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中南美연구자의 이색 주장 -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 민족이다(上)
멕시코는 ‘맥이족의 땅’이라는 뜻
글 : 孫成泰 배재대 스페인어과 교수
⊙ 스페인 정복자들의 기록에 아스텍 원주민들은 820년경 아스땅(아사달)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어
⊙ 아기를 업어 키우며 젖 줄 때는 ‘찌찌’라고 해
⊙ 상투·갓, 가체·쪽진 머리, 사주와 점, 정한수 등 풍속 유사
孫成泰
⊙ 53세. 한국외국어대 졸업,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언어학 박사.
⊙ 배재대 스페인어·중남미학과 교수, 同 외국어교실 실장, 한국외국어교육학회 부회장.
⊙ 논문 : <아스테카인의 탄생, 육아 및 장례 문화> <아스텍의 역사, 제도, 풍습 및 지명에 나타나는
우리말 연구> <아스텍제국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풍습> 등.
우리 민족은 일찍이 만주(滿洲)와 요동(遼東) 지역에 부여(扶餘)와 고구려(高句麗)를 건국하고, 이 지역을 호령했던 동북아(東北亞)의 강자(强者)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이 지역의 강자였던 우리 민족은 소수(少數)로 전락하고, 고구려와 부여에 복속했던 숙신(肅愼)족의 후예인 말갈족(후의 여진족)이 만주의 주인이 되었다. 만주를 호령하던 우리 민족은 과연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흔적을 멀리 중남미(中南美)의 멕시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라져 버린 우리 민족
3세기 후반에 쓰인 《삼국지》 〈위지동이전(魏誌東夷傳)〉은 우리 민족의 고대(古代) 역사와 풍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비록 중국의 관점에서 부족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그 시대 우리 선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료다.
우리 민족은 동북아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만주와 요동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 왔다. 만주 북쪽의 길림, 장춘 일대는 부여가 있었고, 만주 남쪽의 집안 일대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오랫동안 고조선(古朝鮮)이 존재했던 요동 일대는, 비록 중국 한(漢)나라 후예인 공손(公孫)씨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고조선의 후예가 살았다. 그 당시 만주 일대에 살던 우리 선조들의 숫자는 얼마였을까?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부여가 8만호(戶), 고구려가 3만호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요동의 공손씨 치하에 있던 선조들도 대략 3만호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여와 숙신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3세기 만주에는 우리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한 그룹 있었다. 그들은 숙신(肅愼)족이었다. 그들은 두만강 북쪽 연해주(沿海州)의 작은 지역에 살던, 근원을 알 수 없는 종족이었다. 그들은 부여-고구려를 건국한 우리 선조 고리족과 언어와 풍습에서 완전히 달랐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그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고, 3세기 초에는 당시 만주 일대에서 가장 강국이었던 부여에 찾아와서 스스로 신하가 되었으며, 매년 무거운 공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壤(위략왈 기국은부 자선세이래 미상파양)
“위략왈,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적이 없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가구 수 8만호를 거느린 부여는 매우 부강하여 다른 민족으로부터 파괴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쪽의 숙신족은 스스로 부여를 찾아와서 굴복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自漢己來, 臣屬夫餘 夫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叛之 夫餘數伐之, 其人衆雖少 (자한기래 신속부여 부여책기조부중 이황초중반지 부여수벌지 기인중수소)
“(숙신은) 한나라 때에 자연스럽게 부여의 신하가 되었다. 부여는 그들을 꾸짖고 조세를 무겁게 부과했다. 그래서 황초년 중에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부여는 그들을 여러 차례 정벌하였다. 그 사람의 수는 적었다.”>
삼국(三國) 시대의 국력은 인구 수에 좌우되었다. 인구가 적은 숙신은 약소국(弱小國)으로 8만호의 부여에 굴복했다. 부여는 그들을 맞이해 후하게 대접한 후에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그들을 혼내고 무거운 공물을 바치도록 명령했으며,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 황초(黃初·삼국시대 위나라의 연호. 220~226년) 연간에 여러 차례 정벌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숙신의 인구 수는 얼마였을까? 숙신의 인구 수는 3만호 미만이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3만호였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부여에 강력하게 대응하던 국가였다. 이 사실과 숙신이 스스로 찾아와 굴복하고 부여가 엄하게 혼냈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해 보면, 숙신의 당시 인구 수는 고구려에도 한참 못 미쳤을 것이다. 아무리 많이 추정해도 2만호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3세기 초 만주와 요동 일대 우리 민족의 숫자는 대략 14만호, 숙신은 2만호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숙신보다 7배나 많은 북방의 강자였고, 최대 집단이었던 것이다.
발해의 少數민족이 된 고구려인들
고구려 문자왕이 아버지 장수왕을 이어서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해(494년), 음력 2월에 북만주의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 부여의 마지막 왕은 800년을 이어 오던 왕조의 문을 스스로 닫고, 오직 가족들만 거느리고 참담한 심정으로 남쪽 고구려로 내려와서 스스로 신하가 되었다. 몇 달만 더 기다리면 따뜻한 봄이련만, 무슨 이유로 그는 추운 북방의 겨울바람 속에서 왕조의 문을 서둘러 닫아야 했을까?
역사는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았다. 다만 왕은 가족들만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고, 백성들은 집단적으로 난하를 건넌 후에 북쪽 아무르강 쪽으로 떠났다고만 전하고 있다. 북쪽으로 떠난 그들은 잠시 두막루국(豆莫婁國)을 건설하여 살다가 다시 사라져 버렸다. 당시의 ‘사라졌다’는 의미는 중국 역사가들의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떠났음을 의미한다.
삼국시대의 우리 민족에게는 숙명의 라이벌이 있었다. 만주 서쪽 대흥안령(大興安嶺) 일대에서 거주하던 선비(鮮卑)족이었다. 그들은 3세기경 중원(中原)으로 내려가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 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우리 민족의 최대 위협이 되었다.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했던 고리족은 선비족과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결국 고구려는 668년 선비족의 후예가 세운 당(唐)나라에 패망(敗亡)했다. 698년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大祚榮)은 북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발해를 건국했다. 당나라는 서쪽에서 쳐들어오는 토번족을 막아야 했고, 안으로는 각지의 반란으로 점차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발해는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진격하여, 마침내 옛 고구려 전성기의 영토를 능가하는 지역을 장악했다.
그런데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 지배층과 대다수인 말갈족 백성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중국의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도, 일본의 《유취국사(類聚國史)》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796년 영충(永忠)이라는 일본 승려는 당나라에 불교를 공부하러 가던 길에 만주를 지나갔다. 그는 만주 곳곳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마을마다 백성들은 말갈족(숙신의 후예)이었고, 고구려인은 소수였다.”
여기서 고구려인이란 고구려 전성기의 백성들, 즉 3세기의 부여, 고구려, 요동에 살던 우리 선조들을 총칭한 호칭이었다. 3세기에는 우리 선조들이 7배나 많았다. 7분의 1에 불과했던 숙신족이 8세기에는 만주의 최대 집단이 되었고, 우리 민족은 소수집단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발해가 멸망한 10세기 이후에, 두 번 다시 우리 민족의 왕조가 그 땅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이 만주를 떠났던 것이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멕시코에서 발견된 우리 민족
1492년 스페인의 콜럼버스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인도로 가려다가 뜻밖에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는 처음에는 그곳이 인도라고 착각했다.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을 영어로는 ‘인디언’, 스페인으로는 ‘인디오’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페인인들은 지금의 멕시코 수도인 멕시코시티 지역을 중심으로 멕시코와 유카탄 반도에 매우 발달된 문명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특히 멕시코시티 지역에 있던 도시는 30만평의 규모에 20여만명이 살고 있었는데, 도시 중심에는 큰 신전을 세우고, 그 주변은 동서남북의 네 구역으로 나누어, 씨족별로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흰 옷을 주로 입고, 흰색을 숭상하여 거의 모든 건물을 흰 흙으로 칠했고, 처음 찾아온 스페인인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융숭한 대접을 했다. “이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며,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타고난 듯하다”고 스페인인들은 기록했다.
그들은 미개한 원주민이 아니었다. 왕과 큰무당을 중심으로 매우 체계적인 국가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왕과 큰무당, 귀족과 무당, 평민, 노예로 구별되는 사회조직도 갖추고 있었다. 정복한 땅에는 왕족을 통치자로 파견하고, 각 지역에서 매년 두 차례 공물(貢物)을 받았으며, 그것을 그림 문자로 책에 기록까지 하고 있었다. 그들도 나무껍질을 으깨어 하얀 종이까지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고리족과 맥이족의 후예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흥분했다. 유럽인들은 이들이 구약(舊約)성경에서 사라진 단 지파(支派)의 후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 야곱은 12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들이 각 지역으로 퍼져서 인류가 번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12명의 아들 중 11명의 후손들 이야기는 구약성경에 계속 나오지만, 단의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신대륙이 발견되고 아스텍제국이 발견되었을 때 유럽 국가들은, 드디어 사라져 버린 단의 후예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곧 단 지파가 아님을 알았지만, 영국의 킹스버그 남작 같은 사람은 19세기까지도 이들이 단 지파일 가능성을 연구했다.
스페인 왕실은 1521년 아스텍제국을 정복한 직후부터 가톨릭 신부(神父)인 학자들을 멕시코에 파견하여, 그 원주민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언어를 말하며, 풍속은 어떠한지 등을 조사하고 기록하도록 했다.
그들은 먼저, “너희들은 어떤 민족이냐”고 물었다. 원주민들은 “우리들은 고리족과 맥이족”이라고 대답했다. 고리족이 먼저 그곳에 왔고, 맥이족은 나중에 왔다고 했다.
만주와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고리족이었고, 요동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맥족(貊族)이었다. 맥족은 5세기 이후부터는 맥이(貊耳)족이라고 불렸다.
“너희들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원주민들은 “조상들은 원래 아스땅에서 살았고,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위가 평평한 피라미드가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또 “고리족은 원래 태양신을 믿던 고리족 땅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아스땅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아사달이다. 땅과 달은 같은 말이다. 아사달(阿斯達)의 원래 발음은 ‘아스다’이다. 만주에는 우리 선조들이 건축한 수만 기의 피라미드가 있다. 모든 피라미드는 위가 평평하다.
“맥이족은 820년 경 이곳에 왔다”
“너희들은 무슨 언어를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질문의 의미를 몰랐던 원주민들은 그저 “나와 다들이(‘모두가’라는 의미) 이렇게 말한다”고 대답했다. 원주민 언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던 스페인인들은 ‘나와 다들이’를 언어 명칭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오늘날 멕시코 원주민 언어를 ‘나와다들이어’라고 하고, 줄여서 ‘나와들어’ 또는 ‘나와어’라고 한다.
“너희들은 언제 이곳으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원주민들은 “맥이족은 820년경 아스땅을 떠나서 이곳으로 왔고, 고리족은 그보다 수백 년 먼저 왔다”고 대답했다. 여기 나오는 연도는 나중에 스페인인들이 원주민의 달력을 서양력으로 해석한 것이다.
스페인인들이 이렇게 원주민의 기원을 조사해 기록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 후에 아메리카에 온 프랑스와 포르투갈, 영국은 원주민의 역사, 풍습, 언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미국과 캐나다의 인디언에 대한 기록은, 그들이 이미 유럽의 언어와 풍습에 상당히 깊게 영향을 받아서, 그들 고유의 언어와 풍습이 상당히 변질되어 버린 18세기 말 또는 19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뿌리 깊은 연구는 주로 멕시코와 페루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아스텍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인들은 아스텍인들이 보관하고 있던 수많은 책들을 불태워 버렸고, 여러 가지 풍습도 금지했다. 그들은 그림으로 가득 찬 그 책들과 그들의 고유 풍습이 이교도적 풍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원주민들의 말과 풍습을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남겨 두었고, 극히 적은 숫자이지만 원주민들의 그림 문자로 된 책도 남았다. 바로 이러한 자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모습
멕시코의 원래 국명은 ‘맥이고(Mexico)’이다. 이 명칭은 스페인인들이 처음 멕시코에 왔을 때, 아스텍제국을 건설하고 살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는 곳을 ‘맥이곳’이라고 불렀고, ‘맥이가 사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 후에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 지배로부터 독립했을 때, 아스텍인들의 옛 명칭을 국명으로 채택했다. 오늘날 ‘멕시코’라고 함은 영어 발음으로 인한 것이고, 실제로 멕시코인들은 아직도 ‘맥이고’라고 말한다.
남자들의 모습
▲상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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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그림 속의 아스텍인들은 한국인과 흡사한 상투를 하고 있다. |
한민족 댕기머리 모양의 인디언 풀댕기 머리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멕시코 원주민들은 상투를 하고 있었다. 상투는 붉은 천으로 묶어서 만들었고, 조선시대 우리가 사용하던 망건 같은 것이 없어서, 묶은 천이 헐거워지면 뒷머리는 밑으로 처지곤 했다.
<그림2>는 1325년 맥이족이 아스텍제국을 건설하던 때의 역사를 그린 그림이다. 9명의 큰 부족의 족장들이 모두 상투를 하고 있다. 머리 위 양쪽으로 삐죽 나온 것은 상투를 묶은 천 자락이다.
가운데 머리를 풀고 귀 위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은 무당이다. 신(神)에게 나라 건설을 알리는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 먼저 스스로 피를 흘리고 있다. 보통은 새의 피를 뿌렸지만, 중요한 제사에서는 무당이 스스로 피를 흘렸다. 그 제사를 그들도 ‘굿(cu)’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무속인들은 아직도 굿을 할 때 닭이나 돼지의 피를 먼저 주변에 뿌린다.
▲갓과 두루마기
<그림3> 17세기 멕시코 원주민 족장의 외출 모습(왼쪽)과 20세기 초 우리나라 사람의 복장(오른쪽).
>은 아스텍제국의 노인들이 외출을 할 때의 모습이다. 검은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었다. 우리 민족의 외출복인 흰 두루마기의 특징은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넓어진다. 오른쪽의 20세기 초 우리 모습과 비교해도,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까지 같다.
여자들의 모습
▲한복과 加"650;
<그림4>의 아스텍제국 여인들은 한복을 입었고, 머리는 가체(加"650;)를 했다. <그림5>는 신분이 높은 여인들이 머리는 가체를 하고, 화려한 한복을 입은 모습이다. 이 그림은 특히 스페인과 아스텍제국이 전쟁을 시작한 후, 몇 달 후에 제국이 멸망당할 운명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부인들이 높은 건물 옥상에올라가 멀리 해안가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구경하는 장면이다.
한복은 우리 민족의 고유 의상이고 가체도 이미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져 왔던 우리 민족의 풍습이었다.
가체를 만들기 위하여 빠지거나 자른 머리를 버리지 않고 모아 땋아서 머리에 덧대었다. 아스텍제국 여인들도 그렇게 머리카락을 모았다. 또 가체를 머리에 붙이기 위해 천 조각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림5>에서는 아스텍제국 여인들이 붉은 천으로 가체를 덧댔다. 다음 18세기 신윤복의 그림에도 천으로 가체를 묶은 모습이 나온다<그림6>.
▲비녀와 쪽진 머리
<그림7>은 우리 민족 여인의 머리 모습이고, <그림8>은 1521년경의 아스텍 여인들이 통곡하는 모습이다. 모두 머리 뒤의 목 부분에 머리를 뭉쳐서 쪽을 짓고 비녀를 꽂았다.
아스텍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 가운데 원 안의 여인의 소매를 보면, 우리 한복의 소매의 특징이 그대로 보인다. 한복 소매는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부드러운 곡선으로 통이 넓어지다가 손목 부분에서 좁아진다.
머리 부분에서 특이한 점은 이마 윗부분에 머리를 뭉쳐서 두 개의 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도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우리 민족에게 있었다. 이런 모습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나온다.
▲머리꽂이와 봉잠
명성황후 초상화<그림9>와 20세기 중반 멕시코 여인의 모습<그림10>.
우리 민족의 여인들은 머리를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가체뿐 아니라 다양한 머리꽂이를 머리에 꽂아서 장식했다. <그림9>는 19세기 말의 머리꽂이와 명성황후 초상화이고, <그림10>은 20세기 중반의 멕시코의 머리꽂이와 여인이 전통 머리꽂이를 한 사진이다.
머리꽂이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봉잠(鳳簪)이다. 봉잠은 봉황새 모양으로 만든 비녀를 말한다. <그림11>은 조선왕조 말 영왕비의 소립봉잠(小立鳳簪)과 멕시코 유물로 발견된 봉잠이다. 새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있고, 꽁지는 뒤로 들고 있으며, 발을 길게 내려서 꽂는 부분으로 만든 모습이 모두 같다.
<그림11>영왕비의 소립봉잠(왼쪽)과 멕시코의 봉잠(오른쪽).
▲붉은 볼연지 우리 민족 여인들이 볼에 붉은 연지를 찍는 풍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아래는 고구려 쌍영총의 세 여인의 그림이다. 모두 붉은 볼연지를 찍은 모습이고, 머리엔 천을 두른 모습이 가체를 덧댄 것으로 보인다.
<그림12>는 멕시코의 태오티와칸 문명(기원전 1세기~기원후 8세기)의 벽화에 나온 여인의 모습, <그림13>은 미국 남부 애리조나주의 인디언들 그림과 도자기, 그리고 <그림14>는 19세기 미국 수(Soiux)족 인디언 추장 부부의 초상화이다. 수족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인디언 집단으로서, 그들도 우리 민족의 후예라는 증거가 있다. 수족 남자들도 원래는 상투를 했었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자의 상투와 함께 여인들의 붉은 볼연지 풍습은 우리 민족의 이동루트인 알류산열도(列島)와 캐나다 서해안 지역, 그리고 우리 민족의 후예가 퍼진 아메리카 전 지역에서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남자의 상투와 여자의 볼연지 풍습은 아메리카 거의 모든 인디언들 사이에 19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그림12> 멕시코 태오티와칸 벽화 속 여인은 붉은 볼연지를 하고 있다.
<그림13> 애리조나 인디언의 모습을 형상화한 도자기.
<그림14> 미국 수족 추장 부부도 볼연지를 하고 있다.
멕시코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풍습 창포에 머리 감고
<그림15> 아스텍 벽화에 나오는 지게를 진 장사꾼의 모습.
<그림16> 반란 용의자를 고문하는 모습. 가운데에 지게를 세워 놓은 것이 보인다.
우리 민족 여인들은 옛날부터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곧 풍성하고 아름다운 머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체를 하거나 각종 장식을 머리에 꽂기도 했고, 머릿결을 촉촉하게 빛나게 하기 위해서 창포(菖蒲)라는 풀을 물에 으깨어, 그 물로 머리를 감아 윤이 나게 했다. 멕시코의 여인들도 히어끼리들이라는 푸른 풀을 창포처럼 사용했다.
아메리카 여인들도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녔고, 무거운 것을 일 때는 따배(똬리)를 사용했다.
<그림15>는 1540년대 그려진 아스텍제국의 그림 역사서에 나오는 장면이다. 물건을 지게에 얹어서 진 모습과 지게를 지게막대기로 세워 놓은 모습이다. <그림16>은 아직 상투를 틀지 않은 젊은이 두 명이 상투를 튼 어른 두 명을 창으로 고문하는 장면이다.
아스텍제국에서는 상품을 지고 먼 지방으로 무역(물물거래)을 하러 다녔던 장사꾼들이 있었다. 이들은 제국이 정복한 속국(屬國)이나 마을의 감시자 역할도 했다. 반란의 기미가 보이면 중앙 정부에 보고도 하고, 그림에서 보듯이 직접 반란 용의자를 심문하기도 했다.
그림상의 심문 대상자도 상투를 한 모습이다. 신대륙 발견 이전에 멕시코 전역에 퍼져 살았던 사람들은 부여-고구려를 건국했던 고리족이었고, 이 사람들은 씨족별로 혹은 원래 만주에서 살 때부터 조상들이 이웃하여 살던 사람들과 같은 곳에 정착하여 수많은 마을과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의 멕시코시티 지역에 뒤늦게 도착한 맥이족(아스텍족)이 그곳에 살던 고리족과 힘을 합하여 아스텍제국을 세우고, 그 당시의 전국 각지에 산재한 씨족별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지게의 특징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지게와 약간 다르다. 우선 지게끈을 어깨에 메지 않았고, 지겟가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고대 풍습을 기록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우리 민족의 초기 지게 모양이 바로 이런 모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관가에서 성곽을 쌓는데, 젊은이들이 등에 1장 길이의 나무를 대고 짐을 나르는데, 온 종일 일하면서도 힘든 줄을 모르더라”는 내용이다. 그림상의 아스텍제국 지게와 같다.
금줄과 정한수
<그림17> 산파가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치는 모습.
<그림18> 금줄을 친 신령한 나무 아래서 연주하는 무당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아이를 낳으면 집 앞에 금줄을 쳐서 잡인의 방문을 금했다. 이는 그 아이의 운명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소위 ‘액(厄), 즉 나쁜 기운’이 방문객을 통하여 묻어 들어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금줄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걷혔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방문을 허용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금줄은 아이를 낳은 경우에만 친 것이 아니고, 성황당이나 산신제를 지내는, 소위 신성한 곳에도 쳤다. 금줄에는 원형 금줄과 줄형 금줄이 있었다. 멕시코에도 이와 똑같은 풍습이 있었다. 스페인 출신 가톨릭 신부인 사하군(Sahagun)의 책에 남겨진 기록과 그림에 따르면, 멕시코 원주민들도 원형 금줄과 줄형 금줄을 쳤다.
<그림17>은 아기가 태어나자, 산파가 점쟁이에게 찾아가서 집 앞에 칠 원형 금줄을 받고, 아기의 운명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점쟁이를 ‘다마틴이(tlamatini)’라고 불렀다. 우리말 ‘다 마친 이(다 맞히는 이)’의 고어(古語)이다.
<그림18>은 산위에 있는 산신제를 올리는 곳이다. 줄형 금줄을 치고, 신령한 나무 아래서 무당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줄형 금줄에 대한 설명에는 “새끼줄을 꼬아서 만들었고, 같은 풀로 만든 술이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멕시코 원주민들은 태어난 아이에게 복을 빌어 주기 위하여, 집 동쪽에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아이를 안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후에, 복을 빌어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정한수를 떠놓고 빌던 풍습이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악기들도 우리 민족의 것과 같은 것이 많다. 그중에 하나만 공개하면, 징이다. 그들은 징을 ‘태질라가틀(신성한 질라가틀)’이라고 불렀다.
四柱와 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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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9> 가운데 사람 얼굴을 한 태양은 태양신을 상징한다. 점쟁이가 들고 있는 것이 《토날보왈리(신성한 날을 보아서)》라는 책임을 나타낸다. 점쟁이 얼굴 앞에 있는 짧은 지팡이 같은 그림은 ‘굽어진 혀’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말한다’는 기호이다. 즉 점쟁이가 사주풀이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말한다’는 이 기호는 경주의 신라시대 고분인 천마총의 천마 입 앞에도 그려져 있다. |
멕시코 원주민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운명을 알기 위하여 사주(四柱)를 봤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달력은 두 종류로서, 각각 히의보왈리(Hiuhpohualli)와 토날보왈리(Tonalpohualli)이다. 각각 ‘해를 보아서’와 ‘신성한 날을 보아서’라는 우리말이다. 달력 명칭에 사용된 ‘히’와 ‘날’은 오늘날의 우리말 ‘해’와 ‘날’이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사주풀이와 점치는 데 사용한 달력은 토날보왈리였다. 이 달력은 우리 민족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음력 달력과 기본 체제가 같다. 우리 민족도 사주풀이나 점을 칠 때에는 음력 달력을 아직도 사용한다.
<그림19>는 멕시코 원주민이 아이를 데리고 점쟁이를 찾아가서 아이의 운명을 물어보는 장면이다. 그림 설명에 따르면, 점쟁이는 먼저 아이의 태어난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를 물어보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토날보왈리를 펼쳐서, 그날과 그 시각에 해당하는 각종 그림 기호를 보고서, 아이의 평생의 운명을 이야기해 주었다고 한다. 또 사주를 바탕으로 운이 좋은 남녀가 결혼했는데, 이것도 우리 민족의 옛 풍습과 같다.
이 달력을 이용하여, 멕시코 원주민들은 점을 매우 많이 쳤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항상 먼저 점을 치고 날을 받았다. 장사하기 위하여 먼 길을 갈 때도 점을 쳐서 날을 받았고, 이사하거나 새로운 집을 지을 때도, 결혼을 할 때에도 역시 점을 치고 길일(吉日)을 받아서 행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두 아기를 업고 다녔다. 아스텍제국이 정복된 지 20여년 후에 스페인 신부 고마라(Gomara)가 쓴 문헌에는 멕시코 원주민들의 육아(育兒) 풍습이 자세히 나와 있다.
아기를 업고 다니며 젖을 줄 때는 ‘찌찌(tzitzi)’라고 말해
<그림20> 멕시코 여인의 아이 업은 모습(왼쪽)과 20세기 중엽의 우리나라 여인이 아기를 업은 채로 젖을 먹이는 모습.
고마라에 의하면, “원주민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포대기로 둘렀는데, 포대기 양쪽 끝을 젖가슴 위에서 동여매었고, 등에 업힌 아기의 머리는 엄마의 목까지 왔다”고 한다. 그는 또 “등에 업은 아기에게 젖을 줄 때에는 머리를 겨드랑이 밑으로 돌려서, 젖을 물렸으며, 그때 ‘찌찌(tzitzi)’라고 자주 말했다”면서 “‘찌찌’는 아마도 ‘젖’이나 ‘젖주다’를 뜻하는 말인 것 같다”는 해석까지 덧붙였다.
<그림20>은 멕시코 원주민의 아이를 업은 모습과 우리 민족 여인들이 등에 업힌 아이에게 젖을 줄 때의 사진이다. 겨드랑이 밑으로 머리를 돌린 모습이 고마라의 설명과 일치한다. 또 아이의 나이를 말할 때, 태어난 해를 한 살로 치고, 그 다음해에는 두 살로 말했는데, 이런 나이 계산법은 서양의 나이 계산법과 비교하면 심지어 두 살까지도 차이가 난다고 했다. 멕시코 원주민의 나이 계산법은 우리민족의 것과 같았다.⊙
한 中南美연구자의 이색 주장 -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 민족이다(下)
아스텍제국은 맥이족과 고리족이 합작해서 세운 나라
글 : 孫成泰 배재대 스페인어과 교수
⊙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다다살리(tlatlazali) 풍습은 ‘모두 모두 살자’는 의미
⊙ 맥이족과 고리족의 싸움터 맥이가진고(Mexicatzinco)는 ‘맥이가 (전쟁에서) 진 곳’이라는 뜻
⊙ 殉葬 등 장례풍속, 윷놀이·공기놀이·팽이치기 등 민속놀이 흡사
孫成泰
⊙ 53세. 한국외국어대 졸업,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언어학 박사.
⊙ 배재대 스페인어·중남미학과 교수, 同 외국어교실 실장, 한국외국어교육학회 부회장.
⊙ 논문: <아스테카인의 탄생, 육아 및 장례 문화> <아스텍의 역사, 제도, 풍습 및 지명에 나타나는
우리말 연구> <아스텍제국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풍습> 등.
<그림1> 아스텍 전사들의 모습. 아스텍제국은 먼저 아메리카대륙으로 이주한 고리족과 후에 이주한 맥이족이 힘을 합쳐 세운 나라다
5일장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5일마다 장을 여는 풍습이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풍습은 아직까지 이어져서 전국의 많은 곳에서 지금도 5일장이 열리고 있다. 시골에서는 장날에 농사일을 쉬고 장보러 가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아스텍인들에게도 바로 이 풍습이 있었다. 16세기 초에 사하군이 쓴 《멕시코의 풍물역사서》에는 이 시장의 역사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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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1938년도 멕시코 오하카 지방의 5일장날 풍경이다. 몇십 년 전 우리나라 시골의 5일장 풍경과 흡사하다. |
맥이족들, 즉 아스텍인들은 오랜 유랑생활 끝에, 1325년 마침내 자기 나라를 건설하고 정착하게 되자 바로 시장을 열었다. 시장을 처음 연 곳은 평민들이 중심이 되어 살던 다들올곳(Tlatelolco-모든 사람이 올 곳)이었다. 아스텍제국이 강성하여 주변을 정복하면서, 5일장은 멕시코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시장에서 거래하던 상품은 금덩이, 옥, 짐승가죽, 담요, 담배, 귀한 새 깃털, 천, 옥수수 등 매우 다양한 물건이었는데, 거래방법은 처음에는 물물교환이었고, 후에 카카오를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스페인인들의 눈에 비친 5일장은 매우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4일 일하고 5일째 날은 시장에 가곤 했는데, 시장 가는 날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일주일은 5일이었다”고 기록했다.
‘1주일’의 개념은 서양식 개념이다. 기독교의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칠일에는 쉬었다고 쓰여 있다. 그래서 ‘쉬는 날= 일요일’의 개념이 시작되었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스페인인들이 아스텍제국을 정복하고 보니, 원주민들의 풍습에서 ‘5일마다 일은 안하고 시장 가서 친구를 만나거나 노는 모습’을 발견했다. 서양식 사고방식으로 보면, 멕시코 원주민들은 일주일이 5일인 민족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도 원래는 5일장었으므로, 우리도 ‘일주일이 5일인 민족’인 셈이다.
<그림2>는 1938년도 멕시코 오하카 지방의 5일장날 풍경이다. 흰 옷을 주로 입고, 남자들은 밀짚모자를 쓴 모습의 시장 풍경은 몇십 년 전의 우리나라 시골의 5일장 풍경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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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음식을 먹기 직전에 화로에서 익은 음식을 아주 조금, 손톱으로 떼어서 주변에 던진 후 식사를 하는 아스텍 인디언의 다다살리(tlatlazali) 풍습은 우리의 고수레와 비슷하다. |
멕시코 원주민의 음식 풍습 가운데 우리의 고수레와 같은 것이 있었다. 사하군 신부가 기록한 《최초의 기억들(Primeros Memoriales)》이라는 책에는 <그림3>과 함께 그들의 고수레 풍습을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을 때, 먹기 시작하기 직전에 화로에서 익은 음식을 아주 조금, 손톱으로 떼어서 주변에 던졌다. 그 후에 식사하기 시작했다.”
이 풍습을 다다살리(tlatlazali)라고 불렀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모두 모두 살자’로 해석된다.
장례 풍속, 고구려·부여와 유사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 민족의 장례 풍습은 다른 민족과 매우 달랐다. 부여는 부모가 죽으면 매우 길고 풍성한 장례를 치렀고, 때로는 그 장례식이 다섯 달을 넘기기도 하여 손님들이 이제 그만하라고 권할 정도였다. 또 고구려의 장례식은 매우 특이하게, 상주(喪主)들은 울고 주변 사람들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신하나 노예를 함께 묻는 순장(殉葬) 풍습이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 한반도 내에 존재했던 삼한(三韓)의 장례식에서는 새의 깃털을 관속에 넣어 주었다고 했다. 우리 민족은 죽은 후에도 다른 삶을 살아간다고 믿어서, 저승 가는 노잣돈으로 옥구슬을 사체의 입안에 넣어 주기도 했고, 그가 평소에 사용하던 물건을 태워서 보내 주기도 했다. 그리고 관을 땅속에 묻을 때 회(灰)를 뿌려 준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관 주변에 뿌려 주고, 경기도 지방에서는 활관하여 사체(死體)위에 직접 뿌려 준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이러한 우리 민족 장례식의 독특한 풍습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19세기 중엽까지도 그 일부가 남아 있었다. 특히 순장은 남북 아메리카 전 지역에 광범위하게 시행되었고, 부모의 장례식을 몇 달 동안 풍성하게 치르던 풍습도 캐나다 서해안 일대의 인디언들 사이에 19세기 중엽까지 행해졌다.
그곳에서도 너무 장례식을 오래 한다고 하여, 때로는 손님들이 그만하라고 권하기도 했고, 상주는 더 해야 한다고 실랑이를 벌였는데, 그것을 미덕으로 여겼다고 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 부여의 풍습이라고 기록된 것이 캐나다 서해안에서 부여가 망한 지 1400여 년이 흐른 뒤에도 이어져 왔던 것이다.
아스텍王의 장례식
멕시코에 살던 원주민들에게도 이 모든 풍습이 있었다. 고마라 신부의 기록이나 다른 아스텍 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은 그들의 장례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스페인의 역사가이며 신부인 고마라는 아스텍제국의 왕의 장례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왕이 죽자, 친척과 친구인 귀족들에게 알렸다. 그들이 4일 이내에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4일 밤을 울고 곡하며 지새웠다. 다섯째 날, 왕의 입에 아름다운 옥구슬 한 개를 넣어 주었다. 왕의 얼굴 위에 귀신(악마)의 얼굴이 새겨지고 많은 옥(玉)으로 장식된 탈을 씌워 주었다. 사람들이 관을 어깨에 메고 사원으로 가는데, 어떤 사람들은 울면서 가고, 다른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갔다. 이것이 이 사람들의 풍습이었다. 노래는 간결하고 매우 슬픈 곡조였는데, 사람들은 반복해서 불렀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제사장(무당)들은 200명의 노예나 포로들을 순장시켰다.”
우리는 아스텍 왕의 장례식에 관한 이 기록에서, ‘5일장, 저승길 노잣돈으로 옥구슬을 입에 넣어 주기, 탈, 상여 노래’ 등과 같은 우리 민족 고유의 장례식 풍습이 그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고마라 신부는 계속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더 기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자(死者)가 생전에 사용하던 보석, 담요, 방패, 무기, 깃발 등을 같이 태워 주었다
▲장례 마지막 날, 사자를 화장할 때, 집과 화장하는 장소에 많은 음식으로 제사상을 차렸고, 무당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건드리지 않았다.
▲순장의 대상 중 일부는 왕과 함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고마라의 기록 가운데 흥미로운 점은 아스텍인들도 사자를 위한 제사상을 차렸고 순장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의 죽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 11대 동천왕의 장례식에 순장으로 희생될 사람으로서 지원자가 너무 많았다는 기록이 여기서 그들의 정신세계와 일치한다.
‘맥이가 진 곳’
아스텍인들도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 때 그 몸에 흰 흙을 뿌렸고, 새 깃털을 사용했다. 아스텍인들이 아직 유랑생활을 하던 1298년경, 지금의 멕시코시티 주변에서, 그곳에 이미 정착하여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살던 사람들-먼저 와서 정착해 살던 고리족임-과 전쟁을 했고, 패전(敗戰)하여 그 지도자들이 포로가 되어 골와간(Cohuacan)이라는 도시국가로 끌려갔을 때 일이다. 아스텍의 지도자들이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질렀다.
“왜 우리를 죽이지 않는 거냐? 왜 당신네들은 우리를 살려 놓으려 하는 거야? 우리가 죽도록 흰 흙과 새 깃털을 준비해 달라.”
그 후에 아스텍인들과 골와간 사람들은 골와간의 땅에서 함께 살았다. 수십 년을 함께 살던 어느 날, 아스텍인들이 골와간의 공주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분노한 골와간의 왕은 아스텍인들을 공격했고, 아스텍인들은 패하여 도망쳤다. 그 전쟁터를 지금까지도 맥이가진고(Mexicatzinco)라고 한다. 바로 ‘맥이가 (전쟁에서) 진 곳’이라는 우리말로 된 지명이다. 멕시코에는 숱한 지명이 우리말로 되어 있다.
그렇게 도망친 맥이족은 1325년 드디어 호수로 둘러싸인 나지막한 섬에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골와간으로 찾아가서 골와간의 왕자를 모셔 와서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아스텍제국의 제1대왕인 아까만피치들(Acamapichtl)이다. 오늘날의 우리말로 해석하면 ‘우리 까만 피 사람’을 뜻한다. ‘아’는 부여-고구려인들이 사용하던 ‘우리’를 뜻하던 말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이루는 아무르(Amur)강의 ‘아’가 바로 이 말이다. 아무르는 고대 우리말로서, ‘우리 물’이라는 뜻이다. ‘치’는 ‘이치, 저치, 그치, 장사치, 벼슬아치, 양아치’에서 보듯이,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아스텍제국은 맥이족과 고리족이 합작해서 세워
그리고 얼마 후에, 맥이족이 세운 나라와 골와간은 한 나라로 합병해 아스텍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부분이 아스텍제국을 오늘날까지 200여 년간 연구해 온 전 세계 학자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역사 내용이다.
그 당시 멕시코 원주민 사회는 전쟁 포로들을 무조건 노예로 삼고, 제사 때에는 인신공양의 희생물로 삼던 시대였다. 그러나 골와간으로 끌려간 맥이족은 노예 취급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씨족사회를 이루며 살았고, 골와간 사람들과 서로 형제라고 부르면서 시집장가를 갔다. 또 골와간의 공주를 죽여서 두 민족 간에 큰 전쟁이 일어났고, 그래서 서로 원수처럼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맥이족은 나라를 세우자마자 골와간 왕자를 데려와서 왕으로 모셨고, 결국엔 두 민족이 한 나라로 합쳐져서 살았다. 이 부분이 아스텍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학자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골와간은 바로 먼저 멕시코에 와서 정착했던 고리족이 세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고리족은 바로 부여-고구려를 세웠던 사람들로서, 맥이족과 함께 우리 민족의 뿌리였다.
골와간은 원래 ‘고리간’이었다고 밝힌 학자는 우리말이나 역사를 전혀 모르던 19세기 말의 독일학자 에드워드 젤러(Eduard Seler)였다. 그는 지금까지도 아스텍 역사와 고고학의 최고 대가로 칭송받고 있다. ‘간’도 ‘장소’를 뜻하던 고대 우리말이다. ‘정짓간, 헛간, 곳간, 뒷간’ 등의 말에서 나오는 ‘간’이 바로 이것이다. 결국 골와간, 즉 고리간은 ‘고리족이 사는 곳’이라는 우리말이다.
같은 민족이 만주 남부와 북부로 서로 이웃해서 살았고, 아메리카로 건너 간 뒤에 수백 년 만에 멕시코에서 다시 만났다. 비록 전쟁터에서 만났지만 서로를 알아보고, 먼저 정착해 살던 사람들이 새로 온 사람들을 자기 땅으로 데려가서 살게 해 주고, 서로 시집장가를 가며 형제라고 불렀으며, 나라를 세운 후엔 먼저 정착해서 살던 사람들의 왕족을 데려와서 왕으로 세우고, 결국엔 한 나라로 합쳐서 아스텍제국을 일으켰던 것이다.
우리 민족 맥족-고리족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는 서양과 아메리카 학자들이 어떻게 아스텍제국을 제대로 이해하겠는가!
제사 때에는 지방과 축문 불태워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집에서도 지냈고, 무덤에 가서도 지냈다. 제사는 주로 밤 12시경으로 추정되는 깊은 밤에 지냈다. 제사는 음식을 차려 놓고, 먼저 향을 피운 후에, 그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절을 하는 방식은 두 손을 땅에 짚고 무릎을 땅에 대며 고개를 숙여서 했다. 제사를 다 지낸 후에 제사장(무당)은 제사에 사용했던 종이를 불태웠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제사에서 마지막 순서로, 신(神)을 전송하고 지방(紙榜)과 축문(祝文)을 불태우는 것과 같다.
아스텍제국의 제사는 크기도 다양했다. 국가적 신(神)에게 지낼 때에는 도시국가 신민 전체가 모여서 제사를 올렸고, 마을별로, 씨족별로, 가족별로도 제사를 올렸다.
아스텍제국의 가장 큰 제사는 다같이배왈리(Tlacaxipehualli)라고 불렀다. 우리말로 ‘다 같이 배우리’이다. 매년 한 번 드리는 이 제사에는 주변의 모든 나라, 속국과 적국의 왕들과 귀족들까지도 초청을 받고 의무적으로 참석했다. 만약 참석하지 않으면 제사가 끝난 후에 아스텍제국의 공격을 받았다.
이 제사의 목적은 ‘주변 속국과 적국이 아스텍제국의 풍습과 율법을 보고 배우도록’ 하는 데 있었다. 많은 인신공양이 이때에 있었는데, 적국과 속국에 대하여 ‘전쟁이나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의미도 있었다. 그야말로 다 같이 아스텍제국의 힘과 풍습을 보고 배우고, 아스텍이 내세운 질서에 따라 살라는 뜻이 있었다. 또 그들이 되돌아갈 때에는 많은 선물을 주는 화친정책도 함께 펼쳤다. 다같이배왈리 제사는 일종의 외교무대였던 것이다.
팽이치기와 공기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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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20세기 초 미국인 학자 쿨린이 보고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팽이. 우리나라 팽이와 똑같다. |
우리 민족은 팽이치기를 했다. 팽이는 나무를 깎아서 만들었고, 치는 막대기는 그 끝에 질긴 닥나무 껍질을 매달았다. 필자도 어린시절 팽이를 직접 깎아 만들어 치곤 했다. 팽이치기는 농사철이 끝난 겨울에 하는 놀이였다.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팽이치기를 했다. <그림5>는 20세기 초, 그들의 팽이치기를 미국인 학자 쿨린(Culin)이 그림으로 그려서 보고한 것이다. 팽이 모양과 막대기도 필자가 어린 시절 만들어 놀던 것과 같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놀이 중에 조약돌을 가지고 노는 공기놀이가 있다. 다섯 개의 돌을 가지고 하는 놀이로서, 첫 단계에는 땅에 흩어진 돌을 집는 행위로 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다른 돌을 건드리지 않고, 왼손으로 만든 아치형 안으로 집어넣는 놀이를 한다. 필자도 어린시절 매우 자주 하던 놀이이다.
<그림6>은 멕시코 북부 지역에서 하던 공기놀이에 대한 관찰 보고서이다. 그 원문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치형을 만들 때의 설명이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우리가 아치를 만드는 방법과 정확하게 같다.
<그림6> 멕시코 북부 지역의 공기놀이에 대한 보고서(왼쪽)와 ‘아치형 왼손’의 모습.
<여자들 두 명이 하는 놀이이다. 5개의 둥근 조약돌을 먼저 준비한다. 먼저 하는 여자가 그 다섯 개의 돌 중에 하나를 ‘나의 돌’로 골라서, 그것을 공중으로 던지고, 눈은 그것을 보면서 그 돌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손으로 땅에 있는 네 개의 돌중에 하나를 집는다.
이렇게 땅에 있는 돌들을 차례로 하나씩 다 집은 후에, 그 여자는 다시 시작한다. 이번에는 한 번에 두 개씩 집는다. 그 다음에는 세 개를 집고, 나머지 하나를 집는다. 그 다음에는 땅에 있는 돌 네 개를 동시에 집는다. 여기까지 성공하면 이긴다.
그 다음 놀이는 더 어렵다. 돌 하나를 선정하여, 앞의 게임처럼 공중으로 던진다. 그러고는 엄지손가락과 중지가 만든 아치(원형 홀)-검지는 중지 위에 겹쳐 놓는다-속으로 땅에 놓인 돌을 밀어서 집어넣는다. 순서는 첫 번째 놀이와 같다(즉, 처음에는 하나씩 집어넣고, 그 다음엔 둘씩 집어넣고, 그 다음엔 세 개를 한꺼번에 집어넣은 후, 나머지 하나를 집어넣고, 마지막엔 네 개를 한꺼번에 집어넣는다). 세 개를 먼저 집어넣고 나머지 하나를 집어넣어야 할 때, 상대방이 돌 하나를 지정하면, 그 돌을 선택한다.>
윷가락은 네 개로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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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7> 북미 인디언들이 초기에 사용하던 3개 윷가락(왼쪽)과 네 단계 말판(오른쪽). |
윷도 삼국시대에 이미 하던 우리 민족 고유의 놀이 중 하나이다. 항상 두 편으로 갈라서 하며, 나무를 쪼개어 네 개의 윷가락을 만들고, 말이 갈 길을 만든 판을 말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찍이 윷놀이를 연구했던 양주동, 박은용, 성병희 선생과 오늘날 민속학의 대가인 임재해 선생은 우리 민족의 윷놀이가 원래는 ‘도, 개, 걸, 윷’까지의 네 단계 놀이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윷놀이의 명칭을 마지막 단계인 ‘모놀이’라고 하지 않고 ‘윷놀이’라고 부르는 점도 이분들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윷놀이를 했다. 그리고 이들의 초기 윷놀이는 네 단계 놀이였고, 윷가락도 3개였다. <그림7>은 북미 지역에서 사용하던 3개의 윷가락과 네 단계 말판이다.
그리고 우리의 윷이 발전하여 네 개의 윷가락과 ‘도, 개, 걸, 윷, 모’의 다섯 단계 말판으로 바뀌었듯이, 멕시코와 미국 원주민의 윷놀이도 바뀌었다. 그들도 윷가락이 네 개로 되었고, 말판은 열 단계로 바뀌었다. 이것은 우리가 한 칸 뒤로 가는 훗도를 만들었듯이, 그들도 윷가락에 여러 가지 표시를 하여, 어떤 것은 2점, 어떤 것은 4점, 어떤 것은 6점식으로 점수를 다양화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림8> 미국 남부 및 멕시코 북부 인디언들이 사용하던 4개의 윷가락(왼쪽)과 원형 말판(가운데) 및 사각형 말판(오른쪽).
<그림8>은 멕시코 북부 지역과 미국 남부 지역에서 사용하던 네 개의 윷가락과 열 단계 말판의 그림이다. 그들의 말판도 사각형과 원형이 있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우리 민족의 아메리카 이동이 10세기 전후까지 긴 세월 동안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메리카의 네 개의 윷가락은 만주에서 이미 그렇게 발전된 것이 아메리카로 건너가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윷놀이는 부여에서 시작됐는데, 말 경주를 본떠서 만들었다. 그래서 윷놀이 판을 ‘말판’이라고 부르고, 놀이에 사용되는 돌이나 나뭇조각을 ‘말’이라고 부른다.
만주에서 사라진 우리 민족이 대거 아메리카로 건너가면서 그들이 즐겨 하던 놀이가 아메리카 대륙에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하다.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 가장 널리 퍼진 놀이가 바로 윷놀이였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윷놀이에서도 말판에 사용된 돌을 ‘말(horse)’라고 불렀다. 돌을 보고 ‘말’이라고 부르는 민족이 우리 민족 말고 또 있을 수 있을까? 그것도 윷판에서만 그렇게 부르는 것까지 같으면서….
인디언의 윷놀이
아래는 미국 남부 애리조나주(州) 애리조나대학교 인디언 박물관에 보관된 인디언 윷놀이에 대한 설명이다.
▲윷의 모양은 한 면은 평평하고 뒷부분은 둥글다.
▲각 참가자는 자기 집에서 말을 출발시킨다.
▲움직이는 대상을 ‘말(horse)’이라고 한다(말로서 돌을 사용하기도 했다).
▲말이 출발하는 곳을 ‘집(house)’이라고 한다.
▲윷을 한 손에 수직으로 잡고서, 그 밑을 다른 손바닥이나 땅에 평평한 돌 위에 탁 친 후 공중으로 던져 떨어지게 한다.
▲윷가락 가운데 서로 닿는 경우가 있으면 다시 던진다.
▲1점당 한 칸씩 움직인다.
▲점수는 최소한 5점을 넘어야 말이 집을 나올 수 있다.
▲윷을 던져서 옮긴 말이 상대편의 말 위치에 오면, 상대편 말을 잡는다. 상대편의 말은 처음부터 다시 출발한다(상대편 말을 패퇴시켜서 집으로 돌려보낸다).
▲자기의 모든 말이 윷판을 돌아서 먼저 집으로 오는 자가 이긴다.
▲우리의 ‘모’ 자리’에 해당하는 곳에 오면 ‘조오타(jouta)’라고 했다(특히 윷을 던져서 나온 숫자가 단번에 10이 나오면 이렇게 말했고, 한 번 더 던질 수 있었다고 한다/ 필자가 인디언에게 직접 조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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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9> 멕시코 원주민들도 우리 민족처럼 달 속에 토끼가 산다고 믿었다. 사하군 신부의 아스텍 역사서에 실린 달 속 토끼 이야기 그림. |
그 밖에도 아메리카 인디언과 우리 민족 간에는 유사한 점이 적지 않다.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달에는 토끼 한 마리가 살고 있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1924년 일제(日帝) 강점기에 윤극영은 이 민족 설화를 이용하여 ‘반달’이라는 동요를 작곡하였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그루 토끼 한 마리’라는 가사가 있다. 그해 10월 20일자 《동아일보》는 ‘옛적부터 우리나라 사람은 달나라에 계수나무와 토끼가 산다고 믿어 왔다. 이러한 우리 옛이야기를 살린 점이 또한 훌륭하다’고 평했다.
멕시코 원주민들도 달 속에 토끼 한 마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림9>는 사하군 신부의 아스텍 역사서(7권2장)에 기록된 그들의 달 속 토끼 이야기를 소개한 부분에 실린 그림이다.
모카신과 막까기틀 오늘날 미국과 캐나다에 가면 모카신(moccasin)이라는 가죽신을 파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모카신은 원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신던 가죽신으로서 바닥이 평평한 것이 특징이다. 이 모카신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20세기 초의 독일 인류학자 구트문트 하트(Gudmunt Hatt)였다. 그는 이 가죽신이 원래 아무르강 유역에서 신던 신발이었는데, 아메리카로 전해진 것이며, 눈에 빠지지 않도록 그물망 같은 눈발(설피)을 바닥에 받쳐 신기도 했던 신발이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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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1> 조선 시대의 목화신(왼쪽), 강원도의 눈발(오른쪽). |
그런데, 우리 선조들도 가죽신을 ‘모카신’이라고 했다. 조선 초에 편찬된 《경국대전》에는 왕과 사대부가 신는 가죽신을 ‘목화(木靴)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을 영어로 기록하면 바로 모카신(moccasin)이 된다. 또 우리 민족도 신발 바닥에 눈발(설피)을 사용하는 풍습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눈이 많이 오는 강원도 일부 지역에 아직도 그 풍습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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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2> 멕시코 원주민의 막까기틀. |
신대륙 발견 이전에, 아스텍제국에서는 철(鐵)이 생산되지 않았다. 철광산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대륙 발견 이전의 전쟁 무기로는 활, 창, 몽둥이 등을 사용했는데, 그중에도 대표적인 무기인 몽둥이를 그들은 막까기틀(macahuitl)이라고 불렀다. ‘막 까는 도구’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어휘가 부족했던 옛날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도구를 ‘틀’이라고 불렀다. 필자도 어린 시절 부친께서 여러 가지 생활도구를 ‘틀’이라고 부르는 것을 경험했다. 그 당시에 ‘틀 가져오너라’ 하면 항상 무슨 틀을 말하는지 헷갈려서 ‘무슨 틀요?’ 하고 묻곤 했다.⊙
++ 월간조선 2012년 11월호~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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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우리는 안다. 대지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며, 인간이 오히려 대지의 소유물이다. 그것을 우리는 안다.
머지않아 당신의 부족이 홍수 뒤의 강물처럼 이 대지를 온통 뒤덮을 것이다. 반면에 나와 내 부족은 썰물과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이러한 운명은 얼굴 붉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신비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아스라한 별을 지켜보듯이 우리의 소멸해 가는 운명을 지켜볼 뿐이다.
얼굴 흰 사람들의 꿈을 우리가 알 수 있으려면 좋으련만. 그들이 마음 속으로 어떤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으며, 긴 겨울밤에 자기의 자식들에게 그려 보이는 내일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우리가 알 수 있다면...하지만 우리는 야만인들이고, 문명인들의 꿈은 우리에게 가리워져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해 슬퍼하지도 않을 것이며, 얼굴 흰 형제들에게 그 책임을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며 우리들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니까.
당신의 부족과 나의 부족은 기원도 다르고 운명도 다르다. 이 두 부족 사이에는 공통점이란 없어 보인다. 우리에게는 우리 조상들의 유해가 더없이 성스러우며, 그들이 휴식하고 있는 장소는 신성한 곳으로 모셔진다. 그러나 당신들은 당신 조상의 무덤 위를 마구 돌아다니며, 그럼에도 후회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당신들의 조상은 무덤의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 자기가 난 이 땅과 당신들을 사랑하기를 그치고 먼 별들 아래를 헤맨다. 그리고는 금방 잊혀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中에서 -
첫댓글 그래서 We Are The World 인가봅니다~ ㅎ 그럼 멕시코와 우리나라는 동족??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