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의 변천사>
근대에 들어와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문화 생활에 대한 욕구가 높아짐에 따라
취미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메마르고 기계적인 현대 사회의 특성에 지친 이들이
그 어떤 취미보다도 자연과 함께 하는 정서적인 낚시를 더욱 많이 취미로 선택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낚시질의 시대를 지나 낚시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낚시행위가 물질의 소산이기보다는 이제서는 전통의 소산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문화가 마찬가지이듯 낚시도 전통과 변천 과정을 이해했을 때
진정한 깊이를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 나라 떡밥의 변천사를 뒤돌아보노라면 우리 나라 낚시의 변천사를 뒤돌아보는 것과 다름없다.
낚시를 일찍 시작한 50-60대의 낚시꾼이라면 우리 낚시의 변천과정을
고스란히 함께 걸어온 산 증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대들은 역사적으로 근대사와 산업화의 격변기를 살아온 세대이기도 하듯이
낚시에 있어서도 격변기를 체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이 시대 우리 낚시의 가장 큰 변화를 든다면 나는 서슴없이
대나무 낚싯대에서 초경량 카본대로의 발전과
아롱대는 카바이트 간데라 불빛에서 영롱한 케미라이트와 전자찌의 편리함을,
빻아 쓰던 깻묵과 콩가루 떡밥에서 어분과 기능성 떡밥의 등장을 들고는 한다.
카본대와 전자찌, 구루텐으로 낚시를 시작한 사람과
대나무 낚싯대와 간데라, 깻묵을 빻아 쓰던 사람이 낚시를 대하는 느낌이나 애착,
더 나아가 깊이에는 분명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 떡밥의 변천사를 뒤돌아보는 것도 뜻깊은 일 일 것이다.
신세대 낚시꾼들에게는 오늘이 있기까지의 변화의 이해와
오래된 낚시꾼에게는 추억을 되새기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6-70년대에는 대부분 고소득층의 일부만이 즐기던 낚시가 80년대 이후 땜 낚시의 유행과 더불어
중산층 이하 서민 취미로 자리잡으면서 그 인구가 가히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그 증가 추세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60년대에는 깻묵과 보리, 콩 등을 직접 빻아 쓰던 시절이었다.
일부 낚시 방에서는 그렇게 직접 만든 떡밥을 종이 봉투에 담아 팔기도 하였다.
그러다 상표를 붙여 제품화 한 것이 수도권의 토끼 표, 거북이 표, 춘천 원자탄, 신장떡밥,
부산지역의 사상떡밥, 대구지역의 강남산업 제비표 떡밥 등이다.
이렇게 해서 재래 떡밥이 상품화되었고 재래떡밥의 시대는 흔들림 없이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오게 된다.
이런 떡밥들은 지금도 각 지역에서 그 지역을 대표하는 떡밥업체로
앞선 시장 점유율을 지켜오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떡밥의 주재료는 콩, 보리, 옥수수 등을 볶거나 쪄서 단순분쇄 한 곡류와
깻묵, 등겨 등 곡류의 부산물이 전부였다.
67년에 건설된 소양 땜에서 70년대 중반이후 붕어낚시의 호황이 시작되었고
더불어 85년에 건설된 충주땜의 붕어낚시 호황, 그리고 간편하고 편리한 낚시 장비의 발달,
도로와 차량 등 교통의 발달 등이 맞물려 80년대 중반 이후 바야흐로 낚시의 전성기를 맞게된다.
때마침 땜을 이용해서 민물고기가 양식되기 시작하였고
양식 어종으로 선택된 향어의 보급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양식과 더불어 방류된 향어가 낚시 대상어종으로 부상하면서 토종 붕어 낚시에 한정되어 있던
낚시꾼들의 취향이 향어 낚시로 옮겨오게 되었다.
회로 먹을 수 있는 신기하게 생긴 대형 어종에 매력을 느낀 낚시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한정된 일부만의 전유물 이던 낚시가 이때쯤부터 중산층 이하 서민 취미로 자리 잡게된다.
지금이야 향어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져 인기가 별로 없지만 그때만 해도
전문 향어횟집이 따로 있을 만큼 인기 있는 어종이기도 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어분이다.
향어의 사료로 쓰이던 어분을 소분 하여 떡밥으로 판매하는 업체가 늘어나기 시작하였고
낚시매장에서는 사료어분을 포대째 뜯어 놓고 바가지로 퍼서 팔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인기는 대단했다.
주종을 이루던 곡물 떡밥만큼이나 어분의 사용량은 급격한 신장세를 보였다.
하지만 기능을 갖춘 떡밥이기보다는 사료회사의 제품을 단순히 비닐 봉투에 소분하는데 불과했다.
이후 향어-어분, 붕어-곡물떡밥이라는 고정 관념속에 떡밥이 쓰여졌다.
땜 낚시의 시작과 어분의 등장으로 획기적으로 변한 낚시 패턴의 중의 한가지가 밑밥의 대량 투여이다.
양식 어종이므로 사료로 쓰이던 어분을 좋아하기도 했을뿐더러
허허망망 땜에서 고기를 불러모으자니 자연히 대량으로 밑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먹밥 모양으로 아예 만들어 가지고 가서 하루 종일 사용하던 깻묵떡밥이나 콩 떡밥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소비량이 많았다. 더구나 만들어 쓰는 떡밥은 귀했기 때문에
마구 밑밥으로 쓸 수 없었지만 어분은 쉽게 싸게 구입할 수 있었기에
더욱 헤프게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떡밥을 바가지로 반죽하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심지어는 펠렛 형 사료를 포대 째 사 가지고 다니며 밑밥으로 뿌리고 반죽하여
떡밥으로 사용하고는 했는데 밑밥을 한 주먹씩 쫘르륵 쫘르륵 뿌려대는
소리에서 유래된 짜르레기 떡밥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양식장에서 사료를 줄 때도 이런 방법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집어효과가 있기도 했다.
낚시 인구가 늘어나고 양식 어종의 풍부한 공급으로 이 무렵 생겨난 것이
실내낚시터와 양어장 낚시터이다.
90년을 전후해서 수도권 일부에 양어장 낚시터가 생겨났고 시내 곳곳에 많게는 골목마다
실내 낚시터가 생겨 향어를 방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90년대에 들어서 환경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땜에서의 물고기 양식이 수질오염의 원흉으로 낙인찍히며 향어 양식허가가 중단되었고
불결한 고기라는 인식으로 소비까지 줄어 향어가 차츰 자취를 감추게되었다.
낚시인구가 늘어나는 것과는 반대로 자연낚시터의 감소, 토종 어 자원의 고갈 등으로
낚시꾼들이 갈곳은 줄어들기만 했다
더욱이 시간적 제약 등으로 근교 양어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졌다.
그로 인해 인공 유료 양어장 낚시터가 앞다투어 생겨나게 되었다.
무료 자연낚시터에서 소풍 삼아 즐기던 때와는 달리 떡밥의 소비 패턴이 소량 또는 적량에서
대량으로 바뀌게 되었다. 더불어 떡밥의 소비량은 낚시인구의 증가 그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국내 양식 어종은 점점 고갈되었고 이때쯤 불기 시작한 중국산 수입열풍에 수입한 중국 붕어를
양어장마다 방류하게된다. 낚시꾼들은 본의 아니게 양식된 먹이 습성으로 인해
입질이 까다롭고 기분 나쁘게 생긴 중국붕어를 낚아야만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수입해서 빛을 보지 못하던 글루텐 떡밥이
양식된 중국붕어의 먹이 습성에 적합한 떡밥으로 맞아 떨어져 입질 까다로운 중국 붕어가
잘 잡히기 시작하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글루텐 떡밥은 우리 나라 낚시꾼들이 접한 최초의 새로운 타입과 새로운 기능의 떡밥이라 할 수 있다.
글루텐 떡밥의 성공으로 기능성이 전혀 없는 재래식 떡밥과 어분 소분에 안주하던
몇몇 국내 떡밥 업체들이 충격을 받아 기능성 떡밥 개발에 힘쓰게 되었고
허술하기 그지없던 그 수준도 상당히 높아지게 되었다.
기능을 위해 제과재료나 식품재료로 쓰이던 구루텐이 쓰여졌고 드럼드라이 공법 등 특수 가공된
고 단가 재료들이 쓰여지기 시작했다. 특히 인공향료의 첨가가 일반화되기도 했다.
더불어 낚시방법의 발달로 떡밥 운용도 다양해지게 되었으며
대상 어종, 용도(흡입, 밑밥, 바닥, 중층) 장소, 지역 등에 따라 변화를 줄 수 있는
갖가지의 떡밥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또 소비량도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이제는 무조건 많이 잡는 것이기보다는 어떻게 잡느냐의 운용의 묘미가
낚시의 으뜸가는 재미가 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한 두 가지 만능 특효 떡밥을 맹신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또는 기법, 장소,
계절에 따라 떡밥을 선택하는 폭이 점차 넓어지고 있으며 이는 바람직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낚시 매장마다 휘황 찬란하게 진열되어있는 떡밥들은 이렇게 해서 태어나게 되었다.
앞으로도 낚시 인구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며 취향 또한 더욱 다양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떡밥도 더욱 더 다 기능 화, 다 품목 화 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