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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과 반촌
〈반궁도〉《태학계첩》1747년
성균관친림강론도(1748년~1770년)
문묘향사배열도
한양도성도(18세기)
성균관(成均館)은 한국의 옛 대학(大學)으로 그 명칭은 고려 충선왕 때 성균관으로 개명한 데서 비롯하였다. 공민왕 때는 국자감(國子監)이라 부르다가 곧 성균관으로 복귀되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조선 일대를 걸쳐 한국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고려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개경에 세워진 국자감이 고려 충렬왕 24년(1298년) 성균감(成均監)으로 바뀌었다가 충선왕 1308년에 즉위하면서 성균관으로 바뀌었다. 공민왕 5년(1356년)에는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복구되었다.
공민왕 초까지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의 기술학부도 성균관에서 교육하였으나, 그때부터 따로 분리하여 성균관은 유학 교육기관만 전담하는 기관이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성균관이 한양과 개성에 한 곳씩 두 개가 존립하였다. 지사와 동지사가 있으나 실질적으로 정삼품 대사성이 최고 책임자이다. 태조 4년(1395년)에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숭교방(崇敎坊) 부근(현재의 명륜동)에 터를 잡고 성균관을 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완공하였다.
'성균'은 주례의 대사악에 나오는 용어로, 음악을 조율하는 것과 같이 어그러짐을 바로잡고, 지나치고 모자라는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고구려 때부터 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을 가리키던 이름인 태학(太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우선적으로 성균관 입학 기회가 주어졌고, 그 외에 선발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를 통해 입학할 수 있었다. 정원은 200명이었으나 유동적이었다. 또한 성균관 유생을 학생 또는 성균관 학생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대개 정원은 200명으로 여기에 미달하면 사학생도·유음적자(有蔭嫡子)·소과초시 입격자(小科初試入格者)·조관(朝官) 등에서 보충하였다. 학생은 기숙사 '재(齋)'에 반드시 머물며 학령(學令)의 교칙을 엄수해야 한다. 그들의 자치활동으로 재회(齋會)라는 집회가 있고 장의(掌議)·색장(色掌) 등의 회장과 간부진을 둔다. 장의는 재회를 절대적으로 선도하며 학령을 어긴 유생을 문책하여 출재(黜齋:퇴학)할 권한을 가졌다. 그리고 사문유사(斯文有事)나 토역(討逆)이 있을 때 장의의 발론으로 연명(聯命) 상소한다. 이를 유소(儒疏)라 하며 이 모임을 대의사(大議事)라 한다. 유소시에는 사학에서 호응하며 궐문 앞에 연좌하여 왕의 비답(批答)을 기다린다. 유소가 여의치 못할 때는 식사를 거절하는 시위로써 권당(捲堂)을 행하며 나아가 성균관을 비워버리는 공관(空館)이라는 동맹 휴학에 들어간다. 이것은 식자층의 여론을 환기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 밖에 유생은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1398년(태조 7) 조선 태조는 숭교방(崇敎坊 : 명륜동)에 성균관 건물을 준공하고 고려 제도대로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재(齋)를 두었다. 태종은 땅과 노비를 지급하고 친히 문묘에서 제사지내고 왕세자의 입학을 명령하니 그 후 이것은 상례가 되었다. 여러 왕을 거치는 동안 경기도 연해의 섬, 전라남도 해안의 어장과 많은 땅이 부속되었다. 규모는 성종 때에 완성되었는데,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 : 도서 창고)도 이때 증설되었고 현종 때 비천당(丕闡堂 : 과거장), 숙종 때 계성당(啓聖堂)이 세워졌다.
1887년(고종 24) 성균관 교육의 강화를 위하여 성균관에 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다. 1895년(고종 32) 성균관에 경학과(經學科)가 신설되고 역사·지리·세계사·세계지리·수학 등을 교육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국권이 침탈된 이후 성균관의 교육은 중단되었고, 경학원으로 개칭되어 경전을 가르치는 사설 전문학원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전국 유림들에 의한 성균관 교육기능의 회복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1930년에 경학원 부설로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學院)으로 승격되는 부령(府令)이 공포되었으며, 1942년에 재단법인 명륜전문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어 신입생을 뽑고 교육에 임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해 태평양전쟁의 영향으로 폐교 조치되고 말았다. 1945년 해방 이후 군정법령 제15호 제국대학명칭변경에 의해 경학원은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하였고, 군정법령 제6호에 의해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했다.
1946년 유림의 대표 김창숙 선생의 주도하에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고 전국 향교의 재산을 모아 성균관대학을 설립했다. 이후 재단분규가 있었고, 이로 인해 1963년에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교와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분리되었다. 이후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이 1965년부터 1979년까지 성균관대 재단이사장을 맡아 대학을 지원했고, 1996년 삼성그룹이 다시 재단에 참여해 오늘에 이르렀다. 성균관은 유교 및 전통문화 전문 교육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관원으로는 총책임자로 지관사(知館事 : 홍문관 대제학이 겸임)를 두고 그 밑에 동지관사(同知館事 : 겸직) 1명, 전임관원으로 대사성(大司成 : 정3품) 1명, 제주(祭酒 : 정3품) 2명, 사성(司成 : 종3품) 1명, 사예(司藝 : 정4품) 2명, 사업(司業 : 정4품) 1명, 직강(直講 : 정5품) 4명, 전적(田籍 : 정6품) 13명, 박사(博士 : 정7품) 3명, 학정(學正 : 정8품) 3명, 학록(學錄 : 정9품) 3명, 학유(學諭 : 종9품) 3명이 있었다. 이 중 박사 이하는 정원 외에 봉상시(奉常寺)의 관원과 사학(四學)의 훈도(訓導)가 겸직한 것이 있었다. 입학 유생의 정원은 200명으로 문과의 소과(생원시,진사시)에 합격한 생원과 진삭 입학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부족할 경우에는 동,서,남,중학의 사학의 생도나 공신 자제 가운데서 일정한 시험을 거쳐 선발한 인원으로 보충하기도 하였다. 뒤에 경비 부족으로 영조 때는 정원을 120명, 조선 말기에는 100명으로 한 일이 있다.
조선시대의 최고학부인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적 행동으로 국정을 비판하거나 왕에게 상소한 운동. 1398년 유학 교육기관으로 개설되어 성종때에 그 체제의 탄생을 본 성균관은 역대(歷代) 제왕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제학(大提學) 이하의 석학들이 깊이 관계하고, 뒤에 고관·대학자가 거의 모두 여기서 나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재학 중 인 유생들은 정주학(程朱學)의 입장에서 국정에 대한 비판자 역할을 하였고, 이교(異敎)를 사도(邪道)라 하여 배척하는 데 앞장섰으며, 국란(國亂)이 있을 때는 충의지심에서 집단 저항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당파싸움에 이용되기도 하였고, 보수적인 편견으로 새로운 종교·사상의 등장을 봉쇄하는 반동적 역할도 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을 간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1.1519년 기묘사화 때 성균관 유생들은 조광조의 사면을 항소(抗訴)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1611년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를 논박하자 성균관 유생들은 정인홍을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하였다.
3.1893년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하자 성균관 유생들은 동학 탄압을 상소하였고, 동학교도들은 이에 대항하여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訴)·보은대시위를 하게 되었다.
4.1902년 성균관 유생 신채호(申采浩) 등은 이하영(李夏榮) 등의 매국음모를 규탄하였다.
대성전(大成殿)
성균관 대성전(成均館 大成殿)은 조선 시대에 유학을 가르치던 최고의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서 성인들을 배향하기 위하여 설정한 공간으로,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와 그 제자들을 비롯한 성인(聖人), 현인(賢人)들의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있다.
성균관 대성전이 처음으로 조성된 것은 고려 때로, 1304년(충렬왕 30년)에 성균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국자감(國子監) 안에 건립되었다. 이때 충렬왕(忠烈王, 1236∼1308, 재위 1274∼1308)은 공자 등의 초상화 및 제기(祭器)와 악기(樂器) 및 서책들을 원(元)나라에서 구해오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에도 이어져서 보다 체계화되었다.
조선 시대 성균관은 유교의 성인이나 현인에 대한 제향을 하는 동시에 유학을 가르쳐서 조선의 상황에 맞는 고급 관리를 양성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그 가운데 성균관 대성전은 전자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처음 대성전이 조성된 것은 1398년(태조 7년)이었으며, 당시의 이름은 대성전(大聖殿)이었다. 그러나 1400년(정종 2년)에 소실(燒失)되는 바람에 1407년(태종 7년)에 다시 지었고, 1452년(문종 2년) 이름도 대성전(大成殿)으로 바꾸었다. 그런 가운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하면서 대성전은 다시 한 번 소실되었고, 그리하여 전쟁이 끝난 후 1602년(선조 35년)부터 1605년(선조 38년) 사이에 성균관 대성전과 주요 부속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이때 완성된 성균관 대성전의 규모는 앞면 5칸과 옆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건물의 옆면과 뒷면 벽 아랫부분에 돌아가며 낮게 벽담을 쌓았는데, 이는 중국 건축 기법을 느끼게 한다.
제사 공간인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를 주로 하여 증자(曾子, 기원전 506∼기원전 436),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 안자(顔子, 기원전 521∼490), 자사(子思, 기원전 492∼431) 등 4성(四聖)을 배향하였으며, 다시 10철(哲)과 6현(賢)을 종향(從享)하였다. 그리고 동무⋅서무에는 10철을 제외한 공자의 72제자를 비롯하여, 한(漢)⋅당(唐)⋅송(宋)⋅원대(元代)의 현인 및 우리나라의 18명현 등 총 112명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 전국 유림 대회의 결의로 우리나라 명현의 위패는 대성전으로 옮겨 모시고 나머지 94인의 위패는 땅에 묻었다.
한편 문묘에 모신 공자를 비롯한 여러 스승에게 드리는 제례 의식인 석전제(釋奠祭)는 매년 2월과 8월에 거행하였다. 성균관의 석전제는 국가적인 행사였기 때문에 왕을 비롯하여 대신들도 참여하였으며, 왕이 참석하는 경우에는 성균관에서는 성인을 뵙고 치르는 시험이라는 뜻을 가진 알성시(謁聖試)를 특별히 시행하기도 하였다. 1963년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었다.
명륜당(明倫堂)
성균관 명륜당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문묘)에서 교육을 담당하던 공간의 중심이 되는 강당 건물이다. 성균관은 서원의 건물배치에서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앞에, 교육공간인 강당건물을 뒷편에 배치하는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는 데 이는 평지에 터를 잡았기때문에 위상이 높은 대성전을 앞쪽에 두었기때문이다. 지방 향교도 성균관의 건물배치와 격식을 따랐는데, 대부분 경사진 언덕에 터를 잡았기때문에 대성전이 뒷편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으며, 평지에 자리잡은 큰 규모의 향교인 전주향교, 나주향교, 경주향교 등이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 성균관에는 전국의 진사, 생원 중 200명 한도로 엄격하게 선발하여 기숙사인 동.서재에 머물고 공부하였다고 한다.
명륜당은 조선을 건국한 직후인 태조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처음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39년(1606)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대에 경북궁 중건과 함께 크게 수리하였다. 건물은 중앙에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강당건물과 양쪽에 선생들이 머무는 공간인 협실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앞쪽으로 넓을 월대가 있다. 협실은 앞면 3칸반, 옆면 2칸의 온돌방과 마루로 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지붕 추녀마루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잡상들이 있어서, 국가적을 아주 중요한 곳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균관 유생들은 아침에 명륜당 월대 아래 마당에서 예를 올리고 강당에 올라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강학을 하였다고 한다. 한편 명륜당 월대 앞 마당에서는 과거시험을 치루는 과거장으로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명륜당은 성균관의 상징적인 건물로 주변 동네 이름도 명륜동이라 불린다.
이 건물들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의 중심시설이다. 대성전, 동무와 서무, 삼문은 공자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으로 문묘라 하고, 명륜당은 교육 공간의 중심 건물로서 동재 및 서재 등과 함께 성균관을 구성한다. 2398년(태조7)에 이 건물들을 세웠으나, 1606년(선조39)에 다시 지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896년(고종6)에 이를 크게 수리한 것이다. 대성전은 제사 공간의 중심 건물이다. 그 내부의 중앙과 좌우에는 유학자들의 위패를 순서대로 모셨다. 그리고 대성전에 모시지 못한 위패는 동무와 서무에 모셨다. 삼문은 이곳들로 드나드는 출입구인데, 그 가운데 문은 신령이 지나는 곳을 상징한다. 제사 공간의 뒤쪽에 위치한 교육 공간의 중앙에 명륜당이 있고,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다. 명륜당은 가운데 큰 건물과 좌우의 작은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가운데 건물은 모두 마루로 되어 있고 좌의 건물에는 선생들이 거처할 수 있는 온돌방이 있다.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 교육 기관의 제도와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특히 그 건축물의 규모와 격식은 지방 향교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대성전이 앞에, 명륜당이 뒤에 있는 구조는 일반 향교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서울 문묘의 특징이다.
성균관의 강의실이라고 할 수 있는 명륜당이다. 중앙에 강당이 있고, 좌우로 협실을 두고 있습니다. 전면에는 월대가 돌출되어 있는 구조로 궁궐 전각과 비슷한 구조이다.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건립되었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重建)하였다. 대성전 뒤에 있는 강당으로서 중앙에 강당, 좌우에 협실(夾室)을 두었는데, 강당은 정면 3간(間) 측면 3간(間)이고, 좌우 협실은 각각 정면 3간반(間半) 측면 2간(間)이다. 장대석 쌓기의 기단을 쌓고 기단 전면에 월대(月臺)를 돌출시키고, 월대 앞에 석계(石階)를 놓았다. 기단 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이익공으로 결구하였다. 가구는 오량(五樑)으로 전후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동자주 없이 운두가 높은 중도리를 양 측벽에 선 2개의 고주와 대량 위에 걸치고, 종보를 이들 앞 뒤 중도리에 걸었다. 종보에는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겹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명륜당 양측 동익헌(東翼軒)과 서익헌(西翼軒) 두 협실은 명륜당 벽으로부터 정면 2간반(間半)과 측면 2간(間)은 대청이고, 나머지 정면 1간(間) 측면 2간(間)은 온돌방이다. 이들 두 협실은 장대석 쌓기의 기단 위에 다듬은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초익공으로 결구하였다. 지붕은 겹처마로 명륜당 쪽은 맞배지붕이나 두 끝단에는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한편, 지방의 향교에는 대부분 명륜당이 대성전 앞에 위치하고 있으나, 성균관은 명륜당이 대성전의 뒤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을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고 한다. 현재, 전묘후학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향교는 성균관 이외에 전주향교·나주향교·경주향교 등이다. 현재 명륜당의 현판은 앞·뒤로 두 개가 있는데, 앞에 있는 현판은 1606년 명(明)나라 사신(使臣)으로 온 학사(學士)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고, 뒤 벽위에 있는 것은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명륜당은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수행하던 강학(講學) 장소로서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성균관을 비롯하여 전국 향교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진사(進士) 혹은 생원(生員) 중에서 200명을 한도로 엄정하게 선발하여 오늘날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서재(東·西齋)에 기숙하게 하고,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선비정신과 인격을 연마하여 국가발전을 위한 지도자의 덕목들을 익히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매일 새벽에 북이 울리면 동·서재에 기숙하는 학생들은 명륜당 아래에 늘어서서 한 번 읍(揖)한 뒤 당(堂)에 올라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강학을 하였다. 이 밖에도 명륜당은 유생(儒生)들의 시독(試讀)과 소과(小科)·대과(大科)를 행하는 과거장(科擧場)으로도 활용되었다.
반촌(泮村)
반촌(泮村)은 조선 시대에 한양 성균관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주로 성균관 노비로 알려진 반민(泮民)이 살며, 조선 후기에 한양의 도살 면허를 독점한, 일명 “서울의 게토(ghetto)”라고도 일컬어진다.
천자의 나라에 세운 교육 기관은 벽옹(辟雍)이라 불렀으며, 제후의 나라에 세운 교육 기관은 반궁(泮宮)이라 불렀다. 벽옹과 반궁의 주위로는 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벽옹은 완전히 둘러싸서 거의 섬처럼 되었고, 반궁은 반만 둘러쌌고, 이때 반궁을 두른 물을 반수(泮水)라고 불렀다.
조선은 형식상 명나라와 청나라의 제후국이었으므로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반궁이라 불렀다. 또한 성균관 주위에 있는 마을은 반촌이라 불렀고, 반촌에 사는 사람은 반민 또는 반인(泮人)이라 불렀다.
반촌이라는 말이 언제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다만 《고려사》에는 나오지 않고, 《선조실록》 39년(1606년) 6월 15일 기사에서 처음 나온다.
고려 말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자기 집안의 노비 1백여 명을 희사하여 학교 를 부흥할 것을 도운 데서 비롯한다. 조선 시대에 한양으로 천도하여 국학(國學) 을 옮기자, 노비 자손이 수천 명이 되어 반수를 둘러싸고 집을 짓고 살아 동리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곳을 반촌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곳 사람들은 반민 또는 반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뒤 반민은 스스로를 안향이 희사한 노비의 후손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반촌은 기본적으로 반민이 사는 마을이다. 반민이 모두 안향이 희사한 노비의 후손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조선 말까지 그들은 물론 다른 사람도 그렇게 믿었다고 한다.
둘째로 성균관 유생의 하숙촌이다. 성균관 유생은 원칙적으로 성균관에 딸린 재(齋) 에서 먹고 자야 했다. 그러나 성균관에 숙식할 곳이 모자라면 어쩔 수 없이 성균관 밖 반촌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성균관의 식당 정원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균관의 규칙이 너무 딱딱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울러 과거 때 시험을 치러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주인을 잡아 머무르는 여관촌 역할도 하였다.
셋째로 성균관에서는 유학 경전이 아닌 다른 사항, 예컨대 천주교 경전 등에 대한 담론은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일종의 서클 활동 장소로서 반촌이 성균관 유생에게 유용한 곳이었다. 반촌과 관련한 사건으로 정약용의 천주교 학습 사건이 있다.
반민은 기본적으로 안향이 희사한 노비가 하던 역할, 곧 성균관에서 잡역을 맡는 역할을 하였다. 반촌 남자가 성균관 소속 계집종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은 성균관의 직동 곧 재지기가 되었다. 재지기는 재의 각 방에 딸린 심부름꾼 사내아이를 가리킨다. 재지기가 크면 수복(守僕)이 되어 성균관 내 제향과 관련한 육체 노동을 맡는다. 반촌 남자가 성균관 밖의 계집종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은 성균관 서리가 되었다. 이처럼 반민의 사회적 지위는 대단히 낮았다.
반촌에서 반민이 소를 도살하게 된 기원도 명확하지 않다. 《중종실록》 7년 10월 30일 기사에서 성균관 유생에게 쇠고기를 반찬으로 제공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7세기 말 《숙종실록》 24년 1월 24일 기사에서 반인의 도살을 금지할 것을 청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성균관 유생에게 쇠고기를 반찬으로 내는 관습이 있었고, 그에 따라 반촌민에게, 그들이 백정이 아님에도, 소의 도살을 허락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또한 조선 후기로 가면서 한양의 도살업을 반촌에서 독점하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한편 반촌은 그들만의 별천지였다. 《매일신보》 1916년 3월 11일부터 3월 26일까지 연재한 〈경성행각〉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반인은 “소의 도살을 생업으로 삼는 자를 칭하는 일종의 대명사”라고 하였다. 또한 “옛날에는 다른 동 사람으로서 이 동에 들어올 수도 없었으며, 이 동 사람이 다른 동으로 이사 가서 사는 일도 없어서, 일개 별천지를 형성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영조실록》 19년 11월 6일 기사에서는 외인의 입주가 불허된 반촌을 재상의 아들이 점거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반촌에는 조선 시대에 금했던 여러 일, 곧 금란(禁亂)을 범하더라도 반촌에 들어가 조사할 수 없었다. 금란이란 조선 왕조 시대에 단속 대상으로 삼았던 소나무 벌채 금지, 임의 도살 금지, 양조 금지 인데, 이것을 범한 범인이 반촌에 숨어 버리면 추적이 불가능했다.
소의 도살에 종사했고, 다른 곳의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며, 치외법권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던 반촌은 그들만의 독특한 풍속을 유지하며 살게 된다. 또한 윤기(尹愭)의 〈반궁잡영〉(泮宮雜詠)이라는 한시에서 말씨가 서울 사람과 다르고, 사물에 붙이는 이름이 또한 서울 사람과 달랐다고 밝히고 있다.
성균관이 무너지자 반촌도 해체되었으나 반인은 예전처럼 도살업에 종사하였다. 그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세운 학교가 사립 숭정학교였으며, 쇠고기 판매 금액 일부를 학교 운영비로 내놓았으며, 지방에 이주하여 살더라도 학교 재정을 위한 헌금을 우편으로 부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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