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바람재들꽃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바람재 사랑방 스크랩 엉뚱한 과제를 해갔다. 젠장
녹두 추천 0 조회 62 08.04.17 11:23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내안에 끓는 '촌것'은 대략 이렇다>

 

여섯 살, 집에 어른들은 없고 낙타표 성냥은 있다. “칙” 긋자 “확” 불꽃이 인다. 마침 맞게 바짝 마른 헛간 벽의 볏짚에 갖다 대자 화르르 화락 불이 번진다. 야이 벅수야, 빨리 찌그리. 네 살짜리 남동생이 한 대접의 소화용수를 찌끄렸지만 불은 잘만 탄다. 아이 멋져! 실험결과 헛간 홀라당 타고 아버지한테 간짓대로 쎄가 나게 맞다. 고기 좋아하는 남동생 헛간 안의 불탄 토끼장 닭장에서 나온 토끼구이 닭구이 양껏 먹다. 간짓대는 서울말로 대나무 장대. 쎄가 나게는 서울말로 혀가 나올 만큼 몹시. 교훈 자나 깨나 불조심.

 

여덟 살, 처음으로 낫질 하던 날. 오른손에 조선낫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발은 어깨 넓이로 벌려 반걸음 뒤로 뺀 다음 허리를 숙여 나락을 잡는다. 욕심난다고 너무 많이 잡으면 손 빈다 이 머이던지 과허먼 탈이 낭께. 예, 아부지. 손빌라 조심해라 이~ 알았어, 엄마. 낫을 몸 쪽으로 당기면서 동시에 왼손에 잡은 나락은 반대편으로 미는 순간 “샥” 나락의 밑 둥이 잘라지면서 단내가 나는 풀 비린내가 풍긴다. 할 일을 다 마친 나락둥치가 숨 돌리는 소리. 아버지 낫과 엄마 낫은 저만치 갔는데 나만 그 자리가 그 자리. 아이고 우리 손지가 밥 몇그럭 헐만치나 나락을 ?는가? 장허네. 장해. 샛거리 묵고 허소. 나락은 서울말로 벼. 샛거리는 서울말로 곁두리, 새참. 교훈 우리 할머니는 언제나 내편.

 

네 살, 중학생이 되면 까만 교복도 입고 모자도 딱 쓰고 까만 운동화도 신는다며 설레며 기다렸는데 청천벽력이 떨어진다. 교복자율화. 그래도 까만 운동화는 신어서 좋다 했는데 읍내 아이들은 다른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 프로스펙스 아디다스 프로 월드컵 미즈노. 나도 사 달라 졸라도 한 여름엔 돈 살 것이 없다. 돈 살 수 있는 영지버섯을 알게 된 후 마을  앞산에서 발견한 영지버섯 몇 개를 나뭇가지로 가려놓고 키우다. 운동화 만치 키워서 할머니 장에 갈 때 돈 사오라 주면서 프로스펙스 프로월드컵 미즈노라고 몇 번이나 말하다. 할머니가 사온 것은 양 갈래로 쫙 벌어진 가지 사이에 별 하나 떠있는 슈퍼카미트. 머릿속에 노란별이 뜨다. 돈을 사는 것은 서울말로 무엇을 팔아 돈을 마련한다는 뜻. 교훈 영어는 회화 위주로.

 

열아홉 살, 한겨레신문 창간호를 읽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사랑도 명예도 나가나가 도청을 향해를 듣다. 공부 못하는 똥통학교라고 선생들이 우리학교를 비웃다. 니미 조또 학생들 더 공부 안하다. 너희가 먼저 너희를 사랑하고 존중해야 세상도 너희를 사랑하고 존중한다며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열심히 공부하라 말씀 하시는 선생님을 만나다. 선생놈과 선생님을 구분하다. 종례 때 마다 전체 조회 때 마다 불순한 교육을 받지 말고 따라 하지 말라고 좋은데 안 써준다고 겁주다. 선생님들 교무실 앞에서 하얀 마스크에 검은 테이프로 가위표 치고 농성하다. 선생님 힘내세요 외치다. 선생님들 강제해직 당하다. 와와 운동장에 1학년들 모이다. 선생놈들이 들어가라며 몽둥이로 패다. 와와 2학년도 나오다.

 

후배들한테 쪽팔리기 싫어 나가려는데 담임이 참으라고 참으라고 좋은데 가려면 참으라고 부탁이라고 말하다. 쪽팔리게 참다. 우리보다 똥통학교 학생회 간부 전원 자퇴서 써놓고 가두시위 주도하다. 11개중 9개 학교의 고등학생들 가두시위에서 외치다. 선생님을 돌려주세요. 선생님 사랑해요. 서울에 왔더니 너네 동네는 교과서가 다르냐며 빨갱이 새끼들 전라민국이라는 말을 듣다. 교훈 좋은 선생님을 못 만난 사람들은 자기나라 이름도 모르는구나. 나는 전교조 1세대라 다행이다.

 

지금으로부터 몇 달 전,

내 안의 촌것들이 온몸에서 끓어오르다.

자기들을 써달라고, 이야기 해 달라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달라고.

2008년 3월 15일 수요일 저녁 일곱 시.

공부 시작하다.

 

위의 글은 내가 과제로 쓴 글이다.

<소설창작과정>의 선생님이 지난주에 내준 과제는 박철의 시 <그 아이의 연대기>를 읽고 그런 형식의 5연짜리 시를 써오라는 것이다. 전체 연에 한줄기로 꿸 수 있는 공통된 주제와 흐름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문학을 한다는 것, 소설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결핍을 발견하고, 드러내며, 채워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결핍'을 부족한 것이나 채우지 못한것 혹은 콤플렉스로 보지 않고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 행복한 것, 즉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껏 내 사람을 이나마 지탱할 수 있게 해준 것이 무엇이고 지금 내가 갈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고 '내안의 촌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내가 그렇게 탈출하고 싶어하고 저주하고 지긋지긋하게 생각했던 그 '촌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이탈하지 않고 견디게 했고 좋은 이들을 접하게 해주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 '촌것'에 대하 이야기 하고 수다떨고 끼적이고 있었고 나의 '촌것'을 듣고 읽고 싶어하는 이들도 조금은 있다. 때문에 내가 글을 쓰게 된다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 쓸 주제와 대상은 당연히 '촌것'이 될 것이므로 과제로 쓴 것이다. 물론 <일대기>라고 할 정도로 쓴 것은 아니고 일부부만 적은 것이다.

 

선생님의 평가는,

역발상인데 나름대로 괜찮기는 하지만 당신이 원했던 것은 단어의 뜻 그대로 '결핍'에 대한 글을 쓰기를 바랬었다고 한다. 과제를 해온 수강생들 중 원작의 형식과 가장 비슷하고 또 솔직하고 정직하게 글을 쓴 수강생이 제일 후한 평을 받았다. 선생님뿐 아니라 수강생들에게도. 물론 그 수강생도 시 전체를 꿰는 주제가 없는 것이 아쉽다는 지적을 받긴 했지만 각각의 연에는 일관 된 주제가 있었다는 평가였다.

 

나는 과제의 예로 제시한 기성 작가의 작품의 틀이나 형식을 그대로 빌어서 쓰는 것을 피하려고 한건데 선생님이 원하는 것은 예로 제시한 작품을 벗어난 개성이 아니라 그 작품에서 나타난 주제를 파악하여 각자의 상황에 맞게 그것이 드러나게 쓰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결론내리면 나는 엉뚱한 숙제를 해간 것이다. 쪽 팔렸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다른 수강생들의 과제발표를 들어 보니 제가 엉뚱한 숙제를 해 온 것 같습니다." 짬이 나면 잘못해간 숙제를 다시 해봐야겠다.

 

다음 과제는 <존재의 증명으로써의 글 쓰기>를 훈련하기 위해 자신이 자신인 것을 증명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서 꽁트나 엽편 소설을 쓰는 것이다. 엽편 소설은 A4 1~2장 분량이다.  두번째 시간에는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를 쓴 소설가 이기호와 가진 <작가와의 대화>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정리해서 올릴 예정이다. 해야할 공부도, 과제도, 일도 많다. 바쁘다. 바빠.

 

 
다음검색
댓글
  • 08.04.17 20:27

    첫댓글 해야할 공부가 산 같이 쌓였어도 이끌어줄 선생님이 있고 또 그것을 즐기는 마음이 있으니 많은 발전이 있겠지요. 특유의 사투리 넣은 글이 참으로 진솔해서 눈물, 웃음을 자아냅니다.

  • 작성자 08.04.18 13:42

    예. 잘 모르니 이끌어 주는대로 잘 따라 가야죠. 열심히 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겠죠. 고맙습니다.^^

  • 08.04.17 21:38

    글공부가 참 재밌을 거 같습니다. '결핍에 대한 글쓰기', '존재의 증명으로써의 글쓰기' 모두 좋은 제목이네요. '형식을 그대로 빌어서'에서 '빌어서'는 '빌려서'가 맞는 말입니다.

  • 작성자 08.04.18 13:42

    앗, '빌려서' 앞으로 올은 표현으로 쓰겠습니다.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