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 작가들을 대표하던 박경리와 박완서 작가가 떠난 지금, 작가 오정희(71)는 여성 문학인의 대모(代母)다. 등단 50년을 맞아 문학적 열정을 불태우는 오 작가를 만나 위기에 빠진 우리 문학계의 현실을 살펴보고 젊은 작가들이 귀담을 만한 고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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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죽음을 겪으며 세상에 대한 거부와 적의를 품은 소녀는 어두운 교실의 복도에서 “먼지 한 알 없이 청결해 보여서 위축감”으로 “뻣뻣한 스커트를 허리께까지 훌쩍 걷어 올리고 그대로 선 채 오줌을 누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뒤틀린 자아를 가진 소녀의 시선으로 쓴 글이긴 하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읽어도 도발적이다. 오정희는 이처럼 우리 내면의 뒤틀린 욕망을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묘사와 맛깔스러운 문장으로, 놀랍도록 표현해내는 작가다.
책갈피에서 잠시 머물렀던 생각을 거둔 사이 고희를 넘긴 소담한 느낌의 오정희 작가가 서점에 들어섰다. 날이 차서 목도리를 했는데, 얼굴이 발그레했다. 글과 문장은 이렇듯 선명하고 도발적인데, 외모는 순하다 못해 여리고, 얼굴은 인자하고 평온했다. 이 작가의 내면엔 도대체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사진 몇 컷을 촬영하는 사이 긴장을 풀기 위해 몇 마디를 물었다.
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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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에 한 번씩은 올라온다.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동인문학상 후보작 독회를 한다. 사람도 만나러 오고… 서울 올 일이 많기도 하고.”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하셨다. 그로부터 딱 50년이 지났는데.
“68년이다. 당선 소식을 듣고 인터뷰하러 서소문에 있는 중앙일보 사무실을 찾아가 문화부 기자를 만났다. 하필이면 그날이 1·21 사태가 나서 북한에서 김신조가 내려온 날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요즘도 책은 잘 나가나요?
“서점에 와서 보기만 했지 저도 못 물어본다. 아니라고(책이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하면 미안할까 봐.(웃음)”
몇 발짝 걸어가 책이 잘 팔리는지 서점 관계자에게 물어보았다. 다행히 사람들의 반응이 좋다고 했다. 문학과지성사는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불꽃놀이] [새] 등 5권으로 지난해 12월 오정희 컬렉션을 냈다. “좀 더 엄격해진 작가의 눈으로 문장까지 세심하게 다듬어달라”는 출판사의 부탁에 오 작가는 이번 컬렉션을 내면서 가까이는 10년 사이, 멀게는 40년 만에 교정지를 앞에 두고 고민을 했다고 한다. 사진 촬영이 끝난 뒤 대화를 위해 조용한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점 담당자 말이 책의 반응이 좋다고 한다.
“이번에 신작을 낸 것도 아닌데, 출판사에서 나이 먹은 이에 대한 예우를 해준 것 같다. 절판 안 시키고 묶어서 내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오정희 소설이 익숙한 독자에겐 이번 컬렉션이 오랜 벗의 반가운 안부로 다가올 것 같다.
“준비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오래전에 쓴 내 소설들을 읽는 일에는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것은 참 이상하고 특별한 경험이기도 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인 듯 그 소설들을 쓰던 당시의 주변 정경, 한 문장 한 문장을 마음을 다해 써 나갈 때의 정황 즉 생생히 살아나는 나의 모습과, 책을 낼 때마다 후기라는 형식을 빌려 토로한 도저한 결의와 문학에의 열정, 안타까움 들에 쓸쓸해지기도 하고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되돌아보니 글을 쓰면서, 글을 읽고 생각하면서, 글로 인해 괴로워하면서 행복하고 고마운 인생이고 세월이었다.”
문학평론가들은 오정희의 등단 50년은 한국 여성문학사의 50년과도 같다고 말한다. 문학평론가 우찬제는 “오정희 문학 50년은 한국 문학이 여성적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존재론적 성찰의 새로운 지평을 전폭적으로 환기한 50년이고, 한국 소설이 새로운 담론과 문체로 정녕 문학적인 문체의 집을 지을 수 있었던 50년이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작가가 즐겨 다루는 것들은 삶의 불구(不具)성, 낙태, 불임, 가족 간의 왜곡된 관계, 비정상적인 성장, 중산층 중년여성의 심리적 갈등”이다. 이처럼 지극히 여성성 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작가의 문장들은 수준 높은 미학적 성취를 담보해내 놀라움을 안겨왔다. 작가 김훈이 남성적인 필치와 단문으로 ‘문장의 완벽주의’를 보여주었다면, 오정희는 단연 모국어로 구사하는 가장 여성적인 글쓰기로 국어의 지평을 넓히고 ‘문장의 제국’을 이루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새’
다 자식 같은 작품들이겠지만 그래도 가장 애착이 가는 소설이 있다면?
“내 첫 장편소설인 ‘새’다. 장편이지만 우선 읽기 좋게 (두께가) 얇지 않나(웃음). 다른 책들은 40여 년 전, 젊을 때의 자의식이 많이 들어갔다. 내 안에 갇혀서 나를 말하는 글들이지만 ‘새’는 제가 실제 경험했던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가 성과를 떠나 얼마나 절실하게 진정성을 갖고 썼는가가 느껴지면 작품을 아끼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새’는 지금 읽어봐도 참 열심히 썼구나 싶다. ‘새’는 특히 제가 많이 아팠던 소설이다. 어린이의 시선이 등장하긴 하지만 ‘상담 선생님’도 등장하고, 어른의 시각에서 어른의 눈으로 바라본 소설이다. 내 자신이 그때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지 못했던 부끄러움이 있었다.”
아이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섬세하게 묘사한 ‘새’는 열 살 소녀의 시각에서 쓰인 소설이다. 불우한 초등학생들을 돌보는 자원봉사 활동에 나섰던 오정희 작가의 경험이 녹아 있다고 했다. 소설가 정이현은 ‘새’에 대해 “아이들의 상처를 선생은 일체의 낭만도 없이, 기적이나 구원에의 한 줌 희망도 없이 예민하고 정확하게 형상화한다. 그 가차없음만이 우리를 생각하게 할 수 있다”며 감동을 전한 바 있다. 2003년 독일에서 번역 출간된 ‘새’는 독일 리베라투르상을 받았다. 해외에서 한국인이 문학상을 받은 첫 사례였다.
오정희 하면 아직도 ‘유년의 뜰’을 기억하는 독자가 많더라.
“감사할 일이다. 아마도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기억에 남을 수 있을 거다. ‘중국인 거리’도 1950년대 중반이 배경인데,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느끼는 게 있어서 찾았을 수 있다.”
‘유년의 뜰’은 6·25 이후 혼란스럽고 황폐한 시기를 그렸다. ‘중국인 거리’도 아홉 살 때 해안촌 근처의 중국인 거리로 이사 왔던 한 소녀의 시선으로 보는 세상을 담았다. 오정희 작가에 대해 영국의 브리태니커 사전에는 “섬세한 내면의 정경묘사를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과 내면의 고뇌를 자의식적인 측면에서 예리하게 조명하는 소설을 썼다. 특히 여성의 심리갈등 묘사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쓰여 있다. 오정희는 이에 대해 2013년 문학인들과의 만남에서 “나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적 삶의 조건과 현실, 심리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가장 절실하고 잘 다룰 수 있는 주제”라고 말한 바 있다.
등단 50년이다. 반세기의 무게감이란 어느 정도일까 궁금하다.
“멋모르고 얼떨결에 작가가 됐는데,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왜, 연세 많으신 분들이 그러시지 않나. ‘돌아보면 다 꿈 같애!’ 이런 말 하신다. ‘자랑할 것은 없네’ 그런 소리도 하신다. 그게 맞다. 긴 세월이어도 잠깐인 것 같다.”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을 임계점까지 밀어가며 힘 있게 글을 써왔다. 오정희 하면 누구보다 단단하게 자기 예술을 밀고 나간 작가라고 말한다.
“과찬이다. 문학을 시작할 때의 마음, 초발심을 잃지 않으려 했다. 어떤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은 누구나 꿈꾸는 것이다. 그게 문학의 힘이다. 하지만 나도 독자의 반응을 의식해서 내 안의 것을 끝까지 못 밀고 나가는, 순치(馴致)된 것도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작가로서 치열하게 살았다는 얘기는 못하겠다. 흔히, 일하는 여성들이 ‘엉거주춤하고 산다’는 소리를 많이 한다. ‘이쪽에 한 발 걸치고 저쪽에 한 발 걸치고 엉거주춤하고 살았다.’ 이런 소리를 한다. 열심히 살아가지만, 누구나 다 충분히 살았다고 말하지는 못하잖나. 항상 아쉬움이 있고…. 글을 쓴다는 것은 힘이 들어간다. 체력도 필요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뭔가 도망갈 수 있는 명분을 찾는다. 나도 그랬다. 여성 작가에게 가족이나 생계는 좋은 명분이고 미덕이 되잖나. 그래서 나도 도망을 많이 다녔다.(웃음)”
“글쓰기 싫어 많이 도망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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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생의 모든 것을 문학으로 배웠다. 저는 어릴 때부터 글 쓰는 사람이었다. 제가 사유하는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감수성은 모두 문학이란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다. 제 삶은 제가 글을 쓰는 그 자장(磁場)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나를 표현하는 방식,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문학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기왕 작가로서 시작했으니 ‘더 글을 많이 쓰고 살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그 생각을 한다.”
작가의 말대로 오정희는 평생을 문학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해온 사람이다. 열아홉 살 때 “정결한 사랑, 문학과 나 사이에 어떤 매개항도 두지 말 것. 아름답고 힘 있는 문학을 할 것”을 결심하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한 그다. 당대 최고 문인들인 김동리·서정주·박목월·김수영·김현의 강의를 들었다. 문학인으로서 오정희는 ‘행복한’ 세대다.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본격문학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나도 많이 아쉽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 면도 있지 않을까. 문학은 시대의 산물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가 접하는 매체 자체가 다르다. 문학에 대한 믿음이 엷어졌고, 세상을 즐기는 형태도 달라졌다. 문학도 수요와 공급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밤이 길어서 책 읽기에 좋았다. 농한기에는 겨울에 밤새워 새끼 꼬던 시절이 있었다. 밤새워 책을 읽는 시간이 있었다. 지금은 그러기에는 즐길 것들이 너무 많다.(웃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시대와 역사 속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내놓고 보면 우리 세대는 식민지시대를 겪고 전쟁을 겪고 격랑이 심했던 시절을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단절돼 있는 듯한 느낌이다. 우리에겐 임진왜란이, 일제식민통치가, 6·25가 그렇게 먼 얘기가 아니었다. 요즘 세대들은 다르다. 우리 세대와는 의식·관습·사고가 많이 달라졌다.”
문학상 심사위원도 맡고 계신다. 매년 여러 문학상 수상자가 배출되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본격문학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 한국 문학의 위기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앞서 말했지만 시대와 삶을 살아가는 조건이 다르다. 예를 들어 내 초기 작품을 보면 항상 가족이 등장한다. ‘나’라는 존재는 가족 속의 나로부터 출발해야 했다. 상처도 가족에게 입고 사랑도 가족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가족으로부터 탈출하지만, 귀소(歸巢)하는 것도 가족이었다. 지금은 그게 없어졌다. 똑같은 가옥구조에서 살고, 또 혼자 살아가는 이도 많다. 생활양식도 다 다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뭐냐? 물건을 사러 시장에 가야 흥정도 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겪는 애환이 있는 것인데, 지금은 시장에 가도 그 시절 풍경이 아니다.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정해진 가격을 보고 선택한다. 그러니 그것을 반영한 또 다른 형태의 문학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살던 농경시대는 변화가 느렸다. 부모의 체험이 우리에게 전해졌고, 그게 유전자처럼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축적될 겨를이 없다.”
작가에겐 자기만의 이데아를 끌고 나가는 힘이 있어야 하고, 그 힘으로 독자들과 소통한다. 그런 점에서 요즘 젊은 작가들의 소설엔 힘이 없다는 느낌이다.
“좋은 작품이 줄어든 데는 작가들의 열정이 약해진 면도 있다. 하지만 소설이라는 삶에 대한 이야기, 역사의 볼륨을 담으려면 물리적 시간이, 정신적 여유가 필요하다. 한수산 작가의 ‘군함도’가 나오는 데도 50년이 걸리지 않았나. 작품은 기록물이 아니다. 작가에게 체화되는 시간, 묵혀서 발효될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을 비추어볼 수 있는 또 다른 시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도 문학이 좋아서, 요즘도 글쓰기 공부를 하는 중년 분들이 많다. 조언을 해주신다면.
“예술이란 게 묘하다. 한번 사로잡히면 매료된다. 자기 존재감, 표현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발현되는 분야다. 글이라는 게 사실은 타인을 내세워 내 얘기를 하는 것이다. 글은 자기 내면을 드러내는 일이다. 자기 내면의 상처까지 드러내야 힘 있는 글이 된다.”
오 작가는 1979년 이상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내가 문학에서 나를 아낀다면 그것은 나를 아끼는 게 아니라 나를 죽이는 게 될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가 자신의 내면과 아픔을 깊이 응시하고 드러낼 때 독자와 소통할 힘을 얻는다. 오정희 작가의 작품이 50년 동안 사랑받은 것도 그 때문이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조차 시신을 붙들고 울면서도 속으론 어떤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는 오 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자전적 소설인 듯한 글이 많다. 그는 언젠가 강연에서 “자신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하듯이 써야 하고 남의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하듯 써야 한다”면서 “그래서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도 허물이 있고, 실수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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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면이 보인다. 안쓰러움, 비루함, 자기 목숨을 먼저 챙기는 것. 작가는 이것을 살펴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안 된다. 작가가 자기 내면에 솔직하지 못하면 독자에게 전달이 안 된다. 자기 안에서 글을 끌어내야 한다. 그게 작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작가에겐 나를 표출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남의 시선이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지금도 자신의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인간에겐 누구나 이중적 가치관, 허위의식이 있다. 이 이중적 속성을 인정하고 가는 게 더 낫다. 나도 허물이 있고, 실수하는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가는 게 좋다. 이 나이 되니 무리하지 않고 살려고 한다.”
깊어지면 단순해지더라.
“그렇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된다.(웃음) 얼마 전에 원로 시인을 만나 ‘건강은 어떠세요?’ 물었더니 ‘이 나이에 건강하면 미안하죠!’ 그러시더라. 병마와 싸우기보다는 갈 때가 되어가니 편하게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언제까지나 건강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삶의 불편함이 없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요즘 계획하고 있는 것은?
“쓰다 만 것들을 마무리하고 싶다. 소설을 쓰다 보면 결국은 자기 (내면의) 검열에서 살아남은 것은 소설이 되는 것이고 그러지 않으면 ‘이거 아니야’ 하면서 놔버리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소설은 결국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요즘도 내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내 안에 아직 형상화되지 않은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고 그래서 기대하게 된다. 인생은 끝까지 다 마신 술병이거나 다 읽은 책이 아니다. 요즘엔 돌아가신 부모님이 살아왔던 그 시대의 삶을 써 보겠다는 생각도 있다. 아마도 인간 삶의 어떤 양태를 보여주는 소설,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을 보면서 거기에서 본질적인 것을 캐내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수필과 소설의 중간지점쯤 되는 글을 쓰고 싶고, 완전히 허구의 글도 쓰고 싶다.”
지금도 열정이 느껴진다. 글은 주로 언제 쓰시나?
“지금은 아침에 쓴다. 아이들 다 키워 분가시켰으니 아무 때나 써도 괜찮다.(웃음) 내게 글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내 영혼이 아직 보지 못했던 어떤 것들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사는 진정한 가치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는 일이었던 것 같고… 앞으로 남은 세월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죽는 날까지 답은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세상 끝날까지 잘 살아야 하는데, 잘 살아야 한다는 게 어떻게 사는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오정희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선함을 발견하고 바라보고, 찾아내야 하는 것들이 문학이나 종교가 할 일”이라고 했다. “악한 것들 속에서 선한 것을 발견해내는 사람, 어떤 불합리함 속에서도 선한 것을 발견해내고자 한다”고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오정희 작가가 춘천 갈 기차 시간이 됐다고 했다. 문득 몇 년 전 만난 김형석 수필가의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나이 먹어도 평정심 무너지는 건 순간”
낼 모레 100세가 되시는 김형석 수필가는 65세에서 75세까지가 인생의 전성기라고 하더라. 그렇게 보면 오정희 작가는 지금이 전성기다.
“하하. 그런가. 나이를 먹으면 자연히 알아지는 것들이 있는데, 죽음에 대한 이해가 있다. 저는 어느 나이가 되면 마음의 평안이 오고 그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이 나이에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더라. 나이를 먹어도 마음의 평정심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몸은 쇠약해지고, 앞으로 더 좋은 일도 없고, 이 나이가 되면 크게 이루고 싶은 생각도, 이루고 싶은 기대도 없고, 터무니없는 생각도 안 한다. 이런 생각은 한다. 나이든 내가 이제 무엇에 기대어 살 것인가? 얼마 전에 내가 남편(박용수 전 강원대 총장과 춘천에서 40년째 살고 있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늙고 죽어야 하는 대과업을 앞두고 있는데, 이건 누가 대신할 수도 없고, 내가 단독으로 치러내야 하는 일이다’고. 나를 지켜주고 견뎌내고 내가 받아들이고 완수하려면 내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힘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어디서 얻을 것이냐?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신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내가 변변한 말재주가 없다”며 수줍게 머리를 긁적이던 오정희 작가에게서는 대화를 하면 할수록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느껴졌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열의에 가득 찬 작가였다.
전철역에서 오정희 작가와 헤어지고 나서는 길, 깊이 묻어 놓은 독 안에서 향긋하게 익어가는 술 한 잔을 표주박으로 길어다 앞에 두고 나눈 느낌이었다. 말은 줄이고 눈빛과 행동으로 말하는 작가. 한국 여성문학의 대모라는 찬사는 과장이 아니었다. 이름 가운데 곧을 정(貞)을 쓰는 사람. 작가 오정희는 시리고 푸른 이 하늘이 한국 문단을 위해 남겨놓은 마지막 까치밥 한 알이었다.
- 글 나권일 월간중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