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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92
8월19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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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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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S_Lfu1Av_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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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금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과 함께 모여 ‘원장 직무 수행’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살레시오 원장 매뉴얼’이란 책을 통독하다보니, 원장에게 요구되는 덕목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과중하던지, 합당한 원장 후보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0여년전 돈보스코가 청소년 구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살레시오회를 막 창립하던 초창기 무렵의 일입니다.
1863년 돈보스코가 48세 되던 해, 첫번째 사업체였던 토리노 발도코 오라토리오가 넘쳐나는 아이들로 인해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돈보스코는 미라벨로라는 지역에 두번째 오라토리오를 만들었고, 그 오라토리오의 원장으로 애제자였던 미카엘 루아 신부를 임명했습니다. 당시 원장으로 임명된 그의 나이는 불과 26세였습니다.
돈보스코 입장에서 걱정이 많이 되었겠지요. 아직 젊고, 병약하며, 경험도 일천한 루아 신부의 어깨에 너무나 과중한 직무를 얹어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지, 돈보스코는 그를 파견하면서, 친필 편지를 하나를 써서 건넸습니다.
원장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세하게 적었는데, 몇 구절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그 어떤 일 앞에서도 분노하지 마십시오.
☞ 원장의 고행은 부지런히 자신의 의무를 행하고, 타인이 주는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 경건하고 열성적이며, 주의를 집중하여 미사를 드리고 성무일도를 바치십시오.
☞ 매일 아침 묵상과 성체조배를 빠뜨리지 마십시오. ☞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보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십시오. 명령을 내리거나 훈계를 할 때는 늘 사랑과 인내로써 하십시오.
☞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언제나 잠깐이라도 하느님과 상의하십시오. 보고를 받을 때는, 끝까지 주의 깊게 들어보고, 판단을 내리기 전에는 잘 경청하고, 진위관계를 반드시 파악하십시오.
결국 원장은 명령하고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봉사하고 희생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장은 첫째가 아니라 꼴찌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복음 말씀 말미에는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오 복음 20장 16절)
지금 이 세상에서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눈만 뜨면 거듭 성찰하는 노력입니다. 말 한 마디를 할때, 행동 하나를 할 때도,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행할 일입니다. 지금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유심히 돌아볼 일입니다.
지금 자신이 행하는 권위가 혹시라고 크게 변질되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이 권위중독증에 걸려있지는 않은지? 요즘 제일 조심해야 할 갑질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오늘 아무 것도 아닌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쥐꼬리만한 권위를 부여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첫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실시간으로 듣기 위해, 더 자주 자신을 개방하고 깨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첫째로 살아가고 계시는 분들, 거듭 성찰하지 않고, 부단히 기도하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비참한 꼴찌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가장 부끄러운 꼴찌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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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감사는 태도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f1c6ZXVN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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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하늘 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기보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우리를 가난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종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종이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에 종은 아무리 가져도 부자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종임을 고백하는 방법이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중에서도 나중에 첫째와 꼴찌가 나누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어떻게 첫째와 꼴찌가 나누어지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습니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아침에 만난 이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아홉 시에도, 열두 시와 오후 세 시, 그리고 다섯 시쯤에도 나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주인은 다섯 시부터 온 이들에게 먼저 한 데나리온씩 주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세 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이들은 조금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은 그들을 꾸중합니다.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일해 놓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적게 받았다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는 이들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한 데나리온에 감사하지 못하고 적게 받고 있다고 불평한다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더라도 꼴찌가 됩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려 한다면 어차피 갈 것, 꼴찌보다는 첫째가 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에 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늦게 와서 가장 먼저 돈을 받고 간 이들이 가장 감사할 줄 알았기에 하늘 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일꾼들이라면 어떻게 감사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일한 것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말고 자신이 약속하여 받은 ‘한 데나리온’만 바라봐야 합니다.
저는 아침마다 제 방에서 운동합니다. 절 운동과 팔벌려뛰기를 합니다. 처음 팔벌려뛰기를 할 때는 50번 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00번씩 2세트를 합니다. 그래도 별로 힘들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 근육이 조금 붙어서 나아진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운동하는 방향을 조금 틀었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엔 벽을 보면서 했다면 지금은 ‘십자가’를 보면서 뜁니다. 100번쯤 뛰면 힘이 듭니다. 그러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보면 ‘이것 뛰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예수님은 날 위해 십자가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서 더 뛰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감사의 힘일 것입니다. 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더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아침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온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나를 똑같이 대우하는데, 왜 그 사람에게 감사해야 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한 일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비교하면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데나리온’을 바라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 데나리온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시는 ‘성체, 성혈’입니다. 한 데나리온씩 주는 것이 주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주인은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사 때,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라고 사제가 말할 때, 그때만 보지 말고 우리 삶에서 그분을 끊임없이 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가 솟아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갑자기 불림을 받아 하루 일했는데 10조 원을 받았다면 누가 1시간 일하고 10조 원을 받건, 2시간 일하고 10조 원을 받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성체의 가치를 모르니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체가 없으면 지옥행이어야 함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감사는 태도입니다. 태도는 내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나는 ‘고맙습니다. 나는 진실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지나간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려고 하면 그냥 시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고정하면 됩니다. 내가 그분께 해 드리는 것이나 다른 사람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관심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순간마다 십자가만 바라보고 그 사랑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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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0,1-16 : 포도밭의 일꾼들
오늘 복음에서 밭 임자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주인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사람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른 아침 여섯시에, 아홉시에, 열두시에, 세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포도밭은 하느님의 계명들이고, 이곳에서는 온갖 덕이 포도나무 가지처럼 늘어져 있다. 즉 친절, 순결, 온유, 인내, 고결함 등이다.
교부들은 이 비유를 설명하면서, “하루”를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고 이른 아침에 아담과 에녹의 시대에 살던 이들을 부르셨고, 아홉시에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부르셨고,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오후 세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부르셨으며, 오후 다섯 시에는 다른 민족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그들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6절)라고 묻는다.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들은 모두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였다.
저녁에, 즉 시대의 끝자락에 밭 임자는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내주라고 한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고생은 하지 않고 주인의 후한 덕으로 가장 먼저 보수를 받는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영광을 받은 것이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온 사람들이 받는 품삯을 보고 자기들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 그들은 불평을 한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절) 이렇게 말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을 기분 나빠했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였다. 이제 밭 임자는 그 사람의 시샘을 꾸짖는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5절)라고 하였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16절)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한 시간을 열심히 일하여 하루의 품삯을 받은 이들처럼 우리의 삶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품삯을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품값이라기보다 은총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일한 대가, 보수, 노임이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우리가 불림을 받은 후의 삶을 충실히 하여 그 선물을 받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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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마태오 복음에만 실려 있습니다. 이 비유의 첫째 부분은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의 고용과 이에 해당하는 품삯에 대한 주인의 지시가, 둘째 부분은 온종일 일한 일꾼들의 품삯의 지급에 대한 불평 그리고 이에 대한 주인의 응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평의 주된 이유는 주인이 일이 끝날 무렵에 온 일꾼들과 온종일 일한 사람들을 똑같이 대우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생각에서, 특히 오늘날과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주인의 행동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일꾼이 자신의 품삯을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고, 일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의 체제는 철저한 신분 사회였고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게다가 권력과 부는 소수의 지배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차지였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포도밭 주인의 처사에 대하여 그 누구도 뭐라 할 상황은 아닌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비유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 정의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정의를 담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자면 비유 속 주인은 원래의 계약대로 품삯을 계산하였기에 결코 불의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오히려 이 정의를 깨뜨린 것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일어난 먼저 온 일꾼의 질투입니다. 주인의 정의, 곧 하늘 나라의 정의에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자비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노동의 대가만이 아니라 구직을 걱정하며 장터에서 온종일 서 있던 이들의 정신적 고통의 대가도 고려하시는 자비입니다. 마지막 사람에게도 고용의 기회를 주어 생계를 보장하여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배려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구원받은 첫째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꼴찌가 되어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을 돌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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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점에서, 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신앙 여정을 시작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 라는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그 나라에서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차별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나라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행복한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한때 박해자였던 바오로 사도와 그 박해로 목숨을 잃었던 스테파노 순교자가 똑같은 행복과 평화와 안식을 함께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스테파노 순교자가 부당하고 불공평한 일이라고 항의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마태 20,9-12)
‘맨 먼저 온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은 ‘자기들이 더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맨 나중에 온 이들이 같은 품삯을 받는 것을 비난하지만, 속으로는 자기들에게 특별대우를 해 주지 않는 것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뜻하고, ‘품삯’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
1) ‘맨 먼저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했으니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이들보다 품삯을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 시간이 많으니 품삯도 많아야 한다는 그들의 말은, 비유의 내용 안에서는 ‘일리 있는’ 말로 보입니다. 그러나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을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신앙생활은 노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온종일 고생한 사람들이 아니라 은총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총을 충만히 받았음을 깨닫는다면, 불평하거나 항의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감사드릴 것입니다. 만일에 실제로 신앙생활을 중노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기쁨도 사랑도 없이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그의 그런 생활은 사실상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노동인가? 은총을 누리는 생활인가?”>
2) 사실 남들보다 먼저 복음을 전해 듣고, 남들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감사드릴 일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왜 부모님 마음대로 나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종교와 신앙은 내가 나의 의지로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물려주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유아세례를 받게 한 것이고, 그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안다면 부모에게 감사드리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고 유아세례는 자녀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아닙니다. 첫 영성체를 하고 정식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자녀 자신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3-16)
‘한 데나리온’이라는 품삯은 신앙 여정을 충실하게 마친 사람들이 들어가게 되는 하느님 나라, 또 그 나라에서 받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밭 임자는 일꾼들과 맺은 ‘계약’을 근거로 자신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비유의 내용이 아니라 실제 신앙생활을 생각하면, ‘하느님 나라는 하나뿐인 나라’ 라고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더 좋은 나라도 없고, 덜 좋은 나라도 없습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보다 더 좋은(더 크고, 더 많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는 일도 없고, ‘덜 좋은 구원’과 ‘덜 좋은 영원한 생명’을 받는 일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전부 다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됩니다. 그것에 대해서 불합리하다, 불공평하다, 부당하다고 비난할 이유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글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인데, 영원보다 더 긴 시간이 있을 수 없고, 영원보다 짧은 시간은 영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궁극의 목표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있을 수 없는, 그 자체로 완벽한 가치를 지닌, ‘완전한 삶’입니다. 만일에 덜 좋은 구원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비유의 내용에서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이 포도밭에 늦게 온 것은 그들 자신들의 탓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놀다가 늦게 온 사람들이 아니라, 일을 주는 사람이 없어서 장터에서 일거리를 찾으며 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7절) 이것은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신앙생활을 늦게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늦게 시작한 것과 신앙생활 기간이 짧은 것을 탓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하나뿐이고, 그 자격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가서 누리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똑같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현재의 자격만 보시고 과거를 따지지 않으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평생 노력하고, 마침내 그 자격을 얻었다고 해도, ‘과거의 삶’이 계속 발목을 붙잡는다면, 예수님께서 그토록 ‘회개’를 강조하신 일과 안 맞게 됩니다. 하느님은 진심으로 회개하고 보속한 사람이라면 그의 과거는 보지 않으시고 회개한 현재 상태만 보시는 분입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하느님의 판단 기준은 사람의 판단 기준과 다르다.”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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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호수에서 오리 가족을 보는 것이 작은 즐거움입니다. 2달 전에 16마리의 새끼들과 오리가 호수로 왔습니다. 처음에는 언제나 어미 오리가 앞에 있었습니다. 새끼들은 어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잠시 멀어졌다 싶으면 쏜살같이 어미 곁으로 달려왔습니다. 2달이 지난 지금 새끼들은 제법 컸습니다. 이제는 새끼들이 앞에 있고, 어미는 뒤에서 새끼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새끼들을 믿고, 새끼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표징을 보여주셨고,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새끼오리들처럼 예수님의 곁에서 보고, 듣고, 따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둘씩 짝을 지워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병자를 고쳐주고, 세례를 베풀고, 복음을 전하고 돌아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강물은 흐르기 마련입니다. 뒤에 오는 강물에 자리를 내주고 더 깊은 바다로 가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오리만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강물보다 못할 때가 있습니다. 실수를 탓하기보다는 다시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이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것도 큰 지혜입니다.
코로나19로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습니다. 처음 받은 것은 전 국민에게 주는 지원금이었습니다. 은행계좌로 1,200불이 왔습니다. 잘사는 사람도, 보통인 사람도, 못사는 사람도 공평하게 받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재난지원금이 있었습니다. 은행계좌로 3,000불이 왔습니다. 직원 일인당 1,000불씩 주어졌습니다. 사장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세금을 내는 직원이 3명이라서 3,000불이 나왔습니다. 직원급여 지원금도 나왔습니다. 2달 동안 직원을 해고하지 않는 조건으로 나왔습니다. 25,500불이 은행계좌로 왔습니다. 코로나19로 홍보할 기회가 없었는데 정부의 재정지원 정책은 제가 일하는 신문사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국도 정부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미국처럼은 아니지만 전 국민에게 일정액수의 지원금이 주어졌습니다. 저는 외국에 있기도 하고, 미국에서 이미 받았기 때문에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화살에 맞은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화살의 종류가 아닙니다. 화살을 쏜 사람이 아닙니다. 화살에 맞은 이유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나중에 해결해도 되는 문제입니다. 코로나19는 세계 경제에 엄청나게 큰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미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재정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유럽도 미국과 비슷하게 재정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재정지원을 하였고, 앞으로도 해야 할 것입니다. 생산, 공급, 소비는 경제의 3가지 축입니다. 소비가 위축되는 시기에는 과감한 지원정책이 필요합니다. 정부의 정책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서 실행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의 일당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하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하루 생활에 필요한 금액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이 하루에 필요한 만큼은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 낮부터 일한 사람은 오후에 와서 일한 사람이 같은 일당을 받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일한 시간을 기준으로 일당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기준으로 일당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능력, 재능, 외모와 상관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찍찍이(velcro)' 같은 것이어서 우리 신경계통에 즉각적으로 단단히 둘러붙는 반면에,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선하게 보는 것 등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테플론‘ 같은 것이어서 신경계에 잘 붙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묘한 것은 우리가 이 긍정적인 감정들을 적어도 15초 이상 우리 생각 속에 붙들어 둘 때는 이 감정들이 신경계통에 더욱 단단하게 둘러붙는다고 합니다. 관상은 삶의 긍정적인 모습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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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포도밭 주인이 길을 나섭니다>
마태오 20,1-16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포도밭 주인이 길을 나섭니다>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은 오후 다섯 시
하루 종일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그저 일꾼이 되기를 바라던
소박한 꿈마저 허공에 날려버리고
자신의 주린 배를 움켜쥘 틈도 없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아른거려
더욱 서러운 시간
하루의 넉넉한 결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여유로운 휴식을 기대할 오후 다섯 시
수고로이 포도밭 주인이 길을 나섭니다
자신의 탓 없이 일하지 못해
스스로 무가치하다며 풀죽은 사람들
소중한 일꾼으로 모시고
다른 이들의 자그마한 노동마저도
고운 결실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고마운 선물로 받아들이며
‘일한 만큼’이라는 냉혹함 대신
‘사람답게 살만큼’이라는 따뜻함으로
넉넉히 나누어 함께 살고파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일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절박한 마음으로
애써 포도밭 주인이 길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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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주님의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
+찬미예수님
간혹 부모님들을 만나면 아이들의 성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주로, “내 아이가 사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하면 성소의 꿈을 심어줄 수 있을까요?” 등의 대화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아주 간혹, “내 아이가 사제직에 관심이 있는데 부족한 것이 많아서 걱정이에요”,
“우리 아이는 복사단 활동도 하지 않았고 유아세례를 받지 않아서 자격이 없어요”
라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분들을 만날 때 마다 제가 떠올리는 복음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부르심의 시기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신학교에 막 입학한 학생들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정확히 드러납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고 복사단 활동을 하며 성소의 꿈을 키워온 학생들도 있지만 중고등학교 때 세례를 받았거나 오랜 시간 냉담을 하다가 부르심에 응답해 신학교에 오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의 입학 기준에는 세례성사를 받은 지 3년이 지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는데, 이를 채우지 못해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다가 신학교에 입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늦게 받았다고 해서 사제가 된 뒤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세례나 견진을 늦게 받았을 지라도 신실하고 모범적인 사제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사실 언제 하느님이 부르시든 그것에 응답하기만 하면 되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주인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일을 하는 일꾼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누군가는 이른 아침에 일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오후 다섯 시에 일을 시작하지만 그들이 밭는 품삯은 모두 똑같습니다. 당연히 먼저 온 사람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일을 한 시간과 양이 그만큼 차이가 나는데 동일한 값을 받는 다는 것은 불공평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애초에 계약을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하였으니 먼저 일을 시작한 사람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늦게 온 이들에게 그와 같은 값을 쳐 주는 것은 전적으로 주인의 마음이며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을 늦게 시작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화는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지방에서 포도를 따는 때는 9월 말경이었는데, 10월이 되어 날씨가 선선해지기 전에 포도를 서둘러 따지 못하면 농사를 망치게 되므로 짧은 시간이라도 일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늦게 일을 하게 된 이들이 게으른 이들은 아니었습니다. 지방 장터는 노동자들의 대기소와 같은 곳이었는데, 이른 아침에 노동자들은 연장을 들고 장터에 나와 자신을 써줄 고용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이른 시간부터 고용이 되어 일을 할 수 있었지만 누군가는 오후 5시가 될 때까지 일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도 빈번했습니다. 이를 생각해보면, 일을 하고 싶지만 고용되지 않아 초조하게 앉아있는 일꾼들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날품팔이 노동자들, 노동자들 중에서도 가장 하층의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이들. 차라리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노예나 종들이라면 적어도 굶을 염려는 없었겠지만 이들은 일을 못하게 되면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굶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누군가가 나타나 늦은 시간이지만 일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은총이었을 것이며 아주 감사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은, 때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앞에서 미리 부름을 받은 그 누구도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유다인들에 대한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방인들을 멸시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먼저 선택받았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부름을 받은 이방인들도 하느님 앞에 모두 평등하며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늦게라도 하느님을 찾은 사람들, 그리고 뒤늦게나마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돌아온 이들에게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우리 중에 누구는 이른 시간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있고 조금은 뒤늦게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와 같이 성직자의 역할을 하는 이들도 있고 평신도의 역할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누가 더 낫다고도 부족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하기에 똑같이 소중한 사람들이며 각자의 역할은 하느님께 커다란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그렇다면 어차피 같은 은총을 받을 것 조금 천천히 일하는 것이 이득이 아닌가 싶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결코 스스로를 위한 생각이 아닙니다.
오늘 입당송이 이야기하듯, “주님의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이러한 하느님의 균등한 은총과 사랑에 감사하며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하루빨리 주님께 기쁨이 되고자 채워나갈 것을 약속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랑에 지치지 않으시는 하느님, 누구에게나 같은 사랑과 은총을 보내주시는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자애로운 고용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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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하여 선함으로 충만하신 하느님의 태도를 보여 주십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맨 처음으로 부름을 받은 이들은 틀림없이 박식한 라삐들과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바리사이들뿐만 아니라 하느님 약속을 상속받은 이들인 모든 히브리 백성이었습니다. 반면에 맨 나중에 온 이들은 예수님께서 찾으러 오셨고 당신 초대로 하늘 나라에서 구원을 차지한 죄인들입니다.
오늘 비유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감출 때 예상되는 불의나 종교적 무관심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비유는 주인도 일꾼들도 포도밭도 아니고, 다만 먼저 왔든 늦게 왔든 모두가 같은 액수로 하루에 받는 품삯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지지하는 상업 종교와 보상 윤리에 맞서 사람에게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이렇게 거저 주시는 구원과 용서 그리고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독단적인 행위나 부당한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진실한 회개로 당신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만나러 가시는 사랑스러운 아버지의 행동입니다.
형제를 받아들이는 문을 닫는 바리사이적인 자기만족과 하느님의 구원을 우리의 선행에 ‘합당한 것’으로 바라보는 계약상 종교에서 출발해서는, 모든 인간적 정의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할 수 없고 닮을 수도 없습니다.
이른 아침의 일꾼들, 곧 계명에 충실한 옛 그리스도인들과 신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도록 포도밭에 일찍 불러 주셨음에 기뻐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맨 나중에 온 일꾼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하신 분이시고 거저 주시는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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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철희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의 선택과 판단>
우리는 세상을 온전히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야 자유이지만, 그 말을 할 때 갖는 생각은 세상의 것이라면 내가 무슨 일이든지 해도 좋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보통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말로는 가능해도 실제로는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이야기에, 예수님은 우리더러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검가나 희게 만들지 못하면서 맹세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세상일에 대한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세상 모든 일을 한 가지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자신감은 하느님을 두렵지 않게 생각하는데서 나옵니다.
신앙의 표현으로는 하느님을 두렵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인 오만함에서 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하는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한다면 ‘나보다 더 힘이 강한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일에 자신감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정말 필요할 때는 두려움을 갖기 마련입니다.
신앙인으로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가리켜 ‘두려워 함’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특히 견진성사를 이야기할 때에 그런 표현을 씁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하느님을 공경하는데서 나오는 존경심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귀신들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올바로 돌아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태어나는 일도 내 맘대로 못했고, 세상을 다 마치는 순간이 언제인지도 모르면서 그 둘 사이의 인생의 시간을 우리는 함부로 생각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백성들의 목자를 향하여 징벌의 소리를 선언하십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정말로 필요한 순간에는 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 소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삶을 더 낫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 각자의 마음이기는 해도 그것이 올바른 일인지는 따로 생각해야 합니다.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한 주인의 처사에 항의하던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던 포도원 주인의 말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일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과 판단에 대하여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드러낼 수 있는 올바른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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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마태 20, 1-16)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찾아보자.
첫째 우리는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예수님께 채용된 일꾼들이라는 것이다.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포도는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복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두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채용된 예수님의 일꾼들이다. 따라서 모든 크리스챤의 첫째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바로 그곳에서 나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유치원에서 일을 하던지, 가정에서 가정 주부로서 일을 하던지, 직장에서 일을 하던지, 또는 병원에서 일을 하던지, 크리스챤의 첫째 의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성직자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병원, 학교, 유치원, 사회복지, 양로원 등을 가보면 운영자체에 역점을 두고 있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만일 우리가 복음 전하는 일에 중요성을 두지 않고 사업체의 운영에 또는 일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먼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한다.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모든 사업체는 복음전파의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가정의 가장들이나 주부들도 어떻게 하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직장에 가면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으로 채용된 주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저의 매일 복음 묵상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이 내용만이라도 가족들과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는 것도 아주 훌륭한 복음 전파에 동참하는 것이다.
두 번째, 포도밭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포도밭은 하느님의 백성을 말한다. 이사야서에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 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서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 말인가? ..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이사 5, 1-7)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어 에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해주시고 그들을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복지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보살펴준 백성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도 않았고 야훼의 계명도 지키지 않았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말인가?"라고 한탄할 정도로 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은 백성이었다. 이제 옛 계약을 폐기하시고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한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포도밭으로서 포도송이를 맺어야 할 하느님의 백성들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야훼께서 새로 만든 포도밭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가 송이송이 맺게 해야 한다.
포도송이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곳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가 포도송이를 맺어야 할 포도밭은(장소는) 바로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정, 직장 등은 포도송이를 맺어야할 포도밭이다. 포도송이를 맺으려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그곳이 집안이든 아니면 직장이든 그곳은 나의 포도밭이 아니라 주님의 포도밭이다.
따라서 우리는 채용된 일꾼답게 성실하게 일해서 많은 포도송이를 맺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 빈둥 노는 사람, 자기가 관리해야할 포도밭은 팽개쳐 놓고 다른 사람의 포도밭에 가서 그 사람도 일을 하지 못하도록 훼방노는 사람 등은 자기 몫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세 번째 우리는 주님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한 사람들이다. 한 데나리온이란 하루 일한 노동의 대가의 비용이다. 즉 우리가 하루 생활할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우리가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떤 노동의 대가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한 데나리온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노동의 대가를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일할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내가 잘나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 같은 이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시어 당신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러 주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드리며 기쁘게 일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루 일한 대가를 바라보고 일을 한다면 그것은 노동자로서 노동을 하는 것이요 일종의 노예로서 일을 하는 것이지 사도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일한 대가에 목적을 두고 일을 한다면 즉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창조적인 복음 전파를 할 수 없고 다만 마지못해서 시키는 일이니까 억지로 하는 복음전파가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떤 대가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도록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노예로 일하도록 불러 주신 것이 아니다. 일할 것이 없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김으로서 일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신다.
따라서 포도밭에서 일하는 이는 일 자체에서 즉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아야 한다.
한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보너스로 받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내가 얼마를 더 받을까 다른 사람들은 얼마를 받을까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말고 오직 나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을 10년 한 사람이나 5년 한 사람이나, 이제 갓 영세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복음을 전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주님의 일꾼들이다.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리움을 받았고 그 일을 얼마나 충실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얼마를 받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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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학생 내내 가지고 있었던 고민은 ‘내가 과연 신부가 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부가 될 자격이 제게는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신부가 되면 교회에 큰 해가 될 것 같다는 생각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신부님이 되고 싶었고 이렇게 매일 기도했습니다. ‘제가 크고 위대한 사람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세상에서 작은 빛을 비출 수 있는 존재라도 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당신 도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동시에 나름으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저 자신도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함 그 자체였지만 주님의 도움으로 조금씩 성장해가면서 지금의 제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신학생 때에 가졌던 순수하고 겸손했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주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으로 착각에 빠지면서 이상한 마음이 제 안에 생기게 되었습니다.
즉, 비판의 마음입니다. 다른 신부의 모습을 비판하고, 신자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또 교회의 모습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순수함과 겸손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고, 부정적인 모습만 가득히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은 보이지 않고, 내가 받지 못한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포도밭에서 일하는 일꾼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하루 중 서로 다른 시간에 불린 일꾼들이 나오지요.
그런데 나중에 똑같은 임금을 받게 됩니다. 이에 대해 이른 아침에 나왔던 일꾼들은 투덜거립니다.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분명히 공정하지 않은 처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맨 처음부터 일했던 사람이 아니라,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이었다면 어떨까요?
이 공정하지 않은 모습에 대해서 따질까요? 데모라도 해야 할까요?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고 대접해준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을까요? 처음에 주인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일했던 일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주인으로부터 “일하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떠했을까요? 감사했을 것이고, 더 열심히 일해서 주인에게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처음에 가졌던 순수함과 겸손함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순수함과 겸손함은 필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토록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강조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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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걸어서 성지순례를 하고 있었던 한 순례자가 길에서 마차를 만났습니다. 오랜 순례로 인해 다리가 너무 아팠던 그는 마부에게 태워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마부는 흔쾌히 허락하면서 마차에 태웠습니다. 얼른 마차에 탄 나그네는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까지 멉니까?”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이 말의 속도라면 3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순례자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하겠다고 생각하다가 피곤함에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마차의 덜컹거림에 놀라서 깬 순례자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30분 정도 온 것 같은데, 예루살렘 근처에도 오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다 왔나요?”
“예루살렘은 여기서 1시간 거리입니다.”
“아니! 아까 30분 거리라고 했고, 지금 30분 지났잖아요.”
그러자 마부가 말합니다.
“이 마차는 예루살렘 반대로 가는 마차입니다.”
우리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즉, 우리 삶은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을 향해 가는 우리는 아닐까요? 주님의 뜻을 새기며 정확한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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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한 목자 영성>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어제는 제 사랑하는 도반, 요셉 수도원의 착한 목자 원장 수사가 육체노동을 하고 있어 그 장면을 사진에 담아 격려 멧시지를 보냈습니다.
“요셉 수도원 주보 성인 노동자 성 요셉의 후예! 화이팅!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사진 인물, 자연 배경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시간되면 일 끝나고 갈 때, 두유 한잔+비타민1, 잡숫고 가세요!”
아마 150편의 주옥같은 시편중 가장 사랑받는 시편은 오늘 미사중 화답송 시편 23장일 것입니다. 화답송 후렴 시편 23장 1절은 언제 들어도 감미롭고 영혼에 깊은 위로를 줍니다. 아주 오래 전 묘비명을 청하는 이에게 지체없이 추천한 성구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저는 말을 바꿔, ‘주님은 나의 목자 부러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어라’ 되뇌어 보기도 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바위판에 있는 착한 목자 예수님 말씀입니다.
아주 예전 아빠스님 충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장상으로 생각지 말고 목자처럼 생각하라.’는 공동체 형제들을 ‘섬기고serve’ ‘보살피고care’ ‘떠받쳐주는support’ 일에 충실하라는 충고였습니다. 예전 교수 신부님의 ‘사제’나 ‘신부’ 명칭 보다는 개신교의 ‘목사’라는 명칭이 복음적이라는 언급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부단히 배워 닮아야 할 착한 목자 영성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통상 임금을 백성의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는 임금만이 아니라 다른 수장까지 포함됩니다. 오늘날로 하면 사회든 교회든 공동체의 크고 작은 모든 책임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착한 목자 영성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피를 토하는 듯한 말씀은 그대로 착한 목자 하느님의 심중을 반영합니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떼를 돌보지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물론 각계 각층 모든 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 목자의 진위를 가려내는 거울같은 말씀입니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떼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겠다. 나 이제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계속 반복되는 ‘내 양떼’라는 말마디입니다. 바로 착한 목자 주님의 양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목자들은 주님의 양떼를 잠정적으로 위임맡은 이들이고 원래의 소유주는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목자들이 평생 배워 닮아 가야할 착한 목자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제가 요즈음 동요 부르는 행복에 살고 있습니다. 동요에 보면 유독 엄마라는 말마디가 많이 나옵니다. 착한 목자 주님의 마음에 가장 근접한 분이 엄마일 것입니다. 바로 ‘섬집아기’ 2절의 엄마의 마음은 그대로 착한 목자 주님의 마음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못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 옵니다.”
동심으로 돌아가 착한 목자같은 엄마를 그리워 눈물짓게 하게 하는 동요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은 그대로 복음의 착한 목자 예수님을 통해, 또 곳곳에서 사목하는 착한 목자 주님의 종들을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착한 목자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임자와 같다.”
이런 착한 목자 주님의 영성을 사는 목자를 지닌 공동체가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짧은 말마디에 착한 목자 주님을 그대로 닮은 포도밭 주인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기본 소득제’의 원조가 바로 착한 목자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기본소득제는 재산이나 소득의 유무,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 등과 관계없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최소생활비를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천부의 인권을 부여 받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자유롭게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와 존엄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권리입니다. 바로 이게 하느님의 정의요 자비입니다. 그대로 자녀들에 대한 자비롭고 착한 어머니의 마음도 이러할 것입니다.
이런 착한 목자 주님이기에 일한 시간과 양과는 무관하게 맨처음부터 있었던 자들은 물론 아홉시, 열두시, 오후 세시, 다섯시 모든 일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제공합니다. 모두에게 최저 하루 생계비 임금을 똑같이 제공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착한 목자 주님의 정의요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았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중국 백장선사의 가르침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도 나옵니다. 일하고 싶어도 다양한 사유로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일에 관계없이 이유불문하고 이들도 먹어야 한다는 것이 착한 목자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무위도식無爲徒食, 아무 하는 일 없이 놀고 먹기만 함에 빗댄 좀 모욕적인 말마디인데 착한 목자 예수님에겐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죄스러운 말마디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포도원 주인의 품삯을 제공하는 순서도 맨 끝에 온자로부터 시작하여 품삯도 똑같습니다. 맨먼저 온 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합니다. 인간의 상식적 분배정의의 측면에서 볼 때 너무 불평등하고 불합리합니다. 투덜대는 모습이 흡사 루가복음 15장 돌아 온 탕자 작은 아우를 우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불평하는 큰 아들을 닮았습니다.
“맨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참으로 편협한 시야요 옹졸한 마음은 그대로 우리의 마음일 수 있습니다. 분명 외관상 충실한 당대의 기득권층들을 대변한 말마디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회개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늘 나라의 비유인 선한 포도밭 주인의 일화도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친구여,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참 멋지고 매력적인 착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주제넘게 편협하고 옹졸한 세상 정의의 잣대로 주님의 자비를 재단하는 어리석은 일꾼입니다. 예수님의 ‘니가 뭔데, 니나 잘해’라는 분위기도 감지됩니다. 얼마나 섬세하고 자상한 착한 목자 예수님의 마음인지요. 참으로 디테일에 강한 모습입니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숨어있기에 착한 목자 주님을 롤모델로 삼는 이들은 참으로 디테일에 강해야 할 것입니다. 비결은 단하나 형제자매들에 대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입니다.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입니다. 정말 가난한 이웃의 처지를 헤아렸다면 주님의 처사에 기뻐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당장의 일한 시간이나 양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총체적 딱한 내적 현실을 통찰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많은 식솔의 부양을 책임진 가장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착한 목자 영성을 지닌 이들이라면 모든 공동체 성원을 참으로 아끼고 돌볼 것이며 해고에도 신중에 신중을 다할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세상의 모든 각계 각층 다양한 지도자들이 필히 배우고 실천해야 할 착한 목자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하나하나 모두가 존중받고 배려받고 사랑받아야 할,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소위 갑질이나 혐오와 차별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착한 목자 영성입니다. 착한 목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착한 목자 당신을 닮아 자비롭고 너그러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안의 온갖 것도, 그 이름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하느님 찬양하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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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떤 일이든 사랑을 담아서 하라>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봐야 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지자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 시기심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른 이가 좋은 것을 얻는 모양새를 두고 내 안에서 악을 꺼내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의 좋은 것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못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 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내가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하였는데 누군가 챙겨주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 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을 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을 세상의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가 잘못이 아닐까요?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사가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 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 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가 먼저 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던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2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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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관대한 포도밭 임자이시며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진심이 드러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마태 20,1)
밭 임자가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구하러 장터로 나갑니다. 그는 첫 새벽에 만난 일꾼들을 자기 포도밭에 보내고도,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이렇게 네 차례나 더 장터에 나갑니다. 거기에 일을 얻으려 기다리는 이가 있으면 자기 포도밭으로 보내어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지요. 주인 중심이 아니라 일꾼의 바람를 우선하는 고용 방식입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 20,12)
분명 밭 임자가 첫 일꾼들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보았는데도 그들이 불평합니다. 가장 먼저 선택되었던 기쁨은 사라지고, 노동은 고생이 되었으며, 일한 시간과 수고가 억울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본주의 경쟁 문화에서 자라난 우리에게 이 항변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공정과 평등의 기치 아래 상위 1%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가치, 노동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는데 익숙한 세상이니까요.
타인이 덜 받는 것에 함께 분노한다면 정의, 연대, 사랑이겠지만, 타인이 동등하게 받는 것에 분노하는 것은 질투이고 시기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루 밥값을 벌기 위해 하루종일 가슴 졸인 수고까지를 노동에 준하는 가치로 보아 주는 주인의 마음씀씀이와 관대함이 놀랍습니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마태 20,13)
주인이 그들에게 첫마음을 일깨웁니다. 오히려 합의를 뛰어넘는 허상을 품은 이는 첫 일꾼들인 셈이지요. 그들은 '조금만' 일한 이들이 자기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분노한 나머지, 가장 먼저 선택되어 마음 놓았던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온종일 뿌듯했던 노동의 보람을 박탈감과 상실감으로 맞바꾼 형국이니 주인은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당신이 사랑하고 싶은 만큼 자유롭게 무한히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각 사람의 됨됨이와 자격을 따져 사랑의 양을 제한하거나 계산하는 분이 아니시지요. 만일 그렇다면 주님께 사랑받을 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도 안 될 겁니다. 누군가는 이런 주님 못마땅할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감사할 것입니다. 오늘 비유 속 일꾼들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주님을 닮아 관대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가끔은 깃털 하나 꼽을 자리 없이 마음이 편협하고 옹졸해지니, 남이 무얼 더 받았는지를 살피기보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에 더 주목하는 것이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사실 어쩌면 이런 주인 덕분에 우리는 무수한 죄와 약함에도 불구하고, 턱걸이로라도 포도밭 울타리에 아슬아슬 매달려, 아직까지 희망을 가지고 순례 여정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1독서에서는 목자들을 호되게 꾸짖는 주님의 노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목자들도 그렇게 대해 주길 바라셨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 이제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에제 34,11)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다시 우리를 그들 손에서 거두어 친히 보살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사랑하는 양들을 사람들의 손에, 그들의 방식에 맡겨놓았더니 사랑이 숫자나 도식으로 대치되어, 온기 없이 건조하고 냉랭한 조건 아래 갇혀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마음으로 양떼를 돌보실 착한 목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누구이건 어떤 몰골이건 더, 더, 더 사랑하고, 그래서 더, 더 더 주고 싶어하는 분이십니다. 끝내는 목숨까지 내놓으실 만큼 말이지요. 우리 주님이 그런 분이시니 이미 우리는 과분하게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목자 앞에서 보상과 댓가의 양을 비교하고 따지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잘났건 못났건, 의인이건 죄인이건 당신 포도밭으로 불러 함께할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괜한 곁눈질은 마음만 흐트릴 뿐이지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갑시다. 관대한 주인이시고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오직 하나의 관심사는 "나"뿐이랍니다. 주인의 이 눈먼 "내맘대로" 사랑 안에서 나는 온전한 주인공입니다. 그 주인이 그토록 아끼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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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울 때 울 줄 아는 사람이 건강합니다.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는 눈물이 필수입니다. 울어야 하는데 울지 못할 때 마음의 병이 생긴다고 합니다. 실컷 울고 나면 치유가 되는데, 내가 우는 것을 받아 주는 사람이 없어서 울지 못할 때, 그것이 가슴에 응어리가 되어 남아 있다가 마음의 병을 만드는 것입니다.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 왔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몇 살입니까? 아마도 아주 작은 어린이일 겁니다. 아직도 마음이 어디엔가 매달려서 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게 될 겁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것은 내 마음이 아직도 그곳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그 자리를 떠나 좀 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아이를 붙잡고 실컷 울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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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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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저희 올리베따노 연합회의 창설자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대축일입니다. “더 큰 사랑을 위하여”, 이는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시성 교황교서[사도좌 편지]의 제목입니다. 이 구절은 바로 오늘 <복음> 중에 나오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씀입니다.
“더 큰 사랑”이란, 진정 어떤 사랑인지, 성인의 삶이 어때했는지를 교종 베네딕도 16세께서 성인의 시성식 때 하신 <강론>에서 잘 말해줍니다. 다음은 시성식 때 하신 교종의 강론 말씀 중의 일부입니다.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안에서, 기도와 노동을 통하여 사랑의 열매가 열렸습니다. 그의 존재는 성찬례와 같았고, 그의 삶은 형제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로 이끄신 하느님 관상에 완전히 바쳐진 삶이었습니다. ~그는 1348년 큰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수도승임에도 불구하고, 병에 전념된 그의 수도승들을 돌보기 위해(시에나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머물기 위해) 몬떼 올리베또의 고독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역시 전염병의 희생물이 되어, 사랑의 확실한 순교자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인의 이 모범으로부터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으로, 최고의 희생으로 준비된 사랑으로, 그리고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삶으로, 우리의 신앙이 인도되도록 우리에게 초대장이 도착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표현이 있습니다. 곧 기도와 노동, 형제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 하느님 관상에 바쳐진 삶, 사랑의 순교자,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 희생으로 준비된 사랑,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분리되지 않음을 봅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조화는 결코 이론적인 숙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애덕적인 삶의 실존적인 실행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봅니다. 또한 이러한 애덕의 삶은 무엇보다도 기도와 더불어 실현된 삶임을 봅니다.
성인께서는 <편지 1>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덕들의 어머니는 애덕(사랑)이며,
동시에 이 애덕(사랑)을 발견하고 지키는 것은 기도입니다.”
성인께서는 모든 덕들이 사랑에 달려 있다고 하십니다. 모든 덕들이 사랑에서 태어나며, 그 사랑을 발견하고 지키는 것이 바로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기도하셨으며, 당신에게 있어서 기도와 삶은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곧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차고 넘쳐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는 <편지 39>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애덕(사랑)은 늘 봉사에 봉사를 더하는 모습으로 자기를 들어냅니다.”
이는 사랑은 결국 형제들에 대한 ‘봉사’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곧 형제에 대한 봉사로 드러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죽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지금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지금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성인께서는 실재로 페스트로 죽어가는 형제들에게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의 봉사였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순교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더 큰 사랑”을 실행했습니다. 진정 그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말씀을 온 몸으로 사셨습니다. 성인께서는 참으로 ‘애덕의 부추김으로 고무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편지 8>에서 이렇게 말한다.
“애덕의 부추김으로 고무된 사람은, (곧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성경>의 증언을 따르는 사람은) ‘소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나, 천상공동체의 지극히 거룩한 사랑을 통해서 모든 선한 것들을 얻습니다. 이 사랑에 의해 모든 것이 존재하도록 만들어졌고, 이 사랑을 통해 사람들은 아름다운 방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만일 당신이 땅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땅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하늘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이 아름다운 방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사랑으로만이 우리는 하느님이 되어 갑니다. 오로지 사랑으로만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되고, 하느님이 되어 갑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이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그렇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하느님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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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1)
주님!
당신은 무능하여 맨 나중에 올 수밖에 없었던
꼴찌들부터 품삯을 주십니다.
애시 당초 일을 부리기 위해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부르심은 이미 은총입니다.
은총은 계산이 아니라 자비인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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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20,16)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포도밭 주인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일꾼들 중에서 첫 번째로 부름을 받은 일꾼들이 주인의 처사에 불만을 드러내며 이렇게 투덜거립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20,12)
포도밭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20,15)
우리는 얼마나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내가 받고 있는 것들에 대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받은 것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참행복'은 내게 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주시는 것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 부름을 받은 일꾼들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간섭하면서 불만을 드러내거나, 또는 만족하지 못하면서 더 채우려는 욕심을 드러내면 첫째가 아닌 꼴찌가 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 첫째가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방심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꼴찌가 되는 큰 사고가 일어납니다.
세례를 먼저 받았다고 첫째가 되질 않습니다. 지금 예비 신자라고 해서 꼴찌가 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지금 깨어 있는 사람들!
지금 하느님을 굳게 믿는 사람들!
지금 주시는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첫째'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을 굳게 믿고,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받고,
받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드리면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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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jRLO0nzUVFQ&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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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마태 20, 15)
감사를 잊어버린
우리들 삶입니다.
새날이
밝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새날입니다.
자기만의
역사를 통해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저마다의
여정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듯 만남을
가능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삶의 목적은
주님의 자비를
깨닫고 감사하는
삶의 진실입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알게됩니다.
모든 여정의
기준점이 되시는
사랑의 주님이
계십니다.
한 쪽 끝에도
반대 쪽에도
그 가운데도
여정을 사랑하시는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우리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살게하시고
움직이게 하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새날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삶의 공식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성숙의 시간입니다.
이 모든 시간이
분명 은총이
되게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여정을
끌어안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은총이 되기 위해
주님께서는
저마다 오늘도
가장 알맞은 때를
위해 기다려주십니다.
은총과 기다림에
무관한 삶은
없습니다.
사람에 머무는
여정이 아니라
주님의 초대에
감사하는
여정입니다.
주님께서
지니신 은총의
그 힘을 믿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은총을 가지고
믿음의 길을
충실히
걸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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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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