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안의 성은 위(衛)씨이다. 상산(常山)의 부류(扶柳) 사람이다. 집안은 대대로 이름난 선비집안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어 외사촌형인 공(孔)씨가 도안을 양육하였다. 일곱 살에 책을 읽었으며, 두 번 보면 외울 수 있었다. 고을의 이웃 사람들이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겼다.
열두 살이 되자 출가하였다. 정신과 지혜는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그러나 형상과 모습은 몹시 누추하여 스승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도안은 농사짓는 집의 노역으로 불려나가 3년이 되도록 부지런히 일하였다. 그러나 한 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이 독실한 성품으로 정진하여, 재계(齋戒)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몇 해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스승에게 아뢰어 경을 구하였다. 스승은 『변의경(辯意經)』한 권을 주었다. 이 책은 5천 글자 가량의 분량이었다. 도안은 경을 가지고 논에 들어갔다가, 쉬는 틈에 이것을 다 읽었다. 해가 저물어 돌아와서는 경을 스승에게 되돌려주며, 다시 다른 경을 찾았다. 이에 스승이 물었다.
“어제 준 경도 아직 읽지 못하였을 텐데, 지금 또 다른 것을 찾느냐?”
도안이 대답하였다.
“이미 암송하였습니다.”
스승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를 아직 믿지 않았다. 다시 『성구광명경(成具光明經)』 한 권을 주었다. 그것은 일만 글자[一萬言]에 조금 모자라는 분량이었다. 도안은 이 경을 가지고 갔다. 처음처럼 저녁에 돌아와 스승에게 되돌려주었다. 스승이 그를 잡고 이 경을 되풀이하게 하니,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이에 스승은 크게 놀라고 감탄하며 그를 달리 생각하였다.
그 후 도안이 구족계를 받고 나서는 마음대로 사방을 떠돌아 다녔다. 업도(鄴都)에 이르렀다. 중사(中寺)에 들어가 불도징(佛圖澄)을 만났다. 불도징은 만나자 감탄하여, 하루 종일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의 모습이 뛰어나지 않음을 보고, 모두가 함께 그를 가볍게 보아 괴이하게 여기었다. 이에 불도징이 말하였다.
“이 사람의 머나먼 식견은 너희들이 짝할 바가 아니다.”
이로 인하여 불도징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불도징이 강론하면 도안이 늘 거듭 강술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아직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모두가 말하였다.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가 곧 어려운 질문을 합시다. 그래서 저 곤륜자(崑崙子: 얼굴이 까맣고 몸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기를 죽여 버립시다.”
곧 도안이 뒤에 다시 거듭 강술하였다. 질의와 논란이 날카롭게 일어났다. 도안은 그 날카로운 칼날을 꺾고 시끄러운 문제를 해소하였다. 그러고도 행동에 남은 힘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말하였다.
“얼굴이 새까만 도인[漆道人]이 사방 이웃을 놀래키는구나.”
당시 학자들은 대부분 자기가 듣고 본 것만을 고수하는 폐단이 있었다. 이에 도안은 탄식하였다.
“부처님의 시대로부터 아무리 멀어졌다지만 현묘한 종지는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 마땅히 그윽한 진리를 끝까지 궁구해야 한다. 멀리 미묘하고 오묘한 종지를 찾아 생멸 없는 진리를 말세에 선양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떠돌아 숨어 다니는 무리들로 하여금 근본으로 돌아가게 해야 할 것이다.”
이에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며 도를 묻고, 경전과 계율을 고루 살펴보았다.
그 후 난을 피하여 확택(濩澤)에 숨어살았다. 태양(太陽)의 축법제(竺法濟)와 병주(幷州)의 지담(支曇)이 『음지입경(陰持入經)』을 강의하였다. 도안은 뒤늦게 이들을 따라 수업하였다.
얼마 안 되어 동학인 축법태(竺法汰)와 함께 비룡산에서 휴식하였다. 승선(僧先)과 도호(道護)가 이미 그 산에 있었다. 서로 만나자 기뻐하였다. 곧 함께 글을 펴보고 생각을 기탁하니, 미묘함이 정신[神情]에서 우러나왔다.
그 후 도안이 태행산맥(太行山脈)의 항산(恒山)에 절과 탑을 창립하였다. 옷을 바꾸어 입고 교화를 따르는 사람이 하북(河北) 일대를 반으로 나눌 정도였다.
그때 무읍(武邑)의 태수 노흠(盧歆)이 도안이 맑고 빼어나다는 말을 들었다. 민견(敏見)을 시켜 간절히 설법을 요청하였다. 도안이 아무리 사양하여도 면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요청을 받아들여 강의를 열었다. 그 내용이 명실상부하자 도인과 속인들이 기뻐하며 사모하였다.
45세가 되자 다시 기부(冀部:河北省)로 돌아와 수도사(受都寺)에 머물렀다. 문도 대중 수백 명에게 늘 법의 교화를 베풀었다.
이때 석호(石虎)1)가 죽자, 팽성왕(彭城王) 석준(石遵)이 그 정통성을 이어받아 후사를 세웠다. 중사(中使: 궁중의 사신) 축창포(竺昌蒲)를 파견하였다. 도안을 화림원(華林園)에 들어오도록 초청하고 널리 승방과 요사를 수리하였다.
도안은 석씨들의 말기에 나라 운세가 장차 위태로워질 것을 알았다. 곧 서쪽 견구산(牽口山)으로 갔다. 염민(冉閔)의 난이 일어나 인정이 어수선하였다. 도안은 이에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하늘의 재앙으로 가뭄과 메뚜기떼가 심하고 노략질하는 도적들이 종횡한다. 모여도 안 되지만 흩어져서도 안 된다.”
마침내 다시 대중들을 거느리고 왕옥산(王屋山) 여상산(女牀山)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황하를 건너 육혼산(陸渾山)으로 들어갔다. 나무열매를 먹으면서 배움을 닦았다.
이윽고 모용준(慕容俊)2)이 육혼 땅을 핍박하였다. 드디어 남쪽 양양(襄陽) 땅에 투신하였다. 길을 가다가 신야(新野)에 이르렀다. 도안이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흉년을 만났으니, 나라 임금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불법의 일을 세우기 어렵다. 더욱이 교화의 바탕은 모름지기 널리 퍼뜨리는 데 있다.”
모두가 말하였다.
“법사의 가르침에 따르겠습니다.”
이에 법태(法汰)로 하여금 양주(楊州)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곳에는 군자(君子)가 많아 풍류를 좋아하고 숭상한다.”
법화(法和)가 촉(蜀:泗川省)으로 들어가니, 그곳의 산수가 한가함을 닦을 만하였다. 도안과 제자 혜원 등 4백여 명은 황하를 건넜다. 밤길을 가다 우레와 소낙비를 만나, 번개를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앞에 먼저 가던 사람이 인가를 발견하였다. 문 안에 두 필의 말이 있으며, 처마 기둥 사이에 한 섬의 곡식이 들어갈 만한 말 덮개가 매달려 있었다.
문득 도안이 불렀다.
“임백승아.”
주인이 놀라서 밖으로 나왔다. 과연 이름이 임백승(林百升)이었다. 주인은 그를 신인(神人)이라 생각하고 후하게 접대하였다. 이윽고 제자들이 어떻게 주인의 이름을 알았는지를 물었더니 도안이 말하였다.
“나무가 둘이면 임(林)자이고, 말 덮개의 용량이 백 되[百升]이다. 그러니 이름이 임백승인 것이다.”
양양에 도달한 뒤에는 다시 불법을 베풀었다. 과거부터 불경을 번역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예전의 번역이때로 틀린 것이 있기에, 깊은 뜻이 은몰되어 아직 두루 통하지 못하였다. 매양 강설에 이를 때마다, 오직 그 대략의 뜻을 이야기하고는 읽어 넘길 뿐이었다. 도안은 경전을 읽으면서 궁구하여 깊고 먼 경지에 이르렀다.
그가 주석한 것으로 『반야도행경』ㆍ『밀적경(密跡經)』ㆍ『안반경(安般經)』등 여러 경전이 있다. 모두가 본 문장을 찾아 문구를 비교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을 다 수록하였다. 이어 의심나는 곳을 분석하고 훤하게 풀이하여, 전부 스물두 권의 책이 되었다.
주석서는 서두에서 깊고 풍부한 내용을 이루어, 미묘하게 깊은 종지를 다하였다. 앞뒤의 조리가 일관되며 문리가 회통하였다. 경전의 내용이 극명해진 것은 도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로부터 진(晋)나라에 이르기까지 경전이 전해온 것은 제법 많았다. 그러나 경을 번역한 사람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후세 사람들이 추적하여 찾아보았으나 연대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도안은 곧 명목(名目)을 모두 모아 그 시대와 사람의 이름을 표시하고, 품(品)의 새 것과 옛 것을 가려내었다. 그래서 지어진 것이 『경록중경(經錄衆經)』이다. 경전에 근거가 있게 된 것은 실로 그의 공적으로 말미암은 일이다. 그러자 사방의 학자들이 다투어 찾아가서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당시 정서장군(征西將軍) 환랑자(桓朗子)가 강릉(江陵)에서 주둔하였다. 도안에게 요청하여 잠시 머물렀다. 주서(朱序)가 서쪽으로 가서 주둔하면서 다시 청하였다. 양양으로 돌아가 서로 깊이 인연을 맺고 받아들였다. 주서는 늘 찬탄하였다.
“도안 법사는 도학(道學)의 나루를 건너는 징검다리이자, 마음을 맑게 다스리는 주점이다.”
도안은 백마사(白馬寺)가 협소해지자, 다시 절을 세우고 단계사(檀溪寺)라 이름 지었다. 곧 청하(淸河) 장은(張殷)의 집이었다. 큰 부자와 장자들이 모두 찬조를 하였다. 5층탑과 4백 개의 승방을 세웠다. 양주자사(凉州刺史) 양홍충(楊弘忠)은 만 근의 구리를 보내서 승로반(承露盤)3)을 만들기를 원하였다. 도안이 말하였다.
“승로반은 이미 태공(汰公)에게 맡겨 만들기를 끝마쳤습니다. 이 구리를 회향하여 불상을 주조하고자 하는데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양홍충은 기뻐하며 공경히 이를 승낙하였다. 이에 대중들이 함께 재물을 추려내 희사해서 불상을 조성하였다.
광배가 1장 6척이고, 신령한 상호가 밝게 드러났다. 매일 저녁 빛을 발하여 전당(殿堂)이 환하게 빛났다. 또한 뒤에 불상이 스스로 걸어가서 만산(萬山)에 이르렀다. 온 고을 사람이 찾아가 우러러 예를 올리고, 옮겨서 절로 돌아왔다.
도안은 이미 큰 서원이 성취되었으므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 좋습니다.”
부견(符堅)이 사신을 보내었다. 외국의 금박(金箔)을 입힌 높이 일곱 자의 기댄 자세의 불상과 금불좌상과 구슬로 꿰어 만든 미륵상, 금실로 수놓은 불상, 직물로 만든 불상을 각기 하나씩 보내왔다.
강회(講會)나 법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존상들을 나열하고, 당기(幢旗)와 번기(幡旗)를 배치하였다. 구슬과 노리개가 번갈아 가며 빛나고, 장식한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 계단을 오르고 문턱을 밟는 사람들로 하여금 엄숙하게 경의를 다하게 하였다.
외국에서 건너온 구리로 만든 불상이 있었다. 제작의 형식이 예스럽고 기이하였다. 당시 대중들은 그렇게 공경하고 존중하지 않았다. 도안이 말하였다.
“불상의 형태는 아름답게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육계(肉髻)의 형태가 맞지 않습니다.”
곧 제자로 하여금 그 육계를 화로에 녹여서 고치게 하였다. 그런데 광명의 불꽃이 빛나게 뻗어 나와 법당 안에 가득하였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육계 속에 한 사리가 보였다. 이에 대중들이 모두 부끄러워 감복하였다. 도안이 말하였다.
“불상이 이미 신령하고 기이하니 다시 번거롭게 고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리고는 곧 그 일을 중지하였다. 이에 알만한 이들이 모두 말하였다.
“도안은 사리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짐짓 꺼내어 대중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당시 양양에 습착치(習鑿齒)란 사람이 있었다. 날카로운 말솜씨는 하늘에서 타고난 듯 뛰어나서, 당시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였다. 그가 먼저 도안의 높은 명성을 듣고 일찌감치 편지를 보내 호감을 표하였다.
“듣건대 진실에 응하여 바른 길을 밟아 밝고 환하게 명백하게 안으로 밝으신 분이며, 자비의 가르침을 거듭 비춰주시어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음덕을 입는다 합니다.
불법이 동방으로 흘러 들어온 지 4백여 년입니다. 변방의 왕이나 거사들이때로 받든 사람이 있고, 중국[眞丹]의 숙천(宿川)에서 이보다 더 앞선 시대에 행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도의 운행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것이라서, 세속에서는 아직 모두들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도업의 융성함에는 모두가 짝을 이룰 길이 없습니다. 이른바 달빛이 나오려 할 때 신령한 발우(鉢盂)가 감응하여 내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법사의 임무는 홍범(洪範)4)에 해당하며, 그 교화는 그윽이 깊은 곳을 적셔줍니다. 이곳의 모든 승려들에게는 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경사로운 구름[慶雲]이 동쪽으로 흐르듯, 마니주(摩尼珠)의 빛남을 돌릴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 7보의 자리에 오르시어, 잠시 명철한 등불을 밝히시고, 풍성한 초목[豊草:衆生]에 감로의 비를 내려주십시오. 양자강 기슭에 전단(旃檀)나무를 심으신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늘날 다시 드높아질 것이며, 현오한 물결이 일렁이고 넘쳐서 거듭 한 시대를 휩쓸 것입니다.”
이 편지의 글은 많아서 여기에 모두 싣지 않는다.
그 후 도안이 그곳에 이르러 머문다는 말을 들었다. 습착치는 곧 도안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며 말하였다.
“사해(四海) 습착치요.”
도안이 말하였다.
“하늘 가득[彌天] 석도안(釋道安)이요.”
당시 사람들은 명답이라 하였다.
그 후 습착치는 배[梨] 열 개를 선물로 보냈다. 마침 대중들의 식사 때에 전해졌으므로, 도안은 손수 배를 쪼개어 나누었다. 배가 다 사람들에게 고루 분배되어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고평(高平)의 극초(郄超)는 심부름꾼을 시켜 천 섬의 쌀을 보냈다. 여러 장의 편지를 써서 깊이 은근한 마음을 전했다.
도안은 회답편지를 보냈다.
“쌀을 희사하시니 기다리는 분께 번뇌를 끼쳤음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습착치는 사안(謝安)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곳에서 석도안을 만났습니다. 멀리까지 뛰어나서 평범한 도사가 아닙니다. 문도 수백 명이 재를 올리고 강의함에 게으르지 않습니다. 변화하는 기교와 방술로 보통 사람들의 귀와 눈을 미혹하는 일이 없습니다.
위세를 중시하고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일 없이도, 군소(群小) 종문들의 천차만별을 정돈하는 인물입니다. 그리하여 문도들이 엄숙하고 숙연하게 각자 서로 존경하여 크고도 가지런합니다. 이는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일입니다.
그 사람의 품은 이론은 간결하면서도 대부분 넓게 섭렵한 것이어서, 내외(內外)의 뭇 서적들을 대략은 두루 보았습니다. 음양ㆍ산수(算數)에도 모두 빼어납니다. 불경의 오묘한 이치[妙義]에는 자유자재로 능란하여, 논리의 펼침이 우법란(法蘭)과 법도(法道)와 비슷합니다.
한스러운 일은 그대와 같이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도 한 번 만나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늘 말합니다.”
당시의 현인들에게 중히 여겨진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도안은 번천(樊川)ㆍ면천(沔川:陜西省)에 있던 15년 동안에 해마다 늘 두 번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을 강의하였다. 한 번도 그만두거나 빠트린 일이 없었다.
진(晋)의 효무황제(孝武皇帝)는 그의 도풍을 듣고, 덕을 흠모하여 사신을 보내 문안을 하였다. 아울러 조서(詔書)를 보냈다.
“도안 법사는 기량과 식견이 도리에 통(通)한다. 도풍의 운치가 사물의 말단에도 밝다. 도에 살면서 속인들을 훈도하여 아름다운 공적을 아울러 쌓았다. 그러니 어찌 오직 현재의 세상만을 바로잡아 제도하겠는가? 바야흐로 미래의 세계까지 나루터를 구축한 분이다. 봉급은 모두 왕공(王公)과 같은 대우로 지급하고, 공물은 계신 곳에서 내도록 하라.”
당시 부견은 평소 도안의 명성을 듣고 늘 말하였다.
“양양에 석도안은 참으로 신령한 큰 그릇[神器]이다. 이 분을 모시어 짐을 보좌케 하고자 한다.”
그 후에 부비(符丕)를 파견하여 남쪽 땅 양양을 공략하였다. 도안과 주서(朱序)가 모두 부견에게 사로잡혔다. 이에 부견은 복야(僕射)인 권익(權翼)에게 말하였다.
“짐이 십만의 군사로 양양 땅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얻은 것은 오직 한 사람 반뿐이다.”
권익이 말하였다.
“누구누구입니까?”
부견이 말하였다.
“도안이 한 사람이고, 습착치가 반 사람이다.”
도안은 장안에 이르러 오중사(五重寺)에 머물렀다. 대중이 수천 명에 달하여 크게 법화를 넓혔다.
과거 위(魏)나라와 진나라(晋)의 사문들은 스승에 의거하여 자신의 성명을 지었다. 그런 까닭에 성씨(姓氏)가 각기 달랐다. 도안은 큰 스승의 근본으로서 석가모니를 따를 수 있는 이는 없다고 여겼다. 마침내 승려들의 성을 석(釋)씨로 지었다.
그 후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을 얻었다. 과연 그곳에서도 일컬었다.
“사방의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면, 다시 강물의 이름은 없어진다. 네 개의 성씨가 사문이 되었지만, 모두가 석씨의 종족으로 일컫는다.”
이렇게 경전의 말씀과도 부합되니, 마침내 영원한 법식으로 삼았다.
도안은 밖으로 많은 책을 섭렵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장안에서 의관을 갖춘 집안의 자제로서, 시(詩)와 부(賦:文體의 하나)를 하는 사람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붙어서 명성을 이루었다.
당시 남전현(藍田縣)에서 하나의 큰 가마솥을 얻었다. 용량이 곡식 27섬(한 섬은 열 말)을 담을 수 있었다. 가장자리에 전서(篆書)로 글자를 새겨 놓았다.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을 보였더니 도안이 말하였다.
“이것은 옛 전서(篆書)로 노(魯)나라 양공(襄公)이 주조한 것이다.”
곧 예문(隸文)으로 베꼈다.
또 어떤 사람이 구리로 된 10말들이 그릇을 가지고 시장에서 팔았다. 그 모양이 똑바로 둥근 형이었다. 아래로 향하면 말로 사용하고 가로 놓인 다리 위로 치켜 올라간 부분은 되로 사용하였다.
낮은 쪽에 있는 것이 홉[合]이고, 다리의 한쪽머리는 피리이다. 피리는 종(鍾)과 같았다. 용량은 반 홉을 담을 만하다. 가장자리에 전서로 글자를 새겼다. 부견이 도안에게 물어보자 도안이 말하였다.
“이것은 왕망(王莽, 9~20)이 스스로 말한 것입니다. 순(舜)임금의 황룡(皇龍) 무진(戊辰)년 단위를 개정하였습니다. 양을 같은 비율로 하여 사방에 이를 유포시켜서, 작고 큰 그릇을 고르게 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공평히 취하게 한 것입니다.”
그의 많이 듣고 널리 앎이 이와 같았다. 부견은 학사들에게 명령하여, 내외의 경전에 의문이 있으면 모두 도안을 스승으로 삼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경조(京兆)에서 말이 나돌았다.
“배움에 도안을 스승으로 삼지 않으면, 어려운 문제는 맞추지 못한다.”
과거 부견은 석씨(石氏)의 난리를 이어받았다. 그렇지만 이때에 이르러 백성들의 호구 수가 풍부해지고 사방을 거의 평정하였다. 동쪽은 동해바다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구자국(龜玆國)을 병합하였다. 남쪽으로는 양양을 싸잡고, 북쪽으로는 사막을 모두 점령하였다. 오직 건업(建業) 한 모퉁이만 아직 항복받지 못하였다.
부견은 매양 자신을 섬기는 신하들에게 이야기하였다.
“늘 강남 지방을 평정하여, 진나라 황제를 복야(僕射)로 삼고 사안(謝安)을 시중(侍中)으로 삼고자 한다.”
부견의 아우인 평양공(平陽公) 부융(符融)과 조정대신 석월(石越)ㆍ원소(原紹) 등이 모두 간절하게 간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이에 이들은 부견이 도안을 믿고 공경함을 알아, 마침내 함께 도안에게 청하였다.
“주상께서 장차 동남 지방에 일을 일으키려 한다. 그렇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창생들을 위하여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는가?”
때마침 부견이 동쪽 뜰로 나가면서 도안에게 명하여 가마에 올라 같이 가고자 하였다. 복야 권익이 간하였다.
“신이 듣기로는 천자의 가마에는 시중이 함께 타 모셔야 합니다. 도안은 사람의 형상을 허문 자입니다. 어떻게 천자 옆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부견은 발끈 성을 내고 얼굴빛을 고쳤다.
“도안의 도와 덕은 존경할 만하다. 짐은 천하와도 바꾸지 않겠다. 가마를 함께 타는 영예 정도로는 그의 덕에 걸맞지 않다.”
곧 복야에게 명령하여 도안을 부축해서 가마에 오르게 하였다. 이윽고 도안에게 말하였다.
“짐은 장차 그대와 남쪽 오월(吳越) 지방으로 떠돌고자 한다. 군대를 정비하여 순수(巡狩)5)하면서 회계(會稽)를 건너 동해를 바라본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이에 도안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는 천명(天命)에 응해서 세상을 거느리십니다. 여덟 고을에서 바치는 부유함이 있고, 중토에 자리 잡아 사해를 제압하셨습니다. 정신을 함이 없는 세계에 깃들이신다면, 요임금이나 순임금과 나란히 하는 융성한 제왕이 될 것입니다.
지금 백만의 대군으로 가장 질 떨어지는 토지를 구하고 계십니다. 또한 동남지방의 지형은 땅이 낮고 기운이 사납습니다. 예전에 순임금ㆍ우임금도 그곳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진시황도 한 번 갔다가는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보건대 저의 어리석은 마음으로도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평양공은 훌륭한 친척이고, 석월은 중신(重臣)입니다. 그들이 모두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오히려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러니 저의 경솔하고 얕은 견해의 말도 결코 윤허하시지 않으시겠지요. 그렇지만 이미 후한 예우를 받는 까닭에, 참된 충성[丹誠]을 다할 따름입니다.”
이에 부견이 말하였다.
“땅이 넓지 않다거나 백성을 다스리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장차 천심을 가려내서 나라 운수의 소재를 밝히고자 할 뿐이다. 시운에 순응하여 순수(巡狩)하는 것은 전대의 전적에도 드러나 있다. 부처님 말씀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제왕이 지방을 성찰한다는 글은 없는가?”
이에 도안이 말하였다.
“만약 천자의 가마를 반드시 움직이고자 한다면, 먼저 낙양(洛陽)으로 행차해 위세를 높이어 정예로움을 비축하십시오. 격문(檄文)을 강남땅으로 전하십시오. 만약 그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그때 토벌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부견은 이 말에 따르지 않았다. 평양공 부융 등 정예군 25만 명을 파견하여 선봉[前鋒]으로 삼았다. 부견이 몸소 보병과 기병 60만 명을 거느렸다.
이즈음 진(晋)나라는 정로장군(征虜將軍) 사석(謝石)과 서주자사(徐州刺史) 사현(謝玄)을 파견하여 이에 항거하였다.
부견의 선봉대가 팔공산(八公山) 서쪽에서 크게 무너졌다. 진나라 군사가 패배를 뒤쫓아 30리를 쫓아왔다. 죽은 사람이 서로를 베개삼아 누웠다. 부융은 말이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부견은 홀로 말을 타고 도망치니, 도안이 간언한 말과 같았다.
도안은 항상 여러 경전에 주석을 달았다. 혹 그것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서원하였다.
“만약 말한 것이 이치로부터 그다지 멀어지지 않는다면, 상서로움이 나타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곧 꿈에 머리는 하얗고 눈썹이 긴 오랑캐 도인이 나타나서 말했다.
“그대가 주석을 단 경전은 매우 이치에 합당하오. 나는 열반에 들 수 없어서 서역에 머물고 있오. 마땅히 서로 도와 불법을 널리 전하여야 하므로, 때때로 식사나 마련해 주셨으면 하오.”
그 후 『십송률(十誦律)』이 이르렀다. 원공(遠公:慧遠)이 이에 스승님[和尙]께서 꿈꾸신 분이 빈두로(賓頭盧:佛弟子)임을 알았다. 이에 자리를 마련하고 공양을 올리자 곳곳에서 법칙이 되었다.
도안은 이미 도덕에서 대중의 종사가 되었다. 배움에서 삼장(三藏)을 겸하였다. 승니(僧尼)들의 의궤와 규범과 불법의 헌장(憲章)을 조목 별로 나누어, 세 가지 사례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행향(行香)ㆍ정좌(定座)ㆍ상경(上經)에 대한 법이고, 둘째는 평일의 육시행도(六時行道)와 음식(飮食)ㆍ창시(唱時)에 대한 법이며, 셋째는 포살(布薩)에 사람을 보내서 참회하고 허물을 뉘우치게 하는 따위의 법이다.
천하의 사찰에서 마침내 이것을 법칙으로 삼고 따랐다.
도안은 늘 제자인 법우(法遇) 등과 미륵불 앞에서 서원을 세워,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그 후 진(晋)의 건원 21년(364) 1월 27일에 갑자기 기이한 승려가 나타났다. 형상은 실로 평범하고 누추하였다. 그가 절을 찾아와 기숙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절의 승방은 이미 가득 차 잘 곳이 없으므로 강당에서 거처하였다.
당시 유나(維那)가 불전에서 숙직을 하였다. 밤에 이 승려가 창문 틈으로 출입하는 것을 보았다. 급히 이 사실을 도안에게 아뢰었다. 도안이 놀라 일어나서 예를 갖추어 문안을 드렸다. 그가 찾아온 뜻을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서로를 위해서 왔노라.”
도안이 말하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죄가 깊습니다. 어떻게 해탈할 수 있습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참으로 제도할 만하군. 그러나 잠간 성승(聖僧: 부처님)을 목욕시킨다면, 원하는 대로 반드시 결과가 있으리라.”
그리고는 자세히 목욕시키는 법을 보여주었다. 이에 도안은 다음 세상에 왕생할 곳을 물어보았다. 그가 하늘의 서북쪽 허공을 손으로 가리켰다. 곧 구름이 열리면서 도솔천의 미묘하고 뛰어난 세계가 보였다. 이 날 저녁 대중 수십 명이 모두 같이 이 광경을 보았다.
그 후 도안은 목욕도구를 마련하였다. 비상한 어린아이가 수십 명의 벗들과 나타났다. 절 안으로 들어와 놀다가 잠깐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과연 이것은 성스러운 응보라 하겠다.
그 해 2월 8일에 갑자기 대중들에게 알렸다.
“나는 떠날 것이다.”
이 날 식사를 마친 후 병 없이 세상을 마쳤다. 성 안쪽 오급사(五級寺)에서 장사지냈다. 진(晋)의 태원(太元) 10년(382)의 일이다. 그때 나이는 72세이다.
∙왕가(王嘉)
세상을 마치기 전에 은둔하는 선비인 왕가가 그를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도안이 말하였다.
“세상일이란 이와 같은가 봅니다. 떠나려 함에 그대와 같은 분이 오셨습니다. 어떻습니까? 함께 떠나시겠습니까?”
왕가가 답하였다.
“참으로 그 말씀과 같지만은 먼저 떠나시구려. 나는 해결하지 못한 약간의 빚이 남아 있어서, 함께 떠날 수가 없구려.”
요장(姚萇:後秦의 王, 384~417)이 장안을 점거했을 때, 왕가는 일부러 성안에 남았다. 그때 요장은 부등(符登)과 매우 오랫동안 대치하였다. 요장이 왕가에게 물었다.
“짐이 곧 부등을 사로잡을 수 있겠는가?”
왕가가 대답하였다.
“거의 그럴 것이외다.”
요장이 진노하였다.
“그러면 그렇다 하면 될 것이지, 거의 그럴 것이란 다 뭐냐?”
마침내 왕가의 목을 베었다. 이것이 왕가가 말한 빚이다.
요장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요흥(姚興)이 마침내 부등을 죽였다. 요흥의 자(字)가 자략(子略)이다. 이것이 곧 왕가가 말한 ‘거의 그럴 것’이라는 뜻이다.
왕가의 자(字)는 자년(子年)이며 낙양 사람이다. 형상과 모습이 비루하여 마치 모자라는 사람 같았다. 본래 익살스러워 남 웃기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오곡(五穀)을 먹지 않으며, 맑게 텅 비어 기(氣)를 마시고 살았다.
사람들은 모두 종사[宗]로 그를 섬겨, ‘운수가 좋을까, 나쁠까’를 찾아와 묻곤 하였다. 왕가는 사람에 따라 응답하였다. 그의 말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모습은 광대[調戱]와 같았다. 말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과 비슷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이 지나가고 나면 대부분 증명되었다.
처음에는 가미산(加眉山)에서 문도를 양성하였다. 부견(符堅)이 대홍려(大鴻臚:禮接官)를 파견해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부견이 남방을 정벌하고자 하여 사신을 보내어 길흉을 물었으나 말해주지 않았다. 이어 사신의 말을 타고 거짓으로 동쪽으로 수백 보를 갔다. 신발과 모자를 땅에 떨어뜨리고 옷을 벗어 버리면서 말을 달려 돌아왔다. 이것으로써 수춘(壽春)에서 있을 부견의 패배를 암시하였다. 그의 선견지명이 이와 같았다.
요장이 왕가를 살해하던 날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언덕 위에서 왕가를 보았다는 글을 요장에게 보냈다. 도안의 왕가 같은 신인(神人)과의 은근한 계합이 모두 이와 같았다.
도안은 앞서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서쪽 나라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함께 강론하고 분석하기를 염원하였다. 늘 부견에게 그를 모셔오기를 권하였다. 구마라집도 역시 멀리서 도안의 풍모를 듣고, ‘이 사람은 동방의 성인이다’라고 생각하여, 항상 멀리서 그에게 예배하였다.
과거 도안이 태어났을 때, 왼쪽 팔뚝에 넓이 한 치 가량의 가죽이 붙어 있었다. 잡아당기면 위아래로 움직였으나 손만은 꺼낼 수 없었다. 또한 팔꿈치 바깥쪽으로 네모난 살점이 붙었다. 그 위에 통자 무늬가 있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인수(印手)보살이라 일컬었다.
도안이 세상을 마친 16년 후에야 구마라집이 비로소 중국에 이르렀다. 도안과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한탄이 끝이 없었다.
도안은 일찍부터 경전을 독실하게 좋아하고, 뜻한 바가 법을 베푸는 데 있었다. 초청한 외국 사문 승가제바(僧伽提婆)ㆍ담마난제(曇摩難提)ㆍ승가발징(僧伽跋澄) 등이 수많은 경전을 번역한 것이 백만여 글자에 이르렀다. 그는 항상 법화(法和)와 더불어 소리와 글자를 가려내서 정하고, 글 뜻을 상세하게 파헤쳤다. 새로 나온 수많은 경전들이 이때에 바로잡혔다.
손작이 쓴 『명덕사문론(名德沙門論)』에 전한다.
“석도안은 사물에 너르고 재주가 있으며, 빼어나게 경전의 이치에 뛰어났다.”
또한 그를 위한 찬(贊)에 전한다.
만물이 넓고 넉넉하다면
사람은 본래 많은 것을 주재하는 법
깊고 깊은 석도안은
오로지 이를 겸하여 갑절로 더할 수 있어서
명성을 연과 농[汧隴:陜西]지방에 드날렸고
이름은 회수와 동해까지 치달렸으니
그의 형체는 비록 풀로 변하였으나
아직도 항상 살아 있는 것 같아라.
또 다른 기록에 전한다.
“하북지방에 따로 축도안(竺道安)이 있어 석도안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습착치가 편지를 축도안에게 보냈다고도 한다. 그러나 도안은 본래 스승을 따른 축(竺)이란 성을 후에 석(釋)으로 바꾸었다. 그러니 세간에서는 그의 두 가지 성을 보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