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백발은미의 출현
입술을 핥으며 조돈력은 문틈 사이로 바깥을 살피며 목청껏 외쳤다.
『탁사, 자네는 호가호위(狐假虎威)하지 말게. 나보고 저단으로 가서 자네의 우롱을 받으란 말인가? 내 자네에게 권하는데 꿈도 꾸지 말게. 이 조가는 근본적으로 자네를 인정하지 않네. 자네가 사내라면 들어와서 자세히 도리를 따져 보세.』
탁사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 도리는 더 따지지 않도록 하세. 조돈력, 자네가 거짓으로 명령을 전하고 사사로이 금지구역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권력을 남용하여 불칙한 일을 도모코자 했네. 이 몇 가지 조목만 하더라도 자네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고 남을 것이네. 자네는 스스로 나와서 포박을 받겠는가, 아니면 본단주가 문을 깨뜨리고 들어가서 자네를 잡아야겠는가?』
조돈력은 두 눈이 충혈되어 마구 욕을 했다.
『제기랄, 네가 도대체 무엇인데 감히 임금처럼 이 조모의 죄를 확정짓는 것이냐? 네까짓 머저리 같고 쓰레기 같은 녀석은 아직도 멀었다.』
탁사는 괴이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꾸짖었다.
『이광(李光), 조만길(趙萬吉)… 진호(陳虎)… 안에 별다른 일이 없다면 한 마디 대답을 해라!』
조돈력은 문틈 밖을 향해 퇫, 하고 침을 한 번 뱉고는 욕을 했다.
『이 탁가야, 너는 스스로 들어와 보지 못하느냐?』
횃불의 광채가 탁사의 그 좁고 길면서도 추악한 말대가리의 얼굴을 비춰주고 있었다. 불빛 아래 탁사의 안색은 더욱더 음흉하고 냉혹하게 빛났으며 거센 말이 거침없이 들려왔다.
『조돈력, 너는 그 안에 있는 본단의 다섯 명 행형수를 어떻게 해쳤느냐?』
조돈력은 마음을 가다듬고는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내 솔직히 너에게 이야기하지. 너의 그 다섯 명의 개새끼들은 벌써 두 다리를 뻗었다. 지금 그들은 아직도 황천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네가 급하다면 빨리 쫓아가 보아라. 뒤쫓아 간다면 아마 뒤따라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군유명은 조그만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시간이 다 되었네, 조돈력. 자네는 포위를 뚫고 나갈 준비를 하게.』
조돈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기다리고 있소이다. 공자. 호랑이 등에 탄 격이니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외다.』
바깥의 탁사는 어리둥절해지는 것 같더니 곧이어 극도의 분노에 찬 호통소리를 내질렀다.
『반역도 조돈력! 너는 간담이 부었느냐? 감히 본방을 배반하다니!』
조돈력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서 매서운 어조로 맞받아 욕을 해댔다.
『조모는 어둠을 버리고 밝음을 되찾았으며 훌륭한 주인을 선택해서 섬기기로 했다. 그 이유는 너희들의 그 아첨만 해대는 쌍판을 보기 역겨워졌기 때문이며 다시는 같은 통속이 되어서 더러운 놈이 되기 싫었던 것이다. 탁사. 너는 호통을 치지 말아라. 재간이 있으니 안으로 들어와 실력대결을 하자꾸나. 이 조모가 너를 두려워할 줄 아느냐?』
철문 앞의 탁사는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사납게 외쳤다.
『문을 깨뜨려라!』
그 소리가 막 단주의 혀끝에서 허공으로 피어오르는 순간 공지 저쪽의 어둠 속에서 갑자기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덮쳐들었다. 그리고 광풍노도가 몰아치듯 세 명의 대비방 수위가 어느덧 철썩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덧 저쪽으로 나가떨어지게 되었다.
다른 한 명의 수위가 막 입을 벌리고 소리치려고 했을 적에 그 검은 그림자는 어느덧 몸을 한 번 떨쳐서 그에게 충격을 주어 허공으로 일곱 자나 날아올랐다가 저쪽으로 나가떨어지도록 만들었다.
곧이어 이곳저곳에서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첩자다! 첩자가 있다!』
『게 누구 더 없느냐? 첩자가 잠입했다.』
『가로막아라! 포위해라!』
그 거대한 검은 그림자는 한 번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 대비방 쪽의 네 사람을 나가떨어지게 만들었으니 장력의 날카롭고 매서움은 실로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대비방의 다른 사람들은 대뜸 모두 소란이 일어서 우왕좌왕했으며 뾰족한 음성으로 고함들을 질러댔다. 수위들은 은초를 불어 경고를 해야 한다는 의무마저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혈뢰의 철문은 신속하게 열려지고 군유명이 번개같이 쏘아져 나왔다.
맨 앞에서 공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흑우 하근이었다.
하근이 손에 들고 있는 무기를 미처 쳐들기도 전에 군유명이 느닷없이 몸을 빙글 돌리면서 겉에 걸치고 있던 잿빛 장포를 휙 하니 비스듬히 날아보냈다.
그 부드러운 잿빛 장포는 날아간 그 찰나 평평해지면서도 똑바로 펼쳐졌으며 한 조각의 철판처럼 맹렬히 부딪쳐가는 것이었다.
그 순간 우직끈, 뚝, 하는 소리와 함께 하근의 머리통은 어느덧 군유명이 내던진 잿빛 장포에 얻어맞고 박살나고 말았다.
새빨간 피와 끈적한 허연 골수들이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군유명은 벼락같이 허공으로 튀듯이 뛰어올랐고 열 몇 번이나 재주를 넘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한 꾸러미의 구름들이 뭉실뭉실 날아드는 것 같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은빛 광채가 벼락같이 번쩍이는 가운데 대비방의 수위들 중 열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모두 군유명의 은교련에 미간을 관통당하고 곧장 골수에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탁사는 길세 호통을 내지르며 급히 군유명에게 달려들었다. 그를 따라온 여섯 명의 행형수들이 사방에서 중간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군유명은 냉랭히 코웃음 치더니 빙그르 하니 역으로 열 번 정도 선회했다.
탁사의 말대가리 얼굴은 이미 청자색 빛으로 변해 죽어라 뒤쫓아 오면서 매섭게 외쳤다.
『이 쥐새끼 같은 녀석, 어디로 도망을 치느냐?』
군유명의 하반신은 미미하게 뒷쪽으로 약간 내미는 듯 하더니 다시 벼락같이 나는 듯이 폭사되어 솟구치게 되었고 은교련은 질풍과 같이 휘둘려지게 되었다.
쉭쉭쉭, 하는 날카로운 휘바람소리와 더불어 눈 깜짝할 사이에 은교련은 스물일곱 번이나 탁사의 머리통을 향해 갈겨지게 되었다.
허공의 은빛 뱀이 흐르고 번쩍이듯 엇갈렸고 또한 사람의 눈을 자극하고 부시게 했다.
탁사는 한 쌍의 맨손으로는 근본적으로 감당을 할 수가 없어서 입으로 뾰족한 부르짖음을 토해 내며 몸을 땅바닥에 던져 굴러서 테두리 바깥쪽으로 나가려고 했다.
군유명의 신형이 허공에서 맹렬한 기세로 꺾어서 돌더니 은교련이 어지럽게 뻗치고 감으려 들었으며 광풍이 벼락같이 이는 가운데 빗방울처럼 달려온 저단 단주를 얽어서는 다섯 걸음 밖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이었다.
다른 네 명의 가까이 있는 행형수가 멈칫하게 되었을 적에 어둠 속에 다시 한 명의 검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달려 나오게 되었는데 그 검은 그림자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 가운데의 한 명과 부딪쳐서는 한 덩어리가 되어 쓰러졌다.
그러나 그 검은 그림자는 즉시 몸을 일으키게 되었고 그에게 몸을 부딪치게 된 그 행형수는 뱃가죽을 얼싸안고 땅바닥에 구부리고 앉았는데 그가 손으로 막고 있는 곳에는 꿈틀거리는 창자가 잘려진 뱃가죽 밖으로 삐져나왔다.
한 소리 맑고도 우렁차면서 뾰족한 피리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소슬하고 싸늘한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그 피리소리는 마치 귀신이 우는 소리와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단지 한 번 울려 퍼졌을 뿐이었다.
한 번 울려퍼지게 된 이후 그 피리를 불었던 대비방의 수위는 이미 그의 뒷쪽에서 덮쳐 든 그 뚱뚱하고 커다란 사람의 일장에 그만 머리통이 양쪽 어깨 사이로 푹 파묻혀 들어가고 말았다.
군유명은 입술을 가볍게 다물면서 크게 몸을 뒤집더니 은교련을 벼락같이 휘둘러 다시 한 명의 행형수의 대감도를 얽어서는 허공으로 날아가도록 만들었다.
그가 눈을 한 번 깜박이지 않고 한 발을 들어 사람을 걷어차자 그 사람은 머리를 얼싸안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 거대한 검은 그림자 금우마는 전신을 낮추더니 마치 땅바닥에 떨어진 공처럼 데구르르 번개같이 움직이면서 추격했다.
탁사를 따라온 여섯 명의 행형수들 가운데 겨우 남은 두 명이 후딱 몸을 돌려서는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겨우 다섯 걸음 달려 나가게 되었을 적에 금우마의 벼락같이 뻗은 두 손의 장력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크게 얻어맞고는 입 안으로부터 선혈을 마구 품어내며 곧장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고 다른 한 명은 막 이빨을 깨물며 대감도를 두 번 휘둘렀으나 금우마의 거대한 손이 어느덧 그의 몸뚱아리에 일곱 차례나 닿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도 땅바닥에서 구르는 원보(元寶)처럼 연신 뒤집어지면서 바깥쪽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귀까지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어장살 라곤은 그 한 자루 겨우 한 자 반밖에 되지 않고 검신이 구부러진 좁은 단검(短劍)을 다른 한 명의 대비방 행형수의 가슴팍에 꽂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샘솟듯 선혈을 그의 얼굴에다가 품어야 했다.
이 마존의 충성스럽고 강직한 수하는 또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려 다른 한 명의 급히 휘두르는 대감도를 피하고 단검으로 싸늘한 광채를 번개같이 번쩍이며 다시 맹렬한 기세로 상대방의 뱃가죽에다가 꽂는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불과했는데 이곳에서는 탁사를 제외한 그의 모든 수하들이 이미 십중팔구는 살상을 입고 나가떨어진 것이었다.
어장살 라곤과 독괴 금우마 두 사람은 여전히 그 몇 명, 그물에서 빠져나간 고기 격인 대비방의 제자들을 추살했고 군유명은 한 차례 냉소를 터뜨리며 재차 탁사에게 덮쳐들었다.
대비방에서 탁사는 형벌을 관장하는 책임을 맡은 저단의 단주였다. 그만큼 그 자신은 물론 그 자리에 앉을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무공에 있어서도 대비방의 일류 인물로 손꼽힐 수 있는 것이었다.
탁사 자신이 자기의 능력이 어떤지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가 보아온 장면들과 겪은 풍랑 역시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유명과 금우마의 무공은 완전히 그에게 경악을 안겨주었고 그를 압도하고 말았다.
세상에 태어난 뒤에 그는 거의 이와같이 초절(超絶)한 솜씨를 가진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으며 더더욱 이와같은 강적과 손을 써서 초식을 교환한 적이 없었다.
이 짧은 순간에 그는 오늘 밤 고수, 진정한 고수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군유명이 허공으로 덮쳐드는 속도는 그야말로 번개를 방불케 했다.
탁사 역시 공격에 능통한 자였다. 상대방이 겨우 그토록 빠르게 번쩍하니 한 번 몸을 날렸을 뿐인데 탁사는 적의 덮쳐드는 기세에 전혀 반격을 가할 빈틈이 없고 또 그 자신의 재간으로는 근본적으로 감당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황해지고 정신이 어지러워진 데다가 경악에 사로잡힌 탁사는 두 손을 나는 듯이 뒤집으며 휘둘렀고 온힘을 다 기울여 항거하면서 한편으로 뒷쪽을 향해 급히 물러서며 급히 부르짖었다.
『잠깐… 잠깐!』
손에 들고 있는 은교련을 휙, 하니 손목에 감고 군유명은 탁사와 여섯 걸음쯤 떨어져 있는 앞쪽에 섰다.
그는 얼음과 같이 차갑게 물었다.
『왜?』
땀 방울이 눈썹 끝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는 탁사의 얼굴은 흙먼지로 더러워져 있었다.
그는 가쁜 숨을 식식거리며 몰아쉬면서 입을 열었다.
『빚에는 채무자가 있다고 했소. 여러 친구들은 우리 대비방과 무슨 감정이 있길래 이토록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것이오? 어찌 됐든 간에 당신네들도 분명히 밝혀야지 이와 같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마구 죽이니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냔 말이오?』
군유명은 냉랭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시간을 지연시키지 말아라. 탁가야. 나와 대비방은 바다와 같이 깊은 불구대천의 원한이 있다. 어찌 됐든 간에 너는 목을 길게 빼고 죽음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나는 결코 너에게 실망을 안겨 주지 않겠다!』
탁사는 재빨리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물었다.
『이름을 댈 수 있소?』
군유명은 하늘을 우러러 거칠고도 사납게 외쳤다.
『너는 자격이 없다!』
군유명이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향하는 그 찰나에 탁사는 거칠 것 없이 앞으로 살그머니 나오더니 갑자기 몸을 솟구치며 손을 들어 맹렬히 군유명을 후려쳐 왔다.
발걸음을 비스듬히 하고는 몸을 옆으로 기울이면서 은교련을 뻗쳐내는 군유명!
짝, 하며 은교련이 번개같이 탁사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두 손이 허공을 후려치게 되었을 적에 탁사는 그만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그는 괴성을 내지르며 죽어라 하고 몸을 옆으로 날렸다. 그러나 군유명의 은교련은 어느덧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안면을 후려치며 지나가게 되었고 탁사의 오른쪽 뺨에는 깊게 째어진 하나의 혈흔(血痕)이 남게 되었다.
『네 수작은 아직 멀었다!』
군유명은 냉랭히 호통을 내지르며 은교련을 유성의 꼬리처럼 번득이며 벼락같이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였다. 예리한 은교련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마치 그 누가 흐느끼는 소리 같았다.
탁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은빛 뱀이 나는 듯이 춤추는 가운데 그의 옷자락은 마구 찢겨지고 떨어져나간 베 조각은 훨훨 날아서 떨어졌다. 그래도 아직 목숨을 잃지 않고 있었으나 온몸 아래위 할 것 없이 군유명의 은교련에 맞아 피부가 터지고 살이 뒤집어졌으며 피비(血雨)를 마구 튀겼다.
탁사는 뼈를 에이는 고통을 버티고서는 이빨을 깨물었다. 그러나 쌍방의 실력은 너무나 차이가 났다. 대비방의 저단 단주는 당장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 것 같았다.
한 차례 사람의 심백(心魄)을 흔들고 놀라게 하는 북소리가 갑자기 철위부의 사방팔방에서 울려 퍼지게 되었다.
그 소리는 나직하고도 무거웠으며 음침하면서도 답답했다. 그런가 하면 마치 심장의 고동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둥, 둥, 둥…』
『둥둥둥…』
철위부의 사방에서 모든 모퉁이에서 하나하나 검은 그림자들이 유성이 흐르는 것처럼 이쪽으로 집중되어왔다.
무기의 싸늘한 광채가 그 사람들이 몸을 날릴 때마다 빛을 발했으며 간혹 가다 몇 소리 두껍고도 매서운 호통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조돈력은 혈뢰의 철문 뒤에서 총총히 달려 나오며 한 소리 부르짖었다.
『빨리 뚫고 나갑시다. 잘못하다가는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군유명은 강물이 세게 용솟음치듯 흐르는 것처럼 손을 쓰면서 적을 바짝 몰아세우면서 싸늘하고도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뭘 그렇게 당황하는가? 이곳에는 아직도 우리 세 사람이 있다!』
격전을 벌이면서도 말을 했고 말을 하면서도, 군유명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르게 그림자가 정히 왼쪽 방향에서 질풍노도와 같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포착할 수가 있었다.
다른 것은 보지 않더라도 먼저 그 사람의 경신법만 보더라도 이미 절정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우뢰와 같은 폭갈을 터뜨리며 군유명은 왼손을 오른쪽으로 기울였다가 몸을 오른쪽으로 선회시키면서 앞으로 기울이는가 하면 뒤로 젖혔다. 신형의 움직임은 느닷없이 십 배나 더 빨라졌다.
동시에 그의 은교련은 어느덧 광풍노도처럼 백 번이나 휘둘려지게 되었다.
탁사는 예리한 비명과 참담한 울부짖음을 토해 냈다. 그 소리는 처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군유명의 맹렬한 공격에 그는 땅바닥에 나뒹굴어지게 되었는데 온몸의 피와 살이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해졌으며 뼈는 부러지고 오장육부는 갈기갈기 찢어져 몸을 떨 기운조차도 없었다.
금우마와 라곤이 바로 이 때 일제히 날아들었다. 그리고 금우마가 막 입을 열려고 했을 적에 그의 시선에 그 뭇 사람들을 훨씬 앞서서 달려드는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금우마는 한 쌍의 조그만 눈동자를 벼락같이 부릅뜨면서 나직하고도 급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억센 자가 왔소이다, 공자!』
군유명은 침착하게 말했다.
『훌륭한 재간이오!』
금우마는 재빨리 물었다.
『동강이 아닌지요?』
군유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닮지 않았소. 동강은 지금 이 철위부 안에 없소!』
그러다가 별안간 군유명은 불쑥 부르짖었다.
『관채!』
금우마는 안색을 엄숙이 하면서 무겁게 응수했다.
『백발은미(白髮銀眉)? 과연 대단한 놈이군!』
그들이 몇 마디의 말을 주고받게 되었을 적에 허공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번개처럼 날아서 내렸다.
이 사람은 온 머리카락이 명주실처럼 허연 백발로 뒤덮여 있었고 한 쌍의 비스듬히 귀밑부리로 뻗쳐 있는 짙은 눈썹마저도 은백색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젊고도 준수했으며 표정에는 한 가닥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소탈한 멋이 감돌고 있었다.
그와같은 표정은 훤칠하고도 옥을 깍아세운 듯한 몸매에다가 한 벌의 앞섶자락에 외로운 소나무를 수놓은 듯한 검은빛 장포와 어우러져 더욱 초절하고 비범해 보였다.
이 사람 백발은미 관채는 군유명이 서 있는 일곱 걸음 밖에서 몸을 멈추더니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천천히 사방을 한 번 살폈다.
그리고 난 후 시선을 군유명의 얼굴로 던졌다.
이 때 주위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어른거리고 무기의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또다시 십여 명의 고수들이 도달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묵묵히 사방에 무기를 든 채 섰는데 유리하게 손을 쓸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서는 것이었다.
관채는 다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군유명을 바라보며 맑고도 윤기가 도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을 모두 당신들이 죽였소?』
군유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관채는 조금도 느리지 않고 또 조금도 빠르지 않게,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군유명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들은 당연히 죽어야 하기 때문이오.』
관채는 탄성을 발하더니 여전히 부드럽고도 온화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 당신들에게 그와 같은 권리가 있어서 그와 같은 짓을 했다고 생각하오?』
군유명은 담담히 응수했다.
『그렇게 생각하오.』
관채는 습관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사람을 첫눈에 보고 알 수 있소. 어떤 사람은 특별하여 뭇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오. 차가운 말씨, 고집불통, 거만, 총명, 과단성, 잔혹, 거기다가 무공이 초절한, 바로 당신 같은 사람 말이오.』
군유명은 미소를 띠었다.
『당신 역시 비슷하오.』
관채는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부인하지 않소. 나의 생각으로 나는 당신이 나를 알고 있으리라고 여겨지는구려?』
군유명은 웃었다.
『물론, 백발은미 관채의 명성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본 지 오래이외다.』
관채는 우아하게 허리를 살짝 굽혀 보였다.
『실례지만 귀하는?』
군유명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솔직히 대답했다.
『군유명이오!』
그 이름이 군유명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게 되자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던 고수들은 모두 다 갑자기 두 눈이 둥그레지게 되었고 관채와 같이 침착하고 심심하며 천하에 명성을 떨친 인물도 그만 참지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반신반의하듯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마존이란 말이오?』
군유명은 평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런 것은 가장할 필요가 없는 것이오. 그렇지 않소? 이 때 만약 그 누가 군유명으로 가장한다면 총명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관채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바로 군유명인 것을 믿겠소!』
군유명은 환히 웃었다.
『당신은 내가 이미 죽었다는 소문을 믿지 않소?』
관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부터 나는 그걸 믿지 않았소.』
군유명은 물었다.
『왜?』
관채는 천천이 빙긋이 웃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렇게 쉽게 죽은 사람이 아니며 더욱이 당신이 죽었다고 사방에 퍼진 유언비어는 어떤 확실한 근거도 없었소.』
군유명은 입술을 살짝 다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매우 사리에 맞는 말이오. 내가 이미 해를 입었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은 아마도 그가 속일 수 있는 사람, 약간의 범부속자(凡夫俗子)에 불과할 뿐이고 진정으로 지모나 식견이 있는 사람은 그의 가소로운 거짓말을 믿지 않으리다. 바로 귀하와 같은 사람이 지모가 있고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지.』
관채는 가볍게 웃었다.
『허허허, 마존께서 높이 사주시는 것은 퍽도 드문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그는 다시 정색을 했다.
『더욱이 이와 같이 서로 적대하는 장면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군유명은 담담히 말했다.
『당신이 나와 적이 되고 싶지 않다면 관채, 당신은 적이 되지 않아도 되는 것이오!』
곤채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당신을 우러러보고 있소. 군유명.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구료.』
군유명은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동가가 당신에게 어떤 좋은 점을 제시한 것이오?』
관채는 은빛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무겁게 말했다.
『나 관채는 물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 아니오. 내가 동강을 도와주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오. 바로 그의 외사촌 누이가 나의 연인이기 때문이오!』
군유명은 이해한다는 듯이 빙그레 웃고 입을 열었다.
『만약에 당신이 정의를 애정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원인은 가장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오. 그 누가 당신을 탓할 수 있겠소?』
관채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군유명, 당신은 이간질하지 마시오.』
군유명은 여전히 태연하게 조금도 서두를 것 없이 말했다.
『이간질을 하는 것이 아니오. 나는 그저 솔직히 말했을 뿐이오.』
관채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약간 말하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에 이곳의 일을 내가 결정내릴 수 있다면 군유명, 나는 당신을 저지하지 않고 당신 마음대로 가도록 내버려 두겠소. 왜냐하면 나는 항상 당신을 존경해 왔기 때문이오.』
군유명은 그를 대신해서 그 다음 말을 이어보았다.
『그러나 당신은 애석하게도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이오?』
관채는 눈살을 찌푸렸다.
『맞았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부득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구려.』
군유명은 상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관채, 나는 당신의 고충을 알고 있소.』
관채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무쪼록 당신이 양해해 주시기를 희망하오…』
그가 막 여기까지 이야기하게 되었을 적에 어두운 그늘 속에서 한 비쩍 마르고 왜소한 신형이 저쪽에서 나는 듯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멀리서부터 그 사람은 중기(中氣)가 매우 충분한 음성으로 크게 소리쳤다.
『관형, 그쪽에 계시오?』
관채는 미미하게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서는 소리쳤다.
『조 방주이시오? 나는 여기 있소.』
한켠의 금우마가 약간 다가서며 조그만 음성으로 말했다.
『대비방 방주인 백호(白虎) 조기가 왔구려!』
군유명은 여유 있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야 신나지 않소?』
금우마는 나직하고도 무겁게 외쳤다.
『부러운 기백이군요!』
이때에 그 비쩍 마르고 왜소한 그림자는 번개같이 가까운 앞쪽으로 달려와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