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고있다.
먼
낯선
이국땅에서
목숨을 바치며 지킨 대한민국
우리는
그들을 기억이나 하면서 살아갈까?
글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중공군
3개 사단속에 갇혀버린
미 해병 5연대와 7연대의 전투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우고있다.
통치자
지휘관
유능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의 차이를
뭘까?
사람의 속성이다.
빌
붙어서
뜯어묵는 사람
스스로
자립해서 혼자서 성공하는 사람(요건 하루세끼 걱정없는 가장의 모습이다. 더럽고 추잡스럽게 벌었던 것들이 아닌)
장진호 전투
1950.11.26 ~ 1950.12.13
유엔군 약 3만명과 중공군 9병단 약 12만명의 전투(4배 정도 차이)
미 해병 1사단
상륙
사단장 올리버 P.스미스 소장
해병 5연대 연대장 레이몬드 L. 머레이 중령 : 장진호 서안 유담리 주둔
1대대 존 스티븐슨 소령 : 유담리 역 남쪽 주둔 예비대
2대대 해롤드 로이스 중령 : 유담리에서 서쪽 낭림산맥을 향해 진격중
3대대 로버트 태플릿 중령 : 유담리 역 북족 주둔
해병 7연대 연대장 호머 L. 리첸버그 Jr. 대령
1대대 레이몬드 데이비스 중령 : 보급선 방어
2대대 랜돌프 록우드 중령 : 2개 중대 유담리 동쪽 방어, F중대 보급선 방어
3대대 윌리엄스 해리스 중령 : 5연대 2대대의 양측면 엄호
해병 11연대(포병연대) 칼 영데일 대령
1대대(105mm) 하비 피한 중령 : 5연대 전투단 배속
2대대(105mm) 메릿 애들먼 중령 : 1연대 전투단 배속
3대대(105mm) 프란시스 페리 중령 : 7연대 전투단 배속
4대대(155mm) 윌리엄 맥 레이놀즈 소령 : 1연대-5연대-7연대 전투단에 각 1개 포대씩 배속)
유담리 일대 주둔
해병 5연대와 7연대는 지원부대와 합쳐 약 8200명이 주둔
부사단장 에드워드 크레그 준장이 통합 지휘하다가 아버지 임종으로 27일 오후 미국 텍사스로 출국한 상태
중대단위로 뒤섞여 있어서
장진호 유담리 해병대는 연대전투단(RCT) 체계로 운용
북한 72번 도로를 따라
남쪽 5 KM 지점 터키힐에 7연대 C중대 180명
그 남쪽 7 KM 지점 폭스힐에 7연대 F중대 246명
다시 남쪽 11 KM 하갈우리에 3000명이 주둔(사단 사령부와 1연대 3대대 H중대와 I중대와 포병대)
또
다시 남쪽 18 KM를 내려간 고토리에 해병 1500여명(해병 1연대 2대대와 3대대 G중대와 전차대대 D중대)
황초령을 넘어 남쪽 진흥리에 해병 1600여명(해병 1연대 1대대)
미군은
비전투병력도 싸웠다.
일화
이때의 상황이다.
모든 해병은 소총수라는 개념하에 보병교육
장진호 동쪽
미 7사단 31연대전투단(RCT) 연대장 앨런 D. 맥클린 대령
31연대 3대대 대대장 윌리엄 라이디 중령
32연대 1대대 대대장 돈 페이스 중령
57야전포병대대 레이 엠브리 중령(-1개 포대)
15대공포대대 D중대(57야전포병 대대에 배속)
전멸
어리석고
무능한 지휘관들
중공군
팽덕회
송시륜의 제9병단(4개 사단 X 3개 연대 X 4개 대대 = 48개 보병대대 배속) : 약 15만명
20군(58사-59사-60사089사)
27군(79사-80사-81사-94사)
26군(76사-77사-78사-88사)
1950.11.27 중공군의 공격개시
20군 소속 4개 사단
27군 소속 3개 사단
총 7개 사단이 장진호 전투에 돌입
1950.11.28 쑹쓰륜의 상황 판단에 따라 27군 예비였던 94 사단이 유담리 지구로 투입
1950.12.01 쑹스룬이 26군 76사단과 77사단과 88사단 전부를 투입
후창군 압록강 도하지점을 수비하던 78사단(26군 선견대)도 미군의 역습이 사라지면서 2개 연대를 전선으로 동원)
1950.12.06 급속행군으로 전선에 도착한 76사단과 77사단은 저녁부터 하갈우리 포위 섬멸 작전에 투입
중국측
장진호 전역에 9병단 15만 병력이 참가
이 가운데
비전투부대와 26군중에서 제때 참전을 하지 못한 78사단과 88사단을 제외하고
10개 사단 약 12만명이 실제 전투에 투입된 것으로 계산
쫌전에
마눌과 아들이 산책후
따뜻한
커피 한잔을 두고 갔다.
삶
행복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절대
주어지지 않는다.
겨울
혹한
태백산맥
개마고원
지금 쳐다보며 진격작전을 얘기하면 한마디로 미친 짓이라고 할 수 있다.
더글라스 맥아더
미국의 대통령도 그의 군사적 권위에 반대 의견을 낼 수 없었던 상황으로 보면 답답할 따름이다.
수동리 전투
포로심문
동경사령부에 보고 : 맥아더의 무시
1950.10.30
선두부대인 미 해병7연대 정찰대가 수동리에 도착
한국군 3사단 26연대가 주둔중(11.02 미 해병 7연대와 교대하기로 예정)
1950.11.02
미 해병 7연대가 수동리에 도착하자
중공군 124사단이 공격
미친 공격
전멸
미 해병 1개 연대만 투입했는데도 중공군 124사단은 괴멸(추후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의 중공군 대학살 버전)
미 해병대
1950.11.14 하갈우리에 도착
아무도 몰랐다.
겨울
엄동설한
북풍한설
태백산맥 개마고원의 혹독한 추위를
더글라스 맥아더의 오판
대통령 훈령
중공군이 개입할지 모르니 원산 이북으로 북진하지 마라.
개무시
중공군은 절대 참전하지 않는다.
진격
중공군 개입 확인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낸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무리한 공격명령
총공격
하루만에 대패하여 총퇴각
중공군 1차 대공세 : 미 1기병사단 8연대가 3대대만 바리고 후퇴(미군 600명이 깨끗하게 전멸)
중공군 2차 공세
1950.11.25 이천우의 중공군 13병단 18만병이 서부전선에서 공격 시작
26일 오후부터
한국군 2군단의 전선이 붕괴
11.27
도쿄의 더글라스 맥아더는 중공군을 과소평가하고 동부전선에서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
충분하게 이해는 된다.
그가
도쿄에서 뭔 짓을 하며 전쟁을 무시했는지 나는 상상이 간다.
1950.11.27
중공군은 미 해병 1사단을
진흥리에서 고토리와 하갈우리와 유담리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도록 유도했다.
상식적으로 쳐다보면 전멸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완벽한 철수작전을 성공시킨다.
미 해병1사단
사단장 올리버 P. 스미스 소장
미 해병 7연대가 유담리 일대를 방어
미 해병 5연대가 선봉으로 낭림산맥을 넘어 서진
미 해병 1연대는 유담리까지 오지 못하고 대대별로 여기저기에 흩어지고
이때
미 해병 5연대와 7연대는
중공군이 쳐들어 온다는 것을 확신하고 꽁꽁 얼어있는 땅을 파서(전동착암기와 폭파) 강력한 진지를 구축(신의 한수다)
부대편성은 다 방어대형으로
1950.11.27 밤 10시 부터 동부전선 중공군의 2차 공세
유담리
북쪽과 동쪽을 방어하던 3개 중대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1403고지 방어
7연대 H중대가 가장 먼저 큰 타격을 입고 후퇴
1282고지 방어
7연대 E중대는 176명중 120명이 사상 당해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5연대 1대대 지원으로 방어는 성공
1240고지 방어
D중대도 고지를 빼아긴 후 다른 중대가 재탈환 했지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전투가 불능상태
결국
유담리의 해병대는 완벽하게 중공군들에게 포위되었다.
유담리 남쪽과 하갈우리 사이의 보급로를 지키던
터키힐
7연대 C중대는 28일 새벽 2시 30분에 중공군 58사단의 공격으로 사상자 60명이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고
그 남쪽에 위치한
폭스힐
F중대는 무려 81명이 사상당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날 밤
하갈우리와 고토리는 조용했다.
다만
하갈우리 포병대 H포대만 유담리 지원을 위해 포들이 불을 뿜었을 뿐이다.
이렇게
장진호 서쪽의 미 해병대 5연대와 7연대는 완벽하게 고립된다.
1950.11.28 중공군에게 포위
밤사이에
유담리 동북쪽을 지키던
미 해병대 7연대 D중대와 E중대와 H중대가 사실상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고
유담리 남쪽의 보급로를 지키던
미 해병대 7연대 C중대와 F중대는 고립되었다.
미 해병 5연대와 7연대 연대장은 상의하여 더 이상 서진을 중단하고 방어진지를 축소하기로 하였다.
이때
대한민국 전투경찰 화랑소대의 영웅들이 있었는데
쓸개빠진 것들이
즉
왜구
왜늠
출신들이 지들만의 전쟁놀이로 훈포장을 다 가져 갔으니 볼때마다 욕이 나온다.
눈이
침침해서
잠시
글을 멈추고
산책을 하면서 집으로 가서 할 예정이다.
세이노
책
읽으면
눈이
더 침침할텐데 걱정이다.
세상에
통치자나
지휘관을 향해
"NO"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참
어렵다.
그렇게 하면
조직에서 탈락하는 것만 남을텐데 애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 어렵다.
당당하게
떳떳하게
대한민국 내부고발자는 대부분 조직의 탄압을 버티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당신들은 우리 중생들을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묻고 싶지만 답이 없어 질문을 책 귀퉁이 옆에 붙여 놓으니 나중에 꼭 알려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구름아
바람아
니들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미군
더글라스 맥아더가 중공군을 우습게 봤던 증거
10군단
딸랑이 군단장
원산 - 수동 - 장진호 - 신흥군 - 풍산군 - 혜산군 - 백암군 -청진시
480 KM 작전구역 담당
저런
미친 짓을 하는데도
선견지명을 가진 지휘관이 있었으니
미 해병 1사단장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소장이다.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라."
중공군의 포위
유담리와 하갈우리까지 보급로를 보호하기 위해 유담리 남쪽 5 KM 덕동고개 북쪽 터키힐에 C중대
12 KM 지점 덕동고개 남쪽 폭스힐에 F중대가 주둔중 이었다.
이들은
원형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밤사이에 포위당한 채 공격을 받았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내린 7연대의 지시는A와 B중대는 유담리에서 터키힐로 싸우면서 내려가고
F중대는 폭스힐에서 덕동고개를 지나 터키힐로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F중대 윌리엄 바버 대위는 적의 강력한 저항과 현 진지 위치, 중대 내 수많은 사상자 때문에 7 KM를 북진하는 것은
불가능하여 현 진지 잔류를 요청.
할 수 없어
7연대장 호머 리첸버그 대령은 아직 유담리까지 오지 못해 하갈우리에 있던 2대대장 랜돌프 록우드 중령에게
북쪽으로 이동하여 F중대와 합류하라고 지시
그때까지
랜돌프 록우드 중령은 자신의 대대 소속 D중대와 E중대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그리고 F중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 채 명령에 따랐다.
하지만
폭스힐까지 이동은 불가능하여 다시 하갈우리로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소장은 새로운 지시를 하달
5연대는
유담리를 방어하고
7연대는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통하는 도로를 개통시켜라고 명령했다.
나중에
이 두연대는 전우애가 뭔지 보여주면서 하갈우리까지 철수를 하는데 찡한모습이다.
하갈우리
사단사령부 방어
나중에
위에
하나 빠진 것 하고 올리는 걸로(어리석고 무능한 지휘관의 판단과 결정으로 수많은 앳된 병사들이 허무하게 죽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