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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시인 김정호…
김정호(金正浩). 그의 본명은 조용호다. 1952년 3월27일 생(음)으로 광주시 북동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조재영씨로 부친은 서울 종로경찰서.여수경찰서장을 거쳐 이름을 광범 개명한 후 출판사를 경영했고 모친은 동일창극단 단원 출신으로 창의 명인인 박숙자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터 몸이 약해 온갖 병치레를 다 했었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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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의 음악적 재능은 외가쪽의 영향이 지대했다. 모친과 함께 6ㆍ25동란중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외조부 박동신은 우리 국악의 거인이었는데 명창 김소희의 고수이자 인간문화재인 김동준, 국립창극단장 박우성 등이 그의 제자이며 보국가, 유관순전, 해방가등 판소리 창작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어머니와 외할아버지는 함께 ‘아성극단’이란 악극단을 만들어 만주나 상해 등지로 공연을 다니기도 했던 ‘명인’이었는데 어머니는 김정호가 6살 때 집안에 있던 국악기를 모두 내다 버렸고 심지어는 가야금 줄까지 끊어버렸다. 그 힘들고 고된 악극단생활을 자식에게 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머니는 ‘동일창극단’의 단원이었는데 명창 김소희 선생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외할아버지인 박동실 선생은 국악의 대가로서 인간 문화재인 김동준, 국립창극단장인 박우성 등을 길러냈고 특히 ‘김유신 보국가’ ‘유관순전’ ‘건국가’ 등을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현재 국립국악원 악장인 박종선씨는 그의 외삼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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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도
광주 수창국민학교 2학년 때 서울 교동국민학교로 전학을 온 김정호는 70년대 인기개그맨이 었던 고영수 와는 같은 동네 같은 교동국민학교를 다녔고 용호의 어린 시절은 온순하면서도 활달했다. 그는 국민학교 시절 글짓기나 연극을 잘하는 국민학생 이었다. 특히 웅변에 재능을 보여 여러 차례 상을 받기도 했다. 밥상위에 올라가 연설흉내를 내는 등 웅변에 재능을 보여 여러 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머리좋고 활달한 개구쟁이였고 국민학교 1학년 때는 뇌염에 걸려 사지를 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 1968년도
서울의 교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근의 대동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중학교때 '전국 학생 웅변대회'에 매년 참가하여 수상(정확히는 입상)도 했었다는데.. 대동상업고등학교까지 다녔던 김정호에게 우연히 음악에 심취하는 계기가 있었다.
“ 김정호의 경우도 계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3 때인 어느 무더운 여 름,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이스크림가게가 문을 열었는데 그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배달하는 아저씨가 배달이 없는 시간에는 늘 기타를 퉁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흘러간 노래 <애수의 소야곡>, <울며 헤진 부산항> 등의 처량한 기타소리는 어린 김정호의 발길을 멈추게 했으며, 학교수업이 끝나면 그는 항상 그곳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이 후일 연예계에 발을 딛게 된 동기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집 근처 악기점에서 1,500원 짜리 기타를 3 개월 할부로 구입하여 아이스크림 배달원 아저씨한테 지도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혼자 기타를 통기다 음이 틀리면, 처음에는 기타 줄을 맞출 줄도 몰라 밤늦은 시간이라도 아이스크림 가게 문을 두드려 잠자는 아저씨를 깨 워 줄을 맞춰 오곤 했었다는데..
어릴때나 성인이 된 후나 한가지 일에 뜻을 두면 어느 정도 끝을 보아야 직성이 풀렸던 그 의 성격은 후일 그 아저씨를 오히려 가르쳐 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람새 신용산님 글-
그러나 김정호의 기타를 마련하게 된 계기는 다른 설도 있는데 기타는 중학교때 외삼촌(삼촌인지)한테 생일 선물로 받고 계속 쳤다는 설도 있습니다.
-바람새 최길수님 글에서-
이 당시 상황을 김정호는 당시 음악잡지 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의 음악적 배경을 " 어딜 때는 뭘 압니까? 전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국악의 션율을 들으면 어디로 빠져드는 기분이 들 정도로 마냥 좋아 했어요" 라 했다. 그의 마지막 시기에 국악에 심취해서 몰입했던 것은 아마도 이때의 경험이 그를 이끈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어느 잡지 가사에는 중학교 2학년때 우연히 친구가 기타를 치는 모습을 본것이 계기가 되어 그 날부터 그 신기한 기타를 얻기위해 할머니를 졸라 결국 그의 부탁에 못이긴 할머니는 중학교 2학년의 김정호에게 당시 1천 3백원짜리 기타를 사주었다는 일설도 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기타를 배운 것은 3년뒤인 고교 2학년 때였는데 비로써 기타의 참매력을 안 다음부터는 밥도 잠도 설치며 기타를 쳤다고 하며 몰래 무일푼으로 무전여행을 떠나기도 했는데 그 여행에서 느낀 감정을 바탕으로 후에 어니언스가 불러 히트했던 <사랑의 진실>이란 노래가 그때의 경험과 감정을 바탕으로 만든 노래라 한다.
그때의 상황을 " 그때는 역시 내가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떠들고, 좋아하는 악기를 다루고 또 돈도 생기고 하니까 그저 어우러졌던 것 같아요" 라고 김정호는 인터뷰에서 표현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김정호에겐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고등학교 재학시 당시에 유행하던 무전여행을 제주도로 갔는데 폭풍주의보로 배가 뜨지 않아 몇일을 더 있다보니 돈도 없이 몰래 배를 탔답니다. 걱정도 되고 신세가 초라하여 난간 위에서 기타를 치기 시작했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들고 반응도 좋아 오히려 여비까지 얻어 왔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1970년도-
그가 처음 음악을 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에 합류, 악기를 다루면서부터 였다. 노래 만드는 일이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고교 졸업 후엔 기타를 둘러맨 채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음악에 대한 갈증은 끝이 없었으나 정작 그가 자리해 음악 할 장소는 아무데도 없었다. 당 시 그는 종로 낙원상가 주변을 배회했으며, 심지어는 잠자리 조차 없어 거리에 내놓은 이삿 짐 속 케비넷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다고 한다.
대동상고졸업 후 가정사정 등으로 인해 진학을 포기한 김정호는 그동안 쌓았던 기타실력을 갖고 미8군 무대로 진출하여 활동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기타에 더욱 더 심취하였는데, ‘삼청동의 기타박사’라 불리는 이생회씨에게 우이동에 골방에서 두문불출하며 온종일 기타를 배운 뒤부터 노래와 기타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의 음악 실력은 금새 소문이 났고 미군 기지촌에서 그룹사 운드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가수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는 어니언스의 임창제, 쉐그린의 멤버였던 이태원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당시 활동을 하던 듀엣 어니언스에게 곡을 주어 취입하게 되었는데 그 노래가 바로 <사랑의 진실>,<작은새> 두 독이다. " 취입을 하고도 별 관심 밖이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더군요. 뭐, 별로나쁘진 않더군요. 하 하 하" 김정호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고 김정호와 임창제의 모습>
스킬보이스라는 이름으로 미8군 보컬그룹 활동을 하면서 70년대 초 김정호는 임창제 등과 미8군에 출연하던 이상일씨를 음악스승으로 모시며 북한산 속에 머므르며 연주에 온 힘을 쏟았다. 임창제는 이 당시 김정호가 믿고 의지했던 절친한 음악의 형제. 이들은 '음악과 결혼했다'고 할 만큼 음악적 야망을 함께 키워갔다.
“정호는 우리가 다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어보면 늘 기타를 끌어안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 정좌한 자세로 열심히 기타를 치고 있던 작은 체구... 정말 악착스런 정신과 사랑을 가지고 연습하는 걸 보았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기타실력이 뒤지면 밤을 새워서라도 극복하고 마는 완벽주의 스타일이다. 당시 북한산 등성이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공부도 많이 못해 무식한 우리가 음악으로 세상에서 1등을 한번 해보자'며 아이들처럼 새끼손가락을 걸며 맹세하던 생각이 난다“
-가수 임창제씨 당시를 회상하며.-
1972년 김정호는 어니언스에게 작은새를 작곡하여 주었다. 어니언스는 김정호곡 <사랑의 진실>을 가지고 당시 최고의 인기 쇼프로인 쇼쇼쇼 무대로 정식데뷔를 하였다.
<70년대 전설적인 뚜엣 어니언스의 모습/ <사랑의 진실-지구, JSL120691, 73년5월5일 / 어니언스 데뷰음반>
스킬보이스라는 록그룹을 결성하며 미8군 무대로 진출한 임창제가 이수영과 함께 듀엣<어니언스>로 데뷔하려하자 자신의 일처럼 뛸 듯이 기뻐했던 김정호. 작곡한 노래들을 선물로 주었다. 어니언스의 데뷔앨범속에 수록된 김정호의 곡들은 두 사람의 합의하에 임창제 이름으로 먼저 발표를 했다. 만약 히트를 하게 되면 그때 가서 '이 곡들은 김정호가 만든 곡들'이라고 깜짝발표를 하고 '김정호에 대한 궁금증이 높아질 때 데뷔를 한다'는 계획이었다. 의리있는 임창제는 대표곡 <작은 새>외에도 <사랑의 진실><외기러기><저별과 달을>등 모든 곡들이 대히트를 하자 약속대로 KBS라디오방송에서 사실을 발표했다.
1972년 어니온스가 불러 히트한 ‘작은새’를 통해 먼저 이름이 알려졌다. 어니온스가 초기 히트한 노래 중 ‘편지’를 제외하고는 ‘사랑의 진실’‘저별과 달은’ 등 대다수 곡은 김정호가 작사·작곡한 것들이다. 어니언스 멤버 임창제도 “어니온스를 만든 장본인”으로 김정호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1972년부터 김정호는 <이름 모를 소녀>를 부르며 본명인 조용호 대신 김정호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김정호란 예명은 자신이 직접 지은 것이다.
“저는 1973년부터 75년 까지 명동에 있던 르시랑스 음악감상실에서 DJ를 했습니다.
그곳은 음악평론가 이백천 선생님이 주인이었고, 송창식 김민기, 윤형주, 김세환, 이종용, 이장희, 둘다섯, 이동원 유심초의 동생 (아직 듀엣 결성 이전 이었고 무명시절), 김도향, 스푸키스, 오준영(강변연가의 작곡가), 채은옥, 오니온스 등이 라이브 콘서트를 했습니다.
물론 그곳에 김정호씨도 나타났습니다. 이름모를 소녀를 불렀고, 이백천선생님께서 그에 대한 평을 했습니다. 아마도 김정호씨 음악 에너지에 대한 찬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김정호씨는 매우 소박 소탈했습니다. 멋을 낸다거나 팬을 의식한다거나 이런 모습과 생각은 그의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음악과 소리, 작곡과 영혼, 무대와 사랑, 인간, 진실……. 이런 것들로만 향하는 하나의 뜨거운 블루스, 빛이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정호씨는 농담도 없었고, 일상적인 대화도 없었습니다. 늘 기타만 가슴에 안고 노래만했습니다. 그의 두 눈은 물끼가 어려서 번쩍이는 안광을 지녔습니다.
두눈은 커다랐고 수척해 보였지만 어딘가 단단한 정신력이 그의 모습을 크게 보이게 했습니다. 그는 노래할 때 마다 에코를 많이 넣어 달라는 주문을 늘 했습니다. 아, 그리고 담배를 참 많이 피웠습니다.“
- 가요평론.방송작가 구자형씨의 김정호 회상-
또 하나의 당시 르시랑스에서 노래 부르던 김정호에 대한 기억이 있다.
“당시 명동에 있던 음악 감상실 르시랑스는 음악 평론가 이백천이 운영하던 곳으로 실내분위가 독특하다. 홀 안을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바닥에 카펫을 깔아 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음악감상을 하고 누워있어도 상관이 없었다. 그 때 이곳에서 한 무명가수가 매일 나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업소에서 출연료를 따로 주는 것도 아닌데 그는 매일 같은 같은 자리에 앉아 누가 보든 말든 양반다리를 하고 고개를 떨구고 심각하게 노래하던 친구가 김정호이다“
-신성원의 뮤직노트 “한국의 레너트 코윈 - 김정호“ 중에서 -
-1973년도
김정호는 자신이 작곡하여 준 어니언스의 노래가 힛트를 치자 여기에 힘을 얻어 1973년에 2년 여 동안 활동하던 미8군 보컬그룹 활동을 중단하고 가수데뷔를 모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작곡해서 준 어니언스의 노래가 히트를 치자 '김정호가 누구냐'는 대중들의 궁금증이 더해가면서 임창제의 손에 이끌려 73년 '이름 모를 소녀'라는 데뷔 곡으로 김정호는 대중들 앞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70년대를 풍미하며 지대한 음악적 영향력을 끼친 천재 대중음악가의 등장 이었다.
어니언스의 히트곡 <사랑의 진실><작은 새>의 진짜 주인공이 밝혀지자 미8군 무대에서 기타를 치며 <사월과 오월>멤버로 잠시 활동을 하던 김정호는 TBC방송 신광철 PD에 의해 패티킴의 스페셜프로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미 전국그룹사운드경연대회에서 가수왕으로 뽑혀 솔로데뷔를 꿈꾸던 조용필과 함께 김정호의 동반 게스트 초청은 파격이었다. 폭발적인 반응속에 두사람은 대중들 속으로 탄탄한 첫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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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독교방송의 가요담당 프로듀서로 김정호의 데뷔에 도움을 주었던 김진성씨는 김정호를 이렇게 회상했다.
"김정호가 '이름모를 소녀'를 처음 내놓고 제가 그 노래를 감명깊게 듣고 그 친구에 대해 다시 한번 주위를 환기시켰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심야프로그램 '꿈과 음악 사이에'와 '세븐틴'이라는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는데 그때 처음 '이름모를 소녀'를 취입하여 음반이 나오기 전에 얼른 테이프를 가져온 적이 있었지요.
그때 제가 김정호에게 "너는 한국의 모차르트'라고 얘기했어요. 뭔가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움이 그 속에 배어져 있는 것 같아서, 그런 노래를 처음에 듣고 감명 깊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974년 영화 이름모를소녀중에서 김정호 모습>
“김정호를 어니언스를 통해 알게 됐다. 이후 자주 만나다가 <이름모를 소녀>를 영화로 기획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김정호는 인기를 떠나서 자신의 노래로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다. 우수적인 눈과 흑인적인 패턴, 가사에는 우리의 전통적인 한이 짙게 담겨 있었다. 포크음 악을 했지만 정통적인 우리 창을 많이 가미했다. 흑인에게 전통적인 부르스가 있다면 우리 에게는 김정호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김정호같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 CBS 기독교 방송에서 PD로 김정호를 처음 만났던 평론가 김진성씨의 회상-
73년 12월, 백순진, 김태풍과 김정호가 한 TV프로에 출연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김태풍이 <4월과5월>을 탈퇴를 하고 그 자리를 김정호가 새로운 멤버가 되었음을 알리는 자리였다.
당시 음악 재능이 뛰어 났던 김정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기타 하나를 메고 비원 옆 꽃밭 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던 처지였다. 백순진은 동생의 소개로 김정호의 기타 연주와 노래를 듣고 단번에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았다. 김정호의 신기에 가까운 기타 실력을 본 서유석과 특히 김세환은“사부님으로 모셔야겠다”고 감탄을 했다.
73년 날짜미상의 날에 CBS(기독교방송국)가 주최하는 프로에 김정호는 출연한 적이 있었다. 청계천4가에 있는 아마죤이란 극장식 무대였는데 당시 CBS는 매일 오후 2시부터 공개방송으로 쇼프로그램을 그곳에서 했다. 이 프로에 김정호의 출연을 확인한 이승규기자가 김정호가 폐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확인차 김정호를 만났다. 김정호는 펄쩍 뛰며 “감기에 걸 걸 기침 몇 차례 했다고 폐병환자 취급을 하느냐?” 부인했다고 이승규의 연예가 어드벤쳐 에서 증언하고 있다. 73년도에 벌써 김정호의 병세가 기자에게 까지 알려질 정도로 김정호의 병세는 심상치 않았다.
- 이승규의 연예가 어드벤쳐에서 / 1985년 10월호 월간스크린 기사에서-
-1974년도
<보고싶은마음/ 이름모를 소녀> 유니버셜 레코드사 1974년>
1974년 김정호는 김태풍의 사정으로 인해 파트너가 없어진 백순진의 간곡한 청에 의해 마지 못해 [3기/4월과 5월]로 '74년 1월부터 2월까지 약 2개월간 활동을 하였다
멤버교체된 3기 4월과 5월은 74년 1월부터 KBS TV ‘젊음의 행진’등 방송 출연과 더불어 월 40여만 원의 개런티를 받고 명동 OB'S 캐빈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이때의 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어느 날 김정호가 펑크를 냈다. 자신의 힘으로 처음 돈을 번 김정호 는 부친에게 월급을 자랑하며 가족이 함께 살자고 했다.
하지만 “딴따라 짓 하냐”는 부친의 무시에 좌절한 김정호가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던 었다. 백순진은 “그의 부친이 음악성을 인정하고 감싸주었다면 김정호는 정말 한국 음악계의 큰 인물이 되었을 재목이었다”고 지금도 아쉬워한다. 이미 김정호의 재능을 인정한 지구레코드는 백순진을 통해 ‘4월과 5월’의 전속을 추진했다.
<제3기 4월과5월 시절의 백순진과 김정호>
하지만 ‘작곡가로도 전속하라’는 조항에 김정호가 반발했다. 단지 가수로만 전속하고 싶을 뿐 작곡은 자기 뜻에 맞는 사람에게 마음대로 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또 두 사람은 삶의 방식이 달랐다. 담배와 대마초 흡연에 대한 간섭이 싫었던 김정호는 이종환의 주선으로 유니버샬과 전속 계약을 맺고 2달 만에 팀을 탈퇴했다. 이에 김태풍이 <4월과5월>에 재 합류하면서 김정호와 <4월과5월>의 인연은 끊어진다.
이리하여 김정호가 참여한 [제3기/4월과 5월]의 앨범제작은 무산되었으며 원래 건강이 안 좋았던 김정호는 지구레코드 전속문제를 청산하는 소동을 치르고 난 후 지병인 늑막염이 재발 하여 병상에 눕게 되어 74년 2월 28일부터 활동을 중단하였다. 결국 백순진,김정호로 멤 버교체된 제3기 <4월과5월>의 활동기간은 아쉽게도 74년 초반의 만2개월이 채 되지 않았다.
4월과 5월 맴버로 옛 동아방송 <유괘한 응접실>출연 해서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4169&r_serial=01
1974년 5월 4일에는 어니언스의 리사이틀이 이대강당에서 있었다. 출연자는 주인공 어니언스 외에 송창식, 김세환, 윤형주 등 어김없는 고정 게스트싱어들과 김정호, 이승재, 뱀파이어, 윤항기 등이었고 자신의 리사이틀에 어니언스가 게스트로 출연해준 것에 답례하는 뜻에서 이장희가 예정에 없던 출연을 했다.
1974년 5월, 인기가요 10위로 처음 올라간 김정호님의 이름모를 소녀 자료가 발견되었습니 다. 첫음반 제작일시는 1974년 5월 이전이 되어야 합니다. (유니버살 전속계약과 함께 음 음반 작업)
-김민수 님의 자료정리 중에서 보충함-
1974년 후반기에 김정호는 그의 대표곡이자 데뷔곡인 ‘이름모를 소녀’등이 수록된 첫 독집(K-Apple 791)을 발표하였다. 자작곡인 <이름모를 소녀>는 사연이 있는 노래였는데
<보고싶은 마음/ 이름모를 소녀> 유니버셜 레코드사 k-APPLE-7 1974년 9월 8일>
<이름모를 소녀>는 부인 이영희씨를 애타게 짝사랑하면서 품었던 회한을 담은 노래. 교동초등학교 선배의 사촌동생이었던 부인은 김정호가 중학시절부터 점찍어 오랜 세월을 홀로 애태 웠던 평생의 반려자였다. 자신의 일상적인 음악생활을 이야기하는 연애편지를 하루에도 수차 례 보냈지만 꿈쩍을 안했고 결국은 <이름모를 소녀> 음반을 들고 찾아가서 성공했다고 합니다.
보수적인 그녀의 어머니는 직업도 불안정하고 음악을 한다는 김정호가 미덥지 못했다. 그러 나 순수한 심성의 사촌오빠 후배가 싫지 않았던 이영희씨 였고 74년 늦 봄 쉘브르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김정호 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 당시 김정호는 대부분의 가수들이 그렇지만 방송과 쉘부르 같은 생음악 업소에도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셀부르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던 코아님의 김정호에 대한 기억이 있는데
“전에 명동 쉘부르는 엘칸토 지하에 있었습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끝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손님이 아닌 사람들이 자주 들락거립니다. 아닌 게 아니라 손님도 아닌 친구가 떡하니 일을 보고 있더라고요. 등치도 쪼만한게 만만해 뵈서 한마디 했습니다.
" 당신 손님도 아니면서 왜 쉬를 하고 그래에~~!!!!..." 뒤로 돌아 보더니…….씨익 웃데요???.....어쭈구리???...별 싱거운 놈이 다 있네…….하고는……." 어여어~~!!! 볼 일 보고 가쇼." 그랬죠…….
저녁에 공연을 하는데…….그 친구가 김정호더라고요……. 처음 실물을 봤을 땐데……. 몰라 본거죠…….으미…….쪽 팔리는거……. 김정호가 기타를 옆에 들고 앉아서 노래를 부르면……. 손님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칩니다. 그렇게 안 할 수 가 없어요…….온 정성을 다 해서……. 영혼을 끄집어내듯이 땀을 삘삘 흘리며 부르는데…….어떻게 앉아서 박수를 쳐요???......그때도……. 그랬습니다…….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안스러워…….너무도 안스러워…….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면…. 여기저기서 수건을 들고 쫓아 올라 갑니다…….
땀을 닦아 줄려고요…….몸이 안 좋다는 것은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거든요……. 후에 사람들 은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너무 슬픈 노래만 불러서……. 마치 영혼을 끄집어 내는듯한 애절한 창법이 김정호를 데리고 갔다고 말이죠“.
-코아 님의 김정호에 대한 추억-
(추가: 코아님이 셀부르에서 노래를 부르던 때는 1977년부터 1979년까지라 합니다. 그 후론 군대를 갔다고 하는데 77-9 년도 사이면 김정호가 무교동에 꽃잎이라는 업소를 경영하며 그곳 무대에서 노래를 했을 텐데. 약간의 확인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바람새의 글 중에 셀부르에서 노래를 부르던 김정호에 대한 짫은 글이 하나 있는데 아마도 년도는 74 년도 일 것으로 추정되며 “4월 4일 세종문화회관 “쉘부르” 공연장에선 전유성씨가 김정호는 왜 안부르셨습니까? 하였더니 이종환씨는 “출연료를 분당 칠팔백 달라고 해서… 못부르셨다네요 “ 라는 글이 조금행 님의 이름으로 올라와있다.
<이름모를 소녀>를 방향은 대단했는데 "이름모를 소녀"를 녹음하고 지방으로 여행 중이었는데 방송을 타고 난리(?)가 났었고 부랴부랴 소속사에서 김정호를 찾아오고 양복 두벌을 맞춰주어 방송출연을 했다는 합니다. 74년 7월부터 10월까지 김정호의 <이름모를 소녀>는 최고의 인기 가요로써 군림했다.
<윤복희 쑈에 출연하여 열창하는 김정호 모습>
이 당시 김정호는 노래보다 작사, 작곡, 그리고 연주에 관심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름 모를 소녀>를 양희은이 취입했던 점을 보면 그런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이 당시에 한참 신예가수로써 인기를 끌고 있던 양희은씨가 김정호를 회상하며>
“1974년이었던가?..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드는 가수가 있다고 해서 어니언스의 임창제 씨 와 함께 그를 만났다. 키가 작고 눈이 정말 컸는데, 그의 노래를 들어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왜 남한테 곡을 주는 걸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름모를 소녀>는 김정호씨를 능가할 가수는 없었다“
- 가수 양희은씨의 김정호에 대한 회상-
1974년 12월 20-21일에 김정호는 리사이틀 개최하였다. 김정호는 12월 20-21일 양일에 걸쳐서 연세대 강당에서 오후4시와 7시 하루 두차례에 걸친 리사이틀을 개최했다. 반주는 안건마 그룹과 19인조 스트링 오케스트라가 했고 송창식. 김세환. 어니언스. 석찬 등이 찬조 출연했다. 그의 리사이틀은 두 번의 연기되는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것이고 김정호는 <하얀나비> 등 그의 노래 18곡이 발표되었다.
< 1974년 12월 20~21일 김정호 리싸이틀 을 보도하고는 신문기사와 1974년 12월 21일 김정호 리사이틀 당시 기타를 연주하는 김정호>
- 1975년도-
75년 봄, 김정호는 집안 어른들을 모신 가운데 이영희씨와 약혼식을 올리고 한 공간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75년 잇달아 ‘하얀나비’를 내놓으면서 김정호는 한(恨)이 느껴지는 포크가수로서 자리매김 했다. 그러나 인기가 오를수록 그는 서서히 죽음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대마초와 폐결 핵. 그 두 단어가 결정적으로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곡을 쓸 때면 수유리 그린파크 호텔이나 변두리 여관에 장기투숙했어요. 한달이고 두달이 고 곡이 나올 때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매일 피워대던 줄담배로 그의 폐는 빠르게 썩어 들어 갔죠”
김정호 매니저 이상기씨의 당시 김정호에 대한 회고-
< <kim jung ho gold> 유니버셜 레코드사 K-APPLE-791 1975년 5월 31일 >
75년 11월 5일자 세광출판사에서 나온 뉴 히트송66집의 연예단신에는 75년 중반기 이후의 김정호의 근황을 전하고 있다
“김정호군 건강악화”
“지병인 폐결핵과 허약한 체력으로 방송행사에도 고의든 타의든 간에 더러 빠져 방송가에 형이 좋지 않은 김정호군이 또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모든 출연을 끊고 자책에서 휴양중이라는 소식이다. 김군의 병세가 악화된 것은 지난 여름 극심했던 무더위에 고된 출연을 계속했기 때문인데 아무리 인기와 돈이 좋다한들 몸생각을 해야 겠고 <나그네> 이후 별다른 히트가 없다가 <날이 갈수록><나를 두고> 등 자작의 신곡을 발표한 이 마당에 빨리 완쾌되기를 바라뿐이다” 라고 그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75년 11월 5일자 뉴히트송 66집중 방송의 뒤안길에서/ 세광출판사 간 ?
<Kim Jung Ho Gold Two> 유니버셜 레코드사 K-APPLE-813 1975년 10월 15일>
연예계에 김정호가 폐결핵 환자라는 소문이 돌던 시기에, 1975년 12월 14일 가요계에 미증유에 대마초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그는 1975년 마약 사범으로 잡혀 들어간다. 그는 이 대마초파동으로 구금되어 정신병원까지 가야 했으며 이후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깊어지는 병마와 싸웠다.
심해지는 병은 그를 파산으로 몰고 갔으며 변변치 않던 작곡비로 연명하던 그는 단칸방을 전전해야 했다 이렇듯 ‘대마초 파동’은 이때 노래를 할수 없는 환경은 김정호를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간 것으로 보인다. 결혼까지 했지만 10여 차례나 전셋집을 옮길 정도로 생활 형편도 지극히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병마는 더욱 깊어 갈 수밖에 없었다.
75년 겨울은 당대의 다른 가수가 그러했듯이 김정호에게도 불행한 계절이었다. 대마초가수들에게는 철퇴가 내려졌다. 당시 김정호를 담당했던 검사는 그의 딸이 김정호의 열렬한 팬이라면서 훈방조치를 했지만 다시 내려진 재수사 지시에 김정호는 입건조치를 당했다. 당시 박대통령의 아들이 연예인과 친교를 나누며 대마초를 피우는 것을 알게 된 대통령이 철 저히 조사하여 일망타진 엄벌지시가 내려왔기에 간단히 끝낼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신문들은 연일 숨 가쁘게 대마초 관련 소식을 전했다. ‘김추자· 권용남· 손학래 구속,가수 박인수 수배’(6일치), ‘30여명 연예인 명단 입수… 정미하(배우) 구속, 남성듀엣 어니언스의 임창제 자수’(8일치), ‘가수 장현 자수’(9일치) ‘코메디언 이상해· 이상한, 가수 정훈희· 이수미 자수’(10일치), ‘가수 김세환 김정호 불구속 입건’(22일치).
<1975년 대마초 사건으로 재판받는 연예인들>
76년 1월30일자 <조선일보>는 “75년 11월 26일부터 76년 1월20일 사이 대마초관련 연예인은 모두 54명으로 구속 20명, 불구속 11명, 수용 중 13명, 훈방 10명”라며 “그 가운데 가수는 23명, 배우 3명, 코디미언 2명, 악사 26명”이라고 보도했다. 그물망에 잡힌 건 연예인뿐만이 아니었다. 23일 서울지검은 “지난달 27일부터 30일까지 밀매조직 12개파 가운데 5개 파 35명과 흡연자 101명 등 모두 136명을 적발해 이중 65명을 구속, 22명은 불구속, 13명은 정신병원 등에 수용, 나머지 32명은 훈방조치 했다”고 밝혔다.
- 당시 신문기사 발췌 -
대마초 사건 당시 김정호는 자수를 하여 자신의 죄를 알렸고 불구속입건으로 22일 유치조치를 당했다. 하지만 자수의 결과는 엄청났다. 자수해서 벌금만 냈던 ‘어니언스’의 임창제(59)는 “방송이고 공연이고 다 금지야. 나이트 클럽에서도 안 받아줘. 받아줘도 출연료가 그전에 반 토막이야. 먹고 살기 힘들어서 정신 없었지.”라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대마초사건을 보도하는 당시의 신문보도><o:p></o:p>
- 1976년도
76년은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연예계활동을 중지당한 김정호는 동료가수 김세환 김도향 등과 함께 대마초 흡연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지인의 도움으로 무교동에 '꽃잎'이라는 통키타 생음악 레스토랑 운영한다.(1983년 까지 운영)
무교동 골목은 그 당시 ‘낙지골목’으로 유명했다. 그 부근인 지금 영풍문고 자리에, ‘이름모를 소녀’를 만들고 부른 김정호가 경영하던 ‘꽃잎’이라는 통기타 업소가 있었는데 그 곳은 그의 매니저 이상기와 친형처럼 김정호를 보살피던 최무성씨가 경제적 이중고까지 겪는 그를 위해 76년 10월 무교동에 '꽃잎'이라는 생음악 레스토랑을 맡겼다
그래서 김정호는 꽃잎이라는 카페를 운영했고 무교동 꽃잎은 지금의 라이브 레스토랑이었는데 어두운 조명 아 래 호프집처럼 꾸며 놓고 양식과 생맥주를 팔았으며 낮에는 디제이가 음악을 틀어주고 저녁 에는 통기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었다. 이곳에서 강은철. 김학래. 남궁옥분 등 여러 가수가 대중가수로서의 싹을 틔였다. 당시 편지 를 부른 임창제씨가 메인 DJ를 봤고 당시 무명이었던 임하룡씨가 가수를 소개하며 사회를 봤었다(폼사 님의 기억).
83년 재개발로 인해 꽃잎이 헐 릴 때까지 꽃잎은 그의 유일한 음악무대였다. 이 해에 김정호는 좌절속에서도 작곡에 전념하며 생의 전부인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달중에 이십여일은 한적한 남이섬이나 우이동 월벽산장에 칩거하며 꺼져가는 음악혼에 불을 지폈다. 이글을 쓰면서 김정호는 타고난 재주에 비해서 왜 그리도 가난에 허덕였는지 궁금했다. 이승규 기자는 그의 글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김정호에겐 숨겨진 미담도 많다. ”남달리 정이 많았던 그는 정성기 때 어려운 후배들에게 용돈을 나눠주기 일쑤였고 딱한 친구에겐 오토바이를 사줘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원로가수 B씨가 어렵다는 얘길 전해 듣고 쌀 3 가마니를 B씨도 모르게 사준 일도 있었다. ( 당시 연예기자였던 원형걸씨의 회고담. )
그의 ‘인기 가수를 둔 친구들’은 거의 매일 밤 그의 출연업소에서 기다리다 차비 명목의 용돈을 가져가 빈털터리가 된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회상하며 김정호가 건강을 해친 이유들 얘기해주었는데 ”그는 술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담배를 많이 피웠다. 초기증세 때 약을 건네주면 먹지 않고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인천 요양소에서 6개월이면 완치될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도 그는 도중에 뛰쳐나오곤 했는데 월수입이 2백만원선 (현재 화폐가치)이었으나 창작곡을 만든다고 거의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에 묻혀 지낸 탓으로 실제 수익은 형편없었다. 그만큼 노래에 모든 것 걸었다. 돈도 건강도 팽개친 채....“ 라고 김정호의 전 매니저 이상기씨가 회고했다.
-이승규의 연예가 어드벤쳐 중-
김정호가 데뷔해서 숨을 거둘 때까지 매니저로 함께 했고 그가 떠난 뒤 헌정음반을 제작하는가하면, 1986년에 세워진 노래비 제작에도 앞장섰던 이상기씨는 이런 기억을 갖고 있다.
"업소 출연료 50만원 받아 줬다. 지금 가치로 계산하면 천만원 정도가 되는 큰돈이었다. 헌데 며칠 후에 차비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쨌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를 드렸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확인을 해봤다. 역시 아니었다. 남몰래 다시 알아봤더니 친구들을 도와준 것으로 밝혀졌다. 오토바이를 한 대 사면 살아갈 수 있다는 친구에게 얼마.. 다른 친구에게도 얼마..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신세를 진 사람에게는 꼭 갚아야 했고 어려운 친구나 사람을 보면 참지 못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의 어려움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착한 심성이 있는 김정호는 그의 벌이에 비해서 알게 모르게 많은 수익을 남을 돕거나 차용해 주는 등 계산속없는 삶을 살은 결과가 그에게 가난이라는 결과를 남겨주었고 예나 지금이나 병치례에는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결과가 그에게 가난이라는 짐이 지어졌다란 생각이 든다.
- 1977년도
대마초파동으로 활동을 중지당한 김정호는 77년에 군입대를 하였다. 78년까지 18개월동안 군복무(방위)를 하였고 군복무시 김정호는 두 번이나 탈영으로 군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당시 김정호가 근무하던 부대의 선임하사였던 말발굽님의 김정호에 대한 기억은 이렇다.
“저는 군대에서도 쫄병들에게 무조건 괴롭게 하는 그런 인물은 아니였지만 피곤한 선임하사 에 속했습니다. 저는 어느 누가 잘못을 했으면 단체이므로 함께 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의 였고, 역시 그 잘못은 지휘자인 나의 잘못도 있기 때문에 함께 벌을 받겠다 하고는 쫄병들과 함께 군장을 꾸려서 부대외곽을 뛰기도 했지요.
육본의 병들은 대부분이 공부만 하다가 온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구보에는 별로 힘을 못쓰더 군요. 제가 근무할 때 육본에는 산울림의 김창환씨 동생 두명도 군악대에 근무를 하고 있었구여. 논두렁받두렁의 멤버, 아도니스 멤버, 하얀나비의 가수 고 김정호씨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지만 고 김정호씨를 두번이나 영창에 보냈네요. 고 김정호씨가 방위병 으로 육본에 근무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무단 탈영을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헌병대에 탈영신고를 해서, 붙잡아 징계를 받고 영창엘.... 고 김정호씨는 말이 없었습니다. 묻는 말 에도 대답을 잘 안했지요. 오락시간때도 절대로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좀 더 잘해 줄 것을 하고 후회도 해봅니다.
- 김정호님의 방위병 시절 선임하사였던 말발굽님의 증언 -
김정호가 탈영병으로 군영창에 가게 된 이유 중 알려진 것이 하나있다.
“지방공연하는 친구를 따라갔다가 방위 소집에 응하지 못해 결국 탈영병으로 군 영창에 갇 히게 된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군복무를 마치게 되나 가정은 이미 말할 수 없이 어려워 져 집을 팔고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1977년 18개월의 방위소집으로 군복무를 마칠 무렵 호되게 걸린 감기는 지병을 재발시켰다. 그후 김정호는 대마초사건으로 함께 활동이 금지된 하남석과 이 당시 둘도 없던 음악친구였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인생에 대한 고민은 물론 국악리듬에 어쿼스틱 기타와 신디사이저를 접목하는 새로운 음악을 함께 구상하기도 했다.
김정호와 하남석과는 음악적인 코드가 맞았고, 인생을 얘기할 좋은 친구이자 선배였다. 끈끈한 우정은 김정호가 떠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하남석의 회고담은 이렇다.
“같은 소속사였다. 그러다보니 친해졌는데 <이름모를 소녀>를 처음 들으면서 느낌을 토해 내는 매력과 함께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몸이 아프면서 김정호는 외출을 거의 피했다. 대신 전화로 많은 얘기를 했다. 노래가 만들어지면 가장 먼저 들려줬다. 김정호의 특징은 멜로 디를 연주하면서 가사가 즉흥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세월 그것은 바람>,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등이 대표적이다”
군복무 해제 후 김정호는 부인 이영희씨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우었다. 3년간의 열애 후 77년 반포의 17평 주공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이듬해 78년에 쌍둥이 딸 정숙과 정훈을 얻었 다. 12번씩이나 이사를 거듭할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김정호가 가정을 꾸린 건 1975년. 부인은 이영희씨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이자 초등학교 동창생이었다. 김정호는 한 달 내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편지를 보냈다. 큰딸에 거는 기대가 컸던 이씨의 어머니는 엄격했다. 편지의 대부분은 아궁이에 던져졌다. 하지만 이영희씨는 달랐다. 빨간 넥타이에 반코트까지 빌려 입고 머릿기름까지 바르고 찾아 왔던 그 순수함에 끌렸고, 약속시간을 두시간이나 어겼는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모습에서 가슴이 뭉클해지기 도 했다. 그가 일하는 업소며 공원에서의 데이트 횟수가 늘어갈수록 믿음 또한 깊어졌다.
김정호 그는 "난 음악 하나밖에 모르지만 음악보다 더 사랑하는 게 영희 씹니다" 라는 고백으로 부인 이영희씨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1975년, 양가 가족만 모인 가운데 약혼식을 올린 뒤, 1977년 3월 27일에 일영 가는 길목에 있는 은평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78년 10월에는 쌍둥이 딸도 낳았다. 건강도 좋아져 단기사병으로 18개월의 군복무도 마쳤다.
- 1978년도-
78년 10월에 김정호는 쌍둥이 딸을 얻었다. 이름을 정숙과 정훈이라 지었다. 그리고 이 당시에 정확한 시점은 확실치 않지만 이즈음의 작곡가 박건호씨 회고에 의하면 김정호는 부산 서면의 통기타 업소에도 출연한 기록이 있다. ”칠십년대 후반기 부산 서면은 통기타 업소들로 유명했다. 맥천. 미리내. 별들의 고향. 등은 대부분의 통기타 가수들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대마초 사건으로 방송활동이 정지되어 있던 김정호. 이종용 등을 비롯하여 그때는 무명이던 박은옥. 이택림 같은 가수들이 다 서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라고 박건호씨는 회상했다.
- 1979년도-
1979년 12월에 박정희 시해사건을 계기로 대마초 가수들에 대한 해금이 단행됐다. 5년이란 기간은 대중 가수들에게 치명적으로 긴 공백이었지만, 대부분 해금 가수들은 음반을 내거나 다시 무대에 서는 등 하나 둘씩 재기에 나섰다. 그러나 김정호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가요계 주변에서는 김정호를 두고 ‘잠적설’ ‘행방 불명설’ 심지어‘사망설’까지 나돌았다.
- 1980년도-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 후 민주화의 봄을 맞아서 년초에 가요계에도 그간에 대마초사건 후 규제가 해제되었고 김정호는 80년, 5년 만에 대마초 망령에서 벗어난 김정호는 재기앨범 <인 생-유니버셜,K-APPLE-893 ,80년3월>을 발표하였다.
< 김정호 vol.3> 유니버살 K-APPLE-893 1980년 3월 15일>
- 1981년도-
몸이 많이 상한 김정호는 81년 겨울 인천 바닷가에 위치한 결핵요양소에 입원했다. "과거의 “화려했던 때는 흥미가 없다. 인기보다는 마음에 있는 좋은 노래를 불러 남기고 싶다"고 당시 김정호는 술회하였다. 일년 이상 치료를 해야 했건만 결핵균보다 더 강하게 꿈틀거리는 음악적 열정은 1년을 예상하고 들어간 요양소를 5개월 만에 뛰쳐나오게 했다. 요양원을 무단 탈출 후 집에서 요양하며 병원에 통원치료를 받으며 세월을 보냈고 그 즈음 아내 이영희씨의 청을 받아 들여 세검정 감리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81년 5월 김정호는 가요계에 컴백하게 된다. 완전한 상태로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거동을 할 정도로 회복되어 그는 병상에서 만들었던 <인생.별> <기도> <달님> 등의 노래를 취입했다.
<영혼을 노래하는 김정호> 신세계 레코드사 1981년 날짜미상>
<옛노래 모음 Vol.1> 유니버살 1981년 6월 날짜미상>
<기다리는 마음 / 바람이어라> 한국음반 1981년 10월 날짜미상>
< 김정호 vol.4> 유니버살 1981년 10월 15일 발매>
- 1982년도-
82년 다큐멘터리 음악에 빠져있던 뚜아에무아 출신 이필원과 가까이 지내며 김정호는 그 당시 첨단악기 였던 신디사이저로 창출하는 환상적 음악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음악적 열정이 꿈틀거리자 김정호는 오산의 금식기도원과 삼각산 산상기도에 매달리며 살고 싶은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
82년 2월에 이승규기자와 만난 김정호는 그의 건강상태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교회에 나가고 있다“ 며 ”신앙을 통해 신체적, 육체적으로 많은 위안을 받고 있다“고 답을 했다. 김정호는 그 해 빈민들을 위한 성남 시민회관에서 개최된 '포크 콘서트82' 참가했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무대였다고 기록되었다.
1982-06-08 김정호 컴백 기사(경향신문)
82년도 김정호를 기억하는 분이 있는데 그의 기억에 김정호는
“82년, 시골뜨기 촌놈이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선배 하나가 밥 사주겠노라며 불러낸 곳이 광교 삼일빌딩 곁에 있는 '타임'이라는 레스토랑이었죠. 돈까스 하나에도 눈이 휘동그레 지는 판인데 병맥주 두어 병도 떡하니 식탁 위에 오르고 무대에는 연신 이름만 듣던 가수들 이 번갈아가며 올라와 노래를 부르고...
이연실이 <목로주점>을 부르는가 하면 하남석이 <밤에 떠난 여인>을 부르고 최백호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부르고 난 후에 조명이 툭 꺼지는가 싶더니 그 어두컴컴한 무대위로 오른 사람이 김정호였죠... 이미 병색이 완연해져서 핼쓱해질대로 핼쓱해진 얼굴을 감추려고 조명까지 낮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
그 뒤로 순전히 김정호를 보려고, 김정호의 노래를 들으려고 돈까스 값에 맥주 두어병 값이 챙겨지면 광교의 타임으로 달려가는 것을 낙으로 삼던 그 일년이 생각납니다.
-낮도깨비 님의 김정호에 대한 추억-
- 1983년도-
<김정호 vol.1> 아세아 레코드사 SAP-7001 1983년 3월 10일>
<김정호 vol.2> 아세아 레코드사 SAP-7002 1983년 3월 10일>
<김정호 vol.3> 아세아 레코드사 SAP-7003 1983년 3월 10일>
<김정호 vol.4> 아세아 레코드사 SAP-7004 1983년 3월 10일>
1983년 말 김정호는 수척해진 얼굴로 재기음반을 냈다.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님' 등 이때 발표한 그의 노래는 이미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었다 1983년 6월부터 11월 까지 5개월에 걸친 최장 녹음기간을 거치면서 4집앨범 <님/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를 제작되었다.
83년 유작앨범이 된 ‘님’은 그가 남긴 유언인 셈이었다. ‘간다 간다 나를 두고 떠나 간다’라는 절규가 담긴 노래를 녹음 하면서 그는 삐쩍 말라 뼈 만 남은 몸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가 부른 노래는 국악과 가요를 접목하여 새로운 리듬과 멜로디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노래였다.
이필원이 직접 디자인한 <님-아세아,83년11월>은 김정호의 국악적 감성이 배여 있는 눈물 겨운 음반이다. 외삼촌의 국악에 자신의 음악을 접목하려 아쟁, 가야금, 꽹과리를 직접 두 들기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에 혼을 담아내려했다.
이 당시를 부인 이영희씨는 “신보 제작은 뒷전이고 차에 꽹과리를 싣고 다니며 한시간씩 두드렸을 정도로 국악에 빠졌었다“고 회상했다. 김정호의 그 한스런 탄식의 이미지를 담은 노래가 <님>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예견한 상여가락을 연상시키는 선율이었다. 머리가 쭈삣서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님>은 그야말로 온몸을 불사른 김정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제가 후배(정호)에게 가니깐 골방에서 꽹과리(상쇠)를 두들기면서 이 속에 뭔가 있다 하면서 들어 보라고.. 방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고 분위기가 ...”
- MC 이상벽씨 증언 -
1983년 8월 인생」이란 타이틀로 재기 곡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님」등을 발표 하고 결국, 인천 송도에 있는 요양원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그때 가 1983년 12월, 그이가 요양을 시작한 지 4개월 째가 되던 날, 아무도 찾아올 리 없는 저 녁에 초인종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이였습니다. 담당 의사께 인사도 않고 그이는 마침내 요양원을 뛰쳐나온 겁니다. 그이를 사로잡은 노래에의 집념, 그것은 더 이상 잠재우지 못 할 뜨거운 불꽃이었습니다.
-부인 이영희여사의 회고 중에서-
<1983년 5월경의 김정호 모습>
- 1984년도-
1984년 김정호는 유작이 돼버린 새로운 음반을 들고 대중 앞에 섰다. ‘님’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가 실린 4집이었다. 이 음반을 제작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5개월이 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그의 병은 깊어졌고 의사는 ‘더 이상 노래를 하면 죽는다’는 선고를 내린 뒤였다. 제대로 호흡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끊었다. 다시 녹음하기를 반복하면서 만들어진 음반이다.
<님>은 폐결핵으로 호흡이 가빠 한 소절 부르고 쉬었다 하는 방식으로 몇 시간을 두고 취입했다고 한다. 그는“의사는 내게 더 이상 노래를 부르면 죽는다고 했지만 오히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다”며 <님>을 녹음했다.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는 요양원 시절 송도 해변을 걷는 여인에게서 느낀 슬픔의 이미지를 뽑아낸 히트곡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던 ‘한 여인(환자)’의 모습에서 받은 뭉쿨한 감동을 모티브로 한 곡이다. 이 앨범은 숨쉬기조차 힘들어 5개월의 최장 시간 녹음을 해야만 했던 그의 유작앨범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는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는 지병이 악화되어 인천 요양원 시절 면회 온 후 돌아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쓴 곡이라는 설도 있다.
<KIM JUNG HO LIFE> 아세아 레코드사 ALS-1191 1983년 11얼 24일>
- 1985년도-
1985년도에 김정호는 폐결핵 말기의 상태였고 단칸방을 전전하며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고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타계하기 3개월 전에 <MBC 스타쇼>란 프로에 출연을 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인기 가수였다는 것을 딸에게 보여주기 위해 TV에 출연하는가 하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래에 대한 열정을 이기지 못해 무리하게 무대에 서기도 했는데……. 어느 TV 심야 음악프로에 정말 오랜만에 모습을 나타냈었다. 그날 밤 그 TV심야 프로에 나온 김정호의 모습은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었고 얼굴은 까만 상태의 죽음을 앞둔 사람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딸아이가 7살인데요. 지금TV를 보고 있을 것입니다. 아빠도 옛날엔 유명한 가수였다는 사실을 안 믿어요. 그래서 아빠가 오늘 기타들고 TV에 나가니까 잠자지 말고 꼭 보라고 하고 나왔어요” 라고 말하고 <이름모를 소녀>와 <하얀 나비> 두 곡을 불렀다. “
- 바람새 조민호님의 글 중에서 -
“김정호는 어린 딸을 위해 이 아빠도 유명한 가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출연했다며 쑥스러워했다“
당시 변웅전 사회자 인터뷰 (정청식님 보충)
“내 죽거든 앞이 툭 트인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1985년 11월 29일 12시 15분 서울대병원 82병동에서 죽음을 맞았다. 병명은 폐결핵 합병증으로 타계하였는데 부인 이영희씨와 당시 여덟 살 난 쌍둥이 딸이 지켜보고 있었다. 김정호는 1952년 3월 27일 생으로 33년 8개월을 살다가 85년 11월 29일 세상을 등졌다. 1985년 12월 02일 흰눈이 내리던 날 김정호는 지인들의 손에 의해 금촌 탄현의 기독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1985년 11월 30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김정호 부고소식>
그 당시 인기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는 일주일간 추모방송을 내보냈고 MBC 라디오 <달려라 팔도강산>과 KBS-FM <장유진의 가요산책>은 임시편성으로 김정호 애도 추모방송을 했을 만큼 그의 죽음이 가요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원로 작곡가 황문평씨 조차 '감히 천재로 표현해도 좋다'며 34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 김정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정호가 죽기 1주일 전 방송국에 찾아와서 일할 수 없냐고" 묻길래 "몸이 좀 좋아지면 다시오라" 한 것이 가슴이 아프다고……. 아마 그때 방송을 했으면……. 마지막 노래 부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
-DJ 이종환씨 증언-
“김정호는 10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적 싱어송 라이터다. 한국적인 음악 양식을 꾸준히 탐구했고, 풍부한 감성은 <눈동자>(김희갑 작곡)를 들어보면 더욱 잘 알게 된다. 인생 후반부에 국악과 사물놀이의 접목을 시도한 점도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비운의 천재다”
-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씨의 김정호에 대한 평가 -
<1985-12-01 김정호의 장례식 모습>
김정호 사후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그가 떠난 후 라디오 방송에서 제 생각에는 이상벽씨가 진행하는 프로인 것 같은데 그의 부인과 전화 인터뷰하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회자가 김정호씨가 자기의 몸을 조금만 더 챙기고 생각을 했더라면 그렇게 빨리 가지는 않았을 거라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부인의 대답은 자기는 그렇게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본인도 살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다고 이야기 하더군요. 그 질문을 한 사회자가 머쓱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 바람새 강병욱님의 추억 -
- 김정호 사후 -
<못다부른 노래/님> 아세아 레코드사 ALS-1197 1986년 1월 15일>
<김정호 음악세계 MOOD MUSIC> 아세아 레코드사 아세아 ALS-1327 1986년 4월 7일>
김정호의 헌정음반은 1986년 홍민 송창식 김수희 하남석 등 당대 인기 가수들이 모여 헌정 음반 바쳤다. ‘김정호 추모앨범’은 헌정앨범의 효시였다. 김범룡이 ‘이름모를 소녀’를, 김현식이 ‘님’을 불렀다. 송창식(잊으리라), 윤시내(하얀나비), 한마음(빗속을 둘이서), 서수남·하청일(사랑의 진실), 윤승태(작은새)등이 그가 남긴 주옥같은 노래들을 불렀다.
이들 외에도 전영록, 김학래, 홍민, 이정선 등 후배들이 앞다퉈 선배 가수의 추모앨범을 만드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당시 각자 다른 소속사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KBS 음반기획상’을 받는 등 높이 평가받았다 그 해 86년 10월에는 동료들이 노래비를 제작하여 고인의 무덤 옆에 세웠다.
< 김정호 추모앨범> 서울음반 SPDR-214 1986년 11월 >
< 사랑의 앨범 18’의 노래1LP> 서울음반 1986년 11월 >
또한 86년 김정호와는 쉘부르 시절부터 무교동 꽃잎 레스토랑 시절까지 김정호와는 친분이 두터 웠다는 장세국씨가 김정호 사후 김정호를 생각하며 만든 추모곡<별애> 라는 노래가 있다.
<김정호 추모곡 별리가 실려있는 장세국 LP>
-1987년도-
1987년에 김정호를 기리는 의미의 영화-'못다 부른 노래 님'-가 제작되어 그 해 2월 14일 허리우드에서 개봉되었다. 이희도, 김추련, 이정원, 전양자..하남석, 홍민 등이 영화에 출연했다. 마지막 노래 <님>은 김정호를 그리는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많은 부분을 사실과 다르게 표현했는데 부인을 여관에 드나드는 다방아가씨로 묘사했고 김정호는 이복형제에게 핍박 받고 무대에서 숨을 거두는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제작되었는데 영화가 망자의 명예를 심하게 훼손했다는 문제가 제기되어 재상영 금지처분이 내려지기도 했다.
<김정호를 주인공으로 영화”못다부른 노래 님”>
<死의 讚美> 한국음반 hc-200361 1987년 9월 1일>
- 1998년도 -
김정호는 1998년 조선일보가 선정한 <건국 이후 가수 베스트 50> 중에서 30위를 차지하여 그가 대중가요 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확인하여주었다.
-1990년도 -
90년 상반기에 김정호의 LP가 서라벌레코드사에서 <사의 찬미>라는 타이틀로 1990년 4월 15일자로 발행되었다.
<
<사의 찬미> 서라벌레코드사 SKJY-90014 1990년 4월 16일>
- 2003년도 -
2003년 11월 28일-29일 양일간 서울 명동 YWCA 마루홀에서는 김정호가 떠난 지 18년만 에 처음으로 추모공연이 열렸다. 그가 사용하던 기타가 특별 전시됐고 그 앞에는 팬들이 들고 온 국화도 바쳐졌다.
<고 김정호 추모콘서트 >
- 2004년도에 김정호를 기리기 위해 김정호의 트리뷰트(헌정) 음반이 나왔다. 그의 미공개 육성 5분여를 포함한 ‘트리뷰트 김정호’는 그의 육성으로 시작된다. “저녁 때가 나에게 소중한 시간이죠… 그냥 매일같이 찾아오는 밤인데도, 그냥 한 토막 시를 못쓸 때가 많아요. 내 곁에 맴돌 때 빨리 잡아다가… 그게 작곡가니까….” 첫번째 트랙에 5분여 담긴 그의 음성에는 병마와 싸우는 한 음악가의 안타까움이 담겨 있는 듯하다
서른 셋에 요절한 가수 김정호가 숨지기 1년 전쯤 녹음했다는 육성이 스산하고 아프다. “요즘 제일 부러운 건…(중략) 나도 그 속에서 뛰어서 땀도 좀 흘리고, 밥도 맛있게 먹고 말이죠. 그런데 막상 뛰어보면 숨도 가쁘고 하니까, 그럴 때 체력의 한계에서 오는 실망감도 있죠.”
음반은 2003년11월 28~29일 YWCA 마루홀에서 열렸던 ‘김정호 추모공연’ 실황음반이다. 그간 김정호 추모음반이 더러 나왔지만 실황음반은 처음이다. 음악감독을 맡은 김의철이 실황녹음에서 엄선한 10곡의 노래와 김정호의 육성이 실렸다. 한국 포크계의 전설로 불리는 김의철이 음악감독을 맡고, 김두수 한승기 이성원 이원재 문지환 등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우리 포크의 맥을 잇는 가수들이 고인의 노래를 불렀다. 특히 김정호의 어릴 적 친구이자 명창 김소희의 딸인 국악인 김소연이, 김정호가 마지막 음반에서 죽음을 예감하듯 남긴 ‘님’을 국악적으로 풀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김정호의 영원한 동반자인 이영희씨의 남편 김정호에 대해 쓴 글이 있다.
그를 무섭게 옥죄던 고통만큼이나 사나운 겨울 바람이 몰아치던 지난 12월 2일의 금촌 기독교공원묘지. 내 남편, 가수 김정호는 양지바른 그곳 한 곁을 차지하고 땅 속 깊숙이 누웠습니다. 영원히 깰 수 없는 잠이 든 채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눈물로 범벅 된 흙으로 덮이는 그의 관을 보면서도 집에 돌 아가면 그가 활짝 웃으며 맞을 것만 같았습 니다. 내 눈앞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이 도무지 나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비극의 한장면 들일 뿐이란 생각도 했습니다.
서른 세 해를 살고 이제 그는 떠났지만 세상에 두 가지의 귀한 것을 남겨놓았습니다. 쌍 쌍둥이 딸과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진득한 정을 불어 넣던 많은 노래들. 그는 그 속에서 다시 이 세상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11월 28일 그러니까 숨을 거두기 전날 저녁. 그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사옵니다. 주여 어서 빨리 제 맘속에 드시옵소서. 마 음의 평화를 얻게 하옵소서. 아멘 아멘.” 운명을 예감한 듯 육신의 고통을 없애달라는 여느 기도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깊은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 그를 보자 속 절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었습니다.
“울지마. 당신 우는걸 보면 내 마음이 너 무 아파.” 앙상한 손으로 가만히 내 등을 토닥이던 그는 미안하다는 듯이 실쭉 웃으며 ‘내가 죽으면 땅 한 평만 사서 묻어 줘’란 말을 세 번씩이나 거듭했습니다. 내가 침대 에 기대 깜박 잠이라도 들라치면 몹시 싫어했지요. “날 계속 지켜보고 있어 줘.” 고통과 싸우느라 마지막 안간힘을 쏟던 그는 마침내 다음날 12시 15분 한 많은 이세상을 떠났 습니다. 비통한 울부짖음과 기도 속에. 신앙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란 굳은 믿 음과 희망이 그대로 사그라지던 그 순간 저는 하느님마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를 왜 그렇게 미워하셨습니까?’ 라며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 날 밤하늘을 향해 외쳤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습니다. 아직 그의 체온이 남아 있는 집에서 그이가 쓰던 물건들을 챙기면서 그와 함께 했던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습니다.
나의 남편 김정호의 본명은 조용호입니다. 그이와 나는 1952년생 동갑 나기입니다. 교동 초등학교 동창생이기도 하죠. 우리는 천생연분이라고 좋아하며 같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내가 대구 집에 내려가자 그이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것도 한 달 내내. 하지만 그 편지는 처음 세 통 외에는 모두 어머니 손에 들어갔지요. 내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대로 포 기한 듯 싶었습니다.
그런데 1972년 겨울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만두를 빚고 있는데 누가 찾아왔다 길래 나가 보았습니다. ‘아, 그이구나’하며 돌아서서 나는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머리엔 기름을 발라 하이칼라로 넘기고 빨간 넥타이까지 맨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럽고 안어 울리던지, 그래도 그이 딴에는 날 찾아온다고 반코트도 빌려 입고 잔뜩 멋을 냈다는 겁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 집에 들어 올 용기가 안나 막걸리까지 한 사발을 다 마셨다는군요. 그날은 만두 국만 한 그릇 대접하고 어머니께 서 타일러 보냈습니다. 또 한동안 소식이 없던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내가 서울에 올라와 직장에 다니던 늦은 봄이었습니다.
「이름 모를 소녀」를 처음 취입한다며 재킷사진을 싸서 회사로 찾아온 그 이. 나는 처음 으로 그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약속시간을 두 시간이나 넘기고 그곳에 그냥 갔으려니 하고 갔는데 웬걸, 그는 그때까지 다방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이 주변엔 담배꽁초가 수북했었습니다. “아직까지 영희씨를 생각하고 있는데 어떡하면 좋죠?” 그윽하게 날 지켜 보던 그이가 대 뜸 하는 말에 나는 그만 웃고 말았지요. 영희씨를 꼭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같이 가지요.”
그날 명동의 ‘쉘브르’에서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촉촉이 젖어드는 그이의 노래 속에서 어느새 내 마음은 그이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좁은 곳을 싫어해서 우리는 주로 경복궁. 삼청공원. 여의도 잔디 밭 등에서 많은 시간 을 보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그이. 나는 꽃구름을 타고 하늘을 떠 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름 모를 소녀」에 이어 한나절 동안 만들었다는 「하얀 나비」인기가 신나게 올랐습니다. 그와 더불어 그이 몸 속에 깃든 병마도 활동을 시작했던 겁니다. 그땐 가끔 기침이 잦은 정도여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어머니를 통해 그이가 폐결 핵 환자라는 말을 듣곤 펑펑 울다가 이것이 ‘나의 운명’이려니 하고 그이를 활짝 받아 들 였습니다.
아버님이 안 계셨고, 장녀라서 그이의 따뜻한 정을 잊지 못했던 거지요. 부지런 히, 그리고 열심히 병마와 싸운 덕에 완치됐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이에 게 닥쳐온 돌 킬 수 없었던 큰 시련은 ‘대마초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노래를 잃고 또 다시 병이 찾아들었습니다.
1975년 봄, 우리는 집안 어른들을 모신 가운데 약혼식을 올리고 한 공간에서 함께 살기 시 작했습니다. 노래 하나를 만들면서 자신의 생을 한 조각씩 떼어바치던 그이, 촛불만 켜고 밤늦도록 곡을 만들면서도 피곤하기는커녕, 기쁨의 빛을 뿜어내던 그이, 그런 그이와 밤을 꼬박 새우기도 여러 날이었지요. 1977년 3월 27일, 아직 그이가 활동을 못하고 어려움에 빠져있을 때 일영가는 길목의 은평교회에서 조용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처음 만났을 땐 작고 가무잡잡한데다가 눈만 휑하니 커서 무척 어둡고 볼품없어 뵈던 그이. 무척 세심하고 엉뚱한 면도 참 많았지만 우린 오손도손 참 재미있었습니다. 내가 아플 때 면 무조건 잘 먹어야 낫는다며 돼지고기를 사와 고추장을 넣고 볶음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정작 당신께선 식성도 까다로워서 고기를 먹으라면 약같이 생각하시더니. 이윽고 우리에게도 아이가 생겼습니다. 분만의 고통 때문에 내가 ‘지금 안 낳고 조금 있다 낳을 레요’라며 헛소리를 하더라나요. 당신을 쏙 빼어 닮은 쌍둥이 딸아이를 그이는 참으로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말 그대로 ‘행복의 절정’이었습니다.
1979년 12월, 대마초 가수들에 대한 규제가 풀렸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 춤이라도 한바탕 추고 싶어했습니다.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작곡과 레코드취입에 쏟아넣느라 몸조리는 자연 생각 밖이었던가 봐요. 차 오르는 숨과 터져 나오는 기침 때문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지새는 밤이 계속되는 그이를 보기란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었습니다. 말려야 했습니다. 그이의 삶을 계속 잇기 위해서는. 하지만 그의 생을 지탱해 주고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노래를 그에게서 앗아간다는 건, 더욱 큰 고통의 도가니 속으로 그이를 몰아넣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타이틀로 재기 곡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님」등을 발표하고 결국, 인천 송도에 있는 요양원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그때가 1983년 12월,그이가 요양을 시작한 지 4개월 째가 되던 날, 아무도 찾아 올 리 없는 저녁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이였습니다. 담당 의사분께 인사도 않고 그이는 마침내 요양원을 뛰쳐나온 겁니다. 그이를 사로잡은 노래에의 집념, 그것은 더 이상 잠재우지 못할 뜨거운 불꽃이었습니다. 그이는 고통을 안으로만 안으로 만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몸이 아 파 사랑하는 아이들과 더 많이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걸 늘 미안해했습니다.
그이와 함께 산 10년, 그 당시로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커다란 아쉬움 만 남습니다. 최근 2년 동안 우리에겐 참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몸을 아끼지 않고 노래에 전념한 값을 그이는 고통으로 치러냈습니다. 작년부터는 병원 입원이 잦아졌습니다. 환절기만 되면 가뜩이나 약한 몸에 저항력이 떨어져 합병증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계절이 깊어갈수록 그이의 병도 깊어만 갔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렸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그토록 어려움을 치르고 있을때도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 머님과 신앙 속에 빚어진 그이의 선배님들이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한 형제처럼 찾아와 기도하며 찬송하며 그이를 일으키려 애쓰던 분들께 그 고마움을 어찌 다 표현해야 할는지요.
지난 일요일엔 그이를 만나러 금촌에 갔었습니다. 인부들이 그의 무덤 집을 만드느라 떼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예쁘게 만들어 달라고 해. 수고하신다고 내 대신 점심 값도 드리고 그 이 성격에 틀림없이 이런 말을 할 것 같아 웃음이 쿡쿡 나오더군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이가 누워 있는 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냉정한 바람은 내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 놓았습니다.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프다고 그이는 노래했지만 나는 따뜻한 미소를 짓고 싶습니다. 내겐 그이를 닮아 맑은 눈을 가진 두 아이, 정선이와 정훈 이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마지막 한 방울의 생명까지 바친 그의 노래가 영원할 것이니까요...
<故 김정호를 추모하며 네이버 아이디 보물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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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정할 곳이 많은 자료입니다. 자료가 발굴되거나 발견하면 이 글을 수정하거나 추가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에 대해 틀린점이 있으시면 답글로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보물섬님 올리신 정호님평전글 제가 양해을 구하여 이미지와 함께 시디에 수록하여 구워서 정모때에
배포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 시디엔 보물섬님의 글과 이미지가 그대로 볼수가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시디배포를 할적에 받으신 분들이 활용을 많이 못해서 아마 못본 회원님들도 많을거 같으네요 ㅎㅎ
시간 되는대로 고쳐서 올려 보겠습니다,
보물섬님 따님 이름이 정선양과 정운으로 알고 있는데요? 기회되면 직접물어 봐야겠네요.
네..
정호님의 생을 잘 올려주셔서 몇번을 읽었슴니다,
감사합니다,
끝까지 읽는데 많은 시간이 흘렀네요..가슴아픈 이야기도 이제는 지난 추억이 된 지금..
하얀나비 님들이 정호님을 추억하며 이 공간을 곱게 가꾸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
안탑깝습니다 쌍둥이 딸을 남겨두고 어찌눈을감었을까요
그는 가셨지만 그의노래는 영원할겁니다..
흐미이 이런 방대한 자료를.........시간내서 읽어 봐야겠습니다.
역시 보물섬^^" .오늘 아침은 날씨도 좀 덜 덥고 보물섬님 덕분에 정말 신나는 아침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네이버 블로그에 올려놓으신 이 방대하고 세심한 자료들을 정호님 카페에도
올려주셨으면 하고 바랬는데..참 잘 하셨습니다. ^^"
특히 이영희 여사님의 회상글이 마음에 물결을 일으킵니다...
제가 산마당님께 한 질문은 정작 이곳에 해야 했던거군요^^
저만 그렇나요 사진이 안보여 아쉽네요
저는 아주 자알 보이는데 참으로 멋지고 소중한 사진들이 많네요..죄송합니다아...ㅋㅋ
착하면 보임
언젠가 인터넷 검색하다 읽었었는데 자료 올려 주셔서
다시 한번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가수 김정호!
역시 존경합니다.
보물섬님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옵고, 행복하십시오 ^ ^
관련된 자료들을 빠짐없이 찾아 올려주신 그 정성과 노력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저도 호기심을 갖고 몰입해 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은 안보이네요 아쉬어요
가끔 글의 사진이 안보일때가 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목록에서 클릭하시면 보일 것입니다.
감동적인 글입니다~
정성도 대단하시구요.
위글중에서 중학교때인가 삼촌(외삼촌)인지 생일선물로 기타를 사주었다는 것과
고등학교때 제주도에 무전여행갔다가 날씨로 늦어지면서 무임승선하고 갑판에서 처량하게 기타를 치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여들어 교통비까지 해결했다는...
언젠가 월간여성잡지(월간여성인지. 월간경향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70년대말인지.80년대초인지도 가물)에
김정호님이 직접 쓴 수기가 게재되었지요.
제가 월간지를 사고 수기만 찢어 갖고 잡지는 그대로 버렸지요.
그런데 그 수기 자료를 군대갈때 태워버렸습니다.
접하게 되는 많은 자료에서도 그 월간지에 대한 내용이 없더라구요. 아쉬워요~
최길수님.. 아쉽네요. 너무 아쉽네요. 그 자료가 보존되었으면 정말로 귀한 자료가 되었을텐데....
제주도 무전여행 사건은 글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바람새시절의 김정호님 섹션에서 옮겨온 자료라고 기억합니다.
@보물섬 왜 태워 버리셨을까요 이렇게 아수울수가.....
정호님이 쓰신 수기 어디서 찾을수 없나요?
아~그리고 오랜만에 출연하기 위해 찾은 방송국 대기실의 후배가수들속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끼고
반포까지 택시를 타도 몰라보는...
'이름모를 소녀'를 녹음하고 여러날동안을 지방여행을 하고 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 방송출연 섭외가 계속오자
소속사에서 찾느라고 난리가 나고 부랴부랴 올라왔는데 마땅한 옷이없어 급하게 장만하고...
고영수씨와 교동초등학교 동창...
아~ 그리고 대마초 파동때인지 정신병원에 잠깐 머무를때 환자들이 '하얀나비 아저씨'하며 알아보았다는
글도 가물가물 생각나네요
이와 비숫한 내용이 글에 있는데 최길수님의 기억이 혼재된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출연하기 위해 찾은 방송국 대기실의 후배가수들속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끼고 반포까지 택시를 타도 몰라보는> 은 아마도 85년도 언저리 자료같습니다. 이 시절 김정호님이 반포살았다고 기억합니다.
<'이름모를 소녀'를 녹음하고 여러날동안을 지방여행을 하고 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 방송출연 섭외가 계속오자
소속사에서 찾느라고 난리가 나고 부랴부랴 올라왔는데 마땅한 옷이없어 급하게 장만하고>는 73년도 자료같습니다. 이와 비숫한 내용이 자료에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