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서의 두 편과 마찬가지로 두 사이트를 참조했고, 폴란드군의 상황은
http://www.accessweb.com/users/rbereznicki/pole1.html-ssi를 참조하여, 내용은 이 세 가지 자료가 적당히 섞인 형태입니다.
*지도는 마찬가지로 자료로 삼은 사이트에 게재되어있던 것을 아래한글로 다시 그렸습니다. 다시 보니 지명을 잘못 적은 것이 있군요.
제3차 몬테 카시노 전투 (연합군측 제4차전투)
1. 연합군측 작전과 양측 준비
3월의 세 째 주부터 봄 동안 영미공군은 'Strangle'작전을 실시하여 도로, 교량, 철도를 폭격, 보급망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연합군의 구스타프 방어선 돌파를 위한 5월의 공세를 위해 다음의 목표를 설정하였다. 영제8군은 비밀리에 구스타프 방어선의 아드리아 연안지구 (이탈리아 반도 동쪽)에서 서쪽으로 병력을 이동했다. 암호의 해독으로 연합군은 상대인 독일군의 약화된
상황과 그 세부를 알 수 있었다. 카시노 전선은 노르망디 상륙이 시도되기 전에 돌파하기로 결정되었고, 이것으로 프랑스에서 사용될 수도 있는 최대한의 병력을 이곳에서 격파할 것이 기대되었다.
4곳에서의 공격은 다음과 같이 준비되었다. ; 미 제2군단은 서부해안의 7번국도를 따라 안찌오 교두보에 고립된 제5군단을 향해 진격한다. 프랑스군단의 4개 사단은 리리 강 북쪽에서 카시노 산 후방의 독일군을 공격한다. 영 제13군단은 라피도강을 건너, 마을을 제압하고 구스타프 방어선을 돌파, 카시노 서쪽의 도로를 차단한다. 폴란드 제2군단의 목표는 카시노 산으로, 목표를 포위한 뒤, 북쪽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출발점이 될 '기병 고지'는 쿠르트 페트 소령 지휘 하의 제3강하엽병연대 제3대대가 맡고 있었다.
제1강하엽병사단의 제4강하엽병연대는 마을과 수도원의 강점에 진을 치고있었고, 제3연대는 카시노 북서방으로 이동했다. 제1연대는 예비로 남아있었다. 이 교대작업은 야간에만 이루어졌다.
연합군의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영제8군;
1) 리리 계곡의 적진을 돌파, 6번국도를 따라 로마로 진격한다.
2) 테르니-페루지아 방면으로 적을 추격한다.
3) 안코나-플로렌스로 진격한다.
미제5군
1) 아우소니아 애로를 탈취하고, 리리와 사코 강 이남에서 영제8군과 평행으로 진격한다.
2) 안찌오 교두보 공격, 발몬토네 강변의 코리를 지나 진격하여 영제8군을 피해 퇴각하는 독일군의 퇴로를 차단한다.
3) 로마 이북의 적을 추격, 비테르보 비행장과 치비타베치아 항구를 점령한다.
4) 레그호른으로 진격한다.
이 목적을 위해 연합군은 안찌오 지역을 포함하면, 독일측의 14개 사단과 3개 여단규모 전투단에 대해 21개 사단과 11개 여단을 투입했다.
카시노 전선 전투서열 ;
독일군
제10군 (von Vietinghof; 폰 피팅호프)
제51산악군단 (Feuerstein; 포이어슈타인 장군)
제5산악엽병사단 (Gen.Lt. Schrank; 쉬랑크 중장)
제44 '호흐 운트 도이취마이스터' 척탄병사단 (Gen.Lt. Franck; 프랑크 중장)
제1강하엽병사단 (Gen.Lt. Heidrich; 하이드리히 중장)
보데 전투단
제14장갑군단 (von Senger und Etterlin; 폰 젱어 운트 에털린 장군)
제71보병사단 (Gen.Lt. Raapke; 라프케 중장)
제94보병사단 (Gen.Lt. Steinmetz; 슈타인메츠 중장)
군단예비 ; 제15장갑척탄병사단 (Gen.Lt. Rodt; 로트 중장)
* 제51산악군단은 알파데나와 리리의 사이를 담당했고, 제14장갑군단은 아우룬치아 산맥과 해안지역을 담당했다. 카시노 마을과 인근 산지는 제1강하엽병사단이 맡았지만, 3월의 손해에 더해 각 연대의 1개대대는 재편을 위해 프랑스로 이동해있었다.
연합군;
연합군 제15집단군 (Alexander)
영국제8군 (Leese 장군)
영국 제10군단
영국제13군단 (Kirkman 장군)
영국 제4보병사단 (Ward)
영국 제78보병사단 (Keightly)
인도 제8보병사단 (Russell)
영국 제6기갑사단 (Evelegh) ;영국본토, 캐나다병으로 구성
폴란드 제2군단 (Anders 안데르스 장군)
제3카르파티아 사단 (Bronislaw Duch 브로니슬라프 두흐 중장)
제5크레소바 사단 (Nikodem Sulik 니코뎀 술릭 중장)
군예비 ; 캐나다 제1군단
남아프리카 제6기갑사단
미제5군 (Mark Clark)
프랑스군단 (Juin 쥬앵 장군)
프랑스 제1보병사단 (Brosset 브로세)
모로코 제2보병사단 (Dody 도뒤)
알제리 제3보병사단 (de Monsabert 드 몽사베르)
모로코 제4보병사단 (Guillaume 기욤)
미제2군단
미 제88보병사단
미 제85보병사단
군단예비 ; 미 제36보병사단
2. 전투개시 ; 5월11일 밤-12일
1944년 5월 11일 오후 11시, 2000문의 연합군 화포가 아쿠아폰다타에서 해안지역에 이르기까지 포격을 개시했다. 11시 45분, 영국군은 라피도 강을 건너 공격을 시작했다. 12일 오전 1시, 카시노 북서쪽의 폴란드 제2군단, 아우룬치아 산맥의 프랑스 군단, 해안의 미제2군단이 공격을 개시했다. 날이 밝으면서 야보의 무리가 고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아베짜노의 독일 제10군 지휘부와 제14장갑군단 지휘부도 융단폭격의 피해를 받았다.
해안의 미 제2군단은 함선의 화포 지원 하에 산타 마리아 인판테와 솔라치아노에서 슈타인메츠의 제94보병사단과 격전에 들어갔지만, 제85, 88 두 사단 모두 격퇴되었다.
남쪽에서 프랑스군단은 독일 제71보병사단을 공격했다. 라프케의 보병들은 선전했지만, 오전3시가 되어 몬테 파이토는 모로코 제4사단의 손에 들어갔다.
영국 제13군단은 카시노 역과 산토 안젤로 사이, 그리고 산토 안젤로와 리리 강 사이에 교두보를 형성하고 피에드몬테 근방의 비아 카실리나 (6번 국도)로 이동하려고하였다. 커크만의 부대들은 교두보의 형성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제28여단은 동안으로 격퇴되었다. 인도 제8사단은 그래도 나아서 30t 짜리 가교를 두 개 만드는데 성공했다.
정작 몬테 카시노를 지키는 '녹색 악마들'을 향한 폴란드 제2군단의 진격은 쉽지가 않았다.
폴란드 제3카르파티아사단은 593고지 북측에 자리잡고 있었다. 593, 569고지를 목표로 하는 제2보병대대의 공격은 12일 01시 20분 593고지의 점령과 45분 후 569고지의 북방에 도달하는 것으로 순조로와 보였지만, 그 북쪽의 제1보병대대는 문제에 부딪혔다. 제1대대는 새벽이 될 무렵 골짜기의 북쪽 경사면에 도달했는데, 발견되지 않았던 지뢰밭을 만난 것이다. 지뢰제거를 위해 공병들이 급파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18명이 전사했고, 지원을 맡았던 전차들도 제1파는 모두 격파되고, 제2파의 선두전차도 격파되었다. 제1대대는 골짜기에 갇혀서 독일군의 포화를 받기 시작했다.
제2대대 역시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제 제2대대는 569고지의 남쪽 경사면에 도달했지만, 수도원과 콜레 도노르리오에서 쏟아지는 독일군의 탄환을 만났을 뿐 아니라, 숨어있던 독일강하엽병의 5차례의 반격을 받기 시작했다. 제12포돌스키 수색연대도 반격을 막는데 가세했지만, 독일군의 포화는 사방에서 쏟아졌고, 피해는 늘어만갔다.
사단장인 두흐 중장은 제1대대에게 야밤을 틈타 출발선으로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제5크레소바사단의 사정도 그다지 나을 바가 없었다. 적의 포화를 무력화하기 위해 독일군으로 하여금 화포진지를 노출하게 하려고 유도포격을 했지만, 역포격으로 손상을 입은 독일군 화포진지는 얼마 없었고, 통신망도 금새 복구가 되었다. 거꾸로 독일군의 포격이 심해지면서, 콜레 산토 안젤로를 향해 예정보다 훨씬 앞으로 진격해나간 제5빌나여단의 제13, 제15보병대대들은 이미 20% 정도의 손실을 입었고, 이 부대들과의 교신이 어려워졌다. 이곳에서도 공격은 계속되었지만, 독일군 폰 루핀 전투단 (KGr. von Ruffin)의 저항은 대단했고, 517고지를 점령하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고립을 우려한 두 대대는 안전한 산등성이로 퇴각했다.
교신두절로 두 대대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제6르보프여단의 제18대대는 폴란드군이 목표지점에 도달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새벽 3시 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제15대대의 진지에 도착한 6시 30분 경에는 거꾸로 독일군의 반격이 개시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 사단장 술릭 중장은 증원을 결심했다. 이 공격이 있기 직전인 오후 3시, 군단으로부터 공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상황이 나빠진 제18대대는 여단장과의 연락이 이루어지지 않자, 독자적으로 독일군과의 접촉을 끊고 퇴각을 개시했는데, 나머지 두 대대는 이것을 전면철수로 오인하여 마찬가지로 퇴각하였다. 첨병들도 밤에는 명령에 의해 퇴각했다.
군단장인 안데르스 장군은 사실 오후 3시에 공격을 재개할 것을 구상중이었다. 이것을 위해 화포가 부족한 폴란드제2군단은 영국제13군단에게 포격지원을 요청해야했는데, 영제13군단 자신도 라피도 강의 교두보를 둘러싼 전투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독일군은 이제 파손된 화포들을 수리중이었고, 예비대를 빌라 산 루치아와 피에디몬테 지역으로 모으고 있었다. 안데르스 장군은 결국 오후 2시 자신의 군단에게 출발선으로 되돌아올 것을 명령했다. 제8군 사령관인 리스 장군 역시 오후 4시 군단지휘소를 방문하고는 적어도 13일 오후까지는 공격을 재개하지 않기로하였다. 이 공격은 영국제13군단의 느린 진격으로 16일로 다시 연기되었다.
폴란드군은 '기병고지 (유령능선)'를 공격하느라 1차공격에서 다대한 손해를 내었지만, 독일군의 손해도 Veth소령이 일기에 적은 것처럼 엄청났다. >> 경사면에는 시체들이 무수히 뒹굴었다. 악취는 심하고 - 물도 없고 - 잠도 부족하다. 절단수술은 전투지휘소에서 실시되고 있다. <<
3. 구스타프 방어선, 무너지기 시작하다 : 5월13일-15일
해안의 미군은 적의 집요한 반격을 받으며 매우 느린 진격을 13일 하루 종일 하고서야 산타 마리아 인판테를 탈취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이 마을은 14일 독일 제94Füsilier대대의 반격으로 미군 1개 대대 전체가 포로가 되면서 빼았겼고, 14일 저녁에야 재반격으로 점령하였다. 이튿날, 프랑스군의 성공으로 방어가 곤란해진 제94보병사단은 미제88사단에 대해 포르미아에서 방어전을 펴고 있었다.
프랑스군단은 훨신 성공적이었다. 13일 아침이 되자, 모로코병사들은 몬테 지로파노를 탈취하고, 오후 4시에는 몬테 마이오를 점령했다. 이제 독일 제71보병사단의 북익은 위태로와졌다. 프랑스 제1자동차화사단은 북쪽으로 압박을 가하여 산탄드레아, 산탐브로지오, 산타폴리나리를 차례로 점령하고 리리 계곡에 도달했다. 이제 카스텔포르테도 프랑스군의 손에 들어왔다. 몬테 채스치토는 모로코와 알제리사단에 의해 탈취되어, 가리글리아노 강변의 구스타프 방어선은 구멍이 뚫린 셈이 되었다. 5월14일, 쥬앵 장군은 독일 제71보병사단의 진지를 돌파한 후 아우룬치아 산맥을 지나 구스타프 방어선 후방 12마일에 있는 이트리-피코 도로를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기욤 장군의 구미에 병들은 페드렐라로 향했고, 14/15일 밤 스피뇨 북방의 몬테 파메라를 오르고 있었다. 이 밤 동안, 독일 제94보병사단 역시 카스텔로노라토 양측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 방어진지에 커다란 구멍을 만든 것이다.
워드 장군의 영국 제4보병사단은 14일 카시노 남방에서 새로운 공세를 개시하여, 산토 안젤로 북서쪽 1 마일 안쪽에서 교두보를 확장하는 것에 드디어 성공하였다. 15일이 되어서는 아직 예비이던 제78보병사단이 피냐타로-카시노 도로에 접근하여 공격을 재개할 폴란드군의 좌익을 굳히기 시작했고, 인도병들은 밤동안 피냐타로를 점령했다. 인도 제8사단의 우측인 영국 제4보병사단은 여전히 느린 진격을 하고있었다. 훨씬 서쪽에서는 카실리나 가도 (6번국도)로 조금씩 진격해나간 것에 반해서, 카시노 마을 자체에서의 진격은 형편없었다. 이미 독일 제1강하엽병 기관총대대가 거의 전멸했지만, 저항은 계속되었다.
폴란드군의 2차공격에 앞서 폴란드군의 화포와 연합군 야보는 독일군 화포진지의 무력화에 나섰고, 이 사이 제1보병대대가 어려움을 겪었던 골짜기에는 폴란드제4기갑연대 2개중대의 원호 속에 공병들이 지뢰제거를 실시했다. 이제 전차가 버티고 있으므로, 독일군이 지뢰를 재매설하기란 곤란해졌다.
14일, 독일 제10군은 모든 예비대를 전투에 투입하기로했다. 제305보병사단은 무너져가는 보데 전투단을 증원하기 위해 아드리아해에서 이동중이었고, 114엽병사단의 2개 대대와 각종 사단의 예비 병력들이 방어선의 구멍을 떼우기위해 동원되었다. 독일군 화포는 라피도강의 가교에 집중포화를 퍼부었지만, 포격이 개시되자마자 연합군 야보의 공격을 받고있었다.
15일 독일군의 사정은 악화되었다.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제51산악군단의 우익이 붕괴되기 시작했고, 알렉산더장군은 이 지역에 번즈 장군의 캐나다 제1군단을 투입할 것을 명령했다. 캐나다군의 목표는 폰테코르보였다. 독일군은 구스타프 방어선을 더 이상 방어하기 힘들었고, 강점들은 하나 둘 우회되기 시작했다.
4. 몬테 카시노 - 5월17일
5월16일에도 프랑스군단은 진격을 계속하여 몬테 페트렐라와 몬테 리볼레를 점령하였다. 모로코병들은 17일 드디어 독일제14장갑군단의 동맥과도 같은 이트리-피코 도로에 거의 도달했다. 알제리사단은 에스페리아 동쪽에서 독일 제200장갑척탄병연대의 반격을 받았지만, 약화된 독일군의 반격은 알제리사단의 진격을 잠시 방해했을 뿐이었다. 알제리사단은 에스페리아를 점령했고, 프랑스 제1자동차화사단도 몬테 도로 (Monte d'Oro)를 점령했다.
폰 젱어 운트 에털린 장군의 제14장갑군단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제71, 제94 두 보병사단은 거의 와해되었고, 제15장갑척탄병사단 (그나마 일부분은 안찌오 전선에 있었음.)은 심하게 압박받고 있었다. 영국제13군단의 공세로 카시노전선을 향한 카실리나 가도는 남쪽에서 위협받고 있었고, 미제2군단도 포르미아를 점령했고, 이트리를 향해 공격중이었다.
몬테 카시노의 폴란드제2군단은 며칠 간의 준비 끝에 17일 공세에 들어갔다.
안데르스 장군은 포로심문을 통해 자신의 군단에 맞서는 독일군은 단지 약화된 2개 대대와 반격을 위한 1개 대대 정도뿐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미 독일제1강하엽병사단은 몬테 카시노 주위의 전투가 뜸해지자 영국제4보병사단과의 전투에 병력을 돌리고 있었고, 리리 계곡의 방어선이 뚫리면서 몬테 카시노로 보낼 병력은 없어진 셈이었다.
폴란드 제2군단은 휘하의 제5사단이 루드니츠키 소장 지휘하에 전투단을 편성, 산토 안젤로와 575고지를 점령하고, 제3사단이 593-569-476고지들을 점령한 후 6번국도에서 영국제78사단과 합류, 독일군의 퇴각을 방해하는 작전을 세웠다. 공격개시는 영국제13군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17일 오전 7시로 결정되었고, 제5사단은 '기병고지 (유령능선)'을 재차 공격하고, 제3사단은 알바네타를 점령할 것이었다.
16일 밤, 제5사단에게는 예기치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유령능선의 정찰 도중 제16대대는 능선 북쪽의 독일군 거점 여러개를 장악했다. 독일군의 반격은 격퇴되었고, 이것으로 포병관측소가 마련되었다.
17일 7시22분, 준비포격이 있은 후 폴란드제2기갑여단 일부의 지원을 받으며 제5사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전차들의 원호포격 하에 제17대대는 콜레 산토 안젤로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지만, 오후 2시 탄약이 떨어지면서 독일군의 세 번 째 반격으로 남쪽 봉우리를 상실했다. 이 봉우리의 점령을 위해 루드니츠키 소장은 제16, 제18 2개대대를 추가투입하여 6시5분 완전점령하였다. 제5사단은 이미 손해가 심하여, 새로운 공격을 위해 전투에 투입된 적이 없는 사병들 - 취사병, 운전병 등등 - 로 예비병력을 만들어야했다. 이 상황에 겁이 난 루드니츠키 장군은 안데르스 장군에게 말했다. "더 이상 투입할 병력이 없습니다." 안데르스의 답은; "걱정말게. 난 전체 전선의 상황을 알아. 독일은 졌어."
한편, 제3사단은 전차를 동원하여 독일군의 은신처와 593고지의 서쪽 경사면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제5사단이 유령능선에 확고한 진지를 구축하면, 알바네타에 대한 공세가 개시될 것이었다. 이 준비를 위해 제2카르파티아여단의 제6대대 1개중대가 골짜기를 제압하여 전차의 통행로를 확보, 전차들이 포격할 수 있도록하였다. 공병이 나머지 지뢰들을 제거하고 전차가 알바네타 앞까지 도달하여, 이제 593고지의 독일군은 전차들의 포격권 내에 들어왔다.
제6대대는 알바네타의 독일군의 벙커들을 하나씩 유린해나갔고, 제4대대는 593고지로 돌격, 반격하는 독일군과 사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제4대대장 판슬라우(Fanslau)중령이 전사했다. 독일군은 폴란드군의 공격으로 제3강하엽병연대 제3중대가 거의 전멸했다.
아직 독일군은 콜레 산토 안젤로와 '기병 고지(유령능선)'의 일부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폴란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수도원과 569고지를 지키던 강하엽병들은 이제 575고지 주위로 내몰렸다. 강하엽병들은 완강히 싸웠고 불굴의 정신으로 반격을 계속 가해왔다. 벙커들은 육박전으로 탈취해야했다.
6. 독일군의 퇴각 - 5월18일
독일군에는 감지되지 않았던 캐나다 제1군단의 지원까지 받으며 연합군이 구스타프 방어선을 돌파하자, C군집단사령관인 케셀링원수는 카시노 마을과 수도원, 인근 산악지역에서의 철수를 명령했다. 연합군은 남부지역과 로마를 잇는 6번가도를 차단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여, 독일군이 철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말았다. 독일제3강하엽병연대는 카시노 산에서 17일 밤 야음을 틈타 퇴각하였고, 퇴로가 차단된 채 마을에 끝까지 남아있던 제4강하엽병연대의 제2대대는 카시노 산을 올라간 후 피에디몬테로 다시 내려와 퇴각을 완료했다.
18일 새벽, 폴란드 제5대대는 제4대대의 잔여와 함께 593고지 주변에 아직 남아있던 독일군 거점들을 소탕했고, 오전 10시 드디어 593고지를 점령했다. 제6대대도 정오에는 알바네타를 점령했다.
제12포돌스키 수색연대는 10시15분 카시노 수도원의 폐허더미 위에 폴란드 국기를 꽂았다. 그곳에는 바이어 대위 (제4강하엽병연대 제1대대장, Hauptmann Herbert Karl Beyer)를 포함한 30여명의 걸을 수 없는 부상병들만이 남아있었다. 카시노 지역에서 독일군 낙오병의 저항이 없어진 것은 19일이었다.
7. Epilogue
독일제10군은 질서정연하게 구스타프 방어선에서 퇴각, 6마일 후방에 준비되어있던 젱어 방어선으로 퇴각하였다. 이곳 뒤에는 로마 20마일 남방에 또 다른 방어선이 구축중이었지만, 공사는 완료되지 못했다. 이 방어선이 며칠 만에 무너지고, 독일군의 다음 방어선은 라 스페찌아에서 동부해안의 페사로에 이르는 200마일 길이의 '고딕 방어선'이 되었다.
5월23일, 미제5군단은 안찌오의 교두보에서 돌파하여 미제2군단과 합류하였다. 안찌오의 독일 제14군과 구스타프 방어선의 독일 제10군은 이것으로 부분적으로 포위되었지만, 미군은 포위전에 주력하지않고 로마로 진격하였다. 6월4일, 로마에 연합군이 진주할 때, 독일군은 외곽에서 후방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연합군은 구스타프 방어선을 돌파했지만, 그것은 압도적 물량의 우세 하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연합군측 제4차전투의 가장 큰 성공은 프랑스 식민지 병사들인 모로코와 알제리사단들이 일구어내었다. 폴란드군단이 많은 손해를 입으며 결국 카시노 산을 점령하기는 했어도, 그것은 승리라기보다는 독일군의 철수에 의한 결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연합군의 인명손실은 매우 심대했다. 미 제5군은 (안찌오 지역을 포함하여) 1월15일에서 6월4일까지 모두 107,144명을 잃었다. 카시노 전선에서 영국제13군단은 4,056명을, 폴란드 제2군단은 3,779명을 잃었다. 폴란드 군단은 짧은 투입기간 동안 심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이후 피에디몬테 전투까지 포함하면 전사 923명, 부상 2,931명, 행방불명 345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카시노 산의 독일 제1강하엽병이 보여준 완강한 저항으로 이탈리아에서의 연합군의
진격은 지연되었고, 연합군측으로부터 '카시노의 녹색 악마들'이라는 별명을 얻게되었다. 제15집단군 알렉산더 장군 역시 이들의 투혼을 높이 평했다. 부상으로 포로가
된 '녹색 악마들'을 방문했을 때, 독일군 부상포로들 가운데 선임자는 그 자리에서 '차렷, 경례'를 외쳤고, 일어나지 못하는 포로들도 그 자리에서 경례를 하였다. 알렉산더
장군은 그들에게 경례로 답하여 그들의 전우애, 단결력과 헌신에 경의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