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츠 3
정리하다가 만 짐들이 제각각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정리할 생각을 제쳐놓고 안방 침대 위에 몸을 벌러덩 눕힌다. 좁았다. 집이 너무 좁았다. 안방의 크기는 전의 아파트의 크기와 별 다르지 않게 느껴지지만 건넌방의 크기는 많이 작았다. 거실도 주방도 욕실도, 모든 것이 작았다. 덩달아 그의 몸도 마음도 작아지고 있었다. 천장을 올려보며 담배 연기를 뿜는다. 연기는 천장에 닫기 전에 천장과 침대의 중간 지역에서 옅어지면서 넓게 퍼진다.
5
다음 날 그는 하루 종일 집 안 정리를 하였다. 그다지 정리 할 짐도 없어보였는데 막상 펼쳐 놓으니 만만하지가 않았다. 한쪽 농에 이불을 정리하고 다른 농에 양복과 셔츠를, 그리고 서랍에 양말을, 처제가 와서 도와주겠다는 것을 그는 한사코 사양하였다. 이제 손을 놓아야 할 관계를 이런저런 이유로 다시 연결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농문을 닫으려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셔츠를 본다. 많이 낡은 셔츠들이 오래된 양복 곁에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아내가 죽은 후 단 한 번도 옷을 사지 않았음이 기억났다. 그의 옷을 사거나 버리거나 세탁소에 맡기거나 빨거나 하는 것은 아내의 몫이었다. 그가 굳이 백화점을 함께 가지 않아도 아내는 그의 몸 치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아내의 필요에 의하여 양복이나 셔츠나 양말이나 아니 그의 몸에 걸치는 모든 것은 아내가 준비해 주었고 그는 입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는 아내가 죽은 후 단 한 번도 양복이나 셔츠나 양말을 사지 않았다. 옷을 사러 백화점에 가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그에게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냥 집에 있는 것 중에 그 날 그의 눈에 가장 깨끗하게 보이는 셔츠를 입었고 가장 깨끗해 보이는 양복을 입었으며 구멍 나지 않은 양말을 신었을 뿐이다. 때로 더럽다고 느껴지는 양복과 셔츠는 출근하면서 세탁소에 맡겼고 며칠 후 퇴근길에 찾아다 옷장에 걸어두었을 뿐이었다. 문득 그는 양복 두어 벌과 셔츠 몇 개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돌아오는 휴일에 백화점을 가 볼 생각이다.
6
백화점은 그의 아파트에서 세 불록 정도 떨어져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 홈 플러스가 있어서 그곳에서 옷을 살 만도 하였지만 그는 세 불록 정도면 걸어갈 만 하다는 생각과 아내는 언제나 그의 옷을 백화점에 가서 샀다는 말을 한 기억이 났기에 그는 늦은 아침을 먹고 천천히 걸어서 백화점으로 간 것이다. 백화점은 그에게 상당히 낮선 곳이다. 그의 일상에 백화점은 별로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화점은 언제나 아내의 몫이었다. 그는 늘 아내가 사온 것들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사용을 했었다. 그것은 아내의 눈썰미가 남다르기도 해서 언제나 유행에 떨어지지 않는 제품과 멋에 뒤지지 않는 것들을 구입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더불어 그는 외형적인 것에는 그다지 민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 그 날 아내가 챙겨주는 것을 두 말 없이 걸치고 다녔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나섰지만 백화점으로 봐서는 이른 시간인 것 같았다. 백화점은 한가했다. 일층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웬 화장품이 이리 많은지를 보면서 놀랐다. 한 개 층이 모두 화장품 매장으로 가득 했기 때문이었다. 화장품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는 무심코 숨쉬기를 입으로 한다. 그러면서 그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아동복 매장들로 가득한, 삼층은 여성복 사층은 등산복과 골프 전문매장. 그리고 남성복은 오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하였다. 대충 어떤 옷들이 있는지 살피는 것과 더불어 가격대도 눈요기 삼아 살펴볼 생각으로였다. 어느 매장이든 거의 비슷했다. 전시용으로 마네킹에 입혀 놓은 몇 벌의 옷과 행거에 걸려있는 양복들. 셔츠들. 넥타이등이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이, 가격대도 별반 다를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중간 중간 세일이라고 크게 써 붙인 판매대의 옷들과, 정품과 함께 세일 품을 파는 매장이 있을 뿐, 그는 천천히 느긋한 걸음으로 눈요기를 즐기며 걸었다. 하지만 남성 매장이라고 해도 남성들 보다 여성들이 더 많아 보인다. 물론 남녀가 함께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여자 혼자 매장을 도는 모습이 더 많이 보인다. 어쩌면 저 여자들도 내 아내처럼 남편을 위하여 필요한 옷을 사기위해 왔거나 아니면 혼자 미리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점지해 놓은 후 저녁에 남편이 퇴근하면 함께 나와서 사기 위해 돌아보는 것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매장을 한 바퀴 돌아본다.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아이의 짜증을 달래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의 엄마가 말한다. '여기서 얼른 아빠 셔츠 사고 네 장난감 사줄게, 조금만 참아, 알았지?' 아마 아이가 이곳에 오기 전에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 매장을 지나쳤나보다. 하긴 아이에게 있어서 아빠의 셔츠는 관심 밖의 일이다. 아이의 세계에서 아빠의 셔츠는 전혀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아이의 아빠가 아이를 안는다. 여자가 아이의 손에 막대 사탕을 한 개 들려주지만 아이는 받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아이는 엄마의 눈초리를 살피면서 받아드는데 결코 즐거운 표정은 아니다. 어쩌면 엄마의 강요에 의하여 받아 들 수밖에 없는 막대 사탕이었을 것이다. 아이를 안은 부부가 어느 매장 앞에 서는 것을 보면서 그는 커피 한 잔이 생각났다. 그리고 매장 한 곳에 있는 간이 커피숍이 생각난다. 요즈음 트렌드는 매장 한 곳에 그런 휴게 공간을 만들어 놓음으로서 손님들이 쉬면서 쇼핑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있는데 그 결과는 매출의 상승효과를 내고 있다는 말을 어느 뉴스에서 들은 기억이 난다. 그는 커피숍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시켜 한 모금 마신다. 쌉쌀한 향과 맛이 그의 몸을 산뜻하게 만들어 준다. 잠시 그렇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커피를 마신 그는 문득 소변이 마렵다는 생각을 한다. 화장실로 간 그는 별로 나오지도 않는 소변을 억지로 본 후 세면대 앞에 가서 손을 닦기 위해 물로 손을 한 번 행군 후 비누를 들어 손에 비비며 앞의 거울을 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셔츠 주머니 위에 있는 제품 회사의 로고를 본다. 영문 이니셜로 JB라고 쓰여 있는 로고를 보다가 그는 멈칫한다. 어디서 본 듯한 로고이기 때문이다. 그는 손을 부지런히 닦은 후 다시 매장으로 돌아와 한 바퀴 돌기 시작한다.
JB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매장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면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곁에 있는 것이다. 그는 매장 앞으로 가서 셔츠를 내려 본다. 삼십대의 여자가 그 앞에 오더니 상긋 웃으며 인사를 한다. 그리고 그의 셔츠를 본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이 조금 흔들린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눈치 채지 못하고 셔츠를 대충 살핀 후 그 옆의 세일 매장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그녀의 말이 들린다.
-고객님! 셔츠는 제 철에 제 상품을 사시는 것이 가장 좋답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뒤통수를 맞는 느낌을 받는다.
‘여보! 누가 그러는데, 셔츠 같은 것은 제 철에 정품을 사 입는 것이 가장 좋다던데’
‘누가?’
‘오늘 당신 셔츠를 산 매장에서 그러던데.’
‘그래!?’
‘응! 그 여자가 그러는데 셔츠 같은 것은 제 철 과일과 같은 것이라면서 요즈음은 제철 과일이라는 말이 쏙 들어갔을 정도로 사시사철 과일을 먹을 수 있지만 사실 제 철에 나오는 과일 만큼의 맛은 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셔츠 같은 것도 그렇다고’
그는 아내의 말에 그렇게 말하는 장사 수완도 있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그 여자는 말하기를 세일 상품이나 이월 상품은 아무래도 정품과는 다르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물었지. 그게 무슨 말이냐고’
‘그랬더니?’
‘세일 상품은 아무래도 세일 가격을 맞춰서 나오는 물건이라는 거야. 그리고 이월 상품은 버림받은 상품이라고’
그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그런 뚱딴지같은 말이 있느냐는 듯
‘그러니까 그 여자의 말은 자기들의 상품은 세일이나 이월이 없다는 거야. 세일 상품이라고 하면서 정품 보다 가격이 낮은 것은 그 가격대를 맞춰서 나오는 물건이 거의 90%이고 이월 상품은 손님들이 선택하지 않아서 팔지 못한 것, 물론 수량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거지, 그래서 내가 물었어.’
‘그럼 여기는 세일이나 이월 상품 판매는 안하느냐고’
‘그랬더니’
‘자기네는 하지 않는데. 물론 가격은 백화점 판매 방침에 의해서 주변 매장과 같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자기들의 상품은 주변 매장의 가격대에 비하여 월등히 좋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니까 가격대는 주변 가격을 맞출 수밖에는 없지만 그 대신 그만큼 제품을 잘 만들어 내고 있다는, 그 여자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치더라고. 그래서 하나 사왔는데…….’
아내는 그런 말을 하면서 셔츠를 그 앞에 내려놓았었다.
그 일 후에 그는 아내가 어느 매장에서 어떤 제품으로 사왔는지 묻지도 않았고 그냥 주는 대로 입곤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의 셔츠는 전부 JB로고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으면서 여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키는 아내보다 조금 더 커 보였지만 아내보다 조금 마른 체격의 여자. 여자의 얼굴은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여자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한다. 왜 여자는 긴장을 하고 있을까? 손님이야 늘 오고 가는 것이고, 사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물건을 몇 번 들었다 놨다 하다가 그냥 가는 손님도 있는 법인데 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마음에 궁금증을 유발한다. 하지만 그는 여자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앞에 있는 셔츠 중에 100호를 하나 들어서 여자의 손에 건네주었다. 여자는 셔츠를 받아 들고 허리를 굽힌다. 그러더니 그가 건네준 셔츠와 같은 셔츠를 매대 아래의 보관대를 열어 다른 것으로 꺼내서 비닐 봉투에 넣어준다. 그러면서
-손님께서 주신 것은 견본이라 서요…….
변명처럼 한 마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