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화산-. 생각만 해도 유황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 깊은 지구의 속으로부터 끓어올라 외치며 철철철 피흘리는 모습은 나는 살아 있노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뜨거운 속에 머리를 담그어 지구의 깊디깊은 본질을 이야기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상은 상상입니다.
화산의 나라 인도네시아에 와서 활화산은 빼놓을 수 없는 코스일 것입니다. 그래서 발리의 아궁산을 가보기로 했는데 동기형이 아궁산은 사화산이니 멜라피화산을 구경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말에 아궁산이 사화산이었나? 내 기억으로는 활화산이었는데...... 이 아둔한 머리가 책 읽은지 한 1년 되니 내용을 제멋대로 각색했나 보았습니다. 화산은 화산인데 무슨 화산이었는가는 막연하고 3,000미터가 넘는 분화구 뚫린 산의 이미지만 기억했나 봅니다. 만일 동기형이 책을 읽지 않았고 내 이미지만 갖고 일정을 실행했더라면 우리는 사화산만 보고 올뻔했습니다. 사화산은 제주도만 가면 될 것을요. 이렇듯 준비가 매우 엉성한 여행이었습니다. 죽은 아궁산이 내 기억에 살아 있었으니까요.
보로부두르를 뒤로 하고 멜라피 화산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사원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숲에 가려 사원은 보이지 않았지만 감격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문득 아쉬웠습니다. 이곳 인도네시아에서 벌써 나흘째이고 그간 여러 곳을 떠나왔는데 유독 보로부두르는 아쉽다고 여겨졌습니다. 좀더 시간을 갖고 몇 번이고 더 사원에 올라본다면 뭔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아쉬움이었습니다. 마침표도 못 찍은 채 다음 여정을 떠나는 것이랄까요?
멜라피 화산으로 가는 산길은 좀 밋밋했습니다. 산은 산이되 숲이 없는 산이었습니다. 잡초가 우거져 있었으며 곳곳에 아직 풀도 덮이지 않은 땅이 보였습니다. 군데군데에 비었거나 허물어져 가는 집이 눈에 띄었습니다. 더러는 새로 건물을 짓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더러는 떠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왠지 활기차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 더운 날씨도 아니었는데요. 그러고보니 이 나라 사람들에게서 '활기차다, 활력있어 보인다'는 느낌은 약했던 것 같습니다. 오토바이가 그리 많아도 '씽씽' 달리는 오토바이가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팍팍' 걷는 사람도 없고요, 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못 보았습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을 더 올라가니 입장료를 받는 곳이 나타났습니다. 보로부두르 사원 입장료를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납니다만, 하, 글쎄 지금 생각하니 이상합니다. 화산 입장료가 4인에 27만 루피아 보로부두르 사원의 딱 절반입니다. 보로부두르 사원은 수없이 많은 공력을 들여 세운 인류의 문화유산입니다. 입장료가 54만 루피아라고 했을 때는 비싸다고 망설이고 내국인과 차별한다고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그냥 저절로 터진 화산을 구경하러 들어가는데에 27만 루피아를 내라고 했을 때는 막 꺼내 주어버렸거든요. 왜 그랬을까? 가치로 볼 때 보로부두르가 배 이상 아니된다고 할 수는 없을 텐데요. 까닭은 아마도 이런 것 같습니다. 보로부두르 입장료는 생각지도 못 하게 비싼 것인 반면 멜라피 화산은 이미 비싼 걸 경험한 후라서 대수롭지 않았나 봅니다. 그리고 보로부두르는 내국인과 차별한다는 것에 분개하게 됐고 멜라피 화산은 내국인과 차별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니까 그냥 넘어간 것 같습니다. 입장료가 생각보다 비쌀 줄 몰라서 화가 났고, 내국인과 차별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화가 났고, 그런지저런지 몰라서 화나지 않았습니다. 에구, 뭔 말인지 모르겠네 그랴. 헤헤헤헤.
비염에 걸린 나는 오랜 전에 후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아주 진한 냄새를 코끝 가까이 갖다 대어야 약하게 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입장료를 내고 점점 화산에 가까워지자 매케한 유황냄새가 나는 듯 했습니다. 워낙 독한 냄새라서 맡을 수 있는가 싶었습니다. 옆에 앉은 현규형에게 유황냄새가 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어. 조금 나는 것도 같다, 야."
냄새가 난다는 것인지 안 난다는 것인지, 참! 냄새 잘 맡는 현규형이 저 정도라면 내가 맡은 냄새는 상상임신이겠죠?
어쨌든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본능적으로 가장 높은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산의 봉우리는 구름에 가려 있었습니다. 희고 가벼운 구름이 아니라 어둡고 무거운 구름이었습니다. 마침 약간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비가 올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딛고 선 땅도, 관광객을 맞는 건물이 선 땅도, 동쪽으로 난 넓은 황무지도 모두 잿빛 화산재로 덮여 거무데데하였습니다. 잿빛이 죽음의 색깔임을 확인시켜 주는 듯 했습니다. 20여 년 전에 가본 태백시의 인상이 '검다'였지만 죽음 따위는 아니었는데.
그러나 지금 가슴은 흥분되기 시작했습니다. 화산이 어디여? 어디가 화산이여? 그 곳 현지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볼케이노 훼어, 볼케이노? 지금 막 보러 가지 않으면 활화산이 꺼지기라도 한다는 걸까요? 그보다는 내 흥분의 화산이 활활 타고 있을 뿐이겠지요. 한 현지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대뜸 당신 오토바이를 빌려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그러면 당신 뒤에 타고 가면 되느냐고 또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왠 미친 놈여!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도 관광을 온 현지인이었습니다. 핫~!
누군가 지프를 타고 가야 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지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매니저인 듯한 젊은 친구가 오더군요. 너실너실 웃어보이는 폼이 이골이 난 프로페셔날이었습니다. 값을 물으니 30만 루피아라고 이죽거렸습니다. 학~! 내가 부르는대로 주겠습니까? (입장료 빼고......) 그 치에게 조금 깎아달라고 했습니다. 안 된답니다. 몇 번 더 깎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계속 안 된다고 하더군요. 안 돼? 안 돼? 그럼 나도 안 타!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고 돌아섰습니다. 나를 보는 일행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습니다. 단호하게 말하고 돌아서기는 했지만 사실 내 꼬리는 샅에 사려 있었습니다. 나는 더 불안했습니다. 머난먼 길, 비싼 경비, 잔뜩 부푼 기대를 안고 여기까지 왔는데, 만일 저 녀석이 돈을 안 깎아줘서 볼케이노를 못 보게 되면 어쩌지? 여기서 먹구름만 보고 한국에 돌아가면 뭘 봤다고 말하지? 순식간에 먹구름이 뒤덮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내가 꼬리를 사린 줄은 모를거야, 저 녀석!'
이렇게 생각하고 일행에게 나지막히 말했습니다.
"쇼를 좀 해야 깎아줘요."
말할 때도 혹시 저 치가 알아챌까봐 조신했습니다. 그러고나서 운전기사에게 돌아가자고 큰소리로 허풍을 쳤습니다. 그때 정말 불안했습니다. 불길한 먹구름이 내 허파에다 뻑뻑 담뱃재를 떨구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상황을 막장으로 몰고 왔는데 저 치가 '팽'하고 콧웃음을 치면 우리는 몰락하니까요. 저 치가 끝내 요금을 안 깎아 주면 그땐 내가 꼬리를 잘라 바쳐서라도 지프 대여해달라고 애원해야 하는데 아으~ 그 치욕을 어찌 삼킬 수가 있겠습니까! 아, 막장 말고는 협상의 기술이 이렇게 빈약하다니......!
잠시 냉각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에도 운전기사가 정말로 자동차에 시동을 걸면 큰일이기에 조마조마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씨 착한 프리스카가 KLATAN에서 나를 위해 기도했을까요? 매니저가 다가오더니 얼마를 깎아주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까 이죽거리던 입모양이 이젠 천사의 미소로 보였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하지만 점점 냉동되어 가던 내 마음을 들키지 않게 처신(show)해야 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쪽에서도 승락해줄 만한 금액을 불러야 한다는 계산도 했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너무 야박한 넘들이 아니란 걸 보여주어야 할 필요성도 있었습니다.
"투 헌드레드 피프티 다우전드 루피아."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써 보이며 말했습니다. 그 매니저님 고개를 한두 번 갸우뚱 하더니 '오케이'라며 승락했습니다. 휴~! 매니저의 오케이라는 말 한 마디에 냉동실에 넣어뒀던 꼬랑지가 단박에 녹아 흐물거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어쨌든 고!입니다.
출발 동영상
가는 도중 가게
놀러온 현지인 오토바이
용암이 쓸고 간 자리
요란함 굉음, 덜컹거리는 차체, 좁고 굴곡진 길과 불어오는 바람 속에 실려오는 아련한 탄 내음- 모든 것이 화산폭발로 생긴 불모지에 딱 어울리는 컨셉이었습니다.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배낭을 맨 중년의 네 남자 뿐이었습니다. 정말로 어울리지 않게시리 탐험을 하는 듯한 기분에 모두가 들떠 있었습니다. 큭큭큭-.
군데군데 조림지역이 보였습니다. 여기와서 묘목 장사를 하면 돈 벌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참 순진하죠?
오토바이를 타고 온 현지인들이 최북단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태운 지프 기사는 최북단까지 가지 않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현규형이 발끈했습니다. 스물 초반쯤 되어보이는 그 지프 기사에게,
"야, 저기(현지인 오토바이가 있는 북단)까지 가보자."
고 말했습니다. 순진한 기사는 알아들을 턱이 없지요. 생글거리며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답답한 나머지 현규형이 차를 세웠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지프 기사는 여전히 웃고 있었습니다. 현규형이 지프 기사에게 말했습니다.
"야, 니가 우리 눈탱이 치냐?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면 어쩌자는 것이여? 저기 끝까지 가게!"
눈탱이 치냐? 퍼포먼스 사진입니다.
그 말 알아 들어 북단까지 갔습니다.
멜라피 화산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이나 연기조차도 볼 수 없었습니다. 저 먼 산이겠거니 생각하며 혹시라도 구름이 걷히기를 기대해 보았습니다. 마침 바람이 불고 있으니 구름을 걷어내면 지구가 더운 숨을 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별 쇼를 다 해가며 왔건만 끝내 활화산을 보지는 못 했습니다.(활화산을 볼 수 없는 일기에는 입장료를 깎아 주던가 아니면 적어도 입장 전에 고지를 해주던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활화산은 지구가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살아 있는 지구에 나는 조그맣게 살아가고 있는 인간인가 합니다.(끝)
*아, 정말 죄송합니다. 내용 중에 착오가 발견되었습니다. 화산 입장료는 11,000루피아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다녀온지 꽤 오래 되어 핸드폰에 메모해 놓은 것을 열어보며 글을 쓰고 있는데요, 그 메모를 잘못 보았습니다. 27만 루피아라는 것은 지프 랜트비용 25만에 지프기사 팁 2만을 합한 것인데 이를 잘못 보고 글을 썼군요. 죄송합니다. 보고 써도 제대로 못하는......
첫댓글 글올리시느라 고단하시겠어요...
늦은 시간인데 카페회원님들을위해 글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 에피소드와 무한한 상상력속에서 약간은 부족한 준비가 오히려 즐거움이돼는것 같아요...
저는 반둥에 여러번가서 유황물에 삶은 계란 먹고 놀다오곤 했어요...
예전엔 그렇게 멀리갈 생각을 왜못했는지 아쉬워요...
제가못본것 님덕에 편안히 호강스럽게 감상했어요...ㄳ
아이고, 네 창피함을 덮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에 갔을땐 용암이 분출되는 모습은 아니었어도 유황 가스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봤걸랑여!!! 인니에선 멀리서나마 분출하는 용암을 볼 수 있을거라 기대했었는데 유황 냄새로 배채우고ㅎㅎㅎ 용암에 쓸려 폐허가 되어버린 인간의 손길이 미쳤던 흔적과 바로 옆 등성이의 태연한 수목들에 신비함을 느낀걸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아쉬웠겠군요. 그래도 다행이예요. 유황냄새라도 맡았으니까요. 저는 유황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거든요. 헤헤헤
족자는 골목까지 기억을 해도..머라삐 산엔 못 가봤어요..제가 사는 부근에 있어 그랬는지 좀 관심 밖이었어요..마르오보로 숙소에서 일부러 새벽에 일어나 여명전에 무섭게 뿜어져 나오던 연기 구름를 보녀 무섬증이..말랑 집에서도 새벽에 스메르 산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를 자주 봤습니다..브로모 산은 바로 구덩이 앞에 앉아 별 상상을 다 해보고..인니 살면 친해 지는 것 같아요..자연이 무섭기도 하고 익숙해 지기도 하구요..눈 빠지는 애독자가 생겨 열심히 쓰시느라 고생하십니다..ㅎㅎ
할화산을 보았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못 보았어도 즐거웠습니다. 샹그릴라호텔에서 그랬던 것처럼 목적달성은 못 해도 그 과정, 상황이 무지 재미있어서 좋았습니다.
여명에 보는 활화산은 또 어떤 맛일까? 아, 구미가 당기는군요.
저는 반둥에 있는 Kawah putih라는 화산에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산 정상에 유황물이 고여 있으며 연기가 모락 모락 나오지요.
유황 냄새가 너무 심해서 산에 마스크를 판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개당 5천루피를 주고 산 것 같네요.
저는 랜트를 해서 정상까지 갔었습니다.
머리피화산도 궁금했는데, 생각 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군요.
반둥의 Tangkuban perauh에서 계란 삶아 먹는 것 같은 후기를 기해 했었는데...^^
내용이 재미 있습니다. 잘 읽었고 감사드립니다.
하이고, 잘 하셨습니다. 만약 그때 반둥에서, 냄새가 역겹다거나 하는 이유로 화산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않았다면 후회하셨겠죠? 정말 잘 하셨습니다.
메라피에 계란장수도 없고, 계란도없었습니다. 농가가 키우는 닭은 있었습니다만......헤헤헤헤
오늘도 감사히 읽었습니다. 반둥에 있는 화산에 올라갔을 때가 기억이 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