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장
찾아온 사신
북경을 가로지르는 여러 대로 중 가장 넓은 길은 주작대로(朱雀大路)다. 주작대로는 마치 이십대가 동시에 달려도 될 정도로 넓다.
그 주작대로의 끝, 북경의 남단에는 웅장한 장원이 한 채 서있다. 대지가 수십만 평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장원인데 물론 그 규모와 웅장함은 자금성에는 비할 바는 못된다.
하지만 장원으로서는 능히 중원제일을 다툴 만하였다.
-철기친왕부(靑松親王府)!
그것이 이 장원의 이름이었다. 이곳의 주인은 당금의 대명제국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권력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철기친왕 목야염!
바로 그의 거처인 것이다.
때는 아직 해가 돋기 전인 인시말(寅時末)이었다.
두두두두!
철기친왕부의 웅장한 정문이 열리더니 일단의 기마대가 달려나오기 시작했다. 보통의 말보다 한배 반은 건장한 체격의 군마(軍馬)들은 갑옷을 두르고 있고 그 위에는 탄 기사들도 철편을 댄 철갑을 온몸에 두르고 있다.
말 그대로 철기(鐵騎)인 기마대는 다섯 기씩 대열을 맞춘 채 아직도 어둠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있는 새벽녘의 주작대로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전부 합쳐 일천기 정도 되어 보이는 이 기마대의 선두에는 한 명의 거인이 대오를 인솔하고 있었다. 단지 성큼 성큼 걷는 것에 불과함에도 달리는 말과 속도를 맞추고 있는 그 거인은 바로 파천장도 초일강이었다.
“서둘러라! 날이 밝기 전에 철수를 완료 해야한다!”
초일강은 어리둥절해 하는 기마대를 재촉하고 있었다.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마대의 기마병들은 잠을 자다가 불려나온 기색들이 역력하다.
연신 기마대를 독려하는 초일강 옆에는 한 명의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 나란히 말을 몰고 있었다. 근육질의 몸을 철갑으로 두른 그는 자신과 기마대가 나온 철기친왕부의 정문을 돌아보면서 초일강에게 물었다.
“초장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그의 말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의혹의 빛이 가득했다.
“철기친왕부를 호위하는 것이 주임무인 우리 철기군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무조건 황명(皇命)이라고만 하니 이해할 수 없소이다!”
초일강은 중년인의 말에 대꾸도 않은 채 앞만 보고 걸었다.
철기군이라 불리는 이 기마대의 수효는 총 일천기인데 영락제의 특명으로 철기친왕부에 배속된 대명제국의 특수기마부대다. 영락제는 원제국과의 대결에서 늘 명군을 괴롭혔던 몽고족의 주력 중장기마대(重裝騎馬隊)를 모방하여 이들 철기군을 창설했다.
하나같이 천리마인 군마와 뛰어난 마상무술(馬上武術)의 소유자인 기사들이 짝을 이룬 철기군은 비록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실전에서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철기군 한 명이 일반 보병 백 명에 필적한다고 한다는 것이 통설일 정도다.
이들 철기군은 평시에는 철기친왕부에 상주한다. 철기친왕부라는 이름도 이들 철기군의 존재 때문에 생겼다.
그렇다고 철기군이 철기친왕부 소속이라거나 철기친왕 목야염의 사병이라는 말은 아니다.
철기군의 명령권은 어디까지나 영락제에게 있으며 혹시라도 자금성 내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할 일이 있을 때만 출동을 하게 된다.
대신 평시에는 신세를 지고 있는 철기친왕부의 식솔들을 호위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한데 그런 철기군이 자신들이 지켜야할 철기친왕부를 뒤로 한 채 모조리 빠져 나오고 있는 것이었으니,
-철기장군(鐵騎將軍) 하후성(夏候星)!
철기군의 수장인 중년인의 이름이다. 군부 내에서 그의 지위는 결코 초일강의 아래가 아니었다. 하지만 죽어 시체가 되기 전에는 영락제의 십 보(十步)를 벗어날 수 없는 초일강이 아무래도 서열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 초일강이 한 밤중에 느닷없이 찾아와 철수하라는 황명을 전한 것이다.
감히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할 수 있겠는가? 무조건 수하들을 이끌고 철기친왕부의 경비를 푼 채 나온 것까지는 뭐라고 할말이 없지만 궁금함은 참을 수 없었다.
“숙청(肅淸)이오?”
하후성은 초일강을 보며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숙청!
그건 이미 새삼스러운 말이 아니었다. 대명제국이 깃발을 올린 이후, 이전에 영락제를 경원했거나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박쥐같은 사람들은 모조리 관직을 박탈당한 채 유배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건 누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바였다.
“그건 아니오.”
초일강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후 주작대로를 빠져 나온 철기군은 북경의 남쪽 외곽 산등성이에서 대오를 멈췄다. 철기군의 기사들은 의아한 눈길로 초일강을 바라보았다.
초일강은 묵묵히 한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 멀리 그들이 방금 전에 떠나온 철기친왕부의 웅장한 모습이 여명의 뿌연 어둠 속에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하후성은 철기친왕부를 흘깃 일별하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초일강에게 물었다.
“숙청이 아니라면 대체 이유가 뭐요?”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오. 다만 머잖아 철기친왕부에서 한바탕의 전쟁이 벌어질 것은 확실하오.”
초일강은 무거운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전…… 전쟁?”
하후성의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흡떠졌다.
“몽고족이 만리장성을 넘었단 말이오? 아니면 철기친왕께서 모반을?”
그는 다급한 어조로 반문했다.
초일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폐하의 말씀을 종합해보건데 아마도 죽음의 신(死神)같은 존재가 철기친왕부를 찾아갈 것이오.”
“죽음의 신?”
“더 이상은 나도 모르오. 누군가 철기친왕부의 멸망을 바라고 있는 모양이오.”
초일강의 말은 하후성의 궁금증만 더욱 유발시킬 뿐이다.
“대체 어떤 인물이에 감히 철기친왕부와 단신으로 맞서겠다는 것인지……!”
“이 정도로 합시다. 폐하께서는 철기군을 수족처럼 아끼고 계시오. 그래서 그 혈겁에 휘말리면 안되겠기에 철수를 명하신 것으로 알고 있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중얼거리는 하후성의 눈은 빛을 잃고 있었다.
“비록 우리 철기군이 철수했다고 해도 철기친왕부에는 철기친왕께서 초빙한 전설적인 기인들 철기사신로(鐵甲四神老)와 역전의 구십구철갑병(九十九鐵甲兵)이 머물고 있소. 그들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해선 우리 철기군 전체가 동원되어도 승패를 예측할 수 없거늘…… 혼자 힘으로 철기친왕부를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하후성의 말에 초일강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지난밤에 사신과도 같은 존재들이 영락제의 거처를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아마도 철기친왕부는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초일강이었다.
***
“정말 혼자 가겠느냐?”
마황후가 어쩔 수 없는 근심을 실은 채 물었다. 구바우가 얼마나 강한지는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안다. 하지만 그래도 근심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인 것이다.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구바우는 들고 있던 천신단궁을 마황후에게 건네주었다. 무기까지 쓸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지금 두 사람은 철기친왕부가 바라다 보이는 주작대로 건너편에 자리한 어느 장원의 높은 전각 위에 서있다. 그들은 이곳에서 일천의 철기군이 철기친왕부에서 모두 빠져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이른 겨울의 아침이라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다. 방금 전 일천기의 철기군이 철기친왕부를 빠져나가면서 일으킨 소란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나도 목야염에게 받을 빚이 있다. 내가 도와주면 좀 더 빨리 끝낼 수 있을 텐데……”
마황후가 그래도 미련이 남은 듯 천신단궁을 품에 안은 채 말했다.
구바우는 그런 그녀를 돌아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황후님은 더 이상 피를 보시면 안됩니다. 어머니의 기억은 온전히 아이에게로 전달되니까요. 앞으로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십시오.”
구바우의 말에 마황후의 몸에 파르르 전율이 스쳤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슷!
구바우는 마황후의 어깨를 다독여주고는 그대로 전각 아래로 뛰어내렸다. 곧 그가 주작대로를 가로질러 철기친왕부로 다가가는 것이 보인다.
‘어머니의 기억은 온전히 아이에게로 전달된다? 설마 나보고 자기 아이를 낳아달라고……!’
마황후의 옥용에 와락 홍조가 피어오른다.
‘아직 가능할까?’
마황후의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린다. 남편을 잃고 어린 두 딸을 비명에 보낸 자신이 설마 또 아이를 낳을 기회를 갖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녀다.
‘아마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이 나이에 새삼 아이를……’
구바우가 던진 한마디에 끝없이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 마황후였다.
***
“젠장!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갑자기 철기군이 철수하다니……!”
“신경쓸 것 없어! 잠시 훈련을 나가는 것이라잖은가?”
끼기기긱!
철기친왕부의 육중한 철문을 닫으며 몇 명의 장한들이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철기친왕부 내에 주둔하고 있던 철기군이 빠져나간 일은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철기친왕부의 상하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다시 잠자리에 들어가고 싶어 서둘러 문을 닫는 바람에 장한들은 어둑한 주작대로 저편에서 한 명의 청년이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쿠웅!
철기친왕부의 육중한 철문이 다시 굳게 닫히고 곧 그 앞으로 기괴한 청년이 멈춰섰다. 새벽녘의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과 몸은 절반씩만 보이고 있었다.
새하얀 반쪽의 얼굴과 새하얀 한쪽 팔. 반대쪽엔 오직 어둠만이 음울하게 녹아 있다. 만일 무심결에 그를 본 사람은 망자의 혼을 거두기 위해 명부에서 나온 염라사자인줄 알고 기겁을 할 것이다.
“잘 지었군! 비록 배신과 변절의 대가로 쌓은 모래성이긴 하지만!”
구바우는 웅장한 철기친왕부의 정문을 올려다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여명의 흐릿한 빛 속에서 구바우의 입술이 벌어지며 절반은 시커멓고 절반은 하얀 박속같이 고른 치아가 나타났다. 스산한 전율을 일으킬 죽음의 미소가 그 안엔 서려 있었다.
철기친왕부의 정문은 높이가 삼 장에 이르는데 그 정문 좌우에는 무쇠로 주조된 거대한 사자상이 우뚝 서서 포효하고 있다. 하나의 크기가 삼 장에 이르는 철사자상은 철기친왕부의 권위와 부를 상징하는 듯 하다.
“피로 세운 성채이니 피로 씻겨져야겠지!”
구바우의 눈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토해낸다. 그의 뇌리로 이곳에 오기 전 하오밀각(下五密閣)의 정보원에게서 들은 내용이 떠오른 때문이다.
하오밀각은 주로 고관대작이나 거부들의 정보를 수집해서 팔거나 그 정보로 협잡을 하는 것으로 업을 삼는 무리들이다. 구바우는 북경에 닿자마자 하오밀각에 거액을 주고 목야염의 주변을 탐문케 했다.
그리고 영락제를 만나고 나온 직후 하오밀각이 제출한 보고서를 읽었었다.
“유화고모님께서는 돌아가셨단 말이지? 그것도 아들과 함께 독살을 당해서…….”
구바우는 이를 부득 갈았다. 그만큼 하오밀각에서 제출한 보고서의 내용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천산노야 구중경이 툭하면 자신이 노총각이라고 한탄했던 것은 농담이다. 노총각은커녕 그는 한 번 결혼했었으며 딸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노총각이라 박박 우긴 것은 나이 들어 결혼한 아내가 딸을 낳다가 난산으로 죽었고 그 딸마저 일찍이 슬하를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천산노야의 유일한 혈육이 구유화다.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된 구중경은 하나뿐인 딸을 키우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다행히 구유화는 아름답고 착한 소녀로 자라주었다.
헌데 구유화가 열 여섯 되던 해에 비극이 발생했다. 친구들과 나들이를 나갔던 구유화가 누군가에게 납치된 것이다.
당연히 천산노야는 눈이 뒤집혀 딸을 찾아다녔다. 그리하여 마침내 반년만에 딸의 종적을 찾았는데, 범인은 다름 아닌 목야염이었다.
호북성의 무림세가 목가장의 소장주였던 목야염은 친구들과 나들이를 나온 구유화를 보고는 한 눈에 반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잠시 떨어져 있던 구유화를 목가장으로 납치해갔으며 감금해두고 짐승같은 욕정을 채웠다.
필사의 수소문 끝에 딸의 행방을 알아낸 천산노야는 목가장에 난입하여 박살을 내 버렸다. 목가장의 식솔 백여명이 죽거나 다쳤고 납치극의 주범인 목야염은 사지에 화살을 한 대씩 맞고는 벽에 허수아비처럼 꽂혀 버렸다.
마지막으로 분노의 화살이 목야염의 심장에 박힐 찰나 구유화가 나타났다. 그녀는 아버지의 앞을 가로막고는 목야염을 위해 애원했다.
― 저는 이미 이 사람의 아이를 가졌답니다. 절 봐서라도 제발 이 사람을 용서해 주세요.
천산노야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겨우 열 여섯 어린것이 짐승같은 놈에게 능욕을 당한 것도 땅을 칠 노릇인데 그 범인의 아이까지 잉태해버린 것이다.
절망하는 천산노야와 달리 헌신적이고 순한 심성의 소유자인 구유화는 뱃속 아이의 아버지인 목야염을 남편으로 인정해 버렸다. 그래서 목야염을 위해 아버지에게 대신 용서를 구한 것이다.
천산노야는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딸을 빼앗아간 목야염이 갈아 마시고 싶을 정도로 미웠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참아야만 했다.
천산노야는 활을 부러뜨리고 목가장을 떠났다.
뿐만 아니라 중원을 아예 떠나 천산으로 가버렸다.
이 모두가 딸을 위해서였다. 딸의 시댁이 될 목가장을 박살내 놓고 사위인 목야염을 거의 반 병신으로 만들어 놓았다. 자신이 계속 근처에 있으면 목야염과 딸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쓰라린 가슴을 안고 중원을 떠나 머나먼 천산으로 들어가 외로운 사냥꾼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사십여년전의 일이다.
하지만 천산노야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구유화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목야염은 속이 좁은 인간이라 천산노야에게 당한 치욕과 봉변을 결코 잊지 않았다. 늘 그 일을 빌미로 구유화를 구박했으며 심지어 구유화가 낳은 자신의 첫 아들조차 냉대했다. 정식으로 결혼을 해주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구유화가 낳은 아들도 족보에 올리지 않았다.
그래도 구유화 모자는 참고 참았다. 언젠가는 목야염이 자신들을 인정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하지만 구유화 모자의 그같은 간절한 바램은 결국 바램으로 끝나고 말았다.
목야염에게는 남 다른 야망이 있었다. 구유화와의 일은 그저 젊었을 때의 불장난에 불과했다. 그래서 구유화를 아내로 인정하지 않았고 구유화의 아들도 입적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야망을 뒷받침해줄 유력한 가문의 여식과 결혼할 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목야염은 서른 살이 다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키워줄 만한 유력한 집안의 여자들을 끈질기게 물색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목야염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홍무제 주원장이 스승으로 모셨던 거유(巨儒) 유기의 손녀딸 유소영과 사귀게 된 것이다.
유소영은 거유 유기의 손녀였지만 조신한 규중처녀는 아니었다. 오히려 무공을 좋아하는 말괄량이였고 남다른 야심을 품고 있는 여자였다.
어느날 유소영은 사냥을 나갔다가 몽고족의 잔당에게 걸려 납치되려 할 때 마침 지나가던 목야염이 그녀를 구해 주었다. 실상 그것도 목야염이 꾸민 일이었다. 목야염은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몽고족의 잔당인 것처럼 꾸민 것이다.
목야염은 자기가 나서서 유소영을 구해 주면서 패거리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살인멸구해 버렸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했다. 그 일로 안면을 트게 된 목야염과 유소영은 의기투합하여 오래지 않아 야합을 해버렸다.
유소영은 목야염과 깊은 관계가 되어버린 후에야 목야염에게 사실상의 아내와 이미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둘의 관계는 알만한 사람들에게 다 알려진 상태라 목야염과 헤어질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구유화라는 존재는 목야염뿐만 아니라 유소영에게도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목야염과 유소영은 마침내 결혼했다. 그리고 그 직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며 살던 구유화가 누군가에게 독살당하고 말았다. 목야염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함께.
범인은 유소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직접 독을 풀지는 않았다. 목가장의 총관이었던 서문경(西門慶)이란 자에게 막대한 황금과 후일 권력을 약속하면서 독살을 부추겼을 뿐이다.
하오밀각은 그런 내막을 속속들이 알아내 구바우에게 전해 주었다.
“차앗!”
구바우는 좌측에 있는 육중한 철사자상을 들어올렸다. 크기는 집채만하고 무게는 백만 근을 훨씬 넘는 쇠덩어리였다. 그 거대한 철사자상이 공깃돌처럼 허공을 날았다.
콰직!
철기친왕부의 거창한 철문이 그대로 박살나며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갔다.
“뭐야!”
“무, 무슨 소리야?”
“벼락이 떨어졌다!”
그때까지도 곤한 새벽잠에 빠져있던 철기친왕부의 여기저기서 놀란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문밖에 있어야 할 사자철상이 대문 안쪽으로 사십 장이나 날아와 인공호수 속에 처박혀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사방 수십 장에 호숫물이 튀어올라 흠뻑 젖어 있었다. 인공호수 속에서 노닐던 팔뚝만한 비단잉어들이 건물의 지붕 위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그때 부서진 철문을 통해 얼굴의 반반이 희고 검은 괴상한 놈이 걸어 들어온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저놈이 범인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철기친왕부 소속의 호원무사들이 손에 손에 무기와 몽둥이를 꼬나들고 달려들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주리를 틀어 주마!”
철기친왕부의 이름을 빌어 거들먹거리는 것이 장기인 호원무사들은 상대가 사신(死神)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무작정 노성을 지르며 구바우에게 덮쳐들었다.
가장 먼저 달려들어 몽둥이를 후려치던 장한이 구바우의 손에 멱살을 잡혔다. 그리고 그의 몸은 허깨비처럼 허공을 날아갔다.
퍼억!
그자가 머리부터 돌담장에 처박히는 순간 둔탁한 파골음이 터져나왔다. 수박이 으깨어지듯 으스러진 그자의 머리는 허연 뇌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히익!”
“고, 고수다!”
비로소 상대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호원무사들은 꽁무니를 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살기가 동할 대로 동안 구바우는 그자들이 달아나는 것을 용납치 않았다. 철기친왕부의 패거리들이 배경을 믿고 온갖 나쁜 짓을 다 하고 돌아다닌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구바우다.
구바우의 모습이 유령처럼 흐려지며 장한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곧 장한들 사이에서 처절한 비명과 둔탁한 폭음이 터져나왔다.
콰직! 으드드득!
“캐애애애액!”
“크아아아아악!”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겨 나가는 섬뜩한 음향과 함께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처절한 비명 소리가 새벽하늘을 울렸다. 구바우의 주먹과 발길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박살이 난 몸뚱이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으아아아!”
“살, 살인귀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철기친왕부의 막강한 후광을 등에 업고 온갖 악행을 저질러온 무리들은 동료들의 무참한 죽음을 보자 진저리를 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아나는 자들 앞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죽음의 그림자가 있었다. 무시무시한 힘이 실린 철권은 일격으로 한 명씩만 정확하게 신체의 일부를 가격하고 있었다. 가장 고통을 주면서 그 한 방으로 반드시 지옥문을 두드려야만 하는 필살의 주먹이다.
나귕구는 시체들은 단 한 구도 온전한 것이 없었다. 으스러진 뼛조각이 여기저기 박혀 있었고, 갈가리 찢긴 살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핏물이 질퍽거릴 정도였고, 대기는 역겨운 피냄새로 진동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한 명의 노인이 처절한 비명 소리가 연속해서 들리자 잠옷 차림으로 건물에서 뛰어나오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화려하고 단정했던 화원과 뜰은 난장판이 되어 지옥도가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 정원의 한쪽 구석에서 구바우는 마지막 남은 장한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의 옷엔 피가 튀어 스산한 느낌을 주게 하였고, 장한을 쥐고 있는 그의 주먹은 피와 살점이 질퍽하게 묻어 있었다. 희고 검어 사악하게까지 느껴지는 구바우의 얼굴이 피에 젖은 채 마귀처럼 웃고 있다.
“총관인 서문경이란 늙은이는 어디 있느냐?”
구바우는 장한의 목을 틀어쥔 채 물었다.
“커으윽! 총, 총관께서는…….”
허공에 쳐들린 채 숨이 막혀 바둥거리던 장한의 동공으로 문득 잠옷 차림의 노인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저, 저기…….”
장한은 헐떡거리며 노인 쪽을 돌아보았다.
거의 동시에 구바우도 그 노인을 발견했다. 수라장이 된 장내를 본 노인은 사색이 되어 비칠비칠 뒷걸음질을 치는 중이었다.
“늙은이가 서문경이냐?”
구바우는 멱살을 잡고 있던 장한을 집어던져 멀리 날려버리고 노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히익!”
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홱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 열걸음도 못 갔을 때 돌연 우악스러운 손이 노인의 뒷덜미를 홱 틀어쥐었다. 어느 틈에 다가온 구바우의 손이었다.
“놔, 놔라!”
노인은 뒷덜미를 잡히는 순간 몸을 홱 휘돌리며 발길질을 하여 구바우의 머리를 찍어 갔다. 젊었을 때는 제법 한 가닥 했던 솜씨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구바우의 머리를 찍어가던 그자의 발목은 구바우의 또 다른 손아귀에 틀어잡혔다.
우두두둑!
구바우의 손이 힘을 주는 순간 노인의 발목은 가차없이 으스러져 나갔다.
“으아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안 터져 나우묘 오히려 이상하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스!
돌연 구바우의 주위로 안개처럼 솟구쳐 오르는 인영들이 있었다. 아흔아홉 명의 육중한 무쇠 갑주를 걸친 인물들이다.
-구십구철갑병(九十九鐵甲兵)!
철기친왕부가 자랑하는 최강의 용병(傭兵)들이다.
개개인이 한 문파의 장문인에 필적하는 실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방어력을 지닌 무쇠 갑옷과 무시무시한 파괴력의 신병이기들로 무장한 덕분에 전쟁에 나가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
비록 구십구명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실질적인 전력은 일천기로 이루어진 철기군 전체에 필적한다.
이자들의 출신 내력에 대해서는 일체 비밀이다. 목야염이 이들을 대체 어디서 데려와 용병으로 고용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깁구철갑병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하듯 어느날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이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영락제의 북벌 때였다.
제위에 오른 영락제는 몽고족이 재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재위 기간 동안 모두 다섯 번의 북벌을 단행했었다. 역전의 장수들이 영락제를 수행했으며 본래 무림세가 출신인 목야염은 매번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영락제의 북벌에 수행할 때마다 목야염이 거느리고 간 무적의 용병들이 바로 이들 구십구철갑병들이다.
그들은 몽고족의 기병에 맞서 최선봉에서 목야염과 함께 칠십칠 회의 전투를 치르면서 단 한 명도 죽지 않는 불사불패의 신화를 창조했다.
구십구철갑병들이 지닌 무기는 금석을 무 베듯 하는 신병이었고 그들이 걸친 갑주는 설사 벼락에 직격되더라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만년한철로 제조된 것이었다. 그들이 일단 벽을 쌓으면 가공할 돌파력을 자랑하는 몽고족의 기마대도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구바우의 손에 잡혀 있는 늙은이가 바로 철기친왕부의 총관 서문경이란 인물이다. 철기친왕부의 총관이란 직위는 어떤 의미로는 대명제국의 당상관보다 더한 위세를 보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 그자가 구바우의 손에 발목이 잡힌 채 몽둥이처럼 휘돌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콰쾅!
서문경의 머리가 가장 가까이에 접근한 철갑병의 가슴으로 꽂혔다.
“크아아아악!”
당연히 비명이 터졌다. 헌데 기가 막히게도 죽음의 절규는 서문경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 아니었다.
“아이쿠! 머리야!”
머리를 감싸쥔 채 서문경은 단순한 비명을 질렀을 뿐이고, 그의 머리로 강타된 철갑병은 갑주의 가슴 부분이 완전히 박살난 채 썩은 고목처럼 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가슴과 심장이 파열되어 피분수를 뿜으며…….
부우우웅!
서문경의 몸이 풍차처럼 휘돌려지고 만년한철의 갑주가 썩은 판자처럼 부서져 나갔다.
“크아아악!”
“캐애애애액!”
뒤를 따르는 처절한 비명…… 비명들!
철기친왕부는 다시 한 번 피로 씻기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불사불패를 자랑하던 구십구철갑병들은 몽둥이처럼 휘둘러지는 일개 늙은이의 허약한 몸뚱이에 맞아 박살이 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서문경의 육신이 더 이상 무기로 쓰이지 않아도 되는 때가 도래했다. 구바우는 서문경의 피투성이가 된 몸뚱이를 바닥에 팽개쳤다.
서문경은 마침내 구바우의 마수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그에게 정신이 있을 턱이 없었다.
발목이 박살난 고통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거기에, 머리를 쇠판으로 박치기하며 별이 빙빙 돌아갈 정도로 지끈거리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 전율스럽다 못해 이가 덜덜 떨리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의 참상이라니!
구십구철갑병! 무적을 자랑하며 몽고족과의 숱한 전투에서 불사불패의 신화를 이룩했던 그들이 몰살을 당해 있는 것이 아닌가?
죽은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피조물이란 이유를 붙인다면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직접적인 사인이 문제였다.
인간의 뼈가, 두개골이 아무리 단단하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강철과 비교될 수가 있단 말인가? 더욱이 철도 보통의 쇠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에서 캐내는 광물 중 가장 견고하고 강인한 만년한철에 비교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한데 그 인간의 두개골과 만년한철이 부딪쳐 박살난 쪽은 오히려 반대였던 것이다.
서문경은 단지 같은 사람의 머리끼리 부딪친 정도밖엔 충격이 없었다. 그러니 더욱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분명 그 자신의 머리로 저 막강한 철갑병을 모조리 몰살시켜 버린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로서는 알 까닭이 없었다. 무기 대신 휘둘러질 때 천지간에서 가장 강한 파괴력인 시바흑마력이 자신의 몸에 주입되어 만년한철 보다 오히려 단단해졌다는 사실을!
“늙은이가 독부 유소영의 사주를 받아 구유화란 분을 독살한 장본인이렸다?”
구바우는 서문경의 가는 목을 큼직한 손으로 움켜쥔 채 으르렁거렸다.
“그, 그렇소!”
서문경은 혼이 빠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놈이 감히 유화고모님을 독살해?”
구바우는 서문경의 목을 당장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으면서 물었다.
“그, 그건 마님께서 시켜서 할 수 없이…….”
띄엄띄엄 말하는 서문경의 노안에 공포의 기색이 역력했다.
“마님? 첩년이 시킨다고 정실부인을 죽여?”
일순 구바우의 눈가로 시퍼런 살광이 일었다.
그걸 본 서문경은 절망이 무엇인지 실감했다.
‘끝장이다! 사신을 건드렸으니 철기친왕부도 오늘로 종지부를 찍고 마는구나.’
절망!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어처구니없는 참극! 그 앞에서 서문경은 아득한 어둠의 나락으로 추락해 가는 철기친왕부의 현판을 떠올리고 있었다.
서문경은 구바우가 묻는 질문에 넋이 나간 채 술술 대답을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구바우가 알고자 하는 것을 모두 말하는 순간 자신의 목숨도 끝이 난다는 것을!
구바우의 질문이 끝도 한도 없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서문경이었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잔치가 없듯, 마침내 서문경은 자신이 더 이상 구바우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가 염라사자를 본 순간이었다. 한 얼굴에 흑과 백, 천신과 아수라의 형상이 함께 깃들인 염라사자를!
***
천검호신(天劍虎神)!
천도혈작(天刀血雀)!
천창마룡(天槍魔龍)!
천지묵현(天指墨玄)!
그렇게 불리는 네 명의 노인이 있었다.
원래 이들의 별호는 사방무신(四方武神)이었으나 지금은 철기사신로(鐵騎四神老)라 불린다.
철기사신로의 나이는 최연소자인 천지묵현이 이 갑자를 상회할 정도니 최연장자인 천검호신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짐작조차 못할 일이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 장구한 세월을 오직 검법, 도법, 장법, 지법등 단 한 가지의 무공에만 전념해 왔다는 사실이다. 순수하게 그 방면으로만 본다면 이미 그들의 무위는 초일류의 수준을 능가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누구도 철기사신로의 진면목을 본 자는 없다.
이십여년 전부터, 어마어마한 재물을 대가로 받고 목야염의 초빙을 받아 그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형체 없는 인간들이 그들이다.
여하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들은 나서지 않는다. 오직 목야염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졌을 때만 철기사신로는 모습을 드러낸다.
***
두터운 철문으로 외부와 완전히 차단 된 밀실(密室)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다. 부자(父子) 사이인 듯 얼굴의 윤곽이 서로 비슷한 초로의 사내와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다.
“아버지! 아무래도 영락제가 우리를 대하는 것이 전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오늘 저렇게 갑자기 철기군을 빼내간 것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청년이 초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는 갑작스러운 철기군의 철수를 부친에게 보고하러 이곳 밀실로 달려온 상태다.
그는 눈에 확 뜨일 정도로 하얀 피부를 지닌 미남이었다. 하지만 얄팍한 입술은 그의 의지가 여리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으며 간간이 돌아가는 눈동자가 그의 심지가 올바르지 못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 청년의 이름은 목정길(穆正吉). 철기친왕부의 후계자였는데 세상의 여자들이 몽땅 자기 것인 줄 착각하고 살아가는 파락호였다.
목정길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인물은 육십을 바라보는 초로의 사내다. 선풍도골의 풍모에 눈빛이 아주 유현하여 심기가 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인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철기친왕 목야염!
이것이 초로의 사내의 이름이다.
“흐흐! 영락제가 우릴 어떻게 대하든 이제는 상관없다!”
철기친왕 목야염의 입에서 청수한 외모와는 전혀 다른 아주 음침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뿐만 아니라 착 갈아 앉아있던 그의 눈빛이 이 순간 형형하게 백열되고 있다. 그 눈빛은 야망의 빛이었다. 군림을 원하는 자의 눈빛이었으며 피를 원하는 야수의 눈빛이기도 했다.
목야염은 심기가 깊고 자기 분수를 잘 안다는 이제까지의 그에 대해 알려진 소문과는 지극히 상반된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아마 상대가 자신의 핏줄인 아들이기에 진면목을 보이는 것이리라.
“영락제도 만만치 않은 존재니 우리의 일을 눈치채고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갖고 있지 못할 것이다!”
목야염의 말에서는 음모의 내음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래도 동창의 요원이 아버님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한 요인들의 이름이 적힌 연판장(連判狀)을 훔친 것을 보면 무언가 냄새를 맡았다고 보는 게…….”
목정길은 불안한 듯 이마를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
목야염은 부드러운 어조로 그런 아들을 안심시켰다.
“그놈이 애비의 서재에서 빼돌린 연판장을 어디 숨겨놓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아직 자금성으로는 안 흘러 들어간 게 확실하다. 만일 연판장을 동창이나 금의위에서 입수했다면 당장 떼거리로 몰려왔지 철기군을 철수시키거나 하진 않을 게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목정길을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다.
“철기군의 돌연한 철수는 초일강의 말대로 기동훈련을 위해서라고 믿어라. 첩자가 우리에게 잡혀 있는 이상 우리의 계획을 눈치챌 놈은 없다! 하물며 우리가 교(敎)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알려질 리가 없어.”
목야염은 느긋하게 말했다. 헌데 교(敎)를 위해서 일하다니? 목야염이 설마 마교와 통하고 있단 말인가?
“한 달 후에 있을 거사가 성공하고 아비가 제위에 오르기만 한다면 교에서의 아비 위치도 파격적으로 격상될 것이다. 십대천마(十大天魔)나 삼태상(三太上)이라도 감히 아비를 홀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십대천마를 거론하는 것을 보면 목야염이 마교와 내통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회의사신은 아마도 대명제국의 제이인자인 목야염을 통해 역천을 꿈꾸고 있는 듯 했다.
“생각만 해도 흥분됩니다. 황실과 무림을 한 손에 쥐고 흔들 수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목정길의 불안해하던 얼굴에도 생기가 감돈다. 그자의 뇌리로는 무소불위의 권위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상적인 세상이 떠오르고 있다. 이런 인간들이 권력을 쥐게 되면 하는 짓이란 게 이처럼 지극히 저속하고 말초적인 것뿐이다.
“흐흐흐! 애비의 원대한 야망은 그 정도가 끝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마교 역시 이 아비의 수중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목야염은 마교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기가 막혀할 허무맹랑한 꿈까지도 꾸고 있다.
목야염이 마교와 접촉한 것은 아내 유소영의 도움으로 관부에 막 발을 들여놓았던 삼십여 년 전의 일이다.
마교는 원대한 안목으로 관부에까지 자신들의 간세를 심어놓기에 이른다. 그때 선택된 것이 목야염이었다.
야심은 있으되 실질적인 무공은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목야염에게는 고절한 실력의 고수들을 제공하겠다며 손을 잡자는 마교의 제안은 매력적인 것이다.
마교에서 빌려준 고수들의 도움을 받아 목야염은 관부에서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단 오 년만에 어림군의 총수가 되었다. 목야염에게는 무슨 일을 맡겨도 해결한다는 평판이 붙은 덕분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만 현재 철기친왕부에 머물고 있는 구십구철갑병과 철기사신로등은 모두 마교에서 목야염에게 빌려준 고수들이다.
“소자는 아버님만 믿겠습니다! 저는 그럼 황태자 수업을 받아야겠네요?”
목정길은 입이 귀에 걸렸다. 이미 부친 목야염이 황제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목장길이다. 그럼 자연이 자신은 황태자가 되는 것이고……
“녀석.”
실현되지도 않은 굼속을 헤매며 행복해 하는 아들을 목야염은 인자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던가? 간사스럽고 음흉한 자식을 아비라는 자는 예쁘게 봐주고 있는 것이었다.
꿈을 꾸고 있기야 목야염도 마찬가지였다.
‘영락제! 본좌가 야망을 숨기고 네 밑에 들어간 이유는 네게 인망이 없기 때문이다. 권력에 눈이 어두워 조카를 죽이고 보좌를 차지했으니 다른 사람이 또 무력으로 그 자리를 빼앗는다해도 세상의 지탄을 받지는 않는다.’
그렇다. 이것이 목야염이 건문제를 배신하고 영락제를 도운 궁극적인 이유다. 영락제는 본의 아니게 찬탈의 길을 닦아놨다. 다른 사람이 영락제를 흉내낸다고 해도 이제는 비난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만일 건문제 치하에서 그냥 머물러 있었다면 주씨왕조를 뒤엎고 역성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마교도 그렇고 목야염도 그렇고 영락제의 찬탈이 성공하는 것이 훗날 자신들이 황실을 장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한 달후, 영락제는 또 한 번의 북벌(北伐)을 준비하다가 진중에서 갑자기 죽는다. 당연히 황실에서는 제위를 놓고 또 다시 내분이 일어날 것이며 각기 측근들의 부추킴을 받은 세 명의 황자(皇子)들은 누구도 제위를 양보하지 않으려 들 것이다. 골육상쟁은 피할 수 없게 되고 바로 그때 내가 나서서 자연스럽게 분쟁을 종식시킨 뒤 제위에 오른다! 만인의 추대를 받으며.’
목야염은 이미 설정된 장대한 계획을 다시금 머리 속으로 떠올려 점검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웃음은 결코 보기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타인의 피를 보며 간신히 기쁨을 참는 사악한 흉소였다.
음모! 그랬다. 만일, 아직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영락제가 죽기라도 한다면 천하는 또 다시 격렬한 제위다툼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 것이다.
영락제의 둘 째 아들 한왕(韓王)이 부친처럼 야망이 크다는 것은 공공연히 인구에 회자되는 사실이다. 한왕은 순순히 형인 황태자에게 제위를 양보하진 않을 것이다.
만일 영락제가 황태자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혀주지 못한 상태에서 급사라도 하게 된다면 제이차 정난의 변이 일어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목야염과 마교는 그같은 난세를 엿보고 있다. 난세에서는 힘있는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법이므로!
목야염은 실로 가공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단 한 번의 거사를 위해 그는 일평생을 흉심을 감춘 채 양의 탈을 뒤집어쓴 채 살아오고 있었다는 말이다.
헌데 목야염과 목정길 부자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굼에 젖어 황홀경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콰앙!
돌연 그들이 있는 밀실의 한 자 두께 철문이 어떤 강대한 힘에 의해 그대로 박살나버렸다.
“엇!”
“뭐, 뭐냐?”
두 부자는 질겁하며 튕기듯 일어섰다. 그 순간 무언가 시커먼 물체들이 목야염의 앞으로 날아왔다.
데구르르……
네 개의 둥글고 검은 물체는 탁자 위에서 구르더니 정확히 목야염의 앞에서 멈춰섰다.
“헉!”
순간 목야염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숱한 전장을 헤쳐온 목야염이지만 지금처럼 머리털이 올올이 곤두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래야만 했다. 네 개의 둥글고 검은 물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잘려진 머리였기 때문이다. 수급들은 방금 전에 몸통에서 잘려진 듯 목 부위에서는 여전히 시뻘건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목야염의 앞에 나란히 멈춰진 머리의 눈들은 부릅떠져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회의의 빛과 처절한 전율을 두 눈에 담은 채 흡떠져 있는 네 쌍의 눈들.
“철기사신로!”
목야염이 앓는 듯이 흘려내는 신음으로 그 수급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철기사신로! 그렇다. 바로 그들의 수급인 것이다. 마교가 목야염을 위해 파견해준 가장 강력한 조력자들인!
잘읽었습니다.
마교~~~~~~~~~~~~
감사
현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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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입니다.
즐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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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