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편 6절-8절: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생명이다. 사망이다’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거고, 따라서 ‘생명이다. 사망이다’ 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건 생명이고 이건 사망이다’ 하는 규정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거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규정을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면의 생명과 사망의 규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거다. 그리고 사실 눈에 보이는 면의 생명과 사망의 규정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거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라고 했는데, 아담은 자신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도 인간이 죽는 게 뭔지를 몰랐고,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는 자기의 육신은 안 죽었으니까 영이 죽은 것을 몰랐다. 그러니까 인간 편에서는 죽은 게 뭔지를 모르는 거다. 그러면 죽은 것을 언제 실감나게 안 거냐? 아들 아벨이 죽었을 때 ‘죽는 게 이런 거로구나’ 하고 알았다.
‘산다. 죽는다’ 하는 규정을 짓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 라고 했는데 마귀는 선악과를 따먹어도 산다는 식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마귀는 죽는 것을 말을 안 해 준다. 마귀의 말을 들으면 분명히 죽는 건데 사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한다. 참 묘하다.
교인들이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사는 것으로 느끼느냐, 죽는 것으로 느끼느냐? 다 사는 것으로 느낄 거다. 그런데 목사가 먹으면 반드시 죽는 것인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하는 세상과 세상 것을 주는데도 교인들이 이걸 받아먹으면서도 자기의 뭐가 죽는지를 모르고 있다. 이게 마귀의 수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는다. 산다’ 하는 것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는데 마귀의 수법은 ‘죽는다. 산다’ 하는 걸 얼버무리게 하고 희미하게 하고 모르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체적으로 생명이요 영생이시니 당신과 같지 않고 맞지 않는 것은 전부가 사망이다. 예수 믿는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본구원을 입었기 때문에 이 기본구원을 입은 사람은 다 천국에 간다. 영생이다. 현재적으로도 기본구원으로 된 것은 살아있는 거다. 이건 영원히 안 죽는 거다.
더 나아가 주님은 사람이 영원히 안 죽는 방향으로 역사를 하시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주님의 뜻을 따라 살면 이룰구원 차원에서 부분부분적으로 살아나게 된다. 뭘 살리느냐? 주님으로 닮아진 정신, 소원 목적성, 취미성, 추구성, 간구성, 성품, 기능과 지능을, 즉 속사람을 살린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성장하라. 장성하라’ 하는 것이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라’고 하는 거다. 우리의 속사람이 주님에게 100% 삼켜지면 100% 안 죽는다. 그런데 안 삼켜진 게 너무 많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속 성품으로 안 바꿔진 게 너무 많다. 안 바꿔진 것만큼 그 성질은 하늘나라에 못 올라가는 거다.
모세가 느비딤 바위 앞에서 성질을 내며 바위를 두 번이나 쳤다. 그로 인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요단강 동편 느보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죽었다. 이것은 모세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인간의 혈기나 분노의 성분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걸 말해주는 거다. 바리새의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는데, 아무리 예수이름으로 할지라도 질적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지지 않으면 그 성질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다.
어머니 뱃속에서 가지고 나온 성격 성질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이것 역시 예수님의 것으로 바꿔야 한다. 세상 것은 아무리 좋을지라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바꿔지지 않는 것은 전부 변질되고 바람 불면 넘어가게 되어있다. 영원한 것이 없다. 주님께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나의 영을 중생시켜 준 것은 ‘영원히 죽지 않을 너로 만들어 봐라’ 하고 기초를 닦아놓은 거다. 따라서 교회의 교훈에 있어서도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한다. 교인들의 생각 정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야 한다.
공자도 부모를 섬기라고 했고,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이게 둘 다 같은 게 아니다. 공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부모공경을 하라고 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 하나님의 것과 같은 게 아니다. 공자의 부모공경은 이 세상에서의 얘기이고, 성경의 부모공경은 하늘나라까지 같이 올라갈 수 있는 부모로 만들라는 거다. 그러니 질이 다른 거다. 그런데 교인들이 이걸 모른다. 하나님 당신이 생명이요 영생이시니 이 하나님의 것과 맞지 않는 것, 같지 않는 것은 전부가 사망이다. 그 질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하나님과 같은 거다.
‘생명이다. 사망이다’ 하는 것은 인간이 이 용어를 만든 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인간이 용어를 만들기 전에도 있던 것이고, 적용이 되고 있었다. 사망이 어떻게 온 거냐? 하나님의 생명에서 나온 말씀을 안 믿고 어기고 순종치 않으니 온 거다. 에덴동산에서 이걸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어기니 사망이 돼버렸다. 이렇게 어겨지는 과정이 죄행이요, 생명의 말씀에서 어겨진 것이 죄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생명과는 따먹고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고 했으니 생명과는 따먹고 선악과는 따먹지 말아야 했는데 따먹으라는 생명과는 안 따먹고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는 따먹었으니 이게 죄다. ‘하라’고 한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요,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하는 것도 죄다. 따먹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따먹어라. 하나님의 마음을 따먹어라. 하나님의 뜻을 따먹어라’ 이게 다 들어있는 거다.
내가 생명과를 따먹으려는 마음을 먹으면 나는 가만히 있어도 생명과가 나에게 조르르 다가오느냐? 설령 생명과가 나에게 조르르 온다고 해도 내가 입을 벌려야 생명과가 내 입에 들어올 게 아니냐? 그러니까 생명과를 따먹으라고 하는 말씀에 내가 순종을 해서 생명과를 따먹으려면 먼저는 내 눈으로 생명과를 쳐다봐야 하고, 쳐다봤으면 생명과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야 하고, 걸어갔으면 손을 들어서 생명과를 따야 하고, 생명과를 땄으면 내 입에 생명과를 집어넣고 씹어 삼켜야 한다. 이게 선행이요 의행으로 들어가는 순서다. 말씀에 순종은 이렇게 행함이 있어야 하고, 행함으로 생명과를 따먹어야 만이 이것이 내 몸 속에 들어가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은 앞에서 말한 과정을 따르지 않는 건데, 이렇게 되어지는 것은 자기 생각에서 되는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어떤 나쁜 짓을 하기 전에도 마음 속에서 이미 죄행이 진행이 되는 거다. 아직 몸으로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그 마음에서 이미 죄행이 되어가고 있는 거다. 어쨌든 결과는 다 똑같은 거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란 생명의 말씀에서 어겨진 것을 말한다. 일반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할지라도 전부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서 어겨져 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은 다 죄인이다. 안 믿는 사람을 보고 ‘너는 죄인이다’ 라고 하면 ‘내가 언제 죄를 지었느냐?’ 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볼 때는 다 죄인이다. 죄인에게는 사망이 왕 노릇한다. ‘너는 죽었다’ 그 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가 죽은 걸 모른다.
하나님은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죄를 지을 수 없다. 왜냐? 하나님은 생명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해도 다 생명적이고, 무슨 일을 해도 다 선행이고 의행이다. 이런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먼저는 생명과와 반대가 되는 사망에 해당이 되는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일반사람들이 ‘죄를 안 지으면 되지’ 이렇게 말을 하지만 아니다. 모든 인간은 생각 사고방식 자체가 생명의 하나님 앞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이것 자체가 죄다. 그러니 행동적으로 죄를 짓고 안 짓고는 더 말할 게 없는 거다.
이런 안 믿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흔히 말하듯이 지옥에 갈 사람들이다. 지옥에 갈 이 사람들은 남을 해쳐도 지옥에 가는 거고,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해도 지옥에 가는 거다. 왜냐? 안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고 그 영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나는 죄를 적게 지었다. 많이 지었다’ 라고 하는 거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을 잡고 얘기를 하면 틀림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은 모른 채 자꾸 ‘많은 사람이 이러더라. 많은 교회가 이러더라’ 하게 되면 이 사람은 정확한 기준이 아니다. 세상기준이다. 세상기준은 항상 흔들린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확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사망으로 갔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그 영은 죽은 거고, 육신은 죽어가고 있고 결국은 죽는 거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그 즉시 영이 죽었고, 육체도 죽어가는 건데, 그런데 그 때의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그 즉시로 자기들의 영이 죽었다는 걸 아느냐? 모른다. 마찬가지로 현재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아담의 후손들로서 유전죄와 원죄가 그대로 내려가고 있는 건데 이들이 자기의 영이 죽은 걸 아느냐? 모른다. 성경으로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다. 그리고 자기의 육신은 점점 죽어져 가고 있고, 필연적으로는 죽는 건데 안 죽으려고 한다.
안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볼 때 ‘내가 죽기 전에 실컷 먹고 살다 가자’ 라고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이 죽는 걸 보고 내가 죽기 전에 예수님을 바로 믿으며 잘 만들어져야 하겠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 육신의 생명이 죽기 전에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써서 예수님의 죽지 않을 생명에 내가 통째로 삼켜져야 한다. 내 정신과 사상이 말씀으로 바꿔지는 게 삼켜지는 거다. 예수님의 생명에게 삼켜지는 게 예수 바로 믿는 거고 바로 깨닫는 거다. 이건 영생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영은 죽었고, 육체는 죽어가고 있고 결국은 죽는 건데, 이런 인간이 세상의 어떤 사회적 영광이니 행복이니 명예를 다 가졌다고 해도 전부는 같이 죽어가는 거다. 같이 죽어가는 성질이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사회적 부귀 명예 영광을 누리더라도 영은 죽어있고 몸은 죽어가고 있고 죄 아래 놓여져 있는 것이니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해서 이름을 날리고 영광을 받고 할지라도 모든 것이 죽어져 가는 거다. 사망 아래, 죄 아래에서 자꾸 죽는 거다. 사는 게 하나도 없다. 영생으로 살아지는 게 없다. 이게 전부가 죄다. 무슨 말이냐? 어떤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도둑질을 할 힘을 얻기 위해서 밥을 먹는다고 하면 이 도둑은 그런 마음으로 밥을 먹으면 먹을수록 힘은 더 얻지만 결국은 감옥이 자꾸 가까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세상 일반적인 죄란 다른 사람이나 재산에 피해를 입히거나 정해진 국법을 어기는 것을 말한다. 인간세상의 모든 국법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데서 나온 것이고, 인간들이 만들어서 인간들이 지키는 법들이다. 이 법은 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자고 만든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세상의 법으로 사회의 질서가 잡히느냐? 그렇지도 않다. 그렇지만 그나마 이 법이라도 없으면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하나님의 법은 세상의 국법과는 상관이 없는 인간의 생명에 관한 법이고, 인간 전체의 심판에 관한 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면으로 볼 때 이런 세상의 법들이 왜 생기도록 허용하시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를 잘 믿게 하려는 하나님의 수단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이 법마저 없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못 산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나라의 법도 잘 지켜야 한다.
세상의 모든 법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나온 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 외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지식으로 된 법이 하나 더 생긴 거다. 에덴동산에서는 ‘다스리고 통치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하는 하나님 법만 있었는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로부터 인간들이 나름의 법을 만들어서 세상을 악적으로 다스리게 된 거다. 세상 마지막 심판 때까지 하나님과 정 반대가 되는 이 선악과의 기준이, 인간의 소원 목적적 주장성이 계속 내려갈 거다. 그래서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대국적인 구원역사의 최고의 말씀의 법이 흘러가면서, 또한 그 밑으로 보면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타락된 법이 내려가고 있는 거다.
곤충이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대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으면 그 곤충은 죽는다. 대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는 곤충은 자멸해 버린다. 매미가 언제 나오느냐? 여름에 나온다. 여름에 나와서 나무 그늘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이 매미들이 자기가 잘났다고 겨울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면 어찌 될까?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으면 육신이 죽는 길밖에 없다. 믿는 우리는 자연법칙을 지킨다기보다는 자타의 구원에 잘 이용해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 영원히 살 길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통하여 보면 인간이 생명의 말씀의 법을 어기고 살면 영적인 차원에서 즉시 죽어 들어가고, 몸은 어차피 서서히 죽는 거고,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성경이 이것을 거짓 없이 말해주고 있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불신하고, 부인하고,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죽어라고 안 듣는다. 그 고집이 얼마나 센지 죽어도 안 듣는다.
어쨌든 예수 믿는 사람이 말씀을 어기고 살면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에서 성장이 없게 된다. 깨달음도 없고, 고쳐지는 것도 없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희로애락을 느끼는 감성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얼마나 피곤하고 고통스럽겠느냐?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만들고 있다.
자기의 몸이 아프면 뭐라고 기도하느냐? 자기 몸을 염려 걱정을 해서 기도를 하느냐, 내 몸이 아픈 것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염려해서 기도를 하느냐? 자식이 몸이 아플 때 누가 더 걱정을 하느냐? 몸이 아픈 본인보다 부모가 더 걱정을 한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몸이 아프면 누가 더 걱정을 할까? 하나님이냐, 아니면 자기냐?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기 몸이 아플 때 자식으로서 하나님을 더 걱정을 해 봐라.
우리 젊은이들, 다 부모가 있으니까 자기가 몸이 아플 때 부모가 걱정을 해 주면 ‘내 몸이 아프니까 말 시키지 말아라’ 라고 하지 말고 부모의 입장으로 들어가서 나로 인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를 생각해 봐라. 그러면 자기 몸 아픈 것은 달아나 버린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구약성경에 규례대로 살라는 말씀이 있다. 테레비를 밤늦게까지 보지 말고, 저녁밥도 일찌감치 먹어라. 규례대로 살지를 않으면 몸에 병이 생긴다. 자연법칙도 전부는 우리에게 법칙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못 깨달아서, 누가 안 가르쳐 줘서, 몰라서 자연법칙도 어기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도 어기고 있지 않느냐? 이런 자기를 생각을 해 봐라. 깨닫지 못하면 더 힘든 거다. 일반적 이치적으로도 아무 것도 모르면 참으로 힘들다. 뭘 시킬 수도 없고, 창조적인 일을 할 수도 없고, 그러니 이 사람은 뭐만 하겠느냐? 살아있기 때문에 먹기는 먹어야 한다.
인간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살게 되면 사망권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죽게 만드는 것이니 이것이 죄다. 자기가 자기를 죽게 만든다. 생명의 말씀을 먹고 살리는 쪽으로 나가야 의행이고 선행이고 하나님 앞에 구원이 되겠는데 자기가 깨닫지를 못해서 죄 아래 사망 아래 산다면 이는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격이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
사망권 안에 살고 있는 자기를 누가 살려주겠느냐? 부귀나 영광이나 권력이 자기를 살려줄 수 있겠느냐? 돈이 살려낼 수 있겠느냐? 성경은 이런 것으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한다. 신앙 믿음이 저질적인 차원에 있으면 깨닫게 해야 만이 거기에서 올라오는 건데 깨닫게 해 주는 것이 돈이나 물질로 되는 거냐? 안 된다. 질이 전혀 다른 거다.
신앙 믿음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이 사람을 바닥에 눕혀놓고 밥을 떠먹이면 그 믿음이 사는 거냐?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오늘날 교회가 이런 사고방식이 만연하다. 교인들을 영적인 차원에서 깨달음으로 올려야 하겠는데 ‘세상에서 복 복’ 하며 자꾸 먹는 것으로 말을 하니 그 믿음이 어떻게 살겠느냐? 영은 영이고 육은 육인데 육을 자꾸 주면 영이 어떻게 살겠느냐? 영은 영으로, 말씀으로 사는 건데 ‘예수 믿어 세상에서 부자 되라’ 라고 하면 믿음이 물질로써 살아지는 거냐? 오히려 더 죽는 거다. 이게 죄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도 죄고, 이걸 받아먹고 있는 것도 죄다.
세상인간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사망권 아래 놓여진 이 죄인을 세상의 어느 인간이 살려낼 수 있겠느냐? 사람의 신앙 믿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은 돈으로도, 물질로도, 권력으로도 안 된다. 신앙 믿음이 죽은 것을 살려내는 것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살려내지 못한다. 그러면 뭘로 살려내느냐? 구속의 역사라야 만이, 하나님의 역사, 주님의 역사라야 만이 사망에서 살린다. 인간을 생명의 구속으로 살리는 이 일은 너무나도 귀한 일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성령으로 오셔야 했고, 인간의 몸을 빌려서 인간으로 나야 했고, 33년간을 죄를 짓지 않고 사시면서 준비를 해야 했고, 이게 기본구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으심으로 우리를 영원히 살릴 수 있었고, 이 땅에 사시면서 죄와 사망을 정복하고 마귀를 이기심으로 우리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하셨고, 십자가의 고난에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정신과 육체의 모든 고통을 초월해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시키셨고, 부활 승천을 하심으로 우리를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이런 삶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고귀한 삶이다.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하고 살리는 일은 하늘로부터의 역사가 있어야 만이 가능한 거다. 이 구속의 사역은 돈이나 권세나 권력이나 인간의 수단 방법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인간의 구속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다. 인간을 모든 죄악의 길에서 살아나게 하려면, 진리의 바른 길로 가지 않고 죄악의 길로 가고 있을 때 여기에서 형제를 구원할 길은, 빗나간 정신에서 바른 진리 길로 가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 믿어 복 받아라’ 이것으로 되는 게 아니다. 지금 성경 본문이 이걸 말하는 거다.
6절부터 8절을 다시 한 번 보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이제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느냐? 그래도 뭔지 모르겠느냐? 통 못 알아 듣겠느냐, 아니면 조금은 알아 듣겠느냐?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의 수준에서 놀지 말고 옳은 진리이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안 믿는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고 다른 믿는 사람보다도 높은 수준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이치를 따라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게 아니라 물질이 풍부함으로 이걸 의지하는 거다. ‘자긍하는 자는.’ ‘자긍’이 뭐냐? ‘나는 부자다. 나는 풍부하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런 거다.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물질이나 돈이나 권력으로는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을 진리신앙의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할 수 없다는 거다.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생명의 구속은 인간의 힘으로는 영원히 할 수 없다는 거다. 안 되는 거다.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 주님의 것으로 되는 거다. 돈으로 되는 것은 귀한 게 아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돼야 만이 귀한 거다. 이게 구원이다. 기본구원 면에서도 오직 주님이 오심으로 만이 인간이 구속이 되는 거고, 성장적인 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라야 만이 되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이라야 만이 바른 길로 갈 수 있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