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편 4절-5절: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4절: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비유’란 비슷한 것을 들어서 이해를 시키고 알아듣도록 하는 방법이다.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우리 인간이 오묘한 것을 깨닫거나 발견하게 되면 마음이 기쁘고 즐거운 것이 정상적이다.
짐승들의 세계는 영혼도 없고 인격도 없기 때문에 깨닫고자 하는 의욕도 없고, 깨닫는 것 자체도 모르는 것이고, 그런고로 이 면으로 기뻐하는 것도 없다. 다만 배불리 먹고 잠만 잘 자면 된다. 그러면 인간 자기도 그런 존재냐? 예수 믿는 자기는 영혼이 있고, 인격성을 가졌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아가는 존재다. 짐승과는 전혀 다른 존재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실상적인 비유가 있고, 가상적인 비유가 있고, 실행적인 비유가 있다. 성경 전체는 영적인 뜻이 들어있는 특수한 비유다. 천국의 신령한 성격과 성질이 들어있는 특별계시다. 영원 궁극적인 신령천국은 실상세계이고, 이 세상은 영원 궁극적인 실상세계를 깨닫게 해 주는 현상세계다. 이 세상과 세상 것은 영원히 가는 것은 전혀 없고 언젠가는 다 썩고 불타고 세상 마지막 그 날까지 죽었다 살아났다 하며 교체되는 세상이다. 이 세상은 누리는 세상이 아니라 영원 궁극적인 실상세계를 깨닫게 하는 비유의 세상이다.
특수계시인 성경의 비유 속에는 수많은 이치들이 들어있다. 생명에 관한 이치, 성장에 관한 이치, 인격에 관한 이치, 병에 관한 이치, 인인 간에 관한 이치, 사건에 관한 이치, 사물에 관한 이치, 세상살이에 관한 이치, 영적 이치, 육적 이치 등등 헤아릴 수없이 많은 이치가 들어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비유의 세상이다.
이런 물질세상에 인간을 만들어 놓은 것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영적 이치, 육적 이치, 자연이치, 도덕이치를 부지런히 깨닫고 써먹으라는 거다. 깨닫지 못하면 못 써먹는다. 자기가 성경을 깨닫고, 또한 물질이치를 깨닫고 써먹음으로 해서 영능의 실력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만들어진 것만큼 영능의 실력이 커지는 것은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도 활동의 판도가 넓어진다. 영능이 실력이 없으면 전혀 활동을 못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가르칠 수가 없다. 깨달아지면 깨닫는 것만큼 가르치게 되고, 많이 깨달아졌으면 하루 종일 가르칠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가르칠수록 더 깊은 깨달음이 샘물처럼 솟아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세상 사는 이치를 더 밝히 알게 되고, 또한 마음에 기쁨이 넘친다.
예수 믿고 이 세상에 살면서 영적 신령적으로 구원이 이뤄진 것만큼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 나라를 마음 것 누릴 수 있는 것인데, 자기는 수 년 수십 년을 예수 믿고 살면서 영적 이치를 깨달아서 구원의 판도가 얼마나 넓어진 것인지, 아니면 좁아진 것이지를 생각이나 해 보았느냐? 이건 없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던 물질적인 것을 많이 취해서 자기의 판도를 넓혀보려고 할지라도 제 마음대로 되더냐? 세상적인 것으로 자기의 판도를 아무리 넓혀놔도 다른 사람이 다 가져간다. 자기가 쌓아놓은 것을 결국은 다른 사람이 와서 누리게 된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은 삶이냐? 이게 하나님 앞에 선한 거냐? 아니다. 미련한 거다.
자기가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을 닦으며 산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거지가 되고 못 사는 거냐? 그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믿느냐? 예수 믿으면서 특수적 정신과 사상과 목적으로 살면 일반적 생활 면에서도 머리가 되지 꼬리는 안 된다. 부자 되게 해 달라는 소리를 안 해도 영능의 실력을 갖춰봐라. 그러면 많은 것을 정복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이치를 모른 상태에서 세상 것을 아무리 많이 가진다고 해도 다 놓고 갈 것이고, 빼앗기고 갈 것이고, 도둑맞고 갈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 앞에 죄 짓고, 이룰구원은 다 망해버리고, 심판을 받고 자기는 죽는 거다. 이것만이냐? 자기의 이 정신을 이어받은 자자손손은 어떻게 되겠느냐?
그런데 미련한 사람은 항상 천국 같은 환경을 원한다. 그래서 준다고 하면 그 환경을 다스리겠느냐? 아니다. 빼앗기고 쫓겨나게 된다. 원리가 그렇다. 빼앗기고 쫓겨나더라. 에덴동산에서도 그렇고, 이 세상에서도 이런 일을 얼마든지 많이 볼 수 있다. 이 세상은 비유의 세상인데 이런 일을 보면서도 모르겠느냐? 왜 어리석게 살려고 하느냐? 왜 그렇게 어리석으냐? 왜 그렇게 목구멍에 똥만 차 있느냐? 그러면서도 자기는 똑똑하다고 할 거다.
세상을 많이 가진 사람이 그것에 힘을 얻어서 자기는 똑똑하다고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성경으로 통해서 주님의 눈으로 볼 때 그 사람의 속은 팍 썩어버렸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바로 깨닫고, 또한 세상에서 천국에 관한 비유를 많이 깨닫고 가야 할 것이다.
성경은 천국의 뜻이 담긴 천국의 축소판이요, 또한 이 세상에 살면서 신앙실습을 할 수 있는 영적 이치가 담겨있는 세상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은 개인의 활동과 그 삶의 생활, 단체의 활동과 그 단체의 삶의 생활, 이스라엘 국가의 활동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생활, 그리고 이방국가들이 활동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성경 안에는 시와 노래, 말, 음성, 편지, 꿈, 전쟁, 진노, 심판 등등이 있는데 이 모두는 천국에 관한 것을 비유하고 계시하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영원 궁극적인 존영을 위해서 성경 속에 특수비유를 심어놓았고, 또한 이 세상에는 일반비유를 심어놓으셨다. 어찌 이렇게도 빈틈없이 부족 없이 오묘하게 만들어 놓았는지 참으로 신비롭고 놀랍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마음을 쓰면 이 세상에도 오묘한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건데 신령천국에 들어가 보면 얼마나 더 오묘하고 신비스럽겠느냐?
내가 어릴 때 조그마한 라디오에서 재미있는 말이 나오니까 어머니가 그걸 듣고 ‘도대체 저 속에 얼마나 작은 사람이 들어가서 말을 할까?’ 라고 했다. 내가 라디오의 볼륨을 올렸다 내렸다 하니까 ‘그러지 말아라. 그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얼마나 숨이 가프겠느냐?’ 라고 하셨다. 모르면 이런 거다. 영적 신앙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서 물리적 법칙을 발견해서 잘 이용하면 신비스러운 것이 참 많다. 하물며 이보다 더 신비롭고 영원한 효력이 있는 신령한 세계의 오묘한 이치를 한 이치도 못 깨닫고 7, 80년이라는 세월을 그냥 넘겼다면 얼마나 원통하고 분통이 나고 통곡을 할 일이냐?
나이 드신 분들은 과거적으로 ‘아차, 내가 그 때 조금만 어떻게 했으면 돈이 굴러올 것인데 내가 어리석어서 그만 그걸 놓쳐서 평생 동안 이렇게 사는구나’ 이런 건 없느냐? 또는 ‘아, 내가 그 때 순간적으로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이런 건 없느냐? 신앙 면에서도 이치를 깨닫지 못한 채 한 평생 산다면 뭐가 되겠느냐? 밥만 축낸 것밖에 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만든 목적에 대해 생각을 해 봐라. 모른 채 그냥 아침 저녁 세 끼 밥만 먹으면서 남처럼 살다가 죽어질 인생이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고 누려봤자 남는 것은 예수 믿은 거 하나밖에 없다. 믿고 만들어진 그 하나밖에 없다. 학생들이 수 년 수십 년을 학교에 다니면서 남는 게 뭐냐? 배운 지식이다. 그렇게 정다웠던 학교 친구들도 다 떠나가 버린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결국은 세상은 자기 혼자다. 살아있는 동안에 ‘친구야’ 하는 것뿐이지 결국은 세상은 자기 혼자 가는 거다. 그러니 이런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쳐다보며 하나님의 성품을 부지런히 입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사건이 있을 때, 자기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많이 닮아야 한다. 그리고 닮은 것을 또 써먹어서 또 닮고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말씀을 붙잡은 거다. 말씀을 붙잡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다 연결이 되는 거다. 한 이치라도 깨달아서 써먹고 나가면 두 이치, 세 이치가 계속 열린다. 이렇게 살다보면 생활 면에 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가면 갈수록 더 열려지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라.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지혜지식성과 하나님의 도덕성과 하나님의 능력성의 이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생기는 거다. 믿음이 생기면 지혜도 나오고 명철도 나온다. 말씀을 듣지 못하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믿음이 안 생기는 세상을 가지라는 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는 거다.
5절: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죄악이 성도들을 에워싸면 환난의 날이 되는 거다. 즉 환난의 날이 되려면 죄악이 성도들을 에워싸는 거다. 그렇다면 자기 주위에 뭐가 에워싸는지 아느냐? 사람들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잘 안다. 깡패들이 자기 주위를 싹 에워싸는 것을 잘 안다. 믿는 우리는 영적 신앙차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정신적으로 활동을 하면서 자기 주위를 중심하고 에워싸는 것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성경에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것을 보거든 산으로 도망을 가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학교주변에 유흥업소가 자꾸 생겨나면 어찌 될까? 사회적 고통이 오는 것은 빤한 거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그런 유흥업소가 주변에 많은 학교로 보내려고 하겠느냐?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강남 어쩌고’ 하면서 그 쪽으로 이사를 하고 자식을 그곳의 학교에 보내고 했는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걸 ‘잘 했네, 못 했네’ 하기 전에 그게 무슨 뜻인지 신앙적으로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뭘 깨닫게 해 주는 건지 알아야 한다.
죄악이 나를 둘러싼다는 게 무슨 뜻이냐? 일반적으로는 도덕적인 면에서 간사하고 악독한 것들이 자기 주위에 많이 있다는 거다. 자기 이웃에 이런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면 그곳에서 이사를 해야 한다. 거기에 머물러 있다가 악한 자들끼리 싸울 때 벽돌이 날아와서 자기 이마를 때릴 수도 있고 자기 집 창문으로 날아올 수도 있다. 파리가 많은 곳에 살면 어떻게 되겠느냐? 병이 안 생기겠느냐? 모기가 많은 곳에 살면 어떻게 되겠느냐? 병이 안 생기겠느냐?
영적 신앙 면으로 죄악이 둘러쌌다는 것은 자기 주위로 비진리적 육적 세상적으로 가르치는 거짓된 교회가 많다는 거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가르친다고 하는 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게 해 주는 게 아니라, 이치를 깨닫게 해서 참 사람, 지혜로운 사람, 명철한 사람이 되게 해서 성격 성질이 고쳐지면서 반듯한 사람으로 되게 하는 게 아니라 ‘어찌하던 예수 믿어 복 받아라’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교회가 많다는 거다.
요즘 새벽기도를 일천 번제로 드리는 교회가 많다고 하는데, 그 속에는 일반적인 복을 추구하는 거다. 집 주위에 일천 번제를 쌓았다고 하는 교인이 있으면 그렇게 해서 무슨 효험을 봤는지 물어봐라. 일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려서 뭘 얻었느냐? 지혜다. 지혜를 얻어서 뭘 나눴느냐? 재판장이 되어서 옳고 그름을 판단을 잘 했다. 말씀으로 지혜를 얻고 진리이치를 받은 사람은 일천 번제를 쌓지 않아도 사망과 생명을 나눈다. 사망적인 생각과 생명적인 생각을 나눈다. 무엇이 산 거고, 무엇이 죽은 건지 잘 나눈다.
성경에 ‘악한 자, 거짓된 자, 비류들’ 이런 게 있는데, 안 믿는 사람은 말할 필요가 없는 거고 교인들, 교회를 말하는 거다. 그래서 내가 가르칠 때 교회들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서 악하다느니 거짓된 자라느니 라고 말을 하면 듣는 사람 중에는 ‘당신은 왜 맨날 교회를 까느냐?’ 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건 다른 교회를 까는 게 아니라 성경해석이다.
성경에서 종들에게 말씀을 할 때는 목사님들을 향해서 하는 말로 받아드려야 한다. 종이란 크게 말하면 진리복음에 수종드는 사람은 평신도고 목사고 간에 다 종들이다. 그런데 ‘교회의 사자들에게’ 라고 할 때는 주로 목사들에게 하는 말로 받아야 한다. 그런데 거짓된 목사들은 ‘교회의 사자들에게’ 라고 하는 말씀을 자기에게 하는 말로 받지를 않고 교인들을 말로 두들겨 패는 것에 사용을 한다.
성경에 ‘백성들이 죄를 짓더라’ 라고 하면 교회의 인도자 지도자 입장에서 어느 쪽으로 강조가 들어가야 하겠느냐? 인도자 지도자에게 가야 한다. 백성들을 관할하는 지도자 인도자들에게 책망이 들어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그 원인을 어느 쪽으로 생각을 하게 되느냐? 부모 쪽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아버지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다고 하면 강조가 자식 쪽으로 가느냐? 믿는 사람의 경우는 ‘아, 아버지부터가 하나님을 떠났구나’ 이렇게 들어가야 한다. 가정의 어른부터 이렇게 되어 들어가면 그 가정은 기울어진다. 넘어지는 거다. 해체가 되는 거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바람이 나거나 술만 먹고 한다면 그 가정은 해체가 돼버린다. 이러면 자녀들도 밤에 집에 붙어있지 않고 밖으로 돌아다니게 된다. 믿는 사람의 가정이 말씀과 점점 멀어지면 안 믿는 사람과 같아져 버린다. 이러면 그 다음 단계로 그 다음 단계로 자꾸 내려가게 되는 거지 올라오지는 않는다.
세상적으로 가르치는 교회가 자기 주위에 많다. 이런 교회일수록 먹이고 입히고 감싸고 하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까지도 다 좋아한다. 그러나 이건 교회가 아니다. 십자가를 붙였다고 해도 교회가 아니다. 교회간판을 붙였다고 해도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진리는 싫어하고 세상이 좋아하는 말만 하고,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싫어하고 모여서 종교적인 문화행사를 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상이, 이런 가르침이 자기 주위를 둘러싸면, 또 자기가 그 가운데 푹 빠지면 자기는 환난 날이 되는 거다. 네 인생은 이제 끝이다.
세상과 세상 것을 좋아하고 따라가는 교회들이 커지는 것이 교회부흥처럼 여겨지지만 이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본질로 닮아가는 것,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아가는 것, 하나님의 정신을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정신을 닮으면 쓰겠느냐?
교회가 하나님의 본질인 진리신앙이 커지면서 양적으로도 성장이 된다면 바로 된 거다. 그러나 진리성장은 없고, 알지도 못한 채 자꾸 사람숫자만 커지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악성이다. 간사성으로 커지는 거다. 왜 간사성이냐? 다른 사람을 눈으로 보게 해서 자꾸 속이는 거니까.
성도 자기가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듣고 명철한 자가 되었다면 비진리적 세상적 육적 이질적인 자들 가운데 빠져서 소원 목적적으로 그들과 같이 하지를 않는다. 지혜와 명철이 없으면 영의 눈이 멀어서 겉만 보고 악한 자들을 따라가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다. 지혜롭고 명철한 자는 주위에 비진리가 에워싼다고 해도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 이길 수 있으니까. 자기의 신앙 믿음을 질적인 면에서 심사를 하고 잘 살펴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