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에 관한 시모음 13)
흔들리는 갈대 /김미경
은빛 물결 너울너울 춤추는
갈대밭 사이로
밀려드는 설움
강물 목젖에다 풀어헤치고
설익은 청춘 마냥
애처롭기만 한데
네 모습 노을 여문 빛 사이로
희끄뭇게 밀려든다.
허허로운 마음
자꾸만
자꾸만
뭍으로만 떠밀려 가고
방황의 그림자 위에
네 모습 걸러 보지만
너울대는 몸뚱아리 허리춤에 꺾인
내 마음 아픔 되어 세월을 낚는다.
갈대 /허천 주응규
발그레하게 터지기 시작한
가을 햇살은 갈꽃을 피우기 위해
그렇게도 부산을 떨었나 보다
가을밤을 타고 흘러내리는
달빛 서리찬 설움 안고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는
가을날을 애잔하게 물들이고
갈 바람에 일렁이는
쓸쓸함과 외로움들은
그대의 섧은 울음에서 오는가 보다.
갈대 /공석진
흔들리지만 쓰러지지 않겠다
가냘프지만 넘어지지 않겠다
양지바른 언덕에서
손 흔들어 임 마중 나가는
억새가 부럽지 않다
발목이 빠지는 늪지에서
태연히 내 사랑 기다리며
품격있는 머리카락 날리겠다
약하지만 강한 너처럼
아프지만 미소 짓는 너처럼
갈대 인생. /황우 목사 백낙은(원)
샛강에 뿌리 내리고 오순도순 모여 살면서
고라니 잠자리 되어주던 묵은 갈대숲 사이로
고고의 함성도 없이 봄비 맞아 새순 돋아나고
자기 사명 다한 핏기 마른 늙은 갈대는
밭은기침 콜록거리며 몸 져 앓아 누었다.
글썽이던 잎들은 꺾인 채로 빗물에 녹아들고
대를 이어 근본 지키는 뿌리의 자존을 통해
수관(水管) 타고 올라 후대의 젊음 더하지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질 운명인데
얄랑얄랑 꼬리치는 피라미 있어 외롭지 않았어라.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물결치면 치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지조(志操) 없는 갈대라고
시류(時流) 따라 변한다고 지탄도 받지만
어쩌면 그것이 갈대가 사는 방법인 것을
그래도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생각하는 갈대랍니다.
* 갈대는 지조 없이 외부의 자극에 쉽게 마음을 바꾸는 인간을 비유하기도 하지만, 다른 풀들과 달라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는 특성이 강조되어 외유내강의 인간성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갈대밭에서 /권도중
노을이 가고
텅 빈 들을 덮으며 어둠이 오고
뒤늦게 돌아간 사람도 여기에선 보이지 않는다
태양이 그림자를 거두어 간 길을 따라
달무리로 떠서 더욱 긴 그림자는
마음 속 그림자만 남기고 간 그 사람처럼
무수한 별 데불고 와
갈대밭에 잠기고
사랑도
하기 전에는 황홀한 꿈이었다
이제 생각하면 진실인 것을
우리는 더욱 성숙하여 울음도 사치가 된다
견뎌야 하는 것이 삶이고 연륜인 것을
오랜 날 지내 와서
아프지 않는 나의 사상
불어라 바람아
소식처럼 끝없이 가다가 없어지는 소식으로
이렇게 마음 편한 갈대밭이다
갈대 /정아지
한번 흔들거림에 놀란 가슴은
스치는 바람이 볼을 토닥여도
두근두근 새가슴이 됩니다
땅속 깊이 다져진 뿌리라
물길에 휩싸여도 끄떡없음을
그는 모릅니다
예전에 흘러버린 상처
다시 또 새겨질까 봐
두 번 다시 울지 않으려
흔들거리는 모습 감추려
가녀린 몸으로 막아섭니다
갈대밭에서 /이인혁
어디서 살다 왔을까
살며시 흔들어 봅니다.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약한 인간(人間)들이
갈대의 삶을 흔들어 놓을 때
그 순진한 몸짓으로 들려주는
그들만의 사는 이야기가
가을의 영혼들에게 들려옵니다.
지난 계절의 아쉬움은
갈대밭에 슬픈 전설(傳說)이 되어
언제나 하늘로 향하여 있고
바람결 따라 흔들리는 삶은
붉은 노을빛 속에서 거듭 태어나
갈대의 꿈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였다 하면 흩어지고
또 다시 움직이며 무언가를
생성(生成)하는 힘은
갈대들의 세상이 될 줄 알았습니다.
어디서 살다 왔을까
살며시 흔들어
그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갈대처럼 /예닮 윤인규
갈팡질팡 우왕좌왕
몸과 마음이 흔들린다
저기 저 꼭대기에 앉아
요상한 날개를 퍼덕이는 봉황새는
나와 다른 것인가
아 아니다 그렇지 않다
똑같이 흙으로 빚어진 피조물들
그런데 왜
서로 다른 가면을 쓴 채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가
풀밭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면
해를 가린 먹구름의 허상이 보이건만
정작 저 높은 곳에서는 무엇을 하는지
왜 아래를 보려 하지 않는가
도대체 누구를
세상천지에 무엇을 믿어야 할지
부는 바람에 고개만 가로젓는다
그래도 다리는 바닥에 붙어
어디로도 향하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갈대 /강해림
얼굴 가득 경련을 일으키며, 파문이 일 때마다 잡풀더미 움켜쥔 강심(江深)을 읽으며 오래토록 서 있었습니다 세상은 왜 저 산과 바다 경계를 세우고 흐르는 강물처럼 한 방향으로만 가라 강요하는지 단 한 번도 스스로 중심잡지 못한 허리춤 사이 서걱거리며 모래알이 빠져나갑니다 이름 지울 수 없는 세상 꿈꾸다 버림받은 영혼의 척박한 땅, 마음은 언제나 추락지점 모르는 수천 미터 상공까지 날아오르고 싶었습니다
어느새 어둠이 킬킬대며 무릴 지어 내려와 내 영혼의 발등에 입맞춤합니다 빛과 어둠이 서로 몸을 섞고 탐한들 어찌 흉내나 내겠습니까 어둠 속 더듬거리며 뻗어가던 나의 뿌리가 너덜거릴수록 비로소 인간의 울음을 흉내낼 수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바람결에 소식 한 장 보냅니다 흔들릴 때마다 휘휘 빠져나가는 휘파람 소리 하나로 세상은 온전한 슬픔에 젖고 기억 속에서 만일 내 불온한 뿌리가 닿을 어둠이 없었다면 어찌 이 팍팍한 생 건널 수나 있었겠습니까
잠 없는 것들 서로의 체온만으로도 따뜻한 밤입니다 서러운 출생을 꿈꾸며 마음은 다시금 고단한 뿌리를 내리고 떠나지 못한 새들 위하여 비워둔 가슴, 누군가 또 아프게 둥지를 트나 봅니다
갈대처럼 /임영준
그렇게 살아야 했다
여기저기 수그리고
이리저리 비벼대고
바람결에 낭창거리면서
그렇게 뿌리박아야 했다
가장자리든 모퉁이든
태없이 가리지 않고
끈적끈적 흐물거리면서
갈대밭 /김동리
가슴속에 언제나
벌레 우는 鄕`愁
그 꿈속의 고향은 얼마나 먼 곳일까
내 고장 서쪽 산 玉`女`峯 비탈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 속에
작고 붉은 묏새들 날고 있었지
갈대밭 위로 떠오르던
둥근 달은 어머니 얼굴
갈대밭 속의 깊이 모를 늪가엔
늙은 개구리 한 마리
두 눈을 굴리며 나를 바라보았었지
옥녀봉 한쪽 비탈 끝없는 갈대밭
그 늪가의 늙은 개구린
지금도 그 큰 눈 굴리고 있을까
갈대의 꿈 /김경렬
가을 내내
받은 사랑
넘치고 넘쳐
눈보라 견디며
내 공의 힘으로
품위를 지켰거늘
철부지 악동들
휘 두는
연장에 숙여진 고개
그래도
늪지대를 지키며
도요새를 기다리며
다가 오는
환생의 봄을 기려
한 생을 꿈꾸노라
갈대의 아픔 /박인걸
고운 꽃을 피웠지만
아직도 갈대는 흔들린다.
서 있는 자리가 불안하여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바람 부는 언덕에 서서
편히 잠들 수 없을 때면
떨리는 음성으로
고독의 노래를 부르고
이슬비 내리는 날에는
돌아서서 마음껏 울었다.
태풍이 습격할 때면
까무러치면서 버티었고
하나 둘 주저앉을 때면
서러움이 가슴을 후볐다.
산다는 것은 버티는 일이며
아픔을 참는 일일까
끝없는 방황이며
답이 없는 수수께끼일까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느라
무릎에 신경통이 일고
입술이 갈라 터져
목구멍에서 단내가 나도
살아야하기에 견디어 온 갈대는
거대한 숲이 되어 출렁인다.
원색의 갈대꽃이
가을 언덕을 곱게 염색한다.
갈대 /최원정
혼자 우는
고독한 슬픔만은 아니기에
그는,
바람 부는 날이면
솨- 솨-
아예, 목놓아 소리내어 울다가
그 바람마저
잦아든 날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으로
온 몸을 허공에 맡기고
몸짓으로만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