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르포 : 詩와 부안을 찾아가다
- 2011. 한국시문학문인회 춘계문학기행 및 제35회 시낭송회
김필영 시인(사무국장)
강변역에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에 도착하자 박흥순 시인이 먼저 도착해 반겨주었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25명의 시인을 태운 관광버스는 오전 9시 강변역을 출발하였다. 주말 아침 도심에서부터 시작된 정체는 고속도로까지 주차장을 방불케 이어졌으나 버스전용도로를 통해 우리는 같은 방향의 승용차들을 바람처럼 스치며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부안까지는 약 4시간이 소요될 것이었다.
각자 일상에 열중하느라 자주 만나지 못하다가 모처럼 나란히 앉아 떠나는 문학기행이 적잖게 설레었는지 소풍 전야를 뜬눈으로 새우고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담소를 나누는 얼굴들은 소년처럼 붉었다. 김선호 시인이 주문해준 따끈한 설기떡과 바나나, 귤, 과자, 두유, 물 등이 개인별로 지급되자 예상치 못한 준비에 다들 놀라워하며 감사를 나타내었다. 차내 마이크를 잡은 박정원 회장이 준비해온 기행일정에 포함된 명소소개 자료를 배포하고 환영의 인사말을 마치자 일제히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수원을 지나 도심을 벗어나자 차창 밖으로 휘돌아 뒤쪽으로만 달아나는 5월의 들녘엔 듬성듬성 물을 담은 논에 모내기가 시작 되고 있었다. 근년에 뚫린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를 접어들어 고도 공주를 통과하는 도로 양쪽으로 똬리를 트는 산기슭은 지난겨울 잎사귀를 버린 가지마다 다시 돋아난 새 움들이 햇살의 부리에 쪼인 시간만큼씩 농도가 다른 초록 옷을 뽐내고 있었다.
정안 휴게소에 잠시 볼일을 본 후, 점심은 휴게소 음식보다는 전라도 음식이 좋다는 제안에 서둘러 신태인역을 향해 출발하였다. 호남선 신태인역에 앞 정류장엔 이번 행사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알선하느라 몇 달째 애쓰고 있던 조재형 시인이 상기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조 시인이 예약한 “사오육”이란 식당의 점심 음식엔 훈훈한 정이 있고, 남도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문학기행지가 부안지역이었으나 신태인역에 들리게 된 것은 점심을 맛있게 먹자는 이유가 아니라 사실은 오남구(본명 오진현)시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오남구 시인, 그는 1975년 시문학으로 등단하여 30여년 시와 평론을 쓰면서 탈관념시와 하이퍼시 운동을 펼친 시문학인이었으며, 2007~2008년 한국시문학문인회 회장을 역임한 부안태생 선각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향인 부안 행 버스에 우리와 동행할 수 없었다. 바로 작년(2010년)에 갑작스런 췌장암으로 타계하였던 것이다.‘새로운 시 쓰기’에 열정적이었던 오남구 시인의 강의가 귓가에 쟁쟁하여 그의 갑작스런 부재가 실감 나지 않았지만 오남구 시인의 동생이자 이 지역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오재운 씨 안내로 우리는 만석보로 향했다.
만석보(萬石洑), 신태인역을 떠나 10분도 채 안되어 만석보가 나타났다. 신태인에서 이평으로 가는 약 4㎞의 지점에서, 정읍 천과 태인천(東津江) 건너는 다리 아래쪽에 보(洑)를 쌓은 흔적이 바로 옛날 만석보(萬石洑)의 흔적이라 했다. 본래 그 자리에는 자의(正四品 중앙관직) 김명이 만든 예동보가 있었으나 고종 29년에 고부 군수로 온 조병갑이 보의 修築을 빙자하여 가렴주구를 자행하고 농민을 착취하므로 백성의 원성을 샀는데, 멀쩡한 民洑 아래에다 다시 보를 쌓기 위해 농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부역을 시키고, 보를 쌓는데 소요될 목재를 山主의 승낙도 없이 벌목하여 보를 쌓은 뒤, 水稅라는 명목으로 보세를 강제로 거두어들이자 고종 31년인 1894년 2월에 전봉준(全琫準)을 선두로 한 농민들이 萬石洑를 부숨을 기점으로 농민 혁명인 갑오동학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만석보를 지나 들판이 끝나는 지점에서 차가 멈추었다. 도로에 인접한 5미터쯤 솟아오른 구릉에 몇 개의 비석들이 북녘으로 펼쳐진 만석보와 한양의 하늘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묘지 앞엔 우리가 온다는 기별을 듣고 서울에서 미리 내려온 오남구 시인의 미망인이자 오혜정 시인의 어머니인 박정순여사가 골절상을 당해 목발을 짚은 몸으로 아들까지 데리고 맞아주었다. 오남구 시인의 봉문은 동학운동에 몸을 담은 虎山 吳文述 동학인의 산소 우측 하단에 둥근 등을 구부리고 있었다. 동학인 虎山 吳文述 선생의 측면 비문을 읽어보니 虎山 선생은 오남구 시인의 백부였음을 알 수 있었다. 오남구 시인의 시집 중 <東津江月令>(1975), <草民>(1981)을 상재했던 바탕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새로운 시 쓰기 운동’에 그가 열정이 있었던 것 또한 동학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과 무관하지 않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 시류 동인으로 오남구 시인과 치열하게 시를 공부하던 고종목 시인, 송시월 시인, 박이정 시인, 허승 시인, 이옥교 시인과‘하이퍼 시’운동을 함께한 김규화 선생님과 심상운 선생님과 함께 봉분 앞에 머리를 숙인 우리의 가슴엔 무한한 필력을 지닌 아직 60대의 아까운 시인을 잃은 추모의 정에 만감이 교차했다. 제자 이옥교 시인은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묘소 가장자리 측백나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흐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시가 아니다”라고 가감 없이 조언해 주던 스승의 목소리는 귓가에 쟁쟁하건만 만날 수 없는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듯 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등을 어루만지며 다음 행선지를 핑계 삼아 오남구 시인을 만석보 들판 끝에 남겨둔 채 버스에 올라야 했다.
다음 행선지 격포항 채석강을 향해 부안 외곽도로를 향하는 버스 안엔 잠시 침묵이 흘렀으나 다시 마이크를 잡고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20여분을 달리자 새만금 간척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새만금 간척지 개발 사업은 군산 연안과 부안 연안을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방조제 33킬로미터를 축조하여 간척토지(여의도 면적의 140배, 서울시의 3분의2, 전주시의 2배)를 조성한다는 역대 정부의 초대형 국책사업이었다. 부안은 예로부터 이중환의 택리지에서‘생거부안’으로 거론할 정도로 어염시초가 풍부한 살기 좋은 곳으로 쳤는데, 어염시초의 유래가 된 곳이 새만금 갯벌이 있던 부안군 변산면, 하서면 일대이나, 메말라버린 갯벌이 산에 가렸다가 산모롱이를 돌면 다시 펼쳐지는 광활한 새만금 어디에서도 세계적 자연생태계의 보고였던 갯벌이라는 것은 느낄 수 없었고 끝없는 사막이라 느껴져 우리의 마음마저 황무해질 무렵 버스는 어느덧‘격포 채석강’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격포‘채석강’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3호로서,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에 소재하고 있었다. 선캄브라아대 화강암, 편마암이 기저층을 이루고 중상대 백악기 약 7천만 년 전에 퇴적한 퇴적암의 성층으로 바닷물의 침식에 의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 올린 듯 와층을 이루고 있었다. 당나라 때 詩仙 이태백이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가 빠진 곳이 채석강인데 그곳과 너무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변산 8경중 하나인 채석강에는 격포항과 방파제, 등대, 멀리 ‘고슴도치 섬’이라고 하는 위도와 고군산열도로 가는 여객선이 있는 천혜의 명소였다.
우리는 시낭송회와 문학특강이 계획되어 있어 격포항의 비경인 채석강만을 답사키로 하였다. 절벽과 서해바다 사이에 펼쳐진 편편한 바위 위를 함께 걸으며 문우의 정을 나누면서 기암괴석 아래 다정한 포즈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서해의 바닷바람을 들이키며 일상에 찌든 마음을 헹구어 냈다. 파도의 성화에 빈집을 내어주고 몸마저 닳고 닳아 바둑알이 된 조가비들의 유골과 모난 제 살을 파도에 깎아 예쁘장해진 몽돌을 주워 호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층층이 쌓인 책들에서 진리라도 찾아내려는 듯 채석강 절벽 바위틈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가며 한 톨의 詩種子라도 얻어가려는 시인들의 표정은 소년소녀들처럼 싱그러웠다. 포항의 장대규 시인의 차를 타고 달려온 백영희 시인, 목진숙 시인, 탁영완 시인, 조영희 시인이 합류하여 더욱 기쁨은 고조되었다. 한 시간이 잠깐처럼 흘러가고 휴대폰 벨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리니 대전지역에서 온 전민 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께 온 김용재 시인과 홍순갑 시인, 김명아 시인과 모항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주차장으로 집결 할 때에야 제주도에서 군산 비행장을 거쳐 부안터미널로 와 홀로 격포항까지 달려온 양원홍 시인이 그을린 얼굴로 웃고 서있었다. 이제 모항으로 가면 전주에서 온 김동수 시인, 류희옥 시인, 김용옥 시인이 합류할 것이고 부산 행사를 급히 다녀온 양병호 시인과 최만산 시인이 당도할 것이었다. 숙박지인 모항에서 진행될 낭송회와 문학특강 함께할 각처의 詩文學人들은 산란지를 향하는 연어들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모항은 개펄이 아닌 細모래 해수욕장으로 변산면 도청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변산반도 국립공원 산악 경관과 서해의 해양 환경이 수려하게 조화를 이루는 자연적으로 조성된 해수욕장이었다. 우리가 숙소로 사용할 <모항레저타운>은 안개에 젖은 수평선 멀리 고창과 영광을 망부석처럼 바라보며 바다를 마중 나가려는 듯 모항은 모래톱보다 300미터쯤 튀어나가 해변의 언덕위에 서 있었다.
관광버스가 모항레저타운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2011 한국시문학문인회 춘계문학기행 및 제 35회 시낭송회”8미터짜리 현수막이 바닷바람을 견뎌내며 높게 뻗은 소나무 가지를 붙들고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A, B동 두 채로 된 24평형 4개 동에 방을 배정 받아 여장을 푼 우리는 세미나실로 자리를 옮겨 오후 5시 30분에 제 35회 시낭송회가 시작되었다.
연단 뒤편엔 조재형 시인이 준비한 우아한 현수막이 축제분위기를 고조시켜주었다. 낭송시집이 배부되자 장내엔 일순간 적막이 흘렀다. 낭송 순서는 가영심 시인의 부재로 예외 없이 처음차례는 강정화 시인의 몫이었다. 공손하고 다정하게 인사말을 한 다음 “비닐봉투의 비상”을 낭송하는 것을 시작으로‘제 35회 낭송회’는 시작되었고 박정원 회장의 자작시와 문덕수 선생님의 시‘사랑은 어디 있나’낭송이 울려 퍼질 때 낭송회는 무르익어갔다. 포항, 부산, 통영, 대전, 전주, 군산, 경기, 서울 등 경향 각처에서 모인 시인들마다 제각기 다채로운 인사말을 한 다음 자작시를 낭송하였고 몇 년 째 시문학모임에 애착을 갖고 참석한 심우기 시인까지 낭송이 진행되는 동안 낭송가인 유현서 시인은 준비온 배경음악 위로 잔잔히 피어오르는 시향에 젖어 모두 속세를 잊은 듯 행복해 하였다. 문덕수 선생님 특강을 듣기 전 초대 낭송가 유현서 시인의 공연이 마련되었다. 5월의 마지막 전야를 보내며 문덕수 선생님의 “해마다 6월은 와서”가 낭송될 때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사라져간 젊은 청년들의 너덜거리는 육신의 쓰라린 상흔이 세미나실 가득 사무쳐 오는 듯 했다. 이어서 바위에 부서지는 제주의 파도소리를 배경으로 유현서 시인은 혼신을 다해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성산포”를 낭송하였고 시와 더불어 50인의 시문학인은 하나가 되었다.
이어지는 문덕수 선생님의 특강으로 행사는 절정에 다다랐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예외일 수 없는 난제인 “시란 무엇인가”를 화두로 제시한 선생님은 호머의 ‘일리아드’를 대입하여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 중 아킬레우스장군과 핵토르장군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는 또 하나의 관점인 신의 관점을 복합적으로 조명하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셨다. “한명이 희생하여 열 명이 살 수 있다면 그 한 명이 희생하는 것이 정의인가”라는 복합적 질문과 함께 우리 각자가 유추하도록 제시하고 더불어 “시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고찰하도록 사고의 끈을 조여주시며 시인인 우리가 무엇을 시로 써야 하는지를 역설하셨다. 더불어 사물시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넓혀 주시며 왜 진실을 써야 하는지 자각하도록 많은 예를 들어 소상히 도와주셨다. 비좁은 버스로 원거리 여행과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우리를 위해 열강하시는 선생님의 강의해 심취한 우리는 저녁 식사시간을 30분 연기하면서 문학특강의 진수를 섭취할 수 있음을 감사드렸다.
‘칠산꽃게장집’은 10여분 거리에 있었다. 고추로 담근 붉은 꽃게장과 간장으로 담근 꽃게장을 모두 맛볼 수 있는 꽃게정식은 몸통에 꽉 찬 꽃게 속살이 신선하였으며 인접한 곰소의 소금으로 간이 알맞게 들어 부안만의 별미였다. 그에 더하여 조재형 시인의 후배인 ‘부안성모병원’ 천창석 회장과 ‘윤정수 변호사 법률 사무소’ 최관용 사무장이 시문학인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자연산 ‘참돔 회’와 부안의 명주‘뽕주’를 넉넉히 준비하여 가져와 식탁의 즐거움은 고조되었다. 한편 조시인의 아내는 후식으로 먹을 떡과 수박을 살며시 선사해 놓고 가셨으니 이처럼 정성을 다해 베풀어준 조재형 시인의 후대로 인해 우리는 만족스러운 왕의 만찬을 즐겼다.
오늘의 예정된 행사는 마쳤는데도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마당으로 모여들은 우리들은 야외 파티용 의자에 마주보고 둘러앉았다. 바다 멀리 떠나가려는 썰물을 붙잡으려는 모항의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캠프파이어는 피울 수 없었지만 누군가 시작한 학창시절의 명곡을 부르자 아이들처럼 손뼉을 치며 하나 둘, 애창곡이 이어지고 남겨온 뽕주가 작은 잔에 보약처럼 한 순배씩 돌아가자 박정원 회장의 사회로 봄밤의 축제는 무르익어갔다. 김선호 시인은 뜻밖에‘태평가’를 구성지게 불러 우리를 놀라게 하였고, 낭송회 때 정숙하던 김두자 시인은‘돌아오라 쏘랜토로’를 절제된 바이브레션으로 열창하여 우리를 감동시켰다. 유현서 시인은 정호승 시인의 시로 안치환 가수가 노래한 ‘풍경 달다’를 불러 시와 낭송만이 아니라 만능 엔터테이너임을 증명했고, 목진숙 시인은 자신의 시로 작곡된 가곡을 열창했는데 오늘 밤이 아니었으면 명곡을 못들을 뻔하였다. 앵콜 신청이 없어도 한 곡을 더 부르는 넉살이 좋아 아낌없는 박수로 반기고, 수줍음이 많은 시인이 손목을 붙들려 못이기는 척 불려나와 가창력을 발휘해 주었으며, 음정이 틀려도 슬쩍 거들어주는 속 깊은 정이 오갈 때 우리들의 봄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장시간 여행과 강행군에도 문덕수 선생님과 김규화 선생님은‘노래를 시키지 않는다면 함께 하겠다’는 조건부로 늦게까지 자리를 함께하셨다. 오염된 도시를 떠났던 밤하늘의 성근 별들은 시인들의 향기로운 봄밤축제를 구경하고 싶었는지 어느새 셀 수 없는 별들을 데려와 우리들의 머리위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5월 29일, 새벽바다 안개 사이로 모항의 아침은 밝아오고 있었다. 6시가 되기 전에 일어난 시인들은 썰물이 떠난 아침바닷가로 모여들었다. 연인들의 발자국을 모두 지우고 또 다른 사람들의 추억을 그릴 도화지를 펼친 모래톱엔 바다를 등지고 떠난 것들을 밤새워 부르다 목이 쉰 파도가 거품을 부려놓고 밀려갔다가 떠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시인들의 발자국 위에 뿌리를 놓친 해초들을 굴리고 있었다. 시인들은 지난 시절로 돌아가 모래톱에 글자를 쓰기도 하고 조개껍질을 줍기도 하고 백사장을 달리기도 하였다. 송시월 시인은 미당선생의 고향 고창을 향하는 뱃길이라도 찾으려는지 안개가 걷히고 있는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시인의 옆모습이 쓸쓸해 보인다고 하자‘ 시인이 쓸쓸해야 시를 쓰죠’라며 빙긋 웃었다. 8시 반에 약속된 아침식사를 위해 아침 햇살이 부서지는 봄바다를 바라보며 사진촬영을 하고 아쉬움을 모항의 바닷가에 남긴 채 백사장을 나왔다.
여장을 챙겨 버스에 오른 우리는 모항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모항 전망대’집에서 바지락 죽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두꺼운 도기에 넉넉히 담긴 바지락 죽은 백합죽보다 깊은 맛이 우러난 별미였다. 부안의 갓김치와 양파김치가 죽맛에 어우러져 더부룩했던 속이 씻은 듯 편안해지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내소사로 향했다.
능가산(내변산)자락 좌우 산자락을 날개로 감싸 안은 계곡에 숨어 있는 일주문에 도착하자 내소사 종무실장이 지시를 내려 일주문 입구에서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이 또한 우리일행의 방문을 조재형 시인이 부안군 홍보과에서 알렸는데 홍보과에서 공문으로 내소사에 연락하였던 것이었다. 내소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선운사의 말사로서 원래 이름은 소래사(蘇來寺)였으며 대소래사와 소소래사로 구분될 정도로 웅장하였으나 세월의 격랑 속에 축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었다. 선덕여왕 신라의 혜구(惠丘)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석포리에 상륙해 이 절을 찾아와 군중재(軍中財)를 시주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절 이름을 내소사로 바꿨다는 설이 있었다. 길 따라 설치된 스피커의 낭랑한 설법을 듣고도 욕심이 무성한 듯 하늘을 찌르는 전나무, 비자나무 숲길을 500여 미터 걸어가 내소사 경내로 들어섰다. 한 손에 삼지창을 들고 한손엔 용을 움켜 쥔 사천왕문을 지나 돌가마솥에 흘러넘치는 약수를 표주박으로 받아 꿀꺽꿀꺽 들이켜고 나니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300년 수령이 된 보리수와 1000년 된 느티나무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계단을 올라 90도로 허리를 구부린 겸손송을 통과하니 단청을 입지 않은 대웅전이 서 있었다. 대웅전의 문살은 연꽃 및 국화, 모란, 해바라기 꽃살문에 꽃잎과 음영까지 조각되어 볼수록 고풍스러웠고 종각의 고려동종은 오랜 풍상을 견뎌낸 무게를 온몸에 지니고 있었다. 불심 깊은 시인들은 부처 앞에 몸을 낮추어 합장하고 시주도하며 마음을 정갈하게 비운 듯 맑은 얼굴로 절을 나섰다.
다음 행선지인 곰소의 젓갈촌과 염전으로 가는 동안 ‘내소사’를 세글자를 이용한 3행시 경연을 광고하고 젓갈을 상품으로 내걸었다. 바다를 오른 편에 두고 왼 편에 신록이 짙은 산자락을 꾸불꾸불 돌아 해안 도로를 10분 쯤 달려 곰소에 이르렀다. 젓갈촌에서는 새우젓, 낙지비빔젓, 창란젓, 갈치속젓, 명란젓, 토하젓, 백합젓, 어리굴젓 등 다양한 젓갈을 맛 볼 수 있었다. 곰소의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으로 절여서 오랜 전통으로 담은 젓갈이어서인지 짜지 않고 평소 느껴보지 못한 감칠맛이 나서 밥 한 그릇 먹고 싶은 생각이 스쳤다. 우리는 줄을 서서 각자 원하는 젓갈을 사들고 버스에 올랐다.
부안읍으로 향하는 가까운 길목에 곰소 천일염 염전이 있었다. 전북 부안 진서면 곰소리에 위치한 「곰소염전」은 1946년에 지어져 과거 어촌의 촌락단위 형성과 문화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1990년대에 들어서 노동력 부족과 경쟁력 약화 요인으로 인해 절반에 달하는 구역을 양수장으로 임대를 주고 현재 염전 총면적은 45정보(약 135.000평)정도 남아있었다. 곰소 염전은 산과 바다가 인접한 천혜의 자연환경에서 만들어진 소금으로 특히 봄에 만들어진 소금은 변산반도 산에서 송홧가루가 날아와 더욱 고상한 맛이 나는 소금이 생산된다는 것이었다. 천일염은 바닷물을 끌어들여 저장했다가 저수지, 증발지, 결정지로 차례로 옮겨서 햇볕과 바람에 증발시켜 만드는 소금인데, 짜고 쓴맛이 나는 타국의 소금과 달리 곰소의 소금은 처음 짠맛이 났다가 단맛이 나고 식재료의 성분이 무르지 않게 간이 스며들게 하는 소금이라는 점이 독특했다.
부안읍으로 들어가는 길가엔 서해 바다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잘 자란 소나무군락이 들어선 구릉들과 드넓은 들판을 지나며 ‘내소사 3행시 경연’의 심사결과를 발표하였는데, 1등은 이신강시인의 “내 마음을 씻어주는, 소슬바람에, 속세에 묶인 사슬을 털어내고 맑은 세상 안고 간다.”가 뽑혔으며 2등엔 이선 시인이, 3등엔 이순욱 시인이 뽑혔으며, 글씨를 너무 흘려 써서 아쉽게 심사대상에서 제외되어 특선에 뽑힌 작품들은 작자가 직접 낭송하는 특권을 누렸다. 불과 3주전 초록파도가 출렁거리던 청보리밭은 5월의 서걱거리는 봄바람을 붙들고 누릇누릇 익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버스를 길가에 세우고 보리밭 사이로 가까이 들어가 다시 못 볼지도 모를 부안의 보리밭을 배경으로 소년 소녀들이 되었다.
버드나무집의 점심은 한정식이었다. 호남지방의 맛을 느낄 수 있는 홍어삼합을 비롯해 굴비구이와 생조기 탕을 비롯한 전라도 특유의 온갖 반찬들로 밥상은 인심이 흘러 넘쳤다. 이 식사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식사였으므로 식탁에 뽕주가 이별주로 한잔씩 돌아갔다. 조재형 시인이 후식으로 맞추어 준 모시 잎으로 만든 초록색 떡을 후식으로 맛있게 먹고 남은 떡은 봉지에 싸서 나누어 들고 식당을 나왔다. 이제 하나 둘,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오고 있었다. 식사를 급히 마친 양원홍 시인이 군산비행장을 통해 제주도로 갈 비행기 시간이 임박해 포옹도 못하고 떠나갔다. 다음으로는 장대규 시인의 차를 타고 영남으로 떠날 탁영완, 조영희, 백영희, 목진숙 시인과 홍순갑 시인의 차로 대전으로 돌아갈 전민, 김용재, 전민 김명아 시인을 이제 이곳 부안에서 헤어져 보내야 했다. 가을에 다시 만날 기약이 있건만 잠시의 헤어짐도 이별은 이별이라서 뜨거운 햇빛에 얼굴이 그을려도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애잔한 마음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송시월 시인의 제안으로 매창’시인이 잠든‘매창뜸’은 가까운 부안읍내 시가지에 공원으로 가꾸어져 있었다. 400여 년 전 부안현의 아전과 기생 사이에 출생한 매창은 생부에게 한문과 글을 익혀 시조를 곧잘 지어 불러 당대 낙향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공주 목사로 지내다 파직된 후 부안 우반동(곰소항 인근) 정사암에 은신하던 교산 허균과 교류하였으나 38세 젊은 나이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매창뜸’은 매창의 유언으로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전해지는 옛 고려장터였다. 매창에게는 후손이 없어 시를 좋아하던 나무꾼들이 관리해 왔으며, 400여년 벌초가 걸러진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여류 시인으로 황진이, 허난설헌, 매창 3인을 꼽는데 황진이의 시편은 10여 편만 구전되어 오는데 반해, 매창은 무려 58수가 전해지며 매창 사후 부안현의 아전들이 뜻을 모아 매창의 유고 문집을 내서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우리는 15분정도 비문에 남겨진 그의 시와 허균의 애도 시를 읽으며 추모의 정을 나누고 묘소에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공원을 내려왔다. 이제 1박2일 동안 온 영혼을 다해 우리를 위해 후대와 수고를 아낌없이 베풀어준 조재형 시인과 정말 작별해야 했다. 끝까지 후대하느라 눈썹 밑이 움푹 파인 조재형 시인이 버스가 꼬리를 감출 때까지‘매창뜸’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 중 누구도 이번 여행에서 베풀어준 조재형 시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문우의 정과 과분한 후대의 친절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오후 2시에 부안을 출발하여 한 시간 동안 휴식의 시간을 갖기로 하여 잠시 수면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버스는 천안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오후 3시가 되자 차내 여기저기서 이야기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오더니 3시 반이 넘어가자 웃음소리가 들리고 목소리 톤이 소프라노인 이선 시인이 여러 번 웃어대는 바람에 모두들 잠에서 깨어났다. 도착 한 시간을 남기고 다시 석별의 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마이크를 들었다. 운전석 뒤에서부터 차례차례 마이크가 돌아가고‘왜 시를 쓰는지’에 대하여,‘장차 어떤 문학적 계획이 있는지’에 대한 각자의 이야기와 소신을 이야기하였다. 한 분한 분‘시를 쓰는 이유’들이 꽃잎처럼 다채로운 색깔로 소개될 때, 장차 펼치고자하는 소박한 소망을 들으면서 모두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날까지 함께 갈 것을 기도하듯 버스 속엔 끊임없이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문덕수 선생님의 작별인사와 박정원 회장의 작별인사가 마치고 박수소리가 끝나갈 무렵 우리를 태운 버스는 전날 출발했던 강변역 정류소에 스르르 멈추었다.
이번 문학기행에 주인공이 되어 함께한 모든 분들께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행사를 위해 돌아갈 여비도 생각 않고 호주머니를 비워 후원금을 주신 티 없는 정에 감사드린다.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물심양면으로 정성을 다한 조재형 시인과 나누는 일에 기꺼이 자원해준 권은중, 유현서, 심우기 시인께 감사드린다. 마음 한 편에 사정상 함께 하지 못한 시문학인들께 송구한 마음 또한 크다. 집행부의 당연한 수고에 보내주신 따뜻한 눈빛들을 잊을 수 없다.
아! 부안, 짧지만 무한한 감동으로 시문학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은 가슴속에 정지되었다. 언제 또다시 우리가 부안에 갈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시샘엔 서해 채석강과 내소사의 잊지 못할 시편들이 꿈틀거리고 모항 앞바다와 부안의 청보리밭이 가슴속에 오래도록 출렁거릴 것이다.(♣)
첫댓글 김시인님, 잘 읽었습니다. 신태인을 다녀오셨다니 반갑습니다.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지요.
앗, 김 시인님... 건강하신지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태인, 부자동네지요... 역 앞에서 맛있는 점심을 했는데요... 좋은 시도 많이 쓰세요...
우와... 정말 그 날의 감동을 그대로 옮겨주신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잊지 못할 모항의 그 바닷가... 다시 가고 싶습니다...
읽어주셨네요. 바쁘실 텐데, 고맙습니다.
한번 더 읽을려고헙니다요~땡큐~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문학기행 후기를 세세하고 살뜰하게 올려주셔서 참석한것처럼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안하십시오...
김 시인님... 감사합니다. 건필을 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