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에서 하루 늦게 온 바람에 김해 한일합섬에 들어가지 못하고, 처가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때 까지 지냈습니다. 아내의 친구 외삼촌이 근무하는 곳에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는데, 바로 왕자표 신발의 국제화학 사상공장입니다. 출근 날짜는 11월 11일로 정해졌고, 당장 내가 자취할 방을 구하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처음 본 아내 친구와 함께 다니면서 사상역 뒤에, 50,000원 보증금에 3,500원씩 달세를 내는 방을 구했습니다.
내가 임실에서 올 때 거의 빈손으로 왔기 때문에, 보증금이나 간단한 자취용 부엌살림은 장모님께서 해결해 주셨지요. 10월 2일에 고향을 떠나온 내가 40일간을 처가에서 지내야 했으니 그런 불편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마치 “내가 처가에 가까운 곳으로 오니까 취직을 시켜 주세요.”가 되었으니.......
장인 장모님께서도 얼마나 답답하고 속이 상했을까요. 어디서 저런 인간을 좋다고 매달리더니 꼴좋다고 하지 않았을까요? 아내를 향해서 속마음이. 그러나 나한테는 단 한 번도 불쾌한 내색이나 속상한 말씀을 하신 일이 없습니다.
자취를 해 본 일이 없고 겨우 밥만 해 본 사람이, 자취를 하면서 신발공장 현장 노동자로 일한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새벽 7시까지 출근하고 밤 8시경에 퇴근을 하는 강행군의 공장생활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제2사업부 총고무1계의 진행반이라는 곳은 수출용 장화를 생산하는 데, 장화의 온갖 부속을 맞춰서 준비해 주는 일이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생산하는 사람들보다 월급이 더 많다고 좋은 부서라고 하였지요. 하루에 한 시간 더 일한다고 그 만큼 월급이 더 많으니까요.
장모님께서는 얼마나 걱정이 되셨던지 4-5일 만에 한 번씩 반찬을 만들어 오셨습니다. 그러던 2주쯤 뒤에 고향으로 가서, 보따리 몇 개에 살림살이를 챙겨서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김해로 오자마자 아들은 처가에 맡기고 우리 부부만 보따리를 들고 부산 내 자취방으로 왔습니다. 이게 우리 부부의 분가요, 우리 부부만의 살림살이 첫날입니다. 혼인하고 2년 7개월만의 일이지요.
그날 밤!
우리 부부는 역사적인 밤을 보내게 됩니다.
사람들이 내 입을 강제로 벌리고 김칫국물을 쏟아 붓고, 아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무슨 일인지........ 나는 정신이 몽롱하고.....
내가 연탄가스로 중독이 됐던 것입니다. 아내가 자다가 깼는데, 내가 이상해서 살펴보니 그 꼴이었던 모양입니다. 한 밤중에 아내가 밖에서 소리소리 질러 이웃 사람들을 불러다, 나를 밖으로 끌고나와 김칫국물을 쏟아 붓는 그 순간에 내 정신이 돌아 왔던 것입니다. 부산 살이 첫날밤에 이런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내가 없었으면 그날 저녁에 아주 멀리 가버렸겠지요. 그 난리를 치고도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해야 했습니다. 그때는 한 달에 달랑 두 번 쉬고 일해도 월급이 30,000원인데, 무슨 놈의 계산이 단 하루만 결근을 해도 한 3-4천원이 줄어드니까 결근을 할 수가 없었지요.
그로부터 한 열흘쯤 지나서 아침에 세면을 하려고 부엌으로 나갔다가, 뒤로 넘어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때도 연탄가스 때문이었지요. 이 소식을 들은 처가에서 그 집에 살다가는 사위가 죽겠다고 집을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내 월급만으로는 살아가기가 어렵겠다고, 김해 한일합섬 근처에 방을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내가 양재기술이 있으니 한일합섬 아가씨들 옷이라도 고쳐주고 만들어 주면서 돈을 벌자는 거였지요. 김해의 방은 장인어른과 아내가 가서 얻었습니다.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방과 부엌하나씩 30가구쯤 살고 있는 집인데, 일명“참새아파트”라는 셋방 전문집이었습니다.
이사는 12월 31일에 하였는데, 장인어른과 아내가 버스로 두 차례 왕복하면서 살림살이를 옮겼습니다. 한 번에 보따리 두개씩을 들고 버스를 타고 마니면서 이사를 한 것입니다. 내가 퇴근해서 아내와 하나씩 들고 김해 셋방으로 갔습니다.
한 달반 후에 다시 길가 점포가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래야 아내가 부업을 할 수가 있다고.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부산 공장으로 가는 통근버스를 6시경에 타야하고, 저녁에는 8시경에 일을 마치고 퇴근해 오면 밤 9시가 지났습니다. 이런 공장생활은 농사일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생스러웠습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서 공장생활은 익숙해졌고, 저축은 못해도 내 월급과 아내의 부업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4월에는 아내가 둘째인 딸을 낳았습니다. 이번에 제주로 간 그 딸 입니다.
이 무렵에 신발공장에서도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습니다. 새마을교육도 하고 구석구석 쓸고 닦고 생산도 독려하고..... 우리 진행반에서도 분임토의를 하고 실천해서 그 결과를 발표하는 공장새마을 경진대회 에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공장새마을운동은 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고향에서 새마을지도자를 하면서 면 단위는 말할 것도 없고, 군이나 도, 수원 새마을지도자연수원까지 다녀왔으니, 분임토의를 하고 발표하는데 자신이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경진대회에 나가서 발표를 하였는데, 우수상을 받아왔습니다. 신발공장에서는 낮 12시와 오후 4시에 화장실 옆에서 외부 장사꾼이 빵과 음료수를 팔았는데, 빵 포장 비닐과 음료수 병을 함부로 버렸습니다. 내가 그 비닐 청소를 하고 빈병을 모아서 밖에 내다 팔았습니다. 병은 제법 많이 나왔고 나는 자주 리어카에 빈병을 싣고 나가서 팔아왔지요. 그 돈으로 책과 잡지를 사다가 우리 부서 동료들이 읽게 하였습니다. 말단 노동자였지만 분임토의나 공장새마을운동 문제만 나오면 나를 찾았습니다. 회사 안에 공장새마을연수원을 만들어 놓고 운영할 정도였으니까요.
나중에는 공장마을금고를 만들어 운영하였고, 일하다가 개선해야할 점이 눈에 띄면 공장새마을운동으로 연결해서 고치고 새로운 제안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좋은 일을 해 보자고 한 달에 100원 회비 모으기 운동을 하여, 사회복지 시설에 위문을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이 활동은 매달 사다가 읽는 주간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의정부의 어느 술집 아가씨들이 매달 돈을 모아, 의왕의 나환자촌인 나자로마을을 돕는다는 기사를 읽었지요.“참되자일하자회”라는 이 모임의 회원이 160명이 되고 한참 재미가 있었습니다. 나는 2만 명 이상이 일하는 현장 노동자 중에서, 대표이사가 특별히 칭찬과 격려를 해 주기도 하였고 상장, 표창장을 세 번이나 받았습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내가 회사를 그만 두는 일이 벌어졌습니다.(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찍은 사진을 몇 장 소개합니다.
자신의 번식을 위한 식물들의 활동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이 토마토는 참 예쁘게 생겼고 잘 익어갑니다. 오늘 우리 종남산 산방에 오신 손님의 딸이 따서 먹었습니다. 중학교 1,2학년인 두 따님은 참 착해 보입니다. 먹을 수 있다고 하였으니 따서 먹어야지요.
고추가 잘 익어 갑니다. 햇볕에 말리면 태양초지요. 다음 사진은 태양초가 되는 모습입니다.
사과도 씨앗을 만드는 작업인데, 우리 인간들이 잘 먹지요. 제법 굵어졌습니다.
이 꽃도 끈질깁니다.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에 며느리가 사 온 꽃인데, 석달 가까이 우리 집 거실에서 아직도 피어 있습니다. 일부는 씨앗을 만들었지요.
딸의 직장 동료들이 3년 전에 우리 집에 오면서 대봉감나무를 사다가 심어주었는데, 많이 자랐습니다. 겨울에 장독에 넣어 놓고 홍시가 되면 하나씩 내다가 먹을 예정입니다.
대추도 많이 자랐습니다. 그저께 온 손님은 이 대추를 따서 먹어 보더군요. 대추맛이 난답니다.
모과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노랗게 익은 모과를 바라보면서 침을 삼킬 것입니다.
지난 봄에 이 층층나무를 보신 분들은 감탄을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나 자랐습니다. 한뼘 정도밖에 안 되던 위층의 싹이 이제 중심 줄기가 되었고, 나무 밑에는 훌륭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오신 손님이 층층나무 아래서 쉬고 식사를 하더군요.
이 물매화가 드디어 꽃을 피웠습니다. 작년 여름에 명례성지에 갔다가 이 물매화를 보고 감탄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우리 예림성당에도 있네요. 잘 살펴보니 물매화 줄기 옆에 작은, 아주 작은 물매화가 있어서 얻어 왔습니다. 한 3cm나 됐을까요. 그게 커서 드디어 꽃을 피웠으니.....
대자연 속에는 수 많은 식물들이 종족 번식과 씨앗을 만든다고 대단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한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날씨가 무척 덥습니다. 건강하게 지내시고 늘 행복하세요.
2012. 8. 2.
종남산 정남향 산동네에서
조점동
첫댓글 이 땅의 노동자들이 산업화 초기에 겪어야 했던 애환과 고통을 온몸으로 경험하신 님이십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한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과 애환....
그리고 처부모님들의 깊고 따뜻한 애정은 미래의 삶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깊은 사랑과 감사로 이어질지
부럽고 복있는 님이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현장에서의 개선활동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직장인으로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기록들은 개인으로 기록이기보다는 한국 산업화의 좋은 기록입니다.
좋은 글 고대하면서 읽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또 돌아가신 분의 산소를 다녀와야 합니다.
태풍의 영향으로 밤새 시원한 바람이 불어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운취헌님! 반갑습니다. 이 시간쯤이면 아마 삼우제에 가셨겠지요?
새벽같이 글을 읽고 좋은 말씀을 남겨주셨군요. 고맙습니다. 1970년대의 신발공장은 열악했습니다.
환경은 열악했고, 인간대접은 못 받았습니다. 신발공장 아가씨들 엉덩이는 장남감처럼
아무나 만지고 다녔습니다. 그런 누이들, 누나들의 희생과 덕택에 그 많은 수출을 하였습니다.
월급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첫 월요일과 세째 월요일만 휴무(전기가 부족해서)를 하고
월급이 30,000원이었으니까, 생산직이나 아가씨들은 30,000원도 안 됐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장인 장모님께서 훌륭한 어른들이었습니다. 운취헌님!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잠깐 잊혀졌던 추억이 "조" 선생님의 글월 덕분에 회상 되는군요!
연탄 아궁이 부엌을 통해서 드나드는 단칸방의 신혼시절,
밤 10시 소등시간을 지켜야 했던 셋방살이 ... 그리고 9번의 이사
몇만원의 월급...그에 상응하는 인격 대접...
그때 결심한 그리고 염원한 " 세가지 소원! " .....
이제보니 그시절의 엇 비슷한 아픔을 --- 공간적으론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함께 느끼고 살았나 봅니다.
라이박님! 반갑습니다. 아침 일찍 다녀가셨군요? 무더위도 잘 이기고 건강하게 잘 지내실 줄 믿습니다.
연탄 아궁이! 아내 온 첫날밤에 연탄가스 중독이 된 그 방은 연탄 아궁이를 넘어서 방으로 들어가는 구조였습니다.
전등 이야기도 실감이 납니다. 여러 사람이 세들어 와 있으면 주인은 세 사는 사람들 돈 받아서 자기 전기요금도 냈습니다. 전등 하나에 얼마씩 받으니까 전기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했지요. 전기요금, 수돗물 때문에 주인하고 다툰 사람도 보았지요. 그랬던 1970년대를 넘어 온 사람들이군요. 우리는.
라이박님! 좋은 말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기쁘고 행복하세요.
저도 예전고교시절 시골에선 연탄방구경도못하다가
친구집에서자취하다가 연탄을마셔가지고학교도못가고 촌년이
도시맛을톡톡히본적이있었죠
반갑습니다.
연탄맛을 단단히 보셨군요?
이제는 지나 간 이야기지만 그때는 아침마다 연탄가스 중독 뉴스가 있었지요.
월동준비를 하던 때지요. 연탄 50장이나 100장을 들여 놓고, 김장을 하면 그게 월동준비지요.
다 옛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름처럼 편안함이 날마다 유지되시기 바랍니다.
버스요금 40원을 아끼려고 40분씩 걸어서 출근했던 목포아가씨의 75년도의 부산생활이 생각납니다
지독한 연탄가스로 생사를 넘나들었음에도 출근해서 쓰러진, 알뜰한 노하우에 월세방에서 50만원 전셋집으로
동생들 불러 모아 생활했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리워지군요 정말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던 세월이었지요....
조점동님~ 아름다운 추억이 묻어있던 부산 생활 잠시 생각해 봅니다 더위에 건강하세요~
인생후반기님! 반갑습니다. 1975년에 부산에서 함께 살았군요. 5만원에 3,500원씩 달세를 주고 살 그 때, 동료 한 사람은 125만원을 주고 만덕에서 집을 한채 사더군요. 또 다른 한 사람은 12월 말에 570만원을 주고 사상중학교 앞의 기와집을 한채 샀는데, 봄에 1,200만원 주겠다고 팔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넉달만에 배로 올랐다는 말입니다. 나는 월급이 3만원인데...... 동생들을 불러모아 열심히 살으셨던 인생후반기님은 지금 옛 이야기 하면서 행복하게 지내시지요? 40원 아낄려고 40분 걸었다는 말씀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그때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돌이켜 보니 저도 그 무렵(74 ~ 76년)에 부산 대연동에 살았습니다.
하숙비를 벌기 위해 잔업과 철야를 해야 하는 서글프고 고단한 노동자의 삶이었습니다.
참으로 열악했던 노동환경과 근무조건 그리고 저임금 시대...
그 가난한 환경을 살았기에 부유하지는 않지만 오늘의 여유와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저에게는 돌아가기 싫지만 훈장같은 삶의 역정이었습니다.
운취헌님! 이 더위에도 잘 지내시는군요. 그러리라 믿습니다.
1974년에서 76년까지 대연동에 사셨었습니까? 나는 대연동 옆 문현동에서 28년을 살았습니다.
1979년부터 2007년 귀촌할 때까지요. 바로 앞에 글을 남겨주신 인생후반기님과 운취헌님, 다 비슷한 세대이다보니 그 무렵의 열악한 산업 현장에서 피땀을 흘렸네요. 나도 신발공장에서 접착제의 독기에 쓰러진 일이 있습니다. 오직 가난을 극복하고 삶을 개척해야 했으니 그 혹독한 노동자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지요. 지나간 일이지만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아직도 무더운 날씨가 계속됩니다. 건강에 유의하시면서 보람된 날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밀양은 저희 성당에서70년대 산간학교를 여름마다 갔었습니다
전 고향떠나 온지 30년정도 되네요 영도 청학동에서 결혼전까지 살았어요
그당시 사상공단에 신발공장이 있던걸로 기억됩니다
귀촌하고 싶어 이곳에 자주옵니다
emf사모님! 반갑습니다. 천주교 신자군요. 더욱 반갑네요.
나도 밀양에 오기 전에 문현성당에서 주일학교 신앙학교를 밀양 감물로 왔었습니다. 봉사하러 함께 왔었지요. 부산에 신발공장이 많았지요. 사상에는 국제상사, 신암에는 삼화고무, 당감동에는 동양고무, 진양화학 등등....... 귀촌을 꿈꾸시면 이곳 귀농사모에서 좋은 정보를 많아 얻으시기 바랍니다. 많이 알면 알수록 도움이 되지요. 늘 건강하시고 날마다 행복하세요.
귀촌하여 인생의 참맛을
느끼며사신 조점동님이부러워요 ..많이많이..
용리님! 반갑습니다.
우리 부부는 귀촌생활에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날마다가 좋습니다. 용리님도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시더라도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