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1 / 디도서 2:11-14
* 들어가는 말
현대어성경 / 11 영원한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은 이제 누구에게나 주어졌습니다. 12 그리고 이 선물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이루어 갑시다.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세속적인 쾌락에 빠진 생활에서 벗어나서 날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3 우리가 대망하고 있는 그 환희의 때를, 다시 말해서 우리의 위대한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날을 바라고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항상 죄에 빠져 들어가는 우리를 구해 내어 그분의 백성으로 삼고 깨끗한 마음과 남을 돕는 일에 열성을 다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디도서 2:11-14).
오늘부터 대강절(待降節 / 降臨節, the advent)이 시작됩니다. 강림절이란, ‘오심’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을 말합니다. 이 강림절은 성탄절 전 네 주간 동안을 지키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에 ‘예수님을 기다리는 소망을 더욱 새롭게 하는’것입니다. 그리고 이 ‘오심’에는 세 가지의 의미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처음으로 오셨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현재적으로 오심, 약속대로 세상 끝 날에 다시 오실 것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느덧 2004년 대강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소망과 평화와 사랑과 기쁨의 강림절에 우리의 영원한 소망을 다시 새롭게 해 봅시다. 오늘은 대강절 첫 번째 주일로서 주제가 ‘소망’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 시대를 살아갈 진정한 소망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1. 그리스도인의 삶이 기다림의 삶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13절을 봅시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현대어성경, 우리가 대망하고 있는 그 환희의 때를, 다시 말해서 우리의 위대한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날을 바라고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곧 재림의 날입니다. 우리는 비록 세상에서 육신으로 살지만, 육신의 욕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5:2절에서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라고 고백합니다. 현대어성경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세상살이에 지쳐 신음하며 새 옷을 갈아입듯 하늘의 몸을 입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낙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목적지를 분명하게 알고 살아야 합니다. 목적지를 잃어버리면 생활이 표류하게 됩니다. 즉 되는 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육신이 고생스럽지 않고 편안한 쪽을 찾으며, 가능하면 쾌락적인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즈음 들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세 때에 나타날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3:1-5절입니다.
현대어성경 “1 디모데여, 그대는 다음에 적는 사항을 잘 분별해 두시오. 마지막 때가 이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사는 일이 매우 어려워질 것입니다. 2 사람들은 이기심에 빠지고, 돈이면 전부라는 풍조가 범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교만과 과장을 일삼고 하나님을 비웃으며 부모를 거역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나쁜 인간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3 또 그들은 완고하고 절대로 남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문제만을 일으키고 부도덕한 생각으로 가득 찬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난폭하고 잔인한 행동을 하며 착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비웃을 것입니다. 4 그들은 친구를 배반하고 화를 잘 내며 허풍을 떨어대기 일쑤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보다는 오히려 쾌락을 즐기는 데 시간을 보내려 하고, 5 교회에는 나가지만 자기들이 들은 것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까이하지 마시오.”
여러분의 생각에도 지금 세상이 이러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이 말씀에서 나타나는 20여 가지의 삶의 형태가 있는데,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감사치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숲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 산 전체를 모르고, 바다 한 복판에 떠 있는 표류 자라면 그 바다를 모르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톨스토이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고기들이 사람들의 대화를 엿 들었는데,
‘물고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물이다.’
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물고기들은 그토록 중요하다는 물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여, 나이 많은 물고기에게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늙은 물고기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이란,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온 몸이 언제나 그 물에 적셔 있으며, 그 속에서 날마다 살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톨스토이는 믿음이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이 우화를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지금도 살고 있으며, 또한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숨쉬는 공기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만, 공기에 대한 감사를 모르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거나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오히려 더 많이,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섭섭하고 고통스러웠던 일들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소망한다면, 매일의 삶이 감사로 가득해야 합니다. 진정한 감사가 없이는 주님의 오심을 소망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면류관과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오늘을 감사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때에는 지금껏 세상의 죄악과 고통으로 탄식하면서도 감사하며 기다리던 모든 성도들이 즐거움으로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8:21-23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앞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낙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육신으로 사는 세상에서의 삶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에서 살면서 행한 대로 영원한 삶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광된 삶을 소망한다면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모든 사람이 구원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11절(현대어성경)에서 “영원한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은 이제 누구에게나 주어졌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누구에게나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절제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12절에서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현대어성경/ 그리고 이 선물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이루어 갑시다.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세속적인 쾌락에 빠진 생활에서 벗어나서 날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라고 하십니다. 즉 세상적인 삶과의 구별된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1) 먼저 단절과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12절 상반절에서,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의 정욕을 다 버리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 세상의 죄악 된 모든 습관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또한 지속적으로 절제하는 훈련입니다. 세상에 속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은 지극히 감각적이며 한 순간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치 않은 모든 행위와 불신앙적인 행위를 내 생활에서 잘라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절제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1:13-15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그러나 과거의 습성과의 단절과 절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래 전, 1.21사태 때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무장공비로 내려왔다가 붙잡혀 유일하게 생존한 김신조 씨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간증한 내용 중의 한 부분입니다.
그는 자유의 품에 안겨서 한동안 편안하게 살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는 얻었지만 이전의 생활과 너무도 다른 생활로 인하여 '이것이 과연 참된 자유인가?'를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술고래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고민 중에 교회를 찾게 되었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민을 주님께 토로했고, 그의 마음이 새로운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길에서 혹시 자신을 알아보고, "저 사람, 김신조 아니야?"라고 하면, 그는 "할렐루야, 할렐루야!" 라고 응답하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
인간적인 단절과 절제는 더욱 깊은 고민과 좌절을 안겨주기 쉽습니다. 가장 확실한 단절과 절제는 내 영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 되게 하는 것입니다.
2) 경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12절 하반절에서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날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단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악한 본성을 쳐서 복종시키는 영적 훈련입니다. “근신함”이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내면의 욕망을 제어하는 신중함을 의미하며, “의로움”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공정하고 진리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경건함”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도를 양육하시는 훈련은 자신과 다른 사람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사는 삶의 현장은 천국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험난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소망으로 인내하는 삶입니다.
3.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광은 자녀 됨입니다.
14절을 읽어봅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내하고 절제하면서 소망으로 예수님을 기다리게 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녀 됨을 위함입니다. 본문에서 “친 백성”이라고 했는데 헬라어로는 laov" periouvsio"(laos periousios, 영, peculiar people)라고 하며, ‘특별한 민족’, ‘고유한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녀 됨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해를 살아왔습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으로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이 대강절에는 부끄러움이 없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소망을 준비합시다.
탈무드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랍비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랍비는 이 제자에게,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하는 기도문을 외워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은 처음 몇 줄밖에 외우지 못했습니다. 다른 기도문에 대해서도 모두 그랬고, 지금까지 가르친 것도 거의 외우지 못했습니다. 랍비는 그 제자를 나무랐습니다. 젊은 그 제자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랍비는 그 때 그 제자가, 앓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가서 거들어 주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일해서 번 돈을 보내는 등.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랍비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랍비는 모든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마음에 생각한 것은 곧 바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 권의 책을 읽어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마음을 밭 갈지 않는다면 알고 있는데 머물고 맙니다. 마음을 밭갈이함은 두뇌를 밭갈이함보다 더 값진 것입니다. 이것은 ‘바른 것을 배우기보다 바른 것을 행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오랜 성도들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행함은 많지 않음을 봅니다. 참된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과 믿음으로 비롯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평화의 계절에 주님의 오심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면서 부끄러움 없이 주님을 맞이하도록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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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2 / 사9:6-7, 요14:;27
*** 들어가는 말
이사야 9:6-7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의 ‘오심’을 감사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한 주간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은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시며, 영원한 영광의 삶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늘 감사하며 살아도 오히려 부족할 것뿐인 망극지은(罔極之恩, 더 할 수 없이 큰 은혜)입니다.
저는 20년이 넘도록 성탄 장식을 해오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외부 장식과 내부 장식의 일부를 했습니다. 저는 ‘나의 생명의 주님께 감사하는 작은 표현으로’ 최선을 다하여 성탄 장식을 해왔습니다. 이처럼 외적인 장식만이 아니라, 주님을 영접한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아름답게 장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선전하는 아름다운 삶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9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라고 하십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의 소망이며, 평화를 이루는 것이며, 사랑과 기쁨을 주시는 지상최대의 사건입니다. 이것을 마음껏 누리며 선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첫 번째 주제로 ‘기다림’ 즉 소망에 대하여 상고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의 두 번째 자세로서 ‘평화’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지금도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을 중심으로 모슬렘들이 성전(聖戰)이라는 명목으로 세계를 향하여 테러를 행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연합 세력들도 평화라는 명목을 걸고 있지만, 모슬렘들의 항거도 역시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irony)하게도 세상은 평화를 위하여 전쟁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평화를 원하지만 진정한 평화는 없는 것입니다. Gospel song에도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그러나 주 여기 계시니 우리가 아들 믿을 때에 그의 영으로 하나 돼 …”이렇게 노래합니다.(찬미예수 906)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중국의 만리장성은 중국 역대 왕조가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대성벽으로써 보하이 만(渤海灣)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약 6,400㎞(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입니다. 성벽의 높이는 일반주택 건물로 따지면 3, 4층 높이가 되는 6∼9m나 됩니다.
왜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엄청난 재정과 시간을 투자하면서까지 이토록 긴 만리장성을 쌓았겠습니까? 목적은 적국의 침략을 막는 것, 즉 자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만리장성도 평화를 지켜주지는 못했습니다. 복음송 가사처럼, 세상의 평화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예수 안에서만 평화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구약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예고하면서,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약본문에서는 주님 당신께서 친히 ‘평화’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평화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에 가장 먼저 전해진 소식이 ‘평화’였습니다. 누가복음 2:13-14절을 봅시다.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의 성육신을 전하는 천사들의 소식은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평화’였습니다. 평화란 걱정과 염려가 없고 마음이 평온한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은 평화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신약본문을 같이 읽어봅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나의 평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의 특징인 ‘나는 …이다.’라는 자신의 주권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께서 ‘평화’이심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시는 평화는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잠깐 동안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환경과 여건에 관계없이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으로부터 샘솟듯이 솟아나는 평화입니다.
C.C.C. 총재인 ‘빌 브라잍’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대통령 조찬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대학교 때 절친한 친구를 26년 만에 만났습니다. 그는 해군장관이었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그 친구의 가정이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여러 가지를 다 갖추었는데 가정 분위기가 불안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친구의 막내아들이 병으로 죽은 직후여서 그를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한 후 헤어졌습니다.
몇 개월 후에 다시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딸이 임파선 암으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은 “얼마나 슬픈가?”라며 위로의 말을 했는데, 친구는
“아니야, 내가 내 딸을 생각할 때는 심히 슬프고 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지만, 이 어려운 때에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평안을 내게 주셨다네.”
라고 하며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평화’가 있습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평화가 바로 주님이 이루시는 평화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평화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고귀한 평화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환경을 불안해하고, 생활을 염려하며, 삶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것을 봅니다. 평화이신 주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고 하십니다.
2.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평화의 왕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 평화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길을 소외된 이웃에게 돌리고, 아직도 어두움의 그늘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해야 할 이유는 우리도 이와 같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5:18-19절입니다. 현대어성경/ “18 이 새로운 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19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과 화해하시고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할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는 평화의 사절들입니다. 그래서 성탄을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는 자신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진정한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화목을 생활로 전하는 평화 전령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의 생활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평안을 누린다면 그들도 우리를 따라오고 싶어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4절에서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했으며, 4:20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실제적인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1:5절입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은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통하여 본을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안을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으로 우리 속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생활로 인하여 근심이 쌓이고 염려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말씀으로 우리 속에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믿음으로 의지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신약본문 바로 앞 구절인 26절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을 통하여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하며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의 평안을 지속적으로 누리게 하시려고 장래의 모든 일까지도 알게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요한복음16:13절을 봅시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하십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성령께서 때를 따라서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복음15:10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평안을 누리는 길입니다. 요한복음15:7절을 봅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렇게 되면 우리가 불안하거나 염려할 일이 있겠습니까?
이번 주간은 대강절 두 번째 주간입니다. 우리의 생활을 돌아봅시다. 내 자신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 평화로운가? 우리가정은 주님 안에서 평안한가? 내 가까운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평화를 이루는 사람인가를 돌아봅시다.
오늘 우리들에게 맡겨진 일이 바로 평화를 이루는 일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평화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우리들이 역시 평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머무는 곳에는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이 평화의 계절에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로서 삶에 평안을 이루며,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평화 전령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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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