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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돌과 비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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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문학관* 스크랩 실크로드 외 / 문정
동산 추천 0 조회 6 18.09.13 11: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실크로드 / 문정 (1961~2013) 

 

 

서역나라에서 온 당신과 이 땅의 나

전라도 무진장 산협 어둠에 갇혀서

별들에게 가는 길도 막혀서

 

나는 당신에게 동쪽어깨를 기대어가고

당신은 나에게 서쪽어깨를 기대어오고

더하여 조금 큰 나는 어깨마루로 당신을 받쳐 올려가고

더하여 조금 작은 당신은 머리를 어깨마루에 기대어오고

 

마치 강심과 천상이 만난 물낯 같아서

정말로 높이도 깊이도 모르는 거울 같아서

높은 강심에서 천상으로 깊은 천상에서 강심으로

띠처럼 밀려가고 밀려오는 유성우

 

까마득한 허방 길이어서

하늘이 강물이 한소끔 몸을 부르르 떨며 흐른 듯

당신은 동쪽어깨를 길게 뻗어서 돌아오고

나는 서쪽어깨를 길게 뻗어 돌아가서

 

외로운 달의 달이 되어버린 지구(地球)를 감싸 안고

손바닥 그늘골들로

짜나가는 한 필 아침비단,

이제는 전라도 무진장 산협 햇빛에 갇혀서



안개 / 문정 (1961~2013) 

 

 

삶보다 시가 아득해지는 밤

잠들지 못하고

어두운 하늘에다가

별을 달아 보기도 하다가

달아놓고 닦아 보기도 하다가

달을 덜컹덜컹 굴려 보기도 하다가

이 공허한 그림은

예술이 아니라고

새벽까지 아득하게 주저앉다 보면

이 세상 다 작파해 버리고

백지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백치처럼,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 많다



개기월식 / 문정 (1961~2013) 

 

 

두 마음 포개면 노을이 붉어진다는데


여름과 가을이 손잡고 있던 화단에 석류 붉어졌다


달은 지구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웅크려 턱 괴고 앉아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며칠 굶고 홀쭉해진 날에는

고개 들 수 없어 해와 별 다 지워버렸다


어느 날부터는 사그라지지 못해 창백했다

가지 않는 달력을 둘둘 말아 공처럼 굴렸다


외눈박이 지구의 사랑은 태양에게로만 향했다

차오른 달을 지구는 알지 못하고

달은 길게 드리워진 지구의 그늘에 몸이 잠긴다


석 달도 아닌 십 년 만에

잠시 달의 얼굴로 설레는 홍조가 지나갔다



떠도는 고향 / 문정 (1961~2013)



내가 나를 여러 번 부인해도

이제 나는 이 나라의 많고 많은 도시의 붙박이 시민

세밑 남들처럼 짬을 내어 도착한

남해바다 소록도 건너가는 녹동항

발가락 손가락 잘린 그날 그들의 이주는 몰라도

바다는 깊고 물살은 빨라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칠순을 넘긴 여인의 생선가게에 들려 생선을 흥정한다

젊은이의 목소리가 동백이파리 같다는 덕담에

여기가 고향이냐고 나는 묻고

1시간 30분 거리 순천 근교에서 출퇴근을 한다 하며

고향이 어디냐 되물어 온다

내 오래 뼈가 굳은 도회를 말하려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가난만

낮은 봉분으로 남겨준 저 내륙 무진장을 얘기한다

여인은 주름살을 부챗살처럼 펼치며

젊은 시절 많은 아이들을 기르느라

생선 다라이를 이고 그곳에도 갔었노라고

사람들이 다 바다처럼 속과 겉이 똑같이 맑더라고

먼 이방의 장사치에게 밥도 잠자리도

듬뿍듬뿍 마련해줬다는

가난처럼 더딘 새벽에는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며

이불 밑으로 손바닥을 밀어넣고

잠자리는 어떠했느냐고 물어오는 안주인의 말씨 또한 따뜻하여

같은 나라 하늘에 뜬 별들인데도

그곳 별들은 너무나 크고 높아 별들이 주먹만 했다는

그 말에 문득 나의 어린 내륙이

몇 시절 먼지를 털고 일어나 걸어오는 것이어서

다음에 오면 꼭 들리겠노라고

날도 저물었는데 내 차로 같이 가자하자

가게 앞 2.5톤 트럭을 가리키며

지금은 고무다라이 대신 트럭에 물건을 싣고

이 고을 저 고을 생선가게에 어물을 대주기도 한다는

이 칠순 노구의 이야기 속에서

나의 내륙 그곳에 그렇게 많던 눈발이 이 남녘 항구에

무진장 철없이 내리고 있었다




**************************************


문정 시인 (1961~2013) 


1961년 전북 진안군 백운면 출생
전북대 국문과 졸업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주 우석고 국어교사

2012년 제1회 작가의 눈 작품상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인 문정을 떠올리는 밤


전북작가회의(회장 복효근), 최명희문학관(관장 장성수),

우석고등학교(교장 이세재) 등이 18일 오후 6시 30분

최명희문학관에서 ‘시인 문정을 떠올리는 밤’을 갖는다.

시인을 기억하는 여럿이 뜻을 모아 시집 <하모니카 부는 오빠>

발간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

이날 출판기념회는 시인의 친구인 임영섭 씨(남성여고 교사)의

발제를 시작으로 시집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친구들로부터

들어본다. 또, 전북 지역 시인들이 시인의 시를 낭송하고,

시인이 생전 블로그를 통해 좋아하는 시라고 밝힌 오창렬,

도혜숙 시인의 시 낭송도 이어진다.

시인의 목소리가 담긴 영상물 상영을 통해 시인의 자취도

살펴보며, 화가 서완호 씨가 그린 시인의 초상화를 유족에게

선물할 예정이다.


<하모니카 부는 오빠>는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첫 시집을 준비하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시인 문정

(본명 문정희 1961-2013)의 친구들이 그의 시편들을 모아

시집으로, '하모니카 부는 오빠'를 표제작으로 마지막 작품인

'그림자 치료'까지 모두 84편의 시를 담았다.

우석대 송준호 교수는 ‘문정 시인이 슬픔과 절망의 현실

속에서 최종적으로 의지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네 힘든 생을

끌고 나갈 생명력이었을 것'이다고 말하고, 안도현 시인은

‘이 시집은 감정이 여리고 섬세한 시인 문정을 꼭 빼닮았다.

세상을 보는 눈은 연민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목소리는

욕심 없이 차분하고, 그가 매만진 언어는 숨소리가 고르다'며

시인을 그리고 있다.


/ 이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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