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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 전 피닉스 아일랜드를 돌아볼 생각으로 숙소에서 좀 일찍 나왔습니다. 작년 11월에 안도 다다오의 건축세계를 찾아가는 일본여행을 하면서 안도의 건축세계에 빠져든 적이 있는데, 바로 이 피닉스 아일랜드에도 안도의 작품이 있다기에 이걸 보고 싶었던 것이죠. 피닉스 아일랜드에는 안도의 작품으로 고급 레스토랑인 글라스 하우스와 명상센터인 지니어스 로사이가 있고, 또 강남 교보빌딩과 삼성미술관 리움을 설계한 건축가 마리오 보타의 휘트니스 센타 아고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직원에게 물어보니 거기까지 가려면 10분에서 15분을 걸어야 한다는데, 오늘의 일정표상 시간이 빠듯합니다. 평소 같으면 뛰어서라도 갔다 오겠지만 다리 다치고 무리할 수는 없어서 그냥 콘도 주위만 산책하기로 하였습니다. 해만 일찍 떠도 시간이 될 텐데, 겨울이라 해가 늦게 뜨는 것이 아쉽군요.
우선 디카 셀 회원들이 옥상에서 일출 사진을 찍는다기에 옥상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옥상에선 탁연하 선생님을 비롯한 디카 셀 회원들이 일출 사진을 찍기 위해 삼각대를 설치하고 렌즈를 조절하는 등 생기 있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나의 아쉬움을 아는지 글라스 하우스가 멀리 언덕 위에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성산 일출봉이 바짝 다가서며 오래간만이라고 인사를 합니다. 여기서 보면 일출봉이 가느다란 모래 사주로 제주 본토와 이어져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모래사주가 긴 세월 동안 원래 화산섬이었던 일출봉에 조금씩 조금씩 접근하여 마침내 일출봉과 만난 것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피닉스 아일랜드는 섭지코지 위에 만들어졌습니다. 섭지코지는 협지(狹地)의 제주도식 발음 '섭지'와 곶(串)의 제주도식 변형 '코지'가 합쳐진 말이랍니다. 섭지코지란 말 그대로 섭지코지는 제주 동쪽 해안에 볼록 튀어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산책하면서 생각나는 것 하나. 예전에 섭지코지에 왔을 때에는 약간 황량한 듯하면서도 섭지코지만의 매력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곳에 피닉스 아일랜드의 건물들이 점령하고 있으니 아무리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축물이라지만 그냥 자연 그대로 남겨두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입니다. 그래서 올레길도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이 섭지코지를 지나가야 할 것이지만, 이렇게 변해버린 섭지코지를 그냥 지나쳐버렸습니다.
아침을 먹고 효돈동 마을회관으로 이동하니 제주 올레길을 개척하신 서명숙 이사장님이 올레에 대해 강연을 해주시고, 강연 후에는 제주민요연구소의 민요가수 3분이 나오셔서 구성진 제주민요를 들려 주셨습니다. 효돈동을 한자로 쓰면 孝敦洞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동네가 참 효가 두터운 동네이구나 생각하였는데, 원래 마을 이름은 '쉐둔', '쉐돈'이라던 것을 한자로 '牛屯'이라 표시되고, 이후 다시 '孝敦'으로 바뀐 것이더군요. 그러니까 원래 이 동네는 소가 진을 치던 곳이 효가 두터운 곳으로 바뀐 것이네요. 어쨌거나 '효돈'이라는 이름의 영향을 받아 이 마을 사람들은 효성이 지극할 것 같습니다.
서이사장은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자리를 집어던지고 혼자서 스페인으로 날아가 40여 일 동안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자기 고향에도 이보다 더 멋진 길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또 그 때 길에서 만난 영국 여자와 '우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면 또 하나의 산티아고길을 만들어보자.'고 약속하였답니다. 그리하여 2007년 성산포에서부터 제주 올레길 1코스를 만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애월읍의 고내포구까지 15코스를 만들었는데, 이제 조만간에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올레길이 완성되겠죠.
강연 후 일부 회원들은 주일 예배 드리러 근처 교회를 방문하고 대부분의 회원들은 감귤박물관을 관람하러 가는 사이 저는 발이 움찔움찔 하는 것을 참고 마을회관에 남아 법률상담을 하였습니다. 점심식사 후 드디어 올레길 6구간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차를 타고 출발지인 쇠소깍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쇠소깍' - 이름이 특이하죠? '쇠'는 소를 말하고, '소'는 늪지를 말하는 '沼', '깍'은 끝지점을 나타내는 제주도 사투리입니다. 그러니까 소늪지의 끝이라는 얘기인데, 실제로 쇠소깍은 효대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다와 만나는 곳이 주위는 얕은 바위 절벽으로 둘러싸여 물이 잔잔한 것이 경치도 훌륭하여 물이 흘러가는 '川'보다는 '沼'가 더 어울리는 이름 같습니다.
이 쇠소깍에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전설도 있더군요. 350여년 전에 이곳 하효마을에 부잣집 외동딸과 그 집 머슴의 동갑내기 아들이 있었는데, 짐작하듯이 이 둘 사이에서는 사랑이 타올랐겠지요. 그러나 조선의 신분사회에 이들의 결혼이 허락될 수 없는 것. 하여 머슴 아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쇠소깍 상류의 남내소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다는군요. 이에 처녀는 사랑하는 정인(情人)의 시신이라도 찾았으면 하여 쇠소깍의 기원바위에서 100일 기도를 드렸답니다. 처녀의 기도가 응답되었는지 큰 비가 내려 총각의 시신이 이곳까지 떠내려오고, 처녀는 총각의 사체를 부둥켜안고 울다가 기원바위 위로 올라가 사랑하는 님을 따라 쇠소깍에 몸을 던졌다는 것. 그 후 하효마을에서는 이 처녀총각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마을 동쪽에 있는 용지동산에 당(堂)을 마련해 두 영혼을 모시고 기원을 드리고 있다는 것이구요. 저는 이들 정인들의 사랑이 담긴 쇠소깍에 보트를 띄우고 싶기도 하나 시간상 그럴 여유는 없어서 예전에 이곳에서 보트를 띄우던 때를 상기하며 출발장소로 걸어갑니다.
1:15경 출발지에서 회원들은 기념사진을 찍고 출발합니다. 출발지에서는 3명의 해녀가 나란히 앉아 우리 보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고 그 양옆에서는 인어들이 또한 다소곳이 앉아 우리를 환송합니다. 올레길에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이러한 석상도 세웠겠지요? 해녀들 뒤로는 설문대 할망이 한쪽 다리를 걸쳤었다는 지귀도가 보입니다. 뭍으로 돌아가고픈 지귀도(地歸島)에서 미당 서정주는 1937년 4월에서 6월까지 머물며 '심신(心身)의 상흔(傷痕)을 말리우며' '지귀도시' 연작 4편을 지었다는군요. 미당이 이 섬을 찾았을 때에는 뭔가 시인의 심신에 상흔이 새겨지는 아픔이 있었던 때인가 봅니다. 지귀도도 해방 얼마 후까지는 사람들이 살았는데, 4.3 사태 때 보복을 두려워 한 섬사람들이 제주 본토로 피신한 이후로 지금껏 무인도로 남아있습니다. 또 하나의 아픔이군요.
가다보니 지진해일 대피 안내판이 있습니다. 어? 우리나라에도 지진해일이 있었던가? 얼마 전 칠레 지진이 났을 때에 멀리 태평양 건너 일본에서도 지진해일(쯔나미) 대피한다고 한바탕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우리나라는 일본이 태평양의 지진해일을 막아주기 때문에 괜찮지 않았던가요? 하긴 우리나라 남단 제주도의 남쪽 바닷가는 일본이라는 천연적인 방파제에서 살짝 비껴 앉아 있으므로 지진해일 발생 지점에 따라서는 이곳 서귀포 바닷가도 피해를 입을 수 있겠군요.
길을 가다보니 아까는 해녀가 앉아서 우리를 전송하더니, 지금 길옆엔 머리에 두건을 쓰고 등에는 물허벅을 진 제주 여자가 한 손으로 치마를 여의면서 빙긋이 웃고 있고, 또 한곳에선 제주 하루방이 벙거지를 쓰고 제주 도야지를 안고 '놀멍 쉬멍 보멍 갑세'합니다. 놀다 쉬다 보다 가라는 얘기겠죠? 현무암으로 만든 동상이라 제주 여인의 치마에는 구멍이 숭숭 나있는데, 저는 이 여인네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같이 사진 한 장 찍고 갑니다.
길을 가면서 한라산은 곰보 투성이의 제주 돌담 사이로, 붉은 색 동백꽃 옆으로, 때로는 줄로 납작 끌어당긴 제주의 지붕 위에서든 우리가 어디를 가든 머리에는 은색 관을 쓰고 우리를 멀리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제 제가 저 은색의 관속에서 백색의 향기에 취하여 거닐다가 내려왔다는 것이네요. 어제는 하얀 눈나라 속을 거닐었는데, 지금은 따뜻한 봄바람을 맞으며 제주의 바닷가를 거닐고 있으니 지금 제주는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동시성의 시간을 지나고 있군요.
2:00경 보목마을을 지나 제지기 오름으로 오릅니다. 서명숙 이사장은 바닷가를 따라 올레길을 만들면서 이렇게 오름도 한 번씩은 거치도록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오름을 오르며 헉헉대게 만드는군요. 제지기 오름은 남쪽 중턱 굴이 있는 곳에 절이 있었고, 그 절에 절을 지키는 이가 있어 절지기 오름이라고 하던 것이 제지기 오름으로 소리가 변화되었다고 하는데, 절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바닷가의 야트막한 오름이라 헉헉대는 것을 조금 참으니 금방 오름 꼭대기입니다. 오름 위에서 북쪽으로는 한라산이 소나무 가지 사이로 더 가깝게 보이고, 반대쪽으로는 보목 포구 너머로 숲섬(섶섬)이 보입니다. 제 눈에는 물 위로 보이는 숲섬 뿐만 아니라 물속의 숲섬도 보입니다. 한 15년 전쯤이었던가요? 저 숲섬의 물속으로 들어가 산호초 절벽을 따라 물살을 거슬러 나아가는데, 조류가 워낙 세니 아무리 오리발질을 하여도 몸은 좀처럼 나아가지 않더군요. 그래서 잠시 숨을 돌리려고 오리발질을 멈추고 옆의 연산호를 붙잡고 쉬는데 제 몸이 물살에 떠밀리면서 잡고 있던 연산호도 뿌리째 뽑히더군요. 그 추억의 숲섬을 지금은 오름에서 내려다보노라니 예전 추억이 다시 떠올라 미소 한 번 지었습니다.
2:47경 바닷가 숲속길로 들어섰는데, 포장마차 안에서 같이 밀감색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있는 이병욱 교수님과 서예가 하상호 선생, 강웅식씨가 들어와 한 잔 하고 가라 합니다. 포장마차 주인은 82살 할머니 해녀였습니다. 할머니는 제주 고유의 탁주인 순다리와 소라 안주를 내놓습니다. 깨알만한 건더기들이 떠있는 순다리는 일반 막걸리보다 순하면서 달콤하여 마침 목이 말랐던 저는 벌컥벌컥 들이킵니다. 그런데 이 싱싱한 소라 안주는 저 82살 해녀 할머니가 바닷속에서 직접 건져 올려낸 것이라네요. 우와! 저 연세에 지금도 물질을 하다니요! 할머니는 우리가 안주 좀 더 달라고 하니 소녀 같은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안주를 더 집어주는데, 허~참! 글쎄 82살 할머니의 미소를 보면서 귀엽다는 생각이 드네요. 순다리의 달콤함에 우리는 계속 퍼질러 앉아 있으려는데 서초산악회 일행과 함께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오시는 김덕룡 특보 일행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좋은 자리를 계속 독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겠죠.
숲속을 빠져 나오니 강영무 석사 추모비가 있습니다. "정열의 나래 푸른 생명 찾아 하마 예서 봉오리 져/ 지나는 이여 알찬 보람 넋을 우리 예서 찾을지니/ 눈을 들어 먼 파도를 보라" 1971. 7. 21. 서울대 식물학과에서 강영무 석사의 1주기를 맞이하여 이 추모비를 세웠다는데 무슨 사연이 있을까요? 혹시 이 앞 숲섬에서 다이빙을 하다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것이 아닐까요? 제가 숲섬에서 다이빙할 때 제 일행 하나도 조류에 떠밀려 사라지다가 구조된 적이 있었죠. 하여튼 대학 선배가 이곳에서 짧은 삶을 마감하였다니 안타깝군요.
숲섬을 지나서니 저 앞으로 문섬과 또 그 뒤로 범섬이 보입니다. 문섬과 범섬도 모두 제 다이빙 추억이 어린 장소입니다. 문섬에서는 수면에서 내려가는데 물안경에 물이 들어오는 것 같아 안경줄을 더 조이고 들어갔지요. 그렇게 하여 25m 정도 수심에서 문섬 새끼섬의 수중절벽을 돌아가는데 머리는 점점 더 지끈지끈하고 속은 울렁울렁하여, 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물속에서 오바이트를 했습죠. 그 때 좋은 먹잇감을 내주었다며 물고기들이 몰려오는 것이란...
3:34경에는 바닷가 국궁장을 지나갑니다. 이런 바닷가에서 국궁장을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백록정이라는 국궁장에서는 여러 사수들이 검은 색 현무암 바닷가를 가로 질러 건너편 과녁을 향하여 화살을 날립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하니 친절한 사수들은 제주 밀감 한 번 맛보라며 우리에게 밀감 하나씩을 안겨줍니다. 벽에는 궁도 9계훈이 자길 보라 하구요. 그중 하나, '不怨勝者' - 그렇죠. 졌다고 이긴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 되겠죠.
바닷가에 자리 잡은 칼호텔 때문에 올레길은 돌아갑니다. 이제부터는 서귀포시 시냇길로 가니 순간순간 다음 올렛길이 어디인가 헷갈리는데 앞서가던 이병욱 교수님 사모님이 재빨리 파란색 올렛길 화살표를 찾아냅니다. 전통 무용가이신 황경애 사모님은 길나잡이로도 손색이 없네요.
길은 어느 담벼락을 끼고 가는데 담벼락에는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지 그림들이 연이어 부조로 새겨져있습니다. 안내문을 보니 서복전시관입니다. 서복(徐福 또는 서불)이라고 하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대선단을 이끌고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제주도 영주산(한라산)을 찾아온 진시황의 사자가 아니던가요? 서불은 요 앞 정방폭포 해안에 배를 대고 암벽에 자기가 이곳을 다녀갔다고 하여 '서불과지(徐巿過之)'라는 글자도 새겼다는군요.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서불이 여기서 서쪽으로 돌아갔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지요? 일설에는 불로초를 구하지 못한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으로 갔다는 얘기도 있지요. 몇 년 전에 산동반도에서 제일 동쪽으로 튀어난 곳에 갔을 때 서불이 진시황 옆에서 멀리 동쪽을 가리키는 동상을 보았었는데, 서귀포시에서는 그 서불이 다녀간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방폭포 서쪽 암벽 위에 전시관도 세웠군요. 중국인을 기념하는 전시관이라 건물도 중국식으로 지었습니다.
제 선조가 제주 삼성혈(三姓穴)에서 태어난 양을나 아닙니까? 그러니까 저는 탐라국 왕족 후손인 셈이죠. ㅎㅎ 그런데 제 생각에는 서불이 돌아갈 때 돌아가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남은 무리의 우두머리가 바로 양씨, 부씨, 고씨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남아서 이 제주도를 통치하자니 통치설화를 만들어야 하겠기에 삼성혈 신화도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는 것이죠.
전시관 앞을 지나나 우리는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칩니다. 사실 서복이 여기에 남긴 흔적이란 정방폭포 절벽에 새긴 '서불과지' 하나밖에 없고 그나마도 지금은 다 마모되어 없다는데 어떤 내용으로 전시관을 꾸몄는지 궁금하네요.
서복전시관을 지나쳐오니 왼편으로 정방폭포로 내려가는 길이 있습니다. 폭포가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폭포라는 정방폭포 절벽에는 '서불과지' 과두문자를 다시 새겨놓았다는데, 아쉽게도 폭포까지 내려갔다올 시간이 없네요. 다만 우리는 보통 정방폭포의 아름다움만 기억하는데, 4.3. 사태 때는 이 폭포 위에서 제주도민들이 죽창에 찔려 폭포 아래로 떠밀려 살해되었다는 역사적 아픔도 기억하고 지나갔으면 합니다.
길을 건너는데 소암기념관에 '호찌민 옥중시 서예전' 현수막이 걸려있습니다. 소암 기념관은 제주가 낳은 서예가 소암 현중화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관인데, 이곳에서 한국과 베트남 수교 18주년 및 호찌민 탄생 120년을 기념하여 호찌민의 옥중시를 한국 서예가 25인이 작품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이곳도 역시 지나쳐서 이중섭 미술관으로 향합니다. 미술관 옆에는 이중섭 화백이 1951년 6.25. 동란을 피하여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던 초가집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화가는 여기서 1년간을 보내며 '섶섬이 있는 풍경', '서귀포의 환상' 등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화가는 제주도를 떠난 후 1952년에 극심한 생활고에 아이들을 일본인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떠나보냈고, 그 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아 심지어는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다가 1956년에 41살의 아까운 나이에 영양부족과 간염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죠.
화가는 아마도 이 서귀포 시절이 비록 삶은 열악했어도 가족들과 같이 있고, 앞에는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제일 행복했던 시절을 살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화가의 작품중 가족과 아이들과 물고기 등을 주제로 한 그림들은 모두 이 서귀포 생활의 행복함을 기억하며 그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화가의 아들 이태성이 아버지의 명성에 기대어 위작을 만든 것으로 논란에 쌓인 것이 슬프게 하는군요.
여기서도 이중섭 미술관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아! 시간이 아쉽군요. 이중섭 거주지를 돌아 나오니 내리막길은 이중섭 거리로 조성되어 수직막대마다 화가의 그림을 걸어놓고, 보도에도 화가의 그림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울부짖는 소를 보노라면 이중섭의 다른 소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힘이 느껴지면서도 자꾸 보고 있노라면 뭔가 처연함이 느껴집니다. 가족을 모두 일본으로 보내고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던 화가는 가족을 그리워하여 은박지에 가족과 어린이 그림을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외로움과 그림으로 분출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정욕을 소 그림으로 표출한 것은 아닌지... 화가의 '흰 소'나 '떠받으려는 소' 그림을 보노라면 소의 골격과 고환을 강조한 데서 그런 걸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올레길은 천제연 폭포 위쪽으로 오르는 길로 연결되어 우리는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김덕룡 특보 일행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시간상 나머지 구간을 마저 돌 시간이 없어 내려가신다는 것입니다. 아~~ 여기서 외돌개까지의 올레길 나머지 6구간을 마저 걸어야 하는데, 여기서 발길을 돌려야 하나요? 아쉽지만 일정이 있는데 어떡하겠습니까?
5:16경 천제연 폭포 입구 주차장에서 올레길 6구간 걷기를 아쉬움 속에 마쳤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포구에는 정박해 있는 어선들 뒤로 새섬이 보입니다. 저 새섬에서 다이빙할 때의 기억도 떠오릅니다. 당시 폭풍주의보로 애초 계획한 범섬에는 가지 못하고 새섬에서 물속으로 내려갔는데, 새섬의 물속 절벽을 따라가다가 아치 밑을 지나갔지요. 그런데 아치 밑을 통과하면서 위를 쳐다보니 제가 내뿜은 공기방울이 아치 상단의 둥그런 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머물면서 거울처럼 제 모습을 비추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물속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군요.
그런데 그런 새섬을 새연교로 건너갈 수 있게 만들었네요. 새연교의 중간 교각은 언뜻 보면 두바이의 7성급 호텔 '버즈 알 아랍'을 연상케 하는데, 제주 전통배 '테우'를 주제로 하여 설계한 것이랍니다. 시간이 되면 저 다리로 뛰어서 새섬으로 건너갔다 오고도 싶지만 이 역시 마음뿐입니다.
이제 차를 타고 다시 제주시로 넘어가 어제 아침을 먹었던 식당으로 갑니다. 식당에는 제주시장과 제주 지역구의 국회의원들, 제주도의회 의장 등도 참석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특보에게 명예제주도민증 수여식이 있어 제주 국회의원과 기관장들이 출동했군요.
9:25경 이틀 동안 제주의 물과 바람으로 몸과 마음을 정화한 회원들을 태운 비행기가 제주 밤하늘로 떠오릅니다. 저는 동그란 비행기 창문 너머로 어둠 속에 잠들어가는 제주를 내려다봅니다. 창문 밖으로는 1박 2일 동안 제가 지나간 한라산의 설국(雪國)과 쪽빛 바다를 따라가는 올레길이 어둠의 스크린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갑니다. 이제 비행기는 육지를 향하여 가속페달을 밟는데, 저는 제 다친 다리를 다시 굳건히 세워 제주의 산길과 바닷길을 무사히 걷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서서히 눈을 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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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양변호사님 문화유산 답사는 계속 진행중 이시군요?
기념사진 포즈는 영 어색 한디 어쩐대유 ㅎㅎ
전문가 다워요~~~~~~~
흐흐 저도 어색한 것을 느끼겠는데, 보는 사람들이야 어찌겠시유~~ 사람들이 제발 카메라 들이대면 웃으라는데 잘 웃어지지 않으니...
너무하십니다요. 본업이 아니심에도 이리도 글을 잘 쓰시면 잡문이라도 써서 용돈이라도 벌어쓰는 저같은 사람은 어찌하라구요. ^^ 아무튼 비용도 시간도 들이지 않고 따라서 여행하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