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의 취미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마음만 있으면 언제나 간단한 준비와 차림으로 우리나라의 도처에 있는 돌밭을 찾아가 직접 채집작업을 즐길 수 있다. 웬만한 끈기와 열성만 있으면 그 질에 있어서 상당한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수석취미이다.
우리나라의 수석 취미는 아직 보편화되지 못한 처녀지이며 이제서야 겨우 관심들을 기울이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이제부터가 오히려 더 신선하고 착실한 재미를 볼 수 있는 그러한 자연적 소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하나의 소박하면서도 고상한 취미로서 우리가 수석의 세계를 즐기는 것은 그 수석이 지니는 깊고 다양한 심미적, 정신적 의미 때문이다. 수석이 지니는 심미적, 정신적 가치의 깊이, 그것은 한마디로 무궁무진, 다양다채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꿈꾸고 욕구하는 끝없는 심미적, 정서적 갈망을 언제나 수석은 충족시켜준다.
우리가 수석의 세계를 즐기고 탐구하는 것은 우리들 누구나가 하나의 소박한 미의 구도자로서 높고 깊은 예술의 세계에 육박하는 그 창조적 원천과 순수한 향수에 젖어들게 하여 그 특유하고 무한한 심미적 즐거움과 신비를 체험시켜 주기 때문이다. 수석을 채집하고 수석을 감상하고 그 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수석이 바로 위대한 자연과 절묘한 예술의 세계의 그 중간 지점, 그 초월적이며 궁극적인 근원에 아주 쉽게 우리를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인생과 자연, 창조와 감상의 혜택을 동시적으로 그리고 소박하면서도 차원높게 누릴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 수석이란 무엇인가? 왜 그것이 좋은 것이고 좋아지는 것이며 한번 맛을 들이면 깊이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는가? 그 심미적 가치와 정신적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찾고 어떻게 즐길 것인가? 필자가 체험한 약간의 경력으로 대충 그 초보적인 얘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무릇 인간이 즐기고 추구할 수 있는 미의 대상을 흔히 자연미와 예술미로 구분한다. 천지 자연의 삼라만상이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천연적인 조건의 미를 자연미라고 한다면 예술미는 그 자연 삼라만상이나 인간 자체의 정신적 내재적 요소까지를 소재로 한 창조적인 미, 즉 인간이 만들어 낸 인공적인 미를 말한다.
천지 자연의 삼라만상이 미의 대상이 될 경우, 우주나 천체, 지구 위에 있는 산과 바다, 강, 숲, 들 그리고 지하나 바다 안팎에 꽉 차있는 일월성신, 동식물, 생물, 무생물, 유기물, 일체를 가리킴은 물론이다.
이러한 모든 존재와 그 현상, 비와 바람, 번개와 천둥, 눈과 바. 안개와 얼음, 햇빛과 달빛의 일체 역동적이며 정적인 자연현상 전부가 그 대상이 된다. 다만 자연미와 인공미를 구분할 경우 일단은 상대적으로 보아, 우주 자연을 하나의 소박한 객체, 유형적인 대상으로서, 인간이 거기에 아무렇게도 가공하지 않은 존재, 자연적이며 물질적이며 물리적이며 현상적인 시공의 테두리가 그 한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예술미와 인공미란 이러한 자연을 소재로는 하되, 어디까지나 인간이 그 자연에다 어떤 가공을 해서 변형, 변질시키거나 훨씬 정신적이며 심리적이며 창조적이게 한 그러한 미를 말한다.
이러한 인간이 만들어 내는 예술미를 다시 문학, 회화, 음악, 무용, 조각, 공예 부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문의 인공미는 문학, 음악, 무용 등에서 보다 더 많이 자연의 소재에 의존한다. 그 예술로서의 표현 매제가 상당히 물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물질적인 성격과 표현하는 매재로서의 물질적인 성질은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 자연대상은 어디까지나 예술의 표현대상, 그 소재대상으로서의 자연이고, 예술을 표현하는 물감이나 캔버스나 대리석이나 나무 같은 것은 일단 작품으로 승화되어야 하는 변질 변형된, 작가의 주관의 침투를 강하게 받고 있는 다른 차원의 물질적 성격을 띠게 된다. 같은 객체적인 자연 대상을 또 하나의 예술의 대상, 그 세계를 형성하는 인공적, 심미적 욕구를 충죽시키는 그러한 차원의 매재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문학 음악 등의 표현 수단에 비하여 회화나 조각 공예의 재료는 훨씬 자연에 의존하고 더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조건에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인간과 자연, 인간이 미의 대상으로 즐기고 추구하는 자연의 미와 예술의 미는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다, 혹은 다르다고 생각해야 되는가. 자연이 그 미적 추구의 대상일 경우의 그 미의식과 예술 인공이 그 미적 추구와 창조의 수단 목적일 경우의 그 미의식은 어떻게 서로 다른가.
인간과 자연, 자체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창작적 미를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상대적인 얘기이며 아주 엄밀하게 말할 때는 인간 자체나 그 의식의 흐름이나 창조적인 각성에 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종교적인 인격신적인 섭리나 철학에 의존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인간이 느끼는 미의식 역시 인간 자체 내에서 아무런 경험이나 대상이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닌 동시에 반대로 자연이 그 대상이 되거나 계기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자연은 인간의 마음에 비춰졌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의 계기와 근원은 인간의 마음, 그 주관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은 자연, 인간은 인간으로 볼 때 자연미와 예술미의 의미는 성립된다. 그리고 그 자연 자체가 가지는 아름다움, 해나 달이나 별, 구름과 노을의 아름다움, 산이나 바다, 강이나 들, 나무, 꽃, 풀, 새, 짐승, 버러지, 물고기, 그리고 돌과 모래, 바람 소리나 폭포, 산 그림자나 낙엽 등이 그대로 자연의 소박한 미를 이룰 경우, 그 아름다움을 우리는 그대로 자연미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산수나 초목, 꽃이나 돌들을 일단 화폭에 옮기거나 노래로 옮기거나 조각, 무용 혹은 시로 표현될 때 우리는 그 소박한 자연 자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과 질이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직접 눈이나 귀, 코나 입으로 그러한 감각으로 느끼는 미가 아니라 같은 꽃, 같은 파도, 같은 주제의 산수지만 화가가 화목에 옮겨놓은 자연에서는 간접적이면서도 훨씬 더 조화를 얻고 통일된, 그리고 충분한 상상을 구사한 아름다움의 미의식을 경험하게 된다.
화가가 일단 눈으로 보았거나 경험한 자연 소재는 그 화가의 또 하나의 경험세계인 상상의 세계를 거쳐서 그 상상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미의 법칙에 순응한 또 하나의 세계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그림을 보는 사람 역시 그냥 눈으로 감각으로 보는 산이나 꽃과는 다른 차원 미의식, 자기도 화가가 옮겨 담은 상상의 세계를 통해서 자기의 상상이 참가한 즐거운 경험 예술이 주는 그 속의 자연을 정서로서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미보다도 예술의 미가 더 질서의 조화와 통일성을 갖게 되고 그만큼 인간의 예술적 능력이 참간한 새로운 세계, 예술의 세계가 성립되는 것으로 보아 예술미를 자연미보다 위쪽에다 두는 것이다. 예술의 미는 자연을 다시 자기 속의 자연, 다시 한번 형성해 내는 세계, 상상 속의 세계, 마음의 세계의 자연, 미의식의 세계 속의 자연으로 바꾸는 놓은 것이다.
인류가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처음 이러한 예술을 갖게 되고 창작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발생의 근원에 대한 학설은 매우 구구하여 일정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오랫동안 예술을 시작해서 이끌어 내려오고 있으며 어쩌면 먹고 입고 자고 하는 초보적 기본적인 생활수단을 넘어선 가장 가치 있는 일로서 추구하고 있는 것이 예술행위인지도 모른다.
예술이 있으므로써 우주, 천지, 자연, 인간, 삶, 즐거움의 모든 것 중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값지고 행복한 것이 음악, 문화, 회화, 무용, 조각 등의 각 예술의 세계가 채워주는 정신적 정서적 미적세계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인류가 가장 고상하고 깊고 평화스럽고 행복하게 사는 그 삶의 내용의 으뜸가는 한 가지 분야가 바로 이 예술의 세계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을 창조하는 이와 받아들여 감상하는 이가 다 함께 개별적이고 내밀하며 가장 순간적이면서도 영원한 희열과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의 주제와 내용은 인간의 모든 희망과 욕구, 또는 이상과 동경, 삶의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고, 삶의 희열과 만족을 연장하고, 나아가서는 인생 자체의 허무와 죽음을 극복하는 고상, 심원한 종교적 염원과 그 기구행위 자체를 이 예술을 통해서 영위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 인간이 겪어 온 예술의 역사와 그 기능, 그 발전과 쇠퇴의 과정을 살펴볼 때 역연하며 또한 그 예술의 힘이 미쳐 온 인류의 정신사, 어느 민족의 정신적, 사상적, 문화적 자취를 살펴 볼 때 얼마나 그 힘이 위대하고 그 원하는 바가 깊은가 알 수 있다. 이러한 예술의 역사에는 예술 자체의 기본 소장뿐 아니라 인류 민족의 인간의 삶의 역사의 시대적 사회적인 모든 무늬가 깊이 아로 새겨져 있다.
모든 예술가는, 그 예술 자체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하면서 전진적인 자세로 몸부림을 하고 있다.
결국 여기에는 인간의 모든 예술은 그 시초의 근원대상인 자연으로 복귀하거나 거기서 탈출하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자연과의 관계에서 더 발전하거나 변화하거나 쇠퇴하거나 하는 것이다.
자연을 모방해서 출발했고 자연을 소재로 해서 자기를 표현했고 인간 대 자연의 관계에서 예술의 기복과 변천이 이루어지면서 결국 인간, 예술가는 어떤 자연의 계시, 자연이 주는 예지와 묵시, 거기서 얻은 영감과 힌트로 인간 자체의 예술미를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이상적이며 현시적이며 영원한 상징을 자연의 소재에서 얻고 자연의 법칙에서 배우고 자연의 초자연적인 섭리에 따라 자신의 방향을 결정지으려 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 이러한 자연 자체의 미와 그 미를 비유적 이상적 상징적으로 혹은 교훈적 순수미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상관 관계는 이 양자의 영원한 관계이면서 늘 현존적인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그 자연미, 특히 그 자연의 한 정수인 수석의 미란 어떤 것인가. 수석의 미로서의 자연미와 자연미로서의 수석의 미란 어떠한 것인가. 수석의 미가 상징 대표되는 자연미와 인간이 대결하고 있는 예술미와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수석의 미가 깊고 다양하고 순수 소박하고 정신적이라면 그 미의 성격, 그러한 미의 미적 범주는 어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평범하고 단순한 취미가 아닌 깊은 인생의 수양, 어떤 아름다움을 자연을 통해서 초점화하고 궁극화하는 수석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미의 가치, 그 직관적이며 예지적인, 포괄적이며 사색적인 의미는 무궁하고 영원하다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말하는 수석, 강에서 채집하는 수석은 분명히 한 개의 돌이다. 그러나 보통 말하는 돌, 우리가 아무데서나 보는 잡석이 아니라 특별히 골라낸 돌이다.
그 빛깔이나 형태, 단단하기와 질감이 아무데서나 보는 돌, 부딪히면 힘없이 깨어지거나 아무렇게나 두루뭉수리로 아무런 의미도 주제도 찾아낼 수 없는 그러한 돌이어서는 안된다. 떨어져 나온 조각, 승화되지 않은 색채, 거칠고 푸석한 질감의 돌이 아니고, 일단 수석의 범주에 들만한 돌이라면 그 돌 전체가 주는 정기, 특유한 깊이,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 있는 뜻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요약해 말하면 일반적인 돌,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흔하고 많게 그렇게 생긴 돌이 아니라 그것 하나밖에 없는 특이한 돌, 완벽한 개성을 지닌 돌이라야 한다.
이 개성이 곧 수석의 심미성, 깊고도 그윽한 정신적 가치, 우리가 수석을 취미이되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는 그 의미의 높이를 심증하는 것이 된다.
수석은 모든 돌, 일반이 지니는 돌의 성질을 가지면서 그 돌 특유한 성품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수석 하나가 지니는 경탄할 만한 개성과 그 특성은 바로 돌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을 수정하게 되고, 그 돌이 지니는 특이한 미와 의미의 깊이는 바로 모든 예술과 자연이 지니는 미적 범주를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여기서 한 개의 수석이 지니는 세계의 개성미와 정신적 상징을 우리가 추구하는 예술미의 범주를 수정하고 확대변경시킨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수석이 지니는 어떤 놀라운 개성미는 다른 자연, 다른 예술의 그것에서는 찾을 수 없는,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세계를 가지고 있다. 나무에서도 꽃에서도 새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자적인 미를 가지고 있다. 그림에서도 조각에서도 서도에서도 공예에서도 나타낼 수 없는, 수석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수석에서가 아니면 나타날 수 없는 그러한 독특한 미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른 어떠한 종류의 돌에서 쇠붙이 광물이나 금강석류에서도 볼 수 없는 무게와 소박성 혹은 세련미와 그리고 그 포괄하는 바 종합적인 깊은 의미를 수석은 가지고 있고 또 가져야 한다.
첫째 그 질감, 둘째 그 색채와 무늬, 셋째 그 경도, 넷째 그 의미, 주제에서 볼 때 수만 수천 개의 수십만 수백만 개의 돌 중에서 골라내는 한 개 빼어난 수석은 바로 수석미라는 장르를 형성할 만큼 그렇게 아름답고 깊고 다양하고 놀라운 것일 수밖에 없다.
어떠한 인공적 화학적으로 만들어지고 처리된 색채보다는 어떠한 화판이나 캔버스, 어떠한 질감의 종이에 칠해진 색채보다도 감칠맛 있고 깊고 그윽하고 황홀한 색채가 수석의 색채이다.
어떠한 추상화가가 천재적으로 창안 표현한 문양보다도 질서 있고 다양하고 힘있고 정서적인 무늬가 박혀 있는 것이 수석의 문양이다.
겉으로 칠해진 색채나 문양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색깔, 그것은 우리의 심미안을 충분히 만족시켜주는 것이며 아주 불면의 것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그 문양이 의미하는 상징적 혹은 사실, 추상적 주제는 가히 경탄할만한 것이 수두룩하다. 오래고 깊은 고분 벽화의 종교적 근엄성의 것이 있는가 하면 기상천외의 어린이 그림, 감히 인간의 의장으로는 미칠 수 없는 신묘 불가사의한 주제의 그림이 얼마든지 나타난다.
이 형태에 이르러서는 수석 본래의 묘미와 경탄이 바로 이것인가 싶게 다양하고 차원 높다. 그윽하고 웅장하고 아늑하고 수려한 봉우리와 봉우리, 계곡과 계곡이 천변만화를 일으키는 산수경석의 격조를 우리는 수석에서 본다. 말하자면 아주 사실적, 구상적인 산경이 그 형태의 됨됨이에 따라 태산준령이 있는가 하면 목가적인 야산이 있고 둑둑 잘려진 석파, 토파가 있는가 하면 잔잔한 혹은 거칠고 미친 파도 저쪽의 외로운 섬산을 볼 수 있다. 완연히 실제의 큰 산을 축소한 절경이 있고, 단단하고 매끄럽고 새까만 먹돌로 된 그 선도 부드러운 추상의 산도 볼 수 있다.
이른바 물형, 물상석 중에서 대체로 모든 동물, 사자, 말, 곰, 수달피, 개, 소, 코끼리, 학, 사슴, 해태 등의 대부분의 동물은 다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추상적인 형태일 경우 그 세련된 미와 추상의 묘는 아무리 훌륭한 조각예술로도 감히 따르지 못할 완벽성을 띤 것이 허다하다.
특히 수석의 조형미는 완전히 예술미 중에서도 조각예술의 입체미가 가지는 모든 요소를 구비하고 있다. 이러한 조각미적인 입체미와 그 상징적 추상적 주제성은 바로 인류의 예술사를 시대에 따라 재현하는 것같이 고전, 낭만, 사실, 상징, 주지, 입체, 미래, 초현실, 전위의 모든 조류가 그 하나 하나의 수석으로 구현돼 있다.
특히 동양적 수석의 추상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괴석의 상징성과 그 격, 그 정신적 의미는 놀랄만 하다. 추상으로 분류되는 현대감각적인 수석의 조형에는 사실, 사경적인, 산수석, 경석에서는 찾을 수 없는 깊고 다양한 경이적인 주제 의미를 만끽할 수 있다.
침묵과 고독, 겸허와 오만, 지혜와 완매, 소박과 세련, 순교와 기구, 묵시와 표상, 정적과 역동, 온유와 평화, 시련과 희생, 지조와 자존, 사색과 무념무상, 순수와 순결, 은인과 결단, 승리와 패배, 체념과 무위, 순응과 관조, 뉘우침과 고집, 절망과 환희, 분노와 연민, 허무와 긍정, 철학과 감각, 그리고 사랑과 미움, 적멸과 유희, 죽음과 부활을 하게 그리고 또 모든 존재, 인간과 세계와 우주 시대와 인류의 역사의 과거와 장래를 지켜보는 초월적 풍모와 그 정기를 볼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덕목과 관념의 가장 개성적이고 성격적인 개개의 수석 의미 표상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가장 정신적이고 가장 비정신적인 무엇을 내심 깊은 속의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느끼게 한다.
자연이 어떤 의지자에 의해서 초월적인 존재, 전능한 주체의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때 그리고 그러한 뜻, 자연의 법칙을 통해서 그 덩어리가 생성되고 깨뜨려지고 닳고 묻히고 노출되고 떠내려가고 씻기우고 하면서 형성된 이 한개 한개 수석의 형태와 그 내용적인 상징미는 어쩌면 이렇게 정교하고 완벽한 것인가.
바로 신 자신이 그렇게 예술로서 갈고 닦고 빚고 달구고 해서 가만히 어떤 강가 모래 속에 숨겨두신 것같이도 여겨진다.
한 개 강가에 혹은 그 맑은 강물 속에 씻기며 있는 돌이 어째서 이렇게 아름답고 그리고 많은 뜻을 간직하고 있는가.
수석이 자연 특히 산의 한 응결 체 이면서도 물 속에 수만 수십만 수천만년 젖어서 씻기 우며 그 형태와 색채와 질이 형성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앞 부분에서 말한 대로 한 개의 수석은 바로 한 자연이며 특히 그 가장 정수적인 의미를 가진 응결체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산의 뼈이자 물의 뼈, 산수가 그 정기로서 응결된, 바로 자연미의 한 전형이며 상징이며 그 실체라고 생각할 때 인간의 창조물인 예술미에 대응하는 가장 대표적인 자연미라고 단정할 수 있다.
필자는 자연미는 자연 자체의 미, 소박하고 객체적인 존재이고, 예술은 인간이 그 자연을 소재로 하거나 주제로 모방해서 또 하나의 미의 세계 또 하나의 상상을 통해 창조한 세계라고 위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말하는 수석의 그 정교하고 경탄할 만한 미는 어떻게 의미 지워지는가. 다시 말하면 수석의 미가 자연의 미이면서 어떻게 인공적인 예술미를 압도하거나 능가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결국 수석미의 성격, 그 본질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의미를 지워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수석미, 한 개의 절묘한 추상석을 앞에 놓고 말할 때 그 소재가 물론 자연일 뿐만 아니라 그 형성 또한 물론 자연에 의한 것이다.
그 작품적 성과 즉 심미적 수준과 그 가치는 어떠한가. 물론 인간의 예술미를 압도하거나 훨씬 능가한다. 그러니까 한 개 이 자연미인 수석미는 바로 인공미인 예술미와 다를 바 없고 보다 더 계시적이며 특히 인간이 예술 자체에 대한 선도적 계시적 전위적인 가치와 성격을 지닌다. 이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바로 수석미가 지니는 성격, 자연미와 예술미의 한 조화와 통일을 여기에서 보는 것이다. 자연미와 예술미를, 그 양자를 어떤 초자연적인 흐름, 그 의지 그 조화력에서 보면서 바로 자연이 인간의 계시이며 동시에 자연 자체가 어떤 미의 의지 그 초점적인 양식을 가진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수석을 하는 사람, 즉 이 사이에서 인간이 하는 역할, 수석인이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인가. 수석을 채집하는 사람은 그 수석의 미의 창조에 실직적으로 참여할 수가 없다.
자연이 그렇게 만드는 것, 어떤 초월적인 의지가 그렇게 조화의 묘를 미적으로 발휘하는 데에 우리 인간, 수석을 하나하나 주으러 다니는 수석인은 전혀 그 구상과 작업에는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미를 선택하는 것이다. 많은 잡석, 무가치한 형태와 질의 돌을 제쳐놓고 찾고 또 찾아서 바로 그 자연미의 극치, 인간의 예술미를 능가하는 절묘 불가사의한 그 심미적인 수석, 유일 특수한 개성미의 수석을 가려내는 것이다.
여기서 작용하는 것이 바로 그 수석인의 미의식 그 안목임을 두말할 것도 없다. 대자연의 예술품, 우리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예술성을, 그리고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의미와 형상, 아름다움으로 응결된 한 실체를 찾아 만날 때 우리의 행위와 작업은 그 빛과 무상의 희열과 법열을 맛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미를 창조하기보다는 선택 발견하는 것이며, 이 발견에는 꾸준한 정진과 공부, 예술 일반에 대한 조예와 경험을 필요로 한다. 거기에는 노력과 끈기, 인내와 열성, 신념과 개척 정신이 필요하다.
한 개의 명석, 훌륭한 돌을 찾아내어 만나는 데는 많은 우연과 인연, 끝없는 정진, 어떤 깊고 예민한 심미적 예술적 안목과 비평의식이 긴요하다.
돌이 지닌 속성과 그 형성된 미적 가치에 대해서 돌이 지니는 어떤 깊고 교훈적 덕목과 그 상징적 의미를 아주 겸허하게 전체 대자연과 그 주재자에게 표하는 경건한 마음가짐, 맑고 순수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수석의 채집, 수석의 세계에 대한 겸허하면서도 적극적인 참여는 바로 우리의 인생과 생활의 정신적바탕, 어떤 우주적인 미와 자연의 미, 그 의지와 계시의 중심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나와 자연, 나와 미, 나와 신과의 조형적 실재적 심미적 연결과 만남과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선택된 길이요 기회이며 그렇게 주어진 은혜인 것이다. (수석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