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정
투어일자: 2015.5.24.(토)
참석자: 통통한토끼
투어목적지(경로): 대전> 공주> 부여> 홍산면, 내산면, 외산면> 성주산> 옥마산> 청양> 대전
2. 감상 및 투어 포인트:
내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서 미리미리 부처님을 뵙아뵙고자 오늘은 절터를 찾아가봅니다.
말그대로 절터인 까닭에 건물은 없고 절이 있던 자리에 가봅니다. 부처님도 스님도 없는 절터인 까닭에 진리는
둘째치고 세월에 맞춰 흥망성쇠가 오고 갔음이 느껴지니 아주 조금은 뭔가 하나 건진듯합니다.
집이 대전이라 부여과 보령에 못가본 절터를 골라 오늘 한번 떠나봅니다.
3. 견문 및 사진 기타 기록:
< 아침 일찍 아니 새벽에 출발했찌만 이미 해가 중천입니다. 6시 출발했는데도 환해서...그 햇살이 눈부십니다>
< 공주 금강변>
<웅진수신지단 이라는데 웅진의 수신이 혹시 곰아닌가요?? 곰나루터의 전설~~~>
< 솔밭과 아침햇살이 참 좋았는데 사진에는 표현이 안되는게 실력의 한계를 느낍니다.>
[ 곰나루 전설 : 네이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아득한 옛날 지금의 곰나루 근처 연미산(燕尾山)에 큰 굴이 있었다. 이 굴에는 커다란 암 곰이 한 마리 살았다.
어느 날 잘 생긴 사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물어다 굴속에 가두었다. 곰은 사내를 굴에 가둬 놓고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
그리고 짐승을 잡으면 굴속으로 가져와 사내와 함께 먹었다. 곰과 함께 굴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사내는 기회를
보아 도망치려 하였다. 하지만 곰이 밖으로 나갈 때에는 바위로 굴 입구를 막아놓아 하릴없이 굴속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이렇게 하루 이틀을 지나서 어느덧 이 년 동안 곰과 함께 살게 되자 사내는 곰과 정을 나누게 되고, 그 결과 곰이
새끼를 낳았다.
그로부터 또 일 년이 되어 둘째를 낳자 곰은 사내를 믿기 시작하였다. 사내가 새끼들과 어울려 즐겁게 노는 것을
보면서 더더욱 사내에 대한 믿음이 쌓여갔다.
그 날도 곰이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곰은 전과 달리 굴 입구를 막지 않았다. 자식이 둘이나 되는데 설마 도망가랴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사냥터에서 한참 사냥을 하고 있는데 멀리 사내가 강변 쪽으로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곰은 서둘러 굴로
돌아와 두 새끼를 데리고 강변으로 달려갔다. 사내는 이미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곰은 강가에 다다라 사내를
향하여 돌아오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사내는 곰의 애원을 외면하고 강을 건넜고, 그것을 보고 있던 곰은 새끼들과 함께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사내가 건너온 나루를 고마나루 또는 곰나루[熊津]라고 불렀다 한다
< 공주에서 금강을 옆에 끼고 651번을 신나게 달려 부여읍내를 지나쳐 홍산면으로 갑니다. 사실 정림사지도 있지만
몇번 들렀던 곳이라서 패스하고 홍산동헌과 객사를 못본탓에 바로 직행합니다.~~~>
< 홍산면 읍소재지...... 이때가 아침 7시라서....한적합니다. 아니 이미 농부들은 모두 논으로 밭으로 나갔을 시간이죠>
<객사 대문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나의 애마~~>
[객사: 네이버 두산백과]
객관(客館)이라고도 한다. <고려사>에는 고려 말 1279년(충렬왕 5) 8월부터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는
고려 초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으며,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관찰사가 일을
보는 동헌보다 격이 높았으며, 관리는 이곳에 머물면서 교지(敎旨)를 전하기도 하였다.
구조는 본사(本舍)를 중심으로 좌우에 익사(翼舍)를 두고, 앞면에는 내(內) ·중(中) ·외(外) 3문이 있으며, 옆에
아영청(亞營廳) ·무신사(武臣祠) 등 부속건물을 두었다. 본사는 기와와 돌을 깔고 좌우의 익실은 온돌을 깔았다.
특히 전주객사의 경우, 대청을 양청(凉廳), 방을 오실(澳室)이라 하였는데, 이 두 구조가 공존하면 오량(澳凉) 구조라
하였다. 이 구조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지역에 따라 다르며, 남쪽은 대부분 임진왜란 뒤에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아전이 관리하였는데, 고려 때에는 객사사(客舍史)라는 아전이 담당하였다.
일제 때 조선시대의 관청들을 없애버린다는 식민지정책에 따라 많은 객사가 불하되고, 다른 목적으로 쓰이면서
구조상의 변형이 있었다. 남아 있는 객사는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으로, 강릉의 객사문(客舍門:국보 51), 전주객사(보물 583),
고령의 가야관(伽倻館) 등은 조선 전기에, 통영객사 ·여수객사 등은 조선 후기에 지은 것이다.
전국의 객사도 한번 투어주제로 잡아 볼만하겠다.
< 홍산면 객사내에 있는 만덕교비.... 만덕교가 궁금하면..... 500원...ㅋㅋㅋㅋ 사실 만덕교도 가보고 싶었으나 오늘은
탑이 주제라서...다리도 따로 날잡아 봐야겠다. 지난번 강경에 미내다리 원목다리에 비하면 만덕교는 이름에 비해서 너무 소박하다.>
[만덕교: 충청타임즈 http://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77331]
<객사에서 시내로 나가는 한적한 길>
< 홍산면에서 바로 5분거리에 있는 흥양리 5층석탑..... 안양사라는 절이 있었다는데 이곳이 그곳인지 근처에 있었다는
건지 잘은 모르겠으나 돌로 만들어진 석물만 유유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탑: 네이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탑이란 원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이다. ‘탑파(塔婆)’의 준말로서 인도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스투파[率堵婆]’라고도 한다. 스투파는 고대 인도어인 범어(梵語, Sanskrit)의 ‘stupa’의 소리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리고 탑파는 팔리어[巴梨語, Pali]의 ‘thupa’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원래 스투파는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묘(墓)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결국 탑이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용인 지역에 있는 석탑은 모두 9개이다. 고려시대 이전의 완전한 형태의 석탑은 현전하는 것이 많지 않고 온전한 것은
고려시대 이후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중에서도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드물고 대부분 복원되거나 탑재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미의 재발견-탑' ]
< 흥양리 5층 석탑자리에서 바라본 애마와 부여평야~~~ 상천리에 마애불도 있고 홍산 향교, 홍산대첩비 등 둘러볼곳이
널렸으나 다음을 기약하고 바로 성주사지로 달려 갑니다.>
< 첫 인상은 남원의 만복사지와 흡사하다. 넓이나 규모도 그렇고 금당이나 석물의 배치도 흡하나 만복사는 남원시내에,
성주사는 성주산과 옥마산 골짜기에 위치해서 산골에 자리 잡고 있다.>
[석등: 네이버 두산백과]
능묘 앞에 두는 것을 장명등(長明燈)이라 하며, 석등류는 통틀어 석등롱(石燈籠)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석등은 다른 대부분의
석조물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가람배치양식에 따른 한 구조물로서 전래되어 등기로서의 기능과 사원 공간의 첨경물(添景物)로서의
기능을 함께 발전시켜왔다. 그 최고(最古)의 예는 백제 때에 건립한 전북 익산시(益山市)의 미륵사지(彌勒寺址) 석등에서 볼 수
있다. 이 석등은 팔각(八角)의 화사석(火舍石:點燈하는 부분)만 남아 있어 삼국시대의 석등양식은 고찰할 자료가 없다.
통일신라시대에 많이 건립된 석등의 기본양식은 하대석(下臺石) 위에 간주(竿柱:中臺石)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상대석(上臺石)을
놓아 화사석을 받치고 그 위를 옥개석(屋蓋石)으로 덮어 평면이 8각으로 조성되어 있다. 석등은 이와 같은 8각의 기본형이 주류를
이루면서 내려오다가 8각의 4면에 보살상이나 사천왕상을 조각하는 등 시대적 ·지역적 특징을 보이면서 발전하여왔다.
지방적인 특징으로서는 전북 남원(南原)의 실상사(實相寺) 석등이나 임실(任實)의 용암리(龍岩里) 석등과 같이 고복형(鼓腹形)의
간주(竿柱)가 나타나는 예를 들 수 있고, 충북 보은(報恩)의 법주사쌍사자석등(法住寺雙獅子石燈)이나 경남 합천(陜川)의
영암사지(靈岩寺址) 쌍사자석등은 기본적인 각부재(各部材)를 갖추고 있으나, 그 형태가 변형된 이형양식(異形樣式)의 예로
들 수 있다.
고려 전기에는 통일신라 때의 8각형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차차 독자적인 양식을 이루어 사각형을 기본형으로 하되 원형의
간주 위에 사각형의 앙련석(仰蓮石) ·화사석 ·개석(蓋石)을 얹었으며, 충남 논산(論山)의 관촉사(灌燭寺) 석등, 개성시 장풍군
현화사지(玄化寺址) 석등이 대표적이다. 사자석등형의 이형양식은 경기 여주(驪州) 고달사지(高達寺址) 쌍사자석등의 예와 같이
이 시대에도 건조되었으나 신라 때와 같이 쌍사자가 두 발로 서서 직접 상대석을 받치지 않고 사각형의 하대석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 뿐 상대석을 직접 받치지 않고 그 위의 다른 부재가 받치도록 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한편 고려 후기의 공민왕
현릉(恭愍王玄陵)의 장명등과 같이 석등을 사찰뿐만 아니라 능묘에도 장명등으로서 건조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이를 본떠
왕릉에는 반드시 장명등을 세우게 되었다. 그 양식은 경기 여주의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神勒寺普濟尊者石鐘) 앞 석등과 같이
이보다 앞서 유행하였던 세장(細長)한 간주(竿柱) 대신 중대석(中臺石)으로 형태가 바뀌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찰의 창건이 억제됨에 따라서 석등의 건조도 극히 드물었다. 충북 중원(中原)의 청룡사지(靑龍寺址) 사자석등과
경기 양주(楊州)의 회암사지(檜巖寺址) 쌍사자석등의 예에서 조선 전기에 이형양식의 석등이 건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이때가 아침 9시 채 안된 시각이나 햇살은 정오 뺨친다.>
<렌즈에 먼지인지 뭔가 잔뜩 묻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계속 셔터만 눌러 댔으니 카메라가 얼마나 답답해 했을까???!!!>
[탑에 대해서 더 파고 싶다면.....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1422&cid=42665&categoryId=42669]
< 심연동 계곡을 타고 올라 임도를 지나면 성주산 전망대에 이른다. 멀리 동쪽 차령산맥을 바라본다.>
< 전망대로 가는 길에 멀리 서해안이 보일락 말락한다.>
< 성주산 전망대와 성주사지를 뒤로 하고 옥마산 활공장에 오른다.>
< 멀리 서해가 보이고 맘같아선 산둥반도의 닭우는 소리가 들릴락 말락하는듯 하다>
< 창공을 향해~~~>
< 옥마산에서 바라본 성주산과 좌측 중간에 성주사지.....>
<옥마산으로 간 통통한 토끼>
< 애마도 달리고 싶은걸까???>
< 이곳도 절터에 덩그러니 탑만 남았다.>
< 성주산 전망대에서 내려가는 길에 한 컷>
< 심연동 계곡과 성주산 자연휴양림에서 오르면 만나는 고갯마루>
< 이길은 애마를 타고 간 길이 아니라 막판 전망대 400m 산책하는 구간>
<
< 내려오는 길에 울창한 숲을 뚫고 내리쬐는 볕이 스폿라이트 같아 애마를 한번 찍어본다.>
< 천년의 세월이 우습게 이 차갑고 무뚝뚝한 돌들은 그냥 거기에 그렇게 마주하고 있다>
< 6시 출발, 12시 복귀.... 가족들과 점심으로 놀부항아리 갈비....... 대전 월평동 맛집으로 추천합니다만 조금 값이
비싸네용...^^: >
< 언제가 다시 와도 거기 있을 돌들을 바라보며 오늘 투어를 마무리 한다. >
인류가 만든 현재까지의 건축부재 중에 돌만큼 완벽한 것이 없는것 같다. 흔히 생각하는 피라미드부터 이렇게 탑과 계단,
비석과 부도........ 길바닥에 흔한 돌맹이며 골짜기와 산에 널린 바위를 허트로 볼것이 아니고 그 돌에 새겨진 글자하나
획하나 조각품 하나하나를 세심히 바라본다면 그게 바로 시간을 거스르고 공간을 초월하는 석공과의 대화이고 글쓴이와의
대화가 아닐까 싶다.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한자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역사에 맑지 못하니 그저 아름아름 아는게
전부니 아쉬울 따름이다.
오전투어 오후 가족봉사코스를 뛰고 있자니 이제 눈이 감기네요~~ ^^: 다음투어는 어디로 뭘보러 가나?!!!!!!
첫댓글 상세한글과 선명한사딘 안구가 정화
되는 느낌이 있네요
감사합니다.
오늘 공부 너무많이했네요
눈깔 빠질라해요 ㅋㅋㅋ
이젠 늙어서 읽고지나가믄
다는 아녀도90%는 생각이 않나요 ㅋㅋ
눈이 빠지면 곤란한데~~~^^; 그냥 저도 모르지만 투어갈땐 기대감에, 후기쓸 땐 ' 이런거였구나~!' 하는 소소한 알아가는 재미니 그냥 쓰윽 보심될듯합니다.^^
@통통한 토끼 이렇게 정성들여 쓴걸.. 찍은걸
그냥 쓱보면 앙댕용 ~
정성이 대단해!
ㅋㅋ 그리 봐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투어코스를 고민하고 뭘보고 뭘 느낄까 고민하는 분들의 공통점이라면 자화자찬일까?!!!ㅋㅋㅋㅋ
성주산 활공장까지 올랐군요
중간에 정자까지만 갔다왔는데 역시 오래된차라서 마구마구 굴리시는군요
ㅋ~농담이구요 ^^
주제를 정하니 자연스레 소재는 따라오네요
우째 오늘은 쏠투를?
인덕이 없어서 쏠투를.... OTL ^^; 솔직히 신차도 아니고 바이크는 타는거지, 관리하고 모시는게 는게 아니라는 제 개인적인 지론이라~~ㅋㅋㅋ
@통통한 토끼 농인데 맘두시지 마세요
저역시 적당한 관리는 하지만
타다깔면 버린다는 개념인지라 모시고 빨고 닦고는 안합니다. ^^
하고싶었던 진짜말은 길에 관여치않고 갈때까지 들어가보는 대단함을 말한거였습니다.
진짜 멋진투어를 하고계신데 흠..원래 선구자는 외롭고 고독한거지요
아...위로가 안되네 ㅡㅡ::
@69/유유자적/박승룡/안산 ㅋ 유유님 소심하시긴...ㅋㅋ 유유님 골려 먹어봐겠습니다..ㅋㅋ맘 안쓰셔도 됍니다..제가 간튜닝이 된 토끼라서 용왕이 절 탐내지 않던가요...ㅋㅋ
@통통한 토끼 간큰토끼....ㅡㅡ::