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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멸론자가 본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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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불교 논문 및 기타 자료 법보신문)경허의 주색(酒色)과 삼수갑산 재고
걸식 추천 0 조회 63 12.10.04 19:24 댓글 1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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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10.04 21:29

    첫댓글 윗글

    [경허의 고독과 슬픔은 무엇일까?

    그의 고독과 슬픔은 늙음, 무상, 허무, 그리고 지음자가 없는 데서 오는 고독이다.

    선승의 시로서 이렇게 가식이 없는 시도 드물다.

    이 밖에도 술, 허무, 고독, 늙음, 무상 등에 대하여 읊은 시는 매우 많다.

    붓다도 『법구경』, 『숫타니파타』 등에서 무상에 대하여 읊고 있는 시구가 매우 많다.

    그런데 그 차이점은 붓다의 무상시는 시종일관 ‘모든 존재는 무상한 것이라고 파악하여

    그것을 쫓지 말라’는데 비하여,

    경허의 무상시는 깊은 허무와 거듭된 탄식에 머무르고 있다. ]

    사성제법에 무지하면 딱 요꼴로 뽕당~

    허무단멸론자의 종자가 뭐 어디 따로있나

  • 12.10.04 21:37

    윗글- 경허의 계송 중에서

    [봄 산에 꽃이 활짝 피고 새가 노래하며, 가을밤에 달이 밝고 바람은 맑기만 하네.

    정녕 이런 때에 무생(無生)의 일곡가(一曲歌)를 얼마나 불렀던가?

    일곡가(一曲歌)를 아는 사람이 없구나. 시절인가(말세)? 나의 운명인가? 또한 어찌하랴?

    어떤 이가 ‘소가 되어도 코뚜레를 꿸 구멍이 없다’고 하는 말에서 나의 본심을 깨닫고 보니

    이름도 공(空)하고 형상도 공하여, 공적(空寂)한 곳에 항상 밝은 빛이여.

    이로부터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으니,

    눈앞에 외로운 빛은 寂光土요. 머리 뒤 신묘한 모양은 金剛界네. ……

  • 12.10.04 21:40



    어리석은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내가 헛된 말을 한다고 하여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만일 귓구멍이 뚫린 나그네가 있어 분명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곧 安心立命處를 얻을 것이다. ……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한 번 사람 몸 잃으면 만겁토록 다시 만나기 어렵나니,

    하물며 허망한 목숨 아침에 붙어 있다고 한들 어찌 저녁을 기약할 수 있으리오. ……

    저 사람도 같고 이 사람도 같네,

    어찌 나에게 와서 무생(無生, 불생불멸의 진리)의 법을 배워

    인천(人天)의 대장부가 되려고 하지 않는가?

  • 12.10.04 21:42



    이 때문에 내가 거듭 입이 아프도록 부탁하는 것은,

    내 일찍이 방랑자가 되어보았기에 나 역시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오.

    아~아, 그만 둘진저(嗚呼. 已矣夫)!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

    사방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

    사방 둘러봐도 사람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四顧無人, 衣鉢誰傳).

    홀연히 코뚜레 꿸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세계가 내 집(진여)이네.

    6월 연암산 아랫길에서

    야인(野人, 경허)이 무사태평가를 부르네.”

  • 12.10.04 21:44



    요렇게 개구라치면 아무도 모를줄 알았지~~~

    헛 바람만 잔뜩 들어가지고는....ㅉㅉㅉ

    그러니 잡소리만 주절주절

    이것이 바로 한국선불교의 현주소입니다.

  • 12.10.04 21:49

    윗글- 윤창화씨 글

    [ 그의 탄식은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법을 전해 줄 사람이 없음에서 오는 탄식이다.

    선승으로서 이런 장탄식도 드물다.

    그것은 곧 한말의 황량한 선불교에 대한 탄식이고 개인적으로는 지음자가 없는 데 대한 탄식이다.

    또 경허는 “아무리 무생(無生)의 일곡가(一曲歌)를 불러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시절이 말세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운명이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 12.10.04 21:50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내가 헛된 말을 한다고 하여 믿지 않고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자신이 깨달은 것, 즉 무생의 진리에 대하여 말해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 데 대하여 깊게 한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이의부(已矣夫)’는 ‘아, 이젠 다 틀렸다’, ‘어쩔 도리가 없다’, 혹은 ‘끝났구나’라는 의미로,

    주로 절망적인 상황을 나타낼 때 쓰이는 한탄사(恨歎辭)이다.

  • 12.10.04 21:57


    윤창화씨는 그러면서 공자와 이렇게 비교하고있다.

    [춘추시대에 공자는 당시 도덕이 상실되어 가고 있는 데 대하여 “틀렸구나.

    나는 도덕을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듯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已矣乎. 吾未見好德, 如好色者也)”라고 했는데,

    시대와 상황, 주제는 달라도 ‘이의부(已矣夫)’가 주는 탄식의 강도는 같다고 할 수 있다. ]

    ㅋㅋㅋ 주제가 다르다고???

    공자는 도덕적 삶을 여색을 좋아하듯이 했다고 하는데,

    경허는 수행자의 삶(팔정도의 행)을 여색으로 바꿔먹어 버리고,

    신세한탄과 시절 탓만 하고 있는 것이 뭐가 같다는 것인지???

    허기사 주제는 다르긴 하네~

    법을 바꿔 먹은걸로는~

  • 12.10.04 22:01

    윗글-

    [선승들이 깨달은 후 남긴 오도송은 많지만,

    이와 같이 고구정녕한 오도송은 없을 것이다.

    이 오도가에는 한말 선불교의 황폐한 상황이 단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경허는 불타의 혜명(慧命), 선의 전등(傳燈)이 꺼져가고 있음에 대하여 깊이 탄식, 우려하고 있다.

    그 밖에도 화엄사 상원암에 선실을 복원하면서 지은 글과 범어사 금강암 칠성각 창건기에도

    부처님의 혜명이 전해지지 않음에 대하여 탄식을 하고 있는데,

    이를 본다면 그의 탄식은 ‘우선(憂禪)’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정녕 어서 많이 들어본 소리네~~

    그런데 왜? 난 코꾸녕으로 읽혀지는지..

    알아서들 생각해 보세요~

  • 12.10.04 22:08

    윗글- 결론

    [3.경허의 삼수갑산행은 그 돌연성 때문에 신비화, 미화하고 있다.

    이는 아마 고승의 행적을 미화하려는 후대의 영향이 클 것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자세히 보면 그의 삼수갑산행은 염세(厭世), 은둔 등 다분히 도피적 성격이 짙다는 점이다.

    이는 경허가 남긴 시문 즉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는 도중에 읊다(自梵魚寺 向海印寺 道中口號)’에서

    “아는 것은 얕은데 이름만 높고/세상은 위태롭고 어지럽구나....

  • 12.10.04 22:09

    ...즉 자신에 대한 훼찬(毁讚) 등 시비(是非)를 피하여

    상면인(相面人)이 없는 곳으로 영영 종적을 감추고자 한 것인데,

    이것은 그가 은둔 지역을 남한이 아닌 서북단(西北(端)의 오지인 갑산을 택했고,

    이름을 박난주로 바꾸었고 유생 차림으로 입적한 점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또 그의 삼수갑산행 속에는 평소 그가 깊은 허무, 고독, 늙음, 무상 등에

    젖어 있었던 점도 요인이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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