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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잠긴 석파정 별당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과 북악산(北岳山),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 들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이 포근히 안겨져 있는데, 서울 도심과는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로 의구심을 내던질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병풍처럼 둘러선 인왕산과 북악산 자락에 듬성듬성 터전을 일군 집들은 지방에 시골마을이나 조그만 읍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진하게 선사한다. 게다가 도성과도 불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무척이나 가까운 거리로 조선 왕족은 물론이고 양반들의 별장 및 별서(別墅), 피서지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자연과의 동화를 꿈꾸었던 그들의 팔자좋은 바램은 부암동 곳곳에 그림 같은 명소를 빚어 놓은 것이다. 개발의 칼질이 무자비하게 춤추는 현대에 와서도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개발제한에 묶이면서 가까운 성북동과 마찬가지로 전원 분위기를 진하게 간직할 수 있었다. 이곳은 자하문에서 백사골 서쪽을 잇은 부암동 산복(山腹)도로에서 높은 고개를 넘어야 갈 수 있는 산골로 가까운 곳에 북악산길이 지나간다.
부암동의 서쪽 부분인 인왕산 동쪽 기슭에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현장이자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꿈이 담긴 무계정사, 20세기 초에 지어진 반계 윤웅렬 별장,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오래된 보현보살(普賢菩薩)을 간직한 성불사(成佛寺) 등이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 조금 더 확장하면 하얀 관음보살로 유명한 보도각백불과 옥천암(玉泉庵)이란 작은 암자가 있다. 그러다가 2008년 이후 부암동이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면서 답사객과 사진쟁이 나들이객의 발길이 제법 늘었다. |
반역(인조반정)을 꿈꾸며 칼을 씻던 곳, 세검정(洗劍亭) |
신영3거리에서 상명대 방면으로 3분 정도 걸어가면 멋드러진 바위에 홍제천(弘濟川)을 바라보며단아하게 서 있는 세검정을 만날 수 있다. 연산군이 1506년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그 부속 정자로 세웠다는 설도 있고, 숙종(肅宗) 때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는 설도 있다. 허나 둘 다 나름대로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연산군 때 세워진 탕춘대 부속 정자가 바로 세검정의 전신(前身)이 아닐까 여겨진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가득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이 여기서 광해군의 폐위를 모의하며 칼을 물에 씻었다고 전한다. (혹은 칼을 갈고 날을 세웠다고도 함)
이렇게 정권을 잡은 반란파는 칼을 갈던 곳을 반역을 모의한 상징적인 장소로 삼으며 이를 기념하는 뜻에서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영조 24년(1748년)에 약간의 수리가 있었으며, 1941년 불에 타버려 주춧돌 하나만 간신히 버티고 있던 것을 1977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생 소풍이라고 하며, 당시 조선 그리스도인 화보'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백사골 상류에자리한 뒷골마을(능금마을)이 능금 생산지로 이름이 높았음> 하지만 1970년 이후, 개발의 칼바람은 자하문고개를 넘어 평화롭던 부암동과 평창동까지 칼질을 자행하면서 피서객의 물놀이 현장인 홍제천은 물고기도 등을 돌린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해 버리고, 자두와 능금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세검정을 감싸 흐르는 맑은 계곡은 이제 백사골(백사실, 백석동천)이나 북한산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으며, 정자 바로 옆에는 4차선 도로(세검정로)가 뚫리면서 옛날의 운치는 거의 녹아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이기에 외딴 섬처럼 갇힌 세검정. 과연 옛날의 운치를 되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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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위가 바로 조선시대에 사초(史草)를 세초(洗草)했던 차일암(遮日巖)이다. 세초란 사초 등에 적힌 글씨를 물로 빡빡 씻어 지우고 그 종이를 재활용하는 하는 것을 말하며, 세초를 마치면 일종의 뒷풀이로 세초연(洗草宴)을 베풀었다고 한다. 사초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모태가 되는 데이터로 제왕이 죽으면 사초를 정리하여 실록을 편찬한다.
세검정 찾아가기 (2012년 2월 기준) (세검정에 정차하지 않는 노선은 세검정 초교에서 하차하여 도보 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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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의 옛 사랑방 -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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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에서 도심 방면으로 2분 정도 걸어가면 상명대입구 4거리가 나온다. 그 사거리 서남쪽에는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기와집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집이 석파랑(石坡廊)이란 전통 고급 한정식당으로 서예가로 활약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 선생이 1958년 자하문고개 남쪽 옥인동(玉仁洞)에 있던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집을 가져와 자신의 거처로 삼은 것이다. 그는 부암동에 집터를 닦으면서 순정효황후의 집을 가져왔고, 근처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의 별당(別堂)을 이곳으로 떼가지고 왔는데, 그 연유로 이곳이 석파랑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소전이 이곳을 등진 이후에는 고급 한정식당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진하게 풍기고 있으며, 창문 쪽 외벽에는 동그란 창문을 내고 주변 외벽에는 모조리 벽돌로 도배하여 마치 감옥처럼 폐쇄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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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에 잠긴 석파정 별당 |
현재 별당은 석파랑 소유로 손님을 접대하는 용도로 쓰인다. 대원군 별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의 식사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없이 깨끗히 보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면 뭐 봐줄 만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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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랑 정문의 위엄
양반가의 품격이 돋보이는 석파랑 정원 (왼쪽에 보이는 문은 만세문) |
석파랑 한옥은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중국식 호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뜰에 세워진 만세문(윗 사진의 왼쪽)은 고종(高宗)이 황제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자 1898년에 세운 만세문(萬歲門)으로 원래는 경복궁에 있었다고 한다. 궁궐 건축물의 품격이 고스란히 배인 문으로 지금은 석파랑 손님들이 지나다닌다. 양반가 정원의 고급 품질이 돋보이는 정원에는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으며, 곳곳에 조그만 절구를 비롯한 다양한 석물과 볼거리를 비롯하여 나무와 꽃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보통 일반적인 한정식당보다 1.5~2배 정도 비쌈) 그것도 10% 부과되는 부가가치세(VAT)와 서비스비는 별도로 내야 된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는 한숨만 짓게하는 그림의 떡 같은 곳이지만 이 땅에 흔한 졸부들에게는 그저 가뿐한 장소일 것이다. 역시 이 땅에서는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돈님이 많고 봐야 된다.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나도 과연 저곳에 당당히 어깨를 피고 들어가 한정식을 먹을 그날이 있을까? 돈을 몇 달치를 모아서라도 한번은 먹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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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
부암동의 지명유래가 된 부침(붙임)바위는 높이가 2m 정도로 바위 곳곳에 뚫린 구멍에 돌을 대고 비비면서 소원을 빌면 아들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래서 아들은 원하는 장안의 아낙네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서울의 명소였다. 하지만 1970년대 자하문고개를 넘어온 개발의 칼질은 부암동의 명물인 부침바위를 잔인하게 녹여버려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 겨우 표석을 세워 예전 이곳에 부침바위가 있었음을 아련하게 전할 따름이다. 실례로 이곳에서 멀지 않는 응암동(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응암동의 지명 유래가 된 매 모양의 잘생긴 매바위가 있었으나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폭파시켜 버렸다. |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던 탕춘대성의 성문, 홍지문(弘智門)
고된 세월의 때와 하얀 피부가 공존하는 홍지문의 뒤쪽 |
상명대입구에서 홍은동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과 탕춘대성(蕩春臺城)이라 불리는 성곽을 만나게 된다. 표백제로도 어림 없는 성벽에 가득 낀 알록달록 세월의 때는 문의 오랜 나이를 가늠케 해주며, 그의 모습을 더욱 중후하게 수식해 준다. 이 성곽은 도성(都城)에서 인왕산을 거쳐 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7km의 성곽(城郭)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仁祖) 임금의 머리통이 깨질 정도로 단단히 혼이 난 경험을 바탕으로 혹여 발생할지도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하고 비상시에 행궁(行宮)이 있는 북한산성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도록 비상대피로 확보 및 부암동과 평창동 일대의 국가시설<평창(平倉), 선혜청(宣惠廳), 조지서(造紙署)>을 보호하고자 숙종의 명으로 1715년에 축성되었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인왕산과 북한산의 경계가 되는 홍제천 협곡에 이때 지어진 것으로 탄생된 것으로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것도 모잘라 같은 해 8월에는 홍제천의 물을 흘러보내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마저 무책임하게 떠내려가 터만 아련하게 남은 것을 1977년 7월, 홍지문과 함께 복원되었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원할 때 새로 맞춘 것이다. 오간대수문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문 밖에는 벤치 등이 마련되어 동네 사람과 나그네의 두 발을 쉬어가게 했으며, 성문 앞뒤로 가로수가 조성된 짧은 산책로를 만들어 운치를 더한다.
홍지문 찾아가기 (2012년 2월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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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활짝 열며 오가는 이들의 통행을 묵묵히 굽어보는 홍지문의 앞쪽 옛 성문으로서의 위엄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홍제천의 물을 하염없이 흘려 보내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
북한산과 북악산 백사골에서 발원한 홍제천은 저 문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간다. 마치 냇물 위에뜬 5개의 무지개를 보듯, 유연하게 구부러진 홍예의 곡선이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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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을 향해 힘차게 뻗은 탕춘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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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늑하고 자신을 조용히 돌아볼 수 있는 장소로 그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