌던 추억이 "조" 선생님의 글월 덕분에 회상 되는군요!
    연탄 아궁이 부엌을 통해서 드나드는 단칸방의 신혼시절,
    밤 10시 소등시간을 지켜야 했던 셋방살이 ... 그리고 9번의 이사
    몇만원의 월급...그에 상응하는 인격 대접...
    그때 결심한 그리고 염원한 " 세가지 소원! " .....
    이제보니 그시절의 엇 비슷한 아픔을 --- 공간적으론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함께 느끼고 살았나 봅니다.

  • 작성자 12.08.03 10:22

    라이박님! 반갑습니다. 아침 일찍 다녀가셨군요? 무더위도 잘 이기고 건강하게 잘 지내실 줄 믿습니다.
    연탄 아궁이! 아내 온 첫날밤에 연탄가스 중독이 된 그 방은 연탄 아궁이를 넘어서 방으로 들어가는 구조였습니다.
    전등 이야기도 실감이 납니다. 여러 사람이 세들어 와 있으면 주인은 세 사는 사람들 돈 받아서 자기 전기요금도 냈습니다. 전등 하나에 얼마씩 받으니까 전기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했지요. 전기요금, 수돗물 때문에 주인하고 다툰 사람도 보았지요. 그랬던 1970년대를 넘어 온 사람들이군요. 우리는.
    라이박님! 좋은 말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기쁘고 행복하세요.

  • 12.08.04 11:45

    저도 예전고교시절 시골에선 연탄방구경도못하다가
    친구집에서자취하다가 연탄을마셔가지고학교도못가고 촌년이
    도시맛을톡톡히본적이있었죠

  • 작성자 12.08.04 16:26

    반갑습니다.
    연탄맛을 단단히 보셨군요?
    이제는 지나 간 이야기지만 그때는 아침마다 연탄가스 중독 뉴스가 있었지요.
    월동준비를 하던 때지요. 연탄 50장이나 100장을 들여 놓고, 김장을 하면 그게 월동준비지요.
    다 옛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름처럼 편안함이 날마다 유지되시기 바랍니다.

  • 12.08.05 17:34

    버스요금 40원을 아끼려고 40분씩 걸어서 출근했던 목포아가씨의 75년도의 부산생활이 생각납니다
    지독한 연탄가스로 생사를 넘나들었음에도 출근해서 쓰러진, 알뜰한 노하우에 월세방에서 50만원 전셋집으로
    동생들 불러 모아 생활했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리워지군요 정말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던 세월이었지요....
    조점동님~ 아름다운 추억이 묻어있던 부산 생활 잠시 생각해 봅니다 더위에 건강하세요~

  • 작성자 12.08.05 19:15

    인생후반기님! 반갑습니다. 1975년에 부산에서 함께 살았군요. 5만원에 3,500원씩 달세를 주고 살 그 때, 동료 한 사람은 125만원을 주고 만덕에서 집을 한채 사더군요. 또 다른 한 사람은 12월 말에 570만원을 주고 사상중학교 앞의 기와집을 한채 샀는데, 봄에 1,200만원 주겠다고 팔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넉달만에 배로 올랐다는 말입니다. 나는 월급이 3만원인데...... 동생들을 불러모아 열심히 살으셨던 인생후반기님은 지금 옛 이야기 하면서 행복하게 지내시지요? 40원 아낄려고 40분 걸었다는 말씀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그때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12.08.05 22:14

    돌이켜 보니 저도 그 무렵(74 ~ 76년)에 부산 대연동에 살았습니다.
    하숙비를 벌기 위해 잔업과 철야를 해야 하는 서글프고 고단한 노동자의 삶이었습니다.
    참으로 열악했던 노동환경과 근무조건 그리고 저임금 시대...
    그 가난한 환경을 살았기에 부유하지는 않지만 오늘의 여유와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저에게는 돌아가기 싫지만 훈장같은 삶의 역정이었습니다.

  • 작성자 12.08.06 08:10

    운취헌님! 이 더위에도 잘 지내시는군요. 그러리라 믿습니다.
    1974년에서 76년까지 대연동에 사셨었습니까? 나는 대연동 옆 문현동에서 28년을 살았습니다.
    1979년부터 2007년 귀촌할 때까지요. 바로 앞에 글을 남겨주신 인생후반기님과 운취헌님, 다 비슷한 세대이다보니 그 무렵의 열악한 산업 현장에서 피땀을 흘렸네요. 나도 신발공장에서 접착제의 독기에 쓰러진 일이 있습니다. 오직 가난을 극복하고 삶을 개척해야 했으니 그 혹독한 노동자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지요. 지나간 일이지만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아직도 무더운 날씨가 계속됩니다. 건강에 유의하시면서 보람된 날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 12.08.06 13:00

    밀양은 저희 성당에서70년대 산간학교를 여름마다 갔었습니다
    전 고향떠나 온지 30년정도 되네요 영도 청학동에서 결혼전까지 살았어요
    그당시 사상공단에 신발공장이 있던걸로 기억됩니다
    귀촌하고 싶어 이곳에 자주옵니다

  • 작성자 12.08.06 17:51

    emf사모님! 반갑습니다. 천주교 신자군요. 더욱 반갑네요.
    나도 밀양에 오기 전에 문현성당에서 주일학교 신앙학교를 밀양 감물로 왔었습니다. 봉사하러 함께 왔었지요. 부산에 신발공장이 많았지요. 사상에는 국제상사, 신암에는 삼화고무, 당감동에는 동양고무, 진양화학 등등....... 귀촌을 꿈꾸시면 이곳 귀농사모에서 좋은 정보를 많아 얻으시기 바랍니다. 많이 알면 알수록 도움이 되지요. 늘 건강하시고 날마다 행복하세요.

  • 12.08.09 12:37

    귀촌하여 인생의 참맛을
    느끼며사신 조점동님이부러워요 ..많이많이..

  • 작성자 12.08.10 17:54

    용리님! 반갑습니다.
    우리 부부는 귀촌생활에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날마다가 좋습니다. 용리님도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시더라도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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