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장. 팔황마교주.
아니나 다를까,
석검평의 놀란 외침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일행의 전면에는 일순 뭔가
알수 없는 어둡고 음울하며 안개같은 기운이 내리 깔리면서 그 가운데 일단의
사람들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으으으으......
다섯 사람,
그들이 출현하는 광경은 어찌나 음산하고 괴이쩍은지 마치 땅속에서 유령들이
한꺼번에 흐느적거리며 솟아나오는 것만 같았다.
장내의 중인들은 일제히 신형을 멈춰세우고 경악하여 그것을 바라보았다.
두명의 노인.
그들의 용모는 그 출현방법 만큼이나 음산하고 괴이했다.
하나는 마치 머리를 통째로 끓는 물에 집어넣었다 꺼낸 사람처럼 심하게 일그
러져 안면의 형상을 분간 할 수 없는 독두노인이요,다른 하나는 머리는 백발
인데 안명은 흡사 중년부인의 그것처럼 아름답고 요염하여 사이한 기운을 풍
기는 백발노파였다.
허나 그들 두 사람의 용모가 비록 괴이하기는 해도 다음 두 사람의 얼굴보다
음산하지는 않았다.
두명의 사내.
두 노인의 뒤쪽에 서있는 두 명의 사내중 하나는 얼굴색이 솔밑처럼 검고 다
른 하나는 백지장처럼 창백하여 극한 대조를 이루었는데,그들의 두 눈마저 은
은한 붉은 기운이 어려있어서 마치 전설에 나오는 두명의 저승사자,흑무상과
백무상을 연상시켰다.
그 두 사람은 지금 하나의 검은 색깔의 교자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그 교자위
에는 지금 한명의 중년인이 올라타고 있었다.
그 중년인의 용모는 다른 네명의 일행에 비해 그다지 특이하지 않고 평범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준수했다.
사람들은 그 중년인이 바로 이들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 다섯 사람은 한결같이 전신에 먹물같은 칙칙한 흑의를 걸치고 검은 안개속
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마치 지옥에서 금방 튀어나온 사람들 같기도 했다.
이윽고 안개가 완전히 사라지자,교자위에 올라탄 흑의 중년인은 장내를 둘러
보다가 위지성검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음산한 어조로 물었다.
[그대가 비급을 취한 장본인인가?]
위지성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당신은 바로 팔황마교의 교주겠군?]
그 말에 흑의중년인은 일시 크게 흠칫하여 위지성검을 주시하며 말했다.
[설마 했더니......녹혈맹주나 와룡회주가 비급을 얻을 줄 알았는데,이런 애숭이
가 차지했다니 혹시 그 두사람은 낮잠이라도 잤단 말인가?]
말하며 흑의복면녀를 돌아보자,흑의복면녀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싸늘한 시선
으로 흑의중년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대신,위지성검은 품속에서 그 양피지 책자를 꺼내들고 보이며 입을 열었다.
[당신도 이 책자를 바라고 온것이오?]
흑의중년인은 곤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위지성검의 말을 듣고 문득
두 눈에 음울하고 기이한 광망을 뿌렸다.
동시에 위지성검의 손에 들려있는 양피지 책자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어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미 그 책자의 내용을 봤다면 너는 믿겠느냐?]
이게 무슨 소린가?
느닷없이 터져나온 엉뚱한 흑의중년인의 말에 장내의 중인들은 일시 둔기로
뒤통수를 강타당하는 듯한 거대한 충격을 느꼈다.
그런데 생각하기로 더욱 놀랐어야할 당사자인 위지성검이 놀랍게도 의당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물론이오.]
그 어조는 너무도 태연하여 일시 상대인 흑의중년인마저 의구심을 일게 만들
었는지,
흑의중년인은 오히려 깜짝 놀라는 듯 하며 다시 물었다.
[뭣이,너는 이미 그 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단 말이냐?]
위지성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허나,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으니 당신이 직접 이 일에 관해서
해명을 해주는 것이 어떻겠소?]
일순 흑의중년인의 두 눈에서 흡사 지옥의 안개같은 검은 기운이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더니 애초에 그들이 나타났을 때와 같이 사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동시에 주위를 얼려버릴 것 같은 으시시한 음성이 흑의중년인의 입속에서 터
져나왔다.
[과연,어째서 비급을 얻었는가 했더니 한가닥 하는 놈이었군.크하핫,기와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말해준다고 해도 상관은 없겠지.]
......
장내의 분위기는 씻은 듯이 조용해졌다.
이제는 팔황마교주의 출현으로 인한 공포보다는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한 곤혹
감과 의구심이 더욱 강렬해진 상황이었다.
흑의중년인은 장내의 중인들을 오만하게 한차례 둘러본 후,위지성검을 향해
물었다.
[너는 중원마성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위지성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소.중원마성은 과거 대운광명각이 생겨나기 이전에 강호에 악명
을 떨쳤던 마도의 세력이 아니오?듣기로는 그 마도세력이 정파인들에게 멸망
할 당시,교주의 손자인 갓난아이 하나가 실종 되었다고 하더군.]
흑의중년인은 이빨을 깨물며 소리쳤다
[그 갓난아이가 바로 나였다.저들은 바로 당신에 나를 구해주었던 사대호법이
었고.....]
흑의중년인이 앞에 서 있는 두명의 노인들을 가리키자,위지성검은 고개를 끄
덕이며 대꾸했다.
[사대신마를 말하는 것이로군.]
흑의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사대호법은 마사요귀 네분이었는데,요 며칠 사이에 신사와 신귀가 죽
었다.혹시 너희들의 소행이 아니냐?]
위지성검은 태연히 대꾸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길을 갔을 뿐이오.헌데,당신은 그 중원마성을 재건할 생각이
오?]
흑의중년인은 눈빛을 괴이하게 번뜩이더니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어쨌든 나는 그간 은밀하게 숨어서 나의 세력을
쌓았고 이렇게 팔황마교를 개파했다.내가 이렇게 너희들을 함정으로 유인하여
모두 제거하려는 것은,본 팔황마교의 무림제패의 수단인 것이다.]
위지성검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헌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어째서 이 비급상의 무예를 연성하지 않았
느냐고 하는 것이오.설마 흥미가 없었단 말이오?]
흑의중년인은 일순 흠칫하더니 대답했다.
[물론 그렇다.본좌에게는 이미 그보다 더욱 훌륭한 무예가 있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익힐 필요가 없었다.]
위지성검은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며 다시 물었다.
[이십여년전,대운광명각의 백리룡성이 제거될 때 그의 본거지인 성숙해에서 비
급이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는데,혹시 그 범인은 사대신마이고 그것을 익힌 것
은 바로 당신이 아니오?]
흑의중년인은 크게 흠칫하더니 두 눈에 잔악한 광망을 내뿜었다.
[흐흐,애송이가 제법 너무도 많은 것을 알고 있군.그렇다.본좌의 무공은 과거
백리룡성의 것이다.이것을 아는한 네놈들은 이제 한놈도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소리치며 살기를 내뿜자,그 가공할 여파로 중인들중 비교적 내력이 약한 사람
들은 심한 내상을 입고 입으로 피를 토하기도 했다.
이것을 보고 위지성검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당신이 기왕 일을 벌일 생각이라면 우선 나와 일대일 비무를 벌여보는 것이
어떻겠소?]
[좋다.네 놈이 비급을 차지한 이상 그에 걸맞는 무예를 지니고 있을테니 내 특
별히 네 놈을 상대해 주겠다.네놈은 나의 무공이 어떤 것인줄 아느냐?]
위지성검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백리룡성의 유아독존팔황공이 아니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흑의중년인은 짧게 소리침과 동시에 훌쩍 교자 위에서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흡사 아무런 무게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처럼 그가 허공을 날아 지면에 내려
서자,위지성검은 석덕승등 일행에게 물러설 것을 손짓으로 지시한 뒤 그의 앞
에 마주섰다.
위지성검이 두 팔을 자연스럽게 아래로 늘어뜨리자,흑의중년인은 지옥의 안개
같은 검은 기운을 전신에서 구름처럼 펼쳐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두 사람의 시선은 중앙의 한 지점에서 마주쳤고,거센 폭풍전야
의 전조처럼 숨막힐듯한 긴장되 적막이 장내에 흐르기 시작했다.
이미 무극도검을 연성한 위지성검과 팔황교주,그 두사람의 대결은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
일행과 함께 급히 십여장이나 뒤로 물러난 석검평은 이 숨막히는 광경을 보고
절로 마음이 불안해져서 옆에 있는 석덕승을 향해 물었다.
[폐하께서 이기실수 있을까요?]
이때,석덕승의 안색은 기이하게도 다소 어둡고 곤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글쎄......]
석검평은 마음이 더욱 불안해져서 다시 물었다.
[글쎄라뇨?잘 모르겠단 말인가요?]
석덕승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난 잘 모르겠다.]
석검평은 그의 안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아미를 깊게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말이 어딨어요?그래도 어느 정도 예상을 할 수가 있을 것이 아니예요?]
그 말에,석덕승은 문득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과거 백리룡성의 무예가 어땠는줄 아느냐?......그의 무예는 당시 불가사의하게
도 상상 속의 경지라는 무검을 초월하고 있었다.그래서 돌아가신 폐하께서는
당시 당신께서 무검을 성취하셨음에도 매우 고전을 면치 못하셨다고 했었다.
만일 그분께서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공검이라는 절대최고의 경지를 깨닫지
못하셨었다면,아마 그때의 승자는 백리룡성이었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
이에 석검평은 안색이 대변하여 새파랗게 변했다.
[그,그렇다면 팔황마교주가 연성했다는 유아독존팔황공이란 바로......?]
석덕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그 유아독존팔황공이 바로 백리룡성이 터득했다는 무검을 초월하는 무
예를 말하는 것이지.팔황마교라는 이름을 보더라도 팔황마교주는 그것을 터득
했음이 분명하다.그렇다면......폐하께선혹시 이번의 비무에서 패배를 하실지도
모른다.]
석검평은 새파란 안색으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왜 폐하께서는 이 비무를 피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석덕승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너도 어느 정도는 알겠지만,사람이란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가 있는 법이다.]
석검평은 잠시 생각을 굴려 보았다.
석덕승의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지금 장내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위지성검 자신이 굳이 싸움을 피하고 몸조
심을 한다고 해도 상대인 팔황마교주가 결코 그를 살려둘 리가 없겠기 때문이
었다.
그만 석검평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석무구와 석선비,석우왕 등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라
보았으나 그들의 안색 역시 무거운 것을 보고 그만 마음이 답답하여 소리를
치고 말았다.
[대체 그렇다고 우리는 여기서 가만히 보고만 있자는 말인가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석덕승이 안색이 변해서 말했다.
[아마 그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자칫 시끄럽게 했다간 폐하께 공연히 어떤 부
담을 주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을 하며 석덕승은 말을 조용히 하라는 듯 아직 비무가 시작되지 않고 있는
장내를 가리키며 매우 조바심 난 표정을 지었다.
석무구를 바라보자,그 역시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주작숙부의 말이 사실이다.상황이 비록 좋지 않으나,우리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석검평은 순간 알수 없는 절망감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도리질을 하며 울음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안되요.전 결코 그냥 있을 수는 없어요.]
말과 더불어,그녀는 곧장 한쪽에 무리를 지어 서 있는 와룡회 인원들을 향해
신형을 날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흑의복면녀를 향해 그 앞에서 다가가서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문주님께서 패하신다면 당신들도 곧 죽게 될텐데 그저 보고 있기만
하긴가요?당신들도 어서 손을 써야할 것 아닌가요?]
와룡회의 몇몇 인원들은 이 말을 듣고 무례하다고 생각되어 안색이 가볍게 변
했으나,흑의복면녀의 뜻을 알수가 없어서 감히 나서지는 못했다.
흑의복면녀.
복면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눈빛은 참으로 기묘했다.
무례한 석검평의 태도에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복잡하고 미묘한 시선으로 석검
평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낭자는 걱정하지 말아요.나도 방금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그 말은 비단 석검평에게 의외였을 뿐만 아니라,와룡회의 인원들에게도 그녀
가 그렇게 선선하게 대해줄 줄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흑의복면녀는 그러한 주위의 곤혹스런 표정은 아랑곳 없이 말을 끝내자마자
장내를 향해 훌쩍 신형을 날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신법은 물론 기오막측한 경지에 도달해 있어서,몸을 움직인 순간 어느
새 그녀는 사대신마의 남은 두명인신마와 신요의 앞에 내려서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아름다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어서 함께 덤비도록 하세요.]
신마 교삼괴와 신요 옥소소는 상대방의 신법으로 보아 그 무공이 추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고는 일순 안색이 대변해져서 몸을 가볍게 움찔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이러한 상황을 미리 예측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흐흐흐,그렇게 바란다면 소원을 들어주지.]
발음이 분명치 않은 괴이하고 음침한 음성으로 신마 교삼괴는 소리침과 동시
에 뒤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교자를 들고 있던 흑무상과 백무상이 돌연 신형을 허공에 떠올리며 품속에서
각각 손바닥만한 피리를 꺼내서 불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삐리릭......삐이익-삑삑......
대체로 피리를 불게 되면 얼마 정도는 감미로운 선율도 섞이기 마련이건만,이
것은 그러한 보편적인 상식과 거리가 멀었다.
그야말로 한줄기의 아름다운 선율도 섞이지 않은,세상에서 가장 듣기싫은 소
리만을 모아서 증폭시키는 듯한 찢어지는 소리였다.
흑의복면녀는 이것을 보고 가볍게 눈빛이 변했다.
그 살인적인 피리소리에 중인들이 더러 피를 토하기 시작한 것도 문제지만,그
것보다도 피리소리가 울려퍼지자 홀연 계곡의 입구를 가로막은 수천개의 관들
이 크게 들썩 거리면서 한꺼번에 무수한 홍영들이 관을 부수도 뛰쳐나오기 시
작했던 것이다.
[혈강시?]
흑의복면녀는 즉각 신마와 신요를 놔두고 흑백무상을 향해 신형을 움직였다.
그들이 혈강시들을 부리고 있는 만큼 우선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라 여
겨졌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녀가 흑백무상의 앞에 이르렀을때,이미 흑백무상은 음산무비한 얼굴에
괴상망측한 득의의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클클클,이미 늦었다.혈강시는 벌써 완전히 발동되어 우리가 없더라도 제 할일
을 다시게 되어 버렸다.]
음성은 분명 한줄기이건만 소리는 흑무상과 백무상의 입에서 동시에 나오고
있어서 어느것이 누구의 음성인지 알수가 없게 했다.
그것은 곧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절묘한 합격술을 연성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허나 흑의복면녀는 지금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흑백무상의 말대로 수천구의 혈강시들은 처음에는 다소 멍청하더니 이제는 정
말로 산 사람처럼 영활하게 움직이며 군웅들을 덮쳐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아앗,가 강시닷......]
[으으아악-]
중인들,특히 절정곡의 대다수 인물들은 생전 처음 대하는 혈강시의 흉악하고
도 공포스러운 모습에 경악하여 우왕좌왕하기에 바빴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한꺼번에 덮쳐가는 혈강시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공지경이
었다.
흑의복면녀는 그런 광경을 힐끗 바라보고는 즉각 흑백무상에게 시선을 돌렸
다.
[이미 늦었다고 할지라도 너희들은 제거해야 하겠다.]
아름다우나 싸늘한 음성이 터지자 흑백무상은 한결같이 안색이 대변했다.
그들은 설마 흑의복면녀가 이런 와중에서도 자신들을 제거하려고 할 줄은 미
처 생각하지 못한듯,대경실색하더니 급급히 신형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급급히라고는 하나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들의 신형은 빠르고 눈부시기
그지 없었다.
그들의 신형이 한순간 환영처럼 사라지는가 싶은 찰나,천지는 홀연 그들의 무
수한 그림자로 가득찼다.
윗쪽은 백무상의 신형이요,아랫쪽은 흑무상의 신형인데 그 두사람의 신형이 수
백수천개의 환영으로 화해서 절묘한 배합과 함께 덮쳐드는 그 공세는 실로 무
시무시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의 사람에게나 통하는 것일뿐 흑의복면녀같은 차원높은 무예를 지
닌 사람에게는 어린 아이의 장난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었다.
번쩍,
한차례 눈부신 황금빛 태양광이 주위를 찬란하게 수놓은 순간,잘만하면 그 마
명을 일세에 떨칠 수가 있었던 흑백무상의 육신은 더 이상 찾을 수가 없게 되
어 버렸다.
[악,]
흔적없이 가루로 화해 허공중에 흩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 생전의 절묘한 합격술을 자랑이라도 하듯 그들의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도
거의 동시에 같은 음성으로 발해졌음이 조금 다를 뿐이었다.
흑의복면녀는 이번에는 다시 신마와 신요의 앞으로 신형을 날려갔다.
이때,
팔황마교주인 흑의중년인은 매우 이상한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원래대로 하자면,그는 재빨리 위지성검을 해치우고 자신의 수하들에게 달려드
는 흑의복면녀마저 해치워서 상황을 원만하게 이끌어 나가야 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알 수 없는 기이한 최면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최면이라니?......
흑의중년인은 자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고 느꼈다.
처음,비무에 들어가기 시작할 때 흑의중년인은 내심 위지성검과 흑의복면녀가
한꺼번에 공격을 해오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빨리 이 기회를 빌어 위
지성검을 제거하고 다음 순서를 전개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무예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발생했다.
마악 공격을 전개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알 수 없는 기이한 두려움이 전신을
휩싸기 시작했던 것이다.
상대인 위지성검은 그저 자연스럽게 두 팔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을 뿐 달리
무예를 펼친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갑자기 자신의 심경에 그러한 변화가 느껴질 수가 있단 말인가?
느닷없이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햇빛을 보았을 때의 불가사의한 두려움
을 지금 느끼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최면이었다.
흑의중년인은 처음에는 그것을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무인은 자고로 자신의 예감을 무시할 수가 없는 법이다.
특히 절정의 무예를 연성한 사람일수록 그 예감이 비교적 정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처구니 없게도 공격을 반쯤 펼치다 만 상황에서 더 이상 공격을 하
지 못하고 지금까지 시간을 끌어왔던 것이다
흑의중년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순간의 치열한 번뇌였고 심마였다.
허나 일단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흑백무상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게되자,그
는 이를 악다물고 갈 등의 종지부를 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심마다.나는 저녀석의 최면술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내심 격렬하게 소리침과 동시에,흑의중년인은 드디어 이빨을 깨물며 자신의
무예인 유아독존팔황공을 위지성검의 면상을 향해 전력으로 전개했다.
번쩍......
단순히 번쩍인다고 해서 어둠을 빛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가공할 악마의 입김이었다.
사방의 빛을 온통 한꺼번에 차단한채 죽음의 사신처럼 극쾌한 속도로 위지성
검의 목을 조여가는 가공할 검은 기운을 보며 흑의중년인은 한순간 자신의 소
심함을 비웃었다.
쓸데없는 기우였다고.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불과 일수유도 지나지 않아 급히 수정되어야 했다.
흑의중년인은 언뜻 위지성검의 입가에 떠오른 한줄기 고요한 미소를 본 것 같
다고 느꼈다.
바로 그 순간 성스러운 황금빛 광휘가 그에게서 느껴졌다.
그 빛깔은 너무도 강렬했다.
동시에 흑의중년인은 자신의 최면이라고 생각했던 그 두려움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이,이럴수가......?)
다음 순간,흑의복면인은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는 자신의 실체를 느껴야 했다.
중인들이 처음으로 경험한 혈강시들의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아니,놀라움을 지나 공포스럽다고 해야 할까?
우선 혈강시들은 그 어떠한 장력에도 손상이 되지 않았다.
그 움직임은 비호같이 빨라 어쩌다가 장력을 격중시켰다고 해도 오히려 장력
을 펼친 자가 장력을 따라 역류하며 파고드는 무서운 시독으로 중독이 되어야
했다.
게다가 도검이 불침하는 몸체였으며,웬만한 보검으로 놈들의 몸을 베었다고
해도 다음 순간이면 금방 아물어 버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신병이기를 가지고 있는 석덕승을 제외하고는 거의 혈강시들을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몇번 공격을 시도해 보다가 신법을 펼쳐 겨우겨우 피하기에만 바쁠뿐......
허나 그것 역시 쉬운 일이랴?
절정곡의 수라마검대의 인원들 중에서 혈강시에게 붙잡혀서 도륙이 되는 사람
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행여 한두번 그들의 공격을 피해낸 사람들일지라도
계곡안을 가득 메운 수천의 혈강시들을 더 이상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을 실감
해야 했다.
정녕,계곡내의 사람들들 모두 죽이겠다고 공언했던 흑의중년인의 말은 호언장
담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헌데 온통 아루라장과 같았던 장내에 일순 한줄기 성스러운 노을빛 황금광이
번쩍 빛났다가 사라지자 실로 거짓말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미친 듯이 움직이던 수천의 혈강시들이 한순간 석상처럼 굳어지면 그대로 먼
지가루로 화해 허공중에 흩어져 버렸던 것이다.
중인들은 마악 눈 앞에서 이러한 현실을 보고도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녕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수가 없었다.
어쨌든 하마터면 강호를 일대 혈풍속으로 몰아 넣었을런지도 모르는 혈강시들
이 한꺼번에 완전하게 제거 되었으니 춤을 추고도 남을 일이었다.
다만 너무도 믿기지 않는 불가사의한 일이라 사람들은 일시 멍하니 넋을 잃고
입을 벌리다가 뒤늦게 시선을 한쪽으로 집중시켰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위지성검.
그는 아까의 그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등을 보인 자세로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상대였던 흑의중년인은 땅바닥에 쓰러진채 혼절한 듯 움직이지 않았
다.
중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일순 너무나도 기쁜 마음에 일제히 탄성을 발하려고
했다.
그때,
또 한차례의 황금빛 광채가 사위를 수놓았다.
번쩍,
그것은 전의 노을빛 광휘와는 달리 무슨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잠시동안 중인들의 함성이 멎게 하기에 족했다.
그 황금빛 광채는 흑의복면녀가 발출한 태양광이었다.
지금 그녀의 면전에는 신마 교삼괴와 신요 옥소소가 석상처럼 서 있었는데,지
나가는 가벼운 미풍속에서 그들의 육신은 점차 가루로 화해 사라지고 있었다.
사대신마의 우두머리인 신마와 신요,
그들의 무예는 비록 극강했으나,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한명의 절세신녀를 만
난 것이 그야말로 불운이었다.
흑의복면녀의 광검에 의해 변변히 손도 써보지 못하고 그간 온갖 악행을 일삼
아 왔던 파란만장한 일생을 허무하게 마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신형이 허공중에 완전히 사라지게 되자,그제서야 중인들 속에서 우렁
찬 기쁨의 함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만세-]
그들은 무엇을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
위지성검이 아까 전에 녹혈맹주를 제압할 때에도 그들은 이렇게 기쁨을 표시
하지는 않았다.
그럼 지금은 그때와는 사태가 많이 달라졌다는 말인가?
어쨌든,절정곡의 수라마검대를 비롯한 모든 중인들의 심경은 이 순간 하나로
합쳐진 것은 분명해졌다.
이제 녹혈맹에 이어 그토록 공포의 대상이었던 팔황마교도 완전히 사라졌고,
앞으로 그들의 목숨을 위협할 존재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절정곡은 이미 사마외도의 집단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었고,유명곡은 녹혈
맹과 함께 사라졌으니 전대무림황제가 돌아간 이후 혼란기에 출현했던 여섯
개의 문파중 네 개의 사마세력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로써 강호의 평화는 되찾아지는 걸일까?
중인들은 환성을 울리며 일제히 시선을 위지성검이 있는 쪽으로 던졌다.
그때였다.
돌연 혼절하여 쓰러진줄 알았던 흑의중년인의 신형이 느릿하게 움직여서 몸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닌가.
환성을 지르던 중인들은 일시 크게 흠칫하여 말소리를 중단했다.
아직 위지성검의 상태를 알수가 없었기 때문에 중인들 가운데에는 혹시나 하
는 불안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중인들의 우려를 불식 시키기라도 하듯 위지성검의 조용한 음성이 느릿
하게 울려나왔다.
[그대는 아직도 야욕을 가지고 있소?]
흑의중년인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위지성검은 느릿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렇다면 목숨은 빼앗지 않을테니 어서 떠나시오.]
흑의중년인은 즉시 희열가득한 웃음을 만면에 어금었다.
[가,감사합니다,대,대협......]
이어,
혹여 위지성검이 마음을 바꿀 것을 염려한 때문인지 말을 마치자마자 흑의중
년인은 계곡밖으로 허겁지겁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분명 흑의중년인의 무공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러나 달려나가는 그의 속도는 마치 신법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처럼 빨랐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목숨이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라는 평범한 이치를 말
해주는 진실된 본보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