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모성월과 성모신심 · 성모님의 모든 것 **
5월은 성모성월이다.
교회는 매년 5월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고 다른 어느때보다도 열심히 자주 성모를 공경하고 성모의 모범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와 은총의 삶을 살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성모성월을 맞아 성모성월과 성모신심,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본다.
성모성월의 의미와 유래
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신앙의 대상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공경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
공경은 이미 2세기부터 시작되었으며 4~5세기경 동방교회에서 마리아의 축일이 제정돼 전례적인 공경이 시작됐다. 특히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임을 확인하고 공식적으로 이를 선언함으로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널리 보급되고 권장됐다.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축일은
모두 600여 가지 이상이 되며 그 중에는 온 세계 교회가 다함께 거행하는 축일과 일부 지방 또는 교구나 수도단체에서만 거행하는 축일이 있다.
아울러 공식적인 교회의 신심은 주로 미사전례와 성무일도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교회는 이처럼 전례적이고 공적인 공경외에도 개인의
공경과 신심 행위를 승인하고 권장해왔다. 묵주 기도나 스카풀라, 기적의 메달 등의 개인적인 신심들이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돼왔다.
성모성월은 먼저 동방교회에서 기념되기 시작했다. 이집트 중심의 콥틱 전례에서 고유한 성모성월을 지내기 시작한 것은
11세기에 와서였다. 콥틱 전례력에서 키악(Kiahk)이라는 네 번째 달은 12월 10일부터 1월 8일에 해당하는데 그 중심은 성탄이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기념한 성모성월은 예수 성탄과 그 모친을 찬미하기 위한 것이었고 신자들은 마리아와 관련된 기도서로 매일 기도를 바쳤다.
13세기부터 8월을 성모성월로 정한 비잔틴 전례는 8월 15일을 성모 안식 대축일로 기념했는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더 발전하지는
못했다. 서방교회에서는 중세부터 성모성월이 시작됐다. 5월을 성모 마리아의 달로 봉헌하는 관습은 13세기부터 시작됐고 5월과 성모 마리아를
처음으로 연결시킨 사람은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10세였다.
로마에서는 성 필립보 네리(1515~ 1595)에 의해 5월을
미약하게나마 성모성월로 지내지기 시작했는데 네리는 젊은이들에게 한 달 동안 성모 마리아에게 꽃다발을 바치거나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선행으로
마리아를 공경하도록 했다. 17세기 말엽 마리아 운동과 함께 5월이 성모성월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677년 피렌체 부근의 피에솔레 도미니코회
수련원에서 특별한 모임이 생겼고 이 단체는 5월을 성모에게 봉헌하고 신심을 고취했다. 1701년부터는 한 달 동안 매일 축제를 지냈는데 이때
성모호칭기도를 노래로 바치고 마리아에게 장미화관을 바쳤다. 성모성월 신심행사는 18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프랑스, 스페인에 이어 19세기초
벨기에와 스위스, 19세기 중엽에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도 거행됐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성모성월은 예수회의 디오니시가 1725년
베로나에서 「마리아 성월」을 출판하면서 시작돼 로마, 밀라노 등으로 확산됐다. 이 책에서는 집과 일터에서 성모성월에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
제시돼 있었다. 19세기 중엽에 들어 유럽 전역과 아프리카까지 성모성월이 확산됐고 교황 비오 7세(1800~1823)의 성년 대사 선포와 함께
널리 퍼지게 됐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가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선포한 뒤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은 절정에 달했고
성모성월 행사는 공적으로 장엄하게 거행됐다.
성모신심
한국교회가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를 주보로 모시게 된 것은 1841년 8월 22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허락을 얻으면서 였다. 제2대 조선교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가 1838년 12월 1일 그에대한 윤허를 청했고 3년여만에 교황의 인가가 떨어진
것이다. 이후 1846년 11월 2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무염 성모 성심회」가 당시 선교사제였던 다블뤼 신부에 의해 설립되는 등 한국교회
신자들의 성모신심 운동은 체계와 조직을 갖추기 시작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교회 창립시부터 보여진 한국신자들의 돈독한 성모신심
활동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자료에 의하면 한국교회가 태동된 서학 연구시기에 나타나고 있는 한문본 서적중에는 「매괴십오단」이란 신심서와
「천주성교일과」등의 기도서가 있었고 신유박해 때 형조에 압수돼 소각된 서적들 중에는 성모관련 한문본 한글본 책들이 무수히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중에는 특히 한글본 성모 관련 서적들도 상당 부분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이는 박해 상황 안에서도 열렬했던 당시 신자들의
성모신심을 엿볼 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무염 성모 성심회」창립으로 신자들은 주마다 정기회의를 통해 정한 기도문을
바쳤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곤 했다. 이 단체는 오늘날 각 본당 안에 남아있는 성모회의 요체가 됐다.
1862년 앵베르 주교가 번역 발행한 「텬쥬성교공과」등은 신자들의 성모신심을 더욱 고양시켰다. 이 기도서는 일상기도와 주일 그리고 전례주년내 성모축일에 바치는 기도문들을 수록하고 있어 1962년 바티칸 공의회까지 전례 성모신심의 기도서이자 지도서 역할을 하게된다. 이외에 「주년첨례광익」(1865년) 「성모성월」(1887년) 「매괴성월」(1914년) 등의 잇따른 발행은 신자들에게 성모의 축일과 구원사 안에서의 위치를 이해시켰고 성모성월 및 성모의 덕행에 대한 인식을 넓혀 나갔다. 이러한 흐름속에 1898년 명동대성당은 무염시태 성모께 봉헌됐고 「성모무염시태」교리선포 1백주년이 되는 1954년에는 한국교회가 다시 성모마리아께 봉헌되는 등 성모마리아와 관계된 한국교회 역사는 계속 이어졌다.
성모신심 단체
레지오 마리애: 대표적인 성모신심 단체로 1921년 9월 7일 아일랜드 더블린 시에서 빈민원의 환자방문 계획을
세우기 위해 프랭크 더프를 비롯한 20대의 젊은 여성 15명이 자비의 모후라는 이름으로 첫번째 모임을 가진 것이 시작으로 처음엔 자비의 모후회로
불렸으나 1925년 11월 레지오 마리애라는 명칭을 채택했다. 국내에는 1953년 5월 광주교구장 서리 헨리 현신부가 산정동본당 신자들과 함께
치명자의 모후와 평화의 모후라는 이름으로 모여 첫 까떼나를 바친 것이 첫 걸음이다.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푸른군대라고 불리우던
신심단체로 1947년 미국의 헤롤드 콜갠 신부에 의해 창설됐다. 콜갠 신부는 구 소련의 회개를 요청하며 붉은 군대 소련에 대항해 성모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푸른군대 대원이 되자고 외친 것이 그 시작이다. 단원들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일상생활의 고통을 참으며
희생하고 마리아의 티없는 성심께 대한 신심을 일으켜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께 봉헌하는 생활을 한다. 국내에는 1964년 하 안토니오 신부에 의해
도입됐다.
국제 마리아의 사업회: 포꼴라레 라고도 부르는 이 단체는 1943년 12월 7일 이탈리아 트렌토에서 키아라 루빅에 의해
시작된 평신도 사도직 운동단체로 국내에는 1969년 진출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사회 속에서 사랑의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활동하고
있다. 포꼴라레는 불, 벽난로를 뜻하는 말로 가족들이 불을 피워 놓고 모여 앉던 장소를 뜻하며 가정의 따뜻한 분위기를 상징한다. 포꼴라레 운동을
마리아의 사업회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께서 신자들을 성모님과 닮게 해준다는 점에서 또한 마리아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세상에 주는 도구가 되게
하였다는 의미에서 연유한다.
성모의 기사회: 성모님의 충실한 기사로 열심히 사도직을 수행하고 특히 죄인들의 회개와 이교인,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며 성화를 이룩하려는 신심단체로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와 동료수사 6명에 의해 1917년 10월 16일 로마의
꼰벤뚜알 프란치스꼬 수도원의 성 테오도로 국제 대신학교에서 창설되었다. 국내에는 1976년 대구대교구장 서정길대주교의 승인으로 설립됐다.
성모님의 모든 것
마리아라는 이름의 어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첫째가 모세와 아론의 누이였던 「미리암」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이름은 「뮈르」와 「얌」의 복합어로 뮈르는 이집트어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얌은 히브리어로 「야훼」의 축소형이므로 마리아는
「야훼의 사랑하는 사람」또는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이 된다. 둘째는 '마롬'이라는 히브리 말로 그 뜻이 '들어높인자'라는
뜻이다.
마리아의 부모는 요아킴과 안나로 요아킴은 요셉의 부친인 야곱의 형, 안나는 다윗왕의 직계 자손으로 나자렛에서 출생했다. 그리스도교 예술에서는 두 마리의 비둘기가 들어 있는 새장을 손에 들거나 어린 마리아를 안은 모습으로 표현된다. 축일은 7월26일. 성 안나에 대한 공경은 성모공경과 연관하여 6세기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14세기에 대중화되었다. 요아킴과 안나는 구약의 메시아 기대의 상징이며 마리아와 함께 신약에 소개된 것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는 역사의 한 분기점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성모님과 관련된 축일
성모 마리아는 구세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와 깊이 연결돼 전례 안에 들어와
있다. 성모님께서 보여준 신앙의 모범을 강조하고 신앙인들이 그 모범을 본받아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하기위해 제정된 성모님과 관련된 사건들을
기념하는 날로 그리스도의 구원신비가 마리아의 삶 안에서 얼마나 훌륭하게 구현되었는지 가르쳐 주며 신자들이 자기 존재안에서 실현해야 할 신앙인의
표본으로서 성모님을 제시하는 것이다.
천주의 모친 성마리아(1월 1일) 원죄없으신 잉태(12월 8일) 성모승천(8월 15일)은 대축일이다. 이중 마리아
성탄축일(9월 8일)과 성모승천대축일(8월 15일)은 구원의 열매로서의 마리아를 기억하는 축일로 원죄없으신 잉태가 구원의 첫 열매인 마리아
신비의 출발점이라면 성모승천은 마리아의 마지막 지점으로 성모님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거행하는 축일이다. 따라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 대축일과 성모승천 대축일은 마리아 안에서 완수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의 두 기둥이다.
마리아의
축일은 대체로 성모 마리아에 대해 「교회의 원형」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마리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철저하게 순종함으로써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게 따른 사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마리아 축일을 거행하면서 신앙의 가장 완전한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자기 존재와 삶 안에서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리아에 관한 교의는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이며 하느님의 모친이고 원죄에 물들지 않았으며 사망 후 승천했다.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 루카복음과 마태오복음의 성서적 근거(루카 1,34 : 마태 1,20~25)에 따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잉태를 정통신앙으로 고백한다(사도신경). 동정녀 잉태와 탄생은 그리스도로 인한 하느님의 구원 행위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에서 나오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나아가 마리아는 평생 동정으로 지냈다는 전통이 에페소 공의회(431년) 때 공인됐으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년)때 신조 안에 영원한 동정이라는 표현으로 삽입됐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오랜 그리스도교
신앙고백문들은 한결같이 마리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선포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교의로 선포됐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었다. 이 교의는 그 후 칼체돈 공의회 등을 거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재확인됐다. 이 칭호는 성자와
마리아의 밀접한 관계에서 연유된다. 마리아가 출산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지닌 만큼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다.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죄를 범해 인간은 누구나 원죄의 멍에를 지고 있지만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됐다. 마리아 역시 여느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지만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느님의 은총으로 무죄성의 특권을 지닌다. 마리아는 구세주의 모친으로서 그리스도께 완전히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의 승천: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교의는 아들 성자의 영광과 어머니의 현양,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기쁨을 표현한다.
세례받은 이들은 지금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의 천상의 영광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 승천은 마리아가 모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예형이요,
모범으로서 죽음을 극복했음을 의미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4년 반포된 교회헌장 8장에서 마리아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교리 정립의 근거는 무엇보다 성서적이며, 인간학적 측면에서 마리아를 이해하면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적극 협력한 마리아의 순종과 희망과
사랑의 행위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아울러 마리아론으로 인한 교파간의 대립을 의식하고 과장되고 감상적인 마리아 신심에서 벗어나기를 권고한다.
무엇보다 이는 이전의 공의회와 달리 사변적인 마리아론의 논의를 지양하고 교회 전체가 이해할 수 있는 확실하고 기본적인 교리만을
제시하고 있다. 즉 마리아를 추상적이며 개념적인 신학적 문제가 아니라 이해와 사랑과 공경과 모범의 대상인 하나의 인격체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리스도와 관련해 마리아는 신적 모성 안에서의 중재적 협력, 주님의 종으로서의 순종이 강조되고 있으며 교회와
관련해서는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모성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부름받은 교회의 탁월한 지체요, 교회를 위한 덕행과 봉사와 사도적 복음사명의
모범이며, 동정이고 어머니인 교회의 원형이요, 종말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
성모송: 성모님께 드리는 교회의 기도로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는 기도. 천사의 인사와 엘리사벳의 인사로 구성된 성모송의 첫째 부분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 찬사이며 둘째부분은 죽음과 죄가 지배하는 인생의
비극적인 상황에서 자기의 나약함을 인정하며 도움을 청하는 교회의 기도이다. 성모송은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고 계시는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이 담긴 기도이다.
성모찬송: 살베 레지나, 하례하나이다로 시작하는 이 기도는 대개 5월에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그 끝에
하는 기도로 11세기에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만들어진 기도이다.
삼종기도: 아침 낮 저녁 정한 시간에 마리아의 영광과 강생의 신비를
찬미하기 위하여 바치는 기도로 삼종이란 종을 세번 친다는 뜻으로 종을 세번씩 치고 조금의 여유를 갖고 있다가 다시 계속해서 종을 친다. 이 종을
치는 관습은 11세기 십자군이 생겼을 당시 이들의 승리를 위해 종을 치며 삼종기도를 바치던 데서 유래했다.
묵주기도: 라틴어
Rosarium(장미 꽃다발)에서 유래한 것으로 초기 교회 당시 이교인들이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뜻으로 머리에 엮은 관을 씌우는 습관이 있었는데
초기 순교자들도 꼴로세움 경기장에서 사자들의 먹이가 되기 위해 나아갈 때 장미꽃으로 엮은 관을 쓰고 순교함으로써 하느님께 자신을 바친다는 차림을
했고 다른 신자들이 몰래 순교자들이 썼던 장미관을 모아 장미꽃 한송이에 기도 한 가지씩을 바쳤다. 또한 이집트 사막의 은수자들은 작은 나락이나
돌들을 엮어 가지고 다니면서 기도를 드렸는데 이렇게 영적인 꽃다발을 바치는 습관에서 묵주의기도가 생겼다. 대표적인 성모신심 기도로 성모님은
1917년 파티마에서 발현하셔서 자신을 매괴의 모후라고 선언하고 세계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매일 묵주기도 15단을 바칠 것을 간곡히
부탁하셨다.
성모호칭기도: 성모를 공경하는 여러 칭호들을 부르며 성모님께 드리는 일련의 탄원기도로 현재의 형태는 12세기에 알려져
있던 고대의 성모호칭기도를 간단하게 변형 시킨 것으로 15~6세기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급속히 전파되면서 1587년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인가되고 대사가 허락되었다.
마리아의 노래: 예수를 낳으리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예고를 받은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몸으로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때 그녀의 축복의 말에 응답하면서 부른 찬미기도로 라틴어 마니피캇(찬미하다)으로 시작되어 마니피캇이라고 부른다. 이노래는 과거에
이스라엘 안에서 보여준 하느님의 위업을 제시하는 가운데 그분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보증해 준다.
스카풀라: 다갈색의 4각형 작은 헝겁 두 장을 끈으로 묶어 목주위 앞뒤로 늘어뜨려 착용하는 것으로 가르멜산
성모성심회(가르멜회 제 3회)의 휘장이다. 1251년 7월 16일 성모께서 가르멜회의 총장인 성 시몬 스톡 앞에 출현하시어 이것을 착용하고 죽는
자의 구원을 보증하시면서 성모성의라 불리게 됐고 이 스카풀라에는 많은 특권이 주어졌다.
기적의 메달: 성모님께서 1830년 1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성 빈첸시오 바오로 자비수녀회 내 소성당에 발현하여 가타리나 라부네 수녀에게 직접 준 메달로 이 메달을 지니고 있는
자에게 은총을 풍성히 내릴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1832년 최초의 메달이 주조된 이래 이 메달을 통해 많은 치유와 회개가 잇달아 기적의 메달로
불리게 됐다.
해성·효성: 가톨릭계 국내 학교 중에 해성이나 효성이란 이름이 유난히 많은데 이 말은 바로 성모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모님을 바다의 별, 새벽별로 부르는 것은 바다나 어두운 밤거리에서 표류하는 사람들이 동서남북을 모르면 북극성을 바라보고 길을 찾는
것과 같이 인생에서 성모님은 주보로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성모칠고: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으신 슬픔과 고통을 일컫는 말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절정을 이룬다. 성모칠고는 시메온이 예언한 고통, 이집트 피난, 성전에서 소년 예수를
잃음, 그리스도의 매맞음과 가시관 쓰심, 십자가에 못박히심,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 무덤에 묻히심 등을 말한다.
성모칠락:
성모님 일생에 있어서 성서에 기록된 특별한 일곱가지 기쁨을 기념하는 신심으로 주의 탄생 예고, 엘리사벳을 방문함, 예수의 탄생, 예수 공현,
성전에서 예수를 다시 찾음, 예수 부활, 성모 승천이다.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신심: 20세기 들어 전 세계에 보급된 신심으로 1917년 파티마 발현이 큰 계기가 됐다. 1799년 비오 6세가 이 축일을 승인했고 1861년 비오 9세는 미사와 성무일도를 인정했다. 비오 12세는 1945년 이 축일을 전교회 축일로 보현화시키는 한편 이에 앞서 1942년 인류를 성모성심께 봉헌했다. 이 신심은 파티마 성모신심, 「푸른군대」와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성모 발현
성모 발현이란 성모 마리아가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방법을 초월한 특이한 방법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성모의 메시지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와 호소, 간청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친이자 교회의 어머니로서 하느님의 뜻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해주기 위한 것이다. 세상의 죄악을 슬퍼하고 회개하며
끊임없이 보속하고 기도하라는 것이 바로 성모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성모 발현과 메시지, 기적 등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회개와 보속, 신앙의 활성화를 가져온다는데 참된 의미가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모 발현
지금까지 교회에서
인정하고 있는 발현지는 멕시코의 과달루페(1531), 프랑스의 파리(1830) 라 살레트(1846) 루르드(1858) 퐁멩(1871),
아일랜드의 노크(1879), 포르투갈의 파티마(1917), 벨기에의 보랭(1932-2) 바뇌(1933) 등이다. 이들 지역에서 이뤄진 성모
발현은 모두 교회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하지만 1990년 이후 순례자가 많아진 유고슬라비아의 메주고리예는 아직 교회의 인정을 받지못하고 있다.
곳곳에서 성모가 발현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1928년부터 1975년 사이에 발생했던 성모 발현들 중에서 교회의 공식 인가를 받지 못한 성모
발현이 무려 232건에 달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 지역의 발현과 관련해서는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라야 할 것이다.
루르드 성모 발현: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발현(1858년)에 대해 교구 주교와 본당 신부의 태도는 소극적이거나
저의를 품을 정도였다. 당시 경탈은 베르나데트를 죄인처럼 다루었고 그의 부친을 협박했다. 그러나 여론에 밀린 주교는 신학자 과학자 의학자 등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만들었고 3년 이상 이 사건을 정밀하게 조사시칸 결과 1862년 공인할 수 밖에 없었다.
파티마 성모 발현:
포르투갈 파티마 성모 발현(1917년)에 대한 정식 조사가 시작된 것은 1922년 5월이다 첫 발현 후 5년만에 조사위원회가 구성된 셈이다.
레이야르의 요셉 실바 주교는 7년간에 걸친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6개월동안 면밀히 검토한 뒤 1930년 10월 13일 성모 발현 13년만에
공인했다. 당시 교황 비오 11세는 보고 서류를 직접 읽고 같은 해 10월 1일 파티마 순례자에게 특별 은사를 내려주기도 했다.
바뇌 성모 발현: 벨기에 바뇌 성모 발현(1933년)에 대한 교회 당국의 태도 역시 소극적이었다. 레에즈 교구장 겔호프 주교는
가톨릭계 신문이나 성직자에게 성모 발현에 대해 침묵을 지키도록 주의를 주면서 조심스럽게 의사와 신학자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구성, 1942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교회법에 의거한 면밀한 조사를 지시했다. 겔호프 주교는 1차로 1942년 바뇌 성모에 대한 특별한 공경을 공인하고
1949년 8월 22일 또다시 이 발현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므로 믿어도 좋다는 허가를 내렸다. 이 사실은 교황청에 보고됐으며 후에 교황청에서도
공식 인정하게 됐다.
이밖에도 멕시코 과달루페 성모발현(1531년)이 25년만에 공식 인정을 받는 등 몇몇 사례들이 교회의 공인을
받았으나 반대로 「사실무근」「신빙성 없음」「거짓」등으로 판명돼 교구장이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조사 중에 있는
경우도 많다. 1947년부터 76년까지 이탈리아 몬티키아라 성모 발현, 1961년 스페인 가라반당 성모 발현 등이 아직 공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성모 발현과 메시지
멕시코 과달루페: 1531년 12월 9일 멕시코가 스페인에 정복 당한지 10년째 되는 해다. 정복자들의 폭정에
시달리던 원주민들이 이교신의 모친을 위해 신전을 세웠던 페베약 언덕에서 발현. 과달루페란 말은 「뱀의 머리를 짓밟는 분」이란 뜻의 인디언
말이다. 성모님이 「과달루페의 성 마리아로 불리길 원한다」는 메시지를 주셨는데 이 말이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옮겨져 순례지의 명칭이 됐다.
인디언 피부에 장미빛 옷과 푸른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손은 합장한 채 고개를 약간 숙인 모습으로 스페인 식민치하에서 맨 처음 입교한 원주민 중
한명인 55세의 환 디에고에게 발현했다. 『나는 평생 동정이며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어머니임이 알려지기를 원한다. 나를 찾는 이들에게 나의
동정심을 보여 주도록 정성을 다해 이 자리에 성당을 짓기 바란다』며 디에고의 망토에 성모님의 모습을 새겨주었다. 발현 후 7년 사이에
800만명의 인디언들이 개종했고 전 미주대륙에 복음화의 기틀을 잡는 계기가 됐다.
프랑스 파리 뤼드박: 1830년 프랑스 파리의
위드박에서 발현.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사회는 가치관의 혼란으로 신심이 사라지고 있었으며,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심했다. 지구위에
서서 두 팔을 활짝 펼친 모습. 성 빈첸시오 데 바울로의 「사랑의 딸」수녀원 청원자였던 성녀 카트린느 라부르에게 발현했는데 당시 주변에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십자가가 멸시를 받으면 모든 인간은 더욱
고통에 잠길 것이다. 내가 보여준 모상대로 메달을 만들어 지니고 다니는 사람은 큰 은총을 받을 것이다. 또 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에게도 큰
은총을 충만히 내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메달은 급속도로 보급되었고 이를 통해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기적의 메달」이라 불리게 됐다. 24년
후인 1854년 비오 9세가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했고 카트린느는 1947년 7월 17일 시성됐다.
프랑스
라 살레트: 1846년 프랑스 가르가스산 기슭의 라 살레트에서 발현. 과학의 발달로 신앙이 뒷전으로 밀리고 자유사상가와 무신론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던 시기였다. 순백색의 부인복에 황금색 앞치마를 둘렀다. 어깨에는 장미술이 달린 망토를 걸치고 장미 면류관을 쓴 모습으로 11살의 막시망
지로와 15살의 멜라니 칼바에게 발현. 성모님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죄인들의 화해자」라 밝히고 『회개하고 잘못을 뉘우쳐 하느님과 화해하라.
내 말을 잘 들으면 축복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 했다. 그 중에서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과 예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을 특별히 지적하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큰 흉년이 들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람들이 이 메시지를 무시하자 1846년 이해 혹독한 흉년이
드어 유럽에서 100만명 이상이 굶어죽고 각종 혁명과 폭동이 일어나고 1870년 보불전쟁까지 터지자 회개의 순례객이 몰려들었다.
프랑스 루르드: 1858년 2월 11일 프랑스 루르드 서쪽에 있는 마사비엘동굴에서 발현. 19세기 들어 극심해진 자유주의 사상
등의 영향으로 지식층의 교회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고 있었다. 흰옷을 입고 푸른색 허리띠를 둘렀다. 오른팔에 묵주를 늘어뜨리고 양손을 가슴에 모은
모습으로 가난한 농부집안의 읽기도 쓰기도 못했던 14세의 베르나테드에게 19회 발현. 자신을 「원죄없으신 잉태」라고 밝힌 성모님은 『회개하라.
회개하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당에 입을 맞추어라…』라고 말하며 기도와 보속, 생활의 회개를 촉구하고 특히 묵주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매년
수백만명이 순례하고 있고 수천 건의 기적이 일어났다.
프랑스 퐁멩: 1871년 1월 17일 프랑스 쁘리따뉴 메엔느 북쪽의 작은
마을 퐁멩에서 발현. 프러시아가 프랑스 전역을 침략,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웟으며 퐁멩의 청년 39명이 전쟁터로 떠나게 된 시점이었다. 허리띠
없이 별이 빛나는 짙은 하늘색 부인복에 검은 면사포를 쓰고 있었다. 핏빛의 그리스도가 못박힌 붉은 십자가를 양손에 잡은 모습으로 군에 간 형
아우구스티노를 위해 기도하던 12살의 유젠느 바르바뎃트와 11살의 요셉에게 발현. 하얀 깃발에 『나의 어린이들아 언제나 기도하라. 하느님께서 곧
너희들의 기도를 들으시리라. 나의 아들은 너릐 기도를 즐거이 허락하신다』라는 글자가 나타났다. 1월 28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징집되어간
39명의 마을 청년들이 무사히 돌아왔다.
아일랜드 녹: 1897년 8월 21일 서부 아일랜드의 녹에서 발현. 가혹한 식민지 형법과
엄청난 소작료 등으로 착취당하며 대기근이 휩쓸고 있어 고통받고 있던 시기였다. 흰옷을 입고 기도하는 가운데 오른편에는 성 요셉이, 왼편에는 사도
요한이 서있는 모습이었다. 제대 위에는 어린 양이 있고 그 주위에는 천사들이 돌고 있는 광경이 6~75살 마을 주민 15명이 목격. 말씀은
없었지만 발현모습을 통해 구원의 위대한 주제를 알려주고 있다. 어린 양의 신비와 함께 성모님은 교회의 원형이라는 모습을 구체화기키고 있다. 성
요한은 교회의 옹호자요 전파자, 성 요셉은 자부적 사랑, 제대 뒷편의 십자가는 희샐, 제대는 신앙에 필요한 힘의원천을 계시하며 무엇보다
미사성제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1979년 발현 10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했다.
포르투갈
파티마: 1917년 5월 13일 포르투갈 레이리아교구의 작은 마을 파티미에서 발현. 세계 제1차 대전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발현 때마다
조금씩 달랐으나 흰옷에 흰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묵주를 든 양손은 가슴에 모으고 맨발로 구름을 밟고선 모습으로 가난하고 순박했던 양치기인
루치아(10세)와 사촌동생 히야친타(7세)와 프란치스코(9세)에게 여러 차례 발현했다. 자신을 「로사리오의 여왕」이라 밝히고 세계평화를 위해
매일 묵주의 기도를 바칠 것, 죄인을 위해 희생할 것, 성모성심을 공경할 것을 요청했다. 특히 『러시아를 나의 죄없는 성심께 봉헌하고 매월 첫
토요일에 보속의 영성체를 하라…』고 말했다. 1917년 10월 소련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1942년 10월 교황 비오 12세가 전 세계
특히 러시아를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성심께 봉헌했다.
벨기에 보렝: 1932년 말 벨기에 남부 보렝에서 발현.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했으며 주민의 반 이상이 공산주의 사상에 현혹돼 있어 지역이 전체적으로 냉담상태였다. 흰옷에 황금관을 쓰고 양손을 들어 티없는 황금빛 성심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9~15살의 다섯 아이들에게 발현했다. 「원죄없이 잉태된 티없는 동정녀」「천주의 모친 하늘의 여왕」이라 밝히고 『기도하라,
기도하라, 많이 기도하라.… 나는 되인들을 회개시키겠다.… 나의 아들을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희생을 바쳐라』고 요청했다.
보렝의 주민들이 냉담을 풀었고 첫해 순례자가 200만명이 넘었다. 병의 치유와 함께 영적인 치유와 되인들의 회개가 줄을 이었다.
벨기에 바뇌: 1933년 1월 15일부터 3월 2일까지 독일 국경에인접한 벨기에 바뇌에서 발현. 히틀러가 정권을 잡던 혼란한
시기였다. 루르드에서의 모습과 같이 흰옷에 푸른 띠를 두르고 있었다. 고개를 약간 왼족으로 숙이고 합장한 채 오른팔에 묵주를 늘어뜨린 모습으로
비신자였던 12살의 마리에트 베코에세 발현했다. 자신을 「가난한 자의 동정녀」라며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왔다고 밝히고 기도를 많이
하라고 요청했다. 1천개 이상의 성당이 「병자의 성모」등의 호칭으로 봉헌되었고 바뇌 성모 국제기도회원이 전세계에 수백만명을 넘었다.
성모성월 신자들의 자세
성모성월 신심은 역대 교황들에 의해 그 중요성이 여러 차례 강조돼왔다. 성모성월을 기념하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신앙의 모범을 따르기로 다짐하는 한편 하느님의 은총를 성모 마리아를 통해 전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전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은 매년 이맘때면 성모성월을 기념하는 예절을 특별히 거행한다. 그럼으로써 성모의 모범을 따라 선행과 기도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은총을 얻어주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성모성월신심을 위해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규정한 전례 예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각 본당이나 가정마다 있는 성모상을 아름답게 꾸미고 말씀의 전례 양식을 빌려 재구성한 성모의 밤 등 각종 행사를
거행하고 묵주 기도를 다 함께 바치는 등의 기도 모임을 갖곤 한다. 하지만 교회는 성모성월 신심, 성모신심이 자칫 발현이나 기적에 치우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이보다는 전례적인 공경 안에서 이뤄질 것을 강조했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교서를 통해 『성모성월
신심이 엄격한 의미에서는 전례에 속하진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전례적 예배행위로 간주할 만한 신심』이라고 강조했다. 교황 바오로 6세도 마리아
신심운동이 기적이나 발현에 치우치지 말고 전례적인 공경 안에서 바르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5년에
발표한 교서에서 『성모성월은 전세계 신자들이 하늘의 여왕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달』이라며 『교회 공동체와 개인이나 가정 공동체는 이 기간 동안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마리아에게 드리고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마리아의 숭고한 사랑을 찬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톨릭신문[ 성모성월 특별기획 1] 구세주의 어머니 마리아
가톨릭신문 [성모성월 특별기획 2] 성모 발현과 메시지
가톨릭신문 [성모성월 특별기획 3] 요한 로튼 신부의 특별 마리아세미나(요약)
가톨릭신문 [성모성월 특집 1] 성모성월의 의미와 유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