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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학,인문학 스크랩 고려시대의 동아시아 세계 - 태조왕건, 왕안석의 신법, 거란과 여진족
카페지기 추천 0 조회 75 14.01.11 23: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려시대의 동아시아 세계                         이길상

가. 고려의 성립

 

(1) 통일신라의 붕괴

 

경주시가지에서 벗어나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보면 현재의 경주시 서악동의 도로 변 산 자락에 일렬로 늘어선 일군(一群)의 무덤이 나타나는데, 안내판에 태종 무열왕릉(武烈王陵)이라고 적혀 있다.

 

지금은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어(면적 14,165 m2) 보호되고 있고, 수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명소가 되었지만, 이 능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을 지울 수 없는 사실들이 있다.

 

첫째, 경내에 있는 비각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의 비신(碑身)을 세웠던 거북형의 받침돌(귀부:龜趺)과 비신 위에 지붕처럼 덮었던 교룡(蛟龍)을 새긴 이수( 이首)만 남아 있고 주인공의 내력이 적혀 있어야 할 비신은 없다.

 

다만 이수의 전면 중앙부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각자(刻字)가 있어서 이 비석의 주인과 함께, 무덤의 주인도 무열왕이 틀림 없다고 단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뒤에 일렬로 늘어선 몇 기의 무덤이 있는데 그것이 누구의 무덤인지는 아직도 밝히지 못하고 있고, 비신이 언제 어떤 이유로 없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무열왕릉 앞은 지금은 도로가 나 있고, 그 도로 건너편에 작은 무덤 하나가 있는데 최근에 와서 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의 묘(墓)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무열왕릉 뒤로 늘어서 있는 무덤은 무열왕의 직계조상들의 무덤이 아닐까?

 

서악동에는 김유신, 설총, 최치원을 향사하던 서악서원이 있었는데, 임진난때(1592-98) 불탔던 것을, 효종 2년(1651)에 이 지방 유림들이 재건하여,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전국적으로 예외적으로 인정된 47개 중 하나가 되어 보전되었다.

 

1931년 12월 이 서원의 영귀루(詠歸樓)를 보수할 때 북쪽 축대석(築臺石)으로 쌓아 올린 돌 무지 가운데 작은 비석 하나가 발견되었다. 원비(原碑)의 절반 이상이 결손되어 훼손이 심하고, 한쪽 면에 새겨진 약 4백자의 비문은 해서(楷書)로 음각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어려우나, 祖文興大王....公爲副大摠管 등의 글자가 판독됨으로써 김인문 묘비로 추정하게 되었다.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서 문무왕의 동생이고 당에 숙위(宿衛:일종의 인질)로 여섯 번이나 갔고, 무려 22년간을 당나라에서 살았는데 그가 죽은 곳도 당나라에서 였지만 시신(屍身)이 신라로 운구(運柩)되어 경주 서쪽 언덕에 매장하였다고 삼국사기 김인문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당의 고종이 소정방을 보내어 백제를 정벌할 때(660) 김인문은 부대총관이 되어, 군대의 지휘권과 함께 향도의 역할을 맡아 백제를 정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우리들이 의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무열왕릉의 비에는 비신이 없고, 김인문의 비석은 서원의 축대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납득하기 힘든 대목이다. 이것이 후일 누군가에 의해서 고의로 훼손(毁損)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러면 이것을 훼손시킨 사람들이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다시 남게 된다.

 

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비신이 없다)무열왕의 즉위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진덕왕이 죽고, 군신들이 알천 이찬에게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 임금 될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만한 사람이 없으니 그는 실로 제세(濟世)의 영걸이라 할 것이다 하고 그를(춘추) 왕으로 받들게 하였다.

 

"춘추는 세 번 사양하고, 부득이 왕위에 올랐다(春秋三讓不得已而就位)"라고 기록하고 있는데(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五 太宗王 卽位條), 과연 알천은 춘추를 왕으로 천거했고, 이에 대해서 춘추는 제 삼 사양하였고, 할수 없어서 왕위에 올랐을까?

 

좀더 거슬러 올라가서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성골의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여왕을 세웠다(聖骨男盡 故女王立...)"라고三國遺事 왕력표에는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성골은 무엇이고 진골은 무엇인지?그 구분을 가리기도 매우 모호하다.

 

25대 진지왕의 아들 동륜왕자가 26대 진평왕이고, 그의 딸이 선덕여왕이며, 진평왕의 모제(母弟) 국반갈문왕(삼국유사 : 진평왕의 동생 국기안갈문왕)의 딸이 진덕여왕으로 되어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의 골품제도 가운데, 성골(聖骨)은 부계(父系)와 모계(母系)가 모두 순수한 왕족(朴·昔·金)으로 신라의 가장 으뜸으로 치는 신분 층으로, 성골은 처음의 박씨 7왕, 석씨 8왕, 김씨 13왕으로 진덕여왕(眞德女王)때 까지 서로 혈족 결혼을 하며 순수한 성골을 지켜 왕위를 독점하였으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때 부터는 성골 출신의 왕은 없어지고 마지막 경순왕(敬順王)까지 진골(眞骨) 출신의 왕으로 세습(世襲)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삼국사기에도 그렇게 적고 있다.

 

그런데 진지왕의 다른 아들(진평왕의 동생) 이찬 용춘은 모든 것을 구비한 성골이 였다고 볼 수 있는데,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때 살아 있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했으니 성골남자가 다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으며, 용춘의 아들 춘추를 진골(眞骨)로 적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이것을 짜 맞추기 위해 학자들 간에는 여러 가지로 분류를 해보았다. 부계가 김씨의 왕이고, 모계가 박씨의 왕비, 그 부인이 박씨의 왕계 등 등으로 분류를 시도해 보았으나, 맞지를 않아서 지금은 신라에서 처음부터 성골은 없었는데, 동륜왕계(진평왕계)가 자기들의 가계를 높이기 위해서 부른 것으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왕위를 사양하고 어쩌고 하는 것은 미화된 문자 나열에 불과하고 실제적으로는 왕위 세습을 위해서 많은 사람이 죽고 피를 흘려야 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이른바 비담의 난(毗曇-亂)이라는 것이다.

 

645년 상대등에 취임한 비담은 647년 선덕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고 염종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의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는 등 왕실이 위기를 맞이 하였으나, 김춘추(金春秋)·김유신(金庾信) 등은 반란을 진압하고, 비담 등 주모자의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따라서 진덕여왕의 재세 기간에도 이미 모든 실권은 김춘추에게 있었고,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는 즉위할 절차만을 남기고 있었다. 이래서 왕이 된 김춘추는 김유신과 더불어 삼국통일의 정지작업을 마무리했고 그 후 문무왕을 거쳐서 36대 혜공왕까지 그의 가계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찬란한 통일신라문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혜공왕(惠恭王 : 756~780)에 이르러 일길찬(一吉찬) 대공(大恭)의 모반을 비롯하여, 770년 대아찬(大阿찬) 김융(金融)이, 775년 이찬(伊찬) 김은거(金隱居)가 모반을 일으켰으며, 780년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하게 하였으나, 왕비와 함께 난군(亂軍)에게 혜공왕이 피살되었고, 상대등 김양상이 왕위에 올라 37대 선덕왕이 되었다.

 

그런데 김양상은 내물왕의 10대손으로서, 김춘추의 왕계는 여기서 단절된다. 이런 소용도리 속에서 무열왕릉의 비신과 그의 아들 김인문의 비신이 파괴되었다고 보여지며, 파괴된 체 굴러 다니던 비신 중 후일 서원을 축조하면서 축대 돌이 된 김인문의 비신은 심하게 훼손된 체 천 수 백년을 지나 발견되었으나 무열왕의 비신은 아직까지 그 단서조차 찾지를 못하고 있다.

 

정림사지5층석탑역사의 명암에서 권력에 밀리면 그 말로가 처참한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들이 남긴 조형물마저 없애버리는 것은 후손된 입장에서 보면 자못 안타까운 점이 많다.

 

지금도 부여에 가면 들 가운데 우뚝 서 있는 5층탑이 있는데, 이름하여 정림사지 5층석탑이라 하여 국보 제9호로 지정되어 잘 보존되고있다.

 

그러나 이 탑 역시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기념으로 세웠다는 것이 탑의 1층 기단 석 4면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두고 한 때 치욕의 상징이라 하여 헐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고,

 

지금은 행정구역이 서울시에 편입되어 있는 경기도광주(廣州) 남한산성 아래의 송파에 있었던 삼전도비는 인조가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청의 요청으로 세워졌는데, 청일전쟁(1894) 때 치욕의 상징이라 하여 허물었다가 이듬해 다시 세웠고, 해방 후(1956) 문교부에서는 치욕의 상징을 보인다는 것이 국민 정서에 어긋난다 하여 비를 허물어 땅에 묻었다가 그 후 다시 복원하는등 수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지금 보면 정림사지5층석탑은 1층에서 5층까지 탑신이 위로 가면서 크기를 줄인 비율이나, 옥개석이 위로 갈수록 네 끝의 각도가 약간 씩 차이를 두면서 위로 향한 조형기법은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가장 안정감이 뛰어난 걸작으로서, 당시 백제 장인(匠人)들의 높은 수준을 볼 수 있고,

 

삼전도비의 이수와 귀부는 조선 후기 조각예술의 최고로 평가되는 것 외에도, 비문에 내용이야 무엇이든 간에 한자와 여진문자, 그리고 몽고문자등 3개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사료적인 가치를 담고 있다.

 

4 19후에 이승만의 동상을 독재자의 상징이라 하여 모조리 부셔버렸고, 얼마 전 역사 바로 세우기 라는 명분으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국민(國民)이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줄임 말로서 황국은 일본천황의 나라라는 뜻이고 신민은 그의 신하된 백성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식민지시대의 잔재를 없애는 의미에서 국민(國民)이라는 이름을 고치는 거야 당연하다고 볼 수있다.

 

그러면 국민을 위해서... 국민들이 바라서.... 국민들이 원하기 때문에 하는 그 국민이라는 용어도 바꾸어야 되지 않을까? 그러면 그 국민을 무엇으로 바꾸어야 하겠는가? 초등은 말이 안되고, 서민(庶民)은 비하하는 것 같고, 주민(主民), 중민(衆民), 시민(市民).....인민(人民)은 무난한데 그것은 이미 북한에서그렇게 사용하고 있어서 안되고,...  People이라고 하자니 외래어고.....그대로 국민(國民)이라고 하는데 대한 설명도 없고... 역사란 감정 이전에 현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일제시대 총독부 건물을 흔적없이 허문 것이 잘한 것인지? 이것도 후세의 평가를 기다려야 하는지? 훗날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법석을 떠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 궁금하다.

 

이 후에도 신라 사직(社稷)은 150 여 년 간 더 이어가지만 진골귀족간의 왕위쟁탈은 더욱 치열해 지고,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있던 6두품이 지방 할거(割據) 세력으로 등장하여 그 일부는 호족(豪族)이 되었고, 숙위(宿衛)나 혹은 자비(自費)로 건너간 도당(渡唐)유학생들은 귀국(歸國) 후 반 신라적인 성향을 나타냈고, 선종(禪宗) 9산과 풍수 도참(圖讖)사상은 새로운 사회 건설의 사상적인 배경을 이루었으며, 이른 시기에 당이 쇠망의 길을 걷자 신라도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반도를 통일한 것은 견훤도 궁예도 아닌 송악의 호족이었던 왕건으로서 그의 세력(勢力) 기반은 호족을 비롯한 진골귀족의 수탈에 항거한 총체적인 세력의 결집이라고 보고 있다.

 

(2) 고려 태조 왕건(877~943)

 

고려시대는 문화적인 진전이 중세로 접어드는 시기로 역사적인 기록도 풍부했다. 그것은 이 시대에 국왕의 일대기(一代記)라고 할 수 있는 실록(實錄)이 편찬되었고, 삼국사기가 국가사업으로 새로이 쓰여졌으며, 과거(科擧)가 제도화되면서 관학(官學)과 사학(私學)이 동시에 발달하여 지식 수준이 한 단계 높은 시대상을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풍부한 기록들은 조선이 건국되고, 전조(前朝)의 자료(資料)들이 선별(選別) 정리되면서, 고의적으로 파손했거나 유실(遺失)되어, 현재는 남아 있는 것이 너무나 빈약하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그 남아 남아서모든 것을 밝혀주고 있지만, 이것 역시 조선을 개국한 공신들이나 그 후예들이 쓴것이기 때문에 망국에 초점을 맞추고 조선의 성립을 정당하게 하려고 노력하다 보니사실이 과장되거나 축소 왜곡(歪曲)된 것이 많고, 따라서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서 간행되었는데, 비교적 고려 전기에 관한 기록은 정확하다. 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태조왕건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재위 918∼943)의 본관은 개성(開城)이고, 자(字)는 약천(若天)이며, 성(姓)은 왕(王)씨, 휘(諱)는 건(建)으로 시호를 신성(神聖)이라 했는데, 한주 송악군 사람으로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당 희종 건부 4년, 신라 헌강왕 3년 정유(877) 정월14일 병술에 태조를 송악 남쪽 사제(私第)에서 낳으니, 신비한 광채와 자주 빛 기운이 종일토록 방안에 비치고, 뜰에 가득히 서리고 들려 있었는데 형상이 마치 교룡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용모는 龍顔과 日角이며 턱이 풍만하고 이마가 넓었다. 氣宇와 도량이 크고 넓었으며, 말 소리가 우렁차고 컸다. 너그럽고 후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이 있었다. 왕위에 있은 지는 26년이고 壽는 67세 였다.

 

원년(918) 여름 6월 병진에 태조가 포정전에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고쳤다. 일찍이 세조(왕건의 아버지왕륭)가 송악 남쪽에 집을 지었는데, 중 도선이 문밖에 와 쉬면서 탄식하기를 "이땅에 마땅히 성인이 날 것이다"하였다. 세조가 이 말을 듣고... 송악산에 올라 도선이 굽어 살피고 우러러보더니, 비기(秘記)를 적어 넣은 봉투를 세조에게 주면서"공이 명년에는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을 것이니 자라거든 이것을 주십시오"하였다. 글은 비밀히 되어 세상에서 알지 못하였다.

 

태조의 나이 17세 때에 도선이 다시 와서 보기를 청하고서 "당신은 백륙의 운수(106년 만에 오는 세상의 액운)를 만났으니 말세의 창생이 공이 구제해 주기를 기다리오" 하고 군사를 쓰고 진(陣)을 설치하는데 필요한 지리, 천시의 법과 산천에 제사 지내는데 관한 감통(感通)과 보우(保佑)의 이치를 말하여 주었다.

 

세조는 송악군 사찬이 였는데, 그 고을을 거느리고 궁예에게 귀부하여(895 :진성여왕 9) 금성(철원)태수가 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간 태조는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금성군(錦城)을 공략 함락하고 10 여 고을을 빼앗아 나주(羅州)로 고쳤다. 양주(경남 양산)의 위급을 구하고,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상주의 사화진을 쳐서 견훤과 여러번 싸워 이겼다. 태조가 궁예의 교만과 포악이 심하자,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외방 장수로 나가기를 원했는데, 마침 나주가 불안하자 궁예로부터 한찬해군대장군이 되어 나주에 주둔하였다. 진심으로 군사를 위무하고 은혜를 아울러 베푸니 적이 두려워하여 굴복하였다.

 

..중략.. 목포로부터 덕진포에 이르는 견훤의 전함을 바람을 이용하여 적함에 불을 질러 쳐 부시니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반남현 포구에 이르러 적의 경계에 간첩을 놓았다. 이 때에 암해현의 적의 장수 능창은 해도출신으로 수전을 잘하여 이름을 수달이라고 하였는데, 도망친 자들을 불러 모아 갈초도의 작은 도적들과 서로 결탁하고 태조가 이르기를 기다려 해치고자 하였다...중략...

 

태조가 이를 잡아 궁예에게 보내자 궁예는 그를 목베었다.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파진찬 시중(侍中)이되어 왕성으로 돌아갔다. 백 관중에 지위가 가장 높았으나, 늘 다른 사람이 참소당한 것을 구해주니 조신과 장사들이 그를 따랐다...중략...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해 서울을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 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 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요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顯陵:개성)이다.후략...

 

고려의 건국에서 후삼국의 통일, 그리고 고려의 대내외 정책 등은 생략하고,... 다만 태조가 남겼다는 정계와 계백료서는 그 이름만 남아있을 뿐 내용은 전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반면, 만년에 후손들에게 치국의 교훈으로 남겼다는 훈요십조는 그 내용이 전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말들이 많아서 어기 소개코자 한다.

 

태조가 총애하던 중신(重臣)인 박술희(朴述熙)를 내전(內殿)으로 불러들여 그에게 주었다고 하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① 국가의 대업이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② 사사(寺社)의 쟁탈·남조(濫造)를 금할 것,
③ 왕위계승은 적자적손(嫡者嫡孫)을 원칙으로 하되 장자가 불초(不肖)할 때에는 인망 있는 자가 대통을 이을 것,
④ 거란과 같은 야만국의 풍속을 배격할 것,
⑤ 서경(西京)을 중시할 것,
⑥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의 중요한 행사를 소홀히 다루지 말 것,
⑦ 왕이 된 자는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민심을 얻을 것,
⑧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錦江) 이외의 산형지세(山形地勢)는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⑨ 백 관의 기록을 공평히 정해줄 것,
⑩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지금을 경계할 것 등이다.

 

이것은 태조의 사상 배경과 정책의 요체(要諦)가 집약 된 것으로, 왕권강화를 위한 견해가 천명되었고, 불교숭상과 풍수지리설의 혹신(惑信)을 통해 집권을 정당화하고 후사(後嗣)에 의한 계속적인 집권을 확고하게 하려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이런 사상은 호국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당시 성행한 풍수·도참사상이 반영되어 있는데, 태조는 이를 그의 실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정책면에 적응시켰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훈요 10조는 왕실 가전(家傳)의 심법(心法)으로서 태조가 그의 후손에게만 전하기로 되어 있었고, 신민에게 공개 될 유훈은 아니 였다. 그 내용이 사서(史書)에 실린 뒤로는 식자간에 널리 알려져 후일 흔히 군왕을 간하는 신하들의 전거(典據)가 되기도 했는데, 최근에 이르러 그 제 8항 차현(차령산맥) 이남 공주강 이외의 사람은 등용치 말 것이라는 것을 두고 지역 감정과 맞물려 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파고 있다.

 

이것은 후백제와의 빈번한 싸움에서 태조 자신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으며 특히 대구 공산싸움에서는 그야 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삼한의 군주가 되었을 때 그 악몽이 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십훈요 자체가 위작이거나 가필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천년 전에 있었던 일을 지금 들추어서 누가 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보는지 냉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함흥 출신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이 된 후이 지역 사람들의 기질이 억세고, 자기와 같은 인물이 나는 것을 두려워 해서 이들을 공공연하게 차별하고 중용치 않았다고 하는데, 남북이 통일되어 대통령을 선출할 때 또 다른 지역 감정이 나타나지 않을 까 심히 두렵다. 대통령중심제 하에서 지역감정은 선후진국 관계없이 조금씩은 양념처럼 나타난다.

 

우리는 지금 전통 농경사회에서 몇 단계의 산업화과정을 뛰어 넘으면서 숨가쁘게 달려온 후유증으로 생겨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어떻게 치유할까 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은 해결될 줄 알았는데,자본주의의 무 경험 속에서 단행된 산업의 재편과정에서 경쟁심의 조장은 많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개인의 힘에 한계를 느끼면 집단으로 정치권을 위협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풍조가 사회저변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지역 감정까지 겹치면, 어떤 정책도 정치적 냉소주의가 되어 아무리 그 잘못을 강조해도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가난했던 집안에서 부자가 되면서 나타날 수 있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본다면, 세월이 약이 되어 한 세대가 지나면 자연히 치유되는 일종의 유행병이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기면 문제는 오히려 쉽게 풀릴 것 같다.

 

고려태조가 후삼국을 통합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함에 따라 지금까지 지배층으로 군림하였던 신라의 진골계급은 완전히 무너지고 호족이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등장한다.

 

그러나 신라보다는 수취체제가 대폭 개선되었고, 생산력도 전 시대와는 달랐다고는 하나 농업이 역시 주된 국가의 기간산업이 였고, 신분제도는 여전히 존재하였으며, 중앙집권적인 왕조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사회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를 중세라고 하는데는 그래서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의 시각에 불과하다고 보고, 중국 송나라의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체를 한 번 살펴 보자.

 

나. 송(宋)대의 중국

 

(1) 태조의 중앙집권화와 문치주의

 

송의 태조 조광윤송(宋)은 편의상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으로 구분하는데, 태조 조광윤이 나라를 세우고 개봉에 도읍했던 960년부터 1127년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게 개봉이 함락되어 남쪽 임안으로 옮겨갈 때까지를 북송이라고 하고,

 

임안에 도읍했던 1132년부터 1279년 몽고(원)의 세조쿠빌라이에게 멸망될 때 까지를 남송이라고 한다.

 

북송시대에는 연운 16주를 거란에게 내 주어야 하였고, 남송 때는 회수(淮水) 이북은 금 나라에게 빼앗기고 중국의 남쪽만을 지배하여, 북송 남송 할 것 없이 이 때 까지 중국의 통일왕조로서는 영토가 가장 작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인쇄술, 도자기, 화약, 나침반 등이발명되거나 발달되어 세계사적인 문화면에서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중국이라는 나라가 강국으로서 체면을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진교의 무혈혁명으로 즉위한 조광윤은 천성이 온후하고 관용성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진교역에서 군인들에 의하여 추대되었을 때도, 후주의 왕실과 그 관료들을 보존할 것과 살육과 약탈을 일체 금할 것 등을 다짐받고 나서야 쿠데타에 동의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가 황제가 되고 나서는 탁월한 정치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제도개선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 일차적인 것이 군벌에 의해서 왕조가 교체되는 악순환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5대의 왕조가 단명에 그치고 그것도 하극상(下剋上)의 고리를 끊지 못하여 옛 부하에 의해서 밀려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 였는데 조광윤 자신이 후주의 귀덕절도사로서 근위병의 사령관인 전전도점검의 자리에서 군권을 장악한 결과였기 때문에 자신이 황제가 된 후 이를 폐지하였다.

 

전국 요소에 배치되어 있던 절도사들이 3권(군정,재정, 민정)을 가지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반역할 수 있는 길을 막기 위해서 차례로 이들을 면직시키고 문관으로 대체(代替)하였으며, 중앙군인 금군(禁軍)을 보강하는 반면 지방군을 상군(廂軍)이라는 이름을 붙여 국가의 토목공사에 종사케함으로써 모든 군사력을 금군에 집중시켰고, 지방의 요지에도 금군을 파견하여 주둔시켰다.

 

그리고 참모본부라고 할 수 있는 추밀원(樞密院)을 두고 모든 통수권은 추밀원을 통하여 황제에게 상주(上奏)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송대에는 단 한명의 군사를 움직이는데도 황제의 재가(裁可)를 받아야 했고, 이래서 군사적인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져 5대의 군벌조직은 해체되었다. 이러한 새로운질서의 개편을 송의 문치(文治)주의라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반드시 이해 관계가 얽히기 때문에, 태조 조광윤은 자신을 옹립했던 장수들과 담판을 벌여 스스로 물러나도록 만들었으며 그 대가로 풍부한 보상과 명예직을 수여하여 이들을 무마했다.

 

세금의 징수도 문관이 관리하도록 규정을 바꾸었으며 세금 징수 장부와 비용 지출도 엄격하게 심사하고 관리하여, 기본경비를 제외한 모든 물자는 중앙으로 보내도록 명령하여 중앙집권적 재정 관리체계를 강화했고, 이를 위해 전국을 6개 구역으로 나누고, 전운사(典運司)를 두어 물자 수송을 책임지게 하였다.

 

이들 전운사는 매년 관할 구역을 순시하면서 비축된 물자를 점검하고 장부를 일일이 조사 대조하여 부정을 막았고,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말미암아 수도 개봉(開封)에는 엄청난 물량의 재화가 집중되어 국부를 비축할 수있었다. 이리하여 송나라 초기에는 중앙집권적 관리체계가 비교적 체계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송이 건국할 당시에 강남에는 크고 작은 나라들이 안정된 생활 환경 속에서 각기 지역사회의 여건과 특색을 살려 견직물, 인쇄업, 다(茶), 소금 등 특수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번영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강회의 남당(937~975)국과 사천의 후촉국이 가장 번성하였는데, 송 태조는 강남의 토벌에 나서 우선 초 나라와 형남을 멸망시켜 후촉과 남당이의 연락을 끊고, 사천의 후촉과 광주의 남한을 평정한 뒤 최후로 남당을 정벌하였다(975)

 

이 남당에는 당의 귀족문화가 부활되어 한 때 꽃을 피웠는데 이를 남당문화(南唐文化)라 하며,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서 남당 최후의 국왕 이욱은 귀족들의 생활 감정을 사(詞)라고 하는  새로운 시가로 엮은 "낭도사회"를 남겨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림은 서희(徐熙)의 화조화(花鳥畵)와 동원(董源)의 산수화(山水畵)가 뛰어나 각각 한 유파(流派)를 이루었고, 서숭사(徐崇嗣)는 화조화에 바림의 기법을 사용한 몰골법(沒骨法)을 시작하였으며, 이경은 화원(畵院)을 설치하여 북송(北宋)의 선화화원(宣和畵院)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징심당지(澄心堂紙)라는우수한 종이와 질 높은 먹이 제조되어 당시의 높은 기술 수준을 나타냈다.

 

(2) 사대부(士大夫)의 등장

 

태조는 재위 7년 50세의 나이에 죽고(976) 그의 동생 광의(匡義)가 뒤를 이어 송의 태종(太宗 : 976~997)이 되었다. 그가 즉위한 배경에는 의문점이 있어 태조를 시역하였다고도 하고, 혹은 당시 종실에 내분이 있었다고도 하나, 그는 창업과 수성을 겸한 군주로서, 태조의 즉위케 한 진교역 사건 때에도 선두에서 지휘했으며, 즉위 후에는 오월(吳越)과 북한(北漢)을 멸망시켜(979) 5대이후 분열되었던 천하를 통일하였다.

 

반역을 두려워 한 송 왕조가 통치체제를 중앙집권화하고 황제독재 권을 강화하는데 기여한 새로운 계급이 과거라는 합법적인 제도를 통하여 등용된 일단의 관료 군이 였는데 이들을 사대부라고 한다.

 

사대부(士大夫)란 학자관료라는 뜻으로, 무인지배체제에서 지식인이란 문서나 정리해 주고 대필해주는 도필지리(刀筆之吏)에 불과했던 것이, 이 시기에 이르러 정치의 전면에서 고급관직과 실권을 장악하고 이상과 포부를 가지고 국가를 경영한 교양 높은 지식관료 군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일차적인 등용문은 과거였는데, 태조 때 연30명 정도를 뽑았다가 태종 때는 백 명을 넘었고, 3대 진종 대에는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에 오르지 못한 진사(進士)가 2천명을 넘었으며, 관리를 배출한 집을 관호(官戶)라 하여 면세와 형법상의 특전과 함께 각가지 수입이 보장되어 3년만 관직에 있으면 손자 대 까지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관리 하나를 배출하기 위해 온 집안이 공부 잘 하는 아들에게 매달리게 되고... 따라서 경쟁은 더욱 치열하여 그 문은 더욱 좁아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편법(便法)이 등장하는데, 송나라에서도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도 관리가 되는 길을 열었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낙방한사람, 정부에 많은 헌금을 낸 사람, 정부기관에서 오랫동안 실무를 담당한 사람 등을 특별히 채용하였는데 이를 임자(任子)제도라고 하였다.

 

주로 고관의 자제나 그의 가까운 친척을 등용하는데 이용하였고, 과거에 합격해서 관료가 된 숫자보다 임자로 등용된 숫자가 훨씬 많았다고 하며, 이래저래 해서 일단  관료가 되면 자리만 차지할 뿐 일은 하지도 않았고,각 관서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것은 서리(書吏)들이 였는데 이들에게는 봉급을 지불하지 않고, 각종 수수료를 받아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행정의 실무자들에게 봉급 없이 정직하게 일만 하고 무료 봉사하라고 하면 그것이 먹혀 들어 가겠는가? 고양이도 잘 훈련시키면 생선을지킬 수 있다고 억지 주장을 편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더구나 이들 서리들은 한 곳에 대대로 머물면서 새로이 부임해 오는 경험없는 관료들을 농락하여 치부에 열중하다 보니 세상은 더욱 어지럽게 되었다. 이들 관료 군이 백성 위에 군림하여 그 횡포가 대단한 것은 오히려 당연했고,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이들에게 지급되는 막대한 봉급은 국가 재정을 압박하여 전제군주권에도 장애를 일으켰으며, 엽관(獵官)운동이 활개를 치고 관의 규율 또한 엉망으로 만들었다.

 

(3) 거란의 고려 침입

 

송의 태종은 5대부터 거란의 후원으로 잔명을 보존하여온 북한(北漢)을 멸망시키고(979), 이듬해 연운16주의 회복을 위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연경(현 베이징)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거란의 구원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송나라는 연운 16주에 대한 미련을 버릴수가 없어서 여러 차례 친정했으나 거란의 기병을 송의 느린 보병이 당할 수가 없어서 번번히 패하고 장기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양국간에 무역은중단되고, 이렇게 되자 생필품을 비롯해서 문화적인 생활용품이 부족해진 거란에서는 송을 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배후를 튼튼히 할 필요에서 송과 친교관계에 있던 고려를 먼저 침략했는데 이를 국사에서는 거란의 제 1차 침입(993)이라고 한다.

 

거란과 고려와의 관계는 초기에는 매우 우호적이 여서, 태조 5년(922)에는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926) 고려는 이들과 적대관계로 돌아서, 거란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고려 태조는 사신은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여버렸고(942) 또한 10훈요에서도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야만국이라 하여 경계할 것을 후손들에게 남겼다.

 

그래서 태조의 뒤를 이은 정종도 광군(光軍) 30만을 조직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송이 건국하자(960) 고려가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여 거란(요)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이 때 연운 16주를 두고 요와 송이 공방을 거듭했고, 드디어 요(遼)는 송에 앞서 고려를 침입하게 되었다.

 

993년(성종 12) 10월 요의 소손녕(蕭遜寧)이 침략해 왔는데, 그 이유가 크게 두 가지 였다. 첫째는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가 북진정책을 추진하여 그 영토를 서경(평양) 이북까지 넓힌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고, 둘 째는 거란에 조공을 바치고 송과는 단교(斷交)하라는 요구를 내어 놓았다.

 

이에 서희가 안융진(安戎鎭)에서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했는데,...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것이 아니고, 고구려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나라 이름도 고려라고 했다. 그렇다면 옛 땅을 서로가 찾겠다고 하면, 요의 동경(東京)도 옛 고구려의 땅이 였으니, 지금은 고려의 땅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려가 이웃으로서 요에 조공을 보내고자 해도 압록강 유역에는 여진족의 도둑이 버티고 있어서 길이 막혀 갈 수가 없다. 길을 열어 준다면 조공을 보내겠고, 송나라와는 단교하겠다는 것이 주요 요지다.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 것은 상기한 고려와 송과의 관계를 끊고, 고려를 그들의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여진족 토벌의 수고를 고려에게 떠 넘겨 고려가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쳐서 길을 내고, 조공을 바치도록 조치하였다.

 

결과 적으로 고려는 압록강 동쪽 280리를 개척하는 권리를 얻고, 이를 개척하고는 강동 6주라 하여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였고, 송나라의 연호 대신 요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여 형식상 요의 조공국이 되었다. 명분은 잃었지만 실리면에서는 득을 보았다. 그러나 그 후 고려가 이 약속을 잘 지키지 않자 송과 싸워 승리한 후 다시 두 차례(1010, 1018) 고려를 침공하게 되었다.

 

(4) 전연의 맹

 

거란의 6대 성종은 20 여 년 간 모후인 승천태후의 섭정(攝政)기간이 끝나고 친정(親政)을 시작했을 때는 37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 군주였다.그는 연운 16주를 두고 송과의 오랜 분쟁을 뿌리 뽑기 위하여 송나라를 침공하였다.

 

이 때 송나라는 3대 진종이 즉위 후 8년 째가 되는 해 였는데, 거란의 침공에 놀란 송나라도 군대를 모아 이에 대처하여 황하 유역 전주까지 나갔으나, 거란 군을 이긴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강화(講和)의 실리와 명분을 찾기 시작하였는데, 거란측에서도 깊숙이 들어 간다는 것은 보급로가 차단될 위험이 있고, 그들 유목민의 통치기술로 중국을 지배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드디어 두 나라는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하였는데 이것을 "전연의맹(盟 혹은 役)"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보면 두 나라는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 송은 형이고, 거란은 아우로서 예의를 다한다는 것이고, 송은 형으로써 매년 세폐(歲幣)로 비단 20 만필, 은 10 만 양(兩)을 아우인 거란에 보내고, 양국 모두 투항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국경지대에 무역상을 두어 자유무역을 하자는 것, 등이다.

 

여하튼 이 조약으로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가 지속되어 이 후 거란은 최대의 번영을 구가하였으며, 왕실이 불교를 숭상하여 오늘날까지도 그 자취를 곳곳에 남기고 있고, 대장경을 조판하여 고려의 속장경에도 영향을 준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폐경제가 대두되어 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문화적으로도 한자를 변형시켜 거란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등 번영을 구가했으나 만주의 여진족이 세운 금 나라에게 멸망되었다(1125)

 

(5) 송과 서하(西夏 : 1032 ~ 1227)

 

송나라가 동북면의 거란과의 관계를 마무리 짓고, 숨돌릴 사이도 없이 이제는 서북지방에서 나타난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에게 시달려야 했다. 탕구트족은 원래 오로도스 지방에 흩어져 살던 티베트계의 유목민이였는데, 그 수장 척발사공이 당의 황소의 난 때 당나라를 도운 공으로 이(李)씨 성을 하사 받은 후 정난절도사에 임명되어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가 중국에서 당이 망하고 5대가 성립되자 이 때부터 중국 역대 왕조에 반기(叛旗)를 들기 시작하였다.

 

송이 들어서자 서하는 자국 산 청백 염을 송에 수출하고, 그 대신 곡물, 인삼, 차 등 생활 필수품을 사들여 왔으나 송이 거란과 화약을 성립시킨 후 이를 전면적으로 금지 시키자, 서하는 곤란을 겪게 되었고, 거란이 송과 화친하자 국제적으로도 고립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원호 대에 이르러 독자적인 서하문자를 만들어 문화적인 자부심을 높이고,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어 대등한 입장에서 국교를 열자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하자, 50 만 병력을 국경지대에 배치시키고 송나라를 압박하였다.

 

이에 송나라에서도 백만에 가까운 군대를 동원했으나, 서하군의 적수가 되지는 못하였고, 침입을 저지하는데는 일단 성공하였으나 7년간의 지루한 전쟁으로 양국 모두 지치게 되자 드디어 화약이 성립되었다(1044).

 

이에 두 나라는 거란과의 전례(前例)를 참작하였는데, 다만 거란과는 형제지국이 였으나 서하와는 군신(君臣)지국으로서


① 서하는송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취하고,
② 송은 서하에게 매년 은 7만 2천 양(兩), 비단 15만 3천 필, 차 3만근을 보내며,
③ 양국은 서로 도망자를 숨기지 않고,
④ 양국은 국경 지역에 무역 장을 설치하고 무역을 행한다. 등이 였는데 그러나 양국은이 화약이 성립된 후에도 분쟁이 끊일 사이 없어 송나라는 항상 국경지대에 대군을 배치 시켜야 했으므로 재정적 부담이 더욱 심하였다.

 

(6) 위대한 장사 꾼 위구르인들

 

송 대에 이르면 항해술의 발달과 무역의 성행으로 시박(市舶)으로 불렀던 외국 선박들이 연안 항구를 가득 메우고 각 가지 물화(物貨)를 매매하는 단계에 이르러 육상 통상로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고는 하나, 동서 교통로는 그 나름대로 번영하고 있었다.

 

이 때 텐산남로의 오아시스 지대에서 동서 교역을 담당한 것은 위그루인들로서 그들의 조상은 투르크계의 유목민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들이 툰황의 회랑지대에서 동서교역을 담당하였을 때는 거란의 전성시대로서 거란이 송으로부터 받은 비단과 은화, 그리고 북만주 지방에서 대량으로 산출되는 금을 팔아 산호 옥 등 공예품을 사들여 사치생활을 하였는데 거란의 성종이 송을 침범한 것도 이러한 사치품을 구입하기 위한 은과 비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래서 위구르인들은 거란과 송과 교역하여 많은 이득을 남기고 있었는데 서하가 이 지역을 지배하자 이 혈맥과 같은 동서교통로가 다시 막히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가장 곤란을 느낀 것은 거란이 였지만 송나라 역시 대단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서하와 거란이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고, 송나라가 지루하게 7년간의 전쟁을 불사하고 서하와 싸운 것도 이 통상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서하는 위구르 상인에게 무조건 1/10의 통행세를 징수했는데 이로 인해서위구르의 타격도 대단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능적으로 탈세를 하거나 뇌물로 세관 관리를 매수하는 등 각가지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것이 결국은 여러나라의 생활문화가 거란에 수입되었는데 특히 귀족들의 사치 생활에 필요한 진기한 관상용 수목과 수박 등이 서역으로부터 많이 수입되었다. 원래 수박은 페르시아 원산으로 이 무렵부터 점차 동서에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서하는 이덕명이 제위에 올라 송과의 우호관계가 재개되자 위구르인도 물자가 빈곤한 거란보다 송나라에 들어가 무역에 종사하였고, 이 위구르 상인 중에는 송 왕조의 경제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람들도 있었다.

 

다. 송의 산업경제

 

(1) 산업의 발달과 동전 주조

 

송대의 어음(남송의 회자)당말 오대를 거치면서 각국은 부국강병을 추구하였고 따라서 산업을 장려하여 나라마다 부를 축적하고자 하였다.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살펴보면, 중국은 전통적으로 소규모 자영농인 전호를 징세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에 새로운 부(富)를 창출하는 일은 대개 상업이나 양조 혹은 광업 등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동전을 찍어내는 주조(鑄造)로도 가능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과거 관념적인 계획으로 국가를 경영하거나 지방 호족이 자신의 지배영역을 확장하여 왕조를 형성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국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역별 군벌 세력이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지역적 왕조의 형식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렇게 새로운 부(富)를 창출할 수있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전중국의 구심점이 없이 각 지역 군벌세력들이 각기 황제나 왕을 칭했기 때문에 전통적 역사가들은 이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고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살펴보면, 전중국이 우러러 받들만한 황제의 권위가 부재했기 때문에 심지어 죄인이나 도둑 혹은 보따리 장사까지도 능력만 되면 왕이나 황제를 칭할 수 있었던 반면 도덕적으로 훌륭했거나 학문적으로 뛰어났던 선비들은 오히려 진로가 막혀 평생을 울분에 보내야 했다.

 

이런 가운데 송 왕조가 등장하여 거란과 서하로부터 심한 고통을 받기도 하였으나, 전연의 맹을 계기로 이 후 백여 년 간 평화가 정착되고, 수준 높은 사대부가 등장하여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면서 산업이 발달하고 화폐경제가 등장하는 등 전대와는 다른 사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송대 농업의 특색은 상품작물(商品作物)의 재배였는데, 그 대표가 되는 것이 차(茶)였고, 미작(米作)도 묘(苗)의 이식법이 일반화되어 1년2작이 가능하여 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어 났으며, 따라서 농업의 중심이 화북지방에서 강남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를 수송하고 관리하는 체계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공업에서도 견직(絹織)의 기술향상으로 관영(官營)공장에서 짜내는 화려한 비단은 금 은의 색사(色絲)를 이용하여 화조(花鳥)을 수 놓은 고급품으로서 주로 궁정용으로 소비되었고, 서민들의 생활도 향상됨에 따라서 금(錦), 나(羅), 능(綾)등 대중용 직물의 수요도 급증하였다.

 

석탄이 보급됨에 따라 이를 연료(燃料)로 하는 요업(窯業)이 크게 발달하여 청자(靑磁)와 백자(白磁) 등 고급 도자기들이 풍부하게 만들어져 일반인들도 널리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도 지주의 징심지, 월주의 죽지(竹紙), 상주의 운모지(雲母紙), 호주의 붓, 휘주의 먹, 단계의 벼루 등이 특히 유명했다.

 

광업(鑛業) 생산도 비약적으로 발전되어 동(銅)과 철(鐵)의 생산은 전대(前代)에 비하여 10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동(銅)은 5대 이래 상품경제의 발전에 따라 동전(銅錢)을 주조하는데 사용하였는데 10세기 말에 80만관(貫)이였던 것이, 11세기 초 신종 때에는 300 만 관을 돌파하였고, 북송 연간에 약 2억 관을 주조하였다.

 

이렇게 화폐의 주조가 늘어난 것은 일반적으로 소비계층의 증가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지만, 활발한 외국무역도 한 몫을 차지했는데, 송대의 무역은 위그루인들이 대상을 이끌고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를 지나 서방으로 간 것과, 아라비아 상인을 비롯하여 남방인, 일본인, 고려인들이 선박을 이용한 남해무역을 주도하여 세계 각처로 도자기, 차, 비단 등을 실어 날랐다.

 

송나라가 군사력의 필요에서 티베트 등지에서 군마(軍馬)을 수입하기 위해서는 비단과 교환하였으나, 진기한 사치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동전을 사용했기 때문에 사치풍조가 늘어날수록 동전의 해외 유출이 심하여 그 부족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동전의 해외 유출을 법으로 금지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철전을 만들어 유통시켰지만 무게가 너무 무거워 유통상의 어려움이 따랐고, 또한 원거리 상품 유통에는 동전  마저도 무게를 견디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사천 지방을 중심으로 교자(交子)라는 일종의 지폐가 등장하여 유통되었고, 이것이 남송시대에 까지 이어져 회자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도시에는 행(行)과 작(作)이라는 일종의 상인조합과 수공업조합이 나타나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대변하는 단체가 등장하였다.

 

석탄(石炭)은 2천년 전부터 중국인들에게 알려 졌으나, 이 시기에 와서 가정용 연료(燃料)로 일반화 되였고, 공업용과 제철용으로도 활용하여 생산 향상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초석과 유황, 목탄(木炭) 등을 혼합하여만든 화약(火藥)은 예부터 만들었다고 하나 누가 언제 무엇에 쓸려고 만들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알 길이 없고, 다만 남송이 금나라와 채석기 싸움(1161)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십자군 전쟁 때 이슬람을 통하여 서양에 전달되었다고 보고 있는데...근세 서양인들은 이 화약무기(대포와 총)를 가지고 원료와 시장을 찾아 세계로 나서서 곳곳에 식민지를 얻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또 하나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것은 나침반과 인쇄술인데, 나침반은 11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이미 항해에 이용하였고, 이것이 서양에 전해져 13세기 경부터 그들도 항해에 이용하여 후일 식민지 경영에서 단단히 한 몫을 챙기게 되었다. 문제는 인쇄술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각국의 반응이 다르다.

 

(2) 인쇄술의 발달

 

책은 종이에 문자를 기록하여 이를 읽게 하는 것인데, 이 간단한 원리가 보편화되는데는 장구한 세월을 요하게 되었다. 종이가 발명된 후로도 책을 만든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 였는데 그것은 일일이 배겨 써야 하는 수고가 따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자씩 배겨서 책이 만들어 진 것을 필사본(筆寫本)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인지가 발달되고 책의 수요가 늘어나자 목판에 글자를 새겨서 이를 도장처럼 찍어 냈는데 이를 목판본(木版本)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다시 글자를 낟개로 만들어 이를 조합하여 필요한 책을 찍어내고, 그 다음에는 풀어 두었다가 다시필요할 때 책을 찍어 내게 되었는데, 이렇게 낟 개로 만들어진 것을 활자(活字)라 하고, 이 활자를 사용하여 만든 책을 활자본(活字本)이라고 한다.

 

불국사3층석탑목판의 시작이 어디에서 처음 행해졌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목판으로 찍은 문서들이 남아 있어서 그것을 토대로 원조(元祖)를 찾고자 하는데, 여기에는 단연 우리나라가 맹주로서 자처하고 큰 소리를 내게 되었다.

 

그 근거는 불국사3층석탑에서 그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 탑을 석가탑 또는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하는데 백제의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와의 이야기는 널리 전승되고 있어서 여기서는 생락하고...

 

지금부터 약 40년 전 불국사에는 도둑이 들어 이 탑 속에 보물을 꺼내려고 지렛대로 탑의 기단부를 제겼으나 워낙 견고해서 실패하고 돌아 갔는데, 이로 인해서 탑에 약간의 손상을 입혔다.

 

이것을 빌미로 그 탑 속에 무엇이 있을 까하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학계에서는 이 탑을 해체 복원하였다.

 

여기에서 사리함을 비롯해서 몇 가지가 나왔는데, 그 가운데 두루마리로 된 불경이 나왔고 그것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으로서,"세계 최고(最古)의 통일신라 때 불경인쇄본(佛經印刷本)이다.(두루마리 1축(軸).국보 제126호. 7 m×6.5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판(木板)으로 인쇄된 이 경문은, 석가탑의 해체·복원공사가 진행되던 1966년 10월 13일 탑신부(塔身部) 제2층에 안치된 사리함(舍利函)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 경문은 한 폭(幅)에 55∼63행, 한 행에 7∼9자씩으로 되어 있으며, 상 하(上下)는 단선(單線)이고, 필체는 힘찬 해서(楷書)로서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 특히 북위(北魏)의 서법(書法)을 연상하게 한다.

 

이 다라니경의 출간 연대 상·하한(上下限)은 700년대초에서 751년 사이로 추정하는데, 그 까닭은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집권한15년 동안에만 주로 통용되고 그 후에는 자취를 감춘 소위 측천무후 글자라고 하는 신제자(新制字) 4자(?證]·?地]·?授]·?初])를 이 경문 속에서 발견할 수 있고, 또 최소한 석가탑의 건립연대인 751년을 그 하한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인경(印經)으로 알려진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 : 770년 인쇄)보다 20년이 앞서는셈이고, 지질(紙質)이나 인경의 형태를 보더라도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신라에서 조판(雕板)되었음이 확실하므로, 한국 고인쇄문화(古印刷文化)의 높은 수준을 증명할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등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최근 중국에서는 측천무후 글자가 있다 하여 이것은 신라에서 목판된 것이 아니고 중국에서 목판인쇄된 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서 신라에 들어 갔다고 이론(異論)을 제기하고 있다. 여기에 맞서 비단의 제질 등으로 우리것이 분명하다는 국내 학계의 주장이 맞물려 다시 지루한 문화논쟁이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활자본에 대해서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들어 성경을 찍어낸 것이 1460년대로 알려져 있고, 이 보다 앞서 고려에서는 1234년에 상정고금예문 50권을 활자로 찍었다는 기록이 이규보의 이상국집에 나와 있으나, 남아 있는 것이 한 장도 없어서 증명할 수가 없다.

 

그리고 1377년 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을 흥덕사에서 찍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는 없고 엉뚱하게도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어서 세계적인 공인에도 불구하고 개운치 못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3) 개혁의 상징 - 왕안석의 신법

 

왕안석의 초상송나라가 문치주의을 채택하여 중앙집권적인 황제독재권을 확립하고, 군벌에 의한 국가 전복을 막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그 부작용 또한 심각하였다.

 

황제독재권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관료와 군대(금군)가 필요하였고, 이들에게 지급해야 할 막대한 봉급과 군사비의 지출, 거란과 서하에게 바치는 세폐 등이 큰 부담이 였는데 이를 보충하는 재원으로서는 농민들이 양세법에 따라 바치는 조세와, 상품거래에 부과하는 통과세, 그리고 차와 소금등에 부과하는 소비세 등으로 충당하였다.

 

특히 소금은 당나라 때부터 전매품이 되어 고율의 세금을 부과함으로서 확실한 재원이 되었으나, 이를 구입해야 하는 일반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은 농산물이 환금(換金) 상품화하여 그부가가치가 도시로 들어감에 따라 농촌은 더욱 피폐하여 전호(佃戶)라고 불렀던 농민들은 고리 채에 시달려 몰락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사회를 그대로 끌고 갈 수는 없고, 어떤 단안이 필요하였는데,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조치가 바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으로서, 신법이란 새로운 법령이란 뜻인데 그 내용은 부국강병을 도모하여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왕실을 보호하고 재정을 튼튼히 하고자 하는 조치들이었다.

 

이것은 국가 재정을 상업화하는 금융경제였고, 군사적으로 민병을 중심한 군사제도였다고 보면 된다. 왕안석은 당시 황제 신종(神宗)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세금을 더 걷지 않아도 국고가 충실해질 수 있고, 많은 군비를 들이지 않고도 군사를 양성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세금을 더 걷지 않는데도 국고가 더 충실해질 수 있을까? 이것은 일종의 금융대출의 성격인 청묘법(靑苗法)과 시역법(市易法), 그리고 소박한 물류 개념의 균수법(均輸法)의 시행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정부는 봄철 파종기에 농민들에게 자금을 대출해 주었다가 추수 때 2할의 이자를 붙여 갚게 하는 제도로서 그 당시로서는 높은 이자가 아니라서 농민들도 자금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 이것을 청묘법(靑苗法)이라 하였고,

 

한편, 국고에 비축된 물자는 이용하지 않으면 부가가치가 증가하지 않으므로 왕안석은 상인들에게 대여하는 방법을 썼는데, 상인들은 물자를 내다 팔고 결산할 때 원금에 이자를 붙여 갚는 방식으로 이때 보증금으로서 금이나은 혹은 부동산을 담보로 잡은 것을 시역법(市易法)이라 하였고,

 

과거에는 세금으로 각 지역의 물품을 수도 개봉(開封)에 운반했는데 수로를 이용할 경우 습기가 차거나 혹은 파손될 위험성에 항상 노출되었다. 왕안석은 이를 개정하여 현지에서 물품을 팔고, 그 돈으로 개봉(開封)에서 물품을 구매하여 바치도록 하자는 것인데, 정부에서는 현지 물품을 사 두었다가 이를 개봉으로 옮겨서 팔아 이득을 남기자는 것이다. 즉 정부가 장사를 하자는 것이다. 이것을 균수법(均輸法)이라고 한다.

 

또한 당의 부병제를 모방해서 일종의 민병조직을 통한 군사력의 확보를 도모하였는데 이것이 보갑법과 보마법이었다. 그 외에도 차역(差役)이라 하여 지방에서 조세의 징수와 관리(管理), 운반 등을 위해서 공용의 인부를 징발하였는데, 그 부담이 크고 기피현상이 일어나자 모든 호(戶)에 면역전(免役錢)을 징수하고 그 돈으로 인부를 고용하여 대신 하였는데 이를 모역법(募役法)이라고 했다.

 

21세기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 봐도, 경제관리의 방법으로 국가 재정을 운영하기 위해 시스템을 제도화하려 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신용대출의 방법이 경제 성장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을, 또한 생산이 화물 유통을 증가시킬 때 설사 동일한 세율을 적용시키더라도 고도의 유통상태에서는증세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등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이러한 안목은 전통적인 경제 관과는 비교가 안되는 것이었다.

 

왕안석의 개혁 조치는 그 궁극적 목적이 새로운 제도를통해 국고를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여기에서 축적된 역량으로 북방 이민족을 제압하려는 것으로서, 국가 재정이 건실해지고 이와 동시에 상업적 유통이 활발해지면 그만큼 경제력이 강해진다는 것인데, 지금도 그렇듯이 막강한 경제력은 곧 국방력으로 직결되게 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새로운 제도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주위 조건이따라 주어야 하는데, 이해 관계가 얽히고 설킨 낡은 체계는 반드시 개혁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구실을 찾게 되고, 그것이 황제의 절대권력에 의존하는데는 한계가있기 마련이다.

 

이 법은 시행 초기부터 조야(朝野)의 반대에 부딪쳐 몸살을 앓게 되었는데, 그 반대의 이유도 각양 각색이어서 조상 전래의 법을 버리고 지금 와서 고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주장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후이 법은 군주의 교체에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신법당과 구법당이라는 당쟁을 격화시켜 국론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실제에 있어서도 송나라 때의 내륙 상업구조의 상황은 왕안석의 구상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 많았다. 송나라 때의 지배계층은 경제적인 논리로써 왕안석의 신법을 논했던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입장에서 서로를 공박했기때문에 백성을 상대로 장사를 해서야 국가의 체면이 무엇이냐는 것이 공론이 였고, 소규모 전호 기반의 경제 규모는 갑작스런 금융경제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이데올르기는 정치적 통일에 걸 맞는 경제조직이 따라주지 못했고, 유교적인 농업경제를 바탕으로 윤리와 도덕에 근거한 관념적인 논쟁을 거듭하게 되어, 서양보다 앞서 산업을 일어 켰으면서도 근대 산업자본형성에 실패하여 선진국 대열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다. 금의 중국 지배와 남송 시대

 

(1) 여진족이 세운 금(金)

 

여진(女眞)족은 퉁구스계로서 만주 일대에서 수렵과 목축으로 부족 단위로 생활하고 있든 야만 족으로 고조선 때 읍루, 고구려 때에 말갈, 물길 등으로 불리다가 발해 때에 여진, 여직(女直) 등으로 불렀으며, 조선 초기에는 야인(野人), 그 후 만주 등으로 불렀던 종족으로 우리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발해의 멸망(926)후 만주의 서북쪽에 있던 여진족은 거란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를 숙여진이라 했고, 만주의 동북 지방에서는 반독립상태에서 부족 단위 생활을 하든 것을 생여진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수렵과 목축, 그리고 농경도 약간은 하였으나, 생여진은 문화상태가 아주 열악하여 거란 인들의 멸시를 받았는데, 초피(貂皮)와 은호(銀狐)를 얻기 위해 이곳을 내왕했던 거란인들 중에는 강탈, 사기, 부녀자 능욕(凌辱)등 난행을 저질러 여진족에게 적개심을 불태우게 하였다.

 

이들 분산된 사회를 하나로 통합시킨 것은 완옌부로서 추장 우야소는 고려와 요 등으로부터 철제무기를 수입하여 전력을 증강시키고, 주변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고려의 국경지대에까지 남하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별무반을 만들어 이에 대처하였고, 이들이 함경도 일대에 들어오자 예종 때 윤관은 이를 쫓아내고 그곳에 9성을 쌓았다(1008)

 

그러다가 방비상의 어려움과 여진족의 간청으로 9성을 돌려주었는데, 우야소의 동생 아구다(阿骨打)는 북만주 하얼빈(哈爾濱) 남동쪽의 안추후수이(按出虎水) 부근(지금의 松江省) 아청(阿城)에서 제위(帝位)에 올라(1115),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고려에 대해서 신하의 예를 요구하였다(1125).

 

이에 고려에서는 명분과 실리(實利)가 엇갈려 격론을 거듭했으나, 김부식등의 주장에 따라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그 후유증으로 이자겸의 난(1126)과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1135)이 일어나 국론 분열을초래하였다.

 

(2) 정강의 변(1127)

 

이렇게 갑자기 큰 세력으로 등장한 금 나라의 군사력은 태조(아구다)가 부족을 중심으로 완비한 행정·군사 조직을 잘 활용하였기 때문인데, 300호를 1모극(謀克)으로 하여 100명의 병사를 내고, 10모극을 1맹안(猛安)으로 하여 그 장을 세습시켜 부민을 통치하게 하였는데 이를  맹안모극 제도라고 한다.

 

금 나라가 이렇게 강해지자 송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연운16주를 회복하기 위해서 사신을 밀파하여 교섭을 하였고, 이에 두 나라는 요를 남북에서 협공하기로 약속하고 서로간에 조건을 내 세웠는데, 장성이북의 요나라영토는 금의 지배로 하고 연운 16주는 송이 차지하며 요에 보내는 세폐를 금 나라에 보낸다는 것 등이 였다.

 

이 약속에 따라 태조가 된 아구다는 요군(遼軍)을 격파하여 그 영토를 넓혀 나갔으며, 만주지역으로부터 요의 세력을 몰아 내는 데성공하고, 이어 태조는 산시성(山西省)의 다퉁(大同)을 점령하고 송나라가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을 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송 군을 이끈 동관은 연경 공략에 실패하자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 몰래 금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금 군은 삽시간에 연경을 함락하고 이를 송에게 넘겨주었다(1120) 이렇게 되자 송의 조정에서는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잔 제주를 부려 금을 자극하였고, 금 나라에서도  태조가 죽고 그의 동생 태종(太宗 : 1123∼35)이 즉위하여 요를 멸망시키고(1125) 서하(西夏)·고려(高麗)를 복속시켜(1125) 동아시아 최강자가 되었다.

 

금 나라는 송(宋)나라가 번번히 약속을 어기고 요와 손잡는 등 배신을 일삼자, 송을 정복하기로 결정하고 수도 개봉으로 쳐들어가 이를 압박하자, 풍류 천자로 알려졌던 휘종은 태자에게 양위하고 이에 흠종이 즉위하였다.

 

휘종은 중국 역대 제왕 중에서 가장 서화에 뛰어난 군주였으나, 강남의 수목을 운하를 이용하여 수도까지 운반하는 등 그 폐해가 너무나 심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고, 재상 채경은 권력을 독점하여 정치를 도탄에 빠지게 하여 사회가 매우 어지러워,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나는 등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긴박한 상황에 처한 송나라에서는 다시 강화를 교섭하였으나, 금 나라에서는 이에 응하지 않고 결국 개봉을 함락하여 마음껏 약탈하고, 휘종(徽宗: 재위1101∼35)과 흠종(欽宗) 부자를 비롯해서 왕족, 비빈, 대신, 궁녀, 관료, 군인, 기술자 등 수천 명을 사로잡고, 송의 대신 장방창을 제위에 올리고 나라 이름을 초(楚)라 하여 괴뢰정권을 수립하고 만주로 돌아갔다(1127) 이것을 역사에서는 "정강의변"이라고 한다.

 

본의 아니게 괴뢰정부에 천자가 된 장방창은 괴로움을 이길 수 없어 고민하다가 근왕병을 모집하기 위해서 지방에 가 있던 흠종의 동생 강왕을 모셔다가 황제로 추대했는데 이가 남송의 고종이 되었고 이윽고 송 왕실은부흥하고 초 나라는 32일만에 막을 내렸다(1127)

 

(3) 금의 중국지배와 남송의 성립

 

송대의 운하결국 금 나라는 다시 송의 수도 개봉으로 군대를 몰고 쳐들어 오자, 송의 조정에서는 수도를 양주로 옮기고, 다시 주전(主戰)파와 주화(主和)파로 나누어 격론을 거듭한 나머지 주화파가 우세하여 강화를 교섭하였으나, 금 나라는 이에 귀 기울 릴 생각없이 양주를 공격하였다.

 

이에 고종은 다시 양자강을 건너 항주에 들어가 전열을 정비하고 있을 때, 다시 금 나라 군대는 항주로 쳐들어 왔다(1129)

 

이에 남송의 고종은 이리 저리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렇게 집요하든 금의 침입이 누그러지자,고종은 항주(임안)에 자리잡고 이곳을 수도로 정하여 남송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1132) 이 때부터를 남송시대라고 한다.

 

금 나라에서도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 태종이 사망하고 희종이 즉위하였으며(1135), 하남과 산서지방을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남송에 강화를 제의하였다.

 

그리고 정강의 변 때 잡혀와 있던 진회를 남송으로 보내어 교섭에 임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나라는 화평이 이루어졌는데, 회수(淮水)에서 섬서성(陝西省)의 대산관(大散關)을 잇는 지대를 국경으로 정하고, 남송의 황제는 앞으로 신례(臣禮)를 갖추어 금의 황제를 대하며, 은(銀) 25만 냥과 견포(絹布) 25만필을 세폐(歲幣)로 바친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체결하였다(1138).

 

그러나 이 무렵부터 금 나라는 정치·경제·문화 등 각 방면에서 송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이런 경향은 제4대 해릉왕(海陵王 : 1149∼61) 때에 더욱 두드러져, 마침내 1153년에는 금의 창업근거지였던 상경회령부를 버리고 연경(燕京)으로 천도, 그와 함께 여진인을 하북지방으로 대거 이주시켰으며, 남송을 쳐서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하려는 뜻을 고집하여 반대를 무릅쓰고 남벌(南伐)을 감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금 나라는 이 후 몽고에서 일어난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타이에게 망하였고(1234) 남송 역시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에게 멸망되었다(1279) 한 가지 재미 있는 사실은 두 나라가 화평이 성립되었을 때, 금 나라에 잡혀가 영어의 생활을 하고 있던 휘종과 흠종의 송환 문제였다.

 

그러나 이것은 복잡한 정치적 속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교섭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반대하여, 결국 휘종은 죽어서 그 시체로 돌아올 수 있었고, 흠종은 끝내 돌아 오지 못하고 동생이 보낸 사자가 오기를 학수 고대하다가 그곳에서 쓸쓸히 죽었으며(1161), 고종의 정처(正妻) 역시 돌아오지 못하였고, 모후인 위태후만이 돌아와 80세 까지 장수와 영화를 누렸다.

 

송나라에서 이민족과의 싸움이 벌어지면 주전론을 펴는 것은 전투에 능한 무인들이 아니고 나약한 문인들이 앞장을 서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고, 이 시기에 화이(華夷)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북송의 사마광이쓴 자치통감은 공자의 춘추를 이어 중국사를 서술하여 정통성을 중시  하는 편견을 남겼으며,

 

남송의 주희는 4서를 해석하면서 분수론과 명분론을 강조하여 성리학(性理學)을 발전 시켰는데, 이 성리학의 모범국가가 우리들이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국가든 개인이든 명분이 강하다는 것은 힘이 없다는 반증(反證)에 불과 하다. 실리와 조화없이 명분만 강조하다가 가정이 파멸에 이르고, 회사가 파산되며, 그에 따른 후유증은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최근의 경험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다음 이야기 - 십자군 전쟁과 유럽 사회의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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