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사고(史庫)를 찾아 나선 길
박순화- 시인겸 경북문화해설사.
경북스토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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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사고는 현주소가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산 126-5번지 (각화산 9부능선)이며
백두대간의 허리인 태백산 각화산 해발 1,176m 에 위치해 있다
사고(史庫)는 왕조실록과 왕실족보를 보관하던 서고이다
조선시대 역대 임금님들의 실록과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27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상세히 기록한 책이다
고종황제실록과 순종황제실록은 (1927~1932)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인 관계로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것으로 왜곡이 많아 실록에 미포함 시켰음을 알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 이전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등 4곳에 두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에는 새로운 곳 춘추관,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마니산등 5곳에 사고를 두었다
대부분 사고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훼손이나 도난의 우려가 적은 첩첩산중 산간협곡을 선택했으며 사고 주변에는 수호사찰을 두어 안전하게 보관 관리 하도록 하였다
사고의 역사를 보면 임진왜란의 발발로 전주사고를 제외한 3곳이 모두 불 타고 말았다
1603년 전주사고본을 근거로 조선을 세운 태조에서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을 다시 인쇄하여 춘추관, 묘향산, 오대산, 마니산,태백산등 5곳에 사고를 건립하여 보관하였으나 이괄의 난(1624)으로 인하여 다시 춘추관 실록은 모두 불타고 말았다
묘향산 사고는 후금(청나라) 침입에 대비하여 무주의 적상산으로 강화의 마니산사고는 1660년 정족산으로 이건하게 되어 보관이 쉬웠으나 적상산본은 6.25전쟁때 북한으로 옮겨져 김일성대학에 현재 소장되고 있으며 남한의 4대사고의 실록은 일제강점기때 모두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접수되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이 되어 정족산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적성산본은 북한 김일성대학에, 오대산본은 일본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되어 1923년 간토 대지진때 대부분이소실되었으나 2006년 7월달에 47책을 한국에서 되돌려 받았으며 태백산본은 서울대 규장각에서 지나다가 다시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었다
이에 1997년 정부에서는 왕조실록과 왕위의 족보 2,077책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하였다
그 중 파란만장한 역사 속 사고 중 1606~1892년 시기에 가장 웅장하고 돋보였다는 태백의 사고지를 만나기 위해 봉화군청에 집결 신발끈을 조여매고 각화사에 다다랐다
태백사고지는 대한불교 조계종 각화사 소유주로 선조38년에 경상감사 류영순(柳永詢)의 건의로 사고지로서 요새와 같은 지형이라 적격이라 판정받고 1606년에 건립되어 5월 길일에 봉안하여 1913년까지 약 300여 년 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다
848책으로 1910 일본의 국권강탈 뒤 조선총독부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 서울대학교 규장각을 거쳐 현재 국가기록원에 보관하여 조선실록 연구중에 있다
사고 건물은 실록각, 선원각,근천관, 포쇄각으로 지어졌으며 실록각은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 으로 팔작지붕 중층건물로 상층은 정면4칸 측면4칸, 하층은 종면2칸 측면2칸,선원각은 왕실족보를 보관하던곳으로 상층 정면2칸 측면1칸,근천관은 관리인들이 주거하던 생활공간으로 팔작지붕에 정면5칸 측면2칸, 포쇄각은 책의 습기제거와 온도를 조절하여 보관상태를 점검 할 수 있는 곳으로 단칸와가로 지어졌으나 그 후 김상태, 성익현, 변학기등 의병들의 은신처였다는 이유로 일본수비대에 의하여 완전히 소실되어 버렸다
주인잃은 사고지는 30년간 방치상태로 있다가 1988년 8월 발굴정비사업에 따라 대구대학교 박물관 박물조사단을 편성 발굴해 오늘에 이른다
무엇 보다도 현재 각화사와 봉화군에서 다시 사고지를 복원할 계획으로 추진 중이라니 더 없이 반갑다
한참을 오르니 동암이라고도 하는 금봉암에 다다랐다
속세를 등진 스님이 법당문을 열어주는 모습이 꼭 부처님을 닮았다
정한수 한 바가지로 목을 축여 다시 오르는데 바위가 없는 육산에 춘양목과 단풍나무가 빼곡하다
동료들과 홱홱되는 숨을 몰아쉬며 주능선을 오르는데 머얼리 철량산 육육봉이 아스라히 보이고 억지춘양면소재지가 언뜻언뜻 비친다.
"이야 사고지다"
동료들의 고함소리에 힘 입어 젖먹던 힘을 다하여 드디어 태백사고에 올랐다
사실 필자는 가파르고 험난한 각화산을 동료들과 오르며 몇 번 이나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한편으론 무척많은 기대와 설레임으로 올라 온 터 라 그 기쁨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새 한마리 범접 할 수 없는 외딴 곳, 적막하기 그지없는 땅, 춘삼월에도 허연 고드름을 달고있는 수로, 주춧돌과 부서진 기왓장, 한글과 영어로 임시로 세워놓은 표지판, 가고없는 세인들이 바위에 새겨놓은 이름들~~
그야말로 인걸은 간 곳 없고 역사의 흔적만이 남아있어 마음 아리고 더욱 무상하다. 눈물나도록..
때마침 흩뿌리는 춘삼월의 눈을 맞으며 한국국학진흥원 선비리더과정제3기 수료생들은 만산고택 강백기 해설사의 사고지에 얽힌 해설에 봉화막걸리 한잔을 주춧돌에 올리고 일제히 묵념을 올렸다
아픈역사의 현장에 술술 술이 뿌려진다
모두 경건함으로 머리가 저절로 숙여지고 아무말이 없다
지금 이순간이 오늘의 역사가 되고 오늘의 역사가 내일의 역사가 될것이므로....
어쨌거나 겁도 없이 군화부츠를 신고 올라 동료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태백산사고지를 오른 소인이 무엇을 또 더 바라겠는가?
오늘은 오늘의 길이 이어질것이며 내일은 내일의 길이 또 이어질것이다
파김치가 다 된 육신을 태백산 노거수의 배웅을 받으며 각화산 각화사 등줄기 가파른 지름길을 구르듯이 내려온다.
몇일동안 관절이 욱신욱신 쑤실것이다.
-2016.3.13.일요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