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무엇을 찾으려고 애쓰는 걸까?
나는 지금 어디로 쉬지 않고 흘러가는 걸까?
어떤 노래의 첫부분입니다. 누구노래인지 아십겠습니까?
컴백 홈입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지요.
세상에 도전이 쉬운 줄 알았던 한 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아버지의 삶이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방법으로 도전하여 승리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되도록 이면 멀리 갔습니다.
그리고 도전을 합니다. 잘 될 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일에 누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노력하는 것과 관계없이, 나의 수고와 관계 없이 사람은 자신의 일이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패 했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털리고 세상에 나가면 도와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도리어 세상 속에서 모든 것 털리고 돼지 우리에서 울고 있는 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돼지가 먹는 그 열매, 쥐엄 열매를 먹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은 사람들......, 그렇게 그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냉대 속에 절망에 빠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허랑방탕하여
그의 삶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13절을 볼까요?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그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허랑방탕한 삶과 낭비하는 삶 때문이었습니다. 허랑방탕이라는 말은 무절제한 삶, 말 그대로의 방탕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삶의 준비가 덜 된 사람이었습니다. 절제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규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자신이 준비된 것처럼 착각 했습니다. 자기를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과 싸움에서 진 사람이지요.
낭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낭비하다라는 것은 손에 쉬고 확 뿌리는 것을 말하고, 키질하여 날려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절제하지 않으면, 재산을 사용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 이렇게 공중에 뿌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뿌리고 살아서 몇 칠, 몇 달, 몇 년 동안 버틸 수 있겠습니까?
다 없앤 후
결국 그 아들은 자신의 재산을 다 털어 먹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4절입니다.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다 없앤 후”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흉년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모든 것을 다 잏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궁핍하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어려운 일이란 이렇게 오는 것입니다. 준비할 수 없게 오는 것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결국 그 아들은 그곳 한 사람에게 붙여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15절입니다. 같이 볼가요?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를 도와 주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를 거두어 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그를을 들로 보내어 자신의 돼지를 치게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돼지를 친다는 것은 치욕적인 일입니다.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키는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쥐엄 열매로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먹어야 했습니다. 그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16절입니다. 같이 보겠습니다.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배가 고팠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는 먹고자 했습니다. 돼지가 먹는 것을 먹는 다는 것은 치욕입니다. 그러나 그가 낭비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그를 도와주었던 사람도 결국은 그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아들은 돼지보다도 못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돼지가 먹는 음식도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지요.
그가 찾아가 곳은 바로 이런 곳이었습니다. 살벌한 곳이었습니다. 상막한 곳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나누어 줄 수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아들은 이런 순간에 떠오른 곳이 있었습니다. 차가운 세상에서, 냉대를 받으며, 따뜻한 곳이 잇음을 생각합니다. 17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그는 아버지에 대하여 스스로 말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참 따뜻한 곳이었음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후한 곳이었음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집이 보금자리였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집은 우리 자녀들에게 따뜻한 곳, 보금자리이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저와 아내의 생각은 필요하면 와서 쉬었다 갈 수 있는 곳,
우리 자녀들에게 따듯함이 느낄 수 있는 집을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지은 죄가 관계 없이 그곳에 가면 사랑을 받는다는 생각, 자신이 행한 행동과 관계 없이 그곳에서는 쉼을 얻고, 세상의 냉대 속에서 상하고 아쁜 마음이 치료되고 위로 받고, 따뜻한 환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
자신의 삶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순간에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품꾼들의 풍성함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힘들 때 아버지가 생각나고 어머니가 생각나서, 위로 받을 수 있는 곳, 따뜻한 그곳, 그곳이 아버지 집이고, 그래서 아버지에게 돌아 갈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누구든지 돌아 올 수 있는 곳, 따뜻한 그 곳, 사랑의 그곳......, 4다른 곳에 가지 아니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집이라면, 그래서 그곳이 보금자리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돌아 올 수 있는 보금자리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